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6월호 / 통권 56호 / 불기 2544(2000)년 6월 1일 발행

불립문자(不立文字)/ 장계환 스님 불교대학 교수

저는 법학도라서 그런지 자꾸 따지는 버릇이 있는데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스스로도 조금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국대학교에 와서 그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 것은 불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아무튼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방법 가운데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참선인데 선종에서 내세우는 네 가지 슬로건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특히 어떤 스님들은 “불립문자”를 내세워 경전도 필요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선종의 그 많은 어록들은 왜 나왔는 지 궁금합니다.(법과대학 법학과: 이 명호)

 질문하신 선종의 네 가지 명제를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 먼저 소개해보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가리킵니다..

  옛날 달마스님으로부터 시작된 초기의 선종은 논리적 경향이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비논리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입장이 바뀌어지게 된 것도 바로 위늬 네 가지 명제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불립문자의 원 뜻은, 진리 그 자체는 말이나 문자로서는 똑바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므로, 언어 문자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은 뜻이지요. 흔히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문자에 대한 불신은, 서양종교에서 '태초에 로고스(말씀)가 있었다'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진리의 영역이란 언어가 끊어진 곳이라는 입장이지요. 왜냐하면 절대적인 진리가 이런 것이라고 하면, 그 순간부터 그 입장이 고정화되고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보편적인 진리의 모습을 갖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나무를 잘라 책상을 만든다고 할 때, 나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파괴이지만 반대로 책상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창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궁극적 진리를 이분법(二分法)적으로만 생각하는 언어로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경전 그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경전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달을 가리켜 주는 지침서까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는 달 쪽으로 향하는 일조차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역할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선종에서 어록이 많은 것도 조사스님들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이미 잘 알고서, 그러한 한계성까지도 포함하여 올바르게 알려주기 위한 노심초사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아니면 그것조차 표현할 수 없다는 현실성과, 그러나 결코 언어문자에 구애받지 않았던 그들의 삶이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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