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목적은 모든 생명이 본래 갖고 있는 맑고
밝고 깨끗한 마음의 성품을 되찾는 것이다.
때묻은 마음을 깨달아 본심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성불이라고도 한다.
『유마경』에
마음이 깨끗하면 깨달음의 땅이 깨끗하게
된다(心淨則佛土淨)라고 했다. 또, 『육조단경』에는
마음은 국왕이요, 몸은 국토라고 하였다.
마음이 지저분하면 결코 몸도 깨끗할 수가
없다. 마음이 어떤 역할을 어떻게 잡아
주느냐에 따라 내 몸도 편안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몸을 하나의 국토, 또는 우주법계로
볼 때 마음은 국왕이요, 우주를 원만히
잘 운영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국가를 볼 때 국왕이나 대통령이 통치를
잘못하게 되면 국가는 병이 들고 국민들은
고통을 받게 된다. 발톱이나 손끝에도
조그마한 상처라도 날라치면 몸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된다. 몸 전체 중에서도 그
고통을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요,
그 마음은 상처를 신속히 치유해야 몸이
편안하게 된다.
몸을
병들지 않게 잘 보호하는 주인이 마음이라면,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대통령의 책임이다. 대통령(大統領)이란
국가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거느린다는
의미지만, 꼭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의 모든 단체도 마찬가지다. 사장이나
회장, 혹은 총장이나 이사장은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회사나 학교, 어떤 사회단체의
주인으로 모든 구석구석을 잘 살펴 불편이
없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먼저 찾아 나서야
한다.
불교의
대승보살행이란 남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어떤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찾아야 한다. 남이 싫어하지 않고, 남이
두려워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하지말고, 남이 좋아하고 이익되어
즐거워하는 일을 해야 한다.
육바라밀(六波羅密)은
남을 위하여 실천하는 덕목이다. 나의
마음이 밝지 못하고, 맑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게 되면 남이 나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해가 되어 남으로부터 비난받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내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남이 그렇게 피해를 입었는데
어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으며, 두려움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환경 조성은
누가 해야 될까. 당연히 내 마음의 주인인
내 자신이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은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본심, 즉 깨끗한 환경으로 회복하라는
가르침이다. 우주의 주인은 인간이요,
인간의 주인은 자신의 마음이다. 인간이
의지할 바가 자연이라면, 자기 마음이
의지할 곳도 대중이며 자연이다. 인간이
자기가 의지할, 의지하고 사는 사회 대중과
자연의 편안함에 감사하지 못하고 대중
환경을 어지럽히고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면
그 자신의 마음이 더 어리석고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사회만을 탓하고 남이
병들었다고 남 탓만 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자등명(自燈明) 하고, 법등명(法燈明)
하라고 하셨다. 자기 마음에 등불을 밝혀
들고 진리의 등불을 밝혀 세상을 밝게,
우주를 아름답게, 모든 생명을 즐겁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여 그가 사는
사회는 깨달음의 정토를 만들라는 것이다.
극락정토는 무공해의 세상이다. 불교가
극락을 지향하는 것은 공해가 없는 사회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부터
절에서 하는 모든 의식이나 재(齋) 그
자체가 하나의 환경운동이다.
대웅전(大雄殿)에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자는 것이요, 칠성각(七星閣)에
칠성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것은 하늘,
즉 허공법계를 공해 없이 깨끗이 하자는
것이요, 산신각(山神閣)에 산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기도하는 것은 푸른 산을 아름답게
보호하자는 것이요, 용왕각(龍王閣)에
용왕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것은 물을 아끼고
깨끗이 보존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명부전(冥府殿)에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을 모신 것은 여래화현십대명왕(如來化現十大冥王)이라
하여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명왕의 모습으로 나투었다는
뜻이다.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 모두 절에서 상징하여
모신 이유는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고 깨달음의
실현을 위한 방편으로 모신 것이며, 이
모두가 마음의 환경 우주의 본래 청정한
환경을 되살리기 위하여 모셔진 상징성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불교의 모든 의례
의식과 그 내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환경운동
아닌 것이 없다.
스님들이
절에서 식사하는 발우공양(鉢盂供養)을
보면 김치 찌꺼기 하나 버리지 않고, 발우
씻은 천수물까지도 자연의 물만큼 깨끗해야
된다는 의미로서 볼 때 환경친화적인 생활
실천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어려서 행자(行者)생활을 할 때 노스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무를 아끼면 산신이
돌보고, 물을 아끼면 용왕이 돌본다고
하시면서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를 아끼라고
하시며, 물도 아껴쓰되 더럽혀서도 안
된다고 하시며, 뜨거운 물은 절대 땅에
쏟아 버리지도 말고, 흐르는 물에 소변을
보거나 침을 뱉어서도 안 된다고 하였으니,
어른스님들의 그러한 말씀이 곧 환경교육이었다.
어떤
업적을 쌓기 위해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일들은 과시적이고 외형적일 뿐 깨끗한
마음을 진실로 드러내어 주는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불교의 보살행을 의식하고 모두가 본심자성으로
돌아가 생명을 아끼고 환경을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환경 자체를 나의 몸으로
여기고 나의 마음이 의지할 바라고 확신할
때, 부처님의 말씀이 따로 없어도 우리는
깨달음의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사회가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줄지는 모르지만,
결국 환경운동을 전개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몸은 쓰레기와 함께 오물로 처리되어 썩어
갈 수밖에 없으며, 황폐화되어 가는 마음은
마약과 모함, 살상 투쟁이 난무하는 지옥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환경법이다.
잘
배우고 바로 익히고 실현하는 불제자,
바로 환경운동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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