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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5월호 / 통권 23호 / 불기 2540(1996)년 5월 1일 발행

 

 

 

 

고승법어

동국의 종/녹원 큰스님

 

정각도량

백인일색/이도업 스님

 

전등이야기

고행의 의미/이법산스님

 

일주문

진흙 속에 핀 연꽃, /이영자

 

정각논단

불교음악/박상진

 

불심의 창

외화내빈 문화구조의 허실/홍윤식

 

교리강좌

무명/정승석

 

경전의 세계

열반경/이만

 

동국과 불교

전란중 재단의 경영 노력/이봉춘

 

비유와 설화

철판을 배에 두르고 다니는 사나이/조용길

 

가람의 향기

봉정사/편집부

 

불자탐방

주철식 기관장 / 편집부

 

열린마당

기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도수

 

신행단체

한마음

 

불교 건강법

피로하십니까? / 김장현

 

 

 

고승법어

동국의 종 / 녹원 큰스님


일찍이 구한말에 우리나라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열풍이 휘몰아칠 때에 우리 불교계의 선각자들은 이 민족의 장래와 교육을 걱정하시고 삼보(三宝)의 정재(淨財)를 쾌히 투척하여 불법(仏法)을 수호할 목적으로 본 동국대학교를 설립한지 금년으로 90주년이 되는 해일뿐만 아니라, 경주 캠퍼스가 개설된지도 18주년이 됩니다.

이와 같은 역사와 사명감을 갖고 있는 우리 대학은 90주년을 맞이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여러 가지의 중․단기적인 교육환경발전계획과 각종의 기념행사들을 수립한 가운데, 그 행사의 일환으로 경주 캠퍼스의 정각원에 우리 대학의 무궁한 발전과 부처님의 법을 오래도록 선양하기 위하여 “동국의 종” 주조불사(鑄造仏事)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작년에 이 일을 시작하여 불과 일년만에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훌륭한 종각과 함께 월성(月城)에 새롭게 법음을 전할 범종(梵鐘)이 탄생하게 된 것은 이 일을 맡아서 끝까지 잘 마무리한 정각원장의 노고도 치하할 일이지만, 아마도 여러 교직원들과 신도님들의 성원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 경주는 우리나라의 역사상 천년의 고도로서 언제나 우리 국민들에게 마음의 안식처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길이 보전해야 할 많은 문화재들이 있지만 그것의 대부분이 불교 문화재이듯이 오늘 또 이렇게 유서 깊은 경주에 만년을 지탱해 줄 위풍 있는 범종을 완성한 것은, 봉덕사의 종을 1200여년 전에 효성스러운 두 임금이 자기의 선고(先考)를 위하여 십  여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것과도 버금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사찰에서 범종을 치는 것은, 이른바 법구(法具)의 사물(四物)로서 법고(法鼓)가 축생들의 해탈을 위하고, 목어(木魚)가 어류들을 위하며, 운판(雲板)이 조류들을 위하여 쳐지듯이,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조석으로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범종은 본래 증일아함경(増一阿含経, 第14巻)같은 데 보면,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아난(阿難)이 부처님의 설법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하여 건치(楗稚)라는 악기를 쳤다는 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는데, 그 악기를 특별히 범종(梵鐘)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범(梵)이란 말은 청정(淸浄)이나 적멸(寂滅)등의 뜻인데, 이를 진리에 비유하여 이 우주의 심오한 진리의 소리를 은은히 들려주는 바로 그 종(鐘)이라는 의미에서 범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많은 중생들은 이 범종의 소리를 듣는 순간만은 진리의 소리를 듣는 것이 되기 때문에 번뇌가 없어지고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 없어져서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되므로 사찰에서는 조석예불 때마다, 중생 구원의 뜻으로 종을 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청정한 범종의 소리가 온 법계의 구석구석에까지 온화한 바람처럼 혹은 감미로운 메아리처럼 널리 퍼져서 어둠의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의 법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개교90주년을 맞은 우리 동국대학교는 21세기를 目捷에 두고 교육개혁의 물결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지표와 효율적인 학사 운영으로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거듭나야할 중차대한 사명과 책무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대학이 가장 세계적인 대학임을 생각할 때 160년 동안 한국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토양이 된 불교를 건학이념으로 교육하고 있는 동국대학교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대학이며 세계적인私学이라고 自負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가 이룩한 옛 仏国浄土에 우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설립되었고, 오늘 仏音을 전파하는 동국의 梵鐘이 打鍾되게 된 것은 동국정신의 구현과 동국발전을 위해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캠퍼스 안에 모든 중생들의 원력을 성취시켜주고, 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약해줄 수 있는 훌륭한 범종이 완성되었으므로 이는 우리 동국인 뿐만이 아니라 이웃 주민들에게도 선업을 닦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이렇게 단합되고 신성tm러운 불사(仏事)에는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력이 함께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심과 보현보살의 연명력(延命力)과 문수보살의 지혜력이 함께 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이 梵鍾 仏事에 애써주신 송석구 총장님을 비롯한 이도업 정각원장 스님 그리고 평소에 선입을 많이 쌓고 이에 동참하신 여러분들과 오늘 바쁘신데도 범종 타종식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부처님의 慈悲光明이 고루 비추시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法語로 가름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각도량

백인 일색(百人一色)  / 이도업(경주캠퍼스 정각원장)


현대는 색깔의 시대라 한다. 뚜렷하게 자기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크게 대접받는 그런 사회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라 단   한가지라도 특수성이나 전문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크게 환영받고 출세할 수 있는 그런 사회라는 뜻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워 들이는 일을 혼자서 담당하던 시대에서 뿌리는 일 따로, 거두의 들이는 일 따로 식으로, 분업화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산업 사회는 百人이 百色이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자기색깔, 자기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百人百色의 전문성에 의해서 양질의 상품이 개발되게 되었고 단시간 내에 대량생산의 과업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서 뿌리는 일, 가꾸는 일, 거두워 들이는 일을 혼자서 담당하던 50년대보다 우리는 지금 물질적으로는 아주 풍부해졌고 생활면에서는 대단히 편리해졌다.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했고 선진국 대열에 끼여 보자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결과 GNP는 10,000불을 넘어 섰고 아시아에서는 네 마리 비룡(飛龍) 중의 하나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하나 있다. 우리 같은 범부중생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5․6십년대보다 더 풍부해지고 더 편리해졌으면 그와 비례해서 그만큼 불신과 불안과 불만이 적어져야 할 텐데 지금 우리 사회는 전연 그렇지가 않다. 자식과 부모가, 학생과 교수가, 야와 여가 서로 불신하고 각 계층 계층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살자고 밤잠 설치며 허리끈을 동여매고 일한게 아니었는데…….

분명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정치를 잘하자는 것도, 산업화 선진화하자는 것도, 민주화를 목이 메이도록 부르짖은 것도, 労와 使가 목숨까지 걸어 놓고 박이 터지게 싸운 것도 마음 편하게 살아 보자고 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불신 불안 불만 덩어리로 굴러가고 있으니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에 틀림없다.

잘못의 첫째는 百人이 百色이기를 너무 강조했던 점 때문이다. 전문 지식만 습득하면 만사 오케이일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대학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 전문지식의 습득과 보편적인 교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 아닌가? 백인 백색(百人百色)의 전문성만 강조했지 백색(百色)이라는 다양성(多樣性)이 社会라는 거대한 룰 속에서 전체로서 조회할 수 있는 지혜의 끈을 놓쳐 버렸던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 않는가. 전문성과 전문성을 꿰어 조화시킬 수 있는 끈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적인 교양이다. 전문지식만 가진 A와 B가 만나면 한두 마디의 통성명으로 대화는 중단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상대편의 전문지식에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끊기니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생기니 불신이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각자 자기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구와도 얘기할 수 있는 보편적인 교양(지혜)을 습득시켰더라면, 철학이나 보편적인 종교과목을 학교에서 그렇게 찬밥 먹이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부조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잘못은 百人이 一色인 점을 망각한 것이다. 百人一色, 이것은 부처님께서 크게 외치신 일대 선언이다. 人間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현상적으로 보면 그 업(業)에 따라서 外的인 모양새는 百色이고 内的인 心相 또한 各色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百人이 一色이요 同色이라는 것이다. 누구나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同色이요, 좀 더 적극적으로 만인이 부처다 라는 점에서 一色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와 나는 仏性이라는 동질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색이요 만인의 불성(仏性)에는 추호의 차이도 없이 똑같기 때문에 一色이라는 것이다. 百人이 一色이라는 사실, 一切衆生이 개유불성(皆有仏性)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살아오지 않았나, 너와 내가 모양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전문적인 기술이 다르고 직분과 역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우리는 형제이며 하나라는 동질임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勞와 使, 학생과 교수, 여와 야, 남과 북, 동과 서, 그리고 종교와 종교가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 해오지 않았겠는가 “一切衆生은 개유불성(皆有仏性)이다.” 참으로 위대한 선언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카스트라는 색깔로 사회 계층이 나뉘어 서로 반목하며 질시하고 있었다. 그때 부처님은 큰 목소리로 선언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피부색이 다르고 직업을 달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 존엄성에 있어서 동일하며 평등하다고. 오늘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모두의 동질성을 자각하고 인식해야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진정한 동체대비(同体大悲)는 발현될 수 있다. 百人百色의 전문성을 상보성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고 百人이 一色이라는 동질성의 자각으로 同体大悲를 발현시켜야 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重要한 일은 百八百色의 전문성만의 강조보다는 百人이 一色이라는 동질성의 自覺인 것이다.

 

 

 

 

전등이야기

고행의 의미 / 이법산(서울캠퍼스 정각원장)



삶의 길은 고달프다. 그러나 수행의 길은 즐겁다.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고행이라 표현하지만 수행이 고행이라면, 수행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도 역대 스님들도 수행으로써 높은 도(道)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수행이 괴로움으로 느껴졌다면 큰 진리는 결코 깨달아지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살이가 괴롭지 않다면 행복은 추구되지 않을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괴로움을 괴롭게 받아들이지 말고, 괴로움으로 인하여 행복을 찾아 얻을 수 있는 동기가 유발되고, 이를 극복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그 괴로움은 희망과 광명을 비춰주는 즐거움으로 변화될 것이다.

승나(僧那)선사는 중국 선종의 제2조 혜가(慧可)선사를 만나 설법을 듣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승나선사는 제자 혜만(慧満)에게 말했다.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은 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도움에 있을 뿐이다. 만일 본심(本心)에 계합하여 마음대로 하는 참 광명을 얻으면 고행은 흙을 뭉쳐서 금을 이루는 것 같거니와 고행만을 힘쓰고 본심을 밝히지 못하고 사랑과 미움에 얽매이면, 고행은 그믐밤에 험한 길을 지나는 것 같다. 네가 본심을 밝히고자 하거든 자세히 살피고 관찰하라. 색을 만나고 소리를 만날 때에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있음인가 없음인가. 이미 있음에도 없음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 구슬이 오롯이 밝아 항상 세간을 비치되 한 티끌만한 간격도 없고 잠깐 사이의 끊임도 없다”(경덕전등록 제3권 승나선사)

참된 고행은, 진흙을 뭉쳐 금을 만드는 것만큼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맑고 밝은 본심의 참 성품을 들어내는 진리의 길이다. 고행은 캄캄한 그믐 밤길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신념과 용기의 든든한 마음으로 무장하되 알 수 없는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살펴 간다면 경계인 어두움의 현상에 빠지지 않고 가만히 움트는 새벽을 맞게 될 것이다.

혜만은 승나 선사의 지시대로 수행한 결과 마음에 구슬이 오롯이 밝았으니, 여의주는 곧 본심자성이요, 이 여의주의 마음은 항상 밝아 세상을 두루 비추어 자재로히 제자를 제접하고 여러 생명을 구원케 되었다.

 

 

 

 

 

일주문

진흙 속에 핀 연꽃, 處染常淨 / 李永子(불교대학 교수)

 

잘 가꾸어진 정원에 우아하게 핀 목련을 볼 때도 있고,  가끔 산자락이나 길가에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피어있는 들풀꽃을 보기도 한다. 정성어린 손길을 느끼면서 아름다움을 살리고 피우고 있는 정원수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언덕 길가에 핀 들꽃은 각각 모두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딛고 성장해 간다. 들풀꽃은 들풀꽃대로 정원수는 정원수대로 삶을 이어가는 역정이 있지만 그러나 모두 마른 흙에 묻혀서 피어있다. 마른 흙에 피었다고 모진 비바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뭍에 핀 것은 물속에 피는 것과는 다른 안이함이 있다.

물속에 피는 꽃은 연꽃이다. 연꽃은 진흙의 연못 속에 핀다. 우리나라에는 흰색, 노란색, 분홍색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집트가 원산지이지만 지금은 전세계에 퍼져있다.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프랑스 파리에서 1시간 가량 세느강을 끼고 가면 유명한 화가인 끄라우드․모네가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크고 아름다운 정원에 연꽃이 화사하게 핀 연당이었다.

연당의 연꽃이 불교의 상징 꽃이기 때문에 관리책임자들이 정성을 기울이지 않아 죽어버렸다던 우리의 독립기념관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는 나에게는 더 큰 감명을 안겨 주었다.

95년 10월 중순의 가을 날, 가지각색의 연꽃과 어울린 연당은 아름다웠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다. 특히 대승불교를 상징한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보살이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삶을 굳세게 이어가는 사람이다.

법화경의 종지용 출품에는 이 보살을 이렇게 표현한다.

 

-보살의 도 잘 익혀서

 세간에 물들지 않음이

 마치 연화가 물에 잠겨 있듯이

 땅에서 솟아 오른다.-

 

우리는 말로는 보살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오염된 세간, 사바세계에 머물면서 거기에 오염되지 않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 물 속에 피면서도 그 싱싱한 꽃핀이 물에 젖지 않는다. 물에 젖지 않을 뿐 아니라 연화의 크고 보드라운 색깔을 그대로 만개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사는 이상, 이와 같은 보살의 삶을 지향해 가야 할 것이다.



 

 

 

정각논단

불교음악 / 박상진(국악과 교수)


현대의 포교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음악을 수단으로 하는 포교를 으뜸으로 친다. 어느 사찰이든 법당 안에 피아노 한 대쯤은 있다. 법회 때에도 삼귀의를 시작으로 찬불가, 청법가, 사홍서원을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독경도 하고 발원문도 낭독하고 설법하고, 공지사항을 발표하는 순서로 대부분 법회를 행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순서는 기독교의 예배보는 순서와 거의 흡사하다. 산중불교에서 도시불교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법회의식의 순서나 분위기가 기독교의 예배의식과 동일하다 하는 것은 논외로 하고자 한다. 다만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찬불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제도는 일제 때부터 비롯된다. 음악교육의 내용은 모두 서양음악이다.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찬불가를 작곡하게 되면 당연히 기독교의 찬송가와 같은 찬불가가 된다. 왜냐하면 서양음악의 뿌리는 그레고리안 성가이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범패와 비슷한 8세기 경에 발생하였다. 서양음악은 그레고리안 성가가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해서 현대에 이른다. 그러므로 서양음악으로 작곡된 찬불가는 찬송가를 닮은 음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버터만 먹고 산사람은 김치의 훌륭한 점을 모르듯이 찬송가를 닮은 찬불가이든 피아노 반주에 의한 것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차라리 이러한 강변은 나은 편이다. 더 큰 문제는 불감증이다. 법당에서 목탁치고 염불 하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 치며 찬송가식 찬불가를 부른다. 목탁치고 염불 할 때는 부처님 정서이지만 피아노 치며 찬불가를 부를 때는 분명히 다른 정서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불교의 현대화라고 착각하게 된다.

특히 어린이 법회는 더욱 심각하다. 어린이 법회 중에서 불교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주고 오래 기억되도록 하는 수단은 노래와 시청각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시청각 교육은 전무한 실정이고 보면 찬불가를 부르는 노래순서는 목탁소리와 독경소리 다음으로 어린이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불교적인 정서로 기억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인데 피아노 반주에 의한 찬불가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나는 어린이 법회는 음악의 비중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매우 높아 어린이 포교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에 대한 불감증으로써는 이런 것들을 충족시키기에 어렵다고 본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인 중 카톨릭 신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카톨릭에서 우리나라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판세가 뒤바뀌었다. 가장 신뢰받는 직업도 신부란다. 불교의 미래는 어린이 포교에 달려 있다. 가장 불교적인 꿈나무를 키우는 데 있어서 음악만큼 훌륭한 수단은 없다. 이 음악이야말로 가장 불교적이어야 한다.

불교는 우리 민족의 운명과 늘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대부분이 불교문화이다. 문화재도 불교문화재가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불국사, 석굴암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불교문화재의 우수성을 세계가 입증해 준 셈이다.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는 이미 오래전에 세계가 인정하였다. 그 음악이 바로 불교음악에 뿌리를 둔 국악이다.

국악의 판소리는 범패의 화청에서, 영산회상은 영산회상불보살을 노래하던 성악곡에서 기악곡으로 발전된 대표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국악이 불교음악이다, 아니 국악이 내 음악이다라는 것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아니 국악인지 조차 무감각하다. 오히려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의 토착화를 부르짖으며 영국찬송가, 미국찬송가를 버리고 국악을 자기음악화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자기가 난 자식을 외면하고 기독교에서 버린 찬송가를 다시 주어다가 열심히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불교방송에 다이얼을 맞추면 음악을 듣고서는 기독교방송인지 불교방송인지 구분이 안된다. 한복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세계 속에 나아갔을 때 인정받듯이 국악의 음악성과 예술성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였다. 불교에서는 국악을 집안에 불러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내 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꾸어 주기만 하면 된다. 이미 출신성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같은 식구로서 인정만 해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가문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세계화를 위해서 낮은 코를 높이고 까만 머리를 노랗게 물들일 수는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불교가 가장 한국적이고 음악이 가장 불교적일 때 한국불교는 세계 속에서 돋보일 것이다.

 

 

 

 

불심의 창

外華内貧 문화구조의 허실 / 홍윤식(예술대학원장 ․ 박물관장)



지난달 하순경 대학가에는 졸업 시즌을 맞아 바쁜 나날이 연속되었다. 대학의 규모가 커지고 대학 수도 늘어나니 자연 졸업식이 성대해지고 10여 일에 걸친 대학가의 졸업축제 분위기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입학하여 형설의 공을 쌓아 그 결과를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는 날이니 그 당사자로서는 부푼 가슴에 가득 차게 될 것이고 학부모나 그들을 지도하였던 교수들도 보람을 느끼면서 축제분위기를 자아내게 된다는 것도 교육계에 수십년간 몸담아 오면서 쉽게 느끼곤 하였던 일이라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성대하고 화려하기까지 보이는 오늘날의 대학 졸업광경에서 교육의 보람은커녕 서글픈 심정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됨은 웬일일까. 그것은 졸업식장에 참석하여 졸업의 의미를 되새기는 내성적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야외에서 꽃다발을 주고받거나 요란스럽게 사진촬영이나 하면서 들뜬 마음을 외부적으로 한껏 표출하는 것이 대학졸업식의 참모습처럼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 많은 졸업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대학의 시설이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되어지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하나 이 같은 문화현상은 졸업식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지적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평생의 반려자를 맞이하는 결혼식의 풍경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즉 작금의 결혼풍경은 결혼의 의미를 내성적으로 보다 충실히 하려는 마음의 다짐보다는 많은 시간과 경비를 부담하면서 갖가지 모습의 기념촬영을 하여 결혼식의 의미를 외부적인 양상으로만 표출하고 있음이 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뿐이겠는가. 국민소득 만불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경제구조는 어떠한가. 자동차산업의 수출실적과 조선기술의 선진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경제의 선진국 대열에의 진입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지만 심한 대일무역 적자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은 웬일일까. 모르기는 하지만 이 같은 사실도 내부적으로 기술축적을 하지 못하고 外華内貧의 산업구조에 의존하고 있음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이상과 같은 문화현상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문화구조를 이루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外華内貧의 문화구조가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은 채 생활문화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승용차의 선호현상이나 대형아파트의 선호현상 등이 그와 같은 것이다. 이 같은 문화구조는 자기 과시욕과 이기주의를 팽대시켜 문화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키고 융화력을 약화시켜 종국에는 문화의 내실과 축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일찍이 조선시대 성리학이 선비정신을 고양시켜나 갔다는 긍정적인 면을 인식하면서도 조선 후기가 되면 空理空論의 명분론에 사로잡혀 文化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実事求是의 実学思想이 발로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을 한바 있다. 그러한 사상은 성리학에서 뿐 아니라 불교사상에서도 韓龍雲의 仏教維新論등을 통하여 발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상은 주체성의 회복을 통한 문화의 내향성과 창조적 역량을 길러다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그러한 사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外華内貧의 문화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여 외향적인 문화에 치중하는 문화의식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 계층에 만연되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문화현상을 보면서 다시금 오늘의 실학사상을 제창해 본다.

 

 

 

 

교리강좌

무명  / 정승석(불교대학 교수)


음주 운전의 위험성은 운전자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음주 운전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자신은 술을 마셨어도 운전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술 마시고 운전하면 차가 더 잘 달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면 그 주장은 착각의 극치라고 웃어 넘길 만한 농담에 불과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음주 상태에서는 차가 더 잘 달린다는 것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음주 운전으로 사고를 낸 경험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정상이 아닌 감각으로 운전하면서도 자신은 정상적인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차가 서행하거나 정지해 있는데도 잘 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서 뒤따라 가다가 앞 차를 들이받는다.

이 같은 음주 운전의 경험을 우리는 단순히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운전자가 음주 상태에서 운전에 대한 기본 상식을 몰랐거나 잊어 버렸기 때문에 사고를 낸 것은 아니다. 음주 상태에 있는 자신은 현재의 상황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을 몰랐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은 음주 운전자의 어리석음, 즉 음주 상태의 의식과 같은 것을 뜻한다. 무명의 본래 의미는 ‘진실에 대해 어두운 것’이며, 따라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아는 것’이다.

흔히 무명을 무지라고 설명하는 것은, 무명을 말 그대로 풀어서 우선 이해를 도모하기 위함일 뿐이다. 무명은 ‘명’ 즉 밝음이 없다는 말이고, 명은 지혜․지식․학문을 뜻한다. 이 같은 문자 해석에 의하면, 무명은 곧 무지를 뜻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불교를 포함한 인도 철학 전반에서 무명은 결코 ‘지식의 결여’인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무명은 모든 번뇌의 근원이자 고통의 근원으로 간주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무명은 나무의 뿌리이고,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번뇌이다.

무명을 굳이 무지라는 말로써 이해하고 싶다면, 그 무지는 그냥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명의 의미에 적합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 곧 무명이라는 점에서, 무명은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염처경(聖念処経)』이라는 불전에서는 무명을 혼취(昏酔), 즉 술에 취한 혼미 상태로 비유한다. 우리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이것저것을 분별한다. 음주 상태의 대화에서는 오히려 모두가 유식하고 평소보다 더 시비를 잘 가린다. 그러나 그 분별이나 유식함이 바르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무명을 음주 상태로 비유하여 설명한 것은, 비록 분별은 있더라도 진실한 지혜가 없는 것이 무명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성실론』에서 이 점을 “사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더라도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부연한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다고 하여 무명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무명에 싸여 있기에는 유식자나 무식자나 서로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음주 상태에서는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던 호기와 충동이 저절로 표출되어 무절제한 행동을 유발하듯이, 무명은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의지로서 발동한다. 이 점에서 인간은 애초부터 무명에 의해 태어나서 무명에 싸여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무명에 싸여 있는 인간의 실상은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고정된 관점에서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항상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고 살아간다. 사물에 대해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진실이라고 단정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나’가 자기를 유지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항상 변하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릇된 인식이자 바른 인식의 결여이며, 곧 무명이다.

또 윤리적으로 말하면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며, 인간은 선과 악이 엄격히 분리된 상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선일수도 악일수도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오직 선이거나 오직 악인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이와 같이 윤리적으로도 절대적인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진실이다.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곧 무명이다. 선이 아닌 것을 선으로 알고 악이 아닌 것을 악으로 아는 데서 번뇌는 싹튼다.

세계의 무상함이 진실이라면 절대적 자기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고 영원한 어떤 것을 상정하여 집착하는 오류가 우리에게 부착되어 있다. 무명이란 우리에게 부착된 그 오류를 가리킨다. 바른 인식의 결여인 무명은 결국 우리의 심리 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더럽히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무명은 번뇌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 무명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면에서 정의할 수 있다. 무명은 우리의 주변 세계, 즉 대상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서의 무지이며, 이는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으로 아는 허위의식이다. 다른 한편으로 무명은 삶의 주체인 자기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며, 이는 번뇌의 원인인 동시에 번뇌 자체이기도 하다.

 

 

 

 

경전의 세계

열반경 / 이 만(불교문화대학 교수)



이 경전은 흔히 대반열반경(大般涅槃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팔리어 대장경 중에서는 장부(長部)의 제l6경에 해당된다. 특히 이 경전은 장부 가운데서도 그 내용이 긴 것으로 부처님께서 만년에 왕사성을 출발하여 열반지인 쿠시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과 그 행적에 관하여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어서 부처님의 최후의 모습을 살피는 데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데 이 열반경은 그 소속이 어느 부분, 즉 아함부에 속해 있느냐, 아니면 대승경류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도 다르고 또한 주요사상도 다르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팔리어로 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経)은 소승계통의 열반경류로 한역 된 것 중에서는 장아함경 가운데의 유행경(遊行経)이 바로 이 경전에 해당된다. 그 내용은 부처님 스스로가 자신의 입멸을 통하여 인생의 무상함과 죽음에 관한 교훈을 우리 중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데, 우리가 죽음에 관하여 이를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극복했을 때에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죽음이란 태어남을 위한 전제조건이며, 태어남은 죽음이 전제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의 짓이지 인생을 달관한 현명한 사람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부처님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어떠한 신화나 문장가들의 윤색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평소 인간 석가의 참모습을 그대로 가식 없이 전하고 있는 데서 이 경전의 신선함이 유독 돋보이는 것은, 아마도 부처님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삶을 살다가 갔음을 사실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충격이 아닌가 한다. 이에 반하여 대승경전사상의 경전에서는 열반사상을 종교적 내지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강조한 것인데, 부처님의 그것은 영원한 세계 속에서 잠시 동안의 육체의 소멸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분은 결코 입멸하지 않는 것이며, 법신으로서 이 세계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안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불성을 잘 개발하면 그 법신과 합일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단계로서 인생을 긍정적이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 때에 가능하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대승열반 경에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의 큰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몸(仏身)은 언제까지나 상주(常住)하다는 것이며, 열반은 바로 상락아정(常欒我浄)이고, 일체 중생은 모두가 부처 될 성품을 지니고 있다[悉有仏性]고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불신의상주절을 보면 그 수명품(壽命品) 등에서 이르기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인간이나 천상, 땅이나 공중에 있는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이 이래의 바다로 흘러가는데, 이 바다는 영원한 것으로서 마치 부처의 몸도 이와 같이 수명이 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래 부처는 생(生)이 아닌데 생으로 나타나며, 멸(滅)이 아닌데 멸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므로 육신을 떠나 법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즉 육신에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법신을 누구나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둘째의 강령인 열반의 상락아정설에 관한 내용을 보면, 위에서와 같이 부처의 몸이 상주하다면 이는 무상이 아니라 항상[常]하는 것이며, 그것이 항상 한다면 진실한 자아[我]나 큰 자아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것[浄]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거기에 머무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운 경지[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고귀덕왕보살품(高貴徳王菩薩品) 등에서 말하기를, 영원하고 즐거우며, 진정한 자아이고, 또한 청정한 것이 큰 열반이므로 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마치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괴로운 생사의 바다를 건너가게 진실한 가르침을 보여주고, 큰 즐거움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선악에서 벗어난 것이고,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면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편안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 번째의 강령은 모든 중생들이 본래부터 성불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설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막연하게 일체 중생의 실유불성설(悉有仏性說)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성이란 바로, “일체 모든 부처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인 중도의 종자”라고 하여,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불성이 있다고 해서도 안되고, 또한 불성이 없다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집착심과 허망성에서 떠날 것을 강조한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불성이 없다는 일천제(一闡提)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는 설하고 있다, 이 경전의 중국에서의 전역(傳訳)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1) 동진의 법현(法顯)이 각현(覺賢)과 함께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経 : 416~418年)이 있고, 2) 북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経․北本涅槃経 : 416~423年)과, 3) 혜엄(慧嚴)과 혜관(慧観) 및 사령운(謝靈運) 등이 북본열반경을 기초로 하고 여기에 법현과 각현의 것을 대교(対校)하여 남본열반경(南本涅槃経)을 만든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열반경에 관한 중국에서의 주석서로는 1) 양 나라 보량(宝亮)의 대반열반경론(論) 71권(509年)과, 2) 수 혜원(慧遠 : 523~592年)의 대반열반경의기(義記) 10권, 3) 수 길장(吉藏 : 549~623年)의 대반열반경유의(遊意) 1권 및 4) 당 장안(章安 : 561~632年)의 대반열반경소(疏) 33권 ․ 동 현의(玄義) 2권 ․ 동 현의문구(玄義文句) 2권 등이 있고, 우리나라의 주석으로는 원효의 열반경종요(宗要) 1권(現存)과 동 소(疏) 5권, 경흥의 열반경소 14권 ․ 동 술찬(述賛) 14권 ․ 동 요간(料簡) 1권 ․ 현일(玄一)의 대반열반경료간(料簡) 1권, 의적의 열반경강목(網目) 2권 ․ 동 소(疏) 16권 ․ 동 의기(義記) 5권 및 태현의 열반경고적기(古迹記) 8권 등이 있다.

 

 

 

 

동국과 불교23

전란중 재단의 경영 노력 /이봉춘(불교문화대학 교수)



대학본부의 대구피난에 이어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1년간의 전시연합대학을 거쳐 우리 대학만의 단독 개교가 가능했던 것은 그 배경에 불교종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남산동 동화사 별원에서의 추억어린 피난생활, 부산 신창동 경남 교무원 임시교사에서의 다행스러운 개교가 다 종립대학으로서의 인연과 배경을 갖고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그러나 교사 및 교육시설 교수들의 생활 등 전시상황 하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고,  여기에다 대학운영 또한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당시 김동화학장은 이 같은 비상시국과 혼란기의 대학운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 강의는 점차 본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바로 이럴 즈음에 한가지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김동화학장의 돌연한 사임이었다.

어느 대학이나 겪었을 혼란의 시기이지만, 우리 대학이 맞은 수난 앞에 이를 대처하는 데는 방법상의 차이와 다소의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부 교수와 학생들 간에는 학장의 업무방식이 미온적이라거나 간혹 불공정한 인사처리가 있다는 등의 불평이 대두되었고, 이윽고 그 영향은 외부로까지 파급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이 많은 피난지에서 자칫 학원분쟁의 씨가 될 수도 있는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때가 때였던 만큼 크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재단과 대학에서는 곧 사태수습에 나서 거의 사태가 원만하게 수습된 1952년 5월, 김동화학장은 재단측과 학생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용퇴하고 만 것이다.

김동화학장이 본의가 아니었지만 학내 행정에 적게나마 착오가 생긴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은, 선생의 탈속한 성품과 또 학내에 퍼져 있는 여러 가지 잡음을 조속히 해소 시키려는 애교심에서였다. 그런데 김학장의 용퇴와 더불어, 그와 관련된 일에 깊이 개입하였던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정두석교수도 또한 사퇴하였다.

김학장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학장직에는 이미 칠순이 넘어 심신 양면으로 활동기를 훨씬 지난 권상로교수가 취임하였다. 따라서 다소의 불안도 없지 않았지만 김동화학장이 합동숙소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보좌하였고, 또 권학장의 학문적 권위와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지도력이 무언의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대학은 정상을 되찾고 재단측과의 유대 또한 더욱 긴밀해지고 있었다.

한편, 이 무렵의 재단의 정비 및 대학경영을 위한 노력에 대해서도 일변하지 않을 수 없다.

8․15 해방 이후 국토의 양단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은 전국에 걸쳐 토지를 가지고 그 토지의 생산물 수입으로 학원을 유지하던 사학재단이었다. 우리 대학을 경영유지하는 동국학원의 경우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토지를 기부한 사찰의 지역이 38선 이북에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그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그래도 8․15 직후에 보고된 재단의 토지면적은 무려 1,505,713평에 달하여, 단연 타사학재단이 따를 수 없는 확고한 재정적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다 해방 이듬 해인 1946년 5월 20일에는 다시 전국 사찰에서 토지 200만평을 배분 증자키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러나 해방 후의 정치적 혼란과 장차 토지의 私有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항간의 비판적인 여론에 자극받아 각 사찰에서는 기부키로 한 결의를 무시하고 토지를 매각처분하게 돼서 토지증가가 여의치 못하였다. 따라서 1947년 11월 1일의 제4회 중앙교무회에서는 전국 사찰림의 2할을 동국대학의 건축기금으로 동국학원에 배분 기부키로 결의하였다. 이때 기부키로 의결된 전국 사찰림의 2할은 17,388여 정보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사유림만 완전히 동국학원의 재산으로 확보된다면, 동국대학의 유지경영에는 별로 재정적인 곤궁을 느끼지 않게 되어, 학원의 비약적인 발전이 기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희망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은 1950년에 공포된 토지개혁과, 이어 돌발한 6․25 동란이었다.

전격적인 토지개혁으로 과거 토지생산물의 수입으로 경영되어 오던 사학재단은 하루 아침에 재정적 기반이 무너지고, 학생의 납입금에 의존해야하는 비운에 빠지고 말았다. 동국학원의 경우, 해방 당시 1,507,713평에서 대학 승격 후 시설확충을 위해 604,983평을 매각하고 848,701평이 남아 있었는데, 이 또한 소작인에게 5년 연부로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가로 동국학원이 받은 것은 농림부 발행의 地価증권 5매 6,787石9斗와 문교부 발행 文敎地価 증권 5,762石4斗 합계 11,43l石3斗의 증권이었으나, 이마저 수속중에 6․25 사변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에 당시의 동국학원 이사장이었던 이종옥은 수습안을 강구하기 위하여, 1951년 11월 25일 부산불교경남교무원에서 개최된 제10회 불교중앙교무회에서, 이미 의결된 전국 사찰림 2할의 기부 목적인「동국대학교 교사건축비용」을 「동대의 농림학부증설 및 그 유지의 기본재산」으로 수정케 하였다. 또한 6․25로 중단되었던 지가증권의 추심과 지가증권으로 투자할 수 있는 적당한 귀속재산의 물색에도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는 격전이 계속되어 국방선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불안한 상태여서 지가증권으로서는 재산전환이 매우 어려웠다.

당시의 이 같은 딱한 사정의 일단은, 1952년 1월 9일자의 서무과장 장용서의 출장복명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거기에는 「원래 귀속 기업체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다 또한 서울시내에는 기업체의 약6할이 파괴 손실되어 좀처럼 착안할 것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매일같이 서울시청에 드나들며 관계자에게 간청하였으나 하등 소득이 없었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재단에서는 부득히 ①장래 운영에 있어 큰 자본금을 요하지 않는 것 ②수도 복구공사에 대량으로 사용될 것 ③동국대학교 신축에 석재로 이용케 될 것 ④특수한 기술을 요하지 않는 것 등의 이점이 있다는 이유로 ‘돈암채석장’을 계약하기로 하였다.

한편 기하급수적으로 폭등하는 전시하의 변조적인 경제적 악조건에 겹쳐, 시중에서 액면의 3~4할로 거래되는 토지증권을 사장시키는 불합리한 재단운영을 효과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도 시도되었다. 전남 목포시 소재의 대광유지주식회사에 대한 투자가 그것이다. 주당 5만원의 주식 4,791주 계23,955만원을 문교증권으로 인수키로 의결하여, 1953년 8월까지 제2회분을 불입한 것이다.

후일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문교증권 5,762石4斗가 거의 송두리째 없어지는 실책을 자초하였던 이 주식투자는 분명 당시 재단측의 큰 실책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군사 정치 경제적인 대혼란기에 있어서도 우리 대학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보려는 당시 재단인사들의 끈덕진 노력이 있었다는 점만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1951년 11월 25일에 개최된 제10회 불교중앙교무회에서, 전국사찰 기증의 전국사찰림 2할의 기탁 목적을 ‘동국대학교사 신축비용’ 예서 ‘동대의 농림학부증설 및 그 유지의 기본재산’으로 전환케 했던 것은 하나의 업적으로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문교부로부터 1952년 2월 1일자로 임학과의 증설이 인가되었거니와, 이는 우리 대학이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데 있어서 불가결의 명분이 되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비유와 설화

철판을 배에 두르고 다니는 사나이 / 조용길(불교대학 교수)



삿트야․니간타의 이름을 가진 장로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나라 안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이런 일 때문에 그는 자기도취에 빠져 그의 눈앞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철판으로 배를 싸고 다녔다. 사람들이 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면, ‘지혜가 터져 나올까 두렵기 때문이오’ 라고 으시댔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여 밝고 지혜로운 법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말을 듣고,그는 시기심으로 자나깨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들으니 사문 고타마은 스스로 부처[覺者]가되었다고 한다는구나. 지금 나는 그에게로 가서 깊고 묘한 이치를 물어 말문을 밖아 버리겠노라.”

그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사밧티의 기원정사로 향했다. 기원정사에 이르자 부처님의 위엄이 해돋이와 같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고 나서는 기쁨과 두려움이 그를 착잡하게 하였다. 그는 부처님 앞에 예배드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떤 이를 가리켜 도인이라 하고 지혜롭다하며, 어떤 이를 장로라 하고 단정하다 합니까? 또 어떤 사람을 가리켜 사문이라 하고 비구라 하며, 어질고 밝다 합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을 가리켜 도가 있다 하고 법을 받든다 합니까?”

부처님은 그의 물음에 대해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마음이 올바르고 법답게 행하며

정의를 지키는 지혜로운 사람

그를 가리켜 도인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말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려움 없고 걱정도 없으며

선을 지키는 이가 지혜로운 사람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장로인가

머리카락이 회다고 해서 장로인가

그의 나이 헛되이 늙었으니

그것은 속이 빈 늙은이일 뿐


진실과 진리와 부드러움과

불살생과 절제로써

더러운 때를 벗어버린 사람

그를 진정한 장로라 하네


어떤 것이 단정한 사람인가

질투하고 인색하고 겉으로 꾸미거나

말과 행동에 어긋남이 있으면

꽃 같은 모습은 될 수 없네


질투와 인색과 위선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지혜로워 성내지 않는 이

그런 사람을 단정하다 하네


어떤 것이 사문인가

머리를 깎았기 때문이 아니다

허위와 탐욕에 차 있는 자가

어찌 사문이 될 수 있으리


크고 작은 악을 물리치고

도량이 넓고 진리를 잘 펴며

마음이 고요해서 잠잠한 이

그를 일러 사문이라 하네


어떤 것이 비구인가

밥을 빈다고 해서 비구가 아니다

삿된 행으로 바라는 것 없으며

그것은 다만 이름을 구함이니


온갖 죄악의 업을 잘라버리고

법다운 행을 깨끗이 닦아

지혜로써 온갖 악을 부수는 이

그를 일러 비구라 하네


어떤 것이 어질고 밝음인가

입에 말이 없다고 해서가 아니다

마음쓰는 것을 정묘하게 못하면

바깥 형식만 따르는 것이니


마음에 거리끼는 일 없어

그 마음의 행이 밝게 비고

이것저것 사라져 고요해지면

그를 일러 어질고 밝다 하네


어떤 것을 도가 있다고 하는가

한 생명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모든 중생을 두루 건져

해침이 없음을 도가 있다고 하네


어떤 것이 법을 받듬인가

많이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비록 들은 법은 적더라도

그것을 몸소 익혀 행하고

도를 잘 지켜 잊지 않는 이

그를 일러 법을 받든다고 하네.


삿트야․니간타와 그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열려 기뻐하였다. 그들은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비구가 되었다.

 

 

 

 

가람의 향기

봉정사 /편집부



겨우내 몸단장하던 동백이 서둘러 붉은 볼을 내밀고 동장군의 입김을 피해 달아났던 개구리가 한참동안 하품을 하던 이튿날, 선비의 마을에서 겨울을 난 안동 봉정사를 찾았다.

그곳으로 가려면 안동 시외버스터미널 앞 육교를 건너 51번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달려야 하는데, 51번의 종점이 봉정사 입구라면 버스 정류장과는 관계없이 차를 탈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곳마다 차를 세워 가는 곳이라 조금은 멀게도 느껴질 것이다. 하물며 승객이 내리고 싶은 곳에 차를 세우는 일쯤이야.

상식의 법규 속에서 질주하는 큰 도시의 시내버스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승하차의 무질서가 이곳 어른들의 인심으로 여기는 이쯤에서는 너그러운 웃음으로 넘겨  보아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51번 종점에서 내려 봉정사 일주문으로 오르는 길, 여름의 실록을 이곳과 겨룰 수 있는 비경이 있으면 나와 보라던 어느 선배의 호언장담이 지나친 말씀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은, 옛 정자 명옥대(鳴玉臺)가 퇴계 선생의 정신과 말씀을 벗삼아 계곡과 더불어 흐를 녹색 짙은 그 계절을 상상해 본다면 두고두고 다시 찾아 올 일이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동 90l번지, 천등산(天灯山) 봉정사(鳳停寺)!

『이 사찰은 서기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에 화엄종의 시조 의상조사(義湘祖師)의 제자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창건한 것으로 본 사찰은 10동(棟) 동서 2개의 암자가 9동으로 총 건평 560여 평을 가진 안동에서 제일 큰 고찰이다. 극락전은 주심포계의 극히 고려양식 건물이며 법당은 신라시대 불당양식과 흡사하며 기둥의 배흘림이라던가 추녀끝이 수직으로 끄여져 있음과 사용재료의 비례 등 현존한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찰은 고려 및 조선조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 나란히 있어 고건물 비교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극락전(국보 제15호), 대웅전(보물 제55호), 화엄강당(보물 제48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이 각각 문화재로 지정 보존 관리하고 있다』라고 안내문은 전한다.

우리들의 국보급, 보물급 문화유산이 비단불교에서 비롯함 뿐이겠는가마는 시방 곳곳 그분의 법향을 느낄 수 있음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새록새록 다시 만나지는 진리의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느꺼운 마음이 새로 와 진다.


<천등산(天灯山) 봉정사(鳳停寺)>


천등산, 송이가 많이 난다는 이 산 중턱을 오르면 천등굴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신라의 의상(義湘)스님이 수행하니 선녀의 모습을 한 마구니들이 스님을 희롱하려 갖은 교태를 부렸다고 한다. 오랜 시간 그 마구니의 유혹을 업신여긴 스님이 한 소식을 얻으니, 이번에는 하늘에서 정말 아름다운 선녀가 스님의 득도를 축하하며 횃불을 비추었다하여 천등산(天灯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편, 스님이 부석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 취미로 종이 봉황새를 만들어 날리는 일이었는데. 파드득 깃을 치던고 새가 이쪽으로 날아와 머물렀다 하여 봉정사(鳳停寺)라 이름하게  되었다.


<극락전>


극락전(極樂展)은 국보 제15호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전면 3칸, 측면 4칸으로 전면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기둥과 창장(기둥과 기둥을 옆으로 잇는 것)과 들보(앞뒤로 가로지르는 나무)를 연결하는 장치인, 공포(共包)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계의 고려양식에 흡사한 점과 가운데가 부풀어 윗부분을 좁게 한 배흘림기둥은 엔타시스의 양식으로, 1972년 보수공사 도중 1625년에 만들어졌다는 상량문의 기록을 발견하고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70여년을 앞섰음이 밝혀짐으로 해서 불세출 세월에 묻혀 지낸 극락전의 참모습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원래 대장전이라 했으나 후에 극락전이라 개칭한 내부에는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아미타불(阿弥陀仏) 즉 무량수불을 모신 불단으로 무량수전, 아미타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불단의 배치는 아미타삼존불을 안치하고 좌우부처로 관세음보살(観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는 게 보통인데 봉정사 극락전에서는 아미타불만 존재하고 다른 불상들은 존재치 않는다. 불단 앞에는 마루로, 그 양옆에는 정사각형의 벽돌(方塼)을 깔았다.


<대웅전>


봉정사의 대웅전(大雄殿)은 보물 제 55호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단층건물로  자연석의 막돌기단 위에 세워졌고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삐걱거리는 툇마루의 소리가 자연스레 뒤꿈치를 긴장하게 하는데, 나를 뒤로 가는 이들은 주의할 일이다.

간격에 비해 얕은 감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기둥은 다포(多包)양식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짜 올리는 고려 말기의 수법을 사용하였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의 단청은 그 기법과 색채가 또렷해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수미단이라고도 불리는 불단 아래에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 대신 목단이 우위에 새겨져 있다. 이 꽃이 전해진 시기는 고려시대 뿐이므로 대웅전 앞 안내판의 조선초기건축물이라는 것에 어폐가 있음을 안내와 설명을 해 주시던 스님의 지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더우기 눈여겨 볼 것은 기와의 무거움을 덜어주기 위해 세워져 있는 공포로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52분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만세루(万歳樓) 밑으로 줄을 서 있는 52개의 계단을 세존의 빛을 받으며 올라오면 52분의 부처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사바의 고민꺼리 쯤이야 마음에 담아 둘 일은 아닌가 보다. 대웅전 현판 양쪽으로 여러가지 악기를 다루며 비천하는 선녀들의 단청은 잊지 말고 보아야 한다.


<화엄 강당>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쪽 아래에는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華厳講堂)이 있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의상조사가 수많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설파한 강당건물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온돌방 구조의 건물로 대웅전 앞마당을 향하고 있다.

그 앞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무량해회(無量海会) 건물로 복원공사 때 너무나 심하게 지붕을 높여 건물 자체도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았지만, 대웅전의 반쪽을 갑갑하게 해 놓았다.

반면, 화엄강당의 지붕은 상단의 대웅전과 하단의 화엄강당의 질서를 매끄럽게 제자리 하게 했다.


<고금당>


극락전 아래의 고금당(古金堂)은 보물 제49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혀 있다.

지금은 스님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데, 가을이면 빛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이 나무는 홀로 물드는 일이 없어, 사계절 짝을 지어 살아간다고 자연의 순리 또한 사람과 비길 일이 아니라고 한다.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 외에도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극락전 앞을 밝히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산사의 투명한 영상이 세상에 알려진 영산암 또한 봉정사의, 고즈넉함을 더욱 후하게 했다.

스님의 설명 중 반은 잊어버리고 반은 얼기설기 담아 두었다.

법당의 형상은 배(船)를 꼭 닮아 있다고 한다. 고해의 파도를 근심하는 사바의 중생들을 평화로운 저 언덕으로 실어 나르는 반야용선의 선장인 부처님을 알현하려면, 이제는 산길로 들길로 배를 타고 갈 일이다.

 

 

 

 

나의 신행담

부처님은 마음 속에 / 김형진(불교학과 88학번)



절의 부처님이 잘 생겨 보여야 그 절과 인연이 있다고 했던가. 불심 깊은 불자집 안에 태어나 나 역시 불심이 깊다고 생각해왔지만 ‘어머 저 부처님은 왜 저리 무섭게 생겼지? 코가 참 희안하게 생겼어.’ 늘 그런 마음이었던 나는 불교 공부 한답시고 폼만 잡고 다녔지, 천수경 한번 독송해 보지 않았고, 부처님 친견하는 것 보다 부처님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를 더 좋아했던 가짜 불자였던 것 같다. 그러한 내 모습이 부처님께서는 안타까워 보이셨을까. 내 마음을 모조리 빼앗아버린 부처님이 어느 날 출현하신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

다포계 건물에 팔작지붕인 각황전에는 전하여 내려오는 중창설화가 있다. 숙종 25년에 계파선사가 장육전(현 각황전)중건불사 대발원의 기도 회향날 꿈속의 신인이 시키는 대로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 천여 명 대중을 대상으로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은 공양주 스님 한 분 뿐이었다. 그 분이 바로 꿈속의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대화주승이신 것이다. 문수대성은 다시 공양주 스님의 꿈속에 나타나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 내일 아침에 화주를 위해 떠나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하며 홀연히 사라지셨다. 다음날 공양주 스님은 일주문을 나서서 한참을 걷고 있다가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 노파를 만났다. 자식도 없이 움막에서 살며 절에서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던 그 노파를 보는 순간 화주승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지만 문수 대성의 교시를 생각하고 그 거지 노파에게 큰절을 올리며

“오! 대시주시여! 장육전을 지어 주소서.”라고 외쳤다. 전후 사정을 들은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다가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 하오리니 문수대성이시어! 가호를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뢰며 큰 늪에 몸을 던져버렸다. 몇 년이 흐른 뒤 화주승은 창덕궁 앞에서 어린 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어린 공주는 화주승을 보자 매우 반가워하였고 태어나면서 펴지지 않았던 손이 펴지더니 그 손바닥에는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어져 있었다. 화주승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숙종대왕은  감격하여 공주를 위하여 장육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부처님을 깨달은 왕, 숙종대왕을 깨우쳐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覺皇殿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화엄사와의 인연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시작되어 그 후로 몇 차례 간 기억은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그다지 신심이 깊지 못한 불자여서 절 밑에서 먹은 산채비빔밥의 기막힌 맛만 기억날 뿐이다.

드디어 지난 봄, 나는 작정을 하고 화엄사를 찾았다. 마음 속에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해주시는 부모님만 믿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조리 다 해가며 철없이 산 것 같다. 2년 전 유럽 배낭여행을 통행 여러 여행자들과 그 곳 현지인들의 만남 속에서 내가 이렇게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전생에 무언가 작지만 착한 일을 한가지 했던 공덕 때문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은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깊은 참회의 마음으로 이어졌다. 알고 짓고, 모르고 짓고, 크게 짓고 작게 지은 모든 악업과 나로 인해 마음 아파한 사람들 모두에게 부처님을 통해 참회하고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잊고 있었던 작은 일까지도 떠올라 무척 마음이 괴롭고 아팠었다. 봄이라지만 그 곳 화엄사에는 채 떠나지 못한 겨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풍경소리는 나를 반갑게 반기는 듯했다. 우선 원주스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스님은 나를 보시고는 “보살님, 아상을 버리십시요. 기도는 下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럴 수가, 들켜버린 것이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말 안 하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었는데 눈빛만 보고 모든 것을 알아 버리신 거였다. 그래서 나는 그 곳에 거처할 동안 괜히 원주스님을 슬슬 피해 다녀야만 했다. 다음날 새벽, 대웅전 예불을 마친 뒤 1000일 관음기도가 한창인 각황전으로 갔다. 국보답게 그 모습은 장엄하였고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묵언기도 중이셨던 명조스님 뒤에 방석을 깔고 반배를 올린 뒤 부처님을 올려다 본 순간! 그 순간의 깊은 전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평온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시면서 “그래, 형진아 잘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분명히, 하루에 4번을 나눠 1000배를 올리려 했는데 나는 단숨에 1000배를 올렸고 도량석을 들으며 일어나 새벽기도, 사시기도, 오후기도, 저녁기도 등 하루 8시간의 기도를 제법 오래 할 수 있었던 것은 각황전 부처님의 힘이 아니었을까. 스님들과 사중식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들은 내게 있어 또 다른 모습의 부처님이셨고 그동안 깨어 있지 못하고 무명의 세계에 빠져 살았던 삶에 대한 더욱 절실한 참회 기도를 하게해 주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양을 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세속에서는 꿈 조차 못 꾼 일인데 말이다. 기도 회향하던 날 원주스님께서 내게 차 한 잔 할 것을 권하셨다. 나는 첫날의 그 말씀이 자꾸 떠올라 떳떳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내심 초조해 하고 있는데 “보살님,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지셨습니다. 기도 잘 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기쁘기도 하였지만 몹시 부끄러웠다.

지난 해 8월 각황전 아래에 있는 서오층석탑 보수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22과 외에 16종 72점의 성보유물이 발굴되었다. 친견하는 것만으로 삼생의 입장이 소멸된다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쌀알만 한 크기의 맑고 영롱한 신비스럽기가 그지없는 것이었다. 사리가 모셔진 각황전에서의 7일기도는 그전보다 더욱 엄숙하고 경건한 기분이었다. 각황전의 부처님은 늘 내게 무어라 말씀하시는 듯하다. 번뇌덩어리를 안고 가면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때로는 나무라시는 미소를, 때로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시고 절을 다하고 올려다 뵈면 더 환하게 웃고 계신다. “수고했다 형진아, 잘 자거라 내일 만나자.” 이런 말씀이 내게는 마음으로 들린다. 각황전의 부처님은 내게 ‘부처는 마음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셨고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을 가슴깊이 전해주셨다. 부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신 듯하다. 눈만 감으면 그 모습이 떠오르기에 언제 어느 장소에서나 기도할 수 있고, 나 자신만을 위해 기를 쓰고 기도했던 것처럼 이제는 남을 위해 기도한다. 예전에는 뭐가 그리 늘 불만투성이었던가. 그 모든 것이 잘난 거 하나 없는 내 마음의 비뚤어진 잣대였다는 것을 알고, 한바탕 참회의 눈물을 쏟고 나니 풀 한 포기 무당벌레 한 마리에게도 눈이 가고 마음이 간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살고 있었던 내가 한순간이라도 참회기도를 하게 된 것은 모두 다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한다. 우물통 밑바닥 속에 살다가 이제야 겨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게 된 나는 가끔씩 마음이 혼탁해질 땐 소리내어 経을 읽는다. 눈썹을 지나 이마꼭대기에 붙어 있었던 눈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으려나 보다.

 

 

 

 

 

 

불자탐방

주철식 기관장 /편집부



남산골에 비가 온 후에 이미 흐드러지게 개나리가 노랗게 물들어 버린 4월의 길목에서 잠시라도 햇볕을 받고 싶은 봄의 유혹을 뿌리치고 만난 사람은 기능직으로 학교에 종사하면서 정심회 불교법회의 전임 회장을 지낸 주철식 법우님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배움을 말없이 실천하고 살아가는 참된, 풍요하게 핀 개나리 같이 넉넉한 봄 기운을 간직한 분이셨다.

주철식 법우님은 정각도량의 불자탐방을 연락 받으시고 바쁜 일과 중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어렵게 짬을 내어 정각원을 직접 찾아주신 것을 보고 자신의 일에는 매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주철식 법우님은 1996년 11월에 제대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하면서 바로 동국대에 기능직으로 취직하신 이래 흔들림없이 자신의 일에 매달려 오시고 있으며, 지금은 기관실에서 5명의 기사와 함께 일하는 기관장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법우님은 동대에 오신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는데 불교와는 언제쯤 인연을 맺었습니까?

“저희 집안은 원래부터 집안 자체가 불교라서 언제부터라는 것이 없습니다. 큰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스님이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절에도 자주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를 진실로 알고 배우게 된 것은 정심회 법회를 하면서부터 더욱 신앙생활에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정심회 법회의 회장도 역임하셨는데, 간단하게 정심회를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정심회는 1988년도 정각원에서 기능직 불자들의 모임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한 달에 한번 법회를 통하여 부처님의 교리를 배우고, 봄․가을 두 차례의 성지순례는 회원 가족이 모두 동참하여 서로의 친목과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바쁜 학교 일과 가운데서도 많은 회원들의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금은 학교에서 가장 내실있는 신행단체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정심회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성지순례를 다녀오신다고 하셨는데, 가보신 곳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으시는 사찰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절은 모두 경치와 산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디가 특별히 좋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절은 예산의 수덕사와 작년에 다녀온 춘천에 있는 청평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예산의 수덕사는 절에서 풍기는 청아함에 젖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고, 청평사는 회장으로서 회원들을 인솔하여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서 참배를 하고 점심 공양을 마치고 밭에서 회원들이 무우를 뽑으며 오랜만에 전원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주철식 법우님은 질문을 받을 때나 말을 할 때 자주 싱긋이 웃으시는 모습에서 봄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요즈음은 외동딸이 동국대 경주 캠퍼스 생물학과에 재학 중이어서 자주 경주에 내려간다고 말씀하시면서 또 말없이 미소를 머금으신다.

법우님께서는 기관실에서 근무하고 계신데 그 곳에서 일하고 계신 분들은 주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저희 기관실에는 5명이 있는데 모두가 기능사 자격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모든 건물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고, 소방과 환경 그리고 상하수도와 기름에 관한 위험물자격을 소지하고 있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기관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분들은 모두 불자들이어서 마음을 하나로 묶이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시다 보면 어려운 일도 많으실 것으로 압니다. 학교나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의 일이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안전불감증에 걸려있는 것 같습니다. 재앙은 단 한번의 실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화재나 가스사고 등에 철저히 대비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행사 유인물을 바닥에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환경문제나 청소하시는 분들의 어려운 점을 조금 만이라도 이해하고 지정벽보판을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바쁘신 생활 속에서도 학교에 근무하시면서 정각원 법당에 자주 참배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찰이 있습니까?

“특별히 정기적으로 다니는 사찰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집이 목동이라 근처에 있는 법안 정사에 일요법회를 가족들과 한번씩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1년에 한번 고향인 기장 옥천사에 정기적으로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

“항상 부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날마다 즐거운 날이 되소서’라는 문구를 집과 사무실 책상 등에 붙여놓고 생활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날마다 즐거운 날이 되소서, 만물을 생기시키는 대지의 기운처럼 자비의 미소가 얼굴에 가득한 법우님을 바라보면서 이 봄에 만난 작은 불심의 씨앗이 되어 모든 대지에 5월의 풍요로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만난이 선연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발원드립니다.

 

 

 

 

열린마당

기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 도수(불교학과4학년 석림회장)



기도란 신과 인간과의 상․하 관계에서 기도자가 신의 가피를 입음으로써 개인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기도자와 별개로 존재하는 신과의 관계에서 기도가 출발하고, 또 그것은 외적인 힘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 내지 기도법은 그 방법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 자체가 전혀 다르다.

불교의 기도는 불․보살님의 명호를 반복해서 부르는 기도법을 취하고 있다, 이를 칭명염불이라 부른다. 이는 타 종교가 취하듯이 개인적인 소망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보살님의 명호를 계속해서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를 정근이라고도 하며,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마인드 컨트롤로 이해할 수 있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하면 심상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평온해 진다.

이러한 상태를 종교적 용어로 안심이라고 하는데, 이 안심의 성취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최고 공덕이다. 기도하기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신심이다. 깊은 믿음 없이는 기도가 성취되지 않는다. 신심이란 쉽게 말하자면 종교적 신념을 말한다.

이 믿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힘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적인 힘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불성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가 무한한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에서부터 불교는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스스로가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지금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모든 삶의 방향을 외부로만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때론 삶의 방향을 안으로 돌리는 시각도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자기 가치관이 정립될 때 만이 인생의 발전을 도모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삶!

이것은 종교적인 신행활동이 아니라, 바로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인간들 스스로의 의지인 것이다.

우리 지금부터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자.

 

 

 

 

신행단체

한마음



마음은 의과대학 내의 불교학생회 모임이다.

의학이란 동양의 한의학과는 좀 다른 학문이나 추구하는 근본 목적은 하나이다.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아 질병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난 의학은 다소 메마른 정서의 학문으로 보여진다. 이에 의과대학 학우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말씀에서 정서적 위안과 도움을 얻고 서로의 공부에 윤활유 역할까지 겸하며 미래의 불자의사로 만들 의도로 만든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의과대학 설립 8년만인 1993년에 가정의학과 성낙진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경주병원 법사이신 해인스님을 지도법사로 모시고 약 15명의 학우들이 모여 시작한 것이 지금 제5대 회장단에 이르게 되었으며 회장단은 회장(박종호 본과 2년) 1인, 부회장(전현학 예과 2년) 1인과 총무로 구성되며 학술부, 홍보부, 문화부가 운영부로 활동하고 있다.

매월 둘째, 넷째주 목요일에 경주병원 법당에서 회원들과 일반학우들이 모여 지도법사님의 법문을 듣고 그리고 교내 교수님들을 모시고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세미나를 통해 우리들의 지식으로 하고 있다.

M․T나 야유회를 통해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부처님 오신날 행사로 의대학우들에게 연등보시를 하고 있으며 교내의 봉축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또 남산 불적답사와 문화 유적답사를 통해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을 갖는다. 방학기간에는 수련회를 가지며 예과 2학년은 이때 임상기초과목 오리엔테이션을 선배들로부터 받는다.

마음은 앞으로 회원들뿐만 아니라 의대의 모든 학우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포교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여 실천적인 불자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 활동을 펴나갈 것이다. 또한 병원내의 봉사활동과 의료봉사에 참여하여 참으료, 참인술을 우리 마음이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하며 아울러 그동안 학업에 끌려 다니느라 제대로 하지 못한 불교도 연합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할 것을 부처님 앞에서 모든 마음 가족이 발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건강법

피로하십니까? / 김장현(서울캠퍼스 보건소장)



충분히 수면을 취한 후 전신이 개운하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것을 맛본 경우가 있는가? 누구든지 피로가 풀린 상태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고 적당히 공복 상태에서는 이와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활력 있는 아침’이란 표현이 바로 이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래 피로감, 무기력감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만사가 귀찮고 권태감에 의욕을 잃어버리고는 온몸이 무겁고 집중력, 조직력 또 적응력까지 떨어져 늘 하던 일은 물론 새로운 일감이 생겨도 마음에 부담감만 들고 짜증만 나는 증상이 바로 피로와 연관된 일련의 증상이다. 피로와 활기의 차이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확실할 수는 없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도 계속 졸리고 노곤하며 신체 곳곳에 이상한 위화감이 생기고 앞에 언급한 증상을 느끼고 있다면 피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머리가 무겁거나 아프다, 어지럽다, 입이 마르고 끈적거린다, 목이 잘 쉰다, 하품이 나온다, 숨이 차다, 어깨가 뻐근하다, 등이 결린다, 다리가 묵직하다, 식은땀이 흐른다, 소변 색이 짙다, 치아가 자주 솟는다, 얼굴이 부석부석하다 등의 증상이 신체적 피로이다. 肝(간)과 腎(신)의 기능이 약해져서 근골의 작용이 약해지며 폐(肺)의 氣(기)부족으로 일어나는 증상이다. 정신적인 피로는 머리가 멍해진다, 상기가 되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싫다, 눈이 자꾸 감기며 졸린다, 글쓰기가 어렵다, 끈기가 없다, 잘 잊어버린다, 만사에 자신이 없다, 혼자 있고 싶다, 불안한 생각이 자주 든다, 실수가 많아진다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같은 일만 반복해서 나타나는 단조로움, 심리적인 스트레스 과도한 정신적인 노동의 결과로 심장의 기능이 허약해진 氣血(기혈)의 부족 증상이다.

인체의 오장육부에서 특히 피로를 주관하는 장기는 간장이다. 흔히 사람들이 피로를 심하게 느끼면 간 기능 검사를 해보는 것도 간장질환의 경우 피로증상이 나타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간장은 보상역할이 뛰어나 일부에 손상이 와도 나머지 부분이 전체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보상을 하는 능력이 있어 간에 이상을 느낄 때에는 이미 간에는 상당히 병이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피로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무리한 상태에 빠져 있으니 이에 올바른 대처를 강구하여 더 이상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의 현상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피로를 풀어야 할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참된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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