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이달의
법문 겸손의 미덕/이법산 스님
곡식은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빈 그릇도 차면
무거워진다. 아만은 겸손이란 그릇이 채워지지
않음에서 오고, 경멸은 공경의 이삭이
여물지 않은 데서 온다. 풍요로운 가을이
오면 누렇게 익어 가는 들녘의 벼이삭을
보고 자연의 겸손을 배우고, 추수하고
방아 찧어 채워지는 쌀 항아리를 보면서
묵직한 공경의 마음을 배워 야 한다. 남보다
나은 내가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어 항상
부족한 듯 하게 마음에 빈자리를 남겨
놓아 더 좋은 지식을 채울 수 있는 여유를
가짐으로써 겸허의 인의(仁義)를 생활화하고,
덕 있는 이를 진정 공경하고 지혜로운
이를 흠모하여 고개 숙일 수 있는 예의와
지혜를 갖추도록 스스로 노력해 야 한다.
겸허한 자는 자기의 지혜와 덕을 알아
모든 이를 수순할 수 있으므로 꾸미지
않은 겸손한 자세가 몸에서부터 나타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신의를 갖게 한다. 또, 모든
사물에 감사한다는 생각과 남의 인격을
존중하고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갖고 행동함으로써 공경의 자세가 몸에
익혀져, 굳이 바라지 않아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훌륭한 인격자로서의 대접을 받게 된다.
부처님께서 『수호국계주경 (守護國界主經)』에
다음 같이 말씀하셨다. "보살은 자신을
낮추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되 겸손과 공경으로
스승을 따르며, 또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터득하여 보존케 한다. " 인간은
스스로 겸손함으로써 자기의 열매에 충실히
할 수 있고, 공경심을 갖고 생활함으로써
남에게 공경 받을 수 있다. 스스로 이를
실천함은 먼저자기 인격을 완성함이요,
남이 이를 보고 따르게 됨은 일체 중생,
즉 모든 사람에게 이익 되고 즐겁게 함이요,
자타가 한 가지로 이를 실천할 때 우리들의
사회는 화해와 행복이 충만한 정토사회가
이룩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건강
·안온 ·장수의 세 가지이다.
즉,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오래 살기를
갈구한다. 그러나 신업(身業)으로써 건강을
해치고. 구업(口業)으로써 불안해하고.
의업(憲業)으로써 수명에 막대한 영향이
있음을 잊은 채 악업(惡業)만을 쉽게 지을
뿐. 선업(선業) 닦을 줄을 모른다. 이
세 가지 소원을 성취하려면 신·구·의(身口意)가
습관화된 10악업을 10선업으로 돌이켜
실천하면 된다. 그러나 이 10선업을 하나하나
염두에 두고 실천하려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다만 불·법·승을 신·구·의로
귀명(歸命)하면 열 가지 선업을 자연스럽게
닦을 수 있다. 즉. 몸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고, 불(佛)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가르침을 널리 선전하며, 마음으로부터
부처님을 염하고 감사하며, 참선하게 된다면
부처님을 믿는 공덕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고, 가르침을 익혀 지혜로운 마음으로
안온하게 생활하며, 부처님의 행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성취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에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는 무릇 세
가지가 있으니, 건강·안온·장수가
그것이다"라고 하시고, 이를 성취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부처님께
귀명하고, 법에 귀명하고, 승에 귀명하는
일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으로써 자기 자신을 살필 줄
알고 공경성으로 남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의 실천이 쉬워 보여도 누누이
당부하신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때
그렇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겸경(謙敬)과 미덕(美德)은 만행(만行)의
근본으로 능히 이를 마음에 새겨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건강한 몸과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한 가지 꼭 지켜질 수 있다면‥‥
정각도량 禪茶一如/정성본
스님
요즘
시내에는 전통 찻집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찻집에 가보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글귀가 禪茶-如, 혹은 茶禪-如라고 하는
말이다. 즉 차를 마시는 것이나 참선을
하는 것은 똑같은 경지의 한 맛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말은 茶생활의
문화가 참선의 경지와 같은 차원 높은
정신문화임을 강조하는 茶道人들의 주장이다.
그러면 차를 마시는 일과 참선을 하는
일은 분명히 다른 행위인데 어떻게 禪茶一如의
주장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차를 마시는
茶道의 문화가 어렵게 선의 경지와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禪茶一如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선, 혹은 '선의
경지란 어떤 세계인가?'를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唐代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이란 단순히 번뇌를 퇴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에 조용히 앉아서 닦는 좌선이나
명상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은 한마디로 인각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을 자각하고 자각된 본래심(평상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차별심이나
분별심의 번뇌도 없이 일상생활의 每事를
걸림 없이 무애자재롭게 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차를 마시고 차의 생활을
하는 茶道의 경지가 선의 생활, 혹은 선의
경지와 같다고 하는 禪茶-如, 혹은 茶禪-如라는
주장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禪僧들의
주장이 아니라 茶道 생활을 하는 茶道人들의
주장이다.
중국
선종의 문헌에서 禪茶一如, 혹은 茶禪一如라는
말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점으로도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이러한 말은 선불교의 정신을 토대로 하여
茶道의 문화를 발전시킨 일본의 茶道人들에
의해 최초로 주장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信심명』의 다음 게송은 茶禪一如의
사상적인 근거가 되는 말이다.
心若不異
: 마음에 차별 분별이 없으면, 萬法一如
: 만 법은 한결 같다.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妄心과 妄念을
여의면 그대로 만법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萬法-如라고 한다. 우리들 인간의 行住坐臥의
일상생활을 여러 가지 일과 행위를 통해서
다양하게 전개할지라도 일체의 주위 경계나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나 근원격인
본래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의 생활이다.
때문에 이러한 본래 심으로 사는 선의
생활 속에 인간의 每事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證道歌에도
「인간의 행위가 모두 선이요, 않아 있는
것도 또한 선이다. 그래서 말을 할 때나
묵묵히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조용히
있을 때나 본래 심으로 언제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行亦禪, 坐亦禪, 語默動靜體安연)」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가
모두 禪의 생활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일체의 근심걱정이 없는 본래심의 평안(열반적정의
경지)한 삶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유마경』
보살품에도 「諸有의 所作, 擧足 下足은
마땅히 깨달음의 세계(道場)에서 佛法에
住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行주坐臥의 일상생활이 佛法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깨달음의 장소(세계 : 本來心)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를 마실 때나
식사를 할 때나 모두가 佛法의 세계에
살(住)고 있는 것처럼. 평상의 일상생활
그 모두가 본래 심으로 佛法을 전개하는
것이다. 平常心(본래심)이 바로道라는
말은 이러한 정성을 단적으로 제시한禪道의
定義이다. 인간의 일상생활 그 모두가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전개하는 선의 생활이기
때문에, 차를 마시는 일이나 참선을 하는
일이나 차별, 분별심이 없는 생활이기에
禪다一如의 세계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一如로
할 수 있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道의 주체인 本來心으로 전개되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적한 곳에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하는 坐禪의 이미지와
조용히 차분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외관상의
모습과 행위를 같은 것(일여)으로 간주하고
茶禪일如, 혹은 禪茶일如의 경지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행위의 구분을
일체화하려는 의도에서 분별심과 조작심이
증대될 뿐이다. 좌선과 차 마시는 행위를
억지로 일체화시키려는 조작된 의지가
작용하게 되는 부작용이 증대될 뿐이다.
좌선과 차 마시는 행위를 억지로 일체화시키려는
조작된 의지가 작용하게 되는 부작용이
증대될 뿐이다. 차를 마시거나 좌선을
하거나 상관없이 일체의 행위와 분별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의 행위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즉 자신이 근원적인
본래 심으로 時空이 교차되는 그 線上에서
자신의 일과 하나가 된 日常三味의 세계에서
一如의 경지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선의
생활, 혹은 禪茶一如의 경지라고 한다.
추사 김정회의 명필로 유명한 다음의 게송은
禪茶一如의 세계를 단적으로 읊고 있다.
靜坐處茶半香초
: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면 향기는 언제나
처음 그 맛.
妙用時水流花開
' 신묘한 마음(지혜)의 작용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靜坐處란
깨달음의 경지인 근원적인 본래심의 本體를
공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말이고, 妙用時란
본래심의 묘한 지혜 작용을 시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즉 본래심의 경지인
본체에서 좌선을 하고 차를 마시면 향기와
맛 등의 현상적인 경계나 분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처음(본래심) 그 깨달음의
경지를 상실하지 않는 입장을 읊고 있다.
처음(초)은 原初, 근원 본래 심으로 一味의
경지를 의미한다. 茶半香初란 어려운 말인데,
本體인 본래심의 경지에서 차를 마시기에
차를 반 잔 마시거나 두 잔을 마시거나
향기나 맛에 끄달려 처음인 根本,즉 본래심의
本體를 상실하지 않고 一味의 경지에서
如如하게 사는 선의 생활모습을 읊고 있다.
이러한 본래심에서 전개되는 신묘한 지혜의
작용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처럼
언제나 如法하고 자유 자재롭게 전개되는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특집1/인터넷
시대의 불교 불교의 인터넷 활용/홍영식/정보산업
대학 교수
1.
인터넷 환경
현대사회를
정보화사회로 흔히들 특징짓는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단순한 정보처리기기로서
폐쇄적인 형태로 단독으로 주로 사용되던
것이 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지금은
전 세계 각지의 컴퓨터들이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상호간에 거의 광속으로 정보를
주고 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컴퓨터 통신의
형태도 탁상용 컴퓨터로 유선망을 주로
사용해 왔지만, 최근에는 인터넷폰등 휴대용
디지털기기를 사용하여 무선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와 같이
컴퓨터통신망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은
홈페이지 형태로 정보를 제공하는 서버와
통신망에 연결된 단말 컴퓨터와 정보전송
및 화면표시를 담당하는 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가 주된 구성요소다. 이러한
인터넷의 사용자는 불과 5년여만에 전
세계적으로 5천만명 이상이고 곧 1억명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의 경우도
1994년 당시에 14만 명 정도였으나 금년
5월 현재 436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2002년에는
1천만명 이상이 인터넷을 이용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
불교와 인터넷
불교의
전파는 불교계의 커다란 사명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인터넷은 이러한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데 매우 유용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일례로 불자, 사찰, 불교기관
및 불교단체들을 대상으로 법회, 행사.
이벤트 등 각종 불사에 관한 공지사항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우편물이나 전화에 의존하거나,
언론 등 홍보기관을 주로 이용하여 장기간에
걸쳐서 많은 경비를 지불했지만, 인터넷을
이용할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또한,
공지사항의 전달뿐만 아니라 큰스님의
법문의 전파나 불자를 대상으로 한 교리문답과
신행상담을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행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심자를 위한
신행안내 등 다양한 형태의 신행지도가
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종무행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종단 산하 사찰간의
정보교류를 활성화시키고.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정보를 공개하고 구성원의 의견을
인터넷을 통해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종무행정의 신뢰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불교 교육기관간의 신속한 정보의 교환,
경전에 관한 학술정보의 제공. 불교연구결과의
신속한 정보의 교환, 경전에 관한 학술정보의
제공, 불교연구결과의 신속한 소재 및
세계 볼교계의 중요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불교 교육과 연구를 지원할 수 있으며,
교육과 연구의 활성화는 불교발전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불교 종합 정보망의 효율성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 달마넷(www.dharmanet.net)를
개설하여 불교의 종합적 정보망을 구축
중에 있다. 또한 최근 보도에 의하면 종단에서는
약200억원 규모의 예산으로 종단산하 3천여
개의 사찰에 1천대의 서버와 9천대의 PC
및 관련 소프트웨어를 공급하여 달마넷을
확충하는 사업을 계약했다고 한다. 불교
종합 정보망에 대한 기반 환경의 조성도
중요하지만, 종합 정보망에 걸맞는 알찬
정보의 수집 및 제공과 충실한 유지보수는
정보제공자 입장에서는 필수적인 사항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불자들이나 불교
관련 단체에서는 종합 정보망을 통해서
제공되는 정보를 개인의 신앙생활과 포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먼저 쓸모
있고 충실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제공되면
이용자는 늘어나게 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용자들이 외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용자들이 정보 취득에 따른
통신료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합
정보망에서 제공될 정보의 종류와 내용은
정보의 제공자보다는 이용자 위주의 것이
되어야 하고 정보 이용을 위한 적극적인
홍보와 이용교육이 지속되어야 종합 정보망에
대한 투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4.
맺는 말
컴퓨터
네트워크에 기초한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정보의 유통속도가 빨라지고 그에 따라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도 가속화되고, 사회도
급속히 변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서
인간이 설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사회
조직은 더욱 냉엄하게 되어 인간이 소외되고
인간성의 상실은 점차 심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 대중은 종교에 의존해서
자기 상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사찰 및 포교당을 찾거나 스님을 만나는
등 신행 안내와 지도를 받은 기회를 갖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터넷을 통한
불교의 포교나 신행지도는 지금보다 다양하고
실제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또한, 일반
불자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사찰을 찾고 스님을 만나는
일과 더불어 인터넷을 통해서 수시로 신행에
관한 정보를 접하거나 전자메일로 신행지도를
받거나 인터넷을 통한 보시를 행함으로써
생활불교의 실천이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기술 등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성 상실이 가속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역으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그 부작용을 완화시키고
나아가서 한국불교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특집2/
인터넷 시대의 불교 불전 전산화의
현실과 전망/박종림 스님
현대
사회의 각 방면에서의 기술적 진보는 이제
분 초 단위로 계산을 해야할 만큼 숨가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전산 정보 분야는
이미 개발을 마친 많은 기술을 현실이
수용하지 못해 기술 구현시기를 꼽고 있어야
할 정도로 빠른 진보를 보여 준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불전 전산화 기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짧은 기간 동안의 숨가쁜 변화는 아마도
이러한 변화속도를 보여 주는 한 표본이
될 것이다. 2000년 10월 세계가 주목할
전자 고려대장경 CD롬 출시를 앞둔 우리
연구소의 출발도 사실 불과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최신이었지만 지금은
유아용장난감으로도 활용 못할 8비트 컴퓨터를
가지고 이 땅에서 최초로 불전을 전산화하겠다고
몇몇 스님들이 망상에 가까운 서원을 낸
것이 이 거대한 불사의 시작이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전산화 기술의 진보 속도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연구소가
체계를 갖추고 고려대장경을 본격적으로
전산화하면서 첫 번째 닥쳤던 어려움은(아니
당혹감이라 해야할 지 모르겠다) 전산화
이전에 고려대장경학이라 불려야 마땅할
연구가 있어야 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불전 전산화가 전산 기술자 몇몇이 모여
눈에 보이는 대로 글자를 입력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의 발견은 초기 무모하리
만큼 용감했던 우리의 전산 시도가 역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준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우리 연구소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근래에
출범한 불전 전산화 기구들도 이 점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소는
이부터 이미 시작된 단순 입력과 더불어
전산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구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 첫째 결실이
동국대 불교학부 정승석 교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려대장경 해제』이다. 이
연구로 연구소는 일차 입력된 고려대장경에
실린 경전과 그 본문들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검색해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조망을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의 학술적 성과는 연세대 이규갑교수가
주도한 입력 과정 중에 발견된35,000여
종의 이체자 정리이다. 고려대장경에는
8,000여 종의 기본 한자가 쓰여졌으니
그 네 배가, 넘는 이체자가 발견된 셈이다.
연구소는 고려대장경 원본의 글자를 그대로
컴퓨터 상에서 구현해야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이 드러나고, 이를 저본으로 하고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신수대장경의 문제점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고려대장경에
나타나는 모든 이체자 폰트를 개발하여
입력하고 있다. 연구소가 부닥쳤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기술적 어려움은 현재 2바이트
코드시스템으로는 수많은 이체자를 갖고
있는 고려대장경을 그대로 구현해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코드 시스템을
적용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 연구소는
이른바 Korean Tripitaka Code System(KTCS)이라
칭하는 4바이트 코드 시스템 연구팀을
가동시켜 고려워드라는 차세대의 새로운
문서작성기를 개발하고. 이 기반 위에서
이체자를 구현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러한
한자 구현 방식은 일본인 신수대장경팀이
정자의 범위를 벗어난 한자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혁명적인
것으로 대만과 일본의 전자불전연구소들이
긴장하여 주목하고 있는 방식이다. 각국의
불전 전산화의 목표는 사실은 모두 동일하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방대한 경전을
수월하게 읽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겠다는 것이다. UC Berkely대학의
Lancaster 교수의 주도로 1993년 창립된
세계 전자 불전 협의회(Electronic Buddhist
TextsInitiative)는 이렇듯 같은 목적
하에서 전산화 작업을 수행하는 각 국의
전자불전 연구소의 기술적·학문적
성과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출범된 기구이다.
이
기구의 출범과 함께 각 국의 연구소는
다양한 언어와 판본으로 이루어진 전자
통합 대장경이라는 이상이 현실화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에 자신들이
개발한 전자불전이 상호 대조와 연결이
가능한 표준화된 체계 안에서 비교우위를
점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물론 출발에서부터 통합
대장경이라는 똑같은 이상을 가진 까닭에
적극적으로 이 기구에 참여하여 고려대장경을
동북아 한문 대장경의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우리 연구소와 경쟁
의식을 가지고 전자 한문 대장경을 만들고
있는 외국 단체의 프로젝트는 일본 대장경텍스트
데이터베이스 연구회의 신수대장경데이터
베이스 프로젝트와 대만 불광사의 불광산
프로젝트가 있다. 사실 우리가 그렇듯이
그들도 물론 그들이 만들고 있는 전자
대장경이 한문 대장경의중심이 되길 원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경쟁은 동북아
3국 중에 어느전자 대장경이 21세기 표준
대장경이 될 것인 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우리 연구소가 전자 고려대장경의 출시를
서두르는 이유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로
볼 때 그 동안 당연히 한문 경전의 중심이
되었어야 할 고려대장경이 신수대장경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가슴 아픈 근세의 역사가
다음 세대에, 아니 영원히 계속되게 할
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이다. 활자본을
대치할 전산화 본에서조차 그 자리를 빼앗기면
고려대장경은 그야말로 박물관의 유물로
밖에는 기능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각자가 동북아 불전
전산화의 경쟁의 중심에 서있다는 긴장된
의식을 항상 유지하고 있다. 전자 고려대장경은
다양한 언어와 판본의 경전들과의 체계적인
연계를 염두에 둔 통합 대장경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체 내용의 활용도면에서
여타의 전산화 본이 아직 시도하지 않은
기능 개발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즉 10만 이상의 검색어 제공에 의한
충실한 경전 본문 검색 기능과 경전 정보
검색을 기본으로 하여 한자 자전과 불교
용어 사전. 이체자전. 고려대장경 해제,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부가적으로 첨부하여
본문의 내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학술적 보조기구장치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부가기능은 전산본 고려대장경이
일본과 중국의 전자 불전을 능가하는 한역
표준 대장경으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장치가 될 것이며, 국내적으로는 앞으로
누군가에 의해서든 개발될 전자 한글대장경에도
제공되어 누구나 쉽게 대장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충실한 참고사전이 될 것이다.
미래의 통합대장경에서 고려대장경이표준
장경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은 단순히
우리가 장경을 충실히 만드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수대장경보다 한발
앞선 전자 대장경의 완성을 디딤돌로 하여
우리는 태국 Budsir프로젝트의 팔리대장경.
태국대장경 입력팀과 미국의 ACIP의 티베트
대장경입력 팀과의 삼각 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이는 또한 Pali Text Society의
영문 팔리 경전과 연결되어 서구의 학자들이
한역 경전을 참고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고려대장경에 접근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내에서의 불전전산화 작업은
이러한 국제적인 연계와 경쟁의 장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국내 불전전산화
기구간의 사소한 경쟁의식, 불필요한 상호견제와
중복 작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두고두고
미련한 조상의표상과 원망의 대상으로
인식 될 것이다. 우리의 불전전산화가
단순히 경쟁적으로 불경을 전산화하는
일 일수는 없다. 그것은 고려대장경 불사를
이룩하여 인류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우리 선대의 앞선 문화 의식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신행상담 대기설법/장계환
스님
요즘
'한글대장경'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부처님은 정말 위대한 문학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많은 비유와 예화를 들어주신
점이 바로 그것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심오하고 난해한 가르침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고 재미있게 깨우쳐
주는 데는 비유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을
불교에서는 대기설법이라고 한다는데 맞는
말입니까(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이진수)
감격은
짧으나 감동은 길다고 하듯이 불교 공부에다
아주 재미를 붙인 모양이군요. 재미있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질문하신 대기설법(對機說法)이란 많은
비유와 예화를 들어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중생의 능력과 소질에 맞추어서
가장 알맞는 법을 설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에 따라 각기 다른
약을 주듯이(응병여약 : 應病與藥) 우리
중생들의 수준과 능력, 그리고 이해 정도와
요구가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에게 제각기
가장 적절한 가르침을 주신 것을 가리켜서
대기설법이라 합니다. 불교의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이 있게 된 것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대기설법이라
하지만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여섯
가지 방법을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상호설법(相好說法)이란
부처님의 거룩하신 모습 그 자체가 이미
훌륭한 설법으로서 중생을 감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문답법(問答法)은
청중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시는 형식으로
대승경전들 대부분이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요즘의 세미나식 방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금강경) (원각경)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무문자설(無問自說)
즉 질문이 없는데도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셋째 전의법(轉意法)은
상대의 논설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면서도
그 내용을 전환하여 보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가는 방법으로써 주로 외도(外道)들을
제도할 때 이용하셨는데 (사문과경)이
이에 속합니다. 넷째 묵언법(默言法)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또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질문의 경우에
해당하는데 가령 14무기(無記) 등을 가리킵니다.
다섯째 운문(韻文)은 기억과 암송에 편리하게
대답한 것으로써 (법구경)이나〈숫타니파타〉
등이 이에 포함되지요. 여섯째 인연담(因緣談)은
인과법을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설하신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다같이 성불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또한
진언이나 염불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받는
방법이라면, 경전은 입으로 전하여 마음으로
전달받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부처님의
팔상성도(八相成道 : 출생에서 입멸까지)는
몸으로 전하여 몸으로 알게 해주는 방법인
반면에, 마음으로 전하여 마음으로 전달받는
방법에는 염화미소(염花微笑)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이상으로 삼고있는
것은 바로 네 번째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행의
길 조사선(祖師禪)의 수행/유진 스님
일반적으로
祖師禪이라면 唐代의 傑僧 馬祖道일(708~788)이
조사선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 「平상심시도」라는
주장처럼, 수행이 필요 없는 일상생활
그대로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종교로
안이하게 간주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한 「이 마음이 곧바로 다름 아닌 부처」라고
하는 「卽心是佛」의 주장은 이러한 생각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사실 唐代의 조사선에서는 마조의
설법에서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라는 주장을 비롯하여,『보林傳』에서나
『임제록』에서도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無修無證)」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언뜻 생각하기에는
수행과 깨달음의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도 보인다. 그리고 『전등록』이나
당대의 禪語錄을 보면, 조사들은 대개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체득하기도
하고 스승과의 일상 대화(禪問答)나 일상의
作務(勞動)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얻게된 機緣을 많이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선수행의 기본이 되는 좌선의 실천은 하지
않았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사실 馬祖道一이
南嶽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좌선 수행을
하고 있을 때, 懷양禪師가 「그대가 좌선수행으로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이 되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좌선
수행을 실날하게 비판하고 있는 逸話에서
좌선 수행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특수한 경우의
事例와그 선문답에 대한 내용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여 조사선의 본질과 참된 수행
정신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필자는 조사선의 본질적인 정신과
수행 체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이에 대한
오해와 실천 수행에 착오가 없도록 제시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여 조사선의 수행체계를 논해 보고자
한다. 회향선사는 왜 좌선 수행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조의 좌선을 비판하고 있는가?
조사선에서 좌선 수행은 무의미한 것인가?
또한 마조는 왜 平常心이 道라고 하면서
「道는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어떤 마음이며, 平常心이 道라고 주장하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면 조사선의
수행체계는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平常心이
道인 그 사실과 「도」는 수행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어떻게
체득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조사선의 기본
정신과 수행체계를 唐代의 禪어록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사선의 본질을
한마디로 「日常性의 종교」 혹은 「생활
속의 종교」 「자각의 종교」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먼저 馬祖道一이 주장한 「平常心시도」라는
조사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전등록」 제28권에는
馬祖道일의 「平常心시도」에 대한 설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道를 이루는데
修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더럽히지(汚染)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汚染이 되는가?
生死의 마음을 일으키고 造作하여 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汚染이 된다. 만약 곧바로
道를 알고자 한다면 「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平常心이란 造作이 없고 是非도 없고 取捨도
없고 斷常도 없으며, 凡聖 등의 차별심,
분별심도 없는 그 마음이다. 經에 말씀하시길
「凡夫行도 아니요 賢聖行도 아닌 바로
그것이 善薩行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다만 지금의 行住坐臥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사물을 접하는 것(平常心)이 바로 道인것이다.
道는 즉 바로 法界인 것이며 恒河沙와
같은 미묘한 작용(妙用)도 이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정장』 51권 440쪽, 上)마조의
설법은 『전등록』과『어록』 등의 馬祖傳에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 유명한 일단인데,
여기서 먼저 그가 주장하는 「平常心이
바로 도 라고 하는 「平常心」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조의 설법에「平常心」이란
「수행하여 깨닫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造作된 마음이 없고, 옳고 그름을 시비하는
분별심도 없고, 좋은 것은 取하고 싫은
것은 버릴(捨)려고 하는 간택하고 선택하는
차별심도 없고 편견과 고정 관념의 마음도
없고 범부나 성인을 구별하는 차별, 분별심도
없는 本來心을 가르키고 있다. 『信心명』에서도
「지극한 道를 이루는데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取捨選擇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 (至道無난 唯嫌간택)』이라고
읊고 있는 주장과 똑같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어떠한 경계에서도 편견과 고정관념도
없고 일체의 차별 분별심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本來心을 마조는
「平常心」이라고 부르고, 이 平常心이
바로 道이며,平常心이 곧 다름 아닌 부처(卽心是佛)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선불교의
사상적인 발전을 잠깐 살펴보면 하澤神會(684~758)의
南宗禪과 『六조단경』에서는妄念이 없는
無念의 眞여自性을 頓悟하도록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自性淸淨한 眞如自性과 번뇌의
妄念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頓悟見性(自性)의
수행구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마조는
이러한 眞如自性과 妄念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平常心으로 통합하여 주장하고 이러한
平常心 이외에 달리 眞如自性이나 근원적인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경전에서 주장하는 「眞如自성」이나 「自性淸淨心」인
인간의 본래심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馬조어록』에 전하는 그의 설법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또 질문했다. 「어떠한 견해를
지어야 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마조대사가
대답했다. 「自性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善惡의 事象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修道人이라고 할 수 있다. 善을
취하고 惡을버리며,空을 觀하여 禪定에
드는 것은 바로 造作하는 행위(業)이다.
게다가 다시 밖에서 道를 구하려 한다면
道와는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속장경』
119권, 406쪽 a 단)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인간 누구라도 본래 구족하고 있는 「自性淸淨心」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本래심을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그 본래의 마음(平常心)이라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일상생활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平常心은 무한히도 충실하고
완전한 것이며, 더군다나 본래심이기 때문에
또다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의
평범하고 소박한 그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平常心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道이며, 근원적인
本來淸淨心인 平常心이 다름 아닌 부처(卽心是佛)라고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의
세계 관중샘품과 불도품/강혜원 스님
제7관
중생품
(관중생품)은
중생의 존재에 대해 설한 것이다. 여기서의
중생은 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부사의해탈품)에서는 일체가 공이라는
진리에 대해 설했지만 이번에는 일체가공이라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 설하는
것이다. 유마는 인간의 존재를 공이라고
본다. 곧존재에 대한 유무와 생멸이 시간을
두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불이의 세계를 설하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의 존재를 공으로 보아야 한다는
유마의 말을 듣고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만약 보살이
그와 같이 중생을 보아야 한다면 왜 자비가
필요합니까?" 이에 유마는 인간 존재가
공(無常 ·無)임을 직시하는 것이
진실한 자비를 일으키는 근본이라
설하고 서른 가지의 '자비'에 대해 설한다.
고요한 사랑, 뜨겁지 않은 사랑, 한결같이
여실한 사랑‥‥등을 밝히고 보살의 자비심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설한다. 또한 유마는
생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여래의
공덕력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여래의
공덕력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 해탈케 해야 한다고 설한다. 문수보살이
그 방법에 대해 묻자, 유마는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正念을 해야 하며 정념은 악법이 생겨나지
안하고 선법은 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과 악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일까?
유마는 몸에서 일어난다고 하여 몸은 탐욕을
근본으로 삼고 탐욕은 허망 분별에 의해
일어나며 그것은 無住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문수가 무주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를 물었을 때, "무주는 즉
無本이오. 무주의 당체에서 일체 법이
성립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선사들은
일체의 존재는 무주이자 무상이며 공임을
禪修로 삼았다. 행주좌와가 모두 선이라는
것도 역시 이를 반영한 말이다. 또한 하늘의
꽃이 사리불의 가사에 붙어 떨어지지 않음에
사리불이 굳이 떼어내라고 함을 보고 천녀는
대승의 보살은 일체의 분별상이 없기 때문에
꽃잎이 신체에 달라붙지 않는다고 하고
두려움을 품는 인간에게는 악마(비人)가
따른다고 비유를 든다. 이는 무주의 실천행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녀의 이러한
설법에 사리불은 "그대는 이 방에
있기를 얼마나 되었소?"라고 물었을
때, 천녀는" 당신은 해탈하시고 나서
얼마나 오래 되셨습니까?"라고 되묻는다.
이러한 대화는 해탈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이다. 사리불은 음욕 ·노여움
·어리석음을 여인 것이 해탈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천녀는 "부처님은
증상만을 위해 그렇게 설하셨지만 증상만이
없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대로 해탈이라고
설하였습니다. " 증상만이란 참된
깨달음을 얻지 많았는데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만하는 자를 말하는데, 부처님은 이
같은 사람에게는 삼독심을 여의어야 해탈을
얻는다고 설하시고 참된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는 삼독 그대로가 해탈이라고 설하였다.
제8
불도품
불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의
논의가 전개되는 것이 이 품의 내용이다.
불도의 행이란 非道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보통 불도라고 하면 깨끗한
장소에서 청정한 행을 하고 조용히 좌선하거나
염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마는
보살의 비도를 행하면 불도에 통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도는 죄의 과보로 일어나는
미혹한 세계의 일이다. 미혹한 세계에
가면 불도를 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여
세상이 혼탁하고 악이 가득한 가운데서
비로소 불도를 안다는 것이다. 문수사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비도를 행한다는
것입니까?" 유마는 "만약 보살이
오무간지옥에 간다고 해도 고뇌와 노여움이
없고 지옥에 가도 죄나 더러움이 없고
축생도에 가도 무명과 교만 등의 잘못이
없고 어디에 가도 온갖 공덕을 구족하며
자신이 흘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한다. 계속해서 유마는 우치한 사람들속에
들어가도 지혜의 빛으로 우치를 억누르고
간탐이 많은 자들이 있는 곳에 있어도
모든 것을 버려 신명조차 아끼는 일이
없고 파계를 한 것처럼 보여도 淨戒에
안주하고 게으른 사람들 속에 있어도 공덕을
닦는다고 한다. 이처럼 어떠한 비도에
든다해도 결코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 보살도라고
하고 이를 불도에 통달한 것이라고 설한다.
유마는 문수에게 "무엇을 여래의
종자라고 하오?"라고 묻고 "62가지
견해나 일체번뇌가 다부처의 종자"가
된다고 하였다. 즉 모든 번뇌가 여래가
될 수 있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때
보현색신이라는 보살이 유마에게 부모
처자 권속 노비 등은 누구이고 하인 말
코끼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을때, 유마는
부모처 제자들은 도피안이며 방편이며
법열의 환희이며 자비심이며 성실하고
착한 마음이며 번뇌라고 했다. 또한 육도의
법은 친구이며 사섭법은 기녀이며 독송과
설법을 혼합하여 이것으로 음악을 삼는다고
했다. 다라니는 법의동산으로 깨달음의
묘한 꽃이 만발하고 해탈의 지혜가 열매로
맺혔고 연못에는 선정처럼고요한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극락의
모습이라고 한다. 유마는 이와 같이 일상생활의
모든 일이 전부 대승의 불법의 생활이
됨을 노래한다. 유마는 중생에게 노·병·사를
가르치고 또한 천지가 통연하여 공임을
가르치고 무상을 알게 한다. 인과법칙에
의해 사람은 반드시 늙어가고 자신도 모르게
병이 들어 고통스럽고 또한 언젠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 보살은 무한한 중생을
감화시키고 불도로 향하게 하려는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일체의 기예 예술 마술 등의 기량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능력으로 모든 중생을 요익하게
함을 가르친다. 불길속에 연꽃이 핀다는
것은 회유한 일이지만 유마는 그것을 행한다.
오욕가운데서도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오탁가운데서도
청정히 살 수 있다는 것은 회유한 일이지만
유마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마는
자유자재로 몸을 나주어 중생을 구하는
것을 설한다. 호색가를 끌어들이기 위해
음녀가 되기도 하고 남자를 끌어 들인
다음불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슬픈 업을 젊어지고 아득한 먼길에서 떠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 유마가 인간의 깊은
참된 모습을 이렇게 梵音으로 노래한 것이다.
불교문학 인도의
설화와 본생담/정승석
본생담이란
주로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로서
선행의 과보를 주제로 취급한다. 50O편이
넘는 이야기들이 불전에서는 자타카로
분류되어 전해졌고, 중국에서는 이것들
중의 일부가 생경(生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자타카는 불전의 서술 양식으로서
9분교 또는 12분교의 하나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타카 즉 본생담은 특수한 이야기
형식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불교문학의
일면을 대변한다. 본생담은 부처님이 전생에서
보살이나 대사(大士). 또는 동물이나 귀신
등과 같이 다양한 생명체의 모습으로 있을
때, 어떠한 선행(善行)을 하고 공덕을
받았기에 현생에서 부처님으로 태어날
수 있었는가를 설화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내용의 구성은 대체로 현재세의 일화,
과거세의 일화, 현세와 전세의 연결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즉 현재세의
일화에서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과거세로 돌린다.
과거세의 일화에서는 현재세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또 다른 이야기를 알려 준다. 연결에서는
두 일화가 서로 인과 관계로 맞물려 있음을
알려 주고, 현재세의 인물이나 사건이
과거세의 그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런데 이 같은 구성에서 전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과거세의 일화는 대부분 불교에서
창작한 것이 아니라, 인도의 민간에서
유행하던 설화, 우화, 야담 등을 그대로
채택하면서 결말의 역전을 고려하여 약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연결 부분에서
과거세의 주역과 현재세의 주역을 인과
관계로 연결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불교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대표적인
예가 되는 이야기를 인도의 유명한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간추려서 소개한다. 마하바라타에서의
원형 오랫동안 숲속에서 고행에 전념하고있던
한 선인(仙人)이 어느 날 개울에서 목욕하고
있을 때, 천녀 우루바시를 보고 욕정을
일으켜 정액을 물 속에 떨어뜨렸다. 그런데
사슴 한 마리가 그것을 물과 함께 마시고
남자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에게는 사슴의
뿔이 돋아나 있었으므로. '리샤 슈링가'
(사슴뿔을 지닌 자)로 불렸다. 그리고
그는 부친 외에는 인간을 본 적이 없는
채 성장했다. 그때 로마파타라는 왕이
앙가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왕은 바라문들의 노여움을 사 그들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궁정의 제관들도 떠나가
버렸고, 제석천(인드라)은 비를 내려 주지
않은 탓으로 백성은 고통을 당했다. 그래서
왕은 고행을 쌓은 현명한 바라문들에게
어떻게 하면 비가 오게 할 수 있느냐고
그 방법을 물었다. 어느 현자가 대답하기를.
여자를 모르는 '리샤 슈링가'라는 은둔자가
이 왕국에 오면 이내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은둔자가 오게 할
방도를 대신들과 궁리한 끝에, 왕은 최고의
기녀들을 모아 놓고 은둔자를 유혹하여
왕국으로 데려오도록 명했다. 여자들은
실패하면 왕의 노여움 살 것이고, 또 고행자에게
저주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일을 맡지
않았다. 이때 어느 노파가 나섰다. 그녀는
배 위에 아름다운 암자를 짓고 강을 타고
은둔자의 암자 부근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나간 틈을 타서 재치가
넘치는 자기 딸을 리샤슈링가의 곁으로
보냈다. 리샤 슈링가는 그녀를 남자 고행자로
알고 접대하였다. 이러저러한 말을 주고받고,
그는 과일 등을 꺼내 주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그에게 고급음식,
아름다운 화환. 화려한 옷이나 최상을
술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공을
가지고 놀면서 때로는 자기의 몸으로 그에게
기대고 수차 그에게 안기기도 하였다.
결국 그녀는 은둔자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고
나서, 바쁘다는 핑계로 떠나가 버렸다.
리샤 슈링가는 그녀가 떠나가 버리자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와, 아들이
한숨을 지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사연을 물은 즉, 아들은 처음 보는
아름다운 사람이 왔다고 고하면서, 자기가
겪은 대로 사실을 밝혔다. 아버지는 "그것은
나찰귀이다. 고행자는 그러한 것에 홀려서는
안 된다. "라고 아들을 훈계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시 나간 틈에 그녀는
또 리샤 슈링가를 유혹하려 왔다. 그는
그녀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 빨리 네 암자로 가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기녀들은 그를 배에 태워
국왕에게 데려갔다. 그러자 이내 큰비가
내렸다. 왕은 자기 딸을 그에게 주었다.
아버지는 암자로 돌아와서 아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국왕과 그 영토를
태워 버리고자 도시로 나갔으나, 왕은
잘 준비하여 여러 가지 선물을 그에게
주고 극진히 환대했으므로 그의 노여움도
누그러졌다. 그래서 도시로 들어간 선인은
아들이 왕녀와 결혼했음을 알고서 노여움을
완전히 풀었다. 아들에게는 아들이 태어나거든
숲으로 돌아오라고 명했고, 그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들이 태어난 후에는 다시
음으로 돌아갔다. 관습에 따라 그의 처도
그를 따라갔다. 본생담에서의 각색 이상과
같은 이야기가 본생담에서는 두 가지로
각색되어 있다. 먼저 [아란부사 자타카]에서
이 이야기는 헤어진 처를 잊지 못해 출가에
싫증을 내고 있는 비구에게 부처님이 "전생에도
그녀 때문에 미혹에 빠진 적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옛날
베나레스에 브라마닷타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보살은 카시국의 바라문 집에서
태어나, 선인이 된 후에는 숲속에 살고
있었다. 어느 때, 한 마리의 사슴이 이따금
그의 정액을 마시고 이로 인해 임신해
버렸다. 이윽고 사슴은 남자를 낳았는데.
선인은 그에게 이시 싱가' (사슴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은둔자로 살게 했다. 그후
아버지는 부디 여색에 빠지지 말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이시 싱가는 열심히 고행했는데,
제석천은 자기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아란부사라는 이름의 천녀를
파견하여 그를 유혹해 고행을 중지시키고자
했다. 이시 싱가는 가까이 오는 천녀를
보고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으나 그녀는
능수 능란한 동작으로 되돌아가는 척했으므로,
그는 흥분하여 그녀를 들아가 그 머리를
잡아 당겨 멈추게 했다. 이로부터 3년
동안 두 사람은 쾌락을 최대한으로 누렸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이시 싱가는 미혹으로부터
깨어나 누구의 부탁으로 자기를 유혹했느냐고
천녀에게 물었다. 천녀는 사실대로 말했고,
이시 싱가는 부친의 유언을 지키지 않아
이렇게 파멸해 버렸다고 후회하고 애욕을
버리고 선정에 들었다. 천녀는 그의 위광을
두려워하고 후회하면서 그의 발 아래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그의 용서를 받아
천계로 돌아갔다. 제석천은 그녀의 공을
치하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천녀는 대답했다. '제석천이여.
원컨대 선인을 유혹하는 일이거든 두 번
다시는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위의
이야기는 수행자에게 유혹을 경계하는
평범한 교훈을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덧붙임으로써 이 이야기는
인과 관계의 불가피성을 각성시키는 불교적
교훈이 된다. "그때의 천녀는 출가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한 남자의 아내이고, '사슴뿐'은
그 남자이며, 수행자인 아버지가 바로
나였다고 부처님은 말했다. "자타카의
문학적 기교는 위와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발휘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선행과
수행을 권장하고 독려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고차원의
지적인 구상으로 작품을 창작하기보다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통속적인 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불교
문학은 불교적 가치관의 대중화에 기여해왔다.
같은 이야기가 (나리니카 자타카)에서는
농도 짙은 외설적인 묘사로 각색되어 있다.
그 외설성의 의도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문학적 묘사의 섬세함은 인정할 만하다.
본생담의 문학적 기교는 나중에 부처님의
전기(傳記)를 작성하는 데서 더욱 크게
발휘 되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최규철 부총장님/편집부
문
: 지난 6월 1일 취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늦었지만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부총장에
취임하시기 전과 취임하신 후 지금까지
달라진 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답 :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교직생활을 하면서 보직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모두가 부분적인 영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보직이라도 책임감과 의무감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겠습니다만 지금의
이 자리는 이때까지 내가 맡았던 보직
중 가장 광범위하고 무거운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껴야 하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서울캠퍼스가
9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경주캠퍼스가
2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변해야 될 제반 문제가 조금 있었는데.
가장 획기적으로 바뀐 것이 이번 7월 1일부로
단행된 행정구조개혁입니다. 예를
들면 기획홍보과가 기획인사처로 바뀌어
아래 기획예산팀, 인사팀, 대외협력팀
등 3개의 팀을 확장·보완하였습니다.
이는 급변하는 경쟁 사회의 환경 속에서
경쟁력을 갖추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팀제행정제도를 도입하였는데
, 구조는 처장과 팀장 그리고 팀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팀제 행정제도의
도입은 수직적 행정구조에서 수평적 행정구조로의
전환이며, 업무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교육환경의
개선과 2000년대에 다가올 인적 고갈상태에
대응해서 학교의 발전과 구성원들과의
친목 강화, 그리고 지역주민과의 유대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문
: 부총장 님께서는 어떠한 인연으로 불교를
접하게 되셨습니까? 답 : 내 고향이 전북
고창입니다. 고창에 유명한 고찰이 있습니다.
선운사죠. 나에겐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찰입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선운사에
다녔습니다. 집안 내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절을 찾은 때는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이 됩니다. 그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어재라는 고개를 넘어 선운사에
다니곤 했습니다. 매년 섣달 그믐날에는
아버지를 따라 선운사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예불을 드리고 했었습니다. 그 때는
불교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단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니곤 했으니까요. 선운사에
아버지. 큰형님께서 불사를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현판에 아버지, 큰형님
등 가족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제 이름은
없습니다. 아마도 어려서 이름을 넣지
않았나 봅니다. 대학을 지망할 때도 유난히
동국대에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불교 종립
대학이고. 활동력과 젊음이 넘치는 곳이
동국대라는 인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 매월 첫 월요일마다
백성욱 박사님의 특강이 있었는데 매 번
청강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선운사에
다였던 그 기억들이 가슴에 남아 지금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 :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답 : 서울에 있었을 때는 집사람과 뚝섬
봉은사에 다녔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시간이 나면 가끔씩 다녔습니다. 4월초파일엔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경주에
있으니까 주로 정각원에서 법회가 있을
때 참석하고. 시간이 나면 불국사나 기림사
등등 경주 지역의 사찰을 찾아 참배를
하곤 합니다.
문
: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회복해야 할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인간은 삶의 목적을
시장성과 경제성에만 두고 살수는 없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은 동물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지만 인간은 환경변화에
후천적으로 터득하여 인격적 인간을 형성하게
됩니다. 인간성의 상실이 두드러지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 불교의
근본정신이 필요합니다. 그 근본정신이
바로 자비의 정신입니다. 불교의 이러한
자비정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런 시대일수록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자비 정신이 있으면
적과도 동침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니까?
답
: 나는 가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삶의
철학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화 속 이야기인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비유해서이야기를 합니다.
한자어로는 '묘龜之競走'라고 하죠. "토끼는
빨리 뛰지만 자신의 능력만 믿고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느리지만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은 거북이가 토끼를 이깁니다.
" 나는 빨리 뛰는 토끼같이 산 것이
아니라 늘 거북이처럼 늘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살아왔다고 얘기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 속 부끄러운 얘기는 남에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떳떳한 얘기는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고, 감추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미루어 본 적도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 왔다는 말입니다. 문 : 한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는데, 부총장님께서도 분명 그런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답 : 나는 시련과 고난이 다가올 때 그것을
회피하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그것을 극복해나갔지요. 누구에게나
인생살이에서 몇 번의 고난을 겪게 되는데
피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그것과 부딪히면서
이겨나가세요. 문 : 마지막으로 2000년대의
주역이 될 학생들에게 스승으로서 그리고
기성세대로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마디 해 주십시오.답 :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학생들이
스스로가 사회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단지 욕망만 가지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현대의 사회에서 뒤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깨끗한
작업복을 입고 흙탕물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옷이 흙탕물에 젖게 되고, 깨끗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옷은 더렵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환경이 중요한
것이고, 또한 자기 자신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환경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자기 자신의 노력이 조화를 이를
때 사회에 적응할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입니다. 둘째, 장인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왜
이럴까' 라고 자기 탓을 하는 이는 못난
사람입니다.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으로서는
성숙되지 못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 환경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육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교육자가 앞에서 끌어
주고. 또한 기성 세대의 노력으로 학생들이
능력을 배양하도록 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 기준이
사회에 휩쓸려 가는 이 시대에 장인 정신으로
경제성 ·상업성이 없어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학생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가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입니다. 감사합니다.
일주문 통치정론/편집부
도(道)는
그 자체로는 비교의 대상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자연(自然)을 비교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자연이 갖는 순리(順理)와 참다움이 도의
본질과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통한 사람을 자연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이것은
인간이 영묘(靈妙)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연의 이치를 무시하고
자만(自慢)에 빠져, 자연을 자신의 뜻에
맞추기를 고집한다면, 이것은 이미 영장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끝없이 인위적인
행위를 가하고 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창조라는 명목아래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인위는 또 다른 인위를
낳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본질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자연이
그러하듯이 평화롭고 조화로움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인 극락이나 천당이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 (一切衆生)은
모두 부처의 성품(性品)이 있다. "
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자연의 보편성과 평등
성을 의미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어(成佛), 중생들의 심성(心性)을 살펴보니.
모두가 여래(如來)의 청정각성(淸淨覺性)을
본래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고통받는 이유가 무시이래 (無始以來)로
'객진(客塵)에 물들어 그릇된 업(業)을
짓고, 그 업으로 괴로운 과보(果報)를
받게 됨을 아시고 중생 곁으로 나아가
중생과 고통을 같이 하면서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통분담이란
바로 이러한 부처님과 같이 중생의 괴로움을
더불어 하여 고통은 덜어주고 즐거움은
함께 하여 그 기쁨이 더해지는 새로운
미래상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고통분담을 하시기
위해서 눈과 귀를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
중생들의 다양한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들어서
때와 상황에 맞게 적절한 방편의 대응책(對機說法)을
제시하여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셨다.
이것은 통치자가 국정(國政)을 봄에 교훈이
되는 바, 부처님께서 『금강명경(金剛明經)』「정론품(正論品)」에
통치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역존상왕(力尊상王)이
왕자 신상(信相)에게 양위를 하면서 전한
말을 예로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올바른 언론이 있어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한다. 내가 옛날 태자(太子)로 있을 적에
오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아버지께서 이 올바른
언론(言論)으로써 나를 위하여 말씀하셨고,
나는 이 언론으로 만 2년 동안 그 나라를
잘 다스렸다. 일찍이 한 생각도 법(法)답지
아니한 생각을 한 적이 없으며, 나의 권속에게도
애착하는 정이 없었다"이와 같이
국가의 통치자나 각 단체의 장(長)들은
언제나 올바른 언론을 중시하여 그 구성원들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 업보중생(業報衆生)을
잘 인도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깨우쳐 즐겁게
살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인 것처럼.
통치자는 국민의 고통을 잘 헤아려 올바른
생각으로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어 즐거운
삶을 영위케 하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이다.
"착한 일 가르쳐 닦도록 하며, 또한
이름이 부모라고도 과보를 분명하게 보이어주니
모든 하늘이 보호하네. 선과 악의 모든
업이 지금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과보를
받게 됨에 모든 하늘이 보호해 주네. 나쁜
일 하더라도 모른 체 하고 죄도 주지 않고
바르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선법(善法)은
멀리 떠나가고 나쁜 갈래만 늘어 가리.
나라
안에서 간사한 일 싸우는 일 많게 되면
삼십 삼천들은 각각 미워하는 생각 내네.
그 나라 임금들이 나쁜 짓을 죄주지
아니하면 나라의 바른 법은 파괴되고 간사와
속임이 성행하리 라. 바른 법으로 세상을
다스려서 이런 짓 하지 말라. 만일 이런
나쁜 일만 행하면, 그 나라는 아주 망해버리리.
임금에게 곱게 뵈여 후한 국녹(國祿)받는
높은 자리 대신들과 관료들은 나쁜 일만
자행하네. 모든 간사와 나쁜 짓 일으켜
나라를 파괴한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법대로 그 죄를 다스려라.
그렇게 하면. 모든 하늘 왕은 이 임금을
옹호하며 나쁜 법은 없애 주고 착한 일
닦게 하리. 이 세상에서 잘 다스리면,
임금 지위 높아지고 선업(善業), 악업(惡業)을
잘 일러주어 인과법칙 보여주면 임금자리
얻으리라."
불심의
창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이름, 어머니!/류인수
인연이
된 모든 것들에는 반드시 연유된 그 무엇이
있기 마련인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까닭을 알게 되고 아쉬워하며 가슴 저리도록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입추가 지난
계절인데도 늦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고,
오늘 새벽에는 장대비가 시원스레 더위에
지친 모든 이들의 가슴을 적시고 지나치고있습니다.
이 비로 더위가 한풀 꺽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난 2월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의 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10여
년의 병고 속에서 말씀조차 잃어버린 채
그 답답했던 세월을 뒤로 한 채 돌아서
가셨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대로 '의지처'요
미음의 고향으로 항시 포근한 그 무엇으로
생각될 겁니다. 저에게도 다를 리 없으며
머리 속을 맴도는 하나하나의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노라마 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아주 어려서
걸음걸이도 서툴렀던 때 인 것 같습니다.
마을 뒷산에 어머니깨서 다니시는 절이
있었습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절의
이곳저곳은 개구쟁이였던 나에게 아주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던 곳입니다. 머리에는
보따리를 이고 넘어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는
저의 손을 잡고 좁은 산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절에 갈 때는 형과 누나도 함께 데리고
가셨지만 유달리 저를 더 많이 데리고
갔던 것 같습니다. 나만 더 예뻐하여 내
손만 잡아 주고 형이나 누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여 언제나 어머니 곁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는 어린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가졌던 나의 생각은 늦둥이로 태어나
허약하기 그지없는 막내 자식에 대한 엄마로서의
책임과 안쓰러움이 늘 그분에게 상념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서의
일입니다. 우리 가족은 고향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하게되었습니다. 음력으로
초하루나 보름이 되었지만 시골에 살던
때와 같이 어머니는 절에 가질 못하였습니다.
지금 같았더라면 3000알 염주라도 구해드렸을
텐데, 그때는 그 분의 간절했던 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름철로 기억이 됩니다.
한동안 건강이 좋지 못했던 형님께서 성당엘
다녀야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잠시 동안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자식을
위하고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내 것(불교)을
포기하는 것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는
조석에 염불하시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가정에는 믿음이 하나여야 된다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모교인 우리 대학에 다니면서 불교학생회에
가입하였고, 공부한다고 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가끔 어머니께서 보시던
천수경을 조그마한 소리로 읽고 있으면
저의 곁에 웃음으로 같이하여주시곤 하셨습니다.
자식이지만 각각 제 갈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던 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집안에
종교적인 문제로 형제간의 우애에 금이
간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형은
나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어 아버지
같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이 되면서
어머니 근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위독하시다" 는 소식에 새벽을
달려 올라갔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 머지않아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시간이
이제는 거의 다 되었다는 느낌이 복받치는
설움으로 후회로 한없이 되돌아 왔습니다.
정말 그 때처럼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사실 없었습니다. 그 분의 본래대로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편안한 곳으로, 아무런
고통도 없이, 혹시나 이 못난 자식 때문에
아직도 안쓰러움이 남아있다면 아니 되겠기에
정말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찾았고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내
손을 잡고있는 어머니 손에 이렇게 나마
힘이 있기를‥‥그 후로 약 한 달이 지난
2월 8일 어머니는 운명하셨습니다. 고속도로
상행선 대전을 지나고 있던 나의 가족에게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병원까지 어떻게 운전하여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니 가까운 친척들은 이미 와 계셨습니다.
영전에 놓인 사진이며, 그 옆을 지키고
있던 형님, 누님을 보게 되었을 때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나에게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형님이 성당에
다니셨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장례 의식을
천주교 식으로 하리라 짐작하였습니다
만은 형님은 어머니 장례식을 불교 의식으로
해야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지레짐작하여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안았는데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청화
큰스님이 계시는 성륜사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주지스님께 나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또한
그러그러한 인연들까지 모조리 나열하여
가며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경기도 가평에
있는 반야사의 혜산 스님을 소개하여 주셨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저를 가련히 여기셨던지
밤길 늦은 시간인데도 영안실에 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모시고 49재를 스님 집전으로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경주에서 서울을
거쳐 반야사로 매주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입재부터 막재 까지 모두 일요일이었기
가능하였습니다. 마지막 운명도 지키지
못한 막내 자식이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돌아가시면서 까지 날짜를 택하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 49일 동안 새벽으로
기도하며 오로지 일념으로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병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온갖 즐거움이 가득한 일곱 겹의
난간과 보배로 짠 그물과 줄로 이어선
나무들. 모두 네 가지 보배로 장식된 세계!
푸른색은 푸른빛으로 붉은 색은 붉은 빛으로
있는 그대로 빛을 내는 세상! 밤낮으로
여섯 때 꽃비가 내리는 무량한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염원하였습니다. 지난
며칠 전에 고인이 되신 어머니 78회 생신이
되었고 이미 늦은 후이지만 그래도 자식된
도리를 하겠다고 반야사 법당에 생신 상을
차렸습니다. 형님께서도 본래대로 부처님께
귀의하셨고, 아버지를 비롯하여 어린 조카들까지
모두 지극한 신심을 일으켜 함께 하였습니다.
반야사 대웅전에서 밤 세워 기도하며 수행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네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주고 가신
어머니의 마음을 물아 본래로 돌아가야
된다는 원을 세워 청화 큰스님께 불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남은 인연과 부처님께
귀의할 수 있도록 맺어주신 어머니 !이제는
소리내어 부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 부르는 노래가 되고 있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일을 글로 쓸 수 있도록
지면을 내어주신 정각원 원장스님께 감사
드립니다. 향을 피워 부처님 전에 올리며
머리 조아려 예배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서방정토
극락세계 대자대비 아미타불!
열린마당 번뇌를
넘어서 지혜로 가는 길/손만동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캠퍼스 생활
2년째. 나는 그다지 조급한 성격이 아니라고
자부한다. 사실 낙천적이라 할 만큼 느긋한
점도 없지 않다. 그렇긴 해도,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든지 거칠 수밖에 없는
고민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
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들이 내가 어절
수없이 겪게 되는 '번뇌'였다는 것을 우연히
한 책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바로
정승석 교수님의 『인간을 생각하는 다섯
가지주제』라는 책이었다. 번뇌, 알고
나서 극복하는 법을 일깨워 주는 책 한
권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민들이 '번뇌'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 책은 그러한 번뇌를 비롯하여 우리가
흔히 그냥 듣고 지나칠 수 있는 불교 용어들을
많은 예시문으로 그리고 평이한 문장으로
알기 쉽게 집필해 놓은 글로 채워져 있었다.
불법을 교시의 하나로 삼고 있는 동국대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오며 가며 듣게 되는 반야심경
낭독이 범패 소리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비롯하여, 친구들간에 하는 농담에서도
불교 용어를 구사할 만큼 익숙해진 것도
없지 않지만, 불교라 하면 어렵고 난해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사랑, 번뇌, 업, 고통, 마음
등의 다섯 가지를 큰 주제로 삼아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번뇌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인간의 번뇌가 그렇게나
많은지, 읽어 가면서 하나 하나에 공감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를 비롯한
누구나 겪었을 법한, 그리고 피할 수 없이
겪을 것 같은 번민과 고민들‥‥‥ 그
모두 다 번뇌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 번뇌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이 번뇌라는
데에 놀라기도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괴로워하며 결코 벗어나기 힘든
번뇌를 불교에서는 일찍이 그토록 투철하게
분석해 놓았다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라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백팔 번뇌'이고,
스님들의 백팔개 염주가 떠오른다. 하지만
염주알이백팔 개가 안 되는 것도 언뜻
눈에 띄는데, 항상 그 까닭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그 의문이 풀렸다.
염주알 수와는 상관없이, 백팔 개와 반드시
상관하지 않고도, 번뇌를 제거하려는 명상이
염주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낱알의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백팔이라는 숫자 자체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단몇 개의
낱알로 된 염주일지라도 거기에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면 백팔 개와 다름없
다.
그리고 사실, 염주는 둥근 원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숫자란 헤아리기 나름이다.
이 책에서 번뇌의 정의는 '끊임없이 발동하는
속마음'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모든
것은 타오르고 있다. 탐욕의 불로, 혐오의
불로, 무지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 탄생,
노쇠, 죽음, 한탄, 슬픔, 고통, 번민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 고 표현한다. 다
별로 좋을 것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 이 다. 그리고 그러한 구체적인 내용
하나 하나를 이 책은 아주 세밀하고 유쾌하게
말해준다. 번뇌의 분류도 복잡하고 분량도
적지 않아서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같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이다.
글을 읽다가 신기한 번뇌 중의 하나가
계절과 관련된 번뇌였다. 봄기운을 예로든
번뇌가 흥미롭다. '도거' (掉擧)라는 어려운
한자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 뜻은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번뇌를 말한다. 그 예가
참 재미있다. 봄이라는 계절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우리 마음을 동요시키며 뭔가를
탐하게 한다. 나 같은 젊은이라면 당연히
연인을 찾고자 하는 들뜬 기분에 빠지기
마련일 것이다. 부쩍 친구들이 소개팅이다.
미팅이다 하면서 바뿐 이유가 이렇게 계절에
동요되어, 바로 도거라는 번뇌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도거는 마음이 흥분된 상태를 말한다.
요즘에는 못생긴 사람은 봐 줘도, 말발
약한 사람은 못 봐 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 잘하는 사람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여자에게 인기 있는 남성들 순위에도 재미
있는 사람, 즉 재미 있게 말 잘하는 사람이
꼭 순위에 오르는 것을 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발언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을 미처 다듬지도
않고 가벼운 언설에 재치를 발라 토로하기
마련이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정해지고, 그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더욱 더 거친 말을 총알처럼 발사하게
된다. 결국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는
사실. 텔레비전이나 버스 속에서 듣게
되는 말들은 얼마나 거친가? 또 여학생들의
말투도 남학생들 못지 않다. 말속에는
자신의 심성이 그대로 담겨진다. 각자의
번뇌가 반영된 것이 바로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도 없이 이어지는 번뇌의 목록들은
나 자신을 투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조명이
되었다. 시험을 치고 난 다음에 꼭하게
되는 후회. 그런 후회가 다음 번에 대한
막연한 결심으로 보일지언정 후회도 번뇌다.
하지만 갖가지 마음 속의 고민과 고통들이
번뇌라는 이름으로 분석을 거치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조금은 터득한 것
같다. 이제 내 고민들이 번뇌인 줄 알게
된 만큼, 그러한 번뇌를 넘어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바뀌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부처님의
눈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제 남은
캠퍼스 생활 동안에도 번뇌를 단속하기
위한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해 본다.
가람의
진수 장곡사(2)/유문용
하대웅전
앞에 오른편에는 설선당이 있는데 하대웅전의
중창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고 보여진다.
요사건물 치고는 아주 고격(古格)으로
지어진 집이다. 지금은 이 설선당 뒤에ㄱ자로
덧달아서 요사로 쓰고 있지만 원래는 덧달아낸
칸을 제외한 전면에 보이는 집만을 설선당이라고
한다. 강설을 하던 강원으로 사용되던
집 이 다. 원래에 설선당은 전면이 4칸이고
측면이 3칸이었는데 나중에 왼편에 부엌을
확장하면서 뒤로 덧달아서 지었던 것이다.
이 집은 스님이 거처하시는 집이어서 요사(寮舍)로
봐야하는데 기둥뒤에 포작을 올렸다는
것이 색다른 점이다. 이 포작에 모양을
보면 포가 많이 올라가는 다포작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는 기둥 위에만
있어서 꼭 주심포 같이되어 있는 것도
특이한 예라고 볼 수가 있다. 집의 뒷쪽에는
포작을 하지 않고 아주 간결한 도리집으로만
한 것이 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법을 보고 "뒤생략법"이라고
한다. 앞에는 법당 앞이어서 격식을 갖추었고
뒤에는 스님들이 살고 계시는 요사채의
됫마당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쓴 판
다.
이 건너편에 있는 봉향각은 매우 작은
집이지만 꽤 잘 지어진 집이다. 이 집은
1969년에 지어진 집이지만 오히려 집에
양식은 굉장히 고격(古格)있게 고증을
해서 지은 집이다. 전면에서 보면 좁은
3칸에 작은 집같이 보이지만 앞면과 측면이
거의 같은 정방형 집이 되어서 그렇게
적어 보이지도 않고 맞배집으로 해서 그렇게
왜소해 보이지도 않는 집이다. 천상(天上)에
설법장인 상대웅전(上大雄殿)의 권역은
남동향을 하고있다. 이 권역이 처음에
적은 규모로 세워질때 원래에 자리인 것
같다. 좁은 계규를 따라서 올라가다가
보면 바로 상대웅전으로 오르게 된다.
오른편으로 바로 붙어서 응진전이 있고
바로 뒤에 산신각이 있다. 이 상대웅전이
장곡사에서 제일 큰집이고 제일 오래된
집이다. 이 상대웅전은 보물 16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집에는 고려 시대에 건축
부재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있던 건물이 완전히 소실이 된 것이 아니라
거의 폐허에 상태에 있던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 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상대웅전은 1960년도에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된 현판 기록문에1777년 조선조
정조 1년에 제건 되었다 한다. 우선 이
집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3칸에 집인데
이게 큰집을 3칸으로 지은 것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고 특히 3칸 중에서 가운데 칸이
좁게 보이고 양옆에 칸이 넓어 보이는
것이 특징으로 보아야할 것 이 다. 이
집에 기둥이 가운데 부분이 배가 부른
배흘림 기둥으로 되어있는데 고려시대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지는
건축양식으로 하대웅전에서도 보았던 고식(古式)의
양식이다. 그리고 기둥 위에 있는 주두(柱頭)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주두와는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주두밑부분데 경사지게 깎은
굽이 보통은 직선으로 경사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주두는 안으로 곡선(曲線)으로
휘어지게 조각을 하였다. 이를 "굽주두"라고
하는데 이런 주두 굽주두는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서 볼 수가 있고 조선 시대의
건축물에서는 볼 수가 없다. 특히 이 집에서
주목되는 것이 단청인데 1777년에 재건된
당시의 단청문양을 무형문화재 단청장(丹靑匠)으로
등록된 분이 원형대로 모사(模寫)를 해서
옛모습대로 단청을 하였다. 최근에는 단청을
할 때에 원형을 살려 단청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가 않다. 다행하게도 이 상대웅전은
옛 단청 기법이 살아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에 단청도 그렇고
상대(上代)로 올라가면서 단청에 색상이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에
색상을 썼고, 문양도 간결하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에 꾸밈도 요란하지
않게 하고 단청도 그렇게 화려하게 하지
않아서 집이 아주 간결하면서도 단아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법당 안에 부처님이
3분이 계시고 바닥에는 모두 전들을 깔아
놓았다. 법당안에 천정에 반자도 하지
않고서 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이런 것은 상대(上代)건축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양상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과
같은 상대 건축물에서도 바닥에 전돌이
깔려 있고 천정에는 반자를 하지 않고
연등천정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웅전에
깔려있는 전돌중에는 고려 시대것으로
보이는 전돌이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연화문(蓮華文)전돌과 흡사한 전돌이다.
신라 시대나 백제시대 고구려 시대 전돌들은
유물로나마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이런
고려 시대에 조각된 전돌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대웅전 안에 있는 세분의 부처님들은 중앙에
비로자나 부처님이 계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 부처님이 양 옆에 계시니까 과거불,
철재불, 미래불의 삼세불이 계시다고 보아야
한다. 이 법당에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존으로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 부처님에
삼세볼(三世佛)을 모딘 때는 법당 이름이
적광전(寂光殿)이라야 맞을 것 같은데
대웅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보았던 하대웅전에서도
약사 부처님이 봉안되고 대웅전이라 하였다.
여기 장곡사는 철저한 화엄사상에서 조성되었다고
본다면 화엄경에 나오는 칠처구회에 설법장을
마련한 절이어서 법당의 옥호(屋號)도
대웅전이라고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비로자나(毘盧舍那)부처 님은 어깨가 당당하고
결가부좌한 무릎 부분이라던지 지권인(智拳인)의
수인으로 보아 적어도 통일 신라 시대
후반까지로 보고 있다. 이 부처님이 않아
계시는 좌대는 전혀 불좌대라고 볼 수가
없는데 이것은 석등에 대석(臺石)이다.
좌대는 없어지고 부처님만 계셔서 임시로
주변에 있던 석조물들을 대좌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비로자나 부처님 뒤에 있는
광배(光背)는 아주 일품이다. 이 광배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높이가 1.5m나 되고
폭이 84cm가되는 매우 큰 광배인데 두께는
불과 3.6cm 밖에 되지 않아서 매우 날렵하고
섬세한 조각의 광배이다. 광배에 단청까지
해놓아서 화려하기가 이를 데 가 없다.
오른편에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국보
5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통일 신라
후반부로 보고 있다. 이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좌대가 원래 이 부처님에 좌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런 대로 좌대와 부처님이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러나 이 부처님에
좌대라고 볼 수는 없다. 좌대에 비해서
부처님의 본체가 좀 작게 되어 있다. 이
부처님 뒤에 있는 광배도 아주 훌륭한데
비로자나 부처님 뒤에 있었던 광배와 같은
솜씨, 같은 시기에 같이 만들어 진 것
같다. 비로자나 부처님 왼편에 있는 아미타
부처님은 흙으로 구워만든 소조불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불상은 아닌 것 같다. 부처님이
앉아 계신 불좌대는 철에 있는 돌들을
모아 놓고 부처님을 모셔놓은 것 같다.
이 상대웅전은 적어도 고려조(高麗朝)로
봐도 좋을 만큼 좋은 법당인데 여기에
수미단이 있고 고궁인 닫집이 있고 격식이
높은 불상이 있어서 매우 고격(古格)의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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