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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28호 / 불기 2540(1996)년 12월 1일 발행

 

 

고승법어

정사람과 자연은 不二의 영원한 생명체
/서웅 큰스님

 

일주문

放下着/ 장성채

 

정각도량

사홍서원/ 법산 스님

 

정각논단

불교와 한의학/ 이종형

 

정각논단

불교와 중국문학 이론/ 백승석

 

생활속의
불교어

사자후/ 편집부

 

경전의 세계

대반야경/이만

 

동국과 불교

대학원의 완성과 본관 준공/ 이봉춘

 

불자탐방

불교 아동학과 심세곤 교수/ 편집부

 

전등이야기

육조혜능과 남악회양/ 성본스님

 

신행 상담

사성제/ 계환 스님

 

비유와 설화

가사의 공덕/ 조용길

 

가람의 향기

고운사/ 편집부

 

불교 건강법

담석증/ 김장현

 

불심의 창

통도사에서의 한때/ 허천택

 

열린마당

열린 마음에 열린 불교/ 이동은

 

열린마당

산사에서 / 송문호

 

 

 

 

고승법어
사람과 자연은 木二의 영원한 생명체 /  서옹 큰스님

 

내가 나이가 많고 귀도 시원찮고 정신도 희미해서 여러분에게 대단히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다, 내가 시원치 않지만 참사람에 대해서 그냥 생각 나는 대로 말해 보겠다.우리 인간 역사는 정신의 원리바탕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역사를 창조하는 데 여러 가지가 달라진다. 가령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신라 때는 화랑도 정신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이 나라를 위해 훈련을 했다. 알다시피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라,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하라, 벗에게는 신의를 지켜, 전쟁에는 목숨을 바쳐 끝까지 물러나지 말라고 했다. 이 세상 살면서 살생을 안 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조건이 살생을 안 할수 없 지만쓸데 없이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마시는 물에도 균이 몇억 마리가 있다. 그러나 안 죽여도 되는 것을 마구 죽여서는 안된다. 이것이 화랑 오계로 신라를 건설한 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 신라 청소년들의 근본 정신이다. 겉으로는 유교 신조라 할 수 있지만 화랑들은 불교를 철저히 믿고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불교 정신의 바탕에서 유교의 충성을 한것이다. 보통 충효와는 다르다. 고려만 하더라도 망할 때이조의 벼슬을 받지 않겠다고 무문동 마을에서 오지 않았다. 명리를 초월해 진실하게 살겠다는 정신이 철저했다. 또한 몽골군이 고려를 쳐들어왔을 때 40년을 싸워 나라를 보위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쟁을 하면 주민들이 도탄에 빠지므로 조정은 할 수 없이 강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 백성은 그 몽골군을 끝까지 철저히 때려 부수었다.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했지만 군인들과 백성이 단결하여 삼별초라는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 끝까지 싸웠다. 제주도까지 가서 끝까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아주 강한 정신으로 싸워서 목숨을 바쳤다. 층을 하더라도 이러한 불교 바탕 즉 인간의 근원과 생사를 초월한 자유 자제한 근본 바탕에서 충효를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강하고 깨끗하고 고상했다. 모든 것을 초탈한 무서운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그런데 이조 때는 불교를 탄압하고 불교는 산중에만 있어서 사회와 접근을 못했다. 유교 정신으로 5백년을 다스렸다. 유교는 충효를 제 일로 주장한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는 불교 바탕에서 충효를 했는데 비해 유교는 그냥 교리와 교조를 지키는 층을 했다. 유교를 바탕 없이 했기 때문에 나약했다. 쉽게 말해 일본이 쳐들어 오니까 한번 싸우지도 않고 나라를 내주었다. 참으로 인간 정신의 근본 원리 바탕은 넓고 깊고 광대하고 위대한 활약이 있는 깊은바탕에서 역사를 창조해야 훌륭하며 시원치 않은 바탕에서는 위대하게 활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 세상인지 불교인의 입장에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옛날 인류는 수렵 채집 시대를 살았다. 사냥과 물고기를 잡아서 살았다. 그때는 개인 또는 가족끼리살았다. 빈약하게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그런데 지금부터 1만2천년 전에 인류가 농사 짓는 것을개발했다. 서양은 밀농사를 많이 하게 되고 동양은 쌀 농사를 했다. 농사를 짓고 짐승을 길렀다. 소, 말, 염소, 돼지 등을 길러서 짐승을 부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사용을 한다. 농사를 지으니까 생산품이 많아지고 여럿이 도와서 집단을 이루었다. 발전할수록 도회지를 형성하고 국가도 형성하면서 여러 가지 문화도 발전하고 잘살게 됐다. 그러나 물자가 많아지고 저축을 하면서 도적들이 생겼다. 사냥할 때는 도적질할 것도 없었지만 농경 목축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라와 나라도 전쟁을 하게 되고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타락하게 됐다. 역사가 내려오면서 시대마다 운이 서로 통해서인지 지금부터 3천년 전에 성자들이 나타났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이, 중국에서는 공자가,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등 동시에 성인들이 나와 인간의 질서를 잡아주어 인간이 올바로 사는 길을 제시했다.그런데 영국을 중심으로 종교를 갖고는 안 되겠다면서 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서양에서는 과학 문명이 일어났다. 어째서 서양에서 과학이 일어났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서양 종교는 합리적이지 않고 신화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고 유교, 힌두교 등 동양 사상은 철학적으로합리적이다. 즉 모순을 안 느끼니까 거기에 만족하고 인간이 질서 있게 생활하게 된 것이다. 서양은 종교가 신화적이어서 중세에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지식이 발전하면서 모순을 느끼고 르네상스 후는 인간주의로 살게 된 것이다. 서양에는 종교가신화적으로 되어서 과학 문명이 일어났다. 동양은 모든 종교 여러 가지 정신 문명이 합리적으로 잘되어서 과학이 안 일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그런데 과학 문명을 인간주의로 발전시켜서 2백년 전부터는 교통 수단이 발전하고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사회 생활은 더욱 복잡해졌다. 오늘날 과학 문명의 병폐를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가가 인류의 과제가 됐다. 그러면 인류 역사를 창조하는 원리 바탕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 역사 원리 바탕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 철학이 현대 문명의 기추가돼 주고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 철학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의심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근본을 탐구한 데카르트는 철학의 창시자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모두를 의심하고 사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정신 이성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은 이성과 바깥의 물질 세계 연장(延長)을 기계적 기하학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했으며 정신은 물질과 다르다는 이원론을 폈다. 그런데 신체는 결국 기계적으로 판단해서 물질로 보며 생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 물질이라는 육체는 생사가 없는 물질이며 생명이 없는 철학이다. 그런데 과학에 들어가면 전부 생명관이 없다 생명관이 없으면 인간을 기계로 보아 사람을 죽여도 죄 의식이 없게 된다. 오늘날 과학공업 시대의 생명관이 없는 것이 제일 병폐이다. 서양에서 식민지를 만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맹목적인 의지로 보았다. 성욕과 식욕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욕망 철학을 쇼펜하우어는 주장했다. 포이에르바하도 욕망 철학이다. 이성은 생명이 없는 사막의 모래와 같다. 욕망 그 세계야말로 푸른 목초가 무성한 들이라고 본다. 이성은 생명 없는 욕망이다. 그것이 오늘날 영향을 많이 주고 있다. 쇼펜하우어 뒤에는 니체가 나오고 포이에르바하 뒤에는 마르크스가 나왔다. 니체는 권리 의욕이 사람을 지배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은 의식주 철학의욕망철학이다. 이 같은 욕망 철학으로 산다면 타락하고 해치고 혼란이 와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니체 뒤에는 히틀러가 그 사상을 세상에 구현했다고 할 수 있고 마르크스 사상을 그대로 구현한 사람을 스탈린이라고 할 수있다. 니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스탈린 또한 문화를 탄압하고 반대파를 죽였다. 바로 이게 서양 철학이다. 오늘날 이런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인류가 멸망한다. 불교는 욕망을 초월한 무한 영원의 생명 시공간이다. 초월하면서 현실 이 자리가 영원히 자유자재하다. 자유자재이게 움직이는 진짜 생명체이다. 불교는 불살생을 첫째로 강조한다. 생명 있는 것을 죽이지 마라. 자비심이 아니면 인류가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이대로 가면 모든 생명이 다 죽어 가게 된다. 백양 사도 다슬기가 까맣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모든 생명은 다 죽는다. 인류는 모두 죽는다. 1년에 한국땅 만한 게 사막이 된다. 오염되고 산성비가 내려 죽는다. 생명관이 불법같이 철저한 게 없다. 오늘날 공업시대에 살기는 좋아졌다. 정보망이 발달했지만 복잡한데 끄달려서 인간들이 제정신 없이 기계적으로 산다. 제정신 없이 어찌 훌륭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참사람이야말로 그 자리에서 아무 걸림 없이 초월해서 자유자재이게 산다. 서양의 데카르트도 그런 말을 했다. 참말로 깊이 들어가면 신을 돌파한다고 말해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데카르트가 신을 돌파했다니까 불초도 돌파했다고 해석했다. 조사선 그 분명한 자리는 신을 돌파하고 부처를 돌파한 거기서도 투과하고 투과해서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다. 인류를 해방하는 것은 참사랑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가 올바로 살게 된다. 오늘날 욕망으로 살고 허무주의에 빠져 인간

질서가 없다. 가정도 파탄이 오고 나라도 혼란이 오고 인류는 아직도 자기 나라 이기주의적 욕망으로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런데 불법 참사랑의 바탕이야말로 전우주가 통하고 개체 개체차별이 분명하다. 개체의 차별이 분명하고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가 서로 이해하고 통하고 존중하면서 평화스럽게 질서를 잡아서 잘살게하는 진리가 불법 참사람에 있다. 오늘날 서양은 데카르트 철학처럼 물질과 정신 2원론이다. 정신은 주인이 되고 물질은 하인이다. 주인 이물질세계인 대자연을 부려 먹고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사상과 바탕이다 인간이 욕망을 마음대로 해서 인류 대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켜서 인류가 멸망하고 생명가치도 존속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참사람이야말로 모든 사람이나 대자연이 둘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체이다. 대자연도 존중하고 아꺽서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고 즐거운 불국토 극락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인류와 생명을 멸망 파멸시키는 무서운 위기를 지키는 것은 불법밖에 없다. 서양역사원리는 분열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해가는 게 역사의 발전이라고 보는 변증법적 역사관이다. 우리 나라도 노사분규가 자꾸 일어나고 경제발전도 주춤하고 있다. 불교는 그런게아니다. 서양의 철학이 투쟁이라면 3차대전이일어나게 된다. 도저히 지구가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 가루가 된다. 불교는 현재 모든 게 하나로 통하고 모든 개체의 차별이 분명하면 서로 원융(圓融)해서 현재가 자비화합 그대로다. 의견과 이해가 다르더라도 자비화합 바탕에서 평화적으로 잘 해결 할 수 있는 게 불법이다. 그래야 세계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가족구성원도 전부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바탕에서 해결하면 화목한 가정을 형성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의견이 다르다고 투쟁으로 해결하려면 파탄이 온다. 국가와 인류도 불교의 자비 화합바탕에서 모든 어려운 문제를 서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세계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오늘날 투쟁으로 해결하려면 3차대전이 나고 경제는 파탄이 된다. 부처님 법이 인류가 멸망하게 되고 지구가 파괴되는 위기를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주문
放下着 /  장성재 / 인문과학부 철학전공 교수

언제부터인가 많은 보물들로 가득 차 있는 유적지들을 찾아가 신기한 것들을 하나라도 더 들여다보는 것보다 오히려 아무렇게나 놓이진 듯한, 흔적들만 남아 있는 곳에서 그것들을 이리저리 상상해보는 것에 더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들을 대하노라면 마치 보는 이를 압도하듯 꽉 찬 西洋畵라기 보다는 무엇인가 모자란 듯 친근하게 다가서는 빈 여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水黑으로 그려 진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 시킨다.

수업이 없는 날. 찾는 이 없이 한적한 곳에 남아있는 초석들을 바라보면서 그 곳에서 있었을 선인들의 자취를  툉그라니 빈 황룡사 지에서 금당의 장육존상과 지나던 새가 앉으려다 떨어졌다는 솔기의 금당 벽화나 원효가 금강샅매경론을 강론했던 강당의 모습을, 구층탑에 올라 주위에 펼쳐져 있을 서라벌의 화려한 궁전과 마을들을 상상하곤 한다. 특히 찾아간 때와 날씨의 변화로 인해 봄날 아침 햇살이 비칠 때나 가을날 석양의 노을질 때, 여름날 바람에 비구름이 홑날릴 때나 겨울날 그친 눈 위로 달빛이 반사될 때면 그 곳들은 더욱 다양한 모습들로 다가 오기에 그 감흥은 더욱 더 고조되기 마련이다. 또한 이같이 상상하는 것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면, 빈 터에 서서 주위 경관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이다. 만약 그 곳에 건물이 있었다면, 그 장엄함에 현혹되고 가리워져 주위 경관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그 건물의 위치에서 주위 경관을 둘러 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임에 따라 느껴지는 놀라움이라 하겠다.

이같은 버릇들은 몇 년 전 어느 초여름날 수업이 빈 오후 시간에 평소 즐겨 찾던 정각원으로 가는 숲 속 린을 산책할 때 있었던 상반된 일련의 경험들에 의해 더욱 깊어진 듯하다. 그 길에서 문득 발 앞에 뱀 한 마리가 죽어 있던 것을 보고 비켜간 일이 있었는데, 그 후로 뱀의 가느다란 몸이 앙상한 가시 뼈로 변해가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줄곧 그 곳을 피해 다녔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주변엔 아름다운 가을 야생화로 뒤덮였지만, 여전히 기억 속에 그 곳은 징그러운 뱀의 몸이 썩어갔던 장소로서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禪家에 '族菊'하는 公案이 있다. 집착하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라는 이 말은 일정한 대상에만 몰두한 시선은 그 보여지는 면만 정확히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자신의 고정된 관점으로 인해 다른 면들을 보지 못하거나 왜곡 시킴으로써 결국 전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려 삶에 지칠 때나 애착을 갖고 한 일에만 몰두하게 될 때면, 하나라도 더 채우려는 것보다 비우려 애쓰는 이 도리를 생각하면서 혹시 더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지는 않은지 한번쯤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특히 몰두하는 일이 현인들의 논리정연하게 꽉 차 있는 글들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혹시 그들의 글을 나의 것인 양 착각하고 오히려 비어있는 듯 허술하게 흔적만 보이는 내 마음의 글들을 내팽개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정각도량
사홍서원 / 법산스님 / 서울 정각원장

사람은 누구나 희망과 소원이 있다.

과거의 행복이나 괴로움, 현재의 불행이나 즐거움을 막론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행운과 행복의 기원만이 있다. 희망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고 소원은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목적이다. 이는 곧 미래를 아름답게 꾸밀 살맛나는 마음의 의지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목적하는 것을 이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다만 자기 자신이 주체이며 주관자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스스로 공간적인 형태와 시간적인 변화에 적응하여 객체인 현상계와 객관인 상대성에 더불어 어느 만큼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나」인 자기 자신이다. 내가 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있는 것이고, 내가 세상의 모든 객체와 더불어 공유할 때 나의 생명도 유지되는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나 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나를 모르고 자신을 망각하여 남을 알려고 하거나 남을 탓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나」를 알려면 곧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어찌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언제나 자기 마음을 깨끗이 닦아 자신의 역량과 스스로의 위치를 알고 일을 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것이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무조건 자기 것만을 챙기려 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하고,남을 위해 베풀려고 하는 것은 원력이라고한다.

불교에서는 원력을 세우는 것을 서원(誓壓醴)이라고 하며, 목적하는 바를 꼭 이루겠다는 수행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불교의 최종 목적은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서원은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하는 것이므로 모든 생명은 곧 나의 생명이요, 나의 참된 수행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로 가는 길이다.

불교의 모든 의식에서 반드시 발원하는 네 가지의 서원(四弘誓願)은 숫자는 네 가지이기는 하지만 오로지 한 마음을 때때로 맑고 깨끗이 하여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맹서이다.선종 혜능대사의 『육조단경』에서 사홍서원은 스스로 깨달아 성불할 것을 강조하고있다.

첫째, 자기 마음의 중생 가없지만 기어코 건지오리다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 가운데 중생인 삿되고 어리석은 마음과, 허황하고 망령된 마음과, 착하지 못한 마음과, 질투심과, 악독한 마음과, 이와 같은 마음이 모두 중생이니 모를 지기 자기 성품을 스스로지 도하는 것이 참 제도이다.

어떤 것이 자성을 스스로 제도함인가? 자기 마음 가운데 삿된 소견과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혹되고 망령된 중생을 바른 소견을 가지고 제도하는 것이니, 그러나 이미 바른 소견이 있다면 반야의 지혜로 유치하고 미혹한 망령된 중생을 타파하여 각각 스스로 제도하되 삿된 것이 오면 바른 것으로 제도하고, 미혹이 오면 깨달음으로제도하며,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이 오면 선으로 제도함이니 이와 같이 제도하는 것을 참 제도라고 이름한다.즉, 자기 마음에 있는 탐,진.치와 악하고 삿된, 시기질투하는 마음이 중생 심이 너반 야의 지혜를 깨달아 제도한다는 것이다.둘째, 자기 마음의 번뇌 끝 없지만 기필코끊으오리다. 이것은 자기 성품의 반야지혜를 가지고 허망한 생각을 없이 함이다,사람이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이 번거로운 것은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여 밖으로 온갖 경계에 유혹되어, 자기의 밝은 마음을 그 유혹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래 밝고 깨끗한 부처와 같은 성품이 유혹 속에 묻혀 있으니, 가려진 속에서의 판단이 올바를 수 없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뿐이다,이 번뇌의 무덤을 헐어 내고 유혹으로 덮인 무명을 녹여내는 무기가 반야의 지혜이다. 곧 내 마음에 쌓인 번뇌가 아무리 두텁고 무겁더라도 기어이 끊고 녹여 없애겠다는 "병서이다.

셋째, 자기 성품의 법문 다함 없지만 기어코 배우오리다.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성품을 깨달아 항상 정법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배움이라고 이름한다.

부처님의 법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하여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많은 진리의 법문이 있더라도 한 마음에 들어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법문이 한마음에서 나왔듯이, 중생도 한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의 마음과 다름이 없이 온갖 법문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깨닫는 것이 곧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운다는 참된 의미인 것이다.

넷째, 자기 성품의 불도가 위 없지만 기어코 이루오리다 이것은 항상 하심(下心)하여 곧고 바른 것을 행하고 미혹도 여의고 깨달음도 떠나서, 반야를 항상 드러내며,참되고 거짓도 없고 바로 부처의 성품을 보면 즉각 불도를 이룰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밝은 성품이 있다. 부처님은 최고의 최상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는 누구나 한 마음 깨달으면오를 수 있나니, 이렇게 하기까지에는 어떠한 괴로움도 참고 참되고 바른 수행을 하면 반드시 불도를 이룰 수 있으니 꼭 그렇게 하겠다는 굳은 맹서이다.

이 네 가지의 서원은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하는 날 끝나는 대승불교의 서원이지만 모두가 각기 자기의 어리석음을 책임지구자기의 중생 됨을 벗어나 자기 속의 불법을 들어낸다면 위 없는 불도를 반드시 이루게될 것이다.

불교의 길은 향상(向上)의 길이다. 어두운 곳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어제의 업보와 오늘의 괴로움을 탓하지 말고, 내일의 발은 깨달음을 향한 희망찬 소원을 향해 염불하고 기도하고 참선하면 반드시 성취될것이다.

성불합시다.

 

 

 

정각논단 1
불교와 한의학 / 이종형 / 분당한방병원장

원래 종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신앙이요, 의학은 육신을 다스리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종교와 의학은 인간의 심신을 위하여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인간문화라 할 수 있다. 특히 불교는 고대의 인도의학을 받아들여 독특한 불교의학을 구성하게 되었고, 따라서 고대 승려들 가운데는 의학을 하는 승려들이 많았다.때문에 불 승들이 신앙을 깊이 하지 않고 생활수단으로 병을 치료하는 쪽에 몰두한다 하여 의료업을 5종사도(邪道)의 하나로 치기도 하였고, 불도수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l3개의 계율 가운데 의료행위도 그 한 조목으로 들어 있게 되 었다.

그러나 인체의 근원을 구명하고 각종질병을 연구하며 자비로운 종교적인 의료를 행하는 고상한 승의(僧聾)들은 이에 관계없이 민중들을 자비롭게 보시고 제하였을 뿐 아니라, 의학을 크게 발달시키었다. 지금도 불교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용수, 용지, 카라카 같은 승려들은 의학의 원리와 불로양성법 안과, 외과 등에 유명한 승의 들로 그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학은 인도의 북방인 중국대륙으로 전파되면서 중국에서 종례부터 발상 되어 온 대륙의학(漢醫學)에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불교의학에서도 기백, 편직 등 대륙의학의 고대 의인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도의 불교의학도 중국의 대륙의학과 진작부터 교류가 있어 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고대 우리 나라에도 단군이래 나름 대로의 민족의학(한의학)이 전래하고 있었을 것이니 주로 민간경험을 토대로 한 질병치료이거나 무당을 통한 주술에의뢰하는 원시 의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나라에 중국대륙의학이 수입된 것은 문헌적으로는 고구려 평원왕(AD5G)때 중국의 오(吳)나라 지총(知摠)이1M권의 중국의사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그전부터 락랑군(樂浪群)을 통하여서도 수입되었고 특히 중국의 고승(高僧), 아도법사(阿道法師)가374년에 고구려에 내도 할 때 여러 불경과 많은 의서들을 가지고 왔다는 71록으로 보아 불교와 의학이 함께 우리 나라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는 그 이전부터 중국 남조(南朝)와의해상교류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일찍이 중국의 이을 받아 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고구려에 와 있던 아도법사의 신라 이주에 따라 역시 불교와 의학이 함께 전해졌을 것이다.이미 중국의학에는 인도의 불교의학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중국의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나라는 중국의 대륙의학과 인도의 불교의학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의학 술을 맞이하게된 것이다.

특히나 우리 나라 삼국시대에 국가종교로 취해진 불교의 사상은 의학계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어 나라백성들의 보건문제나 질병퇴치 등 의료제도가 불교적 인체제로 시행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백성들이 불교 교리에 교화됨으로써불승이나 보살들이 민중의 지도자로서 존중되었을 것이고 의료행위 조차도 불 승들이 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 것이 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유명한 승의로서순도, 아도, 묵호자, 낭태사, 인법사, 혜권,밀본, 법창, 관늑, 법명, 법장 같은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 나라 한의학을 크게 일으키고 외국에까지 널리 빛낸 승의 들이며 국의(國醫)였었다. 일찍이 중국양나라 도홍경의 저술인 본초경집주에우리나라 고려인삼의 우수성과 그 사용법이 소개된 것이라든지 고구려 노사방,신라 법사방, 백제 신집방 같은 훌륭한의약서가 일본의 고대의서인 의심 방에 인용되어 있음을 볼 때 우리 나라 승의 들의 고도의 의학연구업적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승의와 승려의학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더욱 번창하였고 특히 불도의 자비 적 뜻을 따라 질고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료하기 위해 국가에서 동서대 비원을 설립하여 승의 들로 하여금 시료케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불교의 자비정신도 함께 보시 된 것으로 보아진다.마침내는 불교의학과 승의 들의 의료활동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한의학의 불멸의 영향을 끼쳤다. 우선 우리 나라 민족의학의 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허준의 동의보감 첫 장에 불교의학의 기본요체인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성형설(四大成形說)이 인용되어 있고, 또 근대 실학파의 태두인 이광수의 지봉류설에도 이.지.수.화.풍설이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를 비롯한 불 승들의 승군(僧軍)활동과, 전란속에서질고로 신음하는 백성들을 승려들이 구료한 의료활동들이 미담으로 전해 지고있다. 특히 우리 한의학계에서 지금도 많이 응용되고 있는 사암도사의 침구술(鍼灸術)은 우리 나라 한의학의 독특한 침구치료법으로써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와 한의학은 우리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전체적인 동양의학의 구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민족의학인 한의학의 전승,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해온 사실들을 우리 나라 불 교사 및 의학사를 통하여 역역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불교와 한의학은 장차 의료계에서 요구되고 있는 심신(,已,身)치료의학을 창조함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합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크게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정각논단 2
불교와 중국문학이론 / 백승석 / 중어중문학과 교수

불교의 전래는 중국 고대문화의 창작뿐만 아니라, 문학이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본래 경학(經學)에 종속되어 있었던 문학은 대략 3세기의 위진(魏晋)시대 이후로 문인들에 의하여 새롭게 인식되면서 비로소 하나의 독립적인 위치를 찾게 되는데,바로 이 무렵부터 문학의 창작과 비평에 대한 이론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당시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사상은 많은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여러 이론을 제기하였다.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묘오설(妙悟說) 당 이후로 흥성한선종(禪宗)은 문학이론에도 매우 중요한역함을 하여, 문단에서 ''이선유시(以禪喩詩선학의 이론으로 시 또는 문학을 비유함)''의 이론을 널리 제기하게 된다 이 ''이선유시''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이론이 바로송대에 이르러 완성된 엄우(最列쥔, 1180一1235)의 ''묘오설''이다 ''묘오''라는 용어는

승조(曾肇)의 『열반무명론(涅槃無名굻侖)』에''궁극적인 진리는 불가사의한 깨달음 속에있으며. 불가사의한 깨달음은 진리와 하나로 되는 것이다.(玄道在於妙悟, 妙吾在於卽眞)''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불교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겠다. 기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인 오(悟)는 바로 일체의고액(苦厄)을 넘어서기 위한 해탈(柯早脫)의 관건으로 인식의 최고 단계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한 초기에는 이 깨달음에 대하여 ''점(漸)''과 ''돈(諷)''의 두 가지 견해가 있었지만, 그러나 축도생(竺道生)이 돈오(頓吾)를 주장한 이후로, 돈오성불(屯餘吾彧佛)은 중국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선종의 교리가 되었다. 인식의 최고 단계인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논리적 추리로 얻을 수 있는 이성적인 인식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왕왕 일종의 사물이나 혹은 하나의 비유 그리고 한마디의 간단하지만 깊은 뜻이 있는 말을 통하여 계시를 얻어, 아무런 설명 없이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다. 세존이 영취산에서 불법을 전할 때. 수천의 청중이 모였지만 단 한 말씀도 안 하시고 염화(拈花)하여 청중에게 보이시자 가섭(迦葉)이 미소를 지은 것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런 깨달음은 오랫동안 이루려고 애를 써도 이룰 수 없고, 일시에 환히 뚫린다는 것이다. 문학창작에서 오랫동안의 구상에도 결과가 없다가 갑자기 신의 도움을 받은 것 같이 작문의 구상이 막힘 없이 통하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돈 오라고 하고 문학에서는 그것을 영감이라 한다. 이같이 불교 직관의 방법인 돈오가 문학 속에서 말하는 영감의 세계와 서로 상통하는 점은 많은 문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문학작품의 창작과 비평에 응용하였고, 결국에는 송대(宋代)의 엄우에 이르러 묘오설(妙吾說)이라는 이론을 완성하게된 것이다. 이 묘오설은 엄우의 저서인 『창랑시화(倉浪言寺話)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선도(禪道)가 묘모에 있듯이 시도(詩道) 또한 묘모에 있다고 하면서, 당(唐)의 맹호연(孟浩然, 689一740)과 한유(韓愈, 768一824)를 예로 들었다. 맹호연의 학식은 한우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시가 한우의 시보다 높게 평가받는 것은 다름 아닌묘오 때문이라고 하여 시의 창작과 평가는 묘오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시를 짓는 창조적(創造的) 경험과 시를 감상하는 심미적(參美的)경험을 모두 종교적 경험인 불교의 깨달음의 경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한 묘오에 이르기 위해서는 ''식(識)''의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식''역시 불교적 인용어로 외경(外境)을 식별(職別) . 요별(了別)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엄우는 이것을 여러 시인의 작품감상을 통하여 배양한 감상과 감별의 능력에 비유하였다. 그의 주장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춰야만 작품의 좋고 나쁨을 분별할 수있고, 또한 정확한 작시의 학습방법을 찾을 수 있어 결국에는 묘모에 이른다는 것이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엄우의 이러한 주장은 윤리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문학관, 즉 문학은 어버이와 임금을 섬기게하고 아랫사람을 교화하며 윗사람을 풍자하는 것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문학관에서 벗어나 문학의 심미적 가치를 강조한 것으로 중국문학과 이론에 대한 영향은 매우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의경설(是无覓說). ''의경설''은 당(唐)의 사공도(司空圖, 837一908)와 교연(皎然,?)에서 시작하여 청(淸)의 왕국유(王國維,1877一1927)에 의하여 집대성된 것으로 이미지에 관한 이론이다 의경은 주관적 사상인 의(意)와 객관적 존재인 경(境)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즉 의경은 작가의 주관적인 내적 경험(內的經,略)과 생활 속의 객관적인 외적세계(外敵世界)를 서로 일치시킴을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게 하는 예술적인 경계(力竟界)를 가리컨다. 인도대승불교의

유가파(瑜伽派)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형성된 유식종("缶識宗)은 이 이론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불교에서 사람의 신체에는 인식할 수 있는 육근(六根: 耳界.暴界.舌界.身界.意券)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力: 色界.聲界.丹界. 味界.觸界.法界)그리고 이로 인하여 일어나는 육식(六識 . 眼識.耳識.鼻識.沿-職 . 身識 . 尨識)''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팔계(十八界)''이며 ''경계(少覓界)''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유가파는심식 (,已,識 육식에 未那識 . 阿承脣耶識을 포함한 八識을 말함)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마음속에 허상을 만들어 인식의 대상이 있는 것처럼 주관적으로 인정하는데 불과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가 없다고 보았다 사실, 문학은 객관적인 현실의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작가의 주관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문학적인 규율과 유식의 인식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문학작품 중에 반영되는 객관적인 ''경''은 확실히 ''식''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유식의 인식론과 문학은 상통하는 점이 있다.특히 중국의 고대문학 중에서 창작위 주관직인 측면을 다룬 이론적 연구는 적으면서도 한편으로 유구하고 풍부한 서정적인 전통 때문에 작품 속에는 언제나 주관성이풍부했다, 바로 이러한 모순 때문에 유식의 인식론은 중국문학의 ''의경설''을 형성하게한 것이다.

셋째, ''언외지의설(言外之后說)''. 문학은 언어로 의경(息境)을 창작해야 한다. 그러나 언어와 의경의 사이에는 또한 격차와 모순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언어는 제한적인데 의경은 무궁무진하다고들 말을 한다. 불교는 언(言)과의(后)의 관계에 대하여 그 독특한 견해가 있다. 제법 실상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없다. 이것은 바로 소위 ''言語道斷, ,心行處滅(언어도단, 심행처멸 :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는 절대경계의 본체심)''이다. 언어는 실상(實相)이 아니지만, 그러나 언어가 아니면 또한 실상을 표현하지 못한다. 실상은 언어로 말할 수 없고 또한 언어로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가 강조한 것은 언어에 대하여 집착함이 없어야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言과 意에 관한 이론은 중국문학의 발전에 대하여 길은 영향을 미쳤다. 육조(六朝)의 범엽(范曄,398~445)은 일찍이 문장은 마땅히 의(意)를 위주로 하는데, 문자는 后를 전하기만 하면 되지 지나쳐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게 해서는 안됨을 제기하였다. 또한 이 薏는 바로 정지(情志)에 의탁한 것이기 때문에 응당 문장에서 묘사한 것 외에 더욱 깊은뜻을 표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범엽의 이론은 분명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범엽 이후로 많은 이론가들이 시와 문의 ''언외지의''를 다루었는데 실제적으로는 범엽의 이론적 기초위에서 응용한 것이다.

이밖에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학이론에는 왕부지(王夫之, 1619~1692)가 제기했던 ''현량설(現量說)''이 있다. 이 이론은 불교 인명(因明)의 용어인 현량을 문학에 비유한 것이다. 즉 현실의 사상(事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량의 감각적인 것처럼 문학도 현실생활에서 있는 그대로 창작이 되어야지 무병신음(無病申今)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현량설''은 문학창작이 현실을 벗어나서 인공조탁(人工彫琢)하는 경향을 반대한 것으로 중국문학의 창작에 역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상과 같이 불교와 중국문학이론과의 관계를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 역시 불교의 전래는 중국문학의 여러 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생활 속의 불교어
사자후(獅子瞋) /  편집부

사자를 백수(百獸)의 왕이라고 한다. 뭇 짐승들의 왕답게 사자는 위용도 당당하지만 그 포효(咆哮) 또한 여느 짐승의 울음소리와는 다르다. 그래서 이 백수의 왕이 한번 크게 포효하면 크고 작은 모든 짐승들은 그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져 숨을 죽인다. 감히 맞설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자후가 실제로 사자의 울음소리를 가리키는 말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사람이 멋진 웅변을 하거나 크게 부르짖으며 열변을 토할 때 흔히 그렇게 표현하고 있

을 뿐이다. 또는 '질투심이 강한 아내가 남편에게 암팡스럽게 발악하며 떠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전에는 설명되고 있을 정도이다. 백수의 왕 사자의 포효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이 사자 후는 본래 불교에서 고유하게 써 온 말이다. 또 불교에서 이 말이 쓰어질 때고 의미가 실감나게 되살아 남을 느낄 수 있다. 열 반경에 「사자후란 결정설(決定設)을 일컫는 말」이라 하였으며, 유미경 불국품에는 「법을 설함에 두려움이 없으니 마치 사자의 포효와도 같다」고 하였다. 즉 깨달음을 남김없이 이룩하신 불타의 설법은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고 의심할 바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사상 어떤 종교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 백수의 왕이 한번 크게 소리내면 크고 작은 짐승들이 모두 승복하듯이, 불타의 설법은 외도(外道)들은 물론 마군(魔軍)을 설복시키고 모든 중생을 감화시킨다. 그래서 불타의 설법을 곧 열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변을 토하며 자기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세상에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진정한 사자 후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의 없이 수긍될 수 있는 말, 설복되어도 기쁜 그런 사자 후는 실로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자기의 뜻,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 위한 사나운 언어의 폭력만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 큰 소리가 사자 후는 아니다. 사자의 포효는 하나의 상징일 뿐, 그것은 언어 이전 침묵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순수한 진실의 말,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곧 사자후인 것이다.

 

 

 

경전의 세계
대반야경 /  이만 / 불교문화대학 교수

대반야경은 大般若波羅蜜多米厓 (Mahaprajnapdramita sutra) 600권으로서 당의 현장이 660년 정월부터 663년 10월에 걸쳐 번역한것이다. 이 경은 대정신수대장졈 5권에서 8진에 걸쳐 실려 있고 글자총수는 약5백만자에 이른다.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이 전체 경장의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에서도 그 중 4분의 3이 이 대반야경이므로, 이 경전은 그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나 막대한 양에 있어서나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이 경전은 반야부위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반야부위 일대 총서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이 경 전체를 현장이 번역한 전은 아니고, 현장代(602-664)까지 번역된 반야부위 경들과 현장이 번역한 경들을 총체적으로 수록한 것이다. 중국에서 반야부위 경전이 구전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면, 근본 경전으로부터 대소의 2부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 중국에 구전으로 전해져와서, 이미 3세기경에는 2부의 존재와 그 실증이 시도되었다 이어 4-5세기에는

4종설이 전래하고 그에 대한 논증이 시도되었으며, 6-7세기에는 8부설이 전해져 그에 대한 실증이 논해졌다 그러다가 7세기의 현장에 의한 16회 대반야경이 실현됨으로써 반야부위 경전은 완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이 경전의 구성은 600권 4處 16會 275分으로구분되는데, 4處란 이 경전이 설해진 네 장소를 말한다. 즉 1. 왕 사성 취봉산 기사굴산(1-6회, 16

회), 2. 자위성 급고독원(7-9회, 11-l4회), 3. 타화자재천왕궁(10회), 4. 왕 사성 죽림정사(16회). 16회 600권은 내용상 크게 2부로 나눌 수있는데, I회부터 5회까지는 증광된 것들로서6회 이하의 경전들과는 명료하게 다르다. 여기서 '倉'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 16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회별로 그 구성을 보면

 장단의 차이가 많아서 예컨대 제1회는 600권중에서 400권이나 되고, 제8회와 제9회 등은

 단 1권으로 되어 있다. 또 내용과 형식에서 도회별로 차이가 많다. 대반야경 16회의 구성 상황과 명칭, 권수, 별역본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안이별역본이다. 제1회 (1-400권): 10만송반야.제2회 (40l-478권): .2만8천송반야(대품반야),방광반야바라밀경 (20권, 무라자 역), 광찬반야바라밀경(10권, 축 법호 역),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 27권, 나 집 역)

제3회 (479-537진): 1만8천송반야제4,5회 (538-565진): .8천송반야(소품반야), 도행반야바라밀경(10권, 지루가참 역). 대명도경(6권, 지검 역), 마하반야초경(5권, 축불염 역), 마하반야바라밀경 (10권, 나집 역 ) (소품반야), 불모출생삼장반야바라밑다경(25권 시호 역), 불모보덕반야바라밀경(3권, 법현 역), 성팔천송반야밀다일백팔명 진실원의다라니경(1권, 시호 역)

제6회 (566-573권) :승천왕반야, 승천왕반야바라밀경(7권, 월 파수나 역)제7회 (574-575연) 7백송반야(만주실리분),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 (2권, 만다라선 역),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1권, 승가 바라 역)제8회(576권) .5백송반야(나가실리분),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2진, 상공 역)제9회 (577권) .금강반야(능단금강분),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나 집 역),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보리유지 역),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전제 역),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1귈, 달마급다역),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1권, 의정 역)제10회 (578권) .1백50송반야(반야취리분),실상반야바라밀경(1권, 보리유지 역). 금강정유가이취반야경(i진, 금강 지 역), 변조반야바라밀경(1권, 시호 역), 최상근본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7권, 법현 역)

제11회 (579-583) . 보시 바라밀다분

제12회 (584-588) .정 계 바라밀다분

재13회 (589) . 안일바라밀다분

제14회 (590) 정 진바라밀다분

제15회 (59i-592) : 정 리 바라밀다분

제16회 (593-600) . 반야바라밀다 분

 이와 같은 구성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반야경 안에는 여러 가지 별 역본들이 현장이 이 경을 번역하기 약400년 전부터 번역되기 시작하여 별행되고 있었는데, 제1회와 제1l회에서 제16회의 7회는 현장 이전에 그와 유사한 내용의 이본이 전역 된 일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이 경도 다른 반아부 경전과 같이 空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며 육 바라밀 중 특히 반야 바라밀을 강조하고 있다. 반야(지혜)는 事津母이며 육 바라밀의 원천이어서 일체의 불법이 반야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반야 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육 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으며, 육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지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이어서 같은 반야게 경전인 대풍반야경이나 소품반야경 또는 금강반야경과 이 경을 요약한 반야심경 등에 비해서 많이 읽히거나 연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10에서말했듯이 이 경은 '진국(帛贊國)의 전(典), 인천의 대보'로 여겨 천재, 병란, 질병, 기근 등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이 경을 고승들에게 독송시키거나 강설하게 하고, 서사(書寫) 유포시키고 받들어 공양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없앤 수 있다고 믿어 종파와 관계없이 전독(轉賚)되었다. 이 경의 제398귄을 보면 '송지(誦持)하는 자, 전독하는 자, 사유하는 자, 여실히 행하는 자는 모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여 이 경의 공덕을 설한 부분이 있다. 이 경을 송지전독하고 경에서 설한대로 행함으로써 일체의 고액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액을 면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제재초복(除災招福)이요 국가적으로 볼 때는 진호국가(盖阮護1刪譴()인 것이다. 이 경은 이러한 점에서 신앙적으로 존중되어 왔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이 침입하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몽골군의 격퇴를 불전에 기원하여 온 국민이 혼연일치하여 조조(屑杻造)한 고려대장경의 경우 그 첫머리에 이 대반야경을 배열한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 연유가 있는 것이다.

 

 

 

동국과 불교
대학원의 완성과 본관 준공 /  이봉춘 / 불교문화대학 교수

대학원은 우리 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시부터 함께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불교학과, 영문학과, 정치학과만으로 대학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3개 학과만으로는 보다 심오한 학문연구 활동에 있어서 제약이많았다. 각 전문분야에 걸쳐 상호간의 협동 및 비판검토 등 종합대학이 지닌 장점을 충분히 살릴 수 없음은 물론, 우리 대학 출신의 우수한 졸업생이 대학원에 해당 학과가 없어 타대학 대학원을 지망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불 교학에 있어서는, 이 분야 국내 유일의 연구 전당인 대학원에 박사과정조차 설치되어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는 우리 대학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의 전도를 위해서도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대학원의 확장이 시급한 과제가 되어 있는 가운데 1953년 10월에 金東華 박사가 잠시 대학원장작을 맡은 데 이어, 1954년 2월에 梁t主東 박사가 그 후임에 취임하면서부터 대학원 확장을 위한 노력이 본격화 되었다- 때마침 교수.학생 전원이 큰 기대를 걸고있던 도서관의 복구도 완료되어 대학원정의취임과 때를 같이한6월 초에 개관할 수가 있었다. 전쟁의 상흔을 이렇게 하나씩 씻어내면서 학생과 교수의 연구활동이 점차 활기를 띄어가는 가운데 대학원 사무당국에서는 석사과정의 증설과 박사과정의 설치 수속을 서둘렀다.

대학 당국의 노력과 절충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 결과 교육부에서도 본 대학의 전통과 그동안 우리 문화의 향상에 공헌하였던 업적을 고려하여 1955년 4월 1일 신청 내용을인가하였다. 즉 석사과정에 국어국문학과 . 사학과. 법학과. 경제학과의 4개 학과 증설과,문학.철학,법학.경제학의 4부문에 대한박사과정 및 대학원 설치와 박사학위 수여규정이 인가된 것이다.

이로서 본교의 대학원은 명실상부한 대학원으로서의 기구를 갖추게 되었고, 독특한 학풍 수립을 위하여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이 확립 되 었다.

한편 1954년 9월 8일에 기초공사에 착수했던 본관의 건축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상량을 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후원회측의 적극적인 노력과 돈암채석장 및 미 8군측의 건축물자 공급이 제때에 이루어져 1955년 7월 5일에 정조식을 갖고, 같은 해 12월 6일 백성욱총장, 전규홍부총장, 오택언상무, 이윤용 후원회장 등의 참석하에 성대한 상량식을 거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본관의 상량으로 대학시설 확장의 기대가구 체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관이 준공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종합대학교로서 요구되는 내용의 충실을 기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이같은 대학시설의 부족에 따라 제2건물의신축공사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마침 불교학과의 조명기 교수로부터 이미 사용권을 흔쾌히 허락 받은 바 있던 필동2가소재의 대지 3천3백평과 기와목조건물 84평에 대한 계약권을 동 교수가 조건없이 본교에 넘겨준 것을 계기로, 1956년 초부터는 여러 차례 제2차신축공사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물론 상량은 하였지만 본관건물이 준공되지 않았던 당시 사정에서 제2차 신축계획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연구를 뒷받침하는 시설문 확장의 시급한 필요성과 동국의 발전이라는 대전제하에 1956년 9월 10일 재단.학교.후원회측의 합의가 이루어져 기초공사에 착수하기로 하였다.제2차 공사는 신축 중인 본관의 측면 정북에 북 측면은 5층 동 측면은 2층으로 하는 대학본부와 중강당을 포함하는 건물과 본관 뒤쪽에 정남으로 3층 866평의 과학관을 신축키로결정되었다. 따라서 제2차 신축공사는 대학본부의 건축 예정지인 중구 장충동 2가 산 14번지 1에 소재하는 약 30평에 달하는 목조건물4동을 철거하기 시작한 1956년 9월 27일부터시 작되 었다.

철거하게 된 목조건물은 4동이라고 하지만2층 1,022평을 제외한 3동은 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본교가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승격한 후에는 학장실을 비롯하여 학부의 교무.학생 .서무의 3과와 제1.4.5 강의실로 사용해 온 유서깊은 건물이었다. 주로 불교학과의 강의실로 사용되던 제1강의실은 물론이거니와 철거가 시작된 이들 건물은 동국의 애환과 낭만이 함께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였다.해방 직후의 무질서한 정계를 분주히는 틈을 얻어 2一3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 프랑스 시를 낭독하다가 어느새 화제가 철학으로 옮겨지고, 다시 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 학생에게 권하기도 하시던 고 김법린박사의 명강의는 당시의 동국 인들에게는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또 史記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종횡으로 달리는 열강으로 학생들을 황홀케 하던 오 종식선생의 강의는 현관을 가로막아 20개 가량의 책상을 두었던 비좁은 제5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7평의 비좁은 장소이긴 했지만 동서의 사료 전적들을 비치한 아담한 사학과의 연구실도 이 건물 내에 있었다.

전문학교 시절부터 초기 대학교시대에 이르기까지 애환과 낭만, 그리고 가지가지의 추억을 간직한 이 교사를 철거한다는 학교측의 발표는 당시의 동국 인들에게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를 안겨주었다. 물론 대학의 발전을 위한 일이었지만 몇 개 성상 동안 학문을 연마하며 젊은 꿈들을 키워온 정든 교사를 철거한다는 것에 눈시울의 뜨거움을 느끼며 추억을 더듬어 아쉬워하는 동문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 1955년 12월 6일에 상량식을 가졌던 대학 본관의 공사는 1956년 9월 말에 이르러서는 세부적인 공사만 남기고 준공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따라 9월 28일에는 대학본부가 준공될 때까지 임시로 총장실을 비롯한 대학의 사무기구들을 이 본관에 옮겨 학사사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우리 대학의 상징 건물이 기도한 석조본관이 준공된 것은 그해 12월의 일이었다. 이로써 총.학장실 및 대학본부로 충당된 여러 개의 방을 제외하고도 20개의 강의실과 학생휴게실까지 마련되어, 우선 눈 앞의 문제였던 강의실 부족난만은 해결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불자탐방
불교아동학과 김세곤 교수 /  편집부

''경주캠퍼스로 발령받은 때가 1995년 3월 1일자이고 보면,경주에서의 생활도 벌써 2년이란 시간을 보내는 촁입니다. 93년부터 91년에는만2년동안 서울캠퍼스 사범대학에서는 심리학개론을, 교육대학원에서는 교육연구법 , 상담심리 . 임상심리 등을강의했습니다, 그 이전의 시간을 훑어보면 84년부터 93년 2월까지 일본에서 유학을 했으니 20대 후반과 30대의 젊음을 유학생활로 보낸 셈입니다.''경주캠퍼스의 생활 이전을 묻는다면 빠르지않은 경남 사투리로 간단한 약력을 언급하는 불교아동학과 감세곤 교수

 그는 사창 사람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울산에서 양산가는 도로쪽으로 양산시 웅산읍 청선산을경계로 통도사 미타암.원효암.내원사 뒷산을 넘어서면 고향 마을이라고 한다, 내원사 뒤에 있는 아직 암에서는 어릴 때 놀기도 했다. 철이 들면서 부산 동래고등학교 옆 법륜사 칠산동 포교당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불교학생회인 법륜 회에서 간부활동을 하며 봄가을에 불교학술제와 같은 행사도 준비했던 기억이 많이 남고, 대학시절에는 아직 암에서 방학 동안 공부했던 기억도 있다.그 기억의 하나로는 정선산 안적암에 있을 때,동국대학 이사장이었던 벽암스님이 백중행사 때다냐 가셨는데 당시는 큰스님이라는 것도 모르고있었는데 벽암스님이 열반하셨을'때 큰스님이었다는 걸 알고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절 일을 돕다가 절에서 일하는 처사와 짐승을 잡아 피홑리는 잔인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순수하게 자리를 피해 주셨던 지금의 종정 월하큰스님의 모습도 아련하다고 한다 ''아! 큰스님이라서 그런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씀 없이 자리를 피해 주셨구나 하는 기억이 새롭습니다." 불교와의 인연을 따지자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5살 때부터 할아버지 손을 잡고 사찰의 불사나 행사에 막내인 그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종가집에서 자라난 덕분에 집안에는 제사가 많았추 그럴 때면 막내인 그가 제일 앞자리에서 절을 하곤 했기 때문에 절한다는 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할아버지 따라 산문을 향해 갈 때면 들어 두었던 전생이나 부처님의 말씀에 귀가 익었고 사납게 생긴 사천왕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사찰의 자연스런 분위기가 몰에 배이게 되었다,''일체중생 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1生) 이 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면 불교아동학이라는 것도 어릴 때부터 불성을 심는 일을 어떻게 교육적으로 육성시키느냐에 달렸고, 유아 때에 사물에 대한 자연스런 기억이 아마도 좋은 교육환경이 아닐까 합니다.''

열반경(i里槃經)을 보면 역사(力士)가 씨름을 하다가 미간(簡間)에 있던 구슬이 피부 속에 들어박힌 것을 잃어버린 줄로 잘못 알고 있다가 나중에 의사가 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구슬을 잃지않았음을 알게되는 비유의 말씀도 아마 그러한 것에 연유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아동학이란 학문은 학자에서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학문입니다. 유아 때부터 불교적 심성을 기르자는 의도에서 2~30여 년 전부터 사찰에서 유치원을 운영하기 시작한 계기로 우리 동국대에서 불교유치원을 담당할 수 있는 교원을 양성하고자 불교아동학이라는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불교학에 아동학을 접목시키자는 새로운 학문을 구축하자는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불교아동학과에서 담당하는 과목은 불교과 인성심리 . 불교점선위생 . 불교와 관련된 강좌는 두강좌, 나머지는 아동연구법 . 아동심리와 관련된교과목, 종국적으로는 불교 인성심리 . 불교정신위생을 중점적으로 강의하고 있다. 이에 따르는 교재를 2~3년 내로 만들어내야 하고, 아동연구법에 관한 것도 불교를 일찍부터 접하고 불교적인 인성으로 육성시킬 수 있는 연구법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지금의 제일 큰 과제이고, 과 차원에서도 선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산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유아프로그램이 거의 개발되지 않은 상태이고 그 관계에 대한 설정도 뿌리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서양의 기독교적 정신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많아, 내용은 불교인데 형식은 기독교적입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불교교육학회 및 연구기관단체들이 많습니다. 오랜 전통과 일본에서 성행되고 있는 것들을 참고 응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공사중인 불교유치원의 지원과 활용을 효과적으로 잘 해야 합니다, 경주라는 지역성과 특수성을 고려하여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을 부모와의 협의 하에 지역 주민과 연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유아교육만큼 열의 높은 나라는 아직 없는 걸로 보면 또 다른 개념으로 발전될 것입니다,''그러한 것들을 일반화하여 교육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시키고 전인적인 불자로 키울 수 있을 때불교유아교육의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피력한다.여자들 뿐인 불교아동학과에서 청일점으로서 학문적으로나 생활면에서 불편한 점이나 애로사항을 묻는 질문에는 학문상에 있어서는 연구하는 점을 들 수가 있는데 여자들만 있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고, 오히려 주변에서 남자 혼자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들 하는데, 자신은 주위의 그러한 시선이 오히려 부담이 된다고 한다.

자신의 매력이 없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인기가 없는 것 같다며 쑥스러워 하기도 한다,불자교수회에는 불교문화대학의 간사 일을 맡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행사 때면 연락하는 연락병의 역할이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i20여 명의 회원 중에 관심을 가지고 불자 교수회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은 20~30여 명 뿐이다 순수한 신행단체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전파하는 가장 큰 동질성을 가지고 있어서 학교에서 문제 있을 때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실제로 참가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나 여러 가지 일들로 자주 모일 기회가 적어 활동이 미홉한데 회원들의 많온 동참을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불자교수회의 주된 활동은 년 2~3회 정도 사찰순례였지만, 내년부터는 봉사를 할 것인데, 사찰순례 뿐만이 아니라 불자 교수회의 역할을 2가지 하려고 소개한다.

그 첫 번째로는 대남교도소에 교화를 중점으로 하려 하는데, 일년에 한 번 정도 교수님들의 전공을 강연하면서 교화하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포항 해병대를 순방해서 강의하고 교류하려 한다고덧붙쳐 말한다

 가장 불교적인 인간이란 어떤 사람인가하는 질문에는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사명을 자각하고 그대로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동체대비(同體大悲), 그의 가장 좋아하는 부처님 말씀이다. 일체중생의 몸과 자신을 동체일신(同體一身)으로 보고 중생의 고를 없애어서 낙을 베풀어 주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측은하게 여겨구제하고자 하는 마음, 그의 말대로라면 비록 주체는 나고 객체는 제3자겠지만 주. 객체의 분리 없이 남의 슬픔이 나의 슬춈이 되고 나의 기쁨미남의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전등 이야기
육조혜능과 남악회양 /  성본스님 / 불교문화대학 교수

남악회양(南嶽懷讓, 677一744)은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正法을 계승한 인물로 널리 알려진 禪僧이다. 그가 육조혜능의정법을 계승한 인연은 『조당집(祖堂集)』 『彎燈錄』 등의 선종 자료집에서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데, 여기선 『조당집J 제3권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15살 때에 佛法의 인연을 만나,佛經을 읽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나던玄靜三藏이 설법한 뒤에 그의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출가하여 最上乘의 법을 얻어 지극히 미묘한 경지에 이를 것이며, 불법의 겉은 이치를 터득할 것입니다.'

현정삼장의 예언대로 그는 垂拱 4年(688) 출가하여, 荊小 玉泉寺의 유명한 弘景律師(634一712) 밑에서 8년간 t率學을 修學하였다. 懷讓이란 법명도 홍경율사에게서 받은 것이다.

久視 元年(7翩) 회양의 나이 23살이되었을 때, 「나는 具足戒을 받고 벌써5년이 지나는 동안 威儀를 널리 배워 겉모양은 점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불법의 진리를 배우려 해도 깨달음을 체득할 길이 없구나!」라고 자기 비판의 탄식을 하면서 새로운 求道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또 '출가한 사람은 완전한 깨달음(無爲法)을 얻어야 入天에뛰어나리라!' 라고 하면서 禪修行을결심하였다. 그때 이러한 회양의 모습을 지켜보던 坦然선사도 회양과 함께 선수 행을 위한 行神을 함께 하여 여러 선지식을 찾아 뵙기로 하고 嵩山의 慧安國師를 찾아 쐽게 되었다. 단연과 회양은 혜안 국사에게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질문하여 단연은 그 자리에서 깨달아 승산에 머물며 혜안 국사를 모시고 살게 되었는데, 회양은 혜안 국사의 지시로 曹溪의 혜능대사를 찾아 뵙게 되었다.육조혜능과 남악회양과의 처음 만난 유명한 선문답은 다음과 같다.

육조혜능이 회양에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서 오는가?' 회양선사가 말했다. '숭산에서 일부러 화상을 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옳치)않습니다. '이렇게 회양선사는 육조헤능의 문하판의 탄식을 하면서 새로운 求道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또 '출가한 사람은 완전한 깨달음(無爲法)을 얻어야 入天에뛰어나리라!' 라고 하면서 禪修行을결심하였다. 그때 이러한 회양의 모습을 지켜보던 坦然선사도 회양과 함께 선수 행을 위한 行神을 함께 하여 여러 선지식을 찾아 뵙기로 하고 嵩山의 慧安國師를 찾아 쐽게 되었다. 단연과 회양은 혜안 국사에게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질문하여 단연은 그 자리에서 깨달아 승산에 머물며 혜안 국사를 모시고 살게 되었는데, 회양은 혜안 국사의 지시로 曹溪의 혜능대사를 찾아 뵙게 되었다.육조혜능과 남악회양과의 처음 만난 유명한 선문답은 다음과 같다. 육조혜능이 회양에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서 오는가?' 회양선사가 말했다. '숭산에서 일부러 화상을 뵙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옳치)않습니다.' 이렇게 회양선사는 육조혜능의 문하에서 12년간 머물면서 수학하다, 어느날 인사를 올리고 하직을 고하니, 육조께서 '자네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 했는데, 그것을 닦아 증 득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했다.

회양은 '닦아 증 득하는 일은 없지않으나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육조는 '그 더럽힐 수 없는 것이 부처님께서 염려하여 보호하는 바이나,그대도 그러하고 나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면서 印可를 하였다.

혜능이 회양에게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어떤 물건(何物)」은 선불교외 새로운 공안으로 문제로 등단 된 것이다. 오늘날 선의 話頭에 「이 뭣고?」라는 公案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뿐만아니라 자기 자신을 照顧해 보는 문제제기의 선불교외 모든 공안이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자신은 어떤 물건(존재)인가? 너는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라는 혜능의 질문에 회양은 「설사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옳치) 않습니다!」라는 말이 육조혜능의 정법을 얻게 하고 있는 것이다.이 말의 原語는 「設t臥一物卽不中」이다. 한 물건이라는 존재로서의 자기 모습

이 있다면 이것은 집착의 대상을 설정해 버리는 존재이며, 外道의 주장이다.한 물건도 없다는 즉 「無一物」로 철저한 空의 실천적인 입장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六祖壇經』에 혜능의 偈頌에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라고 읊은 이 한마디가 바로 남종선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는데, 이 역시 철저한 깨달음의 체험으로 이룩한 空의 경지를 이 한마디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회양이 말하는「설사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다」고 한 말이나 『螳經』에서 말하고 있는 「本來無一物」은 똑같은 남종선의선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회양이 혜능의 정법을 계승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의 정신을 이은 宋代의 시인 소동파는 「한 물건도 없는 그 세계야 말로 無盡藏의 보물이 있는 것(無一物中無盡蔯)」이라는 유명한 名句를 읊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더럽힘이 없는 본래 청정한 불성을 깨닫고 일체의 망상에 물듦이 없는 각자의 불성을 잘 言蓼持해야 하는 것이다.

 

 

 

신행 상담
사성제 /  계환스님 / 불교대학 교수

사성제라 할 때의 제(諦)는 범어 satya로서 진리를 의미합니다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지요 그 첫번째가 질문한 고제(苦諪滑)인데, 성호 군의 생각에는 진리라고 하면 무언가 좀더 엄숙하고 무게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혹시 믿고 있지나 않나요? 그러나 최고의 진실은 화려하지 않고 최고의 말은 꾸밈이 없는 말이듯이,참된 진리라면 낫 누구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삶은 고통이다', 인생은 괴롭다는 것은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말입니까! 왜냐하면 이 명제는 성별과 환경. 그리고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불교는 이렇게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누구나가 갖고 있는 이성에 호소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모르느냐? 하는 반문과, 아울러 때로는 기쁠 때도 있는데 왜 그렇게 인생을 부정적으로만 보느냐고 힐난하고도 싶겠지요? 그러나 인생을 고통으로 보는 것은 졀코 염세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삶의 진실이자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기쁨도 누리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나마 그 기쁨 뒤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불안을 잠시 잊고 있는 순간에 불과할 뿐입니다.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의 실상이 고통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직시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자신이 아프다고 자각을 할 때 비로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되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프다는 증세를 느끼고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본 결과 간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술이 그 원인임을 앞 게 되듯이, 집제(集릊篆)는 바로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확실한 원인을 알았기 때문에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바로 멸제(跛諦)이지요. 그리고 이제 실질적인 치료방법, 즉 먼저 술을 끊고 안정을 취하고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만 남았듯이, 도제(徒弟)는 바로 그 구체적인 여덟가지(八正道)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직후, 우리의 인생문제와 그 해법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성제 교리가 현대의학의 치료법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은 불교가 현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공(時空)을 초월한 진리임을 입증시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불교 건강법
담석증 /  김장현 /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가끔 우연히 담석이나 신석동 몸 속의 일부 장기에 돌이 들어 있다는 검사 결과를 듣고 무척 놀라는 경우를 보게 된다 담석증은 주로 성인들에게서 발생하는데, 정상 또는 비정상 상태의 담즙이 굳어지거나 부착되어서 형성된 결정체가 담도 혹은 담낭 내부에 형성되어 격렬한 발작성의 복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흔히 말하는 가슴앓이 속병이 대부분 담석증 증상이다.

담석증의 통증은 대개 담석산통발작이라 불리는 격렬한 통증으로 나타나는데 우측 늑골 아래 또는 명치에서 생겨 점차 우상복부로 오른쪽 어깨와 등에까지 이르며 통증이 심해졌다 가벼워졌다 반복되면서 약 1一4시간 계속되는데 동통이 멎으면 언제 아팠던가 싶게 멀쩡해진다.

담석증의 증상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20一30% 환자에서 증상이 없거나 간혹 가벼운 소화불량만 있는 경우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오심구토, 담즙이 섞인 노란 물을 토하거나 혹은 발작 후 황달이나 흰색 대변을 본다. 담낭에 염증이 발생하면 오한, 발열이 나며 증상이 심해지는 수가 있는데 담낭염, 췌장염 등의 합병증을 많이 야기시킨다.

담석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겹쳐졌을 때, 지방질 음식의 과도한 섭취나 과음,담도의 염증이나 담즙의 울체, 당뇨병 및 체질적 요인 등이 원인이 된다.

담석증이 잘 발생하는 유형을 살펴보면 코르셋 대를 허리에 맨다거나 상복부를 압박한다든지, 또는 매일 앉아서만 일을 하여 운동부족에 빠진 사람, 식사 간의 간격이 긴 사람, 격심한 운동과 월경, 분만 등으로 인하여 결석을 요동시키는 경우와 또 예쁘면서 약간은 뚱뚱하고, 40대, 출산 경력이 있는 여자의 경우가 발병 확률이 높다고 한다.

담석증의 치료는 염증이 발생하여 고열이 나고 통증이 격심한 경우에는 수술 혹은 고인 담즙을 빼내는 외과적 처치가 필요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약물요법으로 치유될 수 있다.

담석증의 예방 및 자가요법으로는 술을 먹을 때 안주로 해바라기씨를 많이 먹는 것도 도움이 되며,술을 먹고 난 후 명태, 북엇국으로 조리하거나 생미나리를 즙을 내어 복용하면 좋다. 특히 복어탕이나 복어 껍질을 많이 복용하면 담석을 예방하거나 이미 생겨난 담석을 녹이는 효과를 관찰하기도 한다. 또 약물요법에는 대황, 금전초, 해금사, 조기의 머릿돌 등을 쓰기도 한다. 일상생활의 주의 사항은 달걀 노른자 등의 지방 식을 피하고 담백하고 균형잡힌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며, 변비를 미리 방지하고, 특히 억울한 일을 참거나 속을 썩이면 담즙이 울체된다고 하는데 참지말고 자기의 감정을 솔직히 상대에게 많이 표현하여서 푸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라 할 것이다.

 

 

 

불교건강법
담석증
/ 김장현 /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가끔 우연히 담석이나 신석동 몸 속의 일부 장기에 돌이 들어 있다는 검사 결과를 듣고 무척 놀라는 경우를 보게 된다 담석증은 주로 성인들에게서 발생하는데, 정상 또는 비정상 상태의 담즙이 굳어지거나 부착되어서 형성된 결정체가 담도 혹은 담낭 내부에 형성되어 격렬한 발작성의 복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흔히 말하는 가슴앓이 속병이 대부분 담석증 증상이다.

담석증의 통증은 대개 담석산통발작이라 불리는 격렬한 통증으로 나타나는데 우측 늑골 아래 또는 명치에서 생겨 점차 우상복부로 오른쪽 어깨와 등에까지 이르며 통증이 심해졌다 가벼워졌다 반복되면서 약 1一4시간 계속되는데 동통이 멎으면 언제 아팠던가 싶게 멀쩡해진다.

담석증의 증상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20一30% 환자에서 증상이 없거나 간혹 가벼운 소화불량만 있는 경우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오심구토, 담즙이 섞인 노란 물을 토하거나 혹은 발작 후 황달이나 흰색 대변을 본다. 담낭에 염증이 발생하면 오한, 발열이 나며 증상이 심해지는 수가 있는데 담낭염, 췌장염 등의 합병증을 많이 야기시킨다.

담석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겹쳐졌을 때, 지방질 음식의 과도한 섭취나 과음,담도의 염증이나 담즙의 울체, 당뇨병 및 체질적 요인 등이 원인이 된다.

담석증이 잘 발생하는 유형을 살펴보면 코르셋 대를 허리에 맨다거나 상복부를 압박한다든지, 또는 매일 앉아서만 일을 하여 운동부족에 빠진 사람, 식사 간의 간격이 긴 사람, 격심한 운동과 월경, 분만 등으로 인하여 결석을 요동시키는 경우와 또 예쁘면서 약간은 뚱뚱하고, 40대, 출산 경력이 있는 여자의 경우가 발병 확률이 높다고 한다.

담석증의 치료는 염증이 발생하여 고열이 나고 통증이 격심한 경우에는 수술 혹은 고인 담즙을 빼내는 외과적 처치가 필요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약물요법으로 치유될 수 있다.

담석증의 예방 및 자가요법으로는 술을 먹을 때 안주로 해바라기씨를 많이 먹는 것도 도움이 되며,술을 먹고 난 후 명태, 북엇국으로 조리하거나 생미나리를 즙을 내어 복용하면 좋다. 특히 복어탕이나 복어 껍질을 많이 복용하면 담석을 예방하거나 이미 생겨난 담석을 녹이는 효과를 관찰하기도 한다. 또 약물요법에는 대황, 금전초, 해금사, 조기의 머릿돌 등을 쓰기도 한다. 일상생활의 주의 사항은 달걀 노른자 등의 지방 식을 피하고 담백하고 균형잡힌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며, 변비를 미리 방지하고, 특히 억울한 일을 참거나 속을 썩이면 담즙이 울체된다고 하는데 참지말고 자기의 감정을 솔직히 상대에게 많이 표현하여서 푸는 것도 좋은 예방법이라 할 것이다.


 

 

 

불심의 창
통도사에서의 한때 /  우명주 / 불교문화대학 수업조교

일곱 살, 할머니는 사월 초파일이 되면 통도사에 가자 하셨다.

그날 아침, 동백리름을 바르고 쪽을 지는 할머니 손길은 왜 그리도 더디기만 한지 손을 꼽아가며 기다리던 며칠 밤보다 나는 더 몸이 단다.식전에 씻어 놓은 흰 고무신의 물기가 마를 즈음할머니는 한복 치마를 단속하며 집을 나서고 나의 걸음은 늘 할머니보다 얼마쯤 앞서 있다. 절 아래에서부터 맡아지던 그 술렁거림의 냄새때문이었을까? 몇 번이나 할머니 손을 놓아버려 결국은 머리를 쥐어박히고, 일주문 앞에 다다르도록 꼼짝없이 잡혀있던 손에서는 땀이 배어나온다.할머니는 왜 아버지 이름부터 부르셨을까? 연등 아래에 우리 식구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단단히 달면서 나는 내내 그것이 의아스럽다. 당신의 이름 위에 아들의 이름을 올린 그 속마음을 짐작할 충분한 나이가 안 된 나는 왠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다가 곧 잊는다. 대웅전 처마밑의 큰 연 둥 때문이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단 것이라는 말에 나는 금세 그 돈 많음이 부러워 우리 등이시시해진다. 수많은 등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재미없다. 무언가 특별함이 있어야 할 것만 같아 볼이붓는다. 그때의 나에게 '어느 가난한 여인의 등'설화를 누가 이야기 해 줬더라면 어린 마음이 조금은 덜 쓰라렸을까? 나는 괜히 삐딱해져서 무섭지도 않은 사천왕상이 무섭다고 할머니께 엄살을 부려 봤는데 다독거려 주실 거라는 내 예상은 저만큼 빗나가 나를 당황시킨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할머니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꾸중이시다. 할머니 눈에 언뜻 스쳐가는 불안감을 본 나,그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다. 지금에 와 짐작해보면 할머니께선 그 철없는 막내 손녀가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셨을까, 싶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신데, 온갖 잘못을 벌 주는 분들이신데 그분들이 무섭다니....... 철없는 손녀가 그 분들에게 벌 받는 사람이 되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으로 걱정하신 게 아닌가, 그렇게 넘겨짚어 보면 그날의 할머니의 불안에 고개가 로i덕여진다. 그러나 그ㄹ의 나는 역시 이런 짐작을 할 나이가 못 되었다.절 마당 한쪽에 놓인 우리 암소 여물통같은 무 구유에는 누군가가 던진 동전들이 가득하다''저기다 돈을 던지면 배 타고 갈 때 사고가 안니라''하는 할머니 말씀에 나도 십 원을 손에 쥐었는데 바닥이 낡아서 구멍이 나 있는 게 자꾸만 눈에 들어와 던지기 전부터 겁이 난다. 저리로 돈이 빠지면 어떡하나 하고 던진 동전은 결국 거기 빠질 수 밖에 다시 십 원을 던져 기어이 통바닥에얹어 놓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된다. 지금은 웃음으로밖에 남아있지 않는 그 행동이 그 때는 절대적인 경건함이 되었던 것은 아득한 부처님보기제도 고모집에 갈 때의 무사함이 더 절실했던 까닭이었을테다. 적어도 그때의 나에겐.

부처님도 안 계신 법당에 들어가기가 왜 그리 힘이 들었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느라 블우스 리본이 다 풀어졌다. 어린 나를 밀치던 아줌마들은 언제 그랬나 싶게 다소곳해져서 절을 하고 절을 할 줄 모르는 나, 멀뚱히 서서 불단 앞에 놓인 음식의 처리를 궁금해 하고 있다. 저것도 제사음식처럼 나눠 먹을까를 생각하다가 오늘이 제사가 있는 날임이 떠오른다. 그래서 엄마는 절에 못왔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절 입구의 수많은 장사치들 앞에서 도저히 초연해 질 수 없는 나는 참무던히도 칭얼거린다. 단추를 노루면 철봉에 매달린 원숭이가 빙글빙글 돌던 장난감을 들고 돌아오던 그 의기양양함을 무엇에 비견할 수 있을까. 그날의 환타만큼 달콤한 음료를 나는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다. 절 입구에서 저고리에 달아준 종이연꽃을 거울 위에다 조심스럽게 꽃아두는할머니를 보며 나는 깜박 잠이든다.

열일곱살, 통도사 언저리의 고등학교에 다니는나, 여름방학 보충수업에 몸이 꼬인다 영어단어도 수학공식도 머리 밖에서 나를 휘젓고만 갈 뿐,내 것이 되어주지 않는다. 누구였나, 용기를 내이선생님을 졸라주었고 우리는 마음이 먼저 가 있던 통도사 계곡으로 내달린다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심각한 얼굴로 미래를 얘기하는 듯 했던 우리들이 어느 틈에 물 속을 휘젓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선명한 것은 나의 맨발, 신발이 젖어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어 학교로 돌아오는 동안 축축했던 교복은 어느새 말라있다.돌아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부처님은 ''내센 인사도 없고, 물장난이나 하기냐1'' 잔소리 이 시고나 는 감히 ''오늘 일은 그야말로 우발적이었어요''하고 변명을 한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도 그렇게 계획된(?) 우발적 물장난을 나는 몇 차례 더 저질렀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우리는 뭔가 심심해지면 그냥 통도사에나 갈까? 중얼거린다. 어느 틈에 그 곳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교정이 되어 있다.

겨울방학 보충수업. 나쁜 용기만 잔뜩 늘어버린 나, 수업을 빼먹고 통도사 지장암 가는 길을 친구들과 걷고 있다. 아니, 그냥 걷다 보니 지장암이라는 이정표를 따르고 있다. 스산했던 겨울풍경 앞에서 작정 없이 들뜨기만 했던 것은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그날의 나는 어이없게도 그 풍경 속의 하나인 나를 대견스러워하고 있다. 그 구멍 속의 금개 구리를 분명 보았다고, 바위가 튀어나온 법당에서 부처님께 자랑했는데 부처님은 걱정스러운눈빛으로 나를 굽어보시고 계신다, 그 시선에도 나는 겁 없이 당당해져서 '이런 자리이탈도 필요한 거 아니에요'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렇게 괜한 혼란들을 부처님 앞에다 풀어놓고 풍경소리 들리던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오늘의 터무니 없음들이 나를 나쁜 인생으로 인도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나를 보며 부처님은 얼마나 헛웃음을 웃으셨을까. 그러나 아직도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어쩔 수 없음에 휘둘리고있던 나를 알고는 그냥 한번 봐 주셨을 것이다.그 때는 또 그걸 모른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올곧다는 오만에 목이 빳빳하71만 하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분명 그 통도사에서의 한때들이다. 기분이 울컥한 날, 내 정신의 고향으로 꿈틀대는 거기를 생각하면 다스릴 수 없던 마음이 스스로 백기를 들고 나선다. 대학에 쉽사리 익숙해지지 못한 채 첫 방학을 맞아 물집이 생긴 발로 찾아들었을 때, 무풍교(無風僑)의불지않는 바람은 참으로 익숙하게 나를 위로해주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그 상실의 봄날에도 통도사가 내려다 보이는 탑 근처 바위에서라면 ''할머니 잘 계신 거죠?''하고 평온하게 다른 세상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날을 나는 통도사의 모든 것에 의지해서 살아 갈 것이다.그 솔 숲, 그 바람, 그 시냇물을 감히 나의 토반이라 칭하면서. 그러다가도 어느 먼 날의 나는,그러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우리 자식놈 대학 합격시켜 달라고 떼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통도사에서, 그 부처님께 감히.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그 중년여인에게서 할머니 치마꼬리 붙들고 왔던 꼬마를, 대책 없이 엇나가던 여고생을 금방 떠올리시고 웃어주시리라는 배짱이 내게는 있다.

 

 

 

 

열린마당 1
열린 마음에 열린 불교 /  이동은 / 도서관 불교학 자료실

어느 사회에 소속되든 일단 일원이 되면, 언제일지라도 모임에서 돌아가며 하는 자기소개나 소감발표같이 한마디씩은 의무방어전처럼 치르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불교집안 식구로서 네 개도 드디어 간증(?)을 해야 할 때가 왔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역시 막막하지만 차례가 되었으니 말해보겠다.

내가 이런 차례를 맞이하게 된, 즉 불자(이 단어를 거리낌없이 쓸 수 있게 된 것은 한십년 밖에안되지만)가 된 애초의 원인은 어린이 불교학교선생님었다는 데서 시작해야 될 것같다. 칠십 연대 후반 집안의 커다란 변화-요즘의 '교통사고' 만큼이나 당시에는 진부한 이유였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절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절은 수락산에 있는 석림사라는 비구니 스님들이 계시는 절이었다. 그 절의 총무스님께서 어린이 포교에 뜻을 두고 계시다가 마침 이웃으로 이사온 신도집 딸이 대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새로 만들 어린이 불교학교 선생님으로 점을 찍으셨다. 불교에 대한 무식을 이유로 한사코 사양을 하는 나에게 스님은 그냥 아이들과 놀기만 하라고 하셨다. 말씀 그대로 놀기만 하면 되겠지 하는 무책임한 생각으로 무식을 용기 삼아 초등부어린이 반을 맡았다, 합장 인사하는 법과 절하는 법, 삼보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아이들과 같이 스님께 배웠다. 하지만 명색이 선생님이니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어린이 불교교리 책으로 기초교리를 익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내가 배운다는 부담없이 접한 불교에 나도 모르게 어느덧 푹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이 기초교리 책으로 불교를 익혔기에 나에게 있어 불교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불교는 너무 어려워서.......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를 못했으니 말이다. 물론 불 교학은 지적 단련이 된 사람이 아니고는 접근하기 쉽지않다. 불교는 부처님 말씀은 마음을 열고 자신한테 솔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절에 놀러오는 유아원 아기부터 초등학교 육 학년까지 열댓 명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옛날에 부처님께서...,.. 하며 간식 나눠먹던 수준이 어느덧 아이들이 늘어 학년별로 반을 나누고 담임선생님을 두고 음악담당 선생님까지 모시게되었다. 동생과 동생친구, 오빠친구 같은 절 신도집 딸 등 여러 인연으로 선생님을 초빙했었다. 총무스님은 교장선생님으로서 어린이 불교학교를 열성으로 지원해주셨고, 석림사 일대의 어린이는 물론 멀리 2키로 정도 떨어진 동네에서도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일요일이면 수락산 속에 있는 석림사로 모여들었다. 그 산 속의 절에 크고 작은 아이들로 빡빡하던 정경이라니! 총무스님과 주지스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우리 선생들은 그야말로 신이 나서 일을 했었다. 물론 아이들 지도 외에 선생들끼리 노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우리들에게든 따로 일요일이 없었다. 일요일이란절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보내는 것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재미가 있었다. 한 시절 '우리들만의 리그' 있다고나 할까. 우리들만의리그라니! 이건 어린이 포교 얘기를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사실이 그러했다. 그 뒤 몇 년 후 열과성(즉 신심)으로 일했던 선생들이 하나 둘 개인사정으로 교체되고 막강지원을 해주시던 교장스님도 외국유학을 가시자 그 기세를 드날리던 (정말그랬다) 석림사 어린이 불교학교도 김이 빠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에서 한참 더 남아 있었고 주지스님께서도 계속 변함없이 지원을 해주셨지만 신바람이 빠지자 어린이 불교학교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건 우리 절의 경우만이 아니라 어린이 포교의 전반적인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나의 무지의소치일까모르겠다. 칠십 년대 팔십 년대 초반 어린이포교 활동은 참 활발했었다. 아마 지금의 청년이 된 불자 중에는 어린이 불교학교 출신이 적잖을것이다. 그 때 요원의 불길처럼 불교계에 일었던 어린이 포교운동은 절대 한 때의 붐처럼 일었다 지나가는 캠페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다 아는데.....,.

이렇게 불교에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수준의 어린이 불교학교 선생으로 불교를 접했지만 그 인연을 계기로 내 인생이 정해졌다. 좀 거창한 표현이 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교와 관련이 없는 내생 활은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장,가족, 친구, 관심사 및 과외활동이 다 불교와 연관되었다. 심지어 읽는 책도 불시 위주로 읽었다. 옛날 온갖 것에 관심을 갖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분주했던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만 이렇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재미를 쫓아 한눈을 팔며, 저녁이면 오늘도 못 깨치고 하루가 지나간다고 통곡했다는 옛 스님의 일화에 따끔 서러워만 한다. 어린이불교학교의 인연으로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 그 중에서도 석주 큰스님, 어린이 불교학교 시절 교장스님이었던 능인 스님은 우리 선생들을 데리고 당시 청소년 교화연합회 총 재셨던 큰 스님께 이따금 씩 인사를 다니셨다. 그렇게 뵙게된 큰 스님은 밝고 맑은 분이셨다. 감히 닮고싶은 분이었기에 자주 뵈러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복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족과 부처님을 만난것, 석주 큰스님을 비롯한 여러 좋은 인연들 그냥 좋은 인연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아쉬운 소중한 인연들, 생각하면 원한 것은 다 이루어 진 것 같다.그래서 좋은 원을 갖게 해달라고 원을 세운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보살같이, 살게 해달라고,아니 살겠노라고 기도한다. 또 늘 기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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