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인류문명사의 혁명적 사건
신혁진/ 만불신문 기자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은 1949년 1월 19일 가입 신청을 낸 지 42년만에 유엔회원국이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가 유엔에 기증한 것은 월인천강지곡의 인쇄동판이었다. 한국을 단 하나로 상징할 만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인쇄문화이기 때문이었다. 그 정점에 2001년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직지’가 있다.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으로,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 책의 이름을 줄여서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불설을 담은 경전이 아님에도 직지심경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이라 소개되면서부터이나 이후 바로잡혔다.

직지를 엮어낸 백운화상 경한(景閑, 1298∼1374) 스님은 중국 석옥선사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에 선문염송과 치문경훈 등의 불서의 내용을 더하고 과거 7불과 인도 28조사, 중국 110선사 등 145분의 법어를 선별해  307편의 글을 책 한 권에 수록했다. 이를 제자들이 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상·하권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직지는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본으로 간행됐으나  현재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책(총 38장)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다행히 취암사에서 간행된 직지 목판본 상·하권 1책이 온전한 상태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및 영광 불갑사에 소장돼 있어 금속활자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체제나 내용을 목판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직지는 서양이 자랑하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고, 중국의 동중서(董仲舒)가 쓴 철학서인 춘추번로(春秋繁露)보다는 145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유네스코는 2001년 9월 4일 직지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2001년 현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기록물은 32개국 69건으로, 한국은 직지를 비롯해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4건이다.

 

그러나 이처럼 귀중한 문화유산은 지금 제자리를 잃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라는 낯선 땅에 ‘감금’되어 있는 현실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는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당시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때였던 터라 직지가 타국 땅으로 넘어가는 것을 미처 막지 못했다. 한반도를 떠난 직지는 1911년 드루오 호텔에서 경매되어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가 단돈 180프랑에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됐다.

직지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의사소통과 기록의 역사다. 손짓, 발짓, 몸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교환하던 시대를 지나 간단한 부호와 문자를 이용하면서부터 인류문명은 변화와 발전의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인간의 사고는 문자를 통해 체계화되어 철학으로,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는 수천 년 간 일부 권력층과 지식계층의 전유물이었을 뿐 일반 대중에게는 접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속활자의 발명과 인쇄는 가히 혁명이라고 할만한 인류역사의 발전이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문서의 다량인쇄를 가능하게 했고, 소수의 전유물에 그쳤던 책을 일반에 보급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이전에 목판을 이용한 인쇄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재질의 특성상 다량인쇄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금속활자를 통해 지식의 대량 전달이 가능하게 된 것은 물론 ‘매스미디어’의 첫 출현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은 13세기초에 한국에서 처음 일어났다. 1239년 목판으로 간행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에는 ‘원래 금속활자본이었던 것을 목판으로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1239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규보(李奎報)가 1234년부터 1241년까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나라에서 상정예문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해 각 관청에 보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13세기 금속활자본은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직지는 비록 한국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실물이 존재하고 있어, 우리 민족이 이미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발명해 수많은 기록유산을 남긴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되고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또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 조선의 활판인쇄술은 당시에는 혁신적인 인쇄술로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중국을 거쳐 유럽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직지는 인류문명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산물인 동시에 현재의 정보화 시대를 여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직지는 세계문화의 상징이기 이전에 한국 불교문화의 깊이와 넓이의 척도가 될 만한 것이다. 고려대장경과 속장경이 외적의 침입을 당한 고려가 불력(佛力)을 빌어 적군을 물리치고자 판각한 것이라면,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쓰기 위해 역대 제불조사(諸佛祖師)의 게송과 법어를 담은 직지를 금속활자로 찍어낸 것은 불서의 다량인쇄와 폭넓은 보급을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백운화상이 엮은 책을 제자인 석찬(釋璨), 달잠(達湛) 스님이 비구니 묘덕(妙德) 스님과 함께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금속활자본으로 만든 것이다. 또 당시 고려가 금속활자본으로 인쇄된 불교서적을 필요로 할만큼 불교서적을 읽을 이들도 많았던 땅이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처럼 직지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문화의 커다란 상징이자, 한국불교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성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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