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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연극

"한국의 불교연극"

정상철/국립극단 단장

 


우리는 흔히 인생을 연극(演劇)에 비유하곤 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우리의 삶과 연극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가까운 예를 찾으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기막힌 반전의 순간이나 장면에서 우리는 ‘극(劇)적이다’라는 표현을 아주 자연스레 사용한다.

연극의 기원을 살펴보아도 우리의 삶과 연극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에 인류의 생활 환경은 몹시도 열악하였기에 인류는 자연 재앙이나 질병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는 목적으로, 종족의 번성과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삶의 질이 향상되자 제의의 효험에 대한 믿음은 동요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제의는 점차 오락적으로 변모하였는데, 이것을 연극의 시초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연극의 최초 발생지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연극은 다산(多産)의 상징인 디오니소스(Dionysus) 신에게 바치는 제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행해졌던 굿이 점차 그 제의적 목적을 상실하면서 오락화한 것이 우리 연극의 모태이다. 이렇듯 연극은 우리의 삶과 끈끈하게 맺어져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하면 연극과 종교의 밀접한 관계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비록 우리 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종교는 아니나 우리 나라 민족 종교라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치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던 불교는 연극과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불교와 연극의 관계를 확실히 보여주는 예로는 고려 시대 팔관회(八關會)와 더불어 국가의 양대 축제였던 연등회(燃燈會)를 말할 수 있다. 토속신에 대한 제전인 팔관회와 달리 연등회는 불사(佛事)의 제전이었다. 하지만 이 두 행사는 모두 그 본래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 연극적 놀이들, 즉 잡희(雜戱)를 행하는 국가적인 축제로 전환되었는데, 연등회에서 행해진 잡희들의 종류와 그 규모가 어찌나 방대했던지 그 잡희들을 통털어 백희가무(百戱歌舞)라 한다. 고려 시대의 백희가무를 집약해서 읊은 이색(李穡)의 ‘산대잡극(山臺雜劇)’을 살펴보면 인형극, 가면극, 처용무(處容舞), 줄타기, 사자무(獅子舞), 토화희(吐火戱), 칼 삼키기〔呑刀〕, 서역의 호인희(胡人戱), 오방귀무(五方鬼舞) 등이 백희가무를 이루고 있다.

이런 연극적 놀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점차 발전된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으며, 비록 연등회가 궁중의 행사이기는 했으나 이런 연극적 놀이들이 점차 민간에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 연극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과거에 연극적 놀이들이 이렇듯 궁중 불교 행사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해 왔다면 현재의 우리 연극과 불교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1980년 이후엔 새로 발표되는 모든 희곡의 20% 정도에 달하는 많은 양의 작품이 불교를 소재로 발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교 연극의 붐이 일어나지는 못했다. 이것이 이유가 되었던지 불교 연극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그에 따라 불교 연극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불교를 소재로 삼아 성공을 거둔 작품들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96년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상연되어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강만홍 교수 연출의 불교 신체 연극 “두타”가 있으며, 이만희 작가의 “그것은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등이 있다. 국립극단에서도 99년에 ‘98년 창작희곡 공모 당선작’ 인 “아노마”(송미숙 작, 황동근 연출)을 ‘청소년을 위한 특별공연 시리즈’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려 성황리에 공연한 적이 있다. 또한 이강백 작, 이윤택 연출의 “느낌, 극락같은”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비단 연극 뿐 만이 아니라 승무와 범패는 이미 독자적으로 공연되어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다.

이렇듯 “디지털 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연극 소재는 불교 소재 밖에 없다” 라는 김흥우(동국대) 교수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종합예술인 연극이 불교라는 바다에서 건져낼 연극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며, 한국 불교 연극이야말로 한국적인 특수성과 함께 세계적인 보편성을 바탕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불교와 연극이 앞으로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불교계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불자들이나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신심을 더 돈독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연극계는 좀 더 다양한 소재와 한국적인 연극으로 연극이 갖는 사회적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계는 단순한 소재주의의 범위내에서만 불교를 다뤄서는 안 될 것이며 불교계도 단지 교훈극으로 관객들에게 목적적으로만 다가가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작품은 격려하고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도록 힘을 주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연극계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불교계도 다방면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서울 구룡사 주지 정우스님께서 구룡 소극장에 그치지 않고 일산의 새 절 여래사를 지으면서 지하 1층에 극장을 넣고 뮤지컬 전문극단 신시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는 것은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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