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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영시 : 게리 스나이더의 경우

백원기/전산원교수, 영문학

 

  시집 『거북 섬』(Turtle Island)으로 1975년 퓨리처 상을 받은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1930-)는 대학 시절 전공한 인류학과 일본의 사원에서 공부한 선을 바탕으로 시에 접근한다. 미국의 비트 문학(Beat Movement)의 주역인 케로우악(Jack Keroac 1922-1969)의 소설 『법을 쫓는 자』(The Dharma Bums)에 나오는 재피 라이더(Japhy Ryder)가 바로 스나이더의 분신이다. 이 소설에서 케로우악이 “한산은 재피의 영웅이었다. …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요, 산인이요, 불자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스나이더의 시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말이다. 그는 중국의 당·송 시대의 시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그가 좋아한 은둔시인 한산은 그에게 시인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생태학을 “지상의 살림살이”라고 이원적으로 설명한 스나이더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 한 가족처럼 더불어 사는 지구를 시인이 찬미해야 한다고 믿는다. 『거북 섬』에서도 스나이더는 이 제목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영원한 생명을 지닌 거대한 거북 혹은 뱀의 등에 받쳐 있는 하나의 섬으로 표현한다. 그는 이 섬을 온 인류가 잘 지켜야 함을 그는 그의 시에서 제시한다.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는 이 지구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그는 무당이 되고 뮤즈가 되며, 불보살(佛菩薩)이 되어 자비의 상태에 있으며 … 보살은 고통받는 자의 기준에 의해 살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불교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은 불교의 일체 생명 존중 사상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자연을 숭배하는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는 서구문명을 자연으로부터 고립되어 정신이 파괴될 수 있는 환경 위기에 달했다고 생각하며 시인들은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서구문명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땅에 대한 불경스러운 태도”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고 본, 스나이더는 이러한 서구문화의 병폐는 그 자체로서는 치유가 어렵고 현재의 지배적 삶의 구조와 가치와 한 대안을 상생(相生)과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북미 인디언의 생활양식과 동양의 종교 특히 선 불교(Zen Buddhism)와 도교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의 시를 “생존을 위한 기술”로 언급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시는 극심한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인간 생존에 대한 의식과 이를 극복할 새로운 비전을 찾는 구도자의 자세가 역력하다.

스나이더는 서구문명은 자연을 부정하는 기계론적인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본다. 여기의 자연은 대지(mother nature)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을 동시에 의미한다. 따라서 “탐욕을 충족시키는 기이한 제도”에 기반을 둔 현대사회는 다름 아닌 아수라장이다. 그가 “목구멍은 바늘만 한데 엄청난 식욕을 가진 굶주린 귀신”(『지구의 살림살이』 91)으로 정의하는 이 아귀는 현대문명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주어진 자연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사는 생태계 문화와는 달리, 생물권 문화는 자신의 생존과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지나친 산업화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성장이라는 암세포를 지닌 생물권 문화에 뿌리를 둔 서구문명은 결국 그 가공할 만한 식욕으로 이제 제 살을 먹어 치워 모든 것이 파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그는 인식한다.

『신화와 본문』(1960)은 「벌목」, 「사냥」 그리고 「불」의 3부로 되어 있다. 스나이더는 이들 시에서 신화와 본문이라는 말을 인간 지식의 두 근원으로써 각기 상징과 감각적인 인상을 뜻하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처한 서구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영적 비전을 찾는 유랑자(hobo), 혹은 비구(bikhu)로서 자신의 경험이라는 본문을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 그리고 생태계를 재결합할 수 있는 사회적 신화를 창조하고자 한다.

제1부 「벌목」은 생태계를 무참히 파괴하는 인간의 잔학성과 현대문명의 광기에 대한 고발이다. 숲으로 상징되는 모든 가치, 단지 제목들의 서식지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요람으로서 그리고 많은 생명체의 천국으로서의 숲의 파괴는 필연적으로 인간 삶의 황폐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고 그는 진단하며, 창세기 1: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모든 것들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지배를 정당화하여 엄청난 생태계의 파괴를 초래한 주된 원인으로 본다. “삼림들이 무너진다/절단되어 간다…/아함의 숲도, 시벨리의 숲도/세아미의 소나무도/절단되어 무너진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에 의해/아테네의 요정들과/로마의 자객들에 의해/옛날의 또 현재의/절단되어 나간다 도시를 건설할 터를 닦기 위해/루터와 웨이어하우지에 의해 밀려 나간다”라는 시구에서 보듯이, 스나이더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숲, 그리고 일본의 노작가인 세아미의 소나무와 하이다 인디언의 삼나무의 훼손을 이야기함으로써 숲의 파괴가 과거와 헌재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다. 이러한 무차별한 숲의 파괴 배후에는 유대이즘과 그리스의 철학 전통, 로마의 정치 전통, 그리고 루터의 기독교와 미국의 가장 유명한 목재 가공업자인 웨이어 하우저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공모가 있음을 토로하다.

제2부 「사냥」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삶의 양식을 통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스나이더가 제시하는 비전의 핵심은 서로가 서로를 동정하여 측은히 여기며 “더불어 사는” 상생의 지혜이다. 상생의 지혜는 인간의 삶이 주변 동식물들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깨닫는데서 비롯된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의 이미지를 통해 스나이더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상호관련성을 설명하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은 상호의존의 관계를 넘어 먹고 먹히는 끊임없는 먹이 사슬과 순환을 통해 서로가 상대 안에 녹아 있는 상호관통을 주장한다. 마지막 16편에는 그가 「사냥」 전편을 통해 얻은 공생과 상생의 비전이 잘 함축되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없이 드문 일”이라 말하며, 그는 인간 삶의 중요성과 끝없는 윤회와 재생을 통한 변화와 변신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찬미하는 인간은 만물의 지배자로서가 아닌 만물의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의 모델은 “스스로를 호랑이에게 먹이로 내 주고/눈 먼 자들에 수년에 걸쳐/쌓으면 산이 될 만한 눈들을 기증” 한 부처이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고, 자비심을 바탕으로 하여 조화롭게 더불어 사는 세계의 비전을 그는 “소녀들은 그들의 팔에/야생 가젤 양이나 여우 새끼를 안올 것이고/집에 갓 태어난 아기가 있어/여전히 젖가슴이 부푼 사람들은/그것들에게 그들의 흰 젖을 먹이리라.”라고 묘사한다.

제3부 「불」은 물리적인 실체와 영적인 실체의 상호 침투, 그리고 자아와 타인과의 합일을 강조한다. 광물, 식물, 그리고 동불 세계로부터 인간의 진화와 “골반 요람”이 암시하는 출산, 그리고 “업보(karma)의 난무” 등의 이미지는 죽음과 재생 그리고 해체와 재결합이라는 우주적인 순환 과정을 제시한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시인에게 이 세계는 아직 “업보의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다니는 “끝없는 순환”이라는 윤회의 사슬에 매인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욕망과 집제(集諦)가 넘치고 사랑이 없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은 탐·진·치 삼독에서 비롯되며, 이 삼독은 암과 같아 세계 모든 것들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파괴하여 문명과 인류 그리고 스스로의 멸망과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과 탐욕이 가져오는 병폐에 대한 스나이더의 대안은 사랑이다. 여기의 사랑은 만물의 유기적 연관성과 상호의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자아와 타자를 하나 되게 하는 삶의 원리를 말한다. 이러한 사랑은 그의 “우리는 배운다 사랑을, 두려움도 포함된”이라는 시행처럼, 근본적으로 모든 것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이며 자기 희생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그의 사랑은 불교에서 말하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세우고 지켜 나가는 계(戒), 대상을 지배,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지배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정(定), 그리고 그것이 전체와 자신을 행복으로 이끈다는 존재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자각하는 혜(慧)”의 삼학(三學)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라 할 것이다. 스나이더가 불교, 특히 선 불교와 밀교에 끌리는 것도 이것들에서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현상과 실체와의 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그가 선은 만물의 연기와 화엄에 근거하고 있고, 밀교는 무애의 비전을 개별적인 인간 차원에 적용시킨 것으로 볼 때, “타자”는 연인이 되며 그물의 여러 고리들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것들이 그물의 코처럼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연기론과 무애의 원리는 결국 타자를 연인으로 만들어 자아와 타자의 합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제3부의 마지막 17편은 본문, 즉 감각적 현상계의 세계와 신화의 상징 세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임을 보여준다. “산들이 너의 마음이다”는 말은 물리적 외부 세계와 정신의 내부 세계가 근본적으로 구별이 없는 세계의 의미로서 시인이 지금까지의 구도 여행을 통해 얻은 비전의 결론이다. 온 우주가 다 불타서 정화된 세상에서 시인 또한 이제는 산불을 염려하는 감시원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신비로운 불을 인식하는 자로 변모해 있다. “태양은 새벽 별 일뿐이다”라는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새벽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첫행의 암울한 분위기를 걷어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요컨대 스나이더는 인간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고, 이것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자연계의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인간 본위의 사상과 종교에서 비롯된 극심한 생태계의 파괴에서 찾는다. 아울러 그는 동양의 불교와 도교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의 지혜에서 이에 대한 방안을 모색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는 탈 인간중심의 모든 생명체들이 동일하게 소중한 동료 시민으로 인식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