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의 봄비
강석근 /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雨聲偏與睡相宜  빗소리와 더불어 낮잠자기 알맞은데
一榻蕭蕭日暮時  쓸쓸한 의자에는 저녁 해가 저무누나
無限人間有年喜  뭇사람들은 풍년 든다 기뻐하는데
山僧獨?菜苗滋   산승만이 채소 어린 싹이 자란다 자랑하네
                                             <이규보의 山中春雨>

봄비가 온다. 언 대지를 녹이며 만물에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는 봄비가 내린다. 이 계절의 봄비가 주는 아름다운 흥취를 노래한 위의 시는 백운거사 이규보의 <산중의 봄비>라는 작품이다. 기·승구는 인간세상의 시름을 잊게 하는 비 오는 저녁 산사의 탈속적인 정경을 서술하고, 전·결구는 욕심 없는 선승의 고상한 정신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전구의 뭇사람들은 풍년을 기약하는 단비라 기뻐하는데, 선승만이 텃밭의 어린 채소가 자란다 자랑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이 시의 승려는 선원(禪院)의 청규(淸規)를 지키며 손수 농사를 짓는 선승일 것이다.

비가 내리면 온 대지에 두루 내리지 산사의 채소밭에만 오지는 않는다. 봄비가 삼라만상을 골고루 적시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채소밭에 내리는 것만을 좋아한다면,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도를 실천하는 승려의 태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 시는 화엄사상인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사상이 기본 배경을 이룬다. 화엄사상은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는 논리가 주지인데, 위 작품은 ‘일즉다 다즉일’의 화엄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와 일체의 차별과 분별을 합일시키는 화엄사상의 자재로운 정신으로 인해 이 시의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인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선승이 산사의 채소밭에 내리는 봄비를 보고 기뻐한 것은 온 세상의 풍년을 예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산승은 산사의 채소밭에서 전국의 전답에 내리는 비를 보았던 것이다. 곧 채소밭이 곧 전국토라는 사고는 ‘일즉다 다즉일’의 화엄사상이 변주된 것이다. 이처럼 현상적인 사실을 넘어서 우주의 이치를 직관하는 시적 화자의 높은 도력이 시어 속에 내밀하게 깃들어 있기에 이 시는 수준 있는 불교시로 승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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