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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업, 정구업, 정구업 진언

김호성/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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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약점 중의 하나겠지만,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언변이 좋지 않다는 그런 이야기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처도 주지 않고, 교양 있게 말하지 못한다는 뜻에서이다. 품위와 예의를 지키면서 말을 하는 것은 사람살이에서 매우 필요한 일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내 마음과 말이 어긋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더욱이 경상도의 억양까지 보태지고 나면 때로 심각한 오해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내성적인 내 성격 탓인지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말로부터 상처를 입고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말로 짓는 업, 그것을 구업(口業)이라 한다. 몸으로 짓는 업[身業],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과 더불어 세 가지 업[三業]을 이룬다. 전통적 불교교리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업 중에서 그 근본은 의업이라 말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나 행동은 마음의 드러남,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업이 세 가지 업 중에서 보다 근본적인 업이라고 보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마음의 작용, 생각도 그 과정에 언어의 작용이 이미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 없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의 생각 역시 언어로 짜여지는 옷감이다.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아뢰야식]마저도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언어생활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차대하게 된다. 아름다운 언어가 아름다운 마음을 만들어 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도 옳지만, 일체유언조(一切唯言造)도 옳다. 말에 의하여 지옥을 만들 수도 있고, 말에 의하여 부처님 세계를 만들 수도 있다.  지옥을 향해 가는 언어를 구업이라 한다면, 부처님 세계를 만들어내는 언어를 구밀(口密)이라 한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 쓰는 언어를 청정한 언어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바꾸자고 하는 수행법이 있다. 이러한 입장의 불교를 밀교라고 하는데, 밀교에서 수많은 진언(眞言)을 갖추고 있는 까닭도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2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경전 중의 하나가 『천수경』이다. (1992년에 펴낸 『천수경이야기』가 내 첫 저서이다.) 거기에 따르면, 구업은 다시 넷으로 나뉘어진다. 거짓말[妄語], 아첨하는 말[綺語], 이간질하는 말[兩舌], 욕설[惡口]의 넷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네 가지 구업을 짓지 않겠다 맹서하고, 그것들을 정화하는 것이 정구업(淨口業)이다. 『천수경』은 주지하다시피, 정구업 진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정구업 진언의 의미를 새롭게 천착하게 된 것은 『천수경』에 대한 어떤 책을 통해서도 아니었고, 그것을 해설하면서도 아니었다. 바로 우리들의 언어 생활에 대한 성찰로부터 이루어졌다. 혹시 나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또 너무나 많은 말을 듣고 사는 것은 아닐까. 특히, 남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명백한 구업인데도 말이다. 왜 이렇게 구업을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거기에는 심리학도 있고, 윤리학도 있고, 사회학도 있고, 어쩌면 정치학까지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 관심은 그러한 학제적 원인 분석에 있지 않다. 다만 그러한 우리 삶의 현실태, 언어 생활을 직시(直視)하고자 할뿐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남의 말을 하는 자리에 함께 있게 되면, 내가 그 내용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을 갖는가 하는 점은 상관없이 내 귀에는 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리가 들리게 된다. 아! 구업에는 귀로 듣는 업(耳業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까지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적극적 동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묵시적 혹은 소극적 동의를 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방법의 하나는 우리의 사귐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조차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통해서 나는 『천수경』에서 말하는 ‘정구업 진언’의 본의는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글귀 이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정구업 진언은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맑고도 아름다운 언어 생활을 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진언수행론”을 생각해 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이다.

 3

근래 들어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고 본다. 너무나 날카로운 언어들이 공적으로 교환되고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속담은 진리이리라. 그렇기에 동시에 펜에 찔린 상처는 칼에 찔린 상처보다도 더 오래도록 아픔을 남길 수 있는 것 아닐까. 내 생각에는, 비록 공익을 위한 말이라 하더라도 혹은 학문의 발전을 위한 비평이라 하더라도 여백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사실 적나라한 감정의 언어들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적 언어를 상기하게 된다. 감정의 노출과 감춤이 길항(拮抗)하는 긴장지대에서 성립하는 말, 그 은유(隱喩)를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옛스님이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한 까닭도 이 같은 맥락은 아니었을까. 사실 詩는 寺에서 나온 言이다. 여기서 ‘절’은 저 도저한 침묵의 세계, 선(禪)의 세계를 함의하는 것은 아닐까. 드러난 말보다 더 깊이 숨겨진 말이 있어야 함을 시는 가르쳐준다. 선은 가르쳐준다. 나는 이러한 말을 통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 세계로 나아갔으면 싶다. 시를 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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