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은 싫어한다.
그러나 선과 악의 판단을 어떤 기준에
따라 하느냐에 큰 차이가 있다. 자기는
선이라 하지만 남에게는 악이 될 수 있다.
자기 뜻에 맞으면 선이라 하고, 뜻에 맞지
않으면 악이라고 하는 자기 기준에 맞춘
선·악의 구별이라면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없다. 선과 악의 기준에는 보편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나 개인에게 맞지
않는다고 악일 수는 없다. 대중적으로
타당성이 없을 때 대중의 공감을 받을
수 없는 일이라면 이것을 악이라 하고,
이런 좋지 못한 행동을 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자를 악지식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보운경(寶雲經)』에 악지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선남자(善男子)야,
보살에게는 열 가지의 악지식(惡知識)을
멀리 하는 일이 있느니라. 열 가지란 무엇인가?
① 파계(破戒)한 악지식을 멀리하며, ②
정견(正見)을 깨뜨린 자를 멀리하며, ③
위의(威儀)를 파괴한 자를 멀리하며, ④
그릇된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를 멀리하며,
⑤ 게으른 자를 멀리하며, ⑥ 생사(生死)에
집착하는 자를 멀리하며, ⑦ 깨달음에
등돌리는 자를 멀리하며, ⑧ 속인들을
멀리하며, ⑨ 온갖 번뇌를 멀리한다. ⑩
보살은 이런 일들을 멀리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협박하거나 경멸하여 욕한다거나
하는 마음은 먹지 않고 “내가 일찍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니, 중생들은 습성과
욕망에 의해 더렵혀져 가까운 반연 때문에
잘못이 많다고 하거니와 나는 응당 이
모두를 멀리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몇
가지 일을 갖추어야 보살의 악지식을 멀리하는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
악지식(惡知識)은
불교의 최종 목적인 성불(成佛)을 역행(逆行)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보상의 행원(行願)과는 반목되는
것이다. 보살은 선지식(善知識)의 염원을
좋아한다. 선지식은 성불로 안도하는 안내자다.
선지식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 원만한 인격을 갖추게 되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성불의 정청 극락경계를
증득할 수 있다. 악지식이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좋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라면
선지식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일까? 선지식은
악지식의 반대로 몇 가지 좋은 일을 하는
수행이다.
첫째, 악지식은
계율을 지키지 않고 행동을 함부로 하여
자신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모든 단체
대중들에게 불편을 주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선지식은 계율을
잘 지키며 자신의 본심을 찾아 남에게
조그만 피해나 부담을 주지 않고 사회에
유익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악지식은
스스로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고, 남이
바른 견해를 가지거나 수행하는 것을 보면
방해하거나 깨뜨려 버린다. 그러나 선지식은
언제나 바른 견해를 갖고 수행하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바른 견해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인도한다.
셋째, 악지식은
자신도 올바르지 못하여 남이 지니고 있는
위의 마저 파괴하여 심술 부리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선지식은 자신이 부처님께서
갖추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고 팔만세행(八萬細行)의 위의를 준수하면서
남도 함께 부처님의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한다.
넷째, 악지식은
직업이나 생활에 있어서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고 행패를 부리고, 질서를 파괴하여
남을 불안하게 하는 등 좋지 못한 방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식은 남을 돕고
위로하고 남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고 즐겁게 생각하므로
스스로 올바른 일을 하게 된다.
다섯째,
악지식은 게으름이다. 게으르면 자기 몸도
괴로울 뿐 아니라 그를 보는 사람도 괴롭고,
그 게으름이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나 선지식은 부지런하다. 어떤 일을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하면서도 부지런히
정진하지만 피로한 줄 모르고 삼매의 경계에
들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여섯째,
악지식은 나고 죽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죽음에 집착하여 죽지 않으려고 아무리
바둥대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고 죽고, 오고 감, 있고 없음에 집착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황 된 생각이다. 선지식은
이러한 헛된 생각으로 시간과 정신을 허비하지
않는다. 집착한다는 것은 마음을 구속하는
행위다. 선지식은 집착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
일곱째,
악지식은 깨달음을 외면하는 짓이다. 깨달음은
한없는 과거부터 우리 마음에 때묻어 온
모든 업장을 깨뜨려 밝은 지혜를 증득하여
부처님같이 되는 것인데, 이 깨달음의
길을 외면한다면 이는 분명 악지식이 틀림없다.
그러나 선지식은 한 찰나도 깨달음의 원칙을
떠날 수 없는, 자신만이 깨달음을 증득코자
함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여덟째,
악지식은 속인(俗人)을 멀리하는 것이다.
불교는 염세적 종교가 아니라 세속 친화적
종교이다. 부처님은 설사 이짠띠까(一闡提:
구제불능의 의미)라 하더라도 버리지 않고
가르쳐 깨우침을 얻어 훌륭한 성자로 만들려는
원력이 있다. 그러므로 선지식은 설사
혼자 있더라도 대중과 더불어 한다는 생각으로
대중과 더불어 깨달음을 향하여 수행하고,
남을 위하여 올바른 길을 일러주고, 유익함이
되게 하는 것이다.
아홉째,
악지식은 온갖 번뇌를 멀리 한다는 것으로
약간 이해하기 어려울는지 모르지만, 번뇌는
멀리하고 싶다고 멀리 가는 것이 아니다.
번뇌는 업장이다. 우리는 이 업장을 닦아
없애버려야 한다. 선지식은 번뇌를 멀리하기
보다는 번뇌를 깨달아 집착을 떠나고 바른
지혜의 견해로 나아가는 수행을 함으로써
즐거움의 세계로 찾아드는 것이다.
열 번째,
악지식은 싫은 것은 무조건 멀리하려고
하지만, 선지식은 설사 악지식의 여러
가지 행위로부터 떠나려고 한다고 원망하고
협박하고 경멸하는 것이 아니다. 습성과
욕망으로 인해 생긴 번뇌와 망상을 떠나려고
하지만 그 욕망을 끊어버리고 습성을 고쳐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선지식은 싫어하는
모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상의
열 가지 악지식과 선지식을 간략히 비교해
보았다. 이 모든 악이나 선의 근원은 한
마음에 있다. 한 마음이 어리석어 행동하면
악지식이 되고 깨달아 행동하면 선지식이
된다. 마음의 등불을 밝혀 선악의 경계를
떠나자. 바른 깨달음은 한 마음에 밝은
등불을 환히 밝혀 누구에게나 지혜의 등불로
자비 보시로 회향하여 함께 성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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