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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44호 / 불기 2542(1998)년 12월 1일 발행

 

   

 

이달의 법문

수계/오녹원 큰스님

 

정각도량

다시 선 벼랑 끝에서/ 이법산 스님

 

특집1

[자아와 명상]강좌의 의미/ 정성본

 

특집2

자아와 명상수업이 나아갈 방향/ 유진

 

특집3

인격형성에 있어 남을 수 있는 교훈 /권기현

 

화엄경의 세계

만물의 주체는 무엇인가-유심사상/ 도업스님

 

만나고
싶었습니다

복지경제학의 붓다/ 정승석(번역)

 

가람의 진수

태고종의 본산 봉원사 / 유문용

 

신행상담

"참회"/ 장계환 스님

 

수행의 길

불교의 수행은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
/
정성본스님

 

열린마당

중도/ 윤주억

 

신간안내

화엄경 사상 연구/ 이도업스님

 

 

 

 

이달의 법문 
수계/ 오녹원 큰스님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여러분과 함께 위로는 많은 불보살님과 여러 율사님들, 조사 임들이 증명하는 가운데 이 금강계단에서 증명법사 청운 대화상, 그리고 또 불국사 주지스님이신 선방 대화상 등 삼사(三師)가 여러분의 수계를 위해서 이 금강계단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계를 받는 동국대학교 교수, 학생, 교직원, 그 밖의 수계 지원자들과 원력으로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이제 이 순간부터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원력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계를 받았을 때와 안 받았을 때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수계법회는 다음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째는 수계법회에 참가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인연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원력이 있어야 되고, 세 번째로는 신심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한 가지라도 결여된다면 이 수계법회에 여러분들은 동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결실이 맺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증사석(證師席)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1000명이 넘는 1400여 명이나 되는 오늘 수계제자가 수계를 하게 된 것은 위로는 부처님의 가호요, 여러분들의 신심원력이요, 더불어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준 정각원장 법혜스님, 그리고 함께 이 자리를 주선해 주신 교법사 성본스님, 그리고 우리 경주캠퍼스 김갑수 부총장님을 위신해서 관계자 여러분, 또 오늘은 이 자리를 위해서 바쁘신 와중에도 송석구 총장님이 함께 자리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연히 응립된 가운데 오늘 수계 식을하게 된 것만 하더라도 이 자리에 동참한 여러분들은 대단히 행복한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이 수계 식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에 수계를 잘못 받아도 태산 같은 허물이 있고, 또 계를 설하는 법사가 계를 잘 못 설해도 큰 허물어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계를 설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아쉽게 생각 하지만 짧은 시간일지라도 여러분들께 이 수계공덕을 함께 성취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삼사 앞에서 수계를 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수계사로 청했으니, 우리들 삼사는 여러분을 위해서 수계사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 여러분들이 수계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관에서 좋은 것은 살려야 되지만, 좋지못했던 허물은 깨끗하게 청산하는 마음의 각오뿐만이 아니라 진실로 부처님 앞에 과거의 잘못을 다 드러내서 참회 맹세하고, 앞으로 그릇된 인생관을 가지고 살지 않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컨대 깨끗한 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과 같고, 깨끗한 유리병 속에 밝은 달빛이 담겨서 안팎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과 같아서 여러분들은 안팎의 허물이 없는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런 각오로써 오늘 이 계단(戒壇)에 임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양적으로는 허공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고, 질적으로는 햇빛과 달빛이 이 우주공간에 충만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넓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을 아는 데는 믿음(信)이 필요하고 지혜(慧)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계를 받는 의의입니다.

믿음 없이 사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고 허무하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앎이 없이 사는 사람,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적으로 사는 사람처럼 인생을 헛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실천해서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야 되는데, 실천 없이 인생을 헛되게 사는 사람과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허무하게 돌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계를 받는 인연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정신과 사상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이 어디로부터 나오느냐, 전부 마음씀씀이에 따라서 창출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대자대비의 사상으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들 수 있는데, 이 네 가지의 한없이 무량한 마음, 곧 중생들을 사랑(慈)하는 마음은 인자한 얼굴로서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불행을 당했을 때 슬퍼(悲)하는 마음, 중생이 기뻐(喜)할 때 함께 기뻐하는 마음은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니, 내가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또한 인생생활에 있어서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은 남으로 하여금 즐겁게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비심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등입니다. 남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것, 베푸는데 있어서도 아낌없이 베풀어야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베품이 일어나야 됩니다. 요즈음 철로가에서 놀다가 기차가 와서 위험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을 구제하다가 그 사람을 구제하고 자기는 그 자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까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계를 받는 마음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 들어간 중생들을 위해 지옥을 없애기 전에는 서원코 성불을 아니 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또는 '금강명경(金剛明經)' 이라는 경에사심품을 보면 옛날에 살라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맏형과 중형과 백형, 삼 형제가 산상에 놀러 갔는데, 새끼를 7마리를 낳은 암호랑이가 먹을 것이 없어서 아주 굶어 죽게 됐습니다. 그래서 위에 두 형은 겁이 나서 달아나 버리고, 이 살라라 왕자는 내가 부처님 말씀을 들어 보니 '저렇게 어려운 지경에 다다른 생명들에게는 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베풀어라', 이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 내려서아사상태에 있는 암호랑이를 구하게 되고, 7마리의 호랑이 새끼도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어떠한 존재입니까? 사람이란 만물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살기 위해서 나왔지요? 죽기 위해서 나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의 큰 덕, 가장 큰 덕은 무엇이겠습니까? 살리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의 반대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이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고, 죽이는 것은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계를 받는 것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판단이 된 것이지요. 살생을 안 한다는 것이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천지에 하늘과 땅,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지요.

여기에 가장 큰 덕이 무엇이겠습니까? 생(生), 살리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살리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든지 희망에 만족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희망에 만족하지 못해 자살까지 하려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희망을 채워주는 것을 은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뜻대로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을 다 은덕이라고 하지요. 그렇지요? 희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죄이며 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들은 이 대자대비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불교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60억에 가까운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격이 수송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천(人天)에 가장 수송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에 긍지를 갖고 오늘부터 불자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정각도량
다시 선 벼랑 끝에서 / 이법산 스님

세월은 끝이 없고, 세상은 한이 없지만 인간은 미련하게도 시간의 매듭을 짖고 공간에 집착을 가져, 스스로 만든 한계에 자신을 꽁꽁 묶어 놓고 괴롭다고 아우성치며 슬프다고 통곡하고 있다.

또 한해의 끝 날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후회와 미련에 섭섭한 마음을 돌이킬 틈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새로 운한 해를 맞아야 한다.

해마다 오는 당연한 시점인데도 어리석은 인간은 허둥대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해의 마무리에 와서 마치 인생의 벼랑 끝에 선 듯 초조와 불안으로 괴로워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마음을 맑게 개인 하늘처럼 고요한 호수 같이 되어보자. 울려다 보고 내려다보아도 총총한 별과 밝은 달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겨 주리라.

구름이 허공을 차면 달도 별도 하늘에 보이지 않고, 호수에 물결이 일렁거리면 달그림자, 산 그림자도 찾을 수 없네.

우리 모든 일체 중생 하나하나의 마음은 본래 저 맑게 개인 하늘과 따뜻한 태양 같으며, 밝은 달 빛나는 별처럼 분명한 것이 근본 자성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 본래를 쫓아 평등한 것이므로 어떠한 차별도 없고 모두가 평등 하무로 갈등과 시비도 없고 괴로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가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설사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과거나 미래를 살펴보면 괴로웠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지울 수 없다. 인간에게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종말의 시간, 아니 차라리 종말이었으면 하는 괴로움의 불안과 초조에 사람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세상은 인간의 것만이 아니다. 인간이 세상을 소유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존재는 인간일뿐이다. 인간 외에 그 누구도 과다한 소유욕을 가진 존재가 없다. 어떤 동물이나 미물들도 자기의 영역이 있겠지만, 모두가 자기 영역에 대한 생활의 안정에서 자연현상에 적응하여 만족한 삶을 영유하고 있을 뿐, 남의 영역을 무참히 침공하거나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모든 생명과 더불어 생활하며 생멸하고 있다.

오직 인간은 세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망각 때문에 영리한 두뇌로 세상의 온갖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와 범죄를 행해 놓고 돌아올 과부 앞에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것 같으나 실은 가장 어리석은 존재다. 불안과 초조로 미래의 불행을 고민하는 인간, 그 고민 때문에 개인주의 자기의식에 도취하여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동시에 남으로부터의 침공을 방어해야 할 자기 보호에 급급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안한 존재일까?

부처님께서 『법률삼매경(法律三昧經)』에 말씀하셨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직 남의 악(惡)을 볼 뿐 자기의 악을 알지 못하며, 오직 자기의 선(善)을 볼뿐 남의 선을 볼 줄 모른다. 제 지혜를 자랑하는 자는 다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며, 밝다고 자처하는 자에게는 오류가 많으며, 내가 경(經)을 안다고 장담하는 자는 믿을 것이 못된다. 부처님의 지혜는 광대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인데도 견문(見聞)이 미미한 주제에 자만한 생각으로 스스로 자랑한다면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극한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좋은 스승을 가까이 해야 지혜 있는 사람이 된다.''

사람들에게 지혜롭다고 하면 좋아하고, 선하다고 하면 반가워한다. 이때 듣는 자는 그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내가 과연 지혜롭고 선한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지혜로워지고 선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1년을 돌아보지 말자. 한 해가 끝나는 것만이 끝이 아니다. 하루의 끝도 있고 주말(週未)도 월말(月未)도 있다. 아니 그 보다 우리의 목숨은 호흡을 들이 쉬고 내 쉴 때가 있지 않는가.

인간 생명의 존재가 호흡기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만에 도취한 어리석음의 욕망 때문에 화를 내고 시비를 일으키고 편을 가르며, 투쟁과 파괴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망상을 일으키고 있다. 세상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다. 만물과 더불어 살고 이웃과 함께 사는 공동 공간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며 그 동안의 모든 악습과 어리석은 욕망일랑 그믐밤 어둠에 몽땅 묻어버리자. 「끊어진 곳에서 생을 찾아야 한다(絶處逢生)」고 하였다.

벼랑 끝은 새로운 생명을 싹 틔어 준다. 열린사회, 넓은 미래는 모두 뒤쫓아 가는 후배와 후손들의 것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미래에 희망을 심어 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특집1자아와 명상
「자아와 명상」 강좌의 의미 / 정성본

동국대학교에서는 불교의 정신을 이해하고 참된 자아의 개발로 지혜와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불교관계의 교양강좌로 「불교와 인간」과 「자아와 명상」을 설정하였다.

불교의 근본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개설된 과목이「불교와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자아와 명상」은 이러한 불교 정신을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직접 배우고 익혀서 불법(佛法)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여 불교정신을 통한 인격형성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강좌인 것이다.

곧 불교정신을 구체적인 실천과 실습을 통해 참린 자아를 자각하고, 올바른 인간관을 확립하여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한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정신의 자기화 하는 「자아와 명상」이라는 과목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지 않으면 그 과목의 설정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정신의 진정한 자기화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교육과 실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인가? 불교의 실천 수행법은 다양하게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수행은 역시 좌선(坐禪)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존재를 자각하는 일에서 자신의 현재 위치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여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현재 위치와 존재를 확인하고, 또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좌선을 통한 자기 사유인 것이다.

「자아와 명상」 수업에 관련된 것으로 예전에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 유학하면서 인상 깊게 기억되었던 점은 대학 선원(좌선당)과, 그 곳에서 강의하는 좌선실습이라는 수업을 아주 엄격하게 담당하는 사카이(酒正) 선생의 교육정신이다.

먼저 좌선당이 선원청규(禪院淸方崑)에 의거하여 좌선수행을 할 수 있는 선원의 분위기로 시설되어 누구라도 그 곳에 들어가면 앉아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사유하여 자신을 자각하고 싶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사카이 선생의 좌선 실습수업은 5분전에 좌선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도록 하고, 현관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이후에 오는 학생은 결석처리가 된다. 한번이라도 결석하게 되면 일 년을 다시 재수강해야 하는 엄격한 수업으로 소문난 선승(禪僧)이기도 하다. 따라서 좌선 실습의 학점 따기가 가장 어렵고, 이 시간에는 언제나 신경을 바짝 차려 만사를 젖혀두고 수업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선, 후배 사이에 널리 알려져 오고 있다.

불교의 정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철저한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록 일 주일에 한 시간이라는 짧은 수업이지만 좌선을 통해 자신을 자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하고, 근원적인 자아를 깨달아 지혜롭게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실천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좌선을 통한 자아 개발과 인격 형성을 교육하는 대학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동국대학교 뿐이며, 동국대학교에서만이 할 수 있는 수업이다.

불교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하는 동국대학교의 특성화는 이러한 좌선을 통한 인격교육, 자아개발의 인간 형성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아와 명상은 특정 교재도 없고, 강의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교수님들도 있지만, 사실 이 과목은 교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좌선의 실천 수행방법을 체득하고 생활화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불교와 인간」이라는 과목이다.

「자아와 명상」은 불교의 정신을 구체적인 실천방법과 수행을 익히며. 직접 체득하도록 하는 수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수가 책을 들고 강의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이 각자 좌선을 통해서 자아를 자각할 수 있는 방법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각자가 자신을 자각하고 참고해 보는 진정한 인격교육이 될 수 있는 자신들의 참된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수업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매주 한 시간의 수업을 매주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천과 수행은 끊임없는 반복에서 익숙해지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습성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학교에서 익힌 것을 평생 살아가면서 실천하고 자기생활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수업 시간을 배정해 보면 50분 수업 가운데 5분은 합장(合掌)과 예배로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고, 10분은 좌선의 자세나 정신을 간략히 제시하며, 20분은 직접 좌선을 통해서 사유하고 자신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좌선을 마치고 5분 정도는 선제 조로 경직된 신체를 부드럽게 안마하여 전신을 풀어 주며, 10분 정도는 좌선의 실천을 통한 학생들의 반응과 의문점과 잘못된 점 등을 바로 잡아 주는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즉, 전체점검인 것이다.

「자아와 명상」은 단순히 학교의 수업으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수업을 통해서 익히고 배운 인연과 수행으로 자신의 불교정신을 통한 인생관을 확립할 수가 있도록 하고, 올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5분 내지 l0분 싹은 침실에서 좌선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가치 창조를 향한 사유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강조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자각을 통해 지혜롭게 해결하는 수업의 연장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교수님들의 원력과 사명감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또한 다른 수업처럼 학문과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가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만 남의 인연이 이루어지는 수행의 현장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불교적인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집2 자아와 명상
자아와 명상 수업이 나아갈 방향 / 유진

동국대학교에 들어와 1학년 때 배웠던 교양필수과목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 과목은 '佛敎學慨論' 이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교에 발을 들여 놓기 이전에 알고 있었던 기복적인 불교와 그 책에서 보고 교수님과 함께 배운 철학적 불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때, 그 과목의 이륜은 없어지고 '佛敎와 人間'으로 교과 과정으로 바뀌었지만 내용은 똑같다. 또, 1학년 2학기 때는 교양필수과목으로 '輅敎와 文化史'를 배웠는데, 지금은

 그 과목이 없어지고 대신 '자아와 명상'이 개설되어 있다.

인간의 청정한 본성을 등진 채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 자신의 참된 모습을 잠시나마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자아와 명상' 과목이 신설된 것은 매우 잘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강의를 마치고 법당을 돌아설 때 마다 아쉬움과 석연치 못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좀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하고 숙고하던 중, 이번 경주캠퍼스 정각원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점과 강의 내용 및 강의 방법 등을 몇 자 적어 볼기회가 생긴 것 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한다.

우선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체계적으로 선(禪)을 실수(實修)할 수 있는 교재가 없다는 점이다.

교재가 없는 상태에서의 수업은 마치 항해도와 나침반 없이 선장과 선원이 망망대해(茫茫大每)에서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분명히 설정이 되어 있지만 갈 길이 막막하지 않을 수 없다.

교재란 교수가 없는 교육(敎育)의 장(場)에서는 교수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피교육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닦는 공부는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캠퍼스를 떠난 후에도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옆에 두고 참고할 수 있는 알찬 지침서를 편찬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다음, 평가방법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교재도 없고, 시험도 치지 않고, 전공과목도 아니고, 오직 출석으로써만 평가를 하다 보니 학생들이 이 강의시간을 소홀히 하여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오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매 시간마다 4분의 1 이상이 결석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내증(內證)의 세계를 종이 한 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출석 하나만으로 통과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히 평가하는 방법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학생들의 열성도 높일 수 있고 학습의 효과도 가져올 수 있는 좀더 구체적인 평가방법과 제도적인 장치가 새롭게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수업의 진행방식이 50분 중 약 15분가량은 참선에 대한 기초 지식, 즉 좌선의(坐禪儀)와 참선의 방법 등에 대하여 지도한 후 나머지 시간은 학생들이 스스로 실습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처음에는 15一20분 정도를 좌선하고, 10분 정도는 법당 내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등의 방법을 취하여 몸을 풀면서 진행해 나가다가 점차 좌선하는 시간을 늘여가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해 가면 좋을 것이다. 아마도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앉는 자세일 것이다.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신체의 균형이 깨어져 몸에 병이 올 뿐만 아니라 정신이 산란해지기 때문에 우선 앉는 자세부터 정확히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몸을 단련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만 수업을 이끌어 나갈 때 학생들이 쉽게 권태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촉발시킬 수 있는 옛 고승들의 선이(禪異). 전기(塼記) 등을 담은 이야기를 직접 들여주거나 영상매체를 이용하면 학습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커다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마음자세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제도적인 장치가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만사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학문을 하는 목적은 결국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학문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행복은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행복은 안겨다 주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바깥의 물질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복잡한 세계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칫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 중에서도 본래의 참된 자아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다. 자기를 아는 것은 곧 남을 아는 것이고, 물질의 세계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자각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신의 옛 고향으로 되돌아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이 '자아와 명상'의 시간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가볍게 보아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참된 교육의 장은 교수와 학생과 그리고 교재가 잘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끝으로 '자아와 명상'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명상이라는 것은 서양의 medit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우리 불교의 禪(seon, zen)과 비교해 볼 때 실수(實修)하는 방법이나 위의(威儀) 및 지향하는 궁극 점이 서로 같지 않다. 따라서 본교의 특수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강좌 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점과 강의방법 및 강의내용 등을 개선 보완하여 '자아와 명상' 수업이 새롭게 재탄생 하는 데는 어느 한 사람의 힘에 의하여 혁신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여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루 빨리 나와 처음 대학에 들어 온 젊은 동국인들에게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멋진 강좌가 될 수 있기를 학수고대 하는 바이다.

 

 

 

특집3 자아와 명상
인격형성에 있어 남을 수 있는 교훈 / 권기현/불교문화대학 강사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관찰과 모방,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는다. 사람은 언어활동을 매개로 관찰과 모방, 그리고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얻을 수 있다. 윤리나 도덕의식이 생긴 후 경험자는 피 경험자에게 교훈을 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집단생활을 시작한 후 매우 복잡한 사회를 형성하고,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윤리적인 교훈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미개사회는 미개사회 나름대로 가르침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생활의 규범으로 살고 살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윤리와 가치관은 사람은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아야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상과 복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日 日行咎이면 雖福未至나 禍自遠이오. 日 日惡行이면 雖禍未至나 福自遠이다'' 즉 하루에 선을 행하면 비록 복은 안 온다고 하더라도 재앙이 멀어지게 되고, 하루에 악을 행하면 비록 당장에 벌을 받지 않더라도 복이 멀어진다. 법구경에도 ''선을 서둘러라. 마음을 악에서부터 멀리 하라. 선을 행하는 데 게으른 자는 그 마음이 악을 좋아하게 된다.''라고 했다. 이것은 선한 사람은 봄날 풀이 자라는 것처럼 차츰차츰 번성하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은 숫돌이 달아 없어지는 것처럼 차츰차츰 쇠진하여 망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사회에서는 가끔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다. 현대사회에 접어들면 들수록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점점 윤리도덕의식이 희박해져 가고 있고,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다. 이러한 인간 삶의 방식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단순한 본능적 욕구에 매달리거나, 시대의 흐름에 의식 없이 표류하거나, 아니면 단지 방황할 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결코 진지하고 생명이 약동하는 자아의 주체적인 삶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구제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도 문제이지만, 나아가 다른 사람과 이 세상에 대해서도 무익하거나 자칫 해악의 결과를 초래할 개연성이 보다 높다는 점에서 결코 긍정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벗어난 본능적인 삶, 표류하는 삶에서 균형 잡힌 인간 행위와 조화로운 사회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자기를 상실하고 무원칙하게 방황하는 삶으로는 인간의 이성적 역사와 고상한 문화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

현대 사회를 극도로 비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나, 돌연변이에 의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인간의 도덕성과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며 또한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여러 가지 기준 가운데 좋다와 나쁘다만 구별할 줄 아는 것은 동물이고 좋다와 나쁘다 뿐만 아니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아는 것이 사람이다. 이 능력을 상실하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의 기존 가치관은 옳은 것을 판단할 줄 알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미래의 삶에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준 사상을 별로 없다. 이러한 점에서 불타의 가르침은 미성숙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정신생활을 향상시키고 풍부하게 만들어 본질적으로 인간 스스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자아의 실현을 도모하여 국가 사회 및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교육과정의 유형 중에서 교과 중심의 강의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틀에 가치 있는 것을 채워 넣는 일을 중시한다. 경험 중의심의 강의에서는 학교나 교수의 지도하에 학습자가 가지게 되는 경험을 강조하고, 학문 중심에서는 지식의 구조와 학습하는 방법

을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교과에서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교과도 아닌 인간 자신의 성숙한 인격완성과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교에서 행하고 있는 '자아와 명상'은 인간 중심적 교육과정에 부합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강좌가 개설된 배경은 앞에서 말한 현대 사회의 도덕성과 여러 가지 인간 문제에 대한 사전 인식을 전제로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조건과 상황 아래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모하여 그들의 인성개발을 격려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 강좌는 반드시 학문적인 접근만이 유용할 것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지한 생각과 깊은 체험적 사유가 더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 종교적 편견을 떠나 자신을 찾는 '자신의 성스러움'과도 적극적으로 만나볼 필요가 있으며, 명상 혹은 선에 대한 이해와 그 직접적 체험이 보다 요긴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교육학자 맥클래티는 ''학생은 수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교수를 받아들이며 강의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지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 심지어는 강의 제목마저도 잊어버린 때라도 학생은 여전히 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기억되지 강의가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고 할 정도로 교수는 학생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아와 명상의 시간이 학교를 떠난 후에도 학생들에게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고, 새로운 확신과 혜안을 열어 주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육의 프로그램의 개발과 아울러 교육자로서의 부단한 노력을 통한 도덕성과 인격적 모델로서의 사표를 제시해 줄 수 있어야 되리라 믿는다.

 

 

 

화엄경의 세계 / 네번째 이야기
만물의 주체는 무엇인가 - 유심(唯心,)사상 / 이도업 스님

불교 교학에서 마음(,已,)의 사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부피불교시대에도 인간의 심성(,已났陸)은 본래 깨끗하다고 하는 심성본정설(心姓本淨說)이 있었고,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여래장사상이나 유식사상 또는 선(禪)사상에 있어서도 그 중심 과제는 마음(毛,)의 탐구, 혹은 마음의 정화(淨化)였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상사에 있어서 만물(萬物)의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아주 일찍부터 문제가 되어 왔다. 크게 요약하면 '유심(唯心)이다.' 혹은 '유신(唯神)이다.' 라고 하는 양대 주장이 있어 왔다. 즉, 천지의 만물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희로애락 감정이나 행 .불행 등은 무엇에 의해서 좌우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은 오직 신(神)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유신설(攀神說)이 있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작용(가짐)에 달려있다 하는 유심설(唯心說)도 강력하게 주장되어 왔다. 전자를 신본주의(神本主義) 사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심본주의(,已,本主義)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물론 심본주의에 가까운 종교다.

화엄경에는 다양하게 유심(唯,已,)이 설해지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서 살펴볼 수 있다.

수미정상게찬품(須弦癩頂上手曷讚品)에,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법계의 본성이나 일체의 모든 것들은 오직 마음(唯毛,)이 지은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若人欲了知 三국吐一切1卵 /已覩法界性 一切唯,已,渣)라 설하고 있는 것과, 10지품(十地品)에, 삼계는 허망하나니 단지 이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며, i2연분도 또한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三界虛妄 但是心乍 十二織分 是皆依心). 라고 하는 經句이다.

이 두 경구의 내용은 불교에서 말하는 12연기나 욕계, 색계. 무색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까지도 오직 이 마음작용에 의한 것일뿐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천지만 물을 포함한 모든 것(一切)은 오직 이 마음(心)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행.불행 등도 모두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마음에 어떤 종류가 있으며, 그 마음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과 망상분별심(妄想分別心)이다.

택수(澤水)선사는, 두 가지의 마음이란 정심(淨心)과 망심(妄心)을 말한다. 앙심이란 분별 망상의 마음이며, 정심이란 분별 망상의 근원이다. 정심은 곧 불성(佛'陸)이다. 정심과 앙심은 본래 하나이면서 또 둘이다. 예를 들면 등불과 불빛과 같다. 등불이라는 본체가 있기 때문에 불빛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정심(淨心)이라는 불성의 본체가 있기 때문에 분별 망상의 앙심은 있는 것이다. 정심은 본체이며, 앙심은 그 작용이다 라고 했다. 마음의 본체는 하나지만 현상적으로 보면 둘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에도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견해는 용수나 세친 등이 말한 2종심(二種心)에서 유래한 것이다.

용수나 세친, 정관 등의 화엄교가(華鼠敎家)들은 人間의 마음을 청정심(淸淨心)과 망상심(妄想心)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지만, 화엄경에서는 三界匯出心에서의 마음을 ''욕심'' 또는 ''탐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욕심이나 탐심은 탐욕심의 뜻이라기보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중생심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있다. 유심에서의 '心'을 고정불변하는 청정심으로 해석하면, ''一切唯心 는  ''一切唯神 로 잘 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정불변의 唯心 이 일체를 만든다고 하면 절대의 唯一神이 天地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오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해석된다면 그것은 제행무상(諸平寸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는 불교의 근본사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화엄경의 유심 구에서 말하는 마음은 청정심이 아니라 욕심 또는 탐심이며, 그것은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는 중생심(衆生心)이다. 생멸 변화하기 때문에 정체성(定麓性)이 없고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상주(常住)하지 않는다.

생멸 변화하는 이 중생의 마음을 기신론이나 현수 법장은 법(法)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물론 연기법(彖起法)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경구는 일체유법조(一切匯臣法造)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공물은 물론 산천초목(山川草木)과 같은 자연물까지도 마음(心)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연기법(彖起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연기법인 마음이 一切를 만든다고 할 때의 이 마음은 능소(能所)의 이원적(二元的)인 마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음(心)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해서 만드는 마음(能)이 있고, 만들어지는 일체(所)가 따로 있다면 그것은 유일신교(唯一神敎)에서 신이 천지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며, 주체(主)와 객체(客)의 一如를 주장하는 화엄사상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어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遣)''에서의 마음은 초월적인 절대의 유심히 아니라, 織하여 生하면서 동시에 滅하고, 滅하면서 동시에 生하는 연기의 작용, 그 자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주(主)와 객(客)이 一如인 마음이다. 이와 같은 唯心 즉 法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생멸 변화하는 연기의 법이며, 그 법칙의 작용이기 때문에 定形의 실체(實붉豊)가 없다. 따라서 화엄경에서는 삼계는 허망하다고 하는 공관(空觀)에서 유심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복지 경제학의 붓다 / 정승석(번역)

아마르티야 센(Arnadya sen) 교수와의 문답 : The Times 0f lndia, 98년 10월 26일자

아마르티야 센 교수는 The Times of lndia를 위해 Vibhuti Patel과의 단독 면담에서 말한다. 그는 노벨상을 받은 여섯째 인도인이고, 네 번째 벵갈인이다.

 

어떤 사람은 대만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 내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최초의 아시아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날 기쁘게 했다. 나는 벵골 인임을 피부로 의식하고 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나의 현저한 신원을 갖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신원을 갖추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를 동일시 하고자 선택한 것이다.

서로 다른 신원들은 서로 다른 상황들과 관련되어 있기 쉬우며, 몇 가지 신원들이 동일한 상황에서도 공존할 수 있다. 이처럼 나는 방글라데시인으로서의 신원을 갖고 있다. 나의 가족은 다카(Dhaca) 출신이기 때문이다.

 

문 :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인도 시민입니까?

답 : 시민권은 우리가 자신을 규정짓는 방식이다. 시민권이란 우리가 우리의 시민권을 유지함을 뜻한다는 점에 대해 인도에서 는 부적절하게 이해하고 있다.

우리들 중의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중 시민권은 서양에서 사는 데 편의를 잃지 않으면서 인도인으로써의 신원을 보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특권이다. 인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지만 내가 듣기로는 정부는 비거주 인도인들에게 인도시민과 같은 권리를 약속하면서 인도의 시민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절충안이 아니라 평가 절하다. 그것은 시민권과 함께 오는 신원을 완전히 헐값으로 파는 것이다.

문 : 당신은 이중 시민권을 고려하는 것입니까?

답 : 그렇지 않다. 나에게는 단일한 시민권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인세를 둘러싼 쟁의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영국인으로서의 감각도, 미국인으로서의 감각도 없고, 단지 인도인으로서의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방글라데시를 택해서 이중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고려할지도 모른다.(웃음)

문 : 이전의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로버트 소로우는 당신을 '우리 직업의 양심'이라고 부른다.

답 : 나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나는 경제학의 하강 부분에서 사회의 패배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일해 왔다.

성공적인 기업들이 나의 관심사가 된 적은 없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즉, 영세 농민, 노동자, 빈궁자, 실업자, 학대받는 자, 굶주린 자, 기아의 희생자, 자유를 침해당하는 사람들,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다. 소로우는 그것이 경제학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칭찬하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문 : 언제부터 패배자 측에서 일하려고 결심했습니까?

답 : 나는 젊었을 때, 내가 하고픈 일에 대해 긴장 상태에 있었다. 처음에 그 긴장은 산스크리트와 수학 사이에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산스크리트 전문가였고, 나는 11년 동안 산스크리트를 공부했다. 나에게는 인도철학을 공부하거나 산스크리트 문헌을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자부한다, 나는 학교에서 수학에 전념했다. 대학에서 나는 수학과 물리학, 나중에는 수학과 경제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의 정치적 관심이 그 전환에 영향을 주었다. 박탈, 가난, 세계 전체에 걸쳐 발생하는 착취에 관해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이 공부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렇다. 패배자와 함께 일하려는 것이 경제학으로 전환한 근본 이유였다. 그것은 나의 좌익 정치적 신념과 결부되었다.

문 : 어디서 그랬습니까?

답   처음에는 산티니케탄(Santiniketan)이었고, 나중에는 캘커타의 프레지던시 대학(Prsdency cdege)에서였다. 케임브리지에서 나는 사회주의자 클럽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좌절하게 되었는데, 좌익주의자인 나의 동료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좌익 정치인들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로는 아무런 차이를 이루지 못 한다''라고 말할 때, 나는 그들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란 갖추지 않으면 큰 손실이 될 그처럼 주요한 기준으로 생각되었다.

문 : 정치인으로 나설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답 : 나는 언제나 학자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실제의 정치와 결합할 수 있을지가 유일한 문제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좌익의 태도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문 : 이 노벨상이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닙니까? 기아는 이전에 더 만연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답 : 천만에.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기아는 수단이나 북한과 같은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기아를 방치한다는 나의 관점은 확고하다. 현존하는 유일한 실례들이 몇몇 독재 국가들에 있다. 노벨상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문 : 인도와 중국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1억의 여성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해 주십시오.

답 : 캘커타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으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그 때는 정치적으로 조리가 있는 여성들도 지금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을 역할 상의 불평등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성의 불평등이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 음식과 건강관리에까지 뻗쳐있다는 점을 나중에 내가 기아와 성에 의한 사망을 공부할 때서야 알았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몸을 돌보는 데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기아가 없는 시절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거기에 없는 것과 같다. 남자 어린이가 받는 의료 혜택과 일반적 보살핌은 여자 유아들이 받는 것보다 낫다.

이로 인해 사망률에서 차이가 나고 있는데, 이것은 허용할 수 있는 선을 이미 넘어서 있다. 언론은 유아 살해, 지참금으로 인한 죽음, 과부 분사를 집중 보도하지만 그 영향은 수십 명 혹은 수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수백만 명이 간과되고 있다.

전 과정이 그처럼 말 없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문 : 당신은 언젠가 자신이 불교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답 : 나는 신도증을 소지하고 다니는 불교도는 아니다.(폭소) 수년 전, 내가 산티니케탄에서 무신론자로 등록하려고 하자, 교장은 내게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나는 불교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불교가 불가치론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서 300마일 이내에는 불교 신자가 없었다. 나는 붓다를 이제까지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존경한다.

다른 누구의 사상도 그의 사상에는 필적하지 못한다. 타고르도 아니고 간디도 아니며, 우리의 모든 위대한 저술가들도 아니다. 서기 전 6세기에 있었던 그 각성의 길이는 극적이다.

그 사실성보다도 그의 사상을 특징짓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세 가지 이야기, 즉 병자는 고통 받고, 노인은 나이로 쇠약해 가고, 죽은 자는 화장터로 운구 되어 간다는 이야기에서 ''저런 삶이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붓다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문제이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뜻한 일하게 하는 자극이기도 하다. 직면하는 질병, 늙음의 문제, 피할 수 없는 때 아닌 사망의 문제보다 인간사에 대해 더 잘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붓다라는 이름 자체는 깨달음을 가리키고, 그것은 교육과 각성을 강조한다. 깨달음에 대한 요구, 이성적 사고와 냉정한 분석으로 자기가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는 각성에 대한 요구는 전적으로 붓다에서 유래한다.

그의 인격은 박탈, 죽음, 병, 노쇠, 깨달음, 선행을 통한 사회적 중재에 관한 관심과 결합하여 있다. 내가 붓다를 특히 좋아하는 것은 이 모든 것 때문이다. 그 당시 그는 위대한 타당성을 지녔고,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문 : 당신은 아직도 인도에서 붓다의 유산을 발견합니까?

답 : 인간의 권리를 연구하는 데 나는 아소카 황제의 놀랍도록 각성한 자세에 감명을 받아 왔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추종자가 된 이래 불교를 전파하기를 바라면서도 결코 강압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를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것을 중시했던 간디와 비슷하다. 아소카의 합리적인 그 노선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유래한다.

문 : 노벨상의 상금은 100만 달러입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답 : 영국이나 인도와는 달리 상금에 세금을 붙이는 미국에서 난 여전히 세금을 내야 하므로 미국 정부가 반절을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50만 달러는 나에게 아주 충분하다.

 

 

 

가람의 진수
태고종의 본산. 봉원사 / 유문용

태고종의 본산 봉원사는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치지만 원래에 절 자리에서 자리를 옮기는 과정도 있고, 특히 180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개화에 눈을 뜨게 하는 개화기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 절이라는 데 중요성이 있다.

이 봉원사가 원래 있던 자리를 여러 가지 문헌에서 종합해 보면 연희동에 있던 연희궁터에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아마 연세대학교 뒷산 금화선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절은 원래부터 봉원사가 아니고 신라시대에 있었던 절은 반야사(般若寺)였는데, 신라 진성여왕 3년 889년에 도선국사가 한강 서북 금화산(金華山) 서편 기슭에 창건했다고 한다. 물론 이 당시에는 그렇게 큰 도량은 아니었고, 고려 말 공민왕 때 원증국사인 보유스님이 가람을 확장 중수를 하고 화려한 가람이 되었다고 해서 금화로 절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데 지금 금화 산이나 금화터널이 이때부터 생긴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가 조선조 태조가 이 절을 보고 감복해서 태조에 진영(眞影)을 그려서 이 절에 봉안하고 왕실에 원찰이 되도록 하였고, 당시에 한양으로 천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정도전이 명부전에 편액을 써서 지금도 명부전에 걸려 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선조와 인조 대에도 계속 왕실에서 보살핌이 있었는데,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되는 것은 우리 나라전국사찰에 볼 수 있는 일이고, 이내 다시 중건이 되었으나, 효종 때 1651년에 다시 큰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곧바로 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중건을 했다고 하는 데 영조 24년 1748년에 왕이 친히 절을 새로 지을 땅을 하사하고, 큰 가람을 중창하게 된다. 이때도 왕실에 원찰이고 나라에서 중창 불사에 큰 힘을 써서 봉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절을 지금 이 자리에 새로 짓고는 먼저 있던 반야사에 사부대중들이 모두 이사를 했는데, 새로 지은 절이라고 해서 장안에서는 모두 새 절이라고 불려져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새 절이라는 신사(新寺)라고 새겨 놓고 있다.

서울 근교의 왕실마다 능묘에 원찰을 설정하게 되는 데 태종 헌능에 원찰로는 봉헌사가 있고, 세조대왕에 능인 광릉에는 봉선사, 그리고 성종의 전능에 원찰은 지금 강남에 있는 봉은사가 있고, 현종의 정능에는 봉 국사를 원찰로 해서 서울 주변에 봉지가 들어가는 원찰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초에 와서 아무리 숭유배불(熊需排佛)정책을 썼다고는 하지만, 왕실에서는 조선조 말까지 지속적으로 불사에 전념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새로 중창한 봉원사에 1870년대부터 개화에 물결이 닥치면서 스님으로서 개화에 앞장서시던 이동인스님이 일본을 수차례 다니면서 선진 문물을 도입하면서 김옥균이라든지 박영효와 같은 선비들이 개화에 눈을 뜨게 해서 봉원사에서 늘 이동인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서재필 박사도 여기 봉원사를 개화맥(開化脈)에 온상이라고 할 만큼 우리나라 개화에 앞장섰던 곳이 이 봉원사이다.

1905년에 상궁이 불사(佛事)에 참여해서 대웅전에 신중(神堺), 구품(九品), 산왕(山王), 등에 탱화를 봉안하였고, 1945년 광복이 되던 해에 염불당을 개조해서 광복기념관을 개설해 이 절에 유물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해 이 기념관이 소실되면서 영조 대왕에 어필(御筆)인 봉원사라는 현판과 이동인, 김옥균의 유물을 비롯해서 중요한 기록이나 유품들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광복기념관을 지었을 때 백범 김구 선생도 참여를 하신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염불당과 모든 당우들이 중수 보수되어 지금에 규모로 불사가 이루어 졌는데 이 절에서 가장 큰 건물인 염불당은 흥선대원군 별장에 본 채 건물을 고스란히 옮겨지었고 정원석들도 거기에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1977년에는 고려 말에 태고종의 보유스님의 불교사상과 법맥(法脈)을 이어서 조계종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대한불교 태고종의 총 본산으로 되었다.

그리고 현재 봉원사에는 무형문화재 제50호인 범패가 지정되어 있고, 만봉스님도 단청에 기능장으로서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지속적으로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다.

이 봉원사의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절 입구에 보면 길섶이나 오른편에 살림집들이 많은데 양옥도 있고 한옥도 있다.

주로 한옥들에는 이 절에 계시는 스님들이 살고 계시다고 한다.

이 봉원사는 태고종에 총 본산이고, 스님들이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시다고 한다.

입구의 오른편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놨고, 그 안에 둥그런 섬을 만들어서 잘 생긴 정원 돌과 잘 생긴 향나무를 심어 놨는데, 이렇게 네모난 연못에 원형에 섬을 둔 것은 궁궐에 주로 많이 조성을 하는데 이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난다는 우주에 진리를 담은 의미이다. 하늘은 밝고 땅은 어둡다고 봤을 때 음양(陰陽)에 이치가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연못의 형태인 4각을 땅으로 보고, 또 어두운 음(陰)의 바탕으로 보았고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어서 밝은 하늘을 두었는데, 여기에 수목을 심어서 사람이 있음을 상징한다고 하면 여기에 우주만 물에 섭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볼 것이다.

이것은 풍수지리에서 나오는 음양오행(陰陽五村)이 곁들이게 되는데 풍수지리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풍수지리를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잡는 것인데, 바람과 물이 좋은 곳에 있는 것이 풍수지리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가장 살기 좋은 조건은 우선 남향을 하면 양명해서 좋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뒤가 허하면 불안하니 뒤에 산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배산(背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이 너무 황당하게 터져 있으면 허황하니 앞에도 멀 리라도 막아 주는 산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안산(案山)이 있게 된다. 그리고 양 옆에도 허하면 안되니까 어머니가 감싸 안듯이 양 옆에 산으로 막아줬으면 하는 것이 좌청룡(左靑盲블), 우백호(右白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앞에 물이 흘렀으면 좋겠다해서 안수(案水)가 있게 된다.

이 연못 뒤쪽에 「전성기 공덕비」가 있으며, 절 안에 개인의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 많지 않은데, 이 절을 중창 할 때 많은 시주를 해서 특별히 공덕비를 세운 것 같다.

대웅전과 나란히 있는 법당 서열에 맨 끝에도 「전씨 영각」이라고 해서 전성기에 위패를 모신 집이 있다. 요즘도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엄청난 집이 삼천불전(三平佛殿)인데 최근에 지어진 집이다.

봉원사의 현재 대웅전은 1768년 영조24년에 먼저 있던 반야사를 이 자리로 옮긴 후 봉원사로 불리질 때 세워진 집이라고 한다. 이 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영조대왕이 하사하신 것으로 당대의 명필 「이광사」의 글이라고 한다. 여기 올 가는 계단은 원래부터 전체 계단으로 된 것이 아니고, 높은 축대가 있었고 법당정면에만 계단이 있었다고 하는 데 1966년 대 보수가 있을 때 편의상 이렇게 전체에 계단을 두었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靈山會)를 재현하는 영산제(靈山祭)가 유명한데, 이 영산대법회가 있을 때는 범음(梵昔), 범패(梵唄)의 행사가 이루어지는데, 많은 불자들이 이 영산재에 참배를 하기 위해서 계단을 확장해서 앉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1990년 정밀시 측 할 당시에 새로 지어 놓은 것이다.

이 대웅전은 사방의 길이가 거의 같은 평면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주전법당을 정방형 집으로 하는 것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1990년대 이전의 건물보다 양간 높이가 높아졌고, 문짝이 일반적인 띄살문에서 꽃살문으로 바뀐 것이 다르다. 그리고 이전의 건물은 문짝들이 돌문으로 되어 처마 끝에 갈고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여닫이문으로 된 것이 다르고, 가운데 문짝이 전에는 4짝에 4분합 문이었는데 지금은 6짝으로 된 것이 다르다. 그리고 원래가 모두 판벽(板壁)으로 되어있었는데 지금은 흙벽으로 친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전보다 집에 위용이 당당해 졌고 화려해 졌다.

먼저 집에서는 지붕 용마루 양끝에 용도가 있었고 절에 건물에서는 잘 올리지 않는 것이다. 궁(宮)이나 관아(官衙)에서는 용도를 올리지만 절이나 민가에서는 용두를 올리지 않는다. 여기 봉원사는 옛날부터 상궁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궁의 원찰이 되는 인연도 있고, 또 대원군에 별장도 옮겨졌고 해서 관에서만 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명부전이나 다른 건물에서 화방벽(火防壁)에 사괴석(四愧石)을 쓸 수 있는 것도 그런 경우가 된다고 본다. 단청은 인간문화재가 계시니까 갖은 금단청(錦丹靑)으로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이 대응 전 벽면에 돌아가면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석가모니의 팔상도(八相圖)도 있지만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이 대웅전 안에는 본존불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고 좌우에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이 협시(挾侍)를 하고 있어서 다른 절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은 협시보살로 문수, 보현보살님을 모시고 아미타 부처님에 협시로 관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협시로 관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모신 것은 석가모니를 주 존으로 모시되, 아미타(阿彌陀)의 극락정토(極樂淨土)사상과 내세에 귀의하는 육도(六道)의 환생(還生)을 내포하고 있는 절의 성격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뒤에 있는 후불탱화도 아미타 회상도가 있어서 더욱 그런 신앙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대웅전은 종합적인 부처님 나라에 사상을 총 망라하는 상징을 보이고 있는데 대웅전 안에 여러 사상에 탱화들이 봉안된 것을 보고도 알 수가 있다. 이 탱화들은 모두 조선조 말 궁에 상궁이 시주하여 그렸다는 탱화들인데 모두 l905년에 그려진 것이다.

대체로 부처님이 계시는 전면에 있는 탱화들의 자리를 상단(上壇)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부처님 세계를 나타내는 곳이라서 상단이라고 한다.

오른편 측면은 중단(中壇)이라고 하는데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모시고 여러 신중들이 그려진 곳이라서 중단이라고 하고, 왼편의 측면에는 하단(下壇)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지옥에 감로(甘露)탱화, 현왕(賢王)탱화, 구품(九品)탱화를 주로 모신다.

이 봉원사 대웅전의 좌측 벽인 하단 영단(靈壇) 끝에는 가람신도(伽藍神圖)가 있는데 이 가람신(如藍神)은 가람 전체를 수호하고 있는 신으로 불교와는 직접적인 면은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사역(寺域)을 수호하고 있는 신을 모시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 민가에서도 터줏대감이라고 성주단지를 모시는 일과 같은 오랜 관습에서 비롯된 신앙이다. 따라서 봉원사의 대웅전에 성격은 현세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미래세계의 아미타에 극락정토 세계를 희구하면서 모든 신중과 삼성(三聖), 시왕(十王), 판관(웨官), 록사(錄師) 사자(使者), 그리고 토속신앙인 가탈을 수호하는 가람신까지 총 망라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수용할 수 있는 모든 신중들과 부처님이 함께 하는 불국토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봉원사에서 가장 큰 건물은 새로 지어진 삼천불전(三千佛殿)이 되는데 삼천불 전에 모든 문짝은 아주 화려한 꽃살문을 했고, 보통 문짝 위에는 교창(交窓)이라고해서 빗살로 된 창을 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집에 지둔이 높아서 교창을 하고 그 위에 덧붙여서 투각(透刻)에 살창을 더 두었다.

전면에 3칸 중 가운데 칸에는 소나무와 학이 있는 송학도(松鶴圖)를 두각하고 양 옆의 칸에는 비천(飛天)을 투각한 고창을 두었다.

여기에 투각된 문양은 회화적인 문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소재도 다양하다.

석류(石榴), 천도(天桃), 목단(木壇), 벗나무, 포도(葡萄). 소나무, 불두화(矛赤頭花), 대나무 등이 투각되어 있으며, 이 문양은 절에서 시대가 올라가는 극락전에 꽃살문양과꼭 같이 한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위에 보궁인 닫집을 지었는데 워낙 집안이 높아서 보궁을 3층으로 지어 놓았다. 아마 이런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닫집이 될 것이다. 매우 정교하게 잘 짜이어 맞추어져있다.

봉원사에는 염불당이라는 큰 건물이 있다. 원래는 대웅전 정면에 있어서 법회장(法場會)과 염불당(念佛堂)으로 되고 있었다고 한다. 1945년 광복이 되던 해에 H자 모양으로 46칸이나 되는 대불당(大佛堂)을 증축해서 세우고 광복기념관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당시에 백범 김구 선생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 후 6.25사변 때 이 대불 당이 소실되고 1966년도에 지금의 이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이때 범종각, 영안각, 운수각, 비각이 같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면에 있는 문들은 모두 아자문(亞字門)으로 되어 있어 흥선대원군에 별장답게 아주 세밀한 문살을 이자무늬로 세심하게 짜서 단 고급스런 문이다. 어지간한 사대부 집이 아니면 이렇게 고급스런 문을 달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 집에는 절이나 보통 만가에서 할 수 없는 부분이 또 있는데, 측면을 돌아가면서 벽을 쳐 놓은 것을 보면 밑에서 절반 이상을 담벼락을 치고 그 위에는 흙벽을 쳤는데 이것을 빈담이라고 한다.

이 반당에 네모반듯한 돌인 사괴석 담은 궁이나 관아에서 그리고 나라에서 만든 성곽 같은 데 주로 쓰는 양식이다. 그리고 측면의 지붕 위를 보면 엄청나게 큰 삼각형 부분이 있어서 이곳을 합 각이라고 한다. 이 합각에 공권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이 집에는 현판이 4개가 달려 있는데「봉원사」가 있고, 「무량수각성」, 「청련시경」, 「산호벽루」라고 되어 있다. 「청련시경」과 「산호벽루」는 추사 김정희에 낙관이 있다.

 

 

 

신행상담
참회 / 장계환 스님/불교대학 교수

요즘 온 나라가 정치인들의 비리 사건이라든가, 소위 북풍에 대한 진상 규명으로 사정(司正)인지 혼란인지 모를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과연 얼마만큼 뉘우치고 진정하게 반성의 참회를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벌써 이 해도 저무는구나하고 생각해보니 제 자신부터 먼저 참회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쭈어 봅니다.

불교에서 행하는 참회의 방법과 그 의미를...

(문과대학 한국어문학부 , 이성일)

 

사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어떤 결과보다도 그 동기를 중요시 하는 입장이지요. 그러나 누구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다고 하여 그 잘못을 묵인하거나 정당화 시켜서도 안 될 것입니다.

참회는 범어 Ksama를 응사한 참마(,隘摩)의 첫 글자와, 그 뜻인 뉘우친다는 회(悔)자를 합쳐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원래 범어 크샤마는 잘못을 용서하고 참아달라는(忍,) 뜻이 있고, 회자에는 뉘우치며(悔過) 사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회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므로 참고 용서해주기를 빈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참회는 부처님 재세시(衣世時)부터 제자들이 잘못을 범하였을 때와, 그리고 정기적으로 보름마다 포살(布薩)과 자자(自恣)의 형식으로 행해져 온 것을 보면 불교 교단에서 차지하는 참회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회의 방법에서는 출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하지관>에는 실상의 이치를 관함으로써 죄를 소멸하는 이참(理懺)법과, 예배나 독경 등 신구의(身口意)의 행위에 의한 사참(事懺)법이 있습니다.

또한 <왕생예찬>에서는 세 가지 참회법이 있는데, 상품(上品)참회는 온 몸의 털구멍과 눈에서 피가 나오도록 뉘우치는 참회를 가르키며, 중품(中品)참회는 온 몸에서 땀이 나도록 뉘우치는 것이고, 하품(下品)참회는 눈물을 흘리면서 뉘우치는 참회라고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만으로 모든 잘못이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회의 참 뜻은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언제까지나 반성과 참회만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참회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이란 과거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고, 회는 새로운 잘못을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는 육조(六祖) 혜능스님의 말씀이 보다 더 적절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참은 용서를 비는 것이고, 회는 타인에게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의정(義淨) 실장의 말씀도 참회의 본 뜻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공업(共業)중생입니다. 모두 다 같이 자괴하고 자숙하는 입장에서 상대의 진정한 참회를 수용할 줄 아는 너그러움도 함께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행의 길
불교의 수행은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 / 정성본 스님/불교문화대학 불교학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라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하여 전체를 한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팔만사천의 법문이란 중생의 번뇌가 이처럼 많다는 말이며, 중생 번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방편의 약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佛法은 중생의 번뇌(病)에 맞추어 진실된 가르침으로 처방하는 법문(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서 방편법문(方便法門)이라고 하는데, 이를 응병여약(應病輿藥)이라고 한다.

번뇌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를 제거하는 진실한 가르침을 통해서 번뇌의 본질과 이를 제거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잘 알게 될 때 우리는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불법의 수행은 자신을 불안에서 평안함으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무명의 어두움에서 지혜의 광명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며, 근원적인 본래심의 자각을 통한 지혜로운 삶을 가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을 함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실천 수행은 자아의 자각과, 지혜와 인격 형성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형상적인 삶의 좌표가 되는 계율(戒律)과 자신을 되돌아보고 언제나 자각적인 삶과 지혜를 창출하게 하는 선정(禪定), 그리고 인격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 지혜로운 생활의 실천덕목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과 팔정도(八正道) . 육바라밀(六波羅密)은 대 소승불교를 통해서 불교 수행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두 자신의 살업청정(三業淸淨)의 구체적인 수행으로 집약된다고 할 수있다,

불법의 수행이 왜 삼업청장의 수행이 되는 것인가?

인간은 신구의(身口后), 이 세 가지의 작용과 행위로 인간 일체의 생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행동을 하려고 마음먹는 의지작용이 의업(意業)이며, 그것을 신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업(身業)이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구업(口稟)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과 입이 하나가 될 때 자신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여 살아가는 채비를 차리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율장(律藏)』에도 입을 잘 간수하고 뜻을 잘 수습하여 몸으로 나쁜 일을 범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수행자는 깨달음(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리라!(守口構意身莫犯, 如是行者得度世)라고 설하고 있다.

몸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지라도 마음으로는 온갖 사랑분별로 번뇌를 일으켜 괴롭고 슬프고, 기쁘고, 울고, 웃고, 자신을 시끄럽고 산란스럽게 만들면 역시 불안하고 괴로움에 빠져지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연속 속에 살고 있기에 생사(生死)의 고해(苦錄-번뇌) 속에서 부침(浮沈)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선에서는 생사윤회 (生死輪夏邑) 한다고 말한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중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에서 생사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번뇌가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신구의, 곧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과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이다.

 먼저 신업청정(身衢靑淨)의 수행으로는 불교인으로서 계율을 수지하고 청정한 持戒 生活을 하는 것에서 목욕재계하고 시심으로 합장 예불을 하며, 일체중생을 공경하는 마음과 자세를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구업청정(口業淸淨)의 수행은 경전을 독송하며 불법의 참된 정신을 자각하며, 또한 「관세음보살」 , 「나무아미타불」 . 「석가모니불」의 성호(聖腱)를 입으로 외우면서 염불 하는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업 청정은 단순히 입으로만 행하는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입으로 행동하는 구업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음의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은 마음의 입을 통해서 염불 하는 관념염불(觀念念佛)과 좌선을 통해서 실천하는 수식관(數息觀) 등이 있다. 관념염불은 마음의 입으로「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등의 성호를 부르면서 염불 하는 수행이며, 수식관은 자신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관찰하면서 호흡을 마음속으로 세어가는 수행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좌선수행의 실천방법을 통해서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하자.

마지막으로 意業淸 의 수행은 번뇌의 마음, 즉 妄心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청정하고 깨끗한 본래 심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만들어가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자각을 통해서 가능한 일다.

만약 몸은 바르게 앉아 합장하고, 입으로는 열심히 성호를 외우는 염불을 하고 있을 지라도 마음이 다른 분별심, 차별심에서 떨어져 번뇌를 일으키면 몸과 마음은 두 가지 작용을 하게 되므로 몰과 마음이 따로따로 두 살림을 하게 된다. 신구의, 곧 실업이 일치하지 않게되므로 삼업청장의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되며, 삼업이 청정한 수행이 되지 않은 수행은 올바른 수행과 기도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살펴볼 때 몸을 정돈하고 잘 조절하는 정신단좌(正射需坐)의 조신(調身)은 신입청정의 수행이며, 마음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호흡을 세어 가는 수식관은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마음의 입을 통해서 세어보는 마음의 목소리를 마음의 귀로 또렷하게 듣는 자각은 위업청정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

 좌선과 염불 등의 수행을 통해서 위업을 청정하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오직 지금 여기서 행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는 일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지극히 중요하다. 인간은 지금이라는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금을 떠나서는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열린마당
중도(中道) / 윤주억/동국대학교 식품공학과 명예교수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 곧 중도(中道)다. 중도란 바른 길이며, 실제의 인간생활에 활용되는 바른 길, 현실에 맞는, 공리(호禾竪). 공론(空論)이 아닌 바른길이 중도다. 부처님은 실제성을 가장 존중한 분이다. 그 시절의 종교나 철학의 신화성(神話性)을 안타깝게 여기고 불교를 출현시킨 분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고 100년이 지나면서 불교는 사변화(思辨化) 되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노력은 희석되었으며, 부처님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사변적, 관념적, 그리고 추상적인 우파니샷드의 철학을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실천적, 현실적으로 바꾸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원상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불교는 중도, 중도란 관용하는 마음

불교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자. ''버릴 것도 취하고 취할 것도 취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 뜻이다.

''술은 마시면 안되는가''라고 큰스님에게 물었더니 ''마시지 않는 것이 좋지만, 세상 순리대로''라는 대답을 받았다. 축하모임에 가서 술은 한 모금도 안 마신다고 버틴다면 그것도 한 쪽으로 치우친 마음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연스러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현실성이 인간생활에서 필요하다는 가르침이다.

''염불하다가 졸음이 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또 한번 물었더니 ''졸음에서 깨거들랑 염불하라''고 하였다.

무릎을 꼬집어 억지로 잠을 쫓으며 염불 하라는 것이 아니다. 졸음이 오면 졸아라. 그러나 졸음이 가시거들랑 염불하라 하는 것이다. 얼마나 현실성 있는 가르침인가. 여기에 무애(無碍)가 있다. 자연법이(自然法價)이다.

불꽃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이것이 자연법의 길이다.

중도란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룸이 있고, 자연법이 있다. 졸음이 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 맞으면 아프고, 자식이 죽으면 슬프며,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기에 불교가 있고 중도가 있다.

어느 날 부처님께 제자가 되고 싶다면서 성기를 잘라버린 사내가 찾아왔다.

그러나 부처님은 받아 주지 않았다. 억지로 불구자가 된 사람은 안되겠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라.

부자연스러움이 가장 바람직하지 못하다.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쳤다.

''중도'' 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적 인용어로 많이 쓰여진다. 극우, 극좌 등으로 치우쳐지지 않는다는 의미로는 잘못된 표현은 아니나, 본래의 중도는 무리하지 않는, 자기의 성기를 자르는 것과 같은 억지스러운 일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도를 다시 한번 쉬운 말로 표현하면 관용(寞容)하는 마음을 뜻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극단적인 것이 아닌, 보다 넓고 부드러운 마음이다. 심판하거나 질투함이 없는 마음이다. 기독교의 신은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신이다. 기독교의 엄한 계율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왜 불일향(不一向)을 주장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그와 같이 부드럽고 관용하는 정신을 불교는 품고 있는가. 그것은 부처님이 태어난 고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부처님이 탄생한 곳은 북위 20', 동경 83', 히말라야산의 남쪽 기슭이다. 기후는 온난하고 땅은 기름지며 물은 풍부하였다. 이러한 곳이 부처님의사 상과 인격을 길러낸 토양이다.

기독교를 낳은 황막한 땅이나 마호메트교를 일으킨 사막과는 불교의 풍토는 너무나 다르다. 무덥고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불모의 땅에서 커 온 종교에는 불관용과 보복, 칼에는 칼로써 대답하는 무서운 거절과 단죄, 고발과 심판의 성격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편협됨을 싫어하는 풍토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편, 그 무렵 인도에는 두 가지 사상이 있었다. 하나는 금욕과 고행. 육체를 괴롭히고 단식 .단수하여 욕망을 억누름으로써 선인(仙人)의 길을 얻으려는 사상이다.

마침내 부처님은 둘 다 버렸다.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져서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우유와 죽을 먹었다. 함께 수행하던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비난했으나, 부처님은 ''인간은 목숨이 있어야만 진가를 나타낼 수 있는 법,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필수불가결이다'' 라고 하면서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합리주의, 즉 단식이냐 향락이냐의 이자택일에서 음식물의 자연적인 섭취가 인간에게는 얼마나 유익하고 존귀한 일인가 하는 합리적인 생각, 경제(음식물에 의한 인간활동)와 인간의 융합화, 공리적 현실주의, 이것이 중도관(中道菴鼠)이다.

불교는 허무적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며 오해다.

부처님은 세상 도리에서' 벗어나는 비과학적인 가르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위해 독경한 적도 없었으며, 죽는 것이 바람직스런 일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적도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이 제일이다.

현실의 대지에 굳건히 두 발을 내딛고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며, 보수적이 되지 말고 언제나 전진적으로 문제에 부딪혀 나가라고 가르쳤다.

삼법인(三法印)이란 무엇인가

 삼법인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 (星槃寂靜)을 말한다. 이는 깊고 미묘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방편(方{更)으로 안출(案出)한 것이다.

일체(一切)는 변화한다. 향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이며, 이 도리는 어느 세상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사례(四季)는 변한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의, 시시각각의, 지금의, 찰나의 생명을 존중하여라. 무상을 아는 자만이 상주(常住)의 삶을 얻게 된다. 제행무상은 생명 가치의 발견에 있다.

제법무아는 자아의 부정이다. 동시에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는 만물의 근원, 창조 신, 전지전능의 신을 가르킨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제 1 원인'', ''유일의 원인'', ''절대 정신''과 같은 도그마틱한 ''아(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혼자가 아니다''로 이해해도 좋다. 물론 인간에게는 ''자기''라고 하는 ''아''가 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아''는 실아(實我)가 아니다. 편의상의 ''나''이며 ''아''이다. 왜 그런가 하면 고립된 ''아'', 자기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서로 엉키고설킨 자기다. 살려지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다. 남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불이(不二)의 나이다. 본래는

 자기도 남도 세상도 없다. 있다면 ''아''를 무(無)로 바꾼 ''법의 세겨r', 법계 뿐이다. 그것이 제법무아이다.

 

21세기를 구제할 사상

 흔히 불교를 21세기의 인류를 구제할 사상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불교라해도 먼저 스스로의 자세를 더욱 바르게 해야 한다. 불교는 이원론(二元論)이 아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다. 불교의 불이중도(不二中道) 사상도 더욱 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에 접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1세기의 지도적 사상이라 해서 좋아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좀 더 불교 자신의 사상을 내부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불교는 인간중심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원시 종교에 뿌리를 둔 신화적인 종교에 대하여 인간의 종교로서 살아 왔다. 불의 신이나 물의 신도 아니고, 흙의 종교도 아니다. 생명존중의 인간종교다.

요즘 삶의 질, 삶의 보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법구경'' 182번에 ''인간의 삶을 받음은 아주 드물고 어려운 일''이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으로의 삶을 단순히 ''고마운 일'', 즉 ''Thank you''로 표현하지 않고, 쉬운 일이 아닌 아주 드물고 어려운 일로 표현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야기에 이르면 그것이 바로 ''삶의 보람'' 아니겠는가.

불교를 삶의 보람이라고 하는 ''생(生)''의 근원의 존귀함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보면 틀림없이 21세기를 구제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더욱더 부처님께 다가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신간안내
화엄경사상 연구 / 이도업 스님/불교문화대학장, 화엄 법계사 주지

화엄경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왔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문화대학장 이도업 스님에 의해서 쓰여진 이 책은 제1부 「화엄경의 중심사상」, 저T2부 「화엄경의 세계」로 되어 있다.

제1부 「화엄경의 중심사상」에서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5장으로 나누어 전문적인 논문형식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제2부 「화엄경의 세계」는 화엄경의 구성과 각 품의 중심 내용을 세밀하게 분석 .정리한 것으로 화엄사상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 품의 핵심 내용을 풀어서 정리했으며, 그에 대한경전의 원문을 주(註)로 처리해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법신불사상(法身佛思想)에 대해서 논술하고 있고, 제2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보살사상(菩薩思想)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정토사상(爭土思忽)에 대해서 논술하고 있는데, 화엄경에서 말하는 연화장정토와 정토삼부경에서 말하는 아미타 정토를 비교 .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지금까지의 화엄사상의 연구는 주로 화엄교가(華羸敎家)들의 주석서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반해, 이 책은 화엄경 경문에 의해 분석하고 정리했다는 것이다.

저자로 화엄교가들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화엄경의 경문을 하나하나 정독해서 다섯 가지의 사상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요즈음 불교학자들 중에는 자기 연구분야의 소의의 경전을 구석구석까지 충분히 정독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고자 하는 연구 자세가 점점 결여되어 가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방대한 양의 화엄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정독하고 古今의 연구성과까지 인용해서 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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