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36호 / 불기 2541(1997)년 12월 1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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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학의 진로/ 김두희교수 의과대학장

계(戒)를 받으면 불자(佛子)라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의 마음을 달래준다. 아직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한 손으로 너그러이 감싸주는 말로 들린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0대 후반에 폐결핵을 앓으면서였다. 의학에 대한 동경심도 이와 함께 싹이 텄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잘 만나 좋은 약을 구할 수 있어 절망감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학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성서를 비롯하여 내 손에 와 닿는 문헌을 다 읽어 보아도 그 의문을 풀리지 않았다. 다만 인생은 운명인 것 같다는 느낌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늦었지만 한글로 풀이해 놓은 반야심경이 그 동안 쌓였던 의문의 벽을 허물고 앞을 훤히 내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인생을 사성제(四聖諦: 苦. 集. 滅. 道)로 풀이하고, 그 중 첫번째인 苦痛을 생노병사(生老病死)로 나누면서 그것이 곧 인생의 순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다만 인생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고 윤회의 법칙에 따라 극락과 현세를 자유롭게 드나든다고 한다. 만약 이승의 고통을 해결한다면 그곳이 곧 극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에서는 짧게든 길게든 작든 크든 그러한 고통은 반드시 겪게 되어 있으며, 그 고통은 육신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인생의 한 과정 중 늙고 병드는 것을 방지하고 또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며, 동방유리 광약사여래의 서원을 칭하고 있다. 그 서원이 곧 안먹어도 배고프지 않고 늙지 않으며, 병들지도 않는 용화(龍草)세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의 의학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덜어주고 지상낙원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서원을 가지고, 그 방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유엔의 세계 보건기구의 헌장에는 건강을 '육신에 질병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전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곧 정신이며 그 정신이 깃든 집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그 집을 튼튼하게 짓는 것이 구조적으로 바른 마음이 될 것 같다. 따라서 육신과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을 보건(保健)이라고 할 때, 그 보건을 위한 궁극적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마음이 편안하면 육신도 편안해 지는 것은 틀림없다. 만사가 일체유심조라 하지 않았던가? 방법만 있다면 바로 지상의 극락을 이루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은 곧 어떤 집착을 버릴 수 있는 무량심(無重心)이라고 하고, 慈悲喜捨 4가지를 들고 있다. 이러한 것은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의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부대중을 위한 보건이란 곧 사회적 건강을 말하며, 오늘의 서양에서 전래된 public health(공중 보건)라는 말과 같다. 공중보건학의 목적은 질병을 예방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건강을 유지 증진시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서원이며 약사여래의 서원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불교계에는 이러한 건강함의 측면에서 정신적인 분야는 크게 중시하였으나, 육신을 위해서는 기독교계에 비하여 크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그러한 인생의 고통을 들어줄 수 있는 간병을 위한 인재양성에 보다 소홀했었다는 것을 들수 있다.

우리 한국에서만 보더라도 현재 의료인 양성기관은 40개 의과대학 중 국립이 9개이고 나머지는 사립인데. 그 중 대부분이 기독교 색채를 띤 재단에서 설립했으며, 불교계 재단에서의 설립은 조계종립인 동국대학교 의대와 원불교 재단의 원광대 의대 뿐이다. 그것도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입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 의해서 설립된 연세대 의대의 역사가 IlO여 년인데 비하여 우리 동국의대는 불과 10여 년이다.

그런데 뷸교의 선사(禪師)에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같은 지식을 곁들인다면 모두가 훌륭한 정신과의사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임어당(林語堂)의 말을 빌어보면 서양인보다 동양인은 정신병자가 매우 적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특정한 격식없이 마구 쩝쩝거리며 먹어대는 식습관이라며 횡경막 이하에 평화가 와야 온 세상에 평화가 온다고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불교적인 좌선에 의한 마음 수양 덕분이라 믿어진다. 그래서 그동안 구차한 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근대적 학문을 도입하는 의과대학이 설립되었으니 우리 불교계 의과대학이라면 당연히 정신과 영역의 학문을 크게 개발하여 특징지을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현재 우리나라 정신과 의사들은 이러한 선사들의 가르침에 심취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 다음이 앓기 전에 미리 예방해야 한다는 예방의학일 것이다. 내 몸을 자연상태로 두고 병인을 찾아 제거함으로써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러나 예방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때에 당장에 필요한 것은 그래도 병에 시달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임상의학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산다. 이것은 곧 오늘날의 생태학(生態學)적 개념으로 집약하고 있다. 인간 생태학이란 곧 우리들의 환경과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오래 살아도 될 사람이 어떤 사고나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면 이것은 곧 억울한 죽음이 될 것이며, 고통 중의 고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억울한 현상을 자연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기능만 한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보건(保健)과 간병(看病)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한 보건과 간병을 자연과 더불어 실천해 보려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곧 불교적 색채를 의학(醫學)이라 보는 것 같다. 그 예의 하나로 곧 인도의 요가법을 들 수도 있겠고, 또 음양오행설로 접근하는 한의학의 양생법(養生法)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불전(佛典)에서는 간병을 제일의 수행으로 든다는 것이다 불전에 나타난 의학적 기록은 불교화한 인도의학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계(戒)와 행(行)을 쌓고 경, 론 , 율(經論律)의 삼장(三藏)에 통하고 오명(五明)에도 밝아야 하는데 그 오명 중에 醫方明(Chikitsa vidya)라는 것이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원래 의학은 성스러운 학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병이라 함은 오늘날의 임상의학(臨床醫學)과 간호(看護)업무를 합한 것이라고 본다.

불경 중에도 순수의료에 관한 불경이 따로 되어 있는 것이 없고, 설법 중에는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힌두의 치료법을 인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한두의 율법은 기록하는 것을 죄악시하기 때문에 발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도 의학의 근원이 되어 있는 Veda문명으로 이루어진 성전(聖典) Ayur-veda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방도 횡제내경이나 본초학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우리는 가장 훌륭한 원전으로 동의보감을 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양의학을 멀리해서는 안된다. 서양의학은 어떤 경험적인 인과(因果)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여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치료를 시행하는 것이므로 보다 발전시킨 의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학은 두 가지가 아니고 하나일 뿐이며 다만 전문문야가 개발되므로 해서 할 일이 많아진 것이며, 그동안 불가시(不可視)분야를 가시화하고 불확실한 기능을 실험으로써 증명하여, 조그마한 소우주체의 신묘한 구조를 파헤치며, 나아가 배우고 익힌 바를 수행하는 부서가 지나치게 세분화 되어 있을 뿐이다. 동국의대의 발전은 곧 보살정신이 깃든 불교의학의발전으로 이어가야 할 것 같다. 모든 불자의 협력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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