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5월호 / 통권 55호 / 불기 2544(2000)년 5월 1일 발행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 / 정성본스님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5월의 문화인물로 신라후기 지리산 쌍계사 선문을 개창한 진감선사 慧昭(774-850)가 선정되어 그의 생애와 선사상 등이 재조명되고 있다. 당나라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神鑑선사의 선법을 받고 「동방성인」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3년 동안이나 거리에 짚신을 만들어 보시하는 등 보살행을 실천한 보살이기도 했다. 특히 귀국하여 지리산 쌍계사에 육조혜능의 影堂을 세우고 최상승의 선법을 펼쳤으며, 학인들에게 梵唄까지 가르쳐 해동범패의 시조가 되고 있는 선승이다.

최치원이 왕명을 받고 지은 혜소선사의 비문은 지금도 쌍계사에 보존되고 있는데, 「비문」 가운데 특히 감명깊은 일절이 혜소가 입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유훈의 다음과 같은 일절이다.

「탑을 만들어 형상(유체)를 보존하지도 말고, 비명을 만들어 행적을 기록하지도 말라.」 이 유훈은 일체를 형상과 명예를 초월한 萬法皆空을 체득하고, 선승으로서의 최상승의 경지에 살고 있는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자신의 마지막 유언에서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선승의 삶은 자신의 일상생활, 매사를 그대로 텅 비워버린 空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살고 있는 선승의 일상생활을 「자취를 남기지 않는 삶(沒懿跡)」이라고 하고, 「새가 허공을 날아 다니는 길(鳥道)」이라고도 표현한다. 『金剛經』 등에서 주장하는 無相이나 無住, 즉 공의 실천을 말한다.

선승들의 자취없는 삶을 선의 어록에는 많이 전하고 있는데, 황벽의 『완릉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대사가 西天에서 오셔 오직 一心의 法을 전하여 일체 중생이 본래 바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곧바로 가르치셨다(直指). 수행을 假借하지도 말고, 다만 지금 자기의 마음을 깨닫도록 하라.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다시 별달리 구할 것이 없다.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깨닫는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또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니 心體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양(相貌)이 없고, 정해진 장소도 없으나 또한 한결같이 없는 것은 아니며, 있다고 해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사가 眞性 心地藏은 머리도 꼬리도 없으나, 인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함으로 방편을 지혜라고 한다.고 했다. 만약 인연을 따르지 않을 때라도 그를 가히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인연에 응하더라도 또한 자취(留迹)가 없다.

『마조어록』에도 「흔적을 남기지 말라(不留朕迹)」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임제록』에도 「지금 여기서 법문을 듣는 도인의 作用處는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선승들의 생활은 흔적이나 자취, 종적을 남기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쳐도 물에는 자취가 없으며, 새가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녀도 허공에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취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와 형식, 권위에 사로잡힌 모양인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과 삶을 명예나 업적, 형식적인 권위로 후대에 길이 남기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이 순간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충실하게 살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혜소의 간곡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왕은 당대의 최고 문장가인 최치원에게 命하여 혜소의 비문을 짓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고 있음은 위대한 선승의 삶을 살고 간 혜소의 숭고한 정신과 훌륭한 인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마치 馬祖나 仰山, 監濟 등의 선승들이 한결같이 설법하면서 「나의 말을 기록하지 말라(莫記吾語)」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록이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하겠다.

최치원의 「혜소선사비문」에는 선승으로서의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던 혜소선사의 훌륭한 인품과 쌍계사 선문을 개창하고 선법을 펼치며 자취없는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사는 성품이 꾸밈이 없고, 말을 교묘히 꾸며서 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옷이라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은 항상 두 가지가 있었다. 귀인들이 때때로 찾아와도 일찍이 별다른 반찬이 없었다. 門人(제자)들이 거친 음식을 가져다 드리기 어려워 하니 선사는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으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하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이나 어린애나 접대함에 한결 같았다.

지리산 쌍계사에 선문을 개창하고 학인들을 지도하니 법문 듣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벼와 삼대처럼 줄을 지어 거의 송곳 꽂을 곳도 없을 정도로 많이 모였다고 비문에는 전하고 있는 것처럼, 혜소는 선승으로서의 본분을 검소하고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완전 연소한 위대한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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