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생명의 본질

오녹원 큰스님
동국학원 이사장

 여러분들은 시각적으로 우주 안에 물체를  관찰할 때 어떻게 보십니까.  혹 차별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이름·모양·색깔·대소에 따라 자신이 본 모든 만물이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각(正覺)을 했습니다. 정각을 했다는 것은 모든 물상과 마음, 마음 밖의 마음을 보는 데 있어서 그 원초적인 실상을 더 보탤 것도 더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 본질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중생들은 잘못된 분별심으로 인해 본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생이란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찰나 찰나 변해가며 사는 생명체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생명체란 본래 나고 죽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모양·색깔 등에 팔려서 생명체가 유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산만큼 만이 생명의 전체고 삶의 전부라는 착각을 하고 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해와 달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큰 광명을 법계에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명의 본질은 이들보다도 먼저 있었고 다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이며, 생명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체란 업(業)에 의해서 이루어진 가아(假我)이며, 이것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즉, 업신(業身)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생명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업신은 참자아(眞我)가 아니고 거짓 자아(假我)라는 겁니다.

본래 생명체 본질은 물과 같습니다. 물이 얼면 얼음도 되고 이름도 ‘물’에서 ‘얼음’으로 바뀝니다. 또 얼음은  날씨가 풀리면 녹아 물이 됩니다. 물이 됐을 때 역시 이름이 바뀝니다. 이처럼 물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변합니다. 그렇다고 생명체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이름과 환경에 따른 변화에 따라서 각각을 달리 보면서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을 하고 사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하지 못한 것을 정당하게 깨달은 것이 정각(正覺)입니다. 즉, ‘바로 깨달았다’는 겁니다.

불성(佛性)은 법계에 본래부터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만사가 괴롭지만, 이것을 알면 모든 만물을 접촉할 때 하나도 어김이 없습니다. 그 실상과 나의 불성이 하나에서 늘 접촉되고, 하나에서 늘 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살림살이 안에서 생명이 계속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성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럼 생명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모든 만물이 전부 살수 있도록 기운이 뻗쳐 있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고, 그것이 곧 불성이며, 부처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의존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시간과 공간을 빼놓으면 헛깨비가 됩니다.

시간촵공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분별심이 만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업으로 창출된 겁니다. 시간이나 공간이 불변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가 ‘이곳에 무엇을 만들어야 겠다’ 라는 생각을 떠올려 행함으로써 생긴 것입니다. 즉, 이것은 우리들의 의식인 것입니다.

식(識)이란 밭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물체가 있으려면 밭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래야 씨를 뿌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마음이든 나쁜 마음이든지 일단 식(識)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생겨납니다.(心卽生 種種法生)

세상에 만물이 생겨나려면 밭과 종자 물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들 각각은 곧 행위, 의식, 애착과 귀결됩니다. 이것들은 상호불가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애착이 없으면 만물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즉 행위인 밭이 있고 종자가 있다 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불교만큼 과학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세 가지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불교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이고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인간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무용한 것이지요. 요즘 일부 종교에서는 남을 해하고 세상을 망하게 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사람을 살게 하는 종교입니다. 내가 살고 남을 살게 하는 종교지요. 남과 내가 차별없이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이 불교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동물이건 곤충이건 말입니다. 남을 해하면 나도 훼손 당합니다. 왜냐하면 너와 내가 하나인 까닭입니다. 생명이란 본래부터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미워해서도 모함해서도 속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내 자신을 미워하고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불교입니다. 만일 전 인류 가슴 속에 불교의 가르침이 사무치게 된다면 이 세상은 무기도 전쟁도 필요 없게 됩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전쟁과 살상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몇 천년의 세월이 흘러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집 때문입니다. 아집은 어디서 옵니까. 미혹, 즉 무명(無明)에서 나옵니다.

미혹이라는 것이 중생의 살림살이 근본입니다. 어두운 기운인 미혹은 불행이지요. 우리는 정각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정각이라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행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할려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생겨나는 모든 것은 행위(밭)와 의식(종자)과 애착(물)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행·식·애가 나와 남을 있게 하고 만물을 있게 하고 존재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행·식·애는 우주와 인생·유정·무정이 어디서 창출된 것인지를 잘 알게 합니다.

진리가 있다면 신심이 안 날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에 대한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실천을  해야 합니다. 병원이 없는 곳이나 어려운 사람한테 보시도 하십시오. 이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보시에 대단히 인색합니다. 좋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에 인색한 것입니다. ‘베푸는 종교’는 발전하지만, ‘달라는 종교’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해와 달과 같습니다. 해나 달은 모든 산천을 비출 뿐 차별심이 없습니다. 물론 해나 달이 뜨면 높은 산봉우리부터 비추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차별심이 아니라 법이 그렇게 돼 있는 겁니다. 부처님 법이 어디 차별심이 있겠습니까만 인연이 있는 사람부터 먼저 복을 받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을 지어야 합니다. 멍하게 있어서는 안됩니다. 남을 위해 보시를 하십시오. 행이 있어야 합니다. 불자가 의식이 없다면 원력이 없게 되고 그러면 가정도 꾸려 가지 못합니다. 부처님 법에 “너와 내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전부고 전 인류가 생명체의 전부다”고 했습니다. 어찌 여기에 차별할 것이 있겠습니까. 욕심을 버리고 남을 도울 때 진정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알고 행하는 것, 그것은 불자들의 몫입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