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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3월호 / 통권 37호 / 불기 2542(1998)년 3월 1일 발행

 

 

이달의 법문

오늘을 사는 지혜/무진장 스님

 

정각도량

전법을 수행으로 삼자/이도업 스님

 

특집1

승가생활의 경제/이법산 스님

 

특집2

실직자를 위한 부처님 말씀/유필화규

 

특집3

축재와 보시/정승석 스님

 

불전의 설화

불교 설화의 세계성/이만

 

불교와 국문학

구결능엄경과 능엄경언해(1)/김무봉

 

법화경 공부

상불경 보살/안중철

 

불자탐방

이두남 보살님/편집부

 

불심의 창

나와 부처님의 만남/연기영

 

불서산책

밀린다팡하/김호성

 

신행상담

겁과 찰나/장계환 스님

 

가람의 진수

화엄 종찰, 화엄사/유문용

 

단편소설연재

아름다운 폭동(최종회)/이상우

 

 

 

이달의 법문
오늘을 사는 지혜 / 무진장 스님

 

 제일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출가를 했는가. 출가 동기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적어도 6~7세에서부터 거의 12년에 걸쳐서 베타사상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그 사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하나는 업사상이요, 나머지 하나는 윤회사상입니다.

 업사상과 윤회사상을 들면 불자들은 상당히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교의 중심사상이 아니라 베타사상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교육의 타당성에서 불교가 상당수를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 중류 이상의사회의 아들들은 이와 같은 교육을 다 받게 되는데, 일반인으로서 국왕 대신에 아들들은 업사상이나 윤회사상 이외의 어떠한 사상도 생각해낼 수가 없던 때입니다. 우리는 성도 자로서의 부처님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6~7세에서 12년 동안 그 사상을 공부한 부처님과 29세에 출가해서 35세에 성토한 부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 사상을 공부함으로써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부처님은 대단히 활발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업사상이나 윤회사상 이외의 어떠한 사상이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하고 생각했습니다.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것인데 왜 이러한 계급이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번민이 있었고, 나를 낳아준 우리 어머니는 어째서 일주일만에 서거하셨는가 하는 이러한 번민도 거듭한 것입니다.

 계급문제의 타파와 개개인의 생로병사에 시달리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에게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존재하는데 그러한 행복들은 왜 순간적인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부처님은 출가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출가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중류이상 사회의 아들들은 출가해서 수도하는 것이기에 풍습처럼 되어 있어서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풍습에 의해서 출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29세에 출가한 부처님은 청년기를 그렇게 지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만 그러한 청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 그러한 청년이 존재하는데, 오늘의 시대에 사는 청년의 고민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청년들의 고민은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고민, 그 욕망 하나만 해결되면 안 되는 일이 없고 모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의 고민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의 고민과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고민은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노인을 공경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오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답변 80퍼센트가 공경할 필요가 없다. 왜 노인들은 권위주의 가지고 있느냐, 버스 안에서 어째서 자리를 양보해야 하느냐 그럽니다.

 인과응보를 모르는 오늘의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러한 문제점도 바로 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60년대 초 군사혁명 이후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된 것은 불과 30~40년밖에 안됩니다. 경제적인 욕망 하나 때문에 부모를 해치고 형제를 괴롭히고 남편을 죽여서 보험금을 타먹고,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사회가 돈 때문에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범죄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백의민족이니 슬기로운 배달민족이니 위대한 단군의 자손이니 하는 구호가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을 할 때, 이 시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시대가 될까 하는 그러한 고민은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유사 이래로 오늘처럼 정치가 부패하고 정제가 위기에 빠지고 종교사회마저 병리현상을 낳으며 부도덕하게 망가져 버린 적은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지붕 아래에 일곱 식구 여덟 식구를 위해서 죽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어떠합니까? 일굼 식구 여덟 식구가 다 죽어도 나는 못 죽는다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부지런히 돈 벌어서 부모님께 효도 한 번 하려고 했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나면 하늘이 노랗죠. 그래서 부지런히 벌었던 돈도 형제에 나누어줘 버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다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녹음기 하나 갖다 놓고 우리 몰래 땅 사 놓은 것 있으면 빨리 말하고 죽어라. 지금 우리는 그런 처지에 살고 있습니다.

 전국의 교육계에도 세월이 흐르면 월급 타면 그만이고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네 운명이지 성의 있게 교육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될 대로 되라.

 기술교육을 하지 인성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이 과연 살 수 있는 길이 될까.

 불교사상을 통해서 볼 때, 컵 속에 물이 담겨져 있는데 그 물이 물일 때는 어느 그릇에 부어도 꼭 맞습니다. 이 물이 얼어 버릴 때는 맞는 그릇이 없습니다. 지금 완전히 얼어 버린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녹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잘 사는 길이 무엇이냐. 적정을 즐겨라. 고요를 즐겨라. 와글와글 들끓고 있는 인식이 비정상적인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적정과 고요를 즐길 수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고 봅니다. 들끓고 있는 한 자기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조국을 보고 국제를 보아야 합니다.

棄濁染하고 發女少明하라. 능엄경에 나오는 아주 짧은 말씀입니다. 우리 한 생각 가운데 탁한 생각을 버리고, 묘명을 발하라. 원각경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斷無明하여 顯佛隧하라. 어리석은 무명을 끊고 불성을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인이 말하고 있는 이 마음의 본성, 청정한 본성이라는 것은 닦아서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본래 청정한 본성, 닦을 필요조차 없는 본성을 아는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요, 알아야 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부처님만 믿어서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고 있는 내가 身, 口, 意 三業이 청정해야 된다는 지도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정마니보주, 우리 본성 본래의 성품이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무색투명한 것입니다. 오색찬란한 것이 아닙니다. 오색찬란한 것은 바깥 경계를 받아 들여서 빛나는 것이지 그 자체는 색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조스님은 전념 청정을 후렴청장이 부축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원래 아무것도 없는 것, 전혀 없는 것을 일러 우리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한 마음의 세계가 전념인 것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일으키면 후렴이 일어날 때에는 매우 정당 한 것입니다. 전념 청정을 후렴청장에 부촉할 때만 인식이 정당해지는 것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정을 즐겨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물질로 푸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의 안식을 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말씀으로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특집 IMF 시대와 불교의 대응
승가생활의 경제 / 이법산 스님/불교대학장

 

불교는 본래 무아(旅我), 무소유(無所有)가 원칙이다. 무아는 본래 ''나''라는 자체가 없다는 허무의 무가 아니라, 남과의 어떤 차별이 없이 더불어 사는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집착에 얽매이지 말라는 해탈의 의이라고 할 수 있다. 승가의 생활이란 본래 이러한 입장에서 대중과 더불어 수행하면서 살기 때문에 일정한 개인 소유가 없고 공유물에 대한 낭비가 없는 것이 원칙이다.

 인도.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동남방불교 승가의 생활은 2,500여년전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생활과 같은 무소유의 생활을 지금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아침에 탁발하여 낮12시 전까지 도끼공양을 하고, 옷 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 탁발을 하기 때문에 절에서는 전혀 취사를 하지 않으므로 생활비도 크게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북방계 불교 사원의 생활이란 추운 겨울이 있고, 대부분 사찰이 산중에 있기 때문에 생활습관이 남방불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승가의 생활도 자연히 시장 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찰의 경경책임자는 주지이며 사찰의 규모에 따라 여러 분야의 책임을 맡은 소임자들이 사찰의 운영과 승가 생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소임을 맡은 사람이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상황에 따라 임기와 소임이 바뀌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며 함께 도와 가면서 공동생활과 자기수행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승가의 생활은 부지런하고 절약하며 아껴쓰는 근검생활이 평상심미 되어 있다. 우선 절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스님들의 발우공양이 그렇다. 자기가 먹을 만큼 그릇에 담아서 먹기 때문에 음식찌꺼기가 전혀 없으며, 발우에 붙은 음식물을 숭늉으로 깨끗이 씻어 먹기 때문에 설가기 물까지 깨끗하다. 우선 음식을 남겨 버린다거나 음식 그릇을 세제로 씻을 것이 없으므로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의복도 그렇다. 스님들의 옷은 단순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시 하는 법복인 가사(袈裟)도 일명 분소의(糞宵衣)라는 의미도 떨어진 천 조작을 붙여 기워서 사용하는 뜻이다. 의복도 떨어지면 낱낱이 기워입는 관습이 생활화 되어 있으므로 의복비에 대한 부담도 없다.

 옛부터 스님들의 교육에서 빼놓지 않는 생활습관이 있다. 절은 명당자리에 있으며 산중이라서 나무가 많고 물도 풍부하다. 때문에 '나무를 아끼고 물을 함부로 쓰지 말라'를 철칙으로 생각하고 있다. 산에 아무리 나무가 많지만 함부로 배어서 연로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아무리 많이 흘러가는 물일지라도 마음대로 퍼서 쓰고 오염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풍부한 자원이라도 자연 속에서 스스로 재생산의 기능에 맞추어 아끼고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 자연을 훼손하고 낭비하여 드디어 자연환경이 상처를 입고 자원이 고갈되어 버린다면 어떤 생명이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요즈음 사찰의 주지나 종단의 소임을 맞아 수행교단과 사찰을 외호하는 스님들이 편의상 고급승용차를 이용하거나,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이 눈에 띠고 세인의 시선을 곱지 않게 하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의 승려들은 일정한 급료나 수입도 없이 근검절약의 내핍생활을 하고 있다.

 내핍생활은 부처님께서 출가 사문에서 탐착 을 갖지 말고 도를 닦는 최소한의 생활에 만족해야 할 것을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 1장에서 당부하셨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문이 되어 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세속의 온갖 재산을 버리고 남에게 빌어 얻는 것으로써 만족하라. 하루 한 끼만 먹고, 한 나무 밑에서 하루 이상 머물지 말라. 사람의 마음을 덮어 어리석게 하는 것은 애착과 탐욕이기 때문이다.''

 또, 『유교경(遺敎經)』에서 마지막으로 비구들에게 부탁하는 말도 탐착에 대한 걱정이었다. ''여러 비구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이 없어 근심 걱정이 없다.  ... 만약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한 듯 하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듯 하지만 사실은 부유하다.''

 승가의 생활이 편안해 보이는 까닭은 욕심과 애착이 적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혹 욕심과 아 만으로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는 자도 있지만, 많은 대부분의 사찰스님들은 가난하고 생활자체도 검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 얼굴 가득히 편안한 마음에서 내비치는 부유한 자비가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의 스님네는 가사와 더불어 세 가지의 옷과 발우 하나로 만족하였다고 하지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와의 기후 환경과 시대적 순응이 다르기 때문에 생활방식 또한 다르게 적응될 수밖에 없다.

 

 

 

특집2 IMF 시대와 불교의 대응
실직자를 위한 부처님 말씀 / 유필화 / 성균관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IMF시대는 사실 아직도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국민이 그 영향을 무척 많이 느끼고 있다. 생필품 값이 오르고, 주변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띠기 시작하며, 개인이고 기업이고 은행에서 돈을 꾸기 어렵다. 많은 가정에서 매달 소득이 줄고 있으며, 앞으로의 가계소득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다. 그래서 지금 당장 집안에 어느 정도 현금이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 마냥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IMF시대가 몰고 올 가장 큰 시련은 역시 대량실업사태일 것이다. 이제는 기업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앞으로는 도산 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정부나 은행이 나서서 구해주는 일이 극히 드물 것이다. 즉 기업은 이제 철저히 홀로 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무구조가 취약한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 엄청난 불황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근로자들을 그만두게 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적게는 100만명, 많게는 약 200만명의 실업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의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무려 50만~1,000만명의 우리 동포가 실업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겪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독일도 현재 엄청난 실업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에서는 현재 400만이 넘는 실업자가 있는데 경제성장률이 꽤 높은데도 이 숫자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최소한 이들의 생존권은 보장해주고 있다. 즉 오랫동안 일자리가 없어도 나라에서 어느 정도 살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업사태가 독일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제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지난 30여년간 고도성장을 해 온 덕분에 대량실업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는 노하우도 별로 없다. 더구나 정부가 지원해 줄 수 있는 실업수당도 충분치 않다. 그래서 우리의 근로자들은 직장을 잃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글자 그대로 생존권이 위협받는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범죄가 늘어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모든 국민들은 극심한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업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일인 것이다.

 이런 고달픈 시대의 실업자들에게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실까?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을 갖고 있을 그들이 품기 쉬운 심정은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다. 자기를 해고한 고용주, 무능력한 정부, 잘 사는 사람들, 무책임한 정치인들, 정리해고를 강요한 IMF 등등 원망의 대상은 끝이 없다. 그러나 남을 탓하는 것은 언제나 부질없는 일이다. 그것은 우선 자신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고,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실직이라는 이 엄연한 현실을 지극히 경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곧 이어서 이 시련을 기필코 극복하겠다는 큰 원을 세우라고 가르치실 것이다. 그 원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것을 이루려는 힘 , 즉 원력이 크기 때문에 도중에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그토록 간절한 원을 세우느냐 아니냐 이다. 원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차게 정진하는 사람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게 되어 있다. 부처님은 법화경의 방편품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그대들, 이제 모두 부처님께서

 근기에 따라 설법하심 알았으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고

 자신도 성불할 수 있음을 크게 기뻐하라.''

 

세계의 어떤 종교가 이렇게 커다란 희망과 기쁨을 주는가? 열심히 정진하면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실직의 어려움을 극복 못할 리 없다.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목표를 향하여 걸어 나가자. 가족들과 친구들이 따뜻한 박수를 보낼 것이다.

또한 자기도 모르게 지혜가 샘처럼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특집3 IMF 시대와 불교의 대응
축재와 보시/정승석 / 불교학부 교수

 

실직자가 속출하는 우리의 어려운 경제 난국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간 재산을 많이 모아두었던 사람들이 그 재산을 사회에 베풀기를 바라는 기대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 흔히 재벌이라고 불렸던 대기업의 주인들이 상재(上只才)가 될 때, 우리의 경제 난국이 자력으로 풀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연도속업경(演道 谷業經)에서 부처님은 재산을 활용하는 데 따라 부자는 세 부류로 불린다고 가르친다. 재물을 긁어모으면서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자를 하재(下財)라고 하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입지도 먹지도 않으며, 부모에게 공양하지도 않고 바른 삶을 지도하는 성자나 수행자에게 공양하지도 않는다. 이와는 달리 지성으로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고 손님 곽 권속을 정으로 돌보는 자를 중재(中財)라고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선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면서 뒷날의 복을 바라지는 않으나, 성자나 수행자를 공경하지는 않는다. 끝으로 부모에게 효손하고 규범을 잘 지키며, 가난한 자와 못난이를 돌보아 주고, 성자나 수행자를 공경하면서 재산을 베푸는 부자가 있다. 이런 사람들을 상재(上財)라고 하며, 이들은 세상에서 더 견줄 데가 없는 대장부가 된다.

 불교에서 대장부라는 말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담대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호칭이 아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정도를 지키는 무욕의 보살을 일컫는다. 우리의 경제 난국을 헤쳐 나가려면 이 길은 상제 또는 대장부가 많이 출현하여야 할 터인데, 부자만 이 상재나 대장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는 항상 그들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어려운 처지에서도 남에게 베푸는 이가 진정한 대장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절약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다 보니 절약이라는 명분 아래 인색함을 미덕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마저도 감도는 듯하다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절약하기도 하고 인색하게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축재가 누군가에게 베풀기 위한 대비일 때 그것은 미덕이 되는데, 흔히 절약을 미덕으로 권장하는 취지도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누군가에게 베푼다는 생각은 아예 떠올린 적도 없이 재산을 축적해 가는 자체에서 만족을 구하는 사람은 인색함을 스스로 미덕으로 치부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인색함을 악덕으로 취급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시대적 요청은 미덕으로서의 절약이지 결코 절약으로 위장된 인색함이 아니다. 축재 자체만을 위해 절약하는 사람은 하재(下財)일 뿐이다. 상제가 되기 위해 절약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미덕이다. 그리고 이 미덕은 누구나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상응부 경전의 말씀을 새겨들어 실천한다면, 그는 곧 상제요 대장부라고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궁핍한 중에도 베풀고,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면서도 베풀지 않는다. 궁핍한 중에 베푼 물건은 천금(千金)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여로(旅路)에서의 동반자처럼 가난한 가운레저 베푸는 그런 사람들은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서도 죽지 않는다. 이것이 영원한 법이다.''

 불교는 무탐과 무욕을 권하고 강조하지만, 범상한 사람들에게 재산과 축재의 가치마저 도외시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축재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고 남을 돕는 등의 선입을 쌓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보시의 전제로서 축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 정신을 일깨운다. 예를 들어 『증지부』(增支部) 경전에서 부처님은 부(富)의 축적에 대해 자상하게 가르친다. 이에 의하면 축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지향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축재의 효용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첫째,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하인과 일꾼과 남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둘째, 친구와 동료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셋째, 정치적 재난, 수재나 화재와 같은 자연적 재난, 도둑이나 전쟁에 의한 인위적 재난, 유산의 상속 등에 대비하기 위해,

넷째, 친족과 손님과 국가와 조상과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섯째, 인내와 겸손으로 진리를 성취한 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

이 가르침에 의하면, 바람직한 축재의 목적은 결국 타인에게 복리를 분배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향수(享受)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살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으로 강조하는 보시는 바로 이러한 축재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시는 축재의 목적을 실현하는 최고의 미덕이다.

보시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축재의 수단과 방법은 무엇이나 허용될 수 있다고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열심히 재산을 모아 재벌이라고 불리는 부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실천하는 보시란 그릇된 수단과 방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일쑤이다. 불교에서 권하는 축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윤리적 규범에 따라 재산의 획득을 추구해야 하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는 정당한 법에 따라 재산의 증대와 집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정당한 법에 따르는 축재란 부정한 수단을 배척하고서 이루어진 축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통하는 축재의 원칙이 될 것이지만, 정작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원칙에 대한 확고한 결심이다. ''불법(不法)을 행하여 생활하는 경우도 있고 법을 지켜 죽는 경우도 있다.

불법을 행하여 살아가기보다는 법을 지켜 죽는 편이 훌륭하다.''라고 하는 불제자들의 정신은 응당 경제적인 문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정각도량
전법을 수행으로 삼자 / 이도업 스님/경주캠퍼스 정각원장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공인(公入)이다. 공인은 지연(地緣)이나 학연(學織)은 물론 친.인척 등의 혈연(血緣)에서도 초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과 같은 다종교사회에서는 종교 연에서도 초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특정 종교를 가질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어서는 안된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에 대해 언행으로 표출하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타종교인에게 영향을 주거나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선거 유세에서 자기가 당선되면 청와대에서 찬송가 소리가 울려퍼지게 하겠노라고 공약하더니 지난 5년간 특정 종교에 대해 지나친 언행을 너무 자주 보여 왔다. 연두 기자회견에서는 모두 전도사가 되자고 주먹을 불끈 쥐었고, 법당과 성당과 교회가 나란히 있는데도 어느 날 군부대의 교회만을 방문해서 타종교의 성직자와 신행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그뿐인가. 청와대에서 매주 예배를 본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여성 장관을 임명함에 있어서 우연한 일인지 기독교인만을 선택했다. 그러더니 일요일 날로 정해져 있던 공무원의 시험 일자가 갑자기 변경되어 많은 사람에게 불편을 주기도 했다.

여러 곳의 법당이 방화로 전소되기도 했고, 군 법당 앞에 오물이 투척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종립대학 구내에 있는 만자(卍字) 모양의 조경림(造景林)을 괭이로 파헤치는 몰상식한 일도 발생 했다.

대통령의 언행이 직접 원인이 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간접원인이 되어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 불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자기완성을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 즉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것이 불자들의 본래의 사명임을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고정관념화된 수행에만 치우쳐 있지 않았었는가 반성해 봐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좌선이나 염불 또는 주력의 수행과 함께 전법(傳法)수행이 더욱 요구되는 때다.

불교의 이론은 2천 5백여 년 동안이나 검증되어 온 진리다.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공감되고 인정되어 온 가르침이다. 독선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이웃 중심적이다. 너는 너, 나는 나 식의 독존이 아니라 우주만 물이 거미줄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공존의 이론이다.

저 높은 곳에 신이 있고 여기에 인간이었고 저 밑에 반 생명체가 있다고 하는 차별의 세계가 아니라, 신이 있기에 자연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인간이 있고 인간이 있기에 신이 있다고 하는 절대 평등의 이론이다.

신과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지해서 공존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현상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치론적인 존엄성에서는 철저하게 평등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므로 해서 우리는 서로 포용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 이것이 불법이다. 이런 불법을 보다 많은 사람이 철저하게 인식할 때, 인류는 평화로워질 수 있고 반 생명체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전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전법을 수행으로 삼고 전법이 곧 이웃 사랑이며 하화중생이라는 신념에 살아야 한다. 좌선도 좋고 염불도 좋고 주력도 좋지만, 우리 모두는 지금 전법의 길을 떠나야 한다. 전법을 수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후 전법의 길을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고 하신 부축의 말씀을 지금 실행할 때다. 불법은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법 해야 한다고 하신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해야 할 때다.

 

 

 

불전의 설화
불교 설화의 세계성

이 만/불교문화대학 교수

 

자연의 섭리를 보면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문화와 예술 및 종교 등도 그것이 세계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 내용이 은연중에 열리 보급되어서 한 집단의 지도이념으로 되던가 아니면 윤리와 관습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여 보면 수 천년 전에 중국의 황족이거나 아니면 우리나라의 고구려 유목민들로까지 추정되는 일단의 사람들이 배랑 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을 적에 이를 건너서 북미대륙에 발을 디딘 것이 인디언들이라고 할진대,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미국의 대부분의 지명이 인디언들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면 그 가운데는 동양적인 개념의 것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또한 몽고인들만이 갖는 특성인 몽고반점이 이번에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원주민인 마오리족에게도 있으며, 더구나 그들은 우리와 같이 음력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도 하고, 여자들이 정월 대 보름달의 정기를 얻고자 하여 달맞이를 하는 우리 내의 풍습과 같은 것들이 저들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찍이 아시아에서 옮겨간 부족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부족에게 전해오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시가로 표현한 연가(懋歌)가 이미 우리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니,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으로 시작되는 ''영원한 법의 우정''으로 불려지는 노래 가락이 그것이다.

불교가 지금까지 25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그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일반화되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가지의 사실들에게 증명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흔히 불교는 아시아권에서만 신앙퇴고 유럽 쪽에는 거의 그 교의가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은 관련자료의 부족과 그 입수의 어려움 및 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불교인들의 열의가 없었을 뿐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서 13세기 전반에 독일에서 기사시인으로 활동했던 루돌프 푼 엡스의 대서사시 <바를람과 요사피트>의 내용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니, 우선 그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피트는 인도의 어느 작은 나라의 왕자로서 그 아버지는 아베니에르왕 이었다. 왕은 초기 로마의 황제들처럼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는데, 그는 정치는 잘 했지만 자기의 뒤를 이어서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어서 근심하던 차에 마침내 아들 하나를 본 것이 바로 요사 피트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점성가들이 말하기를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그는 예수교 신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왕은 평소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궁중에서만 놀도록 배려했었다.

그러나 왕자가 크면서 바깥 세상을 구경하고자 하므로 왕은 할 수 없이 이를 승낙했는데, 어느 날 왕자는 궁중에서는 보지 못했던 노인을 보고 시자에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허리가 굽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느냐''고 물으니까, 시자는, ''저 사람은 늙어서 그러합니다. 누구나 다 늙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왕자는 비탄에 빠졌던 것이며, 더 나아가서 병듦과 죽음 내지는 육도 윤회하는 인생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내 회의를 느껴서 탄식하기를, ''아, 슬프다. 사랑과 환락 다음엔 죽음과 비애가 있다니, 이 세상은 단지 공허에 불과하다. 내가 죽어 이 세상을 떠나면 누가 나를 생각해줄까.'' 하면서 궁전으로 돌아 왔다는 것이다.

궁전으로 돌아 온 그는 어떻게 이를 해결할지 몰라서 고통과 번민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에 이를 눈치 챈 부왕은 많은 미인과 기녀들로 하여금 왕자를 유혹해서 환락에 빠져들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러할수록 왕자의 생각은 더욱 복잡해져서 마침내 궁중 밖으로 나가 헤매다가 기독교의 은자이며 성자인 마를람을 만나서 그로부터 생도병사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 왕자도 역시 성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홍기삼, 불교문학의 이해, pp.111~113 참조]

이러한 내용들은 부처님의 탄생설화와 그의 성장과정 및 출가 성도에 관한 이야기로써 그가 어렸을 적에 부왕을 따라서 농경제에 갔다가 농부가 밭기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던 중에 그의 모습으로 일구어진 흙덩이 속에서 벌레들이 꿈틀거리자 이를 작은 새가 쪼아먹고, 또한 이 새는 매와 같이 보다 큰 새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보고 비탄에 빠졌던 일이며, 사문유관(四門遊蓼臥)시에 동쪽의 성문 밖에서는 허리가 굽은 노인을 보고, 남문에서는 고통에 시달리는 병자 등을 보고서 인생의 절망을 느꼈다는 내용과 함께 마침내 북문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고름 해결하려고 수도하는 수행승을 만나서 희망을 얻고 왕자도 출가하여 해탈인 이 되었던 사실들을 그대로 번안(蠟案)한 것이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서양 사람들이 이 가공의 성자를 실재했던 사람으로 여겨서 매년11월 27일을 요사 피트의 제일(祭日)로 정하고 그를 경배하고 있다는 것이며, 후대의 일부 작가들은 이 작품에 감동되어 <요사피트>라는 소설을 썼는가 하면, <십자가의 시련>이라는 희곡작품 등으로 이를 재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도 불교에 대한 관심과 그 실천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예가 1997년 10월에 발간된 타임지의 표제에 ''불교에 매료된 미국''이라는 기사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가 있고, 유럽에서는 1차 대전 중에 수년간 악귀와도 같이 동포끼리 싸웠던 자기들의 삶이 과연 그들이 가졌던 종교적인 이념과 부합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었을 때에, 마침 불교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무한한 관용과 인간주의를 그 근본정신으로 삼고 있는 종교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이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들에 관한 제반자료들을 발굴해서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하여 이를 보급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더 갖게 될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불교와 국문학
구결능엄경과 능엄경언해(I) / 김무봉/국어국문학과 교수

어느 시대 어떤 종교에서나 경전은 존숭(尊崇)의 대상이었다. 경전은 각 종교의 교시를 문자화한 것으로 각기 그 종교의 특징을 가름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경전의 문자는 종교인들에게는 교리전파의 방편으로 중시되었고, 언어학자들에게는 언어사 및 문자사 연구의 자산으로 주목 받아 왔다. 이런 이유로 경전의 문자는 종교학과 언어학 두 분야 모두에서 연구의 중요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 좋은 예가 유럽에서는 산스크리트(Sanskrit)경전이요, 우리나라에서는 구결불경(口訣佛經)과 경전언해류(經典諺解奧頁)이다. 전자가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갇혀있던 구주 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의 제한된 시야를 넓혀 주고 계통론에서 말하는 인구어족(印歐語族)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데 기여했다면, 후자, 특히 최근에 잇따라 발굴된 고려 및 선초(鮮初)의 구결 불경들은 당시의 불교는 물론, 종전까지 실체 파악이 어려웠던 전기 중세 국어의 모습을 전해 주는 데 기여한 바 크다. 또한 국문자 창제 이후에 간행된 불경언해류는 후기 중세국어 연구에서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국문자가 없던 시대에 이 땅에 유입된 불교는 유입의 단계에서 중국을 거쳤기 때문에 초기의 경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십 수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불교경전은 곧 한문경전'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당연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나 불교경전에 담긴 심오한 가르침에 접근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국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구결을 달아 불경을 읽어내는 이른바 '구결불경' 외 모습으로 나타났고, 국문자 창제 이후에는 한문경전을 우리 글로 번역한 언해불경(諺解佛經)의 형태로 나타났다. 즉 고려 및 선초에 활동했던 뜻있는 선지식(善知識)들은 한문경전을 우리말로 읽고 그 내용을 후학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문자가 없던 시기에는 경(經)의 구두(句讀)에 해당하는 곳에 구결을 달아 '구결불경'이라는 기록으로 남겼고, 우리 문자를 가지게 되면서부터는 언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한글 경전을 간행하게 된 것이다. 한문경전에서 구결경전으로 진전을 보았고, 거기에다 경전 언해라는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여 경전간행의 새 시대를 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 과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경전이 『능엄경』이다.

 8세기 초에 중국에 전해져 한문경전으로 조성된 『능엄경』은 고려조에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여말과 선초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혔던 듯 오늘날 전해지는 여말산초의 몇 안 되는 구결불경 중 『구결 능엄경』이 4본으로 가장 많다.

한글 창제 이후에는 미려(美麗)하기 짝이 없는 활자본 『능엄경언해, 乙亥字本』 (1461년) 10권의 간행이 있었고, 곧 이어 불경 간행만을 위해 설치된 간경도감에서 목판본 『능엄경언해』 (1462년) 10권이 인간(印刊)되었다. 목판본은 활자본의 오류를 바로 잡고 그 정밀성을 높여 정제된 모습으로 오늘에 전해지는 경전언해류의 규범이자 소중한 밥보 문화재이다.

 여기에서는 이렇듯 종교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구결 능엄경』 4종과 활자본 및 목판본 『능엄경언해』에 대해서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한문 『능엄경』에 구결로 토를 단 『구결 능엄경』은 현재 4종이 전해지는데 학계에서는 소장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나 수장처 또는 소장자의 이름을 판본 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네 책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은 안동의 박동섭(朴東燮)본이다. 이 책의 원문은 중국에서 편찬된 중국판이다. 권두의 급남(及南)이 찬(撰)한 서에 의해 1I27년(南宋元年)경에 인간 된 책으로 짐작된다. 구결은 기입토(記入吐)로 모두 묵서(墨書)이다. 약체자이며 순독구결이다. 남풍현(南豊鉉)교수는 현토 시기를 13세기 중엽으로 추정하였다.

같은 계통의 구결을 보이는 책으로 대구의 남권희(南權熙)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대구 본이 있다. 이 책은 안 동본인 중국판을 개간(改刊)한 것으로 13세기 경에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것이다. 현토(懸吐)는 진에서 권6까지는 주서(朱書)의 기입토이고, 권7에서 권10까지는 묵서의 기입토이다. 특기할 것은 권1의 첫 장부터 13장까지는 주서 현도 위에 묵서의 현토를 덮어씌운 점이다. 주서한 원래의 토는 13세기 말엽의 것이고, 가필한 토는 조선 중기 이후에 현 토한 구결로 생각된다.

앞의 두 책보다 조금 후대의 구결이 기입된 또 다른 두 책이 있다. 그 하나가 1987년에 경주 기림사(祇林寺) 비로자나불 복장 품의 하나로 발굴된 『구결 능엄경』이다. 이 책은 권2.3.4만이 현재 전하는데 원문은 안 동본인 중국판의 복각본으로 보인다. l4세기에 간행된 듯하며 구결도 당시에 기입한 기입토인데, 몇몇 장에서 원도와 별도로 기입한 가필토를 가지고 있다. 가필로는 후대에 기입한 것이다.

끝으로 서울의 송성문(宋成文)본이 있다.

이 책은 1相1년에 간행된 것으로 권1에서 권10까지 묵서의 기입토기 있다. 15세기 구결의 특징을 보여주나 고려시대 구결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

이상의 『구결 능엄경z 4종은 모두 순독구결약체자가 현토된 경전들이다. 주서 또는 묵서의 기입토는 국문자 창제 이전의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한국어 연구와 당시의 불교를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국문자 창제 이전의 우리 국어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국어사 학자들은 고대 및 전기 중세국어 시기 우리 국어를 알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은 몇 안 되는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거나 인명, 지명, 관명 등에 남아 있는 옛 말의 잔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재고 등을 통해 논증해 내는 매우 지난한 작업이었다. 거기에 비한다면 구결 불경에 담겨 있는 국어사 자료들은 그 양으로 보거나 표기 방법으로 볼 때 이전의 자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귀중한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도 경전의 문자가 가지는 가치가 어떠한지 새살 일깨우는 바 크다.

 다음에는 국문자 창제 이후의 경전인 『능엄경언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법화경 공부
상불경 보살 / 안중철/서울캠퍼스 법사

 

"나는 그대들을 매우 공경하고 감히 경멸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그대들은 다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 것이기 때문이니라."

<<법화경>>(상불경 보살품)

 

불교의 정의는 무엇일까. 어느 수행자가 물었다. ''불교(부처)는 무엇입니까'' 운문(雲門)선사가 답하였다. ''마른 똥막대기(간시궐, 幹屎擲)니라.'' 또,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 백난천(白欒天)이 조과(窩稟)선사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더니 불교란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정의는 다양하고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는 것이며, ''악한일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한다.''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늘과 땅 사이처럼 현격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불교야말로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번뇌와 미망을 극복하고 마침내 부처님과 동일한 지위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타력불교(他力佛敎)가 아닌 자력(自力)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수행의 힘과 지혜의 힘에 의해서 누구나 부처뿐 아니라 공자나 천주 예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500여 년 전 부처님 당시에도 오늘날 어느 종교와 유사한 교가 있었으니 브라흐마니즘(brarirnamsrn)인 범천교(梵天敎)라는 종교였다. 이 교에 의하면 우주만 물은 범천이라는 신(神)이 만들어냈고, 큰 홍수나 화재 같은 재앙이 일어나는 것도 범천의 뜻이니, 인간은 오직 범천에 철저히 복종하고 따르면서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석가여래께서 6년 동안 설산(雪山)에서 수도하여 오도( 道)를 하고 보니 거지도 소금을 먹으면 물이 마시고 싶고 왕도 소금을 먹으면 물이 마시고 싶은 것처럼, 일체중생의 마음자리나 불성(佛性)자리도 본래는 하나이고 평등하다는 진리를 증득하신 것이다.

원효스님께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心生@ 種種法生 心滅@ 種種法滅)''고 하여 모든 것을 마음의 조화라 규정하고 입당구법(入唐求法)의 길에서 발길을 돌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무슨 있지도 않은 신(神)을 만들어 놓고 인간은 그의 종이 되어 매달려 살아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불교야말로 일체가 평등하여 주종관계가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구애받을 일 없이 자기 스스로 멋과 장단에 따라 살아가는 종교인 것이다.

이 품(品)에서는 석가여래 부처님의 전신인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의 전 법과수행에 관한 행적이 설해지는 데,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음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는 것과 부처를 이루는 성품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만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보살의 도를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점이 교설된다.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만 있으면 합장하고 예배하며, ''나는 그대를 존경한다. 결코 그대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대는 보살도를 행하여 미래에 반드시 부처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로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내고 욕을 하며 심지어는 돌과 막대기로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보살은 그런 사람을 피해가면서 역시 큰소리로 같은 말을 외쳤을 뿐만 아니라 법화경을 수지, 독송, 해설, 서사 하는 전법활동에 진력한다. 이 보살에게 갖가지 박해를 하던 사람들도 마침내 자기들에게 불성을 자각게 하려는 이 보살의 참뜻을 깨닫게 되고 자기들이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후 그를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법화경에는 불성(佛性)이란 말이 구체적으로 사용된 곳이 없다. 그러나 세친(世親)은 <법화경론>에서 ''나는 당신을 경멸하지 않는다.''라는 말 속에 '중생 모두에게 불심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여 불상사상에 의해 법화경을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의 불성에 관한 것이 분명하게 표출된 것은 이 경 신해 품의 장자궁자(長者窮者)의 비유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가난하고 비굴하여 인생에 대한 자신을 상실한 한 평범한 인간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 즉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불성을 자각하여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상불경보살품에서는 결국 상불경보살이 일체중생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는데 대한 확신을 갖고 모든 사람이 그 불성 때문에 존경하고 예배하였으며, 그러한 행동을 바탕으로 전법포교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불성을 자각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나아가 불석신명(不惜身命)하는 자세로 그러한 수행을 집중적으로 행함으로써 그 공덕으로 성불하게 된다고 설한다.

불교의 요(要)는 일체중생이 모두 지니고 있는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로서의 불성을 스스로 발득(發得)하는 데 있으며, 이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끊임없이 수행하고 전법 포교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불자탐방
이 두남 보살님 / 편집부

 

신혼여행을 갈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했던 이 두나 보살님(동국대학교 경주의료원 직원식당)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갓 시집을 온 새댁이었을 때다. 당시 시댁의 시어른도 폐결핵으로 고생을 하실 때였으므로 모든 일을 부처님 법에 의지하며 계셨던 신심 돈독한 시어머니의 심정은 더욱 간절했던 터라 시집 온 며느리를 백석 암에서 기도를 시키셨다. 부처님 전에 기도 올리면 아니 되는 일이 없다던 그 어른의 권유도 인해 불법(佛法) 속에서 몸 또한 건강하게 추스를 수 있었다. 그 덕분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지 25여 년이 되는 지금은 비록 불교 교리의 이론적인 지식은 남다르지 않아도 기도만큼은 몸에 배어 버린 입상 사라 마음과 몸을 따로 놓아본 적이 없다.

''머리 속에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스님들의 법문을 한 번씩 듣게 되면 저의 가슴을 치는 종소리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저에게 꼭 맞는 말씀만 하시는지 놀랄 때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경전의 말씀을 물어 보았을 때 했던 이 두나 보살님의 대답이었다.

법문을 들을 때면 시시때때로 자신을 울리는 종소리와 같다고 한다. 시어머니 살아 다니시던 백석임은 일년에 서너 차례 다녀와도 친정처럼 편안한 곳이고, 7년째 다니는 대인 사는 신심바쳐 기도하며 살기로 작정한 절이다.

아무래도 시부모님의 49재를 지낸 곳이라 애정이 남다르다.

불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뻔한 살림살이라도 마음으로 새긴 불사에는 적은 보시라도 성심껏 마음을 더해 보았다고 한다. 식당 일로 물마를 틈이 없는 손으로 모은 적금을 기꺼이 전방불사에 대훙전 불사에 종각 불사에 남몰래 보시하는 밀행(密行)이야말로 적잖게 놀라움을 준다.

''적지만 필요한 곳마다 작은 힘이라도 되어 준다면 저는 기쁘겠습니다. 살림이 넉넉하다면 불사가 있는 곳마다 척척 나서 보겠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까 조금밖에 못합니다. 하지만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오직 부처님께 바치는 제 마음이니까 조금이라도 보태 보려고 합니다.''

병원 근무는 옛 년 7월이면 만 7년이 된다. 남편 최 병구(동국대 총무과)선생과 함께 동국대와 인연을 맺은 것도 보살님의 의료원과 인연을 맺은 것 또한 모두가 부처님의 기피라 기꺼이 생각한다.

''남들이 뭐라 해도 저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은 기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을 기도하며 살고 싶고 다시 태어나도 부처님 전에서 정진하고 싶습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물었을 때, ''특별히 정해 놓은 분은 없습니다. 그저 저에게는 모두가 존경할 분들이고, 베푸는 것 없이 남들의 칭찬을 들으면 제가 오히려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일반식당에 가시면 비린내 나는 음식을 드시지 못해 굶다시피 하시는 병원 법사님을 위해 틈틈이 법사님 입맛에 맞게 3년여 정성껏 반찬을 마련해 보았다. 그런 안면으로 얼굴을 익힌 탓인지 법당에 참배하러 가면 법사님은 따뜻한 말씀 한 마디 차 한잔이라도 가벼이 넘기시는 일이 없다.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도량은 남해 보리암에서의 일천 배 철야기도였다. 그때처럼 환 회심이 일어난 곳이 없었으니 보살님 가시는 곳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가 편만해 있음을 느낀다.

산 깊고 물 맑은 곳, 어느 한 곳 뼈 속 깊이 신심을 내고 싶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남해 보리암 만큼은 기도의 열정이 사무친 곳이기도 하다.

월산스님께 받았던 '보덕월' 이라는 법명은 호적에 오른 속명보다 오히려 더 많이 불리어지는 이름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열 일 마다하고 절을 찾는 보살님의 행차에는 언제나 남편의 배웅과 마중이 있어서 남편 걱정, 집안 일 걱정으로 철야기도나 성지순례를 불안하게 해 본적은 없어 또한 부처님 전에 감사할 일이라 한다. 부처님 일이라면 거역지 않아 주었던 남편이 고마울 따름이고, 업어 주어도 오히려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남편이라 자랑한다.

''수험생이 없었던 해라 작년 한 해는 마음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바람은 없었습니다만 작은 소망이라면 오로지 집안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대학 졸업반이 되는 딸아이가 좋은 직장 마련이 끝나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24시간 근무를 하고 나서라도 기도가 있으면 절에 간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사무치는 신심이 보살님의 기도의 힘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보살님은 관세음보살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기도의 힘으로 삽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주워진 일에 욕심 없음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그야말로 부처님 법대로 사는 마음의 부자 큰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종소리는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따라서 종소리를 듣고 법문을 듣는 자는 오래도록 생사의 고해를 넘어 부처님의 경지에 오를 수가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두루 평등해서 따로 계신 곳이 없고, 자신이 바로 큰 부처임을 알게 하는 진리를 두고 가셨다. 그 진리를 거울 삼아 참회하게 하는 우리들의 삶이 되어 이두남 보살님의 내색지 않는 실천 행에 더불어 부처님의 법문 밖에서 서성이는 많은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불법에 귀의하길 바란다.

 

 

 

불심의 창
나와 부처님의 만남 / 연기경/법과대 학장

 

봄은 왔지만 우리 서민들의 마음은 아직도 얼어붙어 있다. IMF의 한파 때문이다. 주변의 친지와 이웃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곳곳에서 구조조정과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땀과 눈물의 고통을 요구하고 있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쳐 나가야 하는가? 역시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로서로 등불이 되어 아픔을 함께 하는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울수록 나는 늘 부처님과의 큰 인연을 생각한다. 창창한 남산기슭의 농악에서 70년대 젊은 학창시절을 보내고, 아직도 늘 부처님 품안에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큰 인연인가.

지하철에서 내려 동악을 올라와 교문을 들어서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 진다. 캠퍼스 전체가 법당으로 느껴진다.

오늘따라 유심히 부처님과 인연을 생각하게 된다. 입학식을 마친 새내기들의 밝은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나의 학창시절을 되새겨 보고 싶다.

내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의 꿈을 키우며 보낸 곳은 충북 괴산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부모님은 아들 셋, 딸 둘을 두었으나 질병과 전쟁으로 아들만 셋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부모님이 찾아간 곳이 우리 마을에서 세 시간 정도 걸어서 가야하는 깊은 산중의 조그마한 암자였다. 여기서 100일 간 기도와 정진을 계속하고 내려와서 나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후에 다시 아들 둘을 얻게 되어 삼 형제가 되었으니 원상회복을 한 셈이다. 지금도 그 절은 명산에 위치한 아주 효험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태어나기 전부터 부처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살이 채 안되어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때에도 그 암자까지 밤새도록 어머니의 등에 업혀가서 불공을 드리고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시골의 의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자 부처님의 영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지극한 신앙심이 가장 중요했다고 본다.

내가 불교에 대해서 깊은 회의와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은 역시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부처님의 깊은 인연 따라 많은 대학 중에서 우리 동악의 언덕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2학년때 '유신'이라는 정치적 변혁기를 맞이하여 그때까지 열심히 하던 고시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인생항로를 찾았다. 정치권력이 삼권통합으로 새로운 독재시대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법조인이 되더라도 소신 있는 판결은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진로에 대한 방황이 시작된 셈이다. 우선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부터 읽기로 하였다. 몇 개월을 이렇게 보내면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때부터 '대학생 성경읽기'라는 서클에서 성경공부도 열심히 해 보았다.

그러나 '천지 창조론'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고, 결국 불교경전을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양과목으로 공부했던 「불교학 개론」과 「불교 문화사」 교과서를 몇 번이고 줄을 쳐가며 읽었다. 김동화박사의 「불교학 개론」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당시 막소 베버라는 독일의 유명한 사회과학자의 비교종교학에 관한 책을 읽고 불교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서양에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정신과 사상 덕분이었다고 서술하였다.

동양의 불교, 유교, 도교 등은 정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형성될 수 없었고, 농경사회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불교가 마치 국교처교 되어있는 일본의 자본주의의 실체를 보면서 이 베버의 결론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불교의 사상과 이념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지적(知的)욕구가 나의 가슴을 태웠다.

불교의 경제사상 . 정치사상에 관하여 더욱 공부하고 싶었다. 그 당시의 논문 몇 편을 읽어보았으나,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했다. 불교학생회에 들어가서 토론도 해 보았다. 캠퍼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불교 대학스님들도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졌던 많은 의문들을 풀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하게 되어, 좀더 불교를 공부하고 싶은 욕망에서 불교대학에 학사편입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는 철학과로 정했다가, 한 보광스님(현재 동국대 선학과 교수)의 권유로 불교학과를 최종적으로 택하게 되었다.

내가 법학과 다닐 때 보광 스님은 불교학과에 다니시며, 장학생화 회장을 맡으셨고, 내가 부회장이 되도록 추천하여 함께 일하면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스님을 뵙고 불교의 사상과 실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계속 불교학을 공부하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채 법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동국의 큰 법당으로 다시 돌아와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부처님 품안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부처님의 사상과 정신이 이 사회와 역사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를 늘 생각하면서 이 땅이 불교 정토가 되길 기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서산책
밀린다팡하 / 김호성/불교학부 교수

 

15대 대통령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불교(혹은 스님)와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한 의문에 대하여 이제 <밀린다팡하>는 ''당당하라''고 말하고 있다. 밀린다 왕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비구그의 태도가 매우 당당하기 때문이다.

''존자여, 나와 다시 대론하시겠습니까?''

''대왕이여, 만일 현자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나는 그대와 대론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왕자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그대와 대론하지 않겠습니다.''

''존자여, 현자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대체로 현자의 대론에 있어서는 문제가 해명되고, 비판받고, 수정받고, 반박받지만, 그것으로 성내는 일은 없습니다. 대왕이여, 현자는 진정 이렇게 대론합니다.''

''또 왕자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왕자들은 대개 대론에 있어서는 한가지 일을 주장하고, 한 가지 점만을 밀고 나가며, 만일 그 일과 그 점에 따르지 않으면 '이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한 벌을 주어라'고 명령합니다. 대왕이여, 왕자는 바로 이렇게 명령합니다.

"대왕이여, 왕자는 바로 이렇게 대론합니다."

''좋습니다. 나는 왕자로서가 아니라 현자로서 대론하겠습니다. 손자께서는 마치 비구나 사이나 신도나 정원사와 대론하는 것처럼 마음 놓고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대론해 주십시오. 조금도 염려 마시길 바랍니다.''

''대왕이여, 좋습니다.''

왕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고, 진리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불꽃 튀는 공격과 수비가 반복된다. 밀린다 왕의 매서운 칼날을 나가세나 비구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막아내는 형국이다. 그러나 밀린다 왕 역시 세속의 범상한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질문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교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만 거침없이 파고든다, 예컨대 윤회한다면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윤회의 주체가 없이(無我) 어떻게 윤회는 가능한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들어보자. 나가세나 존지는 비유로써 이해시키려 시도한다.

''여기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은 각각 다르겠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은 꼭 이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지속(순환)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相륙)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으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밀린다팡하>는 바로 이 같은 형식의 대화로 구성된 일종의 교리 문답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약 100가지나 되는 비유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보다 쉽게 다가서도록 한다.

사실, <밀린다팡하>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으로 한역(漢譯)되어 있지만 경전이라 볼 수는 없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문답서(問答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에 이 불서의 가치가 숨어있다. 밀린다 왕이 제기하는 질문은 바로 오늘의 현대인이 제기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가세나 존지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인용한 책은 서경수 교수가 옮기고, 동국역경원에서 문고본으로 펴낸 것이다.

 

 

 

신행상담
겁과 찰나 / 장계환 스님/불교학부 교수

 

내가 동국대학에 입학 된 것을 제일 먼저 기뻐해 주신 분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옛말에 세월이 찰나같다더니 참으로 빠르기도 하구나! 네가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구니 말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또 혼잣말로 "내가 성불하려면 아직 몇 겁이나 더 닦아야 할지"고 하실 때도 있습니다.

겁은 불교에서 아주 긴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얼마나 긴 시간이며, 또한 찰나와는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이 상 미)

 

집안 식구들이 모두 불자인 것 같아서 반갑습니다. 불교를 통하여 더욱 화목한 가정이 꾸며지도록 빌겠습니다. 할머니께서 앞으로 몇 겁이나 더 수행하여야 성불한다고 하시니까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겁(劫)이란 범어 kalpa의 음사(昔寫)로써 겁파(劫波)라고도 하는데, 번역하면 긴 시간(大時)이라는 의미입니다. 인도에서는 가장 긴 시간을 말할 때 바로 '겁'이라 표현합니다. 말하자면 무한하게 느껴지는 오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잡아함경 雜阿含經>을 보면 반석겁(磐石劫)과 개자겁(芥子劫)의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반석 겁이란 사방으로 크기가 일유순(一由旬=40里에 해당)이나 되는 큰 바위를 백년에 한 번씩 부드러운 비단 천으로 살짝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일겁(一劫)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자 겁은 마찬가지로 사방 일 유순이나 되는 큰 성(城)에다가 개자씨를 가득 채워놓고서 백년에 한 알씩을 꺼내어 그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를 가리켜 개자겁이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 그리고 시간개념으로서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겁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이렇게 긴 시간을 설정하고 있는가 하면 질문한 것처럼 '찰나'라는 극히 짧은 시간에 대한 개념도 있습니다.

찰나(刹那)는 범어 ksana의 음사로, 염(念). 염경(念頃)이라 번역됩니다.

즉 극히 짧은 시간, 최소의 시간개념을 말하는데 그 단위가 어느 정도인가 <대비바사론 大毘婆t少論>을 인용하여 설명드린다면 일찰나(一刹那)는 현재시간으로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설(異訛)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짧은 찰나의 순간순간 모든 존재는 생멸(生滅)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찰나 생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겁과 같이 영원에 가까운 긴 시간과 함께, 또한 찰나와 같은 극히 짧은 시간개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진리는 영원하다(겁) 하더라도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즉 인연의 순간순간)은 얼마나 짧은(찰나) 것인가를 시간개념으로서 일깨워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주어진 삶의 무상성(無常性)과 진리의 영원성(永遠'注)을 다함께 마음에 새겨서 더욱 열심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람의 진수
화엄종찰, 화엄사 / 유문용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문(經爻) 층에 가장 방대하고 오묘한 진리가 담긴 경문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불경의 차원을 넘어서 철학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어서 화엄학(華嚴學)이라고도 한다. 화엄경 중에서도 80화엄, 60화엄, 40화엄이 있지만 80권으로 된 화엄경이 완본이라고 한다.

이 방대한 화엄의 경문을 돌에 새겨서 장육전의 사방 벽에 붙여 올렸다고 한다.

이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 서기 544년에 인도스님인 연기조사(織起祖師)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축국(天竺國 : 인도)에서 어머니와 같이 지리산에 와서 암자를 짓고 주석(住錫)하면서 화엄학을 강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지리산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백두산의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내려 와 남해에서 끝을 맺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려졌다고 한다. 이 산은 우리나라 오악(五岳)중에 하나인데 신라시대에는 삼산(三山)과 오악의 신산(神山)이 있어서 남 지리산, 동 토함산, 북 태백산, 서 계룡산, 중 삼각산을 삼고 있다.

조선조 왕궁 정전에 용상 뒤에 있는 병풍에 「일월오악병(日月五岳幹)」이 있는 것도 나라의 5방위 신과 음양의 신의 옹위를 받으면서 국왕이 있다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 남단의 선산에 부처님의 대오각성(大悟覺成)한 화엄사상이 깃들여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악의 신령스런 산에는 원래부터 불법을 수호하는 보살님들이 주처(住處)한다고 믿었는데 이 지리산 일대에는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조처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지리산 일대에는 화엄사를 비롯해서 천은사, 쌍계사, 연곡사, 법계사, 대원사, 실상사 등이 있고 수많은 암자들이 있다.

이 화엄사가 대 가람으로 총람을 이루게 되는 것은 문무왕 10년 670년에 당나라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해동 화엄의 조사로 일컬어지는 의상대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신라 말엽 정강왕 때에 도선국사(滋詵國師)에 의해서 크게 확장되어 장육전(丈六殿)에 화엄 석경을 새겨서 쌓아 올렸다고 한다.

고려조에 오면서 고려 광종 950년에 홍경선사(洪慶禪師) 그리고 문종 때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인종 때에 정인왕사(定仁王師), 충숙왕 때에 조형왕사(組衡王師)에 의해서 중건과 중창을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왕실의 후원으로 이루어진다.

고려조(高麗朝)까지만 해도 불교정책이 국교로 받아질 만큼 되었지만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숭유배불정책(樂儒排佛政策)으로 불교가 탄압을 받았다고 하지만 왕실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당시 화엄 부국세계의 요람이었던 화엄사에서 왕이 직접 참관하는 법석(法席)이 많은 예를 보이고 있고 전국의 중요 사찰에는 끊임없는 중수와 중창이 왕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우리나라의 문화재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되지만 이 화엄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신라시대로부터 호국불교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전통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어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큰스님도 계시지만 특히 이 화엄사에 주석 하시던 윤눌(潤酌)스님과 설홍(雪泓) 스님도 승군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곰을 세운 분들이다. 일본군들이 이에 분풀이로 화엄사를 초토화 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애석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화엄경의 석경이 장육전이 소실되면서 모두 없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몇 편의 석경의 파편들이 절에 일부가 보관되어 있고 몇 군데에 산재해 있다고 하여 그 실상을 알아보는 정도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선조 대왕은 승군의 공로를 치하하는 어필 서책을 하사하였는데 절 안에 보관이 되어 있고 인조 8년 1630년에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서 본격적인 중창사업을 하게 된다. 그 이후로 벽암대사의 문도인 계파대사(桂坡大師)가 숙종 25년 1699년에 대 중창 불사가 이루어지는데 거대했던 장육전 자리에 각황전을 중창하게 된다.

당초 장육전은 3층 건물로 서서 계시는 입불이 모셔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이 당시에 경제 여건으로 미루어 2층집으로 짓게 된다. 이 때에 숙종은 「각황전 : 覺皇殿」이라는 액호를 하사하고 화엄사를 승격시켜「선교양종대가람 : 禪敎兩宗大伽藍」 이라고 칭하게 했던 것이다. 고려 때에 보조국사가 선종과 교종의 난립을 통합한 이래 본격적인 선교 양종의 대 본찰이 생긴 것이다.

이 화엄사에는 국보 제 12호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을 비롯해서 국보 3점, 보물이 5점 그리고 천연기념물 38호인 「화엄사 올벚나무」, 전남지정문화재 2점 해서 모두 11점의 국가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화엄사에서 현존하는 목조 건조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는 건물인 대웅전은 보물 29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인조 8년 1630년 벽암대사에 의해서 중수된 건물이다. 대웅전의 현판은 선조대왕의 8번째 왕자인 의창군(義昌君)의 글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화엄사에서 가장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각황전이 된다.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2층 건물로 되어 있다. 그나마 이 2층의 법당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 자리는 정육전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주존 법당이 된다고 보겠다. 부처님의 몸을 말하기를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한다. 1장을 대충 사람 한 키로 보니까 대충 상상이 갈 만하다. 이만큼 거대한 부처님을 모시자면 적어도 3층 건물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장육전이라고 하면 의례히 3층 건물을 상상하게 된다. 금산사 미륵전의 경우 법당 안의 천장높이가 12미터에 가깝게 되어 미륵 대불이 서 계시는 것이다. 그런 집이 보통 장육전으로 보면 된다. 신라시대나 백제 시대에 이런 장육전에 속하는 3층 건물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경제 여건 때문에 2층 건물이나 2층 건물로 복원된 경우가 많다. 경주 다보탑이나 석가탑이 10.8미터 정도 되니까 미륵전 안에 다보탑이 들어서고도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단한 건물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에 한 전이 있는데 4벽에 흙을 바르지 않고 화엄경을 새겼으나 오래되어서 무너지고 글이 마모되어서 읽을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

이 각황전을 중건 할 때의 설화가 있다.

당시 계파대사는 장육전을 새로 복원할 대원(大願)을 세우기 위해서 1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스님들이 기도를 하는데 스님은 기도를 하는 스님들의 공양주로 나서고 기도에는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00일 기도가 끝나는 날 모든 스님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중건의 화주승을 뽑는데 시험을 한다고 하면서 물에 솥을 담근 후에 밀가루에 손을 넣어서 붇지 않는 스님으로 한다고 했다고 한다. 100일 기도를 드렸던 모든 스님이 모두 손에 밀가루가 묻는데 기도를 드리지 않던 계파스님만 붇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주승이 되었는데 노인이 중창 불사의 시주를 받으러 길을 떠나되 제일 처음에 만 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 노인이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한다. 길을 떠나는데, 그 아랫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노파를 만나게 되어서 난감하였지만 문수보살의 말대로 간청을 했다고 한다. 그 노파도 난감하던 차에 결단을 내리기를 "내가 이승에서는 도울 길이 없습니다. 이승을 버리고 내세에 왕실에 태어나서 장육전 중창 불사를 도울 것입니다' 하면서 인근의 못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계파대사는 일이 틀렸구나 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한양에 들어섰는데 마침 궁궐을 나서니 노닐던 공주를 만났는데 이 공주가 처음 보는 대사를 오래 전부터 친숙한 사이처럼 반색을 했다고 한다. 이 공주는 태어난 이후로 손을 펴지 않고 있었는데 대사가 손을 만지니까 손이 펴지면서 그 안에 장육전이라는 글이 써져 있더라고 한다. 얼마 전에 못에 몸을 던진 노파가 왕실에 공주로 환생을 해서 장욕전을 순장하는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숙종 대왕은 건물이 완성되자 대왕을 깨우쳐 보전을 짓게 했다고 해서 각황전이라는 사액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단편소설 연재
아름다운 폭등(최종회) / 이상우

 

그녀의 말문이 열린 것 같아 슬며시 내가 끼어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털어버려야 할 응어리의 핵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핵심을 희석시켜 버리는 작업을 도와준다는 야릇한 의무감과 나의 호기심이 섞인 질문이었다. 그 물음에 대해서 그녀는 한 박자 정도 사이를 두는 듯하더니 바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좋아하던 오빠가 있었어요. 그런데 가버렸어요. 저를 버린거예요,''

''요새는 오빠하고 연애하는가보지.''

스님의 심드렁한 말투가 끼어들었다.

''애인 사이에 오빠라고 부르는가 봐요.''

해설을 붙이듯 스님의 심드렁함을 달래며 사족을 붙였다.

''왜 가버렸나요?''

''제가 싫어진 거겠지요.''

''왜 싫어졌나요?''

나는 심문을 하듯 하나하나 말꼬리를 물었다.

''현실감이 없다나요. 그건 핑계고 그냥 싫어진 거겠지요.''

''그렇다고 죽을 궁리를 비 그것도 쥐새끼나 먹는 약을 먹고,.. 인간이!''

''제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한 때문이예요.''

''아가씨를 천연기념물로 보존해야겠군. 그깟 실연했다고 죽겠다고 설치는 위인이 요즘도 있다니...''

진담인지 농담인지 애매한 말투로 스님이 빈정댔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런 순애보가 요즘 세상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처사의 눈빛도 이제 조금 맑아졌네 그려. 흠뻑 젖어서 처음 들어설 땐 악취가 눈에서 번들거리드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눈빛은 흐려지는 법인데 무어 그리 미워하고 할퀼 것이 많은지.....''

나는 음식을 훔쳐 먹다가 들킨 것처럼 움찔했다, 급히 숨겨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뒤를 추스렸다.

''빗줄기 소리가 가늘어졌네. 보게, 흐리고 맑은 것이 오고 가는 것이야. 아침 쫌이면 햇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만 자세, 처사는 나와 함께 자고 아가씨는 옆방으로 건너가 쉬어요.''

''스님, 죄송하지만 저도 벽에라도 기댄채 여기 있게 해주세요. 무서워서요.''

''할 수 없지, 함께 밤을 새는 수밖에.''

정신보다는 육체의 지배력이 강한가보다, 날이 훤해질 때까지 나는 늦잠을 잤다. 방문을 열자 눈이 부셨다. 과연 오랜만에 햇살이 파란 나뭇잎 위에 반들거렸다. 멀리 보이는 숲은 눈을 뿌린 듯 희부옇게 보였다. 스님은 새옷을 갈아입고 며칠 째 마당에 떨어져 쌓인 젖은 나뭇잎을 쓸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제 일어나셨구먼, 처녀는 갔네.''

''예에?''

''밤을 꼬박 새웠는지 붐 해지자 부스럭거리더니 법당 청소를 하더군. 같이 청소를 했어.''

''그랬군요. 큰길까지 나가면 여섯 시 반에 첫 차가 있다고 대답해 줬더니 가겠다고 하더군. 나는 고무신 한 켤레와 막 입는 셔츠 하나를 잃었어. 처녀가 달라고 하드먼.''

''괜찮을까요?''

''뭐가?''

''글쎄요. 왠지 불안해보여서.''

''또 못난 음모를 꾸미면 다시 한 번 더 난동을 부리지뭐.''

''에이, 스님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언젠가는 연락한다고 했어. 잘 될꺼야. 아수라장이 되도록 부처님이 참고 견디셨는데 무슨 걱정을 해. 처사는 어쩔 것인고? 머물러도 좋고, 가도 좋고..''

''글쎄요. 스님과 함께 며칠 지내고도 싶고 떠나고도 싶고,..''

''그렇겠지. 지고 온 보따리가 문제지, 오고 가는 것이야 별 것 아니지. 또 지고 갈거야? 버리고 갈거야?''

''가지고 가겠습니다.''

''어이커 밤새 부쩍 크셨네그려. 늙은 중이 청소부도 아닌데 짐짝만 떠맡기고 가버리면 도리가 아니지. 똥이든 된장이든 제 몫은 자기가 책임져야제. 끼니 챙기기에도 힘겨운 중에게 근심 보따리만 하나씩 안기고 가서야 쓰겠는가.''

''예, 잘 알겠습니다. 하루 밤이 천 년보다 길었습니다.''

''어이쿠! 그 양반 계속 듬직한 말만 하네.''

 

그 후 삼 년이란 세월은 나로 하여금 단정한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으로 만들었다. 소득세과외 일이란 수북이 쌓인 자료 더미 속에 묻혀 사는 것이 전부였다. 나뭇잎 위에 반들거리는 햇살이나 여름밤에 무모하게 피어 널려있는 달맞이꽃들에 대한 기억은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가 까맣게 녹아버렸다.

그러한 일상을 가끔 축여주는 것이 법택 스님의 전화 목소리였다. 그날도 세금을 은폐하려는 어느 사업가와 서류를 앞에 놓고 실랑이를 하던 중이었다.

''김 주임님! 전화 받으세요.''

얼굴도 들지 않은 여직원의 매운 음성이 들려왔다.

''김 선생! 잘 지내지요? 나요.''

''예예, 스님 안녕하세요?''

''다음 주말 두 시에 M시에 있는 S예식장으로 오소. 그 때 그 아가씨의 결혼식이 있소. 처자식도 없는 내가 주례를 서게 됐소.'' .

''예예, 스님 알았습니다. 꼭 가겠습니다.''

꼭이라고 힘주어 말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토요일 두 시까지 M시에 닿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꼭이라는 약속은 무엇으로 대체하나. 오후 내내 어려운 화두를 붙들고 앉은 것처럼 난감한 수렁에 빠져 있었다. 민원인을 대하는 말투에 신경질까지 곁들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종이 조각 하나를 뒤집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뿐이었다. 월차를 쓰면 된다는 훌륭한 제도를 생각해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안달함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월차나 년 차는 무슨 대단한 영웅적 활동에만 써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이미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투자해야 할 일상 중에서 그때 그 일보다 더 소중하고 영웅적인 것이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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