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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법문

“현대인의 자비와 지계”

고산 큰스님/ 하동 쌍계사 조실

 


‘자비의 대중화’는 무차화합의 원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무차화합이란 종교인은 종교인끼리,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장벽을 헐어버리고 화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됐을 때 더 나아가서는 산천초목과 같은 자연과도 대화와 화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중들이 힘이 약한 축생과 산천초목을 미약하다고 경시해서 죽이고 훼손시킨다면 결코 우주만물의 진리를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무차화합은 우주 삼라만상 중 무엇이든지 차등을 두지 않고 화합된 하나의 개체로 보는 것입니다.

‘자비의 대중화’역시 무차화합의 연장선 상에서 출발합니다. ‘자비’에는 사랑과 슬픔이 모두 존재합니다. 사랑할 줄 아는 동시에 슬퍼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자비’지요. 우선 사랑을 말하자면 내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남에게 사랑을 베풀겠습니까. 또 자신이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뉘우치고 슬퍼할 줄도 아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이런 뜻을 확실히 안 뒤에야 비로소 남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줄 알고 위로도 해 주는 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기쁨을 함께 즐거워해 주고 슬픔을 사랑으로 위로해 주는 행동의 실천이 바로 ‘자비의 대중화’입니다.

옛날 조사 스님들은 도량을 거닐다가 지렁이가 죽은 모습을 보고도 시자를 불러 영가를 위한 축원을 해줬을 정도로 사람과 똑같이 미물의 생명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내 자신을 비롯해 미물까지 일체 만물을 모두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비의 대중화’입니다. 개신교에서 중히 여기는 ‘박애사상’에는 사랑만이 포함돼 있는데, 자비는 사랑할 줄 알면서도 여기서 더 나아가 남의 슬픔까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자비’는 ‘박애’보다 한차원 더 넓은 의미입니다.

농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밭을 갈다가 본의 아니게 굼벵이가 곡괭이에 찍혀 죽은 것을 보면 측은지심을 가지고 좋은 인연으로 다시 환생하길 바라는 마음만으로도 자비의 실천입니다. 집안에서 화초나 나무를 하나 키우더라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꾸어 나가는 것도 얼핏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또 다른 형태의 ‘자비행’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구걸하는 거지를 만나면 이를 불쌍히 여겨 보시행을 행하는 것을 비롯해, 다른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사랑으로 대하면서 앞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용서하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자비행이지요. 자비행이란 의미를 너무 심오하고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조금만 신경쓰면 얼마든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어요. 문제는 자비를 행하겠다는 마음과 자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은 항상 8만 4천 가지 번뇌 망상심에서 사로 잡혀 산다고 했지요. 이중 양심, 용심, 섭심, 수심 등 근본 4종심이 있는데 이를 잘 의지해 세상을 떠날 때는 자녀들을 다 불러가지고 참회의 말을 하고 떠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양심이지요. 악한 사람도 이럴진데 대중들 중에는 양심을 속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양심에 가책되지 않는 일만 행하고 산다면 불자로서 임무를 다하는 삶이 되고 나아가서는 보살도를 행하는 길이지요. 이것이 출가나 재가 수행자의 본 모습입니다. 또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해도 마음을 아름답게 쓰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용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섭심’은 8만 4천 가지의 망상심들이 자꾸 생겨 마음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것을 잘 다스려 현명하게 거두어들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자주 돌아보면서 자기가 한 잘못된 행동을 참회하면서 마음을 닦아 수행하는 ‘수심’을 자주 해야 합니다.

이외에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비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그럽게 용서를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반 불자들이 모든 계를 다 지키려고 하면 생활인이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행동을 할 때 판단 기준을 양심에 견주다 보면 그것이 곧 생활 속에서 계를 지키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무척 하고 싶지만 가만이 자신의 내면 속에 들어 있는 양심에 반해 가책을 느낀다고 판단될 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재가 불자들이 계를 효과적으로 지키는 방편입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자신만이 아는 양심은 결코 속일 수 없는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행동의 모든 판단 기준을 양심에 맡기면 쉽게 해결될 수 있지요. 그러다 보면 계를 지킨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재가 불자들이 지켜야할 모든 계를 마음속에서 수지하며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재가 불자들이 수행에 임할 때는 자기를 장식하고 있는 온갖 화장을 지워버리고 덜되었으면 덜 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본연의 모습에서 자기를 철저히 성찰하려는 진실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파에 시달리고 세진에 물들여 지는 동안 자기 본성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지요. 진정한 자기 본성 깨닫는 지름길은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모든 미망의 옷을 훌훌 벗고,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꾸준한 마음으로 자신을 항상 채찍질하는 것이 참다운 종교인인 동시에 생활인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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