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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에서 행복을 찾자

무관 큰스님/ 조계종 행자교육원 유나

 


생활 속에서 즐겁고, 마음이 안정되고,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며 추구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일상 속에서의 행복은 어떻게 추구해야 할 것인가를 불교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일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광범위한 내용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일터로 나아가 일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어느 하나 자신의 일상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제각기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선 ‘신심(信心)’이라는 것을 얘기합니다. 신심이라고 하는 것은 희망이라는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와 같이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삼는 것인 ‘원력(願力)’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 원력은 곧이어 실천인 ‘수행(修行)’을 동반하게 됩니다. 이제 이 세 가지 용어를 통하여 생활 속의 행복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신심을 갖는다고 할 때에는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해야겠다 저런 식으로는 어떨까 하는 마음들을 곧잘 내지만, 실제 어떤 식이든 꾸준하게 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불자들 중에는 더러 이런 분들도 계십니다. 부처님을 믿고 신행 생활을 해왔는데 성취가 적고, 복을 많이 받지 못하고, 괴로운 일이 더 많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가졌던 착하게 일하겠다는 생각도 주위 환경의 조그마한 제약에 쉽게 바꾸십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마음가짐이야말로 참된 신심일 것입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는 삼일 동안 마음이 변하지 않기가 어렵다고도 하며, 『법성게(法性偈)』에 보면 처음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정각(正覺)을 이룬다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선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보살 있는 곳에서 신심을 일으켜서 보리심을 발한 다음 53명의 뛰어난 선지식을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백여 개의 큰 도시를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결과로 마지막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렇듯 불교에선 여러 경전을 통하여 처음 마음을 낸 것이 변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이르러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 먹었던 마음과 같이 늘 변하지 않아야 될 이 신심은 원력을 가질 때 더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복에 대한 것도 그냥 어떻게 잘 되겠지 라는 식의 막연함만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적은 것 하나에서부터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매일 착한 일 한 가지를 정하고 실천해봅시다. 그저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해보는 것입니다. 흔히 요즘 세상은 너무 바쁘니까 그런 일에 시간낭비 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나, 신심으로 발해진 목표를 가지게 된다면 정말 못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매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루면 하루, 한 달이면 한 달, 한 분기면 한 분기씩 실천해 보고 그것이 몸에 배이고 나면 다음에는 한 개를 더해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관세음보살을 하루에 열 번씩 부르기로 했다면 삼 개월쯤 해보고 그것이 몸에 익으면 수를 늘려 오십 번씩 부르든지, 아니면 백 번씩이라도 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함에 있어서 처음에 하던 것을 버리고 다시 다른 것으로 옮겨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처음 시작한 것에다 한 개씩 한 개씩 더 보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원력을 쉼이 없이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원력들이 신심 속에서 성취가 될 때, 그 순간 우리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또 옛 스님들은 신심을 갖는 데에, 원력을 일으키는 것에 있어 마음속으로 바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얘기든지 장단점이 다 있기 마련인지라 오늘 이만큼 했으니까 당장 그만큼의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듣는 이에 따라 수긍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바라지 않고 무엇을 실천한다는 것도 가능하며 그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들이 착한 일을 한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지 말고, 선(善)까지도 버려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말 자체는 선을 실천하지 말라는 것이나, 원력을 가지고 수행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 바램이 집착이 되고 아집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극단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집착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믿음이 시작되고, 공부도 시작되고, 원력에 의한 실천도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계산 없이 그저 해놓고 보자 하는 식의 신심이나 원력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가을철 감나무 아래에서 홍시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식으로 맹목적인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믿게 되는데 있어서는 조금은 아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아는 것은 최소한 이해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해 속에서 믿는 것, 목표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목표를 가지게 된 신심도 본인이 직접 행동으로 옮겨 봐야만이 더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입으로 직접 주력하고, 직접 화두를 챙겨보고, 예불을 하는 다양한 실천행을 장려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이해를 바탕으로 신심을 내고, 원력을 세워서, 실천으로 나아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저는 얼마 전에 낮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직원들을 거느리시고 큰 공장을 운영하시는 한 신도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신도님과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직원들이 함부로 남기는 음식에 대해 너무 아깝다고 하시면서 몸소 발우공양의 의미를 실천하시는 그 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일상의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바른 신행을 몸소 하시는 그 신도님의 모습에 무척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 분과 같이 여러분도 각기 계시는 곳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또 수행을 얘기할 때 지혜만을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마는 진정한 수행의 의미는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추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덧붙여 저는 신심과 원력 그에 따른 수행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조금 피곤해지면 금새 편안해지고 싶어하는 욕망에 쉽게 따르게 되는데, 그 순간은 좋을 것 같아도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아 그 행동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고쳐 나가야 하고, 또한 더불어 사는 대중생활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이 행복을 찾고자 하는 수행에 있어서는 큰 것이 아닌 적은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것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 적은 일인 것 같지만 나중엔 오히려 큰 의미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적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는 것을 시작하면은, 또 적은 것부터 작은 선행을 실천해나가면은, 여러분들의 생활이 훨씬 더 윤택해지고 안정이 되며 마음도 즐거워지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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