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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6월호 / 통권 48호 / 불기 2543(1999)년 6월 1일 발행

 

 

이달의 법문

근대의 불교와 미래의 불교/성파 큰스님

 

특집1

선(禪)과 건강/정성본 스님

 

특집2

불교의 예방의학/호윤스님

 

특집3

요가와 건강/현천 스님

 

정각도량

무엇이 내것인가/이법산 스님

 

유마경의 세계

문수사리문질품과 부사의 해탈품/강혜원 스님

 

불교문학

일본 문학과 불교(2)/김환기

 

수행의 길

참선 수행/유전

 

만나고
싶었습니다

박광서 교수/편집부

 

불심의 창

불교로 생활하기/이권학

 

신행상담

생사불이/장계환 스님

 

일주문

연화(蓮華)/일장 스님

 

가람의 진수

칠처구회의 도량, 장곡사(1)/유문용

 

신간안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편집부


이달의 법문
근대의 불교와 미래의 불교/성파 큰스님(통도사 서운암 주지)

 

어떤 선사가 토굴에서 '안유동자불입 (眼有瞳者不入)하고 구무설자당도( 口無舌者當到)하라'는 글을 써 붙여 놓았습니다. '눈에 동자가 있는 사람은 여기 안에 들어오지 말고, 입에 혓바닥 없는 자는 여기에 같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눈에 동자가 있으면 무엇이든 잘 보입니다. 옳다, 그르다, 검다, 희다, 보이면 시시비비가 생기기 때문에 아예 안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입에 혓바닥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을 안 합니다. 말을 하게 되면은 구업을 짓게 되기 때문에 차라리 혓바닥이 없는 자는 동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시비가 보이지 아니하고 입에 시비를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고 토굴에 사는 스님의 생활 형식이자 면모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 말을 항상 기억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교리라든지 다른 차원에서의 불교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불교 역사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터이고 현실에 처한 입장도 여러분들이 잘 아시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도 삼가 하겠습니다.

제가 김갑수 부총장님하고 독립운동과 불교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불교문화연구회'라는 것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국사편찬회에서 만든 '독립운동사' 라는 책 10권을 구해 가지고 그것을 다 열람해 보고 독립운동 관계 자료와 함께 연구하려고 했는데, 6개월 이상 하다가 특별한 성과 없이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0권이나 되는 독립운동사 책에 불교에 관한 것은 백용성 스님도 한 페이지가 안되고, 한용운 스님 또한 몇 페이지 분량밖에 없었습니다. 10권 중에서 한 권이라 하더라도 적은 분량인데, 몇 페이지 남짓한 자료를 보고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노스님들로부터 듣기로는 독립운동 당시에는 많은 스님들이 활동했다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은 교통이나 통신망이라도 편리하고 좋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도 못할 건데도 승려의 활동이 제일 활발했다고 합니다. 어느 절에 가든지 숙식할 수 있고, 차비 얻어 갈 수 있었습니다. 저의 법명이 지금은 '성파'지만 본명은 '성파'가 아닙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름과 호도 자꾸 바꾸어서 활동하니까 그 사람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하기가 굉장히 유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인이 독립운동하면서 찾아오면 전부 노자 주어 보내고 밥 먹여 보내주고 숨겨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계에서는 많은 일을 했는데, 독립운동사에 보면 그 자료가 너무 빈약합니다.

그래서 '승려들은 살아 있으니 상투가 있나, 죽으니 무덤이 있나' 하듯이 어느 누가 자기 조상이,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국가 유공자 하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때 활동하던 승려도 당대로 끝나 버리기 때문에 기록도 없고 챙기는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불교계에서는 기록을 안 남기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기록이 없는 것이 손해입니다, 불교는 호국불교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해방 이후부터 호국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자료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에 남길 수 있는 기록문화가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 끝에 시작한 것이 목판대장경입니다.

고려시대는 우리가 국난을 당해서 불보살의 가호로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원력에서 고려대장경을 조성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시대지만 고려처럼 우리 민족 최대의 숙원인 통일을 발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불사가 목판대장경입니다.

199l년에 시작해 2000년에 완성됩니다. 그래서 내년이면 예정대로 불사가 마무리 됩니다. 이것은 종이에 새긴 것 못지않게 기록이 될 것입니다. 20년 전에 이 작업을 시작했더라도 독립운동 하시던 스님들이 많이 계실 때 구두로라도 녹음을 해 두었어야 했는데, 그때를 놓칠 것입니다. 그래서 김갑수 부총장님하고 한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록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조석으로 남북통일 조속성취, 이렇게 축원하고 또 통일발원 기도를 하고 통일발원 연등법회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역사에 남겠느냐는 것입니다. 독립운동도 불교계에서 많이 했지만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듯이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공부라는 것은 책상에 앉아 있는 것도 공부지만은 이 불교에서는 어느 정도 마치고 나면 어느 정도 학교도 졸업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공부를 자기가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학교만이 공부하는 장소가 아니고, 길거리도 배움터이고, 시장도 배움터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백옥(白玉)은 투어니(投於尼)라도 불변어기색(不變於其色)이라' ,백옥은 진흙 속에 던져두더라도 근본 그 색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승려도 어느 정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승려의 자격을 이루면 어디다 던져두더라도 안 변해야 됩니다. 백옥처럼, 진흙 속에 던져 놓아도 백옥이어야 합니다. 승려는 일을 해도 승려이고, 무엇을 해도 승려이어야 합니다. 어느 기간 동안 이루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어딜 가도 변함없이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불가에서도 생산 불교가 거론되고, 생산 불교 쪽으로 갈 그런 여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원에도 생산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에 전념하는 분은 물론 수도에 전념해야 됩니다. 승려가 많이 사는 절에서 모두 수도에 전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소임에 따라서 그 소임을 착실히 이행해야 되듯이 우리 불교도 소비적인 불교보다 생산적인 불교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백장스님께서 '일일부작(一 日 不作) 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고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밝히셨습니다. 절에서 일하는 것을 '운력(雲力)' 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운력을 많이 하고 살았었는데 지금은 운력풍토가 많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도 지난해 문경 봉암사 선방에 있다가 왔지만, 저의 생각은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은 참선하시고, 또 나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을 해야 됩니다. 묵어있는 구릉지, 임야도 많은데 노동을 해서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선(禪)센터'가 건립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동 . 서양사상에서는 선(禪)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 이때에 우리는 이론보다도 실천해 보는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불교를 상대적으로 보지 말고, 나 자신으로 보아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원수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보통은 자기에게는 굉장히 관대합니다. 자기는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하지만, 남에게는 시비를 걸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으로 보면 문제가 있을지라도 나로 보면 그 허물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리가 높아 권한이 세거나 돈이 많은 사람일 것이라고 하지만, 제일 많이 아는 사람 이 제일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무엇이든지 다 아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많이 아는 사람이 제일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승가에서는 의문을 화두라 합니다. '이 뭣고!'라는 그 의문이 참선을 해 보면 의문이 안 걸립니다. 모르는 줄 모르니까 의문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알아야 의문이 나오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까 의문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무엇을 몰라서 의문이 없거나 아니면, 이미 통달해서 의문이 없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입니다.

 

 

 

특집/수행과 건강
선과 건강/정성본 스님

선(禪)과 건강

정성본 스님/불교문화대학 교수

 

불교에서 각자가 '천상이나 천하에서 절대 유일한 존재이다(天上天下 唯我獨尊)' 라고 하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절대 유일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잘 살아야 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만이 절대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절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존귀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건강해야 존귀한 인간으로서 만사를 이룰 수 있고, 행복하고 보람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질병 없이 건강하고 근심 . 걱정 없이 무사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부처님 전에 합장하여 기도 올리고 원력과 소원을 바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가내 화목과 평안을 기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 또한 이런 인간의 소망과 기원에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필자는 건강이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몸을 보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즉 좌선과 참선을 통해서 신체적으로 질병이 없고, 건전한 육체로 일반적인 놀이나 운동, 작업이나 작업에 종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신체를 말한다. 또한 정신적으로 근심 .걱정과 불안없이 현대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지적(知白勺) 능력을 갖추고 정신적인 질병이 없으며, 사회생활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협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입장에서는 이상과 같은 개개인의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살도를 펼치며 공헌할 수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들은 직장이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와 보수를 받고 있다. 그 집단이나 단체 사회에 대한 공헌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직업과 봉사활동, 연구와 발명을 통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사회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학자나 과학자가 연구. 개발한 성과를 상품으로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공급하는 일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신체적 . 정신적 .사회적으로 각자의 일을 통해서 건강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신체적인 건강은 의식주가 정상적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건강은 마음에 근심, 걱정, 불안, 초조나 두려움, 시기, 질투, 교만함이 없는 순수한 본래 섬으로 편안하고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삶을 말할 수 있다.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가며 보살도를 구현하는 몇 가지 조언을 해 보고자 한다.

선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 심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무사(無事)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다. 이러한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주의사항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

 

1. 수면(잠)을 충분히 취할 것

 수면은 휴식임과 동시에 신체적인 성장이다. 인간에게 하루 두 번 졸음이 오는 리듬이 있기 때문에 졸음이 올 때에는 잠을 자는 것이 가장 좋다. 잠을 많이 자면 근심. 걱정이 없고 건강하다. 어린애들이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하루 생활리듬의 기본이 식사하고 잠자는 일인데, 식사가 육체적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라면 수면은 두뇌의 휴식과 정신적 안정을 취하는 시간이다. 그래야 내일 또 맑은 정신으로 편안하고 여유 있게 하루의 일을 할 수 있다.

 

2. 과로(矗勞)하지 말 것

 정신적 . 육체적으로 과로하지 않는다. 과로는 만병(萬病)의 원인이다. 육체의 한계와 리듬을 파괴하는 무리한 행동은 삼가해야 한다. 가능한 몸을 균형있게 움직이고 과로하지 않아야 신체의 리듬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너무 편하게 누워있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이 굳어버리기 쉽고 나태해지므로 무리하지 않게 움직이고 체조나 에어로빅 등과 같은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균형 있고 건강한 신체와 기력으로 가득 찬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생활과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3.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할 것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중요한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더욱이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며, 내가지금 여기서 하지 않으면 이 일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살리고 인류에게 공헌하는 일에 보람과 사명감을 가지고, 나와 인류를 위해서 즐겁게 일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삶을 긍정적이고 발전적이며, 즐겁고 보람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많이 웃고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 웃음은 신체를 즐겁게 하고 건강하게 만든다. 한산 습득의 웃음은 근심걱정 없는 선불교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단순한 일상 생활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 심으로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심플하게) 천진하게 사는 것이다. 여러 가지 번뇌. 망상에 시달려 고민하고 신경쓰지 말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일행삼매(一才寸三昧)의 염불이나 좌선생활은 좋은 생활이다. 염불이나 참선, 어느 한 가지임에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살 매의 경지에서 본래 심으로 身. 口 .息, 三業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생활이 선과 염불이다.

 

5. 스트레스 받지 않고 천진하게 살 것

 주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신경을 쓰거나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할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일이 없는 사람은 억지로 남에게 봉사하고 청소하는 일이라고 만들어 자신의 일을 통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만들도록 한다.

본래심으로 사랑분별하거나 쓸데없는 남의 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바보처럼 사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건강에 좋은 생활이 된다. 바보는 절대 암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암은 스트레스가 원인이고, 신경 많이 쓰고 근심. 걱정 많은 사람이 잘 걸린다.

스트레스를 선불교외 입장에서 말하면 번뇌 .망상이며, 근심 .걱정이다. 어떤 경계를 만나도  차별. 분별심 일으키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 받지 않는 길이다. 즉 일체의 번뇌 망상에 시달리지 말고 항상 본래 심으로 천진하고 순수하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참되고 진실한 자신의 삶을 알차게 살아가는 선불교외 지혜인 것이다.

스트레스가 없어야 심장에 부담이 없어지고 편해진다. 심장이 편해야 안정되고 여유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행복은 마음의 고향에서 맛볼 수 있다.

 

 

 

특집 2/수행과 건강
불교의 예방 의학/호윤스님

현대사회가 문명의 이기로 인해 복잡 다원화되고, 생활은 편리하게 되었으나 자연의 파괴와 오염으로 인해 인간의 질병 또한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사소한 사고로 입원한 환자가 쉽게 생명을 잃는가 하면, 병원에서 더 이상 재생의 가망성이 없다고 판정되어 퇴원한 환자가 얼마 후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의사란 환자의 질병을 완전히 치유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느 정도 질병의 치유과정을 단축시켜 주거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완전한 치유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내재한 신체의 보상 기전 및 타고난 운명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신체의 보상 기전이 점차 약해지고 각종 질병에 대한 노출 가능성의 증가로 인해 오늘날 의학은 질병의 치료보다는 예방적인 측면을 중요시 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미 부처님께서는 이를 예견하셨는지 오늘날의 예방 의학에 해당되는 위생수칙을 강조하시어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여러 행동지침들을 인정하셨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규제하고 각자의 자각을 촉구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이것이 오늘날 예방 의학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인의 윤리 및 도리에 대해서도 훈계하셨으며, 질병은 의사의 힘만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와 간호인, 환자의 3자가 일체 되어 서로 그 책임을 지고 협조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어찌되었든지 부처님 당시 오늘날 우리들이 예방 의학의 일부분인 공중위생 또는 개인위생으로 논하고 있는 여러 생활 규제 행위에 대해 자세히 논해져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간추려 보고자 한다.

첫째, 수면이 건강 유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수면에는 선의수면(숙면)과 난외수면이 있는데, 부처님은 난외수면을 극력 경계하여 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시는 한편 숙면의 이익과 숙면을 취하지 못했을 경우의 결점을 「십송율」에 담아 많은 교훈을 주고 계신다.

둘째, 목욕의 중요성이다. 목욕은 피부를 청결하게 하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며 심신을 상쾌하게 만들어 질병의 치료 및 예방에 도움을 준다.

셋째, 세수와 양치의 필요성이다.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도록 해야 하며, 식전, 식후 양치의 중요성을 부처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신다.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은 전염성 질병의 예방에 중요하며,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개인위생뿐만 아니라 집단생활을 영위하는데 혐오감을 준다.

넷째, 음주로 인한 해독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지도론」이나 「사분율」에 음주로 인한 폐해와 과실에 대해 논해져 있다. 적정량의 술은 혈중 콜레스테롤치를 낮추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등 건강 유지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제가 부족해 과음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해 지각을 잃고 심신이 흐려져 자신의 건강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술에 의해 취함을 경계해 술을 배척하고 계시지만, 술의 유용성도 인정하시어 병을 고치기 위해 술을 필요할 때는 마셔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다섯째, 포식(과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포식은 위장에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비만을 초래하게 되며, 비만은 모든 병의 근원이 된다. 부처님께서도 이를 아시어 사람이 음식을 너무 지나치게 심취할 때에는 몸이 무거워지고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며, 그렇다고 음식물 섭취를 많이 줄이면 몸이 마르고 마음이 불안하고 의지가 약해지므로 때에 따라서 음식물을 절도 있게 섭취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여섯째, 깨끗한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물을 반드시 여과하여 마시게 함으로써 물 속의 작은 벌레라도 죽이지 않도록 하셨다. 이는 또한 물을 여과하지 않고 마심으로써 설사를 일으키고 고통 받는 경우를 경계하신 것이다.

일곱째, 침이나 대 .소변 등 사람의 배설물 처리를 깨끗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길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고 오물 하수처리를 잘 하지 못하여 자연의 생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의 온상이 되게 하여 사람의 건강에 적신호를 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시어 야채나 풀 위, 물 위에 대 .소변을 보거나 침이나 가래를 뱉지 말도록 경계하셨다. 침은 반드시 타구를 만들어 뱉게 하시고 여기에 재나 모래를 넣어서 용이하게 청소를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셨다.

여덟째, 신체를 청결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언뜻 사소한 일 같이 생각되기 쉬운 손톱, 머리털, 귀지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승려 및 교단 사람들이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가르치셨다.

아홉째, 실내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이다.

먼지가 쌓이고 공기 유통이 잘 되지 않아 습기가 차게 되면 각종 세균이나 곰팡이들이 번식하게 되어 사람의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해 실내의 먼지는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내며, 이불이나 깔개 등은 먼지를 털어서 햇볕에 말려서 사용하도록 권고하셨다.

이 외에도 식당의 청결이나 화장실 사용방법 등 일상의 위생 관리에 대한교훈이 여러 불경 속에 자세히 설명 되어져 있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이 항상 지켜 나아가야 할 교훈이면서도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2천 년 전의 의학이라고 하면 현대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의학에 대한 법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준수해야 할 방도인 것이다.

예방 의학이란 말 그대로 질병을 미리 방지하여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의학이므로 이론만의 학문도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건강한 삶을 누려 나아가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하나하나의 규칙을 지키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 이것이 바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특집3/수행과 건강
요가와 건강/현천스님

요가는 '얽어매다' , '결합하다' , '자신의 주의력을 이끌어 주며, 집중시키며, 그것을 사용하고 응용한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인도 6대 철학체계의 하나로 분류되며 이 지구상의 모든 철학, 종교, 과학 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요가는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적 수행의 한 형태로서 인간의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 영적인 안정을 다루면서 수천 년에 걸쳐 발전되어온 시간을 초월한 삶의 성스러운 과학이다.

면면한 역사를 거치면서 요가는 다양한 유파를 이루면서 발전하였는데, 요가의 유파를 크게 나누어 보면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라자(Raja)요가, 리그베다(Rig Veda)의 내용 중에 있는 옴(Om) 소리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만트라(Mantra)요가, 신(神)에 대한 헌신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박티(Bhakti)요가, 직관적이고 철학적인 탐구, 혹은 분별력을 바탕으로 하는 즈나나(Jnana)요가, 행위의 결실에 집착하여 행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행위의 미덕과 행동의 법칙(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윤회사상)을 중시하는 까르마(karma)요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A.D. 5세기 경에 이르러 육체의 생리적 요소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부터 우주의 생명력이 몸속에 들어와 저장되고 있는 차크라(Chakra, 신경총)를 개발하여 초능력을 얻으려는 탄트라(Tantra)요가가 발전하게 되었고, A.D. 12세기 경에는 고정된 좌법(座法)으로 오랜 시간 명상을 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육체의 고통과 생리적 이상을 해소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되찾고자 하는 하타(Hatha)요가가 발전하였다.

하타요가에서는 마음을 제어할 목적으로 몸을 먼저 다룬다. 하타요기(Hatha Yogi, 하타요가 수행자)들은 신경계통을 정화하고, 대우주의 생명력인 프라나(Prana, 氣)의 통제를 통해 마음작용을 지멸(止滅)하여 해탈에 이르고자 한다.

먼저 B.C. 200년 경 파탄자리에 의해 성립된 요가 수트라(Yoga sutra, 요가경)에는 다음과 같이 라자 요가의 수행체계가 8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 야마 (yama, 전 인류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도덕률을 지키는 것)

2. 니야마 (Nyarna, 계행에 의한 자기 정화)

3. 아사나 (Asana, 요가 자세, 座法)

4. 프라나야마 (Pranayama, 호홉 조절법)

5, 프라타아하라 (Pratyahara, 감각 기능의 통제)

6. 다라나(Dharana, 집중 통일 행법)

7. 디아나(Dhyana, 정려, 명상)

8. 사마디(Samadhi, 삼매 : 심오한 명상으로 얻어지는 초의식)

 

이에 반해 하타요가의 고전인 고락샤 상히타(Goraksa Samhita)와 게란다 상히타(Gheranda samhita)에서는 육체적인 수행인 아사나, 반다(Bandha, 기관의 수축, 조절되는 자세), 무드라(Mudra, 봉합된 자세), 프라나야마의 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감각기능을 통제하고, 명상을 통하여 사마디에 이르고자 한다.

아사나, 즉 요가자세는 육체를 강하고 건강하게 유지시켜주고 이로 인해 몸뚱이에 집착하는 생각이 없어지게 하며, 그 몸뚱이로 하여금 영혼과 화합되는 방편이 되게끔 한다, 팔과 다리를 써서 필요한 무게를 지탱하고 균형을 잡으면서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 한다. 아사냐를 수행함으로써 민첩성, 균형감, 인내력, 왕성한 활동력을 개발할 수 있다.

아사나는 나무자세, 연꽃자세, 물고기자세, 사자자세, 태아자세, 영웅의 이름을 딴자세, 신의 이름에서 딴 자세 등 이 지구상의 생물체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으므로 아사나를 행하는 동안 구도자의 육체는 다양한 생물체의 모습을 닮게 된다. 또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되어 구도자는 정신적인 평정을 얻게 되며, 마음의 변덕스러움을 자제할 수 있게 된다.

프라나야마(Pranayama)에서 '프라나(Prana)'는 호흡, 생명, 에너지와 힘을 의미하고, '아야마(Ayarna)' 는 길이, 뻗음, 확장 또는 제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프라나야마는 호흡의 길이와 그것의 조절을 뜻한다. 프라나야마는 호흡의 기술이며 생명의 바퀴를 돌리는 중심축이다.

아사나와 프라나야마의 수행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행법이 반다(Banda)와 무드라(Mudra)이다. 반디란 근육의 죔을 의미한다. 즉 이 죔을 통하여 그 부위의 신체기관들과 근육이 수축됨으로써 푸라나 에너지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여러 가지 자세나 동작을 의미한다. 신체기관들과 근육의 수축을 통해 체내에서 생성된 프라나 에너지는 신체 내의 특정한 부위로 나아가게 된다.

무드라란 인(印相, 印契)을 의미하며, 이 자세를 통해 아사 나와 프라나야마에 의하여 생성된 에너지를 특별한 중심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그 곳을 각성시키는 행법이다,

이들은 심리, 신체적 중심들인 차크라와 나디(인체 내 에너지 통로)들을 강하게 하며, 에너지의 막힘을 없애주고, 점차 적으로 증가하는 푸라나 에너지의 전달을 원활히 해주며, 신경구조들을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어 오롯한 집중력을 얻는데 방편이 되게 한다. 이들 수행으로 요기는 다음 단계로 감각기능들을 통제하여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사마다 상태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요가수행자는 육체의 민첩감, 안정감, 용모의 깨끗함, 아름다운 목소리, 몸에서 풍기는 향기 등을 얻게 되며, 특히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건강체를 이루면서 고통스럽고 유한한 삶을 넘어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자유, 즉 해탈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요가 수행은 굳이 해탈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심신을 모든 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시켜 모든 현대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과를 지닌다. 요가 수행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운동이나 과학, 의학보다 우리들의 인체를 자연상태로 되돌리면서 완전한 건강체를 만들어준다.

 

 

 

정각도량
무엇이 내것인가/이법산 스님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뜻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라든가 '내 것' 이라는 어떤 주관이나 소유가 없다는 말이다. 부모 태 중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올 때 우리는 무엇을 가져 왔으며, 죽을 때 무언가 가져가는 사람이 있던가? 그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 라는 '아상(我相)'에서 벗어나고, 재 것'이라는 '아소유(我所有)' 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집착은 묶임이다. 집착은 결코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집착은 모든 시비와 갈등, 욕망과 성냄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걱정, 근심, 번뇌 망상은 모두가 집착으로부터 생겨나, 그 집착의 틀이 움직이면서 고통을 연속시키므로 괴로움은 거듭거듭 돌고 돌아 윤회하여 벗어날 길이 막연할 따름이다. 그 괴로움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번뇌 .망상의 불길을 꺼버리는 것이 열반이다. '나'라는 상(相)을 갖고 재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몸과 입과 마음으로 온갖 행위를 자행하여 업(稟)을 짓는다.

이 세상의 어떤 물건이 '나'라는 상(相)을 내세우고 재 것'이라는 소유의 집착을 주장하는가.

 산도 돌도, 물도 나무도, 꽃도 열매도, 구름과 바람도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상(相)을 집착하고 상대인 '남' 이라는 상(相)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고 감이 자유롭고 존재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질투도 시비(是非)도 찾아볼 수 없으니, 걱정도 괴로움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자연은 거룩한 성자처럼 자비롭고 아름답고 편안하여 모든 현상과 더불어 즐겨 살고 있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무한한 혜택을 받고 자연이 제공해 주는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무심히 되지 못하고 자기라는 '나'의 상(相)과 소유의 욕망으로 뺏고 뺏기며, 성냄으로 싸우고 어리석어, 망령된 행위로 자연의 은혜를 등지고 천륜(天뭏侖)을 어기며 악업(怒業)을 자행하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능가아발다라보경 ( 伽阿阿跋多羅寶經)』에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는 세속에서 세워 놓은 이름과 모양(名相)에 집착하고, 마음의 흐름을 따라 움직여 갖가지 형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나(我)' 너 '내 것(我所)' 이니 하는 그릇된 견해에 떨어지므로, 무지(無知)가 본성(本'陸)을 덮고 가려서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그 결과로 탐심(貪心)이니 진애(嗔恙)니 하는 번뇌에서 나온 행위가 모여 망령되어 스스로 얽어매어 마치 누에가 고치를 치는 것 같고, 생사(生死)의 바다와 악도(惡道)의 광야에 떨어짐이 도르래 (叛井輪)와 같아지는 것이다.''

중생이 사는 세계에서 시기, 질투, 투쟁으로 괴로움의 삶을 반복하는 원인은 탐욕심에서 비롯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의 강도에 따라 이 사회와 세계의 시기, 질투와 투쟁의 행위가 자행되며, 이로 인하여 사회는 더욱 불편하고 공포스러워지며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꼼짝없이 고통의 시련을 받고 있다.

인간의 견해(見解)가 어떠하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상황은 변화한다. 악(惡)의 견해에는 악의 일이 저질러져서 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선(善)의 견해에는 착한 인연이 조화를 이루어 좋은 결실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가 바른 견해(正見)이다. 정견은 무아견(無我見)이다. 자기에 집착하거나 상대를 차별시 하는 견해는 올바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자기의 병동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편은 정견(正見)이다. 그러나 무시겁래의 업력에 의하여 무아의 자성 근본의 견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객진에 물들은 잘못된 견해를 자기 견해인 것 저럼 착각하고 피력하며 본질을 외면한 상태에서 본다면 그런 견해가 올바를 수는 없는 것이며, 올바르지 못한 견해의 실현이 좋은 과정과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으므로 중생은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문법경 (文殊舍利問法經)』에 말씀하셨다.

''아견(我見)을 지닌 중생이 허망한 윤회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시작을 알 수 없는 어느 때로부터 망령되이 헤아려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켜 '남'과 '나'를 분별하는 까닭이다. 또 어리석은 중생이 허망한 윤회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최상의 적정법(寂靜法)에 대하여 들은 적도 아는 바도 없으므로 삼업(三業)을 경계함이 없이 몸과 입과 마음을 제 멋대로 굴려서 온갖 번뇌,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짓는 까닭이다.''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진리이며, 상(相)을 여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최상의 목적이라고 설했다.

상(相)이 없으면 견(見)이 있을 수 없으며, 아상과 이견을 떠난 자리는 인간 본래의 맑고 깨끗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의 자리이다. 진여의 자리에서는 욕심낼 것도 성낼 것도 없으니, 어리석음은 있을 수 없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어떤 업(鷺)도 지을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려거든 이기주의를 떠나면 된다. 자기 상(相)을 내세우고 자기 견해를 주장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자는 언제나 잘 안될까 봐, 빼앗길까 봐 걱정스럽고 초조하여지니, 밝은 눈도 욕심 때문에 어두워져 올바른 일을 할 수 없어 괴로움의 나락에서 헤매게 된다. 개인, 가정, 집단적 이기주의와, 선악, 시비, 친소의 편견에서 벗어나면 참으로 즐거워지고 편안해질 것이다. 부처님의 절대적 가르침은 무아(無我)사상이다. 모든 인류가 무아의 적극적 의미를 실천한다면 이 지구상에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두려움이 없는 평온이, 시기질투가 없는 사랑과 자비가 넘쳐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항상 즐거운 극락정토가 실현될 것이다.

 

 

 

유마경의 세계
문수사리문질품과 부사의 해탈품/강혜원 스님

제5 문수사리운질품

 

「문질품」은 문수보살이 유아에게 가서 문병하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우마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다른 보살들에 의해 그의 지혜와 덕이 말해졌는데 여기에서는 우마가 직접 등장해서 문수보살과 함께 대승불교의 깊은 가르침을 설한다

 처음 문수는 부처님의 유마거사의 문병을 부탁받고 거절하지만 '부처님의 뜻에 따라 가겠다'고 한다.

유마의 대승진리에 대한 훌륭한 설법을 이미 알았으므로 대화하기를 끼려했던 것이다. 문수가 문병하러오는 것을 안 유만은 실내를 우선 텅 비게 만든다. 문수가 방에 들어오자, 유만은 즉각 한 마디를 한다.

"문수사리여, 잘 오셨소. 그대는 오지 않는(不來) 모습(相)으로 오셨고 보지 않는(不見) 모습(相)으로 보오."

유마의 이러한 인사에 대해 문수는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렇습니다. 만약 와 버렸으면 다시는 오지 않았고 만약 가 버렸으면 다시 가지 않습니다. 왜냐면 온다고 하지만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으며 간다고 하지만 어디로 가는 곳이 없습니다. 본 것은 다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유마가 방을 텅 비게 만들어 놓은 것은 대승진리의 공사상을 실현 해 보이면서 不來의 來不見의 見의 不二의 세계를 설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유마의 대승적 삶을 문수는 즉각 알아차린 것이다. 문수는 계속해서 물었다. ''거사여, 병은 차도가 있으신지요? 무슨 까닭에 생겼으며 얼마나 오래 되었으며 언제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음으로써 애욕이 있게 되면 병이 생기게 되오. 모든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병을 앓고 있소. 만약 일체 중생의 병이 사라지면 내 병도 사라지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어서고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소.'

보살은 중생과 더불어 하기 때문에 중생의 병은 바로 보살의 병이 되고 이 병의 근본은 미혹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중생이 병이 들면 보살도 병이 든다고 한 근원적인 이유가 보살의 대비심 때문임을 설한다. 대비심은 空心이다. 공한 마음을 드러냄을 반야라고 한다. 보살은 자신의 개인을 버리고 중생과 하나가 될 때가 지혜의 완성일 때이며 우마의 정신은 바로 이러한 반야심을 의미한다면 수는 우마의 텅 빈 방을 보고 ''거사여, 이 방은 어째서 비어 있고 사자조차도 없습니까?'' 유마는''모든 부처님의 국토도 또한 다 비어 있소''라고 답한다. 전 우주 전 세계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전 세계가 공합니까?'', ''공하기 때문에 공하오.'' 우마의 말은 공하기 때문에 궁하다는 것이다 표면적인지 성으로 공을 파악할 수 없으며 공은 直覺에 의해서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문수의 궁금은 더해져서 '동은 어째서 공합니까?''라고 다시 묻는다. ''공은 분별이 없으므로 공하오.'' 공에는 분별 시비 망상이 없다. 한정과 대립을 넘어선 대우주의 생경과 하나로 합일되는 지점에 무분별의 공이 성립된다. 우마의 방은 분별이 없는 공을 상징하는 것이다.

 문수는 묻는다. ''공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모든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그 곳에서 찾아야하오.'' 유만은 그 곳을 ''일체중생의 마음의 움직임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중생의 마음의 움직임은 망상이고 부처님의 해탈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해탈이란 현실의 세계를 떠나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현실의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문질품」의 마지막은 보살의 행이 무엇인지를 설한다.

''생사에 있으면서 더러운 행위를 하지 않고 열반에 머물지만 영원히 멸도하지 않는 것, 이를 보살의 행이라고 하오.... 마구니의 모습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모든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것이 보살의 행, 일체 지혜를 구해도 결코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 공의 도리를 따라 수행하지만 가지가지 공덕의 뿌리를 심는 것이 보살의 행,...''

 둘의 대립된 견해, 즉 위탁과 청정의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를 不二로 관하는 것이 참된 보살의 행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마가 설한 보살의 행은 자아의 집착에서 떠난 대 자유를 향한 도정이다. 보살행은 중생과 대중을 위한 바라밀행이다

 

제6 부사의해탈품

 

유마는 범부들의 분별을 넘어선 경지, 즉 '부사의 해탈'에 대해 설한다. 이 품의 첫머리에는 방안의 의자에 대한 문답으로 시작한다. 사리 불이 '모두들 어디에 앉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유만은 "그대는 무엇하러 여기에 왔소?''라고 묻는다. 사리 불은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답한다. 한정된 의식 한정된 입장을 내세움을 꺼린 유마는 미리 의자를 치운 것이다.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 해탈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유마는 법을 구하는 자세에 대해, ''무릇 법을 구하는 자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고 무리에 집착하여 구해서는 안 되오.''라고 한다.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법을 구하는 태도인 것이다. 삼보에 집착하는 것과 귀의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집착은 미혹하게 만든다.

유마가 말하는 진정한 법(진리)은 적열이지 생멸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불이인 것이다. 취사선택은 절대평등의 법에서 보면 자신의 견해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유만은 법에 대해 다양하게 설한다. 無相 無住 無爲 無染 無行處 無取手舍 無見 등 일체의 대립을 넘어선 경지에 법을 존재함을 말한다.

유마가 문수에게 묻는다. ''어느 불토에서 훌륭한 공덕을 성취한 사자좌를 본 적이 있소? 문수사리는 수미상국에 수미등왕불이 앉으신 팔만사천의 유순으로 장엄한 의지를 보았다고 한다. 유마 신통력으로 그것을 자신의 방에 들여 놓는다. 그러나 그 거대한 의자를 들여놓는데 어떠한 손상도 없었다. 유마은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한다. 신통력을 갖춘 보살들은 앉았지만 수행이 부족한 보살이나 제자들은 그 거대한 의자에 오를 수가 없었다, 유만은 그들에게 예배를 하면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처음 발심한 보살과 제자들은 수미등왕여래에게 예배를 하니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바로 我相이 없을 때, 즉 공한 마음으로 있을 때 그대로 내자유의 행위가 되는 것님을 보인다. 사리불의 눈에는 거대한 의자였지만 유아에게는 거대한 의자도 성도 모두 공인 것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포옹된 것이다.

불교는 시간상으로는 과거와 미래에서 현세를 보려고 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의 영역에서 이 지구를 보고 지구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을 보고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한다. 이처럼 광대한 공간 무한한 시간에서 현실의 모습을 보면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큰 바다에 표류하는 좁쌀과 같은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생각과 의식은 특히 대승경전의 전반에 깔려있다.

유마가 보인 지금까지의 행위는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부사 의한 일로 여겨지지만 우주적인 공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고 걸림이 없는 일이다 불가사의 해탈'은 제불보살의 해탈의 경계임을 보여주고 걸림(분별 망상 시비 등)이 있는 범부에게는 '부사의한 경계'로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살의 입장에서의 세계와 범부의 입장의 세계가 각기 다름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보살도 범부도 그 근원은 空으로부터 임을 여실히 이 품에서는 설하고 있다.

 

 

 

불교 문학
 일본 문학과 불교(2)/김환기

중세에는 계속되는 戰亂과 災 로 황폐화된 世 을 떠나 出家한 隆 者가 많았다. 이들이 만들어 낸 작품을 隱者文學이라 일컫는데 鴨長明의 『方丈記』와 鎌好法師의 『徒然草』가 그 대표작이다. ''강물은 마르는 일없이 늘 흐르고 있건만 물은 원래 그 물이 아니다. 流水가 고인 곳에 떠있는 물거품은, 한쪽에서 사라지면 다른 한쪽에서 생겨나 결코 변함없는 그대로가 아니다. 世間의 사람과 그 住居역시 이와 다름없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토거리에 貴賤의 住居는 영구히 안 사라질 듯하지만, 진정 한 칸씩 돌아보면 옛 그대로의 집은 거의 없다. 작년에 타버려 新築한 집이 있는가하면 큰집이 없어지고 작아진 집도 있다. 사는 사람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네.''

''세상은 無常하기에 진정 좋은 것. 하루살이처럼 아침에 태어나 저녁을 못 넘기고 죽는, 한여름 매미처럼 봄가을도 모르는 것도 있는 법. 인간은 이에 비해 사는 1년 동안만 해도 한없이 유유한 법. 항상 만족하지 못 하고 목숨을 아깝다 한다면 비록 천년을 산다 한들 하룻밤 꿈처럼 덧없는 것일 뿐이 아닌가.''

전자는 불교적 無常觀을 基底로 한 『方丈記』의 序章 도입부고 후자 역시 불교의 無常觀에기초한 예리한 入生藿艮 世上蘿, 美 識을 특징으로 하는 『徒然草』의 第7段 부분으로서 모두 중세 최고의 불교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세에는 사람들이 종교에 구원을 구하였으며 法然, 親鸞, 日然, 道元 등 위대한 종교가가 많이 배출된 시기이다. 그들이 설한 사상은 法語라고 하는 종교문학을 만들어 냈는데, 新鸞의 『歎異抄』, 日然의 『立正安國論』, 道元의 『正法眼飜』이 그것이다.

臨濟宗의 禪寺刹, 즉 교토五山(天龍寺, 相目寺, 建仁寺, 東陋磊寺, 万壽寺)과 가마쿠라五山(建長寺, 円覺寺, 專福寺, 淨智寺, 淨妙寺)을 중심으로 한 禪僧들의 漢文蓼가 성행한 것도 중세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예를 들면 雪村友格의 『岷峨集』, 虎關師鍊의 『齊北集』등을 비롯하여, ''拙僧은 名聞과 利達을 탐내지 않고 빈곤함도 개의치 않고,  世를 떠나 산 속에 묻혀있으니 世 의 煩 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네. 연말이면 날씨가 차 벗삼을 친구 하나 없는데, 寒月 아래 매화꽃 가지 하나가 새롭게 하네.(不求名利不憂省, 隱處山深遠俗座, 歲晩天寒誰是友, 梅花徘月 一枝新)((寂室錄」山居에서, 殺室元光)'', ''  世間의 명예와 이익과 같은 티끌을 털어 버리고, 무명솜옷을 착용하고 그 위에 僧服을 걸치고 정원 靑苔위에 坐禪하자, 서쪽 창 夕陽에 가을날은 저녁을 맞으려거늘, 떨어지는 나풋잎은 이리저리 뒤 섞여 돌과 이끼 위로 떨어지네.(   人間名利璪, 禪袍靜衲蹉靑苔, 西窓落日秋特晩, 墜葉紛紛下石臺) ( 「閻浮集」 山居에서, 鐵舟德 )''와 같은 禪風의 漢詩이다.

근세문학은 1603년 도쿠카와(  )막부부터 大政奉環이 이루어졌던 1867년까지 약 26년간의 한시와 和歌를 비롯한 歌舞伎, 淨瑠璃등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사상적으로 유학, 특히 朱子學이 忠孝에 철저했으므로 국학자와 유학자들 간에 불교교리의 현실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는 排佛論이 나타난다. 따라서 무로마치(室町) 말기가 되면 불 교성이 짙은 五山丈學은 쇠퇴하고 純文學 경향이 강하게 대두된다. 이는 禪風이 짙은 求道的 정신의 漢詩文이 평범하고 저속한 '降緖를 반영하는 시문으로 바뀌어 갔음을 의미하며, 불교사상을 尨艮幹으로 하는 중세의 찬란했던 불교문학이 근세에 이르러 선 소멸되어 갔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밤 谷川을 낀 旅館에 머무는데, 燭影은 憂愁를 자아내고, 한가히 듣고 있던 처마 낙숫물이 가을밤을 적시네.

일어나 窓을 열어 보았더니 이는 谷川의 얕은 내가 졸졸 달빛을 부수며 흐르는 소리였네.(夜!尋溪亭燭影愁, 閑聞 蒼?닳瀉高秋, 起推窓戶知非雨, 石瀨娟娟碎月流)(「山陽詩 」물소리,賴山陽)''와 같은 평범한 漢詩와, 중세 五山의 영향을 벗어나 ''孝行이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사람이 평범하게 충분히 가능한 것이지만, 現實엔 보통사람이 드물고 不孝의 惡人이 넘친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人間이 孝不牙을 모른다면 天의 問責을 피하기 어려우리. (『本朝二十不孝』, 井原西鶴)''와 같은 乍需學사상을 中核으로 하는 문장들을 들 수 있다.

한편 서민들은 歌舞伎, 淨瑠璃, 小昌, 落語 등 새로운 오락문화에 관심을 두기에 이른다. 특히 歌舞伎는 가마쿠라시대의 염불춤(念佛踊), 즉 南無阿弦嶇陀 에 가락을 붙여 唱하고 그 가락에 맞추어 춤추는 무용에, 근세의 歌謠나 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오락물로서 당시의 民衆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근세에 있어서 佛法은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庶民肋 감각 속으로 깊숙이 융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草子의 작자로 활동한 井原西鶴를 비롯해 俳諧로 유명한 松尾芭蕉의 『오솔길(奧 細道)』 『底島紀牙子』과 같은 작품을 통하여 더한층 엿볼 수 있다.

근대문학은 1968년 明治 新이후의 문학을 일컫는데, 元君에 따라 明治, 和문학으로 구분한다. 근대에 들어서면 크리스트교와 西洋哲學이 유입되면서 知識人들 사이에선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란히 普遍化되어 문학작품의 주제로 도입되기에 이른다. 性과 資本에 얽힌 인간의 彷徨과 苦惱, 生老病死를 거칠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運命을 불교의 超越思想의 입장에서 서술한 작품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다.

昭和초기 私小說 작가이면서 「解脫이라 함은 죽음의 고통, 離別의 슬픔, 異性에 대한 애착, 이러한 각종 煩惱의 덩어리인 자가 자신의 모습을 곰곰이 응시하는 것이 아닐까(安 能成 앞 편지)」와 같은 불교적 懺 를 사소설적 자기고백의 방법으로 그려낸 嘉村磯多를 비롯해서, 親鸞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愛慾地 의 문학을 추구한 丹羽文狼 寺院에서 태어나 혹독한 中日戰爭 제 흠을 바탕으로 불교와 마르크시즘을 다룬 武田泰淳, 불교사상을 基底로 삼아 嶽話의 세계를 그려낸 宮澤賢治, 신흥종교교단의 성립과 瓦解의 역사를 "函和시대 사회현상과 결부시켜 다룬 종교소설 『邪宗門』의 작가 高橋知巳, 한국인 출신으로 스토이시즘(StG0gn)을 통한 불교문학의 理想主義的 경향을 그린 立原正秋, 夏目漱石의 漢翁寺를 통한 禪의 세계, 井上靖와 司馬遣太郞 등의 高僧의 芽專記的 소설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근대문학 속에서 佛敎牲은 소설을 비롯한 漢플卷, 薑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6c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이래 중고, 중세, 근세를 거치면서 불교가 현실과 밀접하게 관계해 왔음을 의미하며, 오늘날 일본에 있어서 불교가 生活矛弗敎 철학으로 정착하였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수행의 길
참선 수행/유전

선 수행은 다양하다. 가부좌나 결가부좌의 자세로 사유하는 형식은 古今을 통해 다름이 없지만 사유방법과 실천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시불교의 선정(禪定)이 다르고, 대승불교의 선정이 다르고, 조사선의 선수 행 또한 다르다. 조사선과 묵조선, 그리고 간화선의 수행방법도 다르다.

여기서는 선의 역사와 선사상을 언급하기보다는 선수 행을 직접 실천하여 각자의 본래 심을 자각하고 지혜와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 실천방법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중국 당대(唐代)에 선종의 조사(祖師)들에게서 완성된 선불교를 조사선이라고 한다. 조사선의 수행체계는 좌선과 선문답(禪問答), 그리고 노동생활[作궈芳) 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이고, 그 기본적인 정신은 평상심(본래심)을 일상생활 어디서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각된 본래 심으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그 모두를 선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사선에는 선의 생활을 일반적으로 '참선(參禪)' 이라고 한다. 참선은 깨달음의 평상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오염(汚染)되지 않고, 근원적인 본래 심으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생활종교의 참모습을 말하고 있다. 참선자(參禪者)나 참선승(參禪僧)은 이러한 선의 생활을 하고 있는 수행자를 말하며, 참선학도(參禪學道)나 참선문도(參禪問道)는 선지식을 참 문하여 선의 세계를 참 문하고 도(道)를 탐구(探究)하는것을 말한다.

「증도가(證道歌)」에는 참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遊江海 涉山川 : 강과 바다를 거닐고 산천을 넘어서,

尋師訪道爲參禪 : 스승을 찾고 佛道를 찾아 參禪을 하였네.

自徒a忍得曹溪呂各 : 曹溪의 佛法(道)를 깨닫고 부터는

了知生死不相干 : 生死의 문제에 상관없음을 알았네.

行 禪 坐赤禪 : 걷는 것도 禪이요, 앉는 것도 禪이라,

語默動  安然 : 말하고 묵묵하고, 움직이고 멈추거나 本憔(本來心)은 항상 평안하네.

 

「증도가」에서 말하는 참선은 제방(諸方)의 선지식을 찾아 불도를 수행하는 구도자의 수행생활과 본래심을 깨닫고 일체의 모든 경계에서 선의 생활을 전개하는 조사선의 경지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노래이다.

조계의 불법을 깨닫고부터는 생사사대(生死事大)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증도가」의 작자인 영희현각(永嘉玄覺 : 675一713)이 처음 육조혜능(六祖慧能)을 참 문하고 던진 '생사의 일이 지대(至大)하고, 무상(無常)이 빠르다(生死事大 無常迅速)' 라는 문제를 깨달아 마쳤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일단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사문제는 번뇌의 마음(生死心)을 말하고 있다. 즉 생(生)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고, 사(死)는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생멸(生滅)과 같은 말로서 끊임없는 번뇌 속에 나고 죽는 생사의 고통에 허덕이는 범부의 중생심(衆生心)을 말한다.

그리고 '걷는 것도 참선, 앉는 것도 참선, 어묵동정(語默動醱)에 언제나 마음(本體)이 항상 평안한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깨달음을 체득한 도인의 경지에서는 본래심(평상심)으로 일상의 매사를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참선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역대법보기 (歷代法寶記)』에서도 '일체의 모든 생활이 모두 선(一切時中總是禪)'이라고 하고, 『돈오요문(頓悟要門)』에도 '도를 깨달으면 인간의 행주좌와 등 모든 생활이 바로 도(會道者 寸手住坐臥是道그'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경전과 많은 선어록(禪語睾輦)에서 불법(佛法)은 일상생활을 하는 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조사선에서 말하는 선은 본래심, 즉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참선은 이러한 평상심으로 일상생활에서 자각적인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선의 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참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선의 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참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깨달음의 평상심으로 전개하도록 하는 자기수행이며,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참문하는 선의 생활을 말한다

「무문관(無門關)」 12칙에 서암화상(天벎巖和尙)이 언제나 '主人公!' 이라고 부르고는, 또 스스로 '예1'라고 대답하면, '깨어있는가?(    )' 라고 하면서 '다른 때 다른 날 남에게 속임을 당해서는 안된다.'라고 스스로 주의 주고 있는 자각적인 참선수행의 모습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전해주고 있다. 자기의 본래심(平常心)이 경계에 떨어져 매몰(埋尊旻)되어 주인공이 상실되고, 차별, 분별심과 생사심에 오염된 마음은 선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으며 '平常心是道'의 세계를 구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선하는 수행자가 불법이나 도를 구하는 장소가 자기의 본래심(평상심)이 아닌 사상(事氣)이나 경계에 있다면 엄청난 잘못이다. 마조나 임제가 '밖을 향해서 불법을 구하지 말라(莫向外 求) 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음은 이를 두고 한 견책인 것이다.

불도나 참선 .불법이나 모두 자기 자신의 일이다. 참선은 결국 스승에게 참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참문하는 수행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종문통요(宗門統要)』 제5권에 임제가 참선은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일(成佛作祖)'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각자가 자기 자신의 본래심을 깨달아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여 부처나 조사가 되어서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인 것이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박광서 교수/편집부

신록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사람들 마음까지도 푸르름으로 그윽해지는 오월이다. 일년으로 말하면 반년이 다 되어가策 학교에서는 봄 학기가 한 달 남짓 남았다, 이즈음 되면 한번쯤 계획된 일을 점검해 보기도 하는데 좀 미진한 부분이었다면 매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박광서교수를 만나봤다,

대학에 몸을 담고 후학을 교육하는 교육자로서 학문을 하는 학자로서도 노력하는 분이다. 그렇게 확실한 전문분야에 몸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가에서는 박광서 교수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게 '우리는 선우' 대표로서 박광서교수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재가불자로서 승가에 신선한 새 바람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그마한 키이지만 당당함이 있고 당당하지만 결코 오만하지 않는 불자 박광서 교수는 어느 때보다 요즘이 바쁠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하여 팔 년 동안 실천해온 자비의 등 달기 운동을 펼치고 있고 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장애인 나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에게 다른 계절보다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이 오월에 밝은 햇살을 듬뿍 주고 싶어서 라고...

햇살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늘이 더 짙기 때문에 더 외출하고 싶을 거라고 말하는 마음이 자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선우'의 구체적인 활동은 몇 년 전에 종단의 커다란 흐름을 바로 잡아가는데 재가불자들로서 바른 소리를 내는데 큰 몫을 담당했던 일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재가불자들의 바른 신앙형태를 잡아가는데 큰 몫을 하리라고 본다. '우리는 선우'에서 추구하는 사대 과제가 있는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먼저 박교수는 날로 변하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 부처님 말씀만큼 사람을 바르게 계도하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한 사찰이나 한 지역 또는 한 나라만의 불교가 아니라 세계불교가 되야 하는 필요성이 요구되고 인류에게 보편성을 내세울 수 있는 세계불교의 필요성을 말했다. 지금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날로 불어나는 불교 인구를 생각하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작년에는 미국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서 바라본 불교의 비전은 상당히 희망적으로 보여진다고 했다.

다음은 21 세기를 책임질 수 있는 미래 불교가 돼야 하고, 우리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불교가 돼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이 시대 우리 승가의 활동 중에 많이 부족한 점이 있다면 역시 시민사회에 불교를 전하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시민사회 불 교화를 주장했다. 그리고 재가불자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생활불교다. 부처님 말씀을 아무리 외우고 익혀도 실생활에서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불교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불교 신자들의 대부분이 생활 속에 실천하는 불교가 아니라 사찰에서 배운 부처님 말씀은 거룩하게 따로 가슴속에 간직해두고 일상생활은 무관하게 살아가는게 문제라는 지적이였다. 법당문이 닳도록 드나들며 기도와 정진을 거들 한다고 해도 실생활에서 실천이 없다면 다 부질없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생활 속에 뿌리 내린 불고 생활불교가 절실한 때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실은 사회를 불교화 하려고 해도 불교가 사회화 되지 못해서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말했다.

94년도와 98도는 우리 한국불교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던 해였다. 그럴 때마다 재가불자들의 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역할을 담당했던 박광서 교수는 '우리는 선우' 외에도 재가불자들로 구성된 단체에서 마음을 아끼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상처 깊은 이 시대를 함께 하는 불자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승가에서 교단을 이끌어 가는 수행자들에게 출가정신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출가정신은 무소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며 담담하게 본인의 생각을 토로했다. 우리 승가의 출가 정신을 두 가지로 말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고 상구보리는 지혜를 말하고 하화중생은 자비행을 말한다고 하면서 지혜는 무소유에서 나온다고 견해를 피력하면서 욕망이 크면 무지해져서 지혜로운 수행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했다. 무소유 정신으로 지혜롭게 살고 중생들을 향해서 책임감을 느낄 줄 아는 수행자가 많아질 때 승가가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교단에서 몇 년마다 알아 나는 일련의 사건들도 교단의 종지 문제로 다툼이 생간라면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를 하겠지만 어떤 권력이나 이익을 위해서 교단이 다시 분열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수행자들, 특히 대중들과 가까이에서 종무 행정을 담당하는 수행자나 포교 일선에서 승가의 전반적인 교육을 담당한 수행자들에게 간절하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사회의 흐름과 대중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의식이 결여되고는 사회와 발을 맞추어 걸어가기가 힘들지 않겠냐는 이야기다. 또, 한가지 승가에 바람이 있다면 승가 구성원들의 교육 문제다.

교육은 사람을 획일화시키는 단점도 있지만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고 새로운 지식을 채워주는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승가의 기본 교육과 재교육 문제는 한시가 급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룰 수만은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였다. 이런 말을 당당하면서도 안타 가운 심정으로 말할 수 있는 불자로서의 박광서 교수가 불교에 갖는 애정은 그 누구보다 크고 깊을 것이다.

아마 이 박광서 교수의 전공을 모르고 재가 불자들 모임에서 만났다면 아마 불교를 전공한 교수가 아니냐고 누군가는 묻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고 싶었고, 물질의 근본에 대해서 바닥을 알고 출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지금에 자기를 있게 했으며, 어느 큰스님의 말씀이 재가불자로서 더 크게 할 일이 많고 출가해서 수행을 한다고 그것이 다 바람직한 인연은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세간에 마음을 묶어 두는타澤 더 크게 작용했다고 웃으면서 말하는 불자로서의 박광서. 그는 필시 불자로서 깊은 숙연히 있었을 것이다, 먼 훗날에 많은 지성인들이 정말 불교는 좋은 가르침이다라고 말 할 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 어떤 서원보다 값지게 들렸다.

승가가 바르게 걸어가도록 나침반 역할을 꾸준히 담당하는 '우리는 선우'가 되길 바라고 박광서 교수의 개인적인 원력이 헛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불심의 창
불교로 생활하기/이권학

종교가 갖는 사회적 책임은 매우 중요하다. 얼마 전 매스컴에서 문제가 되는 종교 집단을 해부하고자 기획하였던바 흥분한 신도들의 방송국 난입으로 송출이 중단되는 우여 곡절 끝에 다시 방송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종교와 매스미디어가 누리는 권력과 그 영향력을 실감하였다. 암묵적으로 각자 영역에 대한 침범은 금기시되어온 듯하다. 사실 그 집단의 보도된 단편적인 내용만을 본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한지의 척도가 될 것이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무기로 초법적인 취재 방법 등 언론의 문체점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몰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종교 활동을 보면서 진정한 종교의 위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종교 지도자의 비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처럼 신격화하는 모습에 아연 실색할 뿐이었다. 그들이 숭앙하는 신과 그들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앞선다.

궁극의 목표를 신의 은총이나 선천적인 소질 등 선민적 특이한 원인에 근거하는 것으로 하는 체계는 다소 폐쇄적이다. 그들은 유한한 세속을 벗어나 초월적인 자복의 세계를 표방한다. 그러나 불교는 현실 속에서 그리고 세계를 보는 당체인 바로 현재의 나에게서 의문을 해결하려고 한다. 초월 사상이 위험한 건 현실 생활을 무력하고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 초월 세계를 상정할 수 있을까? 진리는 나를 떠날 수 없고 나를 떠난 진리는 무의미하다. 실천적인 수행의 요소와 엄밀한 철학적 논증을 갖춘 불교는 폐쇄적인 측면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구국의 체험과 경지는 모든 사람이 향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무아 연기라는 진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이 진리 달성의 관건을 포괄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의식)에서 찾고 있으므로 개방적이라 할 것이다.

불교 역시 오도되는 사례가 많이 있는데, 단적인 예로 무속과 관련되는 경우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또한 토속적인 진홍 종교들이 불교 사상을 원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일반인에게 불교는 비과학적이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데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오는 권선 장악의 업보 윤회 사상이 각인되어 있는 점도 한몫을 할 것이다. 물론 교훈적인 측면이 있고 건강한 사회윤리의 추구에 기여한 점이 있으나, 그것만으로 불교가 비춰지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불교가 갖는 신비적인 성격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경우이다. 불교는 현실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이다, 불교 교의를 보면 전연 신비적인 종교가 아니다.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의 다에서 성취하지 못하면 궁극의 목표는 불가능한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나와 이 세계와의 실상을 바르게 보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이 불교이다. 물론 불교에 신비적인 요소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수행중에 성취하는 초능력을 설하지만, 이적(異蹟)에 매몰되어 그것에 집착한다면, 그는 또 하나의 속박을 스스로 만들어 울타리에 갇힌다. 궁극적으로 신비적인 요소는 경계를 하여 부수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여야 한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초능력을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얻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는 행동하고 사유하는 주체라 할 만한 마음에 대한 분석과 가르침 이교의 체계의 요체가 되고 있다.

성전을 짓는데 빚보증을 서서 가정을 파탄시키고, 마술사의 쇼와 같은 행위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구원을 빌미로 공포심을 자극하여 교세를 확장시키는 종교라면 이미 종교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오히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정치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불교 사상이 개방적이고 혁신적임은 바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궁극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설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어떤 타자의 개입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본성에 직 입하여 해탈을 얻는 데 그 장점이 있는 것이다.

불교가 태동한 인도 사상의 전통적인 맥락에서 자유란 소외된 참된 나를 바른 지혜로 나를 구하는 것이다. 대상에 물들여진 나, 즉 거짓된 나를 참된 나로 오인하는 것에서 세상의 속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속박을 끊는 길은 수행을 통하여 참된 지혜로 거짓된 나가 허망하고 망상이고 집착이라고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마음과 그 기능에 대한 가르침이 매우 많다. 이러한 마음 혹은 의식은 생활과 욕구의 주체일 뿐 상주 불변의 실재적 아가 아님은 물론이다. 실제 대상과의 관계에서 고통받는 것은 참된 나가 아니므로 이러한 참된 나를 직관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의 사슬의 끊을 수 있는 길이다. 괴로움과 번민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욕심과 집착에 의함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지위와 명예와 부와 권력을 욕구하는 것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릇되고 이때 나는 그러한 것들에 취착하여 소외당한다. 집착이 있으면 고라 느껴지고 집착이 없으면 고(苦)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는 실재한다기보다는 관념적임이 명료해진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고는 바로 관념의 속박을 의미하며 그러한 관념의 속박은 강관의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관념적이며, 일상의 인식활동에서 판단중지를 통한 관념적 주관을 배제하며 자유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때로 힘이 들지만 나름대로 극복하고 절망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고 현재의 행위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업과 윤회 사상도 결국은 인식 활동과 심층 속의 의식에 기인하므로, 실체인 것처럼 작용하는 이 주관적 나를 바로 통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욕망과 집착을 배제하고 대상과 객진에 소외된 참다운 본성이 오롯이 미혹됨 없이 홀로 발현할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행한 인연을 맺어 불교를 조금이나마 공부할 수 있었고 선지식인 선생님과 선후배들 사이에서 어렴풋이나마 불교를 점할 수 있었다. 괴롭거나 슬플 때도 미혹된 또 다른 내가 힘들어 할 뿐이라고 진정하고 즐겁고 기쁜 일이 있더라도 들뜨거나 자만하지 않도록 절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사물을 보는 데도 잠재된 주관의 개입 없이 좀더 객관적이고자 노력하게 된다. 심경의 변화는 나의 심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그래서냐는 어떤 마음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그것이 비록 진통제와 같은 자기 암시라고 할 수 있지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한다.

 

 

신행상담
생사불이/장계환 스님

'불교와 인간'이라는 교과시간에 불교와 접목된 주제를 택해서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불교에서는 생사가 둘이 아니라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분명히 둘이라는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사(死), 즉 죽음을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생과 사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질문도 있었는데, 비록 토론에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유익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사범대학 수학교육과 : 최명섭)

 

생자필멸(生者必威)이란 말에도 알 수 있듯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멸하기 마련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정물까지도 언젠가는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것(生)과 죽는 것(死)은 분명히 다른 반대의 현상인데 왜 같다고 하는가.'' 라는 질문은 마땅히 제기될 만한 것이라 느껴집니다.

부처님의 연기설에 보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有)'' 고 합니다 '이것'과 저것'에다 '생'과 '사'를 넣어보면 생사가 둘이 아님을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生이 있기 때문에 '死'가 있고, 사가 없으면 생도 없어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생은 사의 최초이자 최후의 모습이고, 사는 생의 최후이자 최초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즉 '산다'는 말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 잘 살았다'는 것은 바로 24시간 나의 생명을 단축시켰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죽어간다'고 했더라면 모두 들 생에 대해 집요한 애착을 덜 가질 텐데 '살아간다'고 사면서, 실은 '죽어가는'것이 현실이니까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별 짓들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生)만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생 그 자체도 무의미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낮과 밤의 교차로 인해서 하루의 시간이 완성되고, 검은 색은 흰 색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물은 상반되는 것이 서로의 존재가치를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가 있기 때문에 삶[생)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더욱 고마운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들 삶의 본질인 죽음을 보면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자기 육신에 대한 애착심 때문이지요. 자신이 입던 헌 옷은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면서도 자신의 육신만은 늙고 병들어도 애착 때문에 바꾸기를 거부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이 다해 죽을 때만을 '죽음'으로 생각하고, 현재의 육신이 죽어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그 찰라 만을 '죽음'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死)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生)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한 마리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다시 그 번데기는 예쁜 나비가 되었습니다. 이 때 애벌레의 세계에는 한 마리가 감소되고 번데기 세계에서는 한 마리가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이 일은 나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생명체들인가요? 분명 하나의 똑같은 생명체의 변화에 불과 합니다.

이처럼 생과 사는 모든 생명에 공통하는 한 현상일 뿐, 다른 두 개의 개체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한다면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주문
연화(蓮華)/일장스님

'부처님 오신 날', 우리들은 연등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려 마음의 등불을 밝힙니다. 지혜의 등불이야말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들의 삶을 올바르게 나아가게 하는 자비의 손길(실천)과 더불어 함께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의 등을 밝힌다 함은 곧 우리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身)과 뜻愾)이 올바르고 부드럽고 포근하여 막힘없이 따뜻하게 흐를 때, 비로소 마음의 등불은 자연히 저절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初轉法綸)에서 '인생은 고(苦)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바꾸어 보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왜곡되게 흘러갈 뿐입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지 않았다면, 중생의 길은 끝없이 먼 고통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고'라는 자각과 그 고로부터 벗어남, 이 두 가지를 같이 한다면,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고로부터 벗어남이 본래 모습임을 알고 생각의 흐름을 바꾸어 열린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도 지혜의 힘인 것입니다.

열린 삶은 어느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모두다 아름다워 어우러진 하나 됨을 알게 되는 지혜의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등이 아니라 지혜의 등, 자비의 등, 연화의 등인 것입니다. 연화(지혜)란 진흙(중생)속에서 피어납니다. 진흙 속에 있으면서 물들지 아니하고, 아름답고 무궁 청정한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꽃 가운데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다만 이 연화만은 꽃과 열매를 같이 맺습니다. 즉 꽃(華)은 인(因)으로 만행(萬牙予)함을 말하고, 열매(蓮)는 과(果)로써 만덕(萬德)을 원만히 하며, 만행과 만덕은 처음부터 함께 합니다. 즉 꽃과 열매가 동시에 피어납니다.

 

법화경을 의지해서(蓮華)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연화는 『법화경』의 법문(法門)을 의미합니다. 즉 연화의 법문은 인과(因果)의 미묘한 도리를 설한 것이기 때문에 『법화경』을 비유로써 『묘법연화경』이라 했습니다.

蓮(열매)과 華(꽃)가 함께 하는 것은 인과 또한 동시로서 '중생즉불(衆生卽佛)'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중생은 반드시 불(佛)을 이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꽃이 반드시 진흙 가운데 있는 것은 해(解)는 반드시 생사(生死)로부터 일어난다. 즉 연화가 흙탕물에서 나 홈은 모든 성문이 대중 가운데 들어가 정좌함이 모든 보살이 연화 위에 정좌함과 같아서 무상지혜청정게(旅上智慧淸淨偈) 설함을 듣고, 이래의 밀장(帝藏)을 증득하는데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개(華開)의 뜻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즉 꽃이 핀다는 것은 중생은 대승(大乘)의 진리에 심지가 약하여 능히 신심(信心)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여라는 정묘법신(淨妙法身)을 개시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이 생기도록 하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꽃의 종류는 많이 있지만 꽃은 있어도 열매(噴)가 없는 것이 있고(一華無 ), 열매를 맺어도 꽃 한 송이에 열매가 하나(一華一 ) 뿐인 것도 있습니다, 즉 중생은 부처를 이를 수 있는 불성(佛'1生)을 누구나 갖추고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비유로써 인과가 동시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과동시(因果同時)라는 의미는 중생즉불(衆生卽佛)의 뜻으로 인(중생)은 반드시 과(佛)를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탐(貪) , 진(瞋) . 치(痴), 삼독심(三毒心)으로부터 잘 지켜내어 우리들의 삶이 콩,무상.무아의 연기를 보는 삶으로 흐르게 될 때, 연화와 같이 일화다과(一華多果)를 맺을 수 있는 열린 삶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 바로 지혜의 등, 자비의 등, 연화의 등을 밝히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람의 진수
칠처구회의 도량, 장곡사(1)/유문용

장곡사는 칠갑산 서편 신곡에 있는데 절이 있는 동네가 장곡리 절골이다. 옛날에는 절이 있으면 절골, 탑이 있으면 탑 골이라고 부른 예가 많다.

이 장곡사가 있는 칠갑산은 그 산세에 경관이 아주 좋아서 예로부터 영산(靈山)이라고 불려졌다. 이 장곡사를 중심으로 경경히 쌓이진 신곡에 사곡사(四谷寺)가 있는데 칠갑사에 장곡사, 사자산에 운곡사, 무성 산에 마곡사, 계봉산에 백곡사기 있다.

절 주변에는 오리나무를 비롯해서 1600여 종이나 되는 자연 수림이 우거져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고. 평평한 분지에 그렇게 넓지 않은 아늑한 곳에 장곡사가 있다.

이 장곡사의 창전은 신라시대 보조선사가 창건 했다고 보여 진다.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에 보면 보조선사의 창건이라고 나오는데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아니고 신라시대에 애장왕부터 헌강왕까지 사셨던 보조선사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상대응전에 있는 철조 약사부처님을 보면 신라시대에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초창 이후에 여러 차례 쇠퇴되고, 전란에 화를 입고 다시 중창되고 하는 과정을 많이 겪어온 듯 하다.

이 장곡사는 가람의 배치 구성이 매우 특이하다. 대응전이 상, 하에 따로 있고 거기에 따른 전각들이 따로 형상이 되어서 첫 느낌은 두 개에 가람을 보는 느낌도 받을만한 절이다. 여기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별도로 없으나 불교적인 사상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가람에 대웅전이 상, 하로 있다는데 주목하여야 한다. 철저한 화엄사상에 입각해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화엄경에 칠처구회(七處九會) 설법을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7장소에서 9번에 설법을 하셨다고 한다. 7장소는 도리천궁, 야마천궁, 도솔천궁, 타화천궁, 중각강당, 적멸도량, 보광 법당 이렇게 7장소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보광 법당과 중간강당에서는 한 번씩 설법이 더 있으셔서 9회에 설법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도리천궁과 야마천궁, 도솔천궁, 타화천궁에 4장소는 천상(天上)에서의 설법이고 적열도량과 보광법당, 중간강당에 3장소는 지상(地上)에서의 설법이기 때문에 천상과 지상에서의 설법 장을 따로 구분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으로 구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장곡사로 들어가는 길목은 구불구불 계류(溪流)를 옆으로 끼고 산길을 오르다 보면 조그만 다리를 건너게 된다. 역시 물을 한번쯤은 건너야 몸과 마음이 맑은 물에 정갈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오르다 보면 운학루 옆으로 들어서게 된다. 아마 지금 오르던 길목에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운학루로 바로 들어가게 된다. 이 운학루는 평지에 지어졌기 때문에 단층에 누각(樓閣)집으로 되어 있다.

이 운학루와 하대웅전, 요사채인 설선당, 봉향각이 동서남북으로 아늑하게 에워싸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를 주는 부처님의 천하(天下) 설법장어 되고, 저 위쪽에 상대응전과 옹진전이 있는 곳이 천상(天上)에 설법 장으로 마련된 가람에 배치구성을 하고 있는데 서로 방향을 달리 하고 있다. 천하(天下)에 설법장인 하대웅전 일곽은 남향을 하고 있고 천상(天上)에 설법장인 상대응전 권역은 남동방향으로 앉아 있다.

운학루는 원래부터 장곡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인근 사자산에 폐사직전인 운곡사에 운학루만 남아 있던 것을 여기 장곡사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운학루에 구조는 누각 밑에 기둥인 누하주(樓下柱)만 있다고 하면 다른 가람의 누각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이 집에서 뒤쪽으로는 2익공 집으로 되어 있고 앞쪽에는 주심포에 기능을 갖추어 놓았다. 법당쪽으로는 주심포집에 분위기를 조성하고 뒤쪽으로는 평범한 2익공 집으로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처마의 구성도 법당 쪽으로는 주심포 분위기에 맞게 부연이 덧달려 있는 겹처마를 하고 뒤쪽으로는 소박한 홑처마로 해서 악공집에 분위기틀 맞추었다.

이 운학루 안에 있는 법고는 그 직경이 무려 1.9미터나 되어서 사람 한길보다 더 크게 만들어 졌다. 이런 법고를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크기의 통나무를 어떻게 구했으며 그 가죽은 어떻게 구해서 만들었는지 퍽 궁금하다. 대개 이 법고를 만들 때는 소가죽으로 쓰는 것이 보통인데 이만한 넓이에 가죽을 소 한 마리로는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코끼리에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코끼리가 없었을 테니까 인도에서 수입하여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여기 운학루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대웅전이 있고 양편에 설선달과 봉향각이 있다. 장곡사의 하대웅전(下大雄殿)은 부처님에 천하(天下) 설법 장으로 볼 수가 없다.

이 대웅전은 보물 181호로 지정되어있는데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다고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임란(壬亂)을 전후한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건축물들의 양식을 비교하여 보면 그 건조물의 건립시기를 대충은 알 수가 있다. 조선조중기 건물도 그렇게 많지가 않기 때문에 이 하대웅전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이 하대웅전의 지붕이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시대, 조선 초기에 건물들이 주로 맞배집으로 되어 있어서 시대적으로나 품격이 높아 보이는 집이다. 화려, 장엄하지도 않고 소박하면서도 근엄해 보인다.

하대응전은 전면이 3칸에 기둥이 4개가 되는데 양 끝에 기둥을 높여 놓아서 4귀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을 귀를 들었다고 해서 ''귀솟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굵어져서 곡선으로 되어 있다. 이런 것을 보고 "배흘림"이라고 한다. 이 기법은 주로 고려시대의 건축물에서 현격하게 보이고 있는데 부석사에 무량수전에서 보이고 있고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이 대응 전의 건축구조가 매우 특이하게 되어 있다. 맞배지붕의 집에서 사방에 포착을 짜올리는 기법은 그렇게 흔한 양식은 아니다. 건축기술의 기법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맞배지붕에서 나포를 올릴 경우 앞. 뒤면에만 다포가 짜여지고 양 측면에는 포착이 없이 되는 경우가 보충인데 이 집은 팔작집에서 저럼 포착이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짜여지고 지붕은 맞배로 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하대웅전 안에 계시는 부처님은 보물 33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약사(藥師)부처님이시다. 고려시대 충목왕 2년 1346년에 봉안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1959년 개금불사를 할 때에 발견된 복장기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한다.

이 장곡사에 있는 부처님 중에서 제일 후덕하고 완벽한 불상이다. 왼손에 약호(藥壺)를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상호가 원만하고 법의(法衣)에 조각도 매우 뛰어나고 몸에 균형이라던지 결가부좌(結跏趺坐)에 모습도 통일신라시대에 양식을 갖추고 있다. 뒤에는 약사회상도(藥師會上圖)에 탱화를 봉안했는데 그렇게 오래되지는 많은 것 같다. 오른편 측면에는 영단(靈壇)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여러 탱화들을 봉안 하였다.

부처님 위에는 보궁인 닫집을 별도로 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계시는 위의 천정에 한 칸을 높게 반자로 올리고 높여진 만큼의 춤에 닫집 저럼 포착을 올려서 천정 안에 닫집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닫집에 천정에는 우물 반자를 하지 않고 용트림을 단청으로 하여 닫집에 형상은 모두 갖춘 것으로 해 놓았다.

이 하대웅전은 닫집의 형태나 또한 맞배지붕과 완벽한 다포집에 조화, 그리고 고식(古式)올 잘 구사한 건축기술 등 우리나라에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 다음 호에 계속-

 

 

 

신간안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편집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홍사성 지음

4.6배판 변형

288쪽

값 8,000원

도서출판 장승 발행

 

우리가 사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라고 한다. 참고 견디어내야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버거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훌쩍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떠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떠난 그 곳도 역시 사바다. 잠시 망각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문제의 근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면 이 사바의 촘촘한 번뇌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우리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분이 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계를 우리와 똑같이 겪으신 분, 사尙때]서 인간을 완성한 분,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육신의 부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체험하고 깨닫고 가르치신 법은 우리 앞에 있다. 바로 경전이다. 우리는 경전을 읽음으로써 2천6백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경전 중에서도 아함부 경전은 부처님의 육성에 가까운 경전이다. 특히 <잡아함경>은 난해한 가르침이 없고 부처님이 제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때그때 일어난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솔직하고 간절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있어 부처님의 인격적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잡아함경>에서 가장 쉽게 마음에 와닿고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100개의 경전을 골라 간단한 독후감을 덧붙인 것이다.

제1부는 '노여움을 다스리는 지혜'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불교', '불교식 다이어트법' 등 유머 속에 교훈이 담긴 얘기가 가득하다. 제2부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이익'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 등 우 리 주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주제로 하고 있고, 제3부는 자살, 낙태 등 사회 . 종교 문제에 관한 부처님의 명쾌한 답변이 실려 있다. 제4부는 생로병사와 12인연, 열반, 중도, 사성제 등 가장 핵심적인 불교교리를, 제5부는 '꾸준히 절에 나가야 하는 까닭' '재가불자가 해야 할 일' 등 불자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진솔한 체험과 따뜻한 인간애가 묻어 있는 지은이의 독후감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원뜻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운문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경전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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