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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도량 47호

   차 례

부처님 오신날 법문/오녹원 큰스님/진실한 빛의 길
정각도량/생사해탈/ 정성본스님
특집1/ 부처님 오신날/부처님 오신 날에는/조명렬
특집2/부처님 오신날/부처님 탄생의 의의/박경준
유마경의 세계/제자품과 보살품/강혜원 스님
불교문학/일본문학과 불교(1)/김환기
수행의 길/염불선의 수행/유진
불심의 창/갓바위와 신행/임태평
만나고 싶었습니다/이영경교수/편집부
열린마당/의료봉사를 다녀와서/서창욱
일주문/말의 정도/이법산 스님
신행상담/실상/장계환 스님/불교대학 교수
가람의 진수/서악의 명찰, 갑사/ 유문용

 

 


부처님 오신날 법문
오녹원 큰스님(동국학원 이사장)현재 대본산 직지사 주지. 동국학원 이사장
진실한 빛의 길

1941년. 이탄용 화상을 은계사로 하여 사미계 수지196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방한암 대종사로부터 비구게 수지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 주지1963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198l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1983년, 조계종 전국교구본사 연합회 회장1984년, 조계종 총무원장1985년,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장1992년, 일본 大正대학 명예 문학박사

 

기묘년 새학기를 맞이해서 우리 동국대학교 모두가 큰 뜻을 가지고 한해의 큰 꽃을 피워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쁘게 할 채비를 가지고 있습니다또 우리 송석구 총장님을 비롯해서 교수 여러분들 학생, 교직원 여러분들과 뜻 깊은 이 법석에서 개강법회의 법문을 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및 말에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은온 것 같은데 봄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역시생명의 질서는 춥던 덥든 간에 그 질서대로 올 때가 되면 오고 갈 때가 되면 가고 하는 것이 어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떤 사람이 봄이올듯해서 봄을 한번 찾아 가 봐야지 생각하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많이 돌아다녀 봐도 봄은 찾지도못하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 매화가 벙긋이 피어서 있는걸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까이 와 있는 봄을 느끼지 못하고 밖으로 헤매는 수고로움만 더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입니까. 그러니까 봄이든 행복이든 멀러서 찾지 말라는 말이겠지요. 며칠 날씨가 추웠지만 이미 이 정각원 앞에 보니까 진달래 개나리가 벙긋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불교는 원초적으로 세속과 떨어져 있는 종교가 아니고 세속이 알고 보면은 곧 불교요 불교가 곧세속입니다. 이런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이 불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자기네들 이치가 따로 있고동화되지 않는 것들은 이치가 별도로 있어서 자기들은 높고 또 상대방은 낮고, 또 가치성이 자기네들은 수승하고 상대방은 가치성이 대단히 열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착오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들이 불교밖에 다른 종교는 다 그렇게 다릅니다. 불교는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한 백년 전예는 어땠습니까. 모든 세상의 행복은 물질만이 그 가치성을 발휘할 수 있다 했는데, 유물론 사상이 우리 지구촌에서는 거의 꼬오녹원 리를 다 감춘 상태입니다. 현대는 고도로 달나라까지 갔다 올 수 있는 문명을 우리가 창출 했지만은 우리 인간은 그러한 문명이 창출되어 갈수록 점점 갈등이 심하고 인간과 인간관계는 점점 소원해 지는 까닭이 뭐겠습니까. 이런 문제가 20세기 와서 아주 심각하게비판이 되고 있는데 지금의 21세기를 이렇게 맞이해서는 안 되겠지요. 지금껏 뭔가 바깥 것들을 찾았던 것이고 이제는 내면세계로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하는데 이런 현상을 표면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문화세계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문화세계란, 문화라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인간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고 인간의 생각이 예술적인 방면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좋은 문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요즘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인간생활에 해롭게 창출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시는 그 순간 무어라고 선언했던가, 그것은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을 선언했지요.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 홀로 가장 높다고 한 것은 생명의 본질보다 더 신비한 것은 없고, 생명의 근원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보다 더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임을 선언한 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뜻입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이라 하고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불멸은 꺼지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생명은원초적인 본질은 이 지구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지구가 몇 억겁을 지내면서 이 지구도 성주괴공 하는 것입니다. 성립이 되었다가 어느 시간까지는 머물러 있으며 머물러 있는 환경이 다하면 무너지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공하게 되지요. 이런 현상적인 진리를 부처님은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설해 놓으셨으며, 급속도로 변하는 과학의 속도보다 훨씬 진보적인 말씀을 삼천년전에 이미 하셨습니다. 또 생명의 존재 유정물들은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이것도 네 가지 과정으로 윤회하는데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습니다. 성주괴공하는 우주나 생로병사 하는 생물들의 순환은 같습니다. 실은 유정 물들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정물토 엄격히 말하면 무정물이 아닙니다. 거기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산은 높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또 계절따라서 봄이면 꽃이 피고 잎이 무성했다가 가을이 되면 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무슨 물건들의 조화로 이렇게 되는가.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개체로서 다 육체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주인공은 평생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본질, 진성 자리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바깥으로 시비만 자아내고 남의 일에 대해서 신경만 쓰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노름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들의 노름을 그치게 하고 생명의 본질에 돌아가서 그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이 교화를 시작한 목적 이였습니다. 생사가 차안에서 나고 죽고, 결국은 우리가이 두 가지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나서 죽는 것은 무슨 대통령을 해도 왕을 해도 교수를 해도, 무슨 짓을 해도 결론은 이 두 가지로 귀결되지요. 나서 죽는 것 뿐 이다. 역사 하는 사람들은 책을 많이 쓰는데 나 같으면 "사람은 나서 죽는다"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고 쓰겠습니다. 나고 죽는 사이에 자기도 잊어버리고 자기 존재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다반삽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고통이 많이 있습니다. 이 고통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라는 존재물로부터 왔으며, 나라는 존재물이 이 육체가 없으면 고통이 있을 수도 없지요. 세상에서 최고의 명예와 부를 누리고 살아도 평생 이 몸뚱이 하나 치닥거리하고 먹여 살리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살아갑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대통령이 되고 교수가 되는 것도, 다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중생이 사는 이곳은 차안이라 고합니다. 나고 죽는 일만 알면 그것은 이상세계라고 말합니다. 열반의 세계가 그 이상세계. 즉 피안이라는 것입니다. 강 건너 저쪽 피안은 나고 죽는 법이 없는 생명이 아주 현현하게 드러나서 고금이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명의 존재물을 이걸 불교에서는 진여라고 하고 진아라고도 합니다. 대학에서 불교를 알려고 하면 적어도생명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야 하고 뭔가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게 하려고 수단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배와 같은 수단으로 많은 세월을 길에서 법을 설하셨는데 중생들은 그 수단을 잘 이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배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수고로움을 어리석게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서 집착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중생심이고 그런 필요 없는 집착을 하는 것 때문에 고통이 오는 것이지요.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초연한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망상심을 버려야 합니다. 망상심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개나 구름과 같이 기후변화에 따라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중생이 평생 생각하고 행위 하는 것이 흡사 그와 같아서 그것으로는 제대로 산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본래 생명의 존재물들은 차별상이 아니고 차별상은 사람의 생각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생을 사는 동안 몇 차례의 길흉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은 좋은 기운을 당면했을 때 놓치지 않고 열심히 성공의 탑을 괌지요. 이 세상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무슨 빛인가_ 바로 진실의 빛입니다. 가장불행하게 하는 빛은 무슨 빛인가 진실하지 못한 빛입니다. 금년부터 우리 동국대학인들이 거짓이 없고 진실한 빛으로 학문을 하자고 권하고 싶고 학문의 진실한 빛을 찾는 것이 학문하는 사고며 그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이라는 것이 건물만 잘 지어져 있다고 해서 명문대학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대학 내에 학문하는 사람과 그 학문의 세계가 채워져 있어야 명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대열에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진실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진실된 학문을 하는 국민이 되었을 때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켜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인데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뭔가 사람이 사람다운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짓을 안 하고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대단히 어지럽고 삭막하게 변해갑니다. 우리 동국인들은 마땅히 가정을 밝히고 나아가 나라를, 더 크게는 이 지구촌을 정토로 만들 수 있도록 올해는 "나"를 버리고 "우리"로 나아가는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한해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기묘년에 우리 동국인들은 스스로 짖는 공덕으로 모든 가정에 부처님의 명훈가피력이 충만하길 바라고 더불어 50세기를 잘 갈무리하길 바랍니다.

 

 


정각도량
생사해탈/ 정성본스님

얼마 전에 초청법사 법문이 있었다.

노스님이기에 '조실스님'이라는 존칭으로 소개하자. 스님께서는 법상에서 "相室의 칭호를 받으려면 반드시 生死問題를 해결한 禪僧어야 하고, 生死大事를초월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生死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조실 자격이 없다"라고 지극히 겸손한 말씀이 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스님께서는 생사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행생활 하셨고, 그 해결을 위해 어떠한 수행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아마도 육체적으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가 되지 못했기에 조실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정말 선에서 말하는 生死自由. 혹은生사解脫을 육체적  물리적인 자유자재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육체적으로 생사를 해탈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소위 고승들의 죽음에 대하여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坐脫立亡에대한 이해를 의식하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승들이 임종에 즈음하여 安樂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평상생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죽음, 그 자체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고승들의 죽음(死]은 안락하고 자유자재한 경지에서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생(生)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고승이라 하더라도 육체적인 출생을 자유자재로 해탈할 수 있는가? 출생 이후에 불도를 만나 수도하여 고승이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출생을 해탈하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생사해탈은 생사를 동시에 해탈하는 것이지 생과 사, 그 어느 한쪽 만을 해탈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육체적인 생사해탈과 생사자유를 주장하는 사람은 불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며 외도의 견해에 떨어진 것이 다. 돈황본 육조壇經」에 오조 홍인이 제자들에게 재가 그대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생사의 일이 크다(生死事大)고 말했다. 그대들은 종일 供養하고 단지 福田만을 구하며. 生死苦海를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설법하고 있다. 홍인의 설법은 제자들이 계율생활로 열심히 닦고 노력하고 있으나 불법의근본문제를 철저히 수행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질책인 것이다. 육조단경에 혜능이 달마와 양무제와의 대화를 해석하는 부분에서도. 양무제는 복전은 이루었지만 불법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룬 공덕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홍인이 생사문제는 지극히 중요하고중대한 일이며 생사 윤회를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 이것은 가장 큰 일이라고강조한 말인데. 선불교에서는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홍인의 설법으로는 최초로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홍인의 설법을듣고 깨달아 생사문제를 해결하여 그의 법을 계승한 육조혜능은 『金剛經義解』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善護念이란 모든 학인이 반야의 지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護念하여 망령되어 증憎의 마음을 일으켜서 밖으로 六塵에 물들어 생사고해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자기 마음 가운데 한 생각, 한 생각을 바르게 하여(念念상정 삿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自性如來를잘 호념하는 것이다' 혜능의 설법에서 생사고해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생사해탈'은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말인데. 육체적인 생사해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임제도 '만약에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고해 속에 浮沈하리라'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凡聖  증愛에 대한 분별심. 차별심이 바로 번뇌이며 이를 生死心. 혹은 生滅心이라고 말한다. 임제는 생사에 물들지 않고 가고 옴에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불법을 깨달아 일체의 경계에 매몰되지 않는 정법을 볼 수 있는 진정한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安般守意經』에서도 '생사의 분별이 되는 것은 생각(妄念)이 일어나면 즉생이요, 생각이 없어지면(멸), 즉 멸이 된다. 그래서 생사라고 말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말하자면 생멸과 생사는 똑같은 말이며. 生住異滅과 生老病死도 같은 의미인 것이다.

 

 

七佛通戒偈로 잘 알려진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이, 寂滅爲樂'이라는 노래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생이라고 하고, 사라지는 번뇌를 멸이라고 한다. 마음속에 이러한 생멸의 번뇌가 없어졌을 때에 본래 청정한 마음에서열반적정의 즐거움이 있다고 설한다. 「大乘起信論』에 '마음(妄念]이 일어나면 만법이 생하고 마음(妄念)이 없어지면 만법이 멸한다'라고 설하고 있음은 이와 똑같은 취지의 말이다. 불법은 육체나 현상법을 문제로 삼고이것을 자기가 깨닫고 육체적인 생사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心法을 깨닫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량분별과 생사번뇌를 초월하는 것이다. 만약 육체적인 현상법을 생사해탈하려고 불법을 닦으려 한다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영가현각이 처음 혜능을 방문하여 '生死事大 無常迅速'이라고 질문하자, 혜능이 '어찌 남이 없는 것(無生)을 체득하지 않고. 빠름이 없음(無速)을 통달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여 답하고 있다. 현각은 『증도가』에서 '몇 번을 나고(幾回生) 몇 번이나 죽었던가(幾回死).生死 悠悠하게도 定止함이 없네. 돈오하여 無生을 깨닫고는 일체 榮辱에 어찌 근심과 기쁨이 있으랴!'라고 읊고 있다. 혜능을 참문하여 心法을 돈悟하고 일체의 번뇌가 남아 있는 本來無一物인 無生의 경지를 체득하고. 無常을 초월한 영원의 지금에서 본래 심으로 살 수 있게 편 자신의 경지를 깨달음의 노래로 읊고 있다. 끝으로 나옹화상의 법문을 통해서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를 선의 수행을 통해서 깨닫도록 하자.'생각(망념)이 일어나고 생각(망념]이 없어지는 것을 생사라고 한다. 생사의 망넘에 당해서 순간 순간에 부디 힘을 다해 화두를 들라. 화두가 순일하면망념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없어지게 된다. 망념이 일어나고 없어짐이 다한 그 곳을 神靈(靈)이라 한다. 神靈(靈)한 그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無記(자각함이 없음)라고 한다. 신령함 가운데 화두에 어둡지 않으면 그것을 신령함[昭昭靈靈] 이라 한다. 즉 이렇게 텅 비고 고요하여 신령스럽게 아는 것(空寂靈知]은 무너지지도 않고 잡스럽지도 않으니, 이렇게 공부하면 멀지 않아 이루어 질 것이 다: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참된 자기 자신을 철저히 깨달아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갖추는 것이며, 일체의 차별. 분별심을 벗어나 각자의 근원적인 생사의 번뇌없는 본래심을 돈오하는 것이 생사해탈이며 생사자유인 것이다.

 

 


특집1/ 부처님 오신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조명렬/중앙승가대 교수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의를 파악하지도 못했던 어린시절부터 나는 사월 초 파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할머니를 통해서 였다.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일년 중에서 제일 많이 정성을 드리고 절에 가신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그 날이 다가오면 몇 일전부터 절에 가실 준비를 깔끔히 하셨다. 새 옷을 짓거나 말끔히 빨래를 했고 음식을 철저히 가려 드시면서 매사를 정갈하게, 정성을 다하셨다. 딸을 챙겨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서면 며칠 밤을 지내고 돌아 오셨다. 새벽마다 불 밝히고 혼자 앉아서 염불을 열심히 하셨는데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생활이라고 믿어왔을 뿐 부처님의 존재에 대해서 깊은 사고를 해 보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 반야심경과 찬불가를 배웠으나 반야심경을 가르쳐주신 교장선생님은 선친과 절친한 관계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그분이 훌륭하신 강백이셨다는 사실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이제 겨우 부처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생기고 그 믿음이 확신되어지는 요즈음 가끔씩 지난날 주변에 있었던 부처님과의 인연을 추억해 볼 때 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외할머니의 신앙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八相華라는 佛名을 가졌고 염불을 열심히 하셨던 할머니가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거룩한 모습으로 떠오름에 삼가 마음모아 왕생극락 하시기를 축원 드린다. 부처님께서는 의조부셨던 선각대신이 그의 부인 룸비니를 위해서 만든 동산 룸비니에서 탄생하셨다. 불본행집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탄생하시자마자 중생들이 많은 즐거움을 받았는데 먼저 탐  진  치가 사라지고, 병든 이가 병이 낫고, 장님은 눈을 얻고. 귀머거리는 듣게 되고, 가난한자는 재물을 얻고. 지옥중생은 휴식을 얻고,축생은 공포를 잊고. 아귀는 배가 부르게 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다고 하는 의미일 것이다. 집착으로부터의 해탈은 쉽게 이루어질 수가 없다. 또한 논리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수행)이 없이는 이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집착은 인간이 지닌 가장 모질고 질긴 인간병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자기 자신에의 집착이라는 것은 항상 정당하게 포장되어진 위선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은 참으로 위대한 모습이라고 믿어진다. 경전에 나타난 설화중에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내용이 많다. 그 중에서도 늘 기억하는 내용이 있는데 간단히 소개를 하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의 마음을 챙겨보는 기회로 삼아보고    한다. 옛날 인도에 고오타미라는 젊고 어여룬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아들이 한명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재롱과 사랑에 빠져 세월이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그 아들은 병이 나서 쾌유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던 고요타미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을 안고 그가 깨어날 것을 믿고 며칠을 지켜보았으나 사랑스런 아들은 영영 깨어나질 않았다. 그녀는 실신한 듯 아들의 시체를 안고 거리를 누비면서 외치고다였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병이 났는데 일어나질 않아요 눈도 뜨질 않아요, 재롱도 부리질 않아요 내 아들이 일어날 수 있는 약을 주세요." 하면서 며칠을 돌아다녔으나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의 사람들은 안타까웠다. 결국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아들을 안고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애처롭게 자장가만 불렀다. 그때 제바다나에 계시는 부처님께 가면 아들을 살려 낼 약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는 부처님을 찾아간다.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너의 아들을 살려 낼 수 있는 약이 있느니라. 그 약은 앵속(양귀비과의 식물) 씨앗 5~6알 먹이면 곧 일어날 것이니 그걸 구해서 먹이도록 해라. 그런데 그것은 아무 집에서 구하면 안 된다. 옛날부터 한 사람도 죽은 일이 없는 집에서 구한 씨앗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살려 낼 수가 없느니라"고하는 말을 듣고 그녀는 길을 나졌다. 앵속 씨앗은 어렵지 않게 구했으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다. 기쁨과 허탈의 연속 속에서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그래, 인간은 누구든지 죽는 거야. 내가 돌아다닌 집에서도 모두가 사람이 죽었어, 죽지 않은 집은 한 채도 없었다. 우리 인간은 결국 죽게 되어 있어, 다만 일찍 죽고 늦게 죽는 차이가 있을 뿐이야. 아들을 잃고 부모가 어찌나 혼자뿐이겠는가 .."하고 깨달은 고오타미는 정중하게 합장을 하고 부처님 계시는 곳을 향하여 "부처님, 앵속 씨앗은 구하지 못했으나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들을 살려내지는못했으나 집착으로부터 해탈을 했습니다. 자비로움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이 내용은 참으로 깊은 감동과 감명을 주는 시사성이 큰 가르침으로 생각한다. 외아들을 잃은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은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모성발휘는 곧 어머니의 願力이라기 보다 절박하고 간절한 원력이 앵속씨를 찾는 노력(수행)을 재촉시켰고 그 노력의 결과는 인간의 평등성을 깨닫는 眞理에로의 귀의라고 하는 가슴 뭉클한 설화이다. 결국 노력 즉 수행이 따르지 않는 願力을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해탈의 모습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다시 새겨서 수행을 잘 해가는 불자가 될 것을 다짐하고 싶다.

 

 


특집2/부처님 오신날
부처님 탄생의 의의/박경준

인류 역사상 三大聖人의 한 분으로 꼽히는 부처님을 불교인들은 다투어 찬탄해왔다. 다음의 두 게송은 그 중에서 가장유명하고도 대표적인 讚佛偈이다.

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切無有如佛者

 

"천상천하에는 부처님 같은 분 안계시고. 시방 세계에도 부처님에 견줄 만한 사람 없네. 일체 세간 다 둘러보아도 부처님 같은 분 찾아볼 수없네 ."

 

刹塵心念가數知 大海中水可飮盡

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

 

"온 세상을 산산 조각내어 먼지티끌 만들더라도 그 수를 셀 수가 있고. 저 대양의 바닷물은 다 마셔 없앨 수도 있으며. 저 허공의 광활함은 헤아려볼 수도 있고 벌판을 불어가는 바람은 묶어놓을 수 있네, 하지만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써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네."한 마디로 부처님은 사람 중의 사람(人中入)이시고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이시며 성인 중의 성인(聖中聖)으로서 그 분의세계는 언설로써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다는 찬탄이다.

 

 

이러한 찬탄은 부처님 제자들의 것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서양의 비불교인도 부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독의 시인 릴케(Rainermaria Rilke)는 그의 광휘 속의 부처님' (Buddha in derGlorie이라는 시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중심 속의 중심, 핵심 중의 핵, 굳게 닫힌 채 달콤함을 즐기는 편도(편桃). 하늘의 모든 별들까지도 그대의 과육(果肉), 인사를 드리노라. 보세, 그대 아무것도 그대에게 매

달린 것이 없음을 느끼네. 그대 과피(果皮)는 무한 속에 묻혀 있고, 거기서 과즙은 진하게 짜여지네. 밖에서는 광채까지 번적이며 그를 비추인다. 저 위쪽은 온통 그대 태양들이 가

득 가득 빛을 통으며 돌고 있으니 그대 속에서는 이미 태양들을 뛰어넘는 일쯤 시작된 모양이네."릴케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에는 영국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러셀(Bertrand Russell)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그의 연설문 가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글 속에서. "저로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에 있어서나 덕에 있어서나 역사에 알려진 다른 사람들만큼 높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석가와 소크라테스를 예수 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오백 년 만에 한 사람 날까말까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서양의 최고 지성인이, 지혜에 있어서나 덕성에 있어서 하나님의아들인 예수보다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더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그 무엇이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큰 감동과 존경을 불러일으키게 했을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탄생게' 속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일곱걸음을 걸으시고 오른 손으로는 하늘을, 왼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시며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나니, 이 세계의 모든 괴로움을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고吾當安之)고 사자후하셨다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러 흔히 '탄생게'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구절이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뭔가 잘못된 이해임에 틀림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보다는 '삼계개고오당안지'라는 구절 속에 탄생게의 더욱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장 구조상으로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어디까지나 종속절(부사절)이며'삼계개고오당안지'가 주절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 속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생략하면 했지 '삼게개고오당안지'를 생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로 이 탄생게 속에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큰 뜻과 의의가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곧 '이 세계의 모든 괴로움을 평안케 함'이다. 우리는 흔히 불교의 양대 목표를 '자기완성'과 '불국정토 건설 라 하는데, 이러한 근거가 탄생게의 내용 속에 이미 발견된다. 모든 개인적  내적괴로움을 평안케 함은 자기완성이라고 할 수 있고, 사회적  외적 괴로움을 평안케 함은 정토 건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고통 속에 빠져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불교의 근본진리인 연기법의 본래적인의미도 사실은 '모든 괴로움(老死憂悲苦惱)은 緣起된 것이므로 그 극복이 가능하다(緣滅)'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불교의 궁굇蔓? 목표인 열반도 '苦의 소멸'에 다름 아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우리는 미증유의위기와 고통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모든 위기와 괴로움은 신의 뜻도 아니고, 운명적인 것도 아니며 우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연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희망을 잃지말고 지혜와 자비의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이러한 위기와 고통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내어 그것을 극복하는데 앞장서 나가야 할 것이다.

 

 


유마경의 세계
제자품과 보살품/강혜원 스님

제3제자품

(제자품)에서 유마는 병든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문병하러 온 모든 이들에게 무상한 몸에 대해 설했다. 문병 온 제가자들보다 그는 불제자들을 기다렸으며 그들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四無量心을 가진 불타께서는 이를 환히 아시고 십대제자들에게 차례로 권유해 보지만 그들은 가고 싶지 않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각기 그 이유를 드는 가운데 유마의 위대함과 사상의 탁월함을 묘사하고 있다. 제일 먼저 문병을 권유받은 제자는 사리불이었다. 사리불이 좌선하고 있을 때. 유마는 참된 좌선에 대해 말한다. '연坐는 것은 삼게에 있어서 몸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 이를 연좌라고 하오 減定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위儀를 나타내는 것 이를 연좌라고하오 ."좌선에 대해 이처럼 어디에 있든 어디에서 수행을 하던 어디에서 좌선을 하던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이렇게 된다면 능히 깨달음에도 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오탁의 세속을 버리고 고요한 장소를 택해 좌선을 하고 있는 사리불을 비난줬고 그때의 부끄러움으로 사리불은 문병을 거절한 것이다. 다음 대목건련도 마찬가지로 거절한다. 어느 때,설법하는 목련에게 無相이란 相이 없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설할 수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유마는 법에는 相이 없다'는 진리를 확실히 알 때 법을 설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설법은 이러한 법에 대한 이해임을 보인 것이다. 예전의 이러한 일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던 목련이었다.

두타행이 제일인 가섭역시 문병을 거절한다. 과거에 결식할 때 가난한 동네에서만 걸식함을 질타하고 유마는 걸식이라는 것은 평등의 진리를 근거로한 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걸식하는 것조차 無相이어야 함을 말한다. 삿됨과 바름은 본래의 평등심에서 일어난 분별이고 차별일 뿐이기 때문에 유마는 가섭에게 법등즉차별'이라는 대승불교사상을 설한 것이다. 수보리 역시 거절한다. 수보리유마의 집에 가서 걸식할 때 유마는 '제법이 평등한 것처럼 걸식할 때도 평등해야 하오. 제법이 공한 것처럼 걸식도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라고 하였다. 그때 수보리는 당황하여 발우를 그대로 두고 유마의 집을 나와 버렸다. 그때 유마는 일체 言說은 자성이 없고 공한 것이므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힐난으로 문병을 거절한 것이다. 부루나 역시 예전에 유마로부터 질책 받았던 사실을 말하며 거절한다. 설법하는 부루나에게 "우선 선정에 들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피고 나서 설법해야 하오 또한 비구들의 생각을 알아야 하오'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의 근기를 알지 못하는 설법자는 설법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다. 다음 가전연도 유마의 질타 받았던 것을 상기한다. 예전에 비구들에게 부처님의 법문의 요긴한 뜻을 다시 설명하는데 유마가 와서 "생멸의 心行으로서 실상의 법을 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유마는 불교의 근본을 생멸의 한 면에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천박한 지혜로 실상의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고 질타한 것이다. 천안제일 아나율도 문병하기를 거절한다. 어느날 범천이 천안에 대해 묻자, 그는 삼천대천세계를 마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열매를 보듯 하다고 했다. 그때 유마는 "천안으로 보이는 세계는 有爲인가 無爲인가."라고 하고 참된 천안은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無諍삼매에 계시는 부처님만이 세상에 즉한 진리의 세계를 보는 것이라고 하여 유마는 힐난한 것이다. 우바리 역시 문병을 거절하는 이유를 계율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유마에게 비난받았던 것이다. 계를 파한 비구들의 요구로 계율에 대해 설할 때. 유마는"죄성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며, 죄는 인연소생으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며 다만 인연에 의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이른다. 다음 라훌라도 거절한다. 출가의 공덕에 대한 이해를 힐난 받았기 때문이다. 유마는 참된 출가는 간절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을 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구족계를 받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마지막 아난까지도 문병을 사양한다. 부처님이 병중에 계셨을 때 우유를 마시고 싶어 하시어 탁발하러 나잡을 때. 유마는 부처님의 신체는 법신이지 생멸무상의 육신이 아님을 깨우친다. 아난은 부처님의 육신만을 보고 법신의 면을 잊은 것이다. 그때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 (품)에서 유마의 설법의 요체는 無相이었다. 절대의 무상에서 묘有를 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禪의 시작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다. 제4 보살품 십대제자중 어느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부처님은 보살들을 보내려 했다. 이 (품)에서는 네보살들이 유마를 만나 펼쳐 보이는 문답내용이다. 제일 먼저 미륵보살에게 문병을 권유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예전에 미륵이 도솔천에서 不退轉地의 행에 대해 설하고 있을 매 유마가 그곳에 와서 "그대는 다음 생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는데 그 생이란 언제인가? 유마가 문제 삼는 것은 수기의 때(時)이다. 유마는 계속해서 "만약 無生으로서 수기들 얻었다고 하면 無生은 바로 정위(도를 터득한 지위), 정위에서 수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소 어느 생에서 수기를 받으려고 하오끈 정위는 絶對無의 세계를 말한다. 절대무 가운데는 수기를 얻는 것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마는 미륵에게 수기라는 것으로 천자를 유혹해서는 안 된다고 힐난한 것이다. 다시 광엄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그가 바이샬리성을 나오려고 했을 때 성으로 들어가려는유마를 만났다. 동자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오?'라고 물을 때 "도량에서 왔소"라고 했다. 동자가 어느 도량이냐고 했을 때 일체의 모든 것이 도량이라 고하였다. 이때의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 거절한 것이다. _지세보살 역시 사양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어느 때 마왕 파순이 제석천의 모습으로 나타나 데리고 온 천녀를 보살에게 주어 마음을 유혹하려고 했다. 유마와 와서 천녀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고 그들에게 참된 法樂을 설했다. 크게 깨달은 천녀들은 마왕이 천궁에 돌아갈 것을 권해도 이를 거절한다. 그때 유마는 천녀에게 무진등의 법문을 가르쳤다. 즉 천녀들이 돌아가 다른 천녀들에게 無相의 보리심을 내게 하도록 가르치고 그들은 돌아간다. 지세보살이 유마가 천녀들을 결에 두려는 것을 보고 당황했던 당시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선덕보살 역시 거절한다. 예전에 그의 집에서 대보시회를 열었을 때 유마가 와서 참된 보시에 대해 말했다. 껍을 배품은 전후가 없으며 일시에 일체중생을 공양하는 것. 이를 법시라고 하오,"법시의 내용에 대해 유마는 四無量心과 六波羅蜜이라고 하였다. 가장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참된 道心을 일으킨 선덕보살은 유마에게 경배를 하고 영락(목걸이)을 바친다. 유마는 이를 반으로 나눈 뒤 회중에 가장 가난한 걸인에게 또 하나는 가장 고귀한 난승여레에게 올렸다. 당시의 이러한 변변치 못한 모습이 상기되어 문병을 꺼린 것이다.

 

 


불교문학
일본문학과 불교(1)/김환기

오늘날 불교 문학이란 용어는 일반화되어 있는데 이를 일본에서는 두 가지관점에서 보고 있다. 하나는 경전 그 자체를 문학으로 보아 3장 즉 경  율  논(經  律  論)을 불교문학의 주체로 보는 시각과, 불교 사상. 불교 신앙, 불교의례 등과 깊숙한 관련이 있는 불교 찬가. 불교 설화, 법어 등까지 포괄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 문학이라 하면 후자를 일컫는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일본문학사의 흐름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上代 설화 문학에서부터 이성의 시대 근대에 이르기까지일 본 문학사를 시대별로 살펴 보면서 문학 작품 속의 불교성을 구체적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일본 문학은 상대. 중고.중세, 근세. 근대 문학으로 구분한다. 상대 문학(500-800)은 일본인의 조상이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야마토 정권에 의한 통일 국가 수립을 거쳐 나라시대가 종말을 고하기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아직 문자가 없었던 시대로 수많은 신들과 조상들의 이야기는 신화, 전설. 설화화 되었고. 그 후 4세기에 한자, 6세기에 불교가 대륙으로부터 전래되면서 구전되어 오던 것이 기록화 되기에 이른다. 『古事記』,『일本書紀』, 『風土記』, 현존 最고의 일본 와가집 『万葉集』, 불교 설화집 『日本靈異記』 등이 이 시대에 편찬되었다. 일본 최초의 설화집으로서 훗날 설화문학의 원류가 된 『日本靈異기』를 보면"外典을 믿고 이것을 배우는 자는 곧바로 佛法을 비방했고 반대로 內典을 신봉하는 자는 外典을 가볍게 여겼다. 어리석은 무리들은 갈피를 못잡고 罪와 福의 원리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가 깊은 불교도는 內典에도 外典에도 친숙해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삼가 두려워한다(上卷 序)"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백제에서 전해진 外典과 內典의 예를 들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교의 인과응보의 도리를 깨우치게 해 중생을 교화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고 문학은 794년 헤이안(平安) 천도에서부터 1192년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들어설 때까지 약 400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율령 체제가 붕괴되고 광활한 장원을 배경으로 후지와라시(藤原씨)의 攝關정치가 시작되면서 궁정을 중심으로 여류 문학이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헤이안 조정 초기엔 당 문화의 섭취로 한시문이 융성했고 10세기 초 최초의 칙選和歌集 『古今和歌集』이 편찬되어 와가(和歌)는 귀족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히라가나의 발명은 국풍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10세기 초 현존 最古의 이야기 『竹取物語』를 낳았고 「伊勢物語』 그리고 일기 문학 『土佐일記』, 『청령日記』. 『更級日記』 등을 탄생시켰다. 특히 11세기 초가 되면 궁중으로 몰린 궁녀들이 후궁을 무대로 독특한 여류문학을 꽃피우게 되는데 일본최초의 수필 『枕草子』의 집필자 淸少納言을 비롯해 이야기 문학의 집대성인『源씨物語』의 작자 紫式部, 和泉式部 등이 그들이다. 후기에 들어와서는 귀족 계급의 몰락과 함께 화려한 지난날을 회고하거나 비판한 「榮花物語』. 『大경』 등이 등장하는데. 특히 『今昔物語』의 보은담은 "나의 죄보가 무거운데 나를 위해 오랜 세월 不經의 行을 닦아 『법화경』을 강의해 주었기에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석방되어 도리천이라는 천계에 태어나게 되었며 어떤 악인도 이 세상의 자식의수행과 法緣에 의해 그 부모가 사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하는 불교적 설화 형식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또한 일본 고전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源씨物語』는 불교적 숙세관을 기저로 헤이안 귀족의 이상상과 광명. 당시 귀족사회의 모순과 막다른 골목을 반영하고 점차 고민과 우수로 가득한쪽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깊이 파고드는 情致」의 세계를 전개한다. 중세 문학은 1192년 가마쿠라(겸倉)막부 성립부터 1603년 에도(江戶) 막부개설까지 약 400년간을 말하며 그 어느시기보다도 불교 문학이 꽃핀 시기이다. 중세의 전반은 귀족과 무사들의 대립으로 인해 귀족 측에서는 와가의 집대성인 『新古今和歌集』의 편찬과 동시에 쇠퇴해 갔고. 이야기(物語)는 헤이안조를 회고하고 모방한 擬古物語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무사 출신이면서 23세때 출가해 꽃과 달을 중심으로 한 자연미. 인간미. 종교적 경지 등을 자유롭고 담담하게 읊은 西行, 그리고 後鳥羽院.藤原俊成 등이 와가의 중심인물이다. 한편 신흥 무사 측에서는 전란 후에 전해진 영웅 이야기가 기록되어 軍記物語가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平家物語』. 『保元物語, 『太平記』이다. 특히 "祈園精舍의 종소리는 諸行無常의울림이 있고, 釋迦 入滅 때 백색으로 변했다는 사라쌍수의 꽃 색은 盛者必쇠의 도리를 나타내고 있다.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는 자도 한없이 오만할 수는 없다. 다만 어느 봄날 밤 꿈처럼 덧없는 것. 용맹한 자도 결국에는 시들어 가는 바람 앞의 티끌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平家物語」는 1세기 C말 동란을 平 淸盛을 중심으로 하는 平家 一門의 흥망을 축으로 한 불교적 무상관을 기조로 서사시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수행의 길
염불선의 수행/유진

염불선(念불선)은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인 禪定과 염불을 합친 중국불교의 새로운 실천행이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佛陀跋陀羅 등에 의해 觀想念佛을 주로 하는 觀佛삼매나 반주삼매가 수행되었다. 달마계통의 선승들 가운데서 관상염불선을 수행한 사람은 五祖 弘忍의 제자인 법지(法持 : 635~702)가 있는데 그는 정토의 觀念念佛의 수행자로 알려지고 있으며. 또 종말은 『원각경대소초』에,오조 홍인 문하의 분파로서 남山念佛門禪종의 일파를 전하면서 그들의 실천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음 속에 부처를 보존(存佛) 한다고 함은 올바르게 법을 수여할 때에 먼저 법문의 도리와 수행의 취를 설명한 뒤에 一字念佛하게 한다. 처음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부처님을 想念하여 뒤에 점차로 목소리를 죽여 미약한 소리로 하고 소리가 없어지게 되면 부처님을 마음 속 깊이 염상한다. 의식이 아직 거칠면 또 다시 반복하여 부처를 마음에 두고 영상한다. 생각 생각에 부처를 염상하면부처는 심중에 계시는 것이니, 부처를 영상하지 않고 어찌 도를 이를 수 있으리요'그러나 염불선이라면 주로 관상염불의 수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唐宋代 이후에 널리 실천되고 있는 것처럼, 남無阿彌陀佛'이나 혹은 나무-'라고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稱名念佛과 선정의 수행을 일체화한 염불선의 수행을 말한다. 이러한 칭명염불의 실천한 선승으로는 唐代 신라출신인 무상(無相 : 6a4~762)이 유명하다.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무상선사는 사川 成都 淨衆寺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無억 無념 莫忘의 三句설법의 선법을 펼치며. 無念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법으로 引聲念佛의 수행방법을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무상선사는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 만인을 위하여 수게설법을 하였다. 높이 단상에 올라 먼저 길게 소리를 내어 염불(引聲念佛) 하고 한 소리의 숨을 모두 다 내뱉게 하고 목소리가 끊어지고 생각(망念]이 없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설했다. 모든 기억을 없애고 망념을 없애며. 자아(본래심)를 망각하지 말라!'無억은 지나간 과거의 잡다한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고 無念은 지금 여기 자신을 망념이 없는 본래심의 깨달음으로 하는 실천이며, 막忘은자아의 본래심을 자각하여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선불교의 자각적인 실천수행인 것이다. 말하자면 南宗禪의 기본 수행인 무념의 선사상을 독자적인 인성염불을 통해서 무념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염불선의 실천법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무상의 선사상이 독창적이었다는 사실은 종밀의 「원각경대소초에서도 특히 무상의 선사상과 교화를 전하고 있다. 자신의 호흡에 맞추어 목소리를 길게 내어 염불하면서 무념에 이르도록 하는 구체적인 인성염불로서 가르치고 있는 무상선사의 인성염불은 그가 어떤 목소리로 혹은 어떤 부처님의 명호를 입으로 소리를 내어 염불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 널리 유행하고 있는 唐代 정토교의 기본실천인 '나무아미타불 외우는 청명염불이 아닐까? 필자는 선정과 염불을 일체화하여 무념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염불선의 구체적인 실천은 무상선사의 인성염불에 의해 비롯되고 정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무상의 인성염불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한 목소리〔一聲〕로 길게 내어 호흡과 함께 천천히 길게 내쉬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이 듣고 자각하여 일념이 되고 무념이 되도록 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염불선은 단순히 앉아서 좌선을 하며 무념에 이르도록 하는 참선 수행보다 누구나 쉽게 실천하고 무념에 이르도록 하는 실천 수행인 것이다. 무상이 사부대중 백천 만인을 위해 수계설법하면서 인성염불하게 하고 삼구의 선법을 실천하게 하였다는 주장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무상의 인성염불은 사실 송대 이후에 널리 실천되고 있는 염불선의 실천방법과 똑같은 구조로서 누구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칭명하면서 자신이 부르는 염불소리를 듣고 자각하여 자신의 본래심을 자각하고 일념이 되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것은 염불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본래심을 자각하는 염불선의 실천적인 근원이 된다. 사실 당대에 염불선을 주장한 선사는 거의 없었다. 염불선은 송대 法眼宗의 영명연수(永明延壽:994  976)가 자愍流의 염불선을 주창하고 「만선동귀집」 등에서 선과 정토의 일치〔선정일치〕를 내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실천되었다. 오越의 충의왕(忠懿王)은 연수가 있는 영명사에 염불도장으로서'西方 香엄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운문종에서도 天衣義회와 그의 제자 慧林宗本,楊傑 등이 선정과 정토염불을 아울러 수행〔선정兼修〕의 입장을 취했고 長로宗 도 禪淨兼修를 실천한 선승으로 그의 저술인『선원청규』 에는 염불의식과 「아미타불을 十念하고 精魂을 정토에 천도하는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사실 송 원대 이후의 중국불교는 순수한 선종과 정토종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정겸수의 실천불교가 중심이 되었으며, 원대 이후에 中峰明본 天如惟則 등이 염불선을 주장하고 특히 雲서株宏, 감山德淸 등의 주장에 의해 중국선종은 염불선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염불선의 실천은 「유마경」에서 주장하는 '직심이 바로 정토이며, 직심이 도량 이라는 주장과, 『六祖壇경』 유심정토사상에 토대를 두고 '나무아미타블'을 칭명하는 염불의 실천을 통한 본래심의 자각을 실천하도록 하는 선정경수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으로 화두를 들고 着하며 마음으로 자각하는 선수행보다는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소리를 내고 자신의 귀로 그 소리를 또렷하게 듣고자각하는 염불선의 행이 훨씬 실천하기가 쉽기 매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자각하는 방법의 선정과 입으로 내는 소리를 귀로 듣고자각하는 염불의 자각적인 수행법을 일체화하여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라도 쉽게 자신의 본래심을 깨닫게 하며 身   ㅁ  意 三業을 청정하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이기 매문이다. 또한 상근기의 수행자가 참선하는 難行門의선정과 하근기가 염불하는 易行門의 염불을 일체화하여 누구라도 선과 염불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한 새로운 실천수행이 염불선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도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라도 상관하지 말고 니무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면서 자신의 염불소리를 또렷하게 듣고 자신의 본래심을 깨달아 일체의 고해를 건너 안락하고 평안한 정토에 살 수 있도록 염불선을 실천하자. 염불소리에 떨어지지 말고, 염불소리를 통해 본래심을 자각하여 일념으로 살아가는 실천 수행이 염불선인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망상과 번뇌를 떨쳐버리는 소극적인 선정의 실천이 아니라, 각자의 근원척인 본래심을 자각하고 자각된 본래 심으로 일체의 매사를 지혜롭게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불심의 창
갓바위와 신행/임태평

팔공산에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8세기 무렵부터 민간 신앙과 함께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던 신라 사회의 신앙의 형태로서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면서 전국의 많은 불자들이 찾는 약사신앙의 성지인 갓바위가 있다. 일명 冠峯 약사여래불이라고 하는 갓바위 부처님은 1962년 동아일보(10월 20일)에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신라 션덕여왕 7년(638),의현스님에 의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스님들의 구전에 의하면, 신라 효공왕의 대비가 병들어 백약이 무효였는데,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 효성이 지극하니 목탁소리를 따라가면 영약을 구할 수 있다'는 현몽을 얻어 신하로 하여금 목탁소리 나는 곳을 찾게 하였더니, 그 소리가 멎은 곳은 천야만야한 바위 앞에 밝은 샘이 솟아 흘러 그 물을 담아다 대비에게 드리자 그 물을 마시고 완쾌하였으며, 임금은 그 기쁨과 은공에 보답하기위해 약물터에 약사여래불상을 세우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곳을 찾는 불자들이 하나 같이 믿고 있는 것은 '누구나 정성껏 기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꼭 한 가지 소원만은 갖바위 부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365일 갓바위로 이르는 돌계단은 전국에서 찾아온 불자들의 행렬로 쉬는 날이 없다. 불자들의 발길은 무겁지도 않고, 그 행렬은 밤낮을 가리지도 않는다. 대구 쪽 갓바위 주차장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모래알이 많아서 미끄럼기도 하고 완만하지만도 않은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관암사(觀岩寺)라는 절에 이른다. 이곳에는 감로수가 나오는 곳이 있는데, 이 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주위를 돌아보면 많은 불자들이 사방으로 몇 번이고 허리 굽혀 절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광경은 관암사 경내에 이르면 더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절(寺)이란 원래 절을 하는 곳이지만, 부처님 전이 아닌 육방(동서남북하상)을 향하여 합장하고 절하는 모습은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스리랑카의 라훌라(Rahula) 스님이 쓰신What the Buddha Taught(London GordonFraser Gallery Ltd 1978)라는 책은 우리에게 육방숭배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원시불교의 교법을 잘 설명한 책이다. 불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창조신중심의 종교는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창조주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에서 '숭배한다'는 말의 의미는 서양의 종교나 힌두교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숭배해야 하는가? 다음은 붓다의 설법은 그 해법을 말해 주고 있다. 불교 경전 가운데 장아함경(Digha-nikaya의 No.31,Sigala-sutta)에는 붓다가 범인의 생활 그의 가정과 사회적 관계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주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가라(Sigala)라는 이름의 한 청년은 임종하는 부친이 그에게 해 준 마지막 충고를 지키고 준수한다는 점에서 하늘의 기본 육방-동  서  남   북   하   상-을 숭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청년에게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의 '고귀한 규율'로는 '육방이 다르므로 그 여섯 가지를 숭배해야 한다' 고 말했다. 붓다는 누구나 그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써만 그들을 숭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의무들은 시기라에 대한 설법에서 설명되고 있다. 첫째, 동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아동들은 노령에 있는 부모들을 보살펴 드려야 하고부모를 위하여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하고 가정의 명예를 유지하고 전통을 이어가야 하며, 부모가 벌어들인 재산을 보호해야 하고 사후에는 장례의식을 치러드려야 한다. 부모도 역시 자녀들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있다. 즉 부모는 자녀들이 사악한 방향으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하고 그들이 좋고 유익한 활동에 전념하게 해야 하며, 그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하고 온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넘겨주어야한다. 둘째, 남은 스승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이다. 학생은 교사를 존경하고 복종해야 하고 만약 어떤 요구가 있다면 그 요구에 주의해야 하며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도 학생을 적절하게 훈련시켜서 구체화해야 하고 그를 잘 가르쳐야 하며, 교육을 마칠 때는 그에게 방위수단이나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셋째, 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그들 사이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거나 신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편은 항상 아내를 공경함에 있어 부족함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아내를 사랑하고 신뢰해야 하고 아내의 지위와 안위를 보증해 주어야 하며, 그리고 옷과 보석을 아내에게 선물함으로써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 아내도 역시 집안의 일을 관리하고 보살펴야하고 손님, 방문객, 우인, 친척과 피고용인들을 접대해야 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며, 그의 재산을 보호하고 모든 활동에서 슬기롭고 정 력 적이어야 한다. 넷째, 북은 우인, 친족 및 이웃 사이의 관계이다. 이들은 서로 공손하고 자애로워야 하고 즐겁고 유쾌하게 말해야 하며, 서로의 복지를 위하여 일해야 하고 그들 사이에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되고 필요할 때는 서로 돕고 어려울 때는 서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하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이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서너 가지 의무가 있다. 주인은 하인에게 능력과 능률에 따라서 일을 할당해야하고 적절한 임금을 주어야 하며, 의료적인 요구에 대비해야 하고 이따금 기부금이나 보너스를 주어야 한다. 하인이나 피고용인도 역시 근면해야 하고, 주인에게 정직하고 복종해야 하고 그를 속여서는 안되며, 일에 진지해야 한다. 여섯째, 상은 종교인(승려)과 속인(재가자)의관계이다. 속인들은 사랑과 존경심을 갖고 종교인의 물질적인 요구를 보살펴 주어야 하고 종교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속인에게 학식을 전해 주고 그들이 사악한 길을 멀리하고 선한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불교는 인간중심의 종교이므로 가정과 사회집단을 숭배하는 불교의 신행은 누구나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또 그의 가르침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어 그 길을 따른다면,그는 고귀한 불교도이다. 갓바위에 오를 때 가파른 돌계단 길에서 들리던 낮은 목소리들은 지금도 귓가를 떠나지 않고 있다.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영경교수/편집부

6조 혜능(慧能)은 어느 날 (금강경)을 읽다가 홀연히 깨닫는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이生其心)',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라. 일체의 것에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활용하라. 집착할 필요가 없고 집착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로 마음을 쓰라. 이때 비로소 '평등즉차별, 차별즉평등'이라는 중도의 진리를 가장 선명하게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 말씀처럼 그 마음자리 밝히려 이영경교수님(자연과학대학 조경학과)은 정각원을 오르내린다. '저는 경을 읽고 염불하고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심자라면 마땅히 몸을 괴롭히고 마음 낮추는 법을 먼저 배웠어야 했는데, 절을 느즈막이 헌것이 후회가 됩니다. 저보다 더 지극정성인 남편의 권유로 절을 하게 되었는데 하면 할수록 힘은 들지만, 대신 몸은 밝아지고 마음은 더 평화로워져서 너무 잘한 일이다 싶습니다. " 함월사 우룡 큰스님께서 주신 가르침처럼 순하고 선하고 그리고 편안해지는 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학교 새내기 때, 故 이기영 박사로부터 천수경과 금강경을 익혔다. 그 인연으로 86년 미국 유학했을 때에도 '한국불교회'를 찾았었다. '하지한 그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에서의 선교활동은 적극적이다 못해 극성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미국 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받기 전에 이미 그들의 선교활동은 시작되었고 유학생활예서의 어려움을 거의 불편함 없이 도와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포교활동에서의 아쉬웠던 점을 더듬어 보면, 유학시절 정신적 위안이 필요했던 때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묵묵히 봉사하고 신행 활동하는 법우들을 만나면. 미안한 심정이라 한다. 제가 부처님 법을 따르면서 오로지 할 수 있는 포교는 학생들 열심히 가르치고, 부지런히 절하는 것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신명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경구(經句)를 질문했을 때, 서슴없이 천수경을 읊는다. "아약향도산(我若向刀 山)토산자최절(刀 山 自최절)아약향화탕(我若向화湯)화탐자소멸(火湯 自 消滅)"낮은 근기(根機)로는 감히 성취할 수 없는 경지라 그 길은 아득하지만, 법장보살의 서원과 같이 처음의 마음으로 갈고 닦아 업력의 미진이라도 펴 낼 수 있다면 일대사인연 중에 복 많은 사람 아니겠는가. 우리가 만약 도산지옥 가게되오면 칼산들이 스스로 꺽어지오며, 화탕지옥 가게 되오면 가는 지옥 스스로 없어지듯이. 아미타불은 전생의 법장비구(法장비구)였을 때, 사십팔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을 함은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 서원은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자悲)에 가득찬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보살행(菩薩行)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 실천행의 하나로 전공을 살려 환경보호와 전통사찰보호를 위한 '사찰환경보존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회는 1996년에 창단되었지 인 1999년에 정식 발촉식을 갖고 현장 파악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 일원으로사찰환경의 보호 대응책의 하나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려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본말사 주지스님을 중심으로 사찰환경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홍보와 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산과 물, 도량을 지키는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입장에서 사찰보호의 궁극적인 이유로는 첫째, 수행도량으로써 사찰의 원형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귀산수도'라는 말이 있듯이 자연을 지키는 것은 수행환경을 지킬 뿐만 아니라 자연과 함께 많아 가야 한다는 것이죠. 둘째로는 문화환경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문화관광의 차원에서도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의 것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사찰인데, 그런 차원에서도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무분별한 위락시설의 개발은 묵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든지 수승한 경관을 관광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할퀴고 간 흔적은 어렵사리 볼 수 있다. 우리의 정책이라는 것은 언제나 근시적인 안목으로 개발에만 머문다. 해인사 가까운 곳에 터널이 뚫리게 되면 밝은 공기 대신먼지를 먹을 팔만대장경과 봉암사 주변에 골프장공사가 시작되면 그 소음으로 멍들어 가는 參禪道場을 상상만 해도 가슴 서늘해진다. 이왕이면세계적인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보호하고, 봉암사를 보호하는 원시적(遠視的)이고 미래지향적인안목으로 진단하고 정책을 세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찰환경보호를 위한 법적인 면과 함께 성숙된 시민의식입니다. 양으로 개발하기 앞서서 질로써 자연을 보호하는 의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저의 걱정보다는 앞발 앞서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평가해서 사찰환경을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분들에게 송구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조경학자로서 부처님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연과 부처님 도량을 보호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반갑다. "우리 친정어머님께서는 제가 미국 유학 하던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낙산사를 언제나 다시가고 싶은 이유는 제가 유학 떠나기 전, 어머니와 함께 했던 마지막 여행지이기도 하지만 평생 관세음보살님을 사모하시던 그분의 신성이 묻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다시 가고 싶은 절은 단연 낙산사를 꼽는다. 그리고 일타 큰스님을 친견했었던 법도량 해인사도 자주 가고 싶고 멀리 선운사 도솔암은 다시 부처님과 인연을 돈독하게 했던 곳이다. '대학교 다니던 때에는 만배도 했었는데. 결혼해서 아이 낳고 하는 핑계로 절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사실 백 팔배도 힘겨웠습니다. 하지만 지난겨울, 그곳에서 삼천 배를 했습니다. 그때의 환회심이란 만배를 했었던 그때의 자신감과는 비교 할 수 없는 큰 종교적 체험이었고 그 힘으로 다시 온전한 불자가 되고자 심연을 맺은 곳이 아니었나싶습니다. "이영경 교수의 신행생활은 이른 아침 금강경을 독송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3년 동안 독송했었던 천수경 다음으로 11년 째 하는 것입니다. 나날이 새겨 그 뜻으로 세계관을 집 짓고 정신을 올곧게 한다. 경 읽고 염불하고 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낮추어 그곳에 함여있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내리는 일, 다만 잠시도 평화롭지 못했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업을 모두 내리는 연습을할 뿐이다. 부지런히. 이일체제상즉명제불(離一切諸相則名諸佛)모든 상을 여의라. 그러면 곧 부처라 이름하리라.

 

 


열린마당
의료봉사를 다녀와서/서창욱

심우회에 들어오고 나서도 의료봉사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방학때 의료봉사가 있으면 꼭 가겠다고 미리 약속을 해 두었지만 막상 의료봉사 일정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는 그제서야 갈등에 사로 잡혔다. 의료봉사는 왜 가는 것일까 하고. 하지만 한번이라도 가보지 않고서는 이 의문에 답을 할 수 없을 것 같고, 더구나 98학번에서 상필이 형 혼자 가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겠기에 이내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의료봉사를 다녀온 지금에 와서는 좀 알 것 같다. 앞으로 의료봉사를 더 거치면 해답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이번 의료봉사 기간동안 나름대로 겪은 일과 느낀 점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고 다음번엔 좀더 나은 의료봉사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조그만 좌표점 하나를 찍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경주를 떠나기 전날, 법우회'와 '마야'가한자리에 모였다. 봉사단장님과 심우회 회장. 마야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의료봉사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는 약재정리를 했다. 의료봉사 기간 동안 쓸 약재를 사용하기 좋도록 분류하고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저녁에는 성건동에서 간단한 술자리가 있다 고했다. 내일 출발하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사람들 간에 미리 얼굴을 익히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틀날 아침, 약상자와 필요한 기구들을 차에 옮겨다 놓고 연합의료봉사 발대식을 치르고 동아리별로 차에 올랐다. 심우회는 울진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울진까지는 간간이 차창 밖으로 시원한 바다를 보며 의료봉사 동안의 일을 상상해 보곤 했다. 목적지인 노음초등학교에 도착했을 때 심우회 의료봉사와 마야 어린이 교실을 알리는 안내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다. 조용하고 아담한 학교였다. 2층에 숙소를 정하고 1층에도 진료소와 어린이교실 장소를 마련하기도 되었다. 진료소에는 본진실과 예진실. 약제실을 설치하고 내일 봉사 첫 날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저녁식사 후에는 법회를 보기로 되어 있었다. 부처님의 뜻을 되새기며 봉사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이리라.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는 평소 정각원에서 법회볼 때 보다 훨씬 목소리들이 크고 낭랑했다. 거기까진 순조로웠는데, 가끔 겪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백팔배를 올리겠다고 했을 때다들 전혀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더구나 교실마루바닥에 반바지를 입은 체로 한 백팔배는그 결과를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백괄배를 끝냈을 때, 교실 바닥은 땀방울로 얼룩져 있었고, 무릎이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자세를 잡고 입정에 들어간다. 손을 모으고 조용히 앉은 채로 맞는 시골 저녁공기와 청량감은 백팔배로 흘린 땀을 식혀 주고도 남았다. 삐삐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다섯시 오분전, 내가 맡은 일은 식사당번 한마디로 짬팀이었다. 일곱 시까지 아침을 지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네 명이어서 우왕좌왕하며 얼렁뚱땅 밥과 반찬을 만들고 나니 예정보다 30분이나 일찍 끝났다. 이 때부터는 딴 걱정이 생겼다. 첫술을 뜨고는 일그러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떠올리며 과연 괜찮을까 하는 그런데, 이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교수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들의 걱정을 아시고 그저 맛있게 먹어주신 선배   동기들이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다. 오후에는 후원' 일을 하는 상필이 형을 도와 방충망 치는 일을 했다. 그때 정말 현동환선배님께서 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린 헛수고만 할 뻔 했다. 의료봉사기간 내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선배님께 다시 한번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밤이 되니 낮 동안의 피로가 몰려왔다. 딱딱한 마루바닥이지만 포근하게 느껴졌다. 새벽에 추울까봐 진료가운을 덮고 잤다. 내일은 이 옷을 입고 환자분들을 안내하게 되리라. 오늘 맡은 일은 '기도'. 실제로 의료봉사에 한몫하게 되는 것이다. 아홉시부터 진료가 시작되지만. 환자분들은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셨다. 대부분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셨는데. 가운입은 날 의사로 여기시고 안내에 잘 따라 주었다. 불편한 의자에 오랫동안앉아 기다리시면서도 불평 한마디 않으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서 있기가 힘들었지만, 그보다 환자분들한테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인다는 것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이교실만으로도 힘들텐데 의료봉사 일까지 도와주는 그러면서도 힘들다거나 귀찮아하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마야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약제'였다. 처방에 따라 약제을 짓는 일이다. 약을 짓는 데는 무엇보다 정성이 중요할 것임에도 일에 쫓길 때는 빨리만 지으려고 서둘렀던 것이 못내 아쉽다. 약을 짓는 사이에 시간을 내어 본과 3, 4학년 선배님들 진료하는 곳에 참관을 갈 수 있었다. 직접 뜸을 뜨고 침을 뽑아보도록 배려해주셨다. 의료봉사를 더 깊이 체험했던 시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었다. 난 다시 약제를 맡았다. 마지막 날이라 일주일치는 기본이고 심지어 한 달 치까지 짓는 것이 다반사였지 만, 선배님들이 많이 배려해 주셨다. 예정된 진료시간은 열두시 까지었지만, 약제일이 끝났을 때는 두시가 지나 있었다. 봉사를 끝마쳤을 때는 성취감, 그리고 큰 집을 던 것 같은 후련함, 또 아쉬움 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몰려왔다. 무사히 마쳐서 다들 기했다. 봉사가 끝난 지도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간다. 봉사 기간 중에 있었던 즐거웠던 일. 힘들었던 일들은 하나둘씩 잊혀져 가지만, 의료봉사가 나에게 남겨준 교훈들은 쉬 잊을 수 없다. 인의예지를 강조하시며 한의사 이전에 참된 인간이 되기를 강조하시던 교수님 말씀에서, 환자를 대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밤이 깊도록 혈자리를 짚어보던 선배님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힘듦에도 상대를 먼저 배려해 주는 선배님 동기들의 모습들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어렵게 얻은 것이니만큼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의료봉사였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음 의료봉사는 좀더 값진 봉사가 되길 기원한다.

 

 


일주문
말의 정도/이법산 스님

세상의 만물은 누구나 항상 자기표현을 하고 있다. 자기표현은 곧 살아 있다는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무도 풀도 돌도 흙도. 산이나 물도 모두가 자기표현의 상징을 나타내어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의사표현이 있지만 입으로 하는 말은 더욱 설득력 있고 문자로도 형상화되어 글로 쓰이고 있다. 말은 여러 가지아름다운 그림도 그려내고 소설과 시도 쓰며 노래를 불러 즐겁게도 하며, 칭찬을 하여 남을 기쁘게도 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표현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을 죽이고 자신을 죽일 수도 있으며, 남을 법들고 고통스럽게 하고 욕하고 모함하여 죄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말은 진실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것도 진실이요 가장 존경받을 수 있는 것도 진실된 것이다. 진실은 곧 성(聖)스러움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만이 진실과 가식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은 인간의 몫이며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희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행(幸)과 불행(不幸)을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바라는 것은 행복이지 불행이 아니다. 말은 마음대로 행과 불행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말이 진실될 때 행복해지는 것이지 가식을 들어내면 곧 불행해진다는 것도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대집경(大集經)에 나오는 부처님과 보녀동자(보女童子)의 대화를 들어보자."진실이 란 무엇입니까?"

"진실에 세 가지가 있으니. 부처님을 속이지 않고. 자기를 속이지 않고. 사람들을 속이지 않음이다. ""그러면 진실한 말이란 어떤 것이옵니까?"말을 많이 하지 않고, 말을 조심하고. 거친 말을 쓰지 않은 것이 진실한 말이니, 너는 진실한 말을 익히도록 하라."부처님은 진실이며. 자기의 본심(本心)역시 진실이므로 본심을 속인 말은 남을 잘못되게 하는 말이요 남을 속이는 말은 곧 자기의 진실을 가린 망심(妄心)에서 조작된 것이므로 진실되지 못한 말은 자신을 속이고 부처님을 속이는 결과가 된다. 말이란 진실을 들어내는 수단이며 바른길(正道)을 가리키는 방편이다. 말이 많거나 거칠면 진실되지 못할 수 있으니 말을 조심하여 항상 진실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화엄경(華嚴經)에 해야 할 말과 버려야할 말의 예가 제시되어 있다. "소위 해치는 말(毒害語), 거친 말(추광어). 남을 괴롭히는 말(苦他語), 남으로 하여금 원한을 품게하는 말(令他瞋恨語). 저속하고 나쁜 말( 惡語), 용렬하고 천한 말(庸賤語). 이런 말들은 다 버리고. 늘 정다운 말(潤澤語), 부드러운 말(柔軟語), 듣기 원하는말(可樂聞語). 듣는 사람이 기뻐하는 말(문者희悅語). 사람의 마음에 잘 받아들여지는말(善入人心語). 멋지고 도리에 맞는 말(風雅典則語), 시기에 맞는 말(時語), 분명한 말(審語), 진실한 말(實語), 도리에 맞는 말(義語), 정법을 설하는 말(法語), 잘 조복하는말(巧調伏語), 때에 따라 헤아려 결정하는말(隨時籌量決定語) 등을 즐겨해야 한다. 보살은 웃을 때라도 늘 자세히 생각하나니, 어찌 하물며 굳이 어려운 말을 함부로 하겠는가?"말은 하고 싶다고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말이란 언제나 해야 될 말인가. 해서는 안되는 말인가를 반드시 잘 생각하고 선별해야한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본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말하는 자리에 만가면 말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냥 해버리는수가 많다. 생각 없이 하고 난 후 아차 하고 뉘우치는 일이 많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말은 참으로 좋은 도구이다. 깨달음의 길을 일러주는 도구요 남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악기와도 같은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말은 활인도(活入刀)와 같은 것이며. 남을 모함하여 죽이는 말은 살인도(殺人刀)와도 같은 것이다. 말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쓸 말을 해야하며, 화합하는 말이어야 남이 듣기를 좋아한다. 설사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설득력 있는 말로써 남이 듣고 이해하도록 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하지,남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남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한다면 진실된 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은 대단히 필요한 생활의 도구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대단히 불편하다. 남이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답답한 마음은 참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기 어려울 때가 많다. 능가경(楞가경」에서는 종통(宗通), 즉 부처님의 종지를 깨달아 통달할 것과 설통(說通), 즉 진실된 말을 하여 부처님의 종지를 깨닫도록 하는 말, 다시 말하자면 진리에 의한 말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다. 진리에 적합한 말은 누가 들어도 수긍이 가고 설득되는 위력이 있다. 남의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은 분명 나의 진실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가려진 진실에. 잘못된 생각에서 튀어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진실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설통(說通)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자기 말을 남이 들어주지 않고 긍정하지 않는다면, 허물은 말한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청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심(眞心)에는 화를 내는 마음이 있을 수도 없으며 진실된 말에는 수긍 안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 진실된 말은 누구나 듣기 좋고 들어서 즐겁고 받아들여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은 모두가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이 진실될 때 모두가 보고 듣고 즐거워하고 더불어 화합하며 함께 기매하는 바른 길이리라.

 

 


신행상담
실상/장계환 스님/불교대학 교수

법사스님의 법문 내용을 현실생활에 적용시키고, 또한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여서 반갑습니다. 실상(實相)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의 "참 모습" 또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혹은 '진실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본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해서 (법화경)의 중심적인 교설이자 천태교학의 핵심사상을 대표하는 전문용어이기도합니다. 즉 모든 존재는 그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그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대승불교를 일관하는 근본사상으로써 소승불교의 삼법인(三法印)에 대해 대승불교의 일법인(一法印)이라고도 합니다. 문제는 실상을 바로 보아야 된다는 법사스님의 말씀인데, 결국 우리가 실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왜 실상을 똑바로 보지 못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모든 것에 구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기분에 의하거나. 혹은 주변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 사물을 잘못보거나 왜곡되게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법을 한번 예로 들어 볼까요? 여기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이때, 학수군은 색깔을 먼저 보나요? 아니면 꽃 모양을 봅니까? 다같이 한꺼번에 본 다구요? 그건 결코 정답이 아닙니다. 아니, 틀린 답이라기보다는 한꺼번에 본다고 착각을 일으키고 있을 뿐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 간에 실은 한 가지 밖에 보지 못합니다. 이 꽃만 해도 색깔을 볼 때는 모양을 보지 못하고, 모양을 볼 때는 꽃의 색깔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그 시차(時差)가 너무나 짧기 때문에, 그 찰나적인 시차 (즉 꽃 모양을 보고나서 색깔을 보는 짧은 순간의 시차)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한 쪽만을 보고 있으면서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상의 이면에 있는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인(因)과 연(緣)의임시적 화합을 실체로 생각하고 거기에다 집착하게 됩니다. 한번 뒤돌아보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상표에 구애되어 물건을 사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여 불필요한 허세를 부리고,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 무리한 일을 감행하지는 않았는지요. 이 모두가 우리들이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들 입니 다. 요컨대 사물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고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르계 사는 삶의 방식인 동시에 실상을 바로 보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가람의 진수
서악의 명찰, 갑사/ 유문용

고려가 개경 즉 개성에서 도읍을 천도할 때도 계룡산 밑에 자리를 잡으려다가 한성으로 도읍을 정했다는'이야기는 다 알만한 이야기이다. "갑사중수기"에 봐도 오악(五岳)중에 서악(西岳)으로 꼽히는 계룡산에 형국이 닭이 홰를 치고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계룡(鷄龍)이라 하였고 거기에 있는 산사에 불전과 범우의 종소리와 풍경소리가 우렁차서 가히 으뜸에 절이다 하여 감사라 했다라고 한다. 이 절이 처음 지어진 것은 백제 구미신왕원년인 4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 했다는 기록이 있고 무념왕 3년 503년에 천불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통일신라 문무왕때에는 의상대사가 당우 천여 간을 확장 중수해서 국내 최대에 가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확실시 되고 있는 것은 이 갑사에 있는 철 당간(幢竿)이 경내 어구에 남아있어서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신라 말 최치원이 찬한 "唐大薦福寺故寺主蒜經大德法藏和상전에 쓰기를 해동에서 크게 불법(화엄)을 가르친 곳 열 곳을 열거한중에 "계룡갑가 포함되어 있다. 최치원이지목한 '십산십찰(十山十찰)"은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 화엄사, 북악 부석사. 강주 가야산 해인사, 보광사, 웅주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양주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전주 모악산 귀신사, 한주의 청담사등이다.

이 대 가람이 고려시대까지 융성한 법통을 이어 왔는데 조선조에 와서 세종대왕이 밭을130결이나 하사를 해서 대 가람의 운영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이 절에 계시던 영규대사가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조헌과 같이 큰 전과를 올리고 금산성싸움에서 전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5년 뒤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이 대 가람이 모두 소실된 것이다. 그 후 7년 후에 사승들이 힘을 합해 가람을 다시 중건했는데 옛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계속 대 불사가 이루어저서 효종 5년 1654년과 1659년, 1797년, 고종 때에 1875년, 1899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중수가 이루어져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 갑사에는 약 250매의 경판이 보존되고 있는데 이들 중엔 선조 2년(1569)에 판각된 월인석보판목(보물 제582호) 46매를 비롯해서 조선전기에 제작된 경판이 약 70여매 전승되고 있고 보물 478호로 지정된 동종(銅鐘)도 잘 남아 있어서 한참 융성했던 시기에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갑사를 들어가면서 보면 절 뒤의 능선에 구룡봉을-비롯해서 연천봉 연화봉 수정봉이  굽이굽이 둘러서 있다. 이 절은 계룡산 국립공원에 같이 있어서 이 길로 올라가면 용문폭포도 있고 은선 폭포에 구산 구곡을 오르게 되어 있다. 산이 절경이고 들어가는 길싶이 우거져서 참나무. 떡갈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에 고목들이 즐비 하다.

갑사는 크게 4개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대웅전 지역과 팔상전 지역, 표충원 지역, 대적전 지역이 그것인데, 이들 각 지역은제각기 독립된 성격을 지니면서 이를 종합하면 다시 갑사 가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들어가는 길은 새로 만든 큰길로 들어가지 않고 첫길인 오른편 샛길로 접어 올라가는 것이 정상적인 입구가 된다. 이곳에는 당간(幢竿)과 지주(支柱)가 있다. 이 당간은 보물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귀한 성보문화재라고 볼 수가 있다. 이 당간에 높이는 약 15미터에 이른다 고하는데 당간에 마디가 24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원래는 28개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고종 35년 1899년에 폭풍우로 인해서 4개의 마디가 떨어져 없어졌다고 한다. 원래 이 당간을 만들 때에는 이렇게 높은 당간을 한 개로 주물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당간을 만들어 올려 세울 때는 마디 마디로 따로 만들어서 조립을 하게 되는데 한 개에 마디의 높이가 대체로 62센티 정도 되니까 옛날치수로 보면 2자가 된다. 언뜻 보면 꼭 대나무를 세워놓은 것 같이 보이지만 곧고 강직한대나무를 상징했다고도 생각해 볼 수가 있겠다. 좀더 올라가 보면 널찍한 마당에 대적전이라는 집이 보이고 그 앞에 부도가 하나 서 있다. 이 석조 부도도 보물 267호로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재 인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철당간과 같은 시대로 보인다. 이 부도가 사실은 법당 앞에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는데 부도가 법당 앞에 있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이 부도는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갑사에 부속 암자인 중사암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시대에 유행하던 팔각원당형에 전형적인 부도인데 이 원당형이라고 하는 말을 잘 해석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에 사리를 봉안하거나 국사나선사, 왕사 그리고 고승대덕들의 성골(聖骨)을 봉안할때 다른 나라에서처럼 무덤이라는 개념에 둥근 모습에 부도를 만드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인도에 싼치탑과 같이 '무덤형식의부도가 아니다. 불사리를 봉안하거나 성골사리를 봉안 할 때에 집에 모양으로 유택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는 것이 가장 특징적이다. 팔각정의 집에 모신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원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부도에 기단부에 있는 연꽃 조각은 뭉게구름 속에서 용이 나르는 그런 아주 볼륨이 큰 조각을 해서 실제 상황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대석은 팔각으로 정연하게 다듬었고 그 위에 기단부는 3개단으로 했는데 밑에 단에는 팔각에 각 모서리에 큼직한 연잎을 실감나게 깊은 조각을 했고 그 사이에 각 면에 모두 다른 형상으로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그 위에 운용문(雲龍문)에 조각도 볼륨을'매우 크게 했는데 뭉실뭉실한 구름 조각을 하고구름사이에 용이 굼실거리는 모양이 실제 살아있는 용에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이 부도 바로 뒤에 있는 대적전은 조선 순조 26년 1826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앞에 걸려있는 현판에 "도광 6년 4월 목암서"라고 되어 있어서 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갑사에서 대웅전을 보기에'앞서서 이 대적전이 있게 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대적전 왼편에 반듯한 대지가 있는데 여기 보면 고려시대로'보여지는 주출돌들이 많이 노출이 되어 있어서 아마 원래  이 자리가 금당자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는 곳이다. 이 집은 전면과 측면이 거의 비슷한 비교적 정방형에 가까운 매우 큰 집인데 팔작집으로 해서 그 위용을 갖추고 있다. 이 집은 사면에 문짝들이 나 있다. 3칸 중에서 뒤쪽으로 한 칸을 아주 막아서 별개에 온돌방을 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대적전에서 왼편으로 뒤를 돌아서 나가면 대웅전 권역으로 가게 된다. 돌계단을 내려서서 보시면 오른편에 집이 한채 서 있다. 지금은 요사채로 쓰고 있지만 요사채로 보기에는 매우 화려한 집이다. 이 집은 별장이었던 집으로 보여진다. 조선조 말기에 일제시대에 권문세가(權門勢家)를 누려오던 윤덕영이라는 사람이 여기 감사에 와서 그 풍류가 넘치는 계곡과 계류를 보고는 여기에 임천정원을 꾸미고 별장을 지어서 노년기를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에 왕후 윤비에 백부되는 분이라고 하는데 친일 활동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라고 한다. 서울에도 옥류동에 별서 정원을 꾸미고 별장을 크게 짓고 살다가 노년에 미 계곡에 별장을 짓고 정원을 꾸몆는데 계류에1"』막고 연못을 만들고 이 계류를 따라 원쪽에 용문폭포까지 정원으로 삼아 꾸며놓은 것 같다. 이 요사가 있는 자리가 계곡을 앞에 두고있어서 아주 운치 있는 분위기이다. 연못을 중심으로 해서 집 주변에 나무들도 은행나무를 비롯해서 느티나무, 팽나무, 소사나무, 서나무, 단풍나무, 백일홍 등을 심어 원림(園林)을 잘 꾸며놓았다. 대적전에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편으로 약간 높은 곳에 계단이 있는데 이 위에 해탈문이 보인다. 여기가 이 갑사에 중심 가람이 된다. 이 갑사에는 들어올 때 다른 절에서처럼 일주문이나 천왕문의 절차를 밟지 않았다. 갑사의 첫 산문이 해탈문이 된다. 이 해탈문은 2단에 축대 위에 서있는데 원래 이 해탈문은 나중에 지어졌고 뒤에 보이는 강당 자리에 정문이 있었다고 강당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해탈문은 꼭 살림집에 들어서는 대문채같이 지어졌는데 5칸 집에 가운데 칸이 주 출입문이기 때문에 지붕을 높게 솟구친 솟을대문으로 했다. 지붕이 위로 솟아 있어서 솟을대문이라고 한다. 가운데 출입칸에 판대문을 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는 절 이기 때문에 굳이 대문을 달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개방을 해 놓았다. 어 해탈문에 지붕이 좀 특이하게 되어 있다. 솟을지붕 양 옆의 지붕 끝을 팔작지붕으로 해서 철저한 문에 개념보다는 당우(堂宇)에 모습을 갖춘 것 같다. 그 뒤에 있는 강당은 좌우에 진해당이라는 요사와 적묵당이 바싹 붙어서 나란하게 서 있어서 절안을 감싸고 있다. 이 강당은 얼마전에 해체보수를 한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상량문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 상량문에 보면 원래가 이 강당이 이 절에 정문이었다고 되어있는데 후에 이 문을 개수해서 강당으로 했다고 한다. 그 후에 솟을문을 짓고 해탈문이라고 한 것 같다. 이 기록에 보면 이 집이 지어진 것은 만력(萬曆)42년 그러니까 광해군 6년 1614년에 지어졌고 1798년 1890년에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본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강당 전면에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절에 산문의 역할을 대신한 것 같다. 이 권역에서 주전법당이 되는 대웅전은 선조 37년 1604년에 지어졌다고 하고. 효종 5년1654년에는 가람에 전반적인 개축과 증축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 12년 1875년에 대불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대웅전은 충청남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105호로 되어 있다. '각 지방에 道 단위로 지정된 문화재를 보고시  도 지정문화재라고 한다. 여기 갑사에는 목조건조물로는 이 대웅전이 시  도 지정문화재이고 강당이 시  도 지정 유형문화재 95호로 그리고 대적전이 시  도 지정 유형문화재 10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대웅전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어서 매우 중후감이 있는 건물이다. 그라면서도 집에문짝들을 소박하고 서민적인 띄살문으로 해서 친근감을 주고 있다. 대웅전에 전면에 문짝들이 모두 들문으로 되어 있어서 법당에서 큰 법회가 있을 때 이 들문들을 활짝 들어 올려, 수많은 불자님들이 법당 밖에서도 예불을 드릴 수 있게 하는 특수한 시설에 문으로 되어 있다. 이 들문은 궁전이나 일반 사가(私家)에서 주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대웅전에도 포작은 중후한 다포집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여 중후감을 돗보이게 하고 있다. -이 대웅전이 다른 법당과 다른 것은 뒤편과 양 측면 모두 벽을 토벽으로 하지 않고 모두 나루널판에 판벽(板壁)을 했다는 것이 특정이다. 다른 법당과 또 다른면은 사면(四面)으로 문짝들이 난 건물이라는 데에서 특징을 발견 할 수 있다. 대웅전에 계시는 부처님은 주존(主尊)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계시고 왼편에 아미타(阿彌陀), 오른편에 약사(藥師)부처님이 계시는 삼존블(三尊佛)을 모시고 있다. 그 사이사이마다 협시보살님이 보처하고 계시는데 문수(文殊), 보현(普賢), 관음(觀音), 세지(世智)보살님이 보처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뒤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하시는 법회에.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는데 여기에도 주존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고 문수, 보현보살님이 협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4대보살님 이 있고 제 석 천(帝釋天)과 대 범 천(大범天). 사천왕(사天왕), 십대제자, 팔부중(팔部衆)들이 망라해서 계시는 후불탱화로 되어 있다. 아미타 부처님 뒤에도 극락정토 회상도가 있고, 약사부처님 뒤에도 동방에 유리광 세계에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후불탱화가 따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오른편 벽에는 삼장탱화하고 신중탱화를 봉안했고 왼편 벽에는 현왕탱화라는 것이 걸려 있는데 감로탱화와 같은 성격의 탱화이다, 이 대웅전에 후불탱화들은 옹정 9년 1730년 영조-6년에 그려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장탱화는 광무 9년 고종 42년 서기로는 1905년에 '그려졌고 현왕탱화는 융희 4년 1910년인데 우리나라 조선조에 마지막 왕인 순종4년으로 국치를 당하고 일제시대로 넘어가던 해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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