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6월호 / 통권 56호 / 불기 2544(2000)년 6월 1일 발행

기원정사 가는 길 / 김호성 인도철학과 교수

나우가르는 조그만 소읍이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발람푸르까지 가서, 다시 택시를 타야 기원정사에 도착할 수 있다. 나우가르의 기차역은 작다. 완행열차만이 지나가는 것 같다. 예매고 뭐고 없이, 표를 샀다. 컴퓨터 발매도 아니다. 마치 옛날 우리네 비둘기호 열차의 티켓같은 표를 준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바나나와 오렌지로 허기를 달랬다. 주변에 변변한 식당도 하나 없는 역이다.

아! 기차라니……. 기록영화같은 데서 6.25때의 피난열차를 본 기억이 있다. 지붕위에까지 가득 사람들이 올라있는 기차 말이다. 그런 열차를 여기 인도에 와서 본다. 우리가 타고 갈 기차다. 사람들이 지붕 위에까지 올라타는 형편이니, 기차 속의 비좁음은 어떻겠는가. 그 인구밀도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불가사의! 아들, 아내 그리고 나 순으로 우리도 디밀고 올라탔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못 오를 나무는 애시당초 없었던지, 그래도 우리가 들어갈 공간이 있다. 지난 번 고락푸르 갈 때 우리가 탄 열차는 2등 침대칸이었는데, 오늘의  이 기차는 객차 전체가 3등칸인 것이다. 서로 마주 보는 좌석이 2단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총 15명(8명 정원)이 앉아있다. 아들은 2층 침대(이미 많은 짐이 올라져 있다)에 올려놓았더니, 짐 더미 위에 쓰러져 잠을 청한다. 놀라운 일은 인도사람들의 ‘고통분담’이다. 우리는 입으로만 ‘고통분담’을 외칠 뿐, 정작 고통분담은 잘 하지 않는데, 인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 좁은 자리를 나누고 또 나누어 앉는다. 우리에게도 “여기 앉으라”고, 자리를 권한다. 생각한다. 아니 배운다. 진정한 보시바라밀은 즐거움과 쾌락의 나누기에 있다기 보다는 고통과 불편의 나누기에 있음을.

지금 우리는 쉬라바스티로 가고 있다. 부처님께서 24년이나 머무셨다고 하며, 『금강경』의 무대가 된 곳이다. 그 곳을 가는 중에 나는 3등 열차를 탄 덕분에 전무후무할 가능성이 높은 예술을 관람하게 된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이 만드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우리가 앉은 기차의 몸체는 그저 통으로 검게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위에 판화처럼, 혹은 그림처럼 새겨지는 ‘지붕위의 사람들’, 아! 예술이다. 움직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 모습 그대로 잡아내는 그림자의 동영상(動影像)을 보게 된 것이다. 아내도 감탄 불금(不禁)이다. 지붕 위의 사람들, 그림자(影)로 남은 그들. 그들만 그럴 것인가? 지붕 아래 사람들인 우리 역시 그렇게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림자의 예술, 그것이 곧 우리 삶일진저.

一切有爲法  지어진 그 모두는
如夢幻泡影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며
如露亦如電  이슬이며, 번갯불일지니
應作如是觀  그렇게 관찰할지라.

『금강경』의 이같은 사구게(四句偈)에서 ‘그림자’ 역시 그 여섯가지 비유[六喩]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불가(佛家)의 전통놀이 중에 ‘만석중놀이’는 일종의 그림자극인데, 그 내용[記意, signifie] 만이 아니라 그 형식[記表, signifiant]을 통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이 그림자극은 장예모 감독의 영화 『人生』에서도 볼 수 있다.]

 

기원정사는 우리가 묵고 있는 스리랑카절 맞은편에 있다. 들어가니, 은사 스님이 “제일 좋았다” 하실 만하다. 아마도 성지 중에서도 가장 좋은 여건인 듯싶다. 그 이유는 기타태자의 숲(Jetavana) 때문이다. 수닷타 장자가 황금을 깔아서 그 숲을 샀다. 그리고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지어 드렸다. 그 당시 기타태자 숲 그 자체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대로 잘 보존된 느낌이다.

여기저기 승원과 스투파의 기단들이 남아 있다. 지금의 기단이 언제 것인지, 부처님 당시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기원정사가 매우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었음은 틀림없다. 급고독장자는 “보시를 잘 한 사람”(su-datta)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곳을 무대로 『금강경』의 무주상보시가 설해졌으니, 그 인연이 딱딱 맞아든 것으로 믿어진다. 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여기 만약 기원정사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을까? 파괴, 그것이 곧 평화의 어머니라는 역설이 여기에 성립하는 것은 아닌가? 하긴, 『금강경』의 도리를 따르면 “모든 생각을 떠난 것이 곧 부처님“이고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는” 것이니, 여기 기원정사가 있었지만 이제는 없어졌다는 생각도 망상 아니겠는가. 존재와 비존재를 떠나 언제나 부처님은 여기에 상주하시는 것이리라.

송암스님이 이끄는 보현도량의 순례단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그 버스에 동승하여 기원정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앙굴리마라의 스투파 터”와 “수닷타장자의 집터”를 다녀왔다. “수닷타장자의 집터”는 보시를 즐기는 자의 집터답게 자그마하다. 우리네 지금 형편에 견주면 국민주택 규모라고나 할 수 있을까. 스스로 가난하게 산 여력으로 “고독한 이에게 무엇인가를 공급해 주시는 어른” [給孤獨長者]이 되셨던 것이다. 진정, 무주상보시바라밀의 전범(典範)이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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