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6월호 / 통권 56호 / 불기 2544(2000)년 6월 1일 발행
순선 법분/ 청화 큰스님

제가 입산한지도 5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사부대중에게 여러모로 은혜만 많이 끼치고 왔습니다만 아직도 내 공부가 미숙하기가 그지 없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말의 제목은 순선에 대한 법문입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순선(純禪)이란 말은 조금 생소한 말입니다. 한국불교의 禪은 참선하는 화두선이라 하여 화두와 참선과는 마치 등식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 데 참선이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고 화두를 참구하면 바로 그것이 참선인 것입니다.

혹자는 참선을 할 때는 교화도 교학도 별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물론 禪師에 따라서 차이는 있습니다만 교학을 배우는 것은 분별시비만 일으키기 때문에 禪을 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참선을 하려면 교학을 배우지 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순선(純禪)에 있어서는 염불과 참선을 구분하고, 교와 선을 구분하는 그런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순선(純禪)이라는 것은 달마대사로부터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실육문(少室六門)은 달마 스님께서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하신 법문인데 제1문은 심경송(心經頌), 제2문은 파상론(破相論), 제3문은 이종입(二種入), 제4문은 안심법문(安心法門), 제5문은 오성론(悟性論), 제6문은 혈맥론(血脈論)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史家들 중에는 소실육문이 달마대사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선별적으로 몇 가지는 달마스님이 하고 몇 가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후학들이 소실육문에 나오는 법문의 대의를 생각해 볼 때 달마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법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달마대사의 소실육문 가운데 이입사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천적인 수행을 말하는 것인데 이론적으로 범성일여 또는 본체와 현상과 모든 게 본래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입은 제법이 본래로 평등한 일유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법이 본래 평등하여 일유불성인 것을 아는 그것을 불교에서는 혜오(慧悟)라고 합니다.

사행은 보원행과 수연행 그리고 무소구행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보원행은 금생에 우리가 고통을 받고 남한테 시달림을 당하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어온 우리 행위로 인해서 받는다는 것이죠. 우리가 과보를 우연히 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어서 받는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시달림을 받음에 있어서 윤과를 깊이 알고 자기 스스로 깊이 참회를 하는 것이 보원행입니다.

隨綠行은 모두가 인연 따라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어느 것도 거부할 필요도 없이 자기 인연에 맞는 자기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無所求行인데 이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로 제법이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잘못 보아서 현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지 본래가 불성이고 부처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달마스님의 『소실육문(少室六門)』 4권에는 안심법문이 있는데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편안히 하는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이 고난에서 헤매고 있고 불안 가운데서 시달리고 있으니까 우선 그 마음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편안히 할 것인가. 우리 인간의 본체가 무엇인가. 우리 생명의 본체가 무엇인가. 우주가 무엇인가. 이러한 본체론적인, 존재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편안해 질 수가 없습니다.

역대 조사 스님들께서도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한 법문을 하셨는데 달마스님은 소실육문에서 말씀하셨고, 3조 승찬(僧璨)스님은 『신심명(信心銘)』에서 본체상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체상을 여의었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의 법문이 되지 못하고 참선법문이 되지 못합니다.

4조 도신대사는 어록 『입도안심묘방편문』에서 안심에 관한 법문을 하셨는데, 이는 安心에 들어가면 마음을 편안케 하는 방편법문입니다. 그 안심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달마대사도 안심법문이라는 것을 소실육문의 부분으로 설하시고 또 도신스님도 『입도안심묘방법문』 을 저술 하셨겠습니까. 그러한 면에서 볼 때 공부를 할 때는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일불이는 오직 하나를 지켜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라는 것은 불성이요 진여입니다. 그 자리를 지켜 우리 마음이 혼란하지 말고 지키라고 하는 그것이 이른바 도신대사가 역설한 일행삼매인 것입니다. 도신대사는 내가 말하는 법의 요체는 『능가경』 제1절에 있는 제불심제일이라.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불심이 제일 좋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달마스님에서부터 도신대사까지 전수되어 내려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자성이 본래 부처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선과 교가 절대 둘이 아닌 것이고 절대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염불과 참선 또한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를 철학적으로나 교학적으로만 많이 생각하는데 종교와 철학이라는 것은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교학에 대한 공부가 없이 너무나 마음만 갖고 따지면 맹신도가 되어 자신을 범하는 실수를 저지르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학에 대한 공부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론과 실천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활선상에서 부처가 저 밖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어느 것이나 모든 문물이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본래의 성품에서 보면 분명히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현상만 보는데 이는 상당히 유한적인 존재만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금강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풍우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요, 또 풀 끝에 이슬이요 또는 번개불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실지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다 하나의 존재란 말입니다.우리 중생이 번뇌가 어디서 옵니까? 가짜를 실지로 안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없는 것인데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비로소 내 소유도 분명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혼란스런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그 본체론적인 우리 생명의 본체에 대해서 적어도 확신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베이컨이 말한 바와 같이 아는 것은 힘인데 우리가 우리 생명의 본체를 모르면서 어떻게 안심하고 행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어버이라는 위치에서도 자기 자녀들을 모두가 다 부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본다는 것이다. 한 직장에 있어서 상사나 하급직원이 서로를 부처같이 생각할 때는 화기애애한 일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순수한 선(純禪), 이것은 조금도 어렵지도 않고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안심법문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거품같은 몸뚱이를 갖고 살고 있지만 본래의 우리 생명은 불생불멸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진여본성자리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금방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생명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우린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달마대사를 비롯한 역대 조사들께서 깨달으시고 순선(純禪)을 역설하시고 일행삼매가 바로 모두가 다 본체가 아닌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다른 사람들을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시고 마음을 편안히 하셔서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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