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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자의 신행생활

 
김성철/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교수

 


1. 대승적 삶의 길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복을 추구한다.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보다는 평생 큰 탈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염원한다. 세속적 복락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출가한 스님들의 발심에 머리를 숙이고 존경의 마음을 표하게 되는 것이다. 출가한 스님들의 경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 정진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직장을 가진 재가불자들이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직장생활과 깨달음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그렇다면 직장을 가진 일반 불자들의 신행은 어떠해야 할까? 삼국시대 이후 우리 나라에는 대승불교가 전해졌다. 대승이란 말은 소승에 비해 뛰어나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소승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대승과 소승이란 용어에서 가치판단적 기미를 제거할 때, 소승은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가르침이며 대승은 수많은 대중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재해석할 수도 있다. 소승은 부처님의 현생과 같이 출가한 수행자의 길이며, 대승은 부처님의 수많은 전생에서와 같이 승속의 삶을 포괄한 보살의 길이다. 이런 대승 보살의 신행에는 재가자 역시 동참할 수 있다. 그러면 대승적 신행의 길이란 어떠한 것일까?

티베트에서 수백 년 간 불교 신행의 지침서로 삼아 오고 있는, 쫑카빠(1357∼1419C.E.)스님의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국내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올바른 순서』라는 이름의 요약본으로 출간된 바 있음)에서는 이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삼보에 귀의한 후,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하면서 공덕을 쌓아가며 윤회의 세계 내에서 향상하는 삶을 추구하는 범부의 길로 <하사도(下士道)>라고 부른다. 둘째는 사성제와 십이연기 등의 소승적 교리를 터득하고 사념처의 수행을 함으로써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지향하는 출가자의 길로 <중사도(中士道)>라고 부른다. 셋째는 깨달음을 유예(猶豫)하고 윤회의 세계 내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길로 <상사도(上士道)>라고 부른다. 『보리도차제론』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누적적(累積的)이다. 즉, 아래 단계의 신행이 철저히 체계화되어 있어야 위 단계의 신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승속에 공통된 불자의 신행 방식은 <상사도>인 보살의 삶도 아니고, <중사도>인 출가자의 삶도 아니며 바로 <하사도>의 삶이다. 그리고 <하사도>란 한 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착하게 사는 삶이다.

2. 선행과 참회의 기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착하게 살면 손해본다”는 자조적(自嘲的)인 격언이 널리 퍼져 있다. 언뜻 보기에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착한 사람은 손해를 본다. 좋은 일은 남에게 양보하고 궂은 일은 도맡아 한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 “착하게 살면 손해본다”는 조건문에서 “착하게 살면”이라는 문장과 “손해본다”는 문장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세상만사는 인과응보의 이치에 따라 진행된다. 내가 지은 것은 언젠가 반드시 내가 받게 되어 있다. 지금 나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의 행복과 불행은 전생이나 과거의 언젠가 내가 지었던 행위의 결과이다.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다. 사람의 삶은 짓는 측면과 받는 측면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생김새, 나의 능력, 나의 재산, 내가 살아가며 체험하는 행복과 불행 등은 모두 내가 ‘받는 것’(果)들이다. 반면에 나의 말, 나의 행동, 내가 품는 생각들은 모두 내가 ‘짓는 것’(因)들이다. 우리는 매 순간 지어감과 동시에 받아가며 살아간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나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밭에 뿌린 나의 행위의 씨앗이 성숙하게 되면 그와 동질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 착하게 살 경우 좋은 결실을 맺게 되며, 악하게 살 경우 나쁜 결실을 맺게 된다. “착하게 살면 손해본다”는 말에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현재 내가 짓고 있는 행위(因)이기에, 미래의 언젠가 그 결실이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손해 본다”는 것은 지금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 또는 전생의 언젠가 내가 지은 악업의 결과(果)로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착하게 살면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손해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꿋꿋하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 불교의 업설(業說)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아무리 박복해도 착하게 살아야 미래가 밝고, 아무리 유복해도 착하게 살아야 그 미래가 밝다. 불교의 업설은 윤회 내에서의 향상을 말하는 적극적인 윤리설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말한다. 공간적으로는 상하, 팔방의 모든 곳에 부처님이 계시며, 시간적으로는 과거 미래 현재에 언제나 부처님이 계신다. 부처님이란 산스크리트어로 Buddha, 즉 ‘깨달은 분’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다. 그리고 삼천대천세계, 즉 온 우주에는 생명체가 가득하기에 그 어느 방향으로든 끝없이 나아갈 경우 ‘깨달으신 생명체’, 즉 부처님이 계신다. 『법화경』에 등장하시는 다보여래와 같은 분이 외계(外界)의 부처님이시며, 『무량수경』의 주인공이신 서방 정토의 아미타부처님과 같은 분 역시 외계의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분’이시다. 그래서 고래(古來)로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知者: sarvajna)’라고 불렀다. 즉, 부처님은 전지자(全知者)이시다. 사람들은 어떤 절대자를 상상하며 전지전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능자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종교적 희망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세상만사는 우리의 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전능자가 있어서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들은 모든 것을 아는 분들이시기에 우리가 기도를 올릴 때 이 우주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시며 감응하신다.

우리는 나와 가족이 별 탈 없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윤회와 인과응보의 이치에 비추어 볼 경우 내가 전생에 지었을 나의 악업의 과보가 미래에 언젠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의 착한 행동은 과거에, 또는 전생에 내가 지었던 악업의 과보를 상쇄시키진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행을 방지할 수 있을까? 우주 끝 어딘가에 계시는 부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참회하는 것이다. 복을 위한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참회의 기도이고, 둘째는 구복(求福)의 기도이다. 참회의 기도는 씻는 기도이고, 구복의 기도는 바라는 기도이다. 참회의 기도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방지해 줌으로써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 구복의 기도는 불가항력적인 괴로움을 만났을 때 불보살님께 매달려 애원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일상생활 속의 기도는 대부분 참회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뿐이지 무엇을 욕망하지 않는 기도가 참회의 기도인 것이다. 참회는 우리의 죄업을 희석시킨다. 한 움큼의 소금이 강물에 던져질 경우 그 맛이 희석되듯이.

3. 내세에 대한 발원과 보살의 길

우리는 착하게 삶으로써 복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으며, 참회하며 삶으로써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착하게 사는 것, 참회하며 사는 것은 불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미덕이다. 참회하면서 착하게 살기만 할 경우 윤회의 세계 속에서 향상은 할지언정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행복으로 가득한 하늘나라 역시 윤회의 세계에 속한다. 착하게 살고 참회하며 살며 자신이 생각하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사는 경우 그에 해당하는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지었던 선업(善業)의 복이 소진되면 다시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복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괴로운 사바세계에 살다가 행복한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될 때 느껴지는 기쁨은 오래갈 수가 없다. 주변에 행복한 사람들만 있고 계속 행복한 일만 일어날 경우 행복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사후에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을 바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두 가지 극심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자신보다 공덕을 많이 쌓아 하늘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된 천신에 대한 공포이고, 둘째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죽을 때 자신의 사후의 세계를 예감함으로써 발생하는 죽음의 공포이다. 하늘나라의 천신들은 신통력이 있기에 죽기 전 자신의 내세를 짐작하게 되는데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동안 선업을 지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내세에는 대개 지옥이나 축생과 같은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천신들의 경우 죽음의 공포가 극심하다고 한다. 이런 세계관을 갖춘 티베트의 불교인들은 내세에 하늘나라가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을 발원한다. 그리고 스님이 되어 구도하며 남을 돕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즉, 내세에 출가 보살로 살 수 있기를 발원한다.

보살의 길은 『보리도차제론』에서 말하는 <상사도>이다. 보살은 착하게 살고 참회하며 살아가는 <하사도>와 깨달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중사도>의 토대 위에서 항상 남을 돕고 교화하는 <상사도>의 삶을 산다. 보살의 길에 들어선 자는 항상 참회하며 착하게 살아가지만 그를 통해 얻어질 자신의 복덕을 다른 모든 중생을 위해 회향하며, 언제나 깨달음을 추구하고 살아가지만 조급해 하지 않는다. 부처님과 같이 수 억겁에 걸친 보살행 이후의 성불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속제(俗諦)에 의거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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