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도량 41호
차례
이달의
법문 / 마음의 진실/ 월운 큰스님 정각도량
/ 더불어 사는 지혜(四攝事) / 최법혜 특집/
북한의 불교와 명찰 / 북한불교의 오늘
/ 신법타 스님 특집/
북한의 불교와 명찰 / 금강산의 명찰들
/ 정재훈 화엄경의
세계 / 화엄경의 개요 / 이도업스님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깁갑주 부총장 /편집부 불심의
창 / 깨달음과 미 / 김대열 수행의
길 / 불교의 수행과 실천 / 정성본 스님
일주문 / 자연과 인간 / 이법산 스님 신행상담
/ 유의와 무위 / 장계환 스님 신간안내
/ 인도철학과 불교의 실천사상 / 정태혁
박사 가람의
진수 / 미륵도량 금산사 / 유문용 열린마당
/ 나의 신행일기 / 이익수
@이달의
법문 / 마음의 진실/ 월운 큰스님
진실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하나일 수도 있고 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사를
살다보면 사람들이 진실을 추구하는 그
사실 자체가 살아가는 행렬 속에 앞서가는
것이겠지만, 그러면서도 모두가 진실을
바로 보기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은
과장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부처님의
생애도 진실을 추구하는데 필생을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있었던 육사외도(六師外道)도
다를 자기 나름대로 '자기 자신이 진실이다.
자기가 붓다'라고 했으나 그 중 맨 막내인
부처님이 나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도 남들이 믿지
않을까봐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
자신이 진슬을 실에 껴놓고 중생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보아라"라고
하시니 당신이 잔실을 펴는 장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이 안믿어주는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금강경에
따르면 "여래아는 진어자며 실어자요,
여래아는 실지실견(悉知悉見)한다"고
전합니다. 실지실견 즉, 알고 다 본다는
뜻입니다.
이는
무착보살이 도솔천에서 만난 미륵님에게
받아온 팔십게송에 따르면 "다 안다고만
얘기하면 추측이라 해서 믿지 않을까봐
본다는 얘기까지 붙어야 하고, 봤다고만
얘기하고 안다고 하지 않으면 시력이 미치는
가까운 곳만 봤지 먼 곳은 보지 못했다고
하기에 보는 것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거리와 명암에 관계 없고, 본다는
것은 누구의 설명이 비롯되면 내가 직접
확인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콩으로 메주를 쓴다해도 믿어라"라는
부처님의 말 속에 진실이 숨어 있는데
그 진실의 정의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결론은
허망합니다. 진실의 정의는 허망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도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했습니다. '전도몽상을 여의면 일체고액(一切苦厄)을
여읜다'는 말도 있습니다. 서론과 결론이
허망함에 맥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가 놓칠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 현 불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 아닙니까. 진실을 알지 못하고
찾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고 뜻있는 삶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된 진실을 찾는 법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합니다.
석가여래
부처님의 탄생과 불교의 존재에도 반드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최소한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실에도
물리적인 진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과가 의례히 떨어지는 것이라고 알았지만
어떤 학자가 사과가 떨어지는데 물리적인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고 난 뒤부터는 그것은
그 사람이 만들어낸 진실처럼 되었습니다.
물리적인
진실, 이는 소금을 타면 자고, 설탕을
타면 달다는 법과 같습니다. 살다보면
물리적인 진실도 인간의 욕망 때문에 변해갑니다.
'돈을 주면서 이것이 짜지만 달다고 해달라'라고
하는 세태가 요즘의 인간 세상입니다.
물리적.
현실적인 진실도 소중히 생각해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노후된 대승
불교권에서는 불교이론은 현실을 떠나버린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진실을 크게 오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부정리를 하면 불교가 성공을 하고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도불교와 같은 운명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을 잃게
된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소중한
정신문화재를 잃게 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역할은 매우 큰 것입니다.
또,
사람 즉 인간의 정의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지구상에는 사람은 우주만물에 힘을 뻗고
있는 유일신을 믿는 위대한 '신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신의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자기의 능력에
의해 앞 길을 선택할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정신은 동체(同體))입니다.
자비의 뿌리는 동체이기에 자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동체는 너와 나의 부리로
올라가면 하나의 진실로 매듭을 짓게 됩니다.
너와 나를 묶어 우리라는 하나의 존재성
위에서 진실된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고, 나의 즐거움은
네가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진실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나를 지우는 철학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불교의 정신을 모두가 이어가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교리가 전파되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때를
절호의 기회라 행각하고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일어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충무공이 위대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풀이해 보십시오. 왜군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충무공은 위대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충무공의 위대함은 풍수지리가
만들어 주어다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불교계의 흐름은 어떻습니까.
한국의
지식인들 중 불교인의 비중이 36%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불교국가라 칭하는데,
98년도 정부에서 발표한 종교인구를 보면
한국의 국민 중 불교인은 8백 50만명 이라
합니다. 연령별로 본다면 20대 미만은
5% 이하이고, 60세 이하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젊은 불교인들이 불교인으로 의식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인으로써 불교의 자긍심조차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진실에는 물리적인 진실. 사회적인
진실. 문화적인 진실. 의학적인 진실 등
여러 종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실의 뿌리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이 실천해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맑은 마음을 가졌을 때, 계획 세운
것 중 이해관계가 앞에 나타났다고 할
때, 그 때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곧 진실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 이유가 확실하고, 국민 모두가 하나로
뭉쳐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빛날 때, 나의
존재도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말하는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말고, 나의
참된 진실을 찾는데 정진하십시오.
@정각도량
/ 더불어 사는 지혜(四攝事) / 최법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을 통솔한다는 것은
그 대중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권위나 강압에
의한 통솔이 아니라 올바른 다르마(法)에
의한 통솔은 불교도가 실천을 해야하는
대중에 봉사하는 윤리덕목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재가신도 가운데 가장 대중을 잘
다스리고 있는 핫땃가 장자에게 "그대는
대중을 통솔할 때 어떠한 방법으로 통솔을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4섭사(四攝事)에 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섭사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4종의 섭사(攝事)를 말한다.
여기서 섭(攝)이란 섭수(攝受)의 의미이며,
사(事)란 문제점을 뜻한다. 사람들을 섭수하고
조숙(調熟)하는 방법에 4종이 있음을 말한다.
이
사섭사는 원시불교의 실천윤리 덕목의
하나이며,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보살의
이타행(利他行)으로서 매우 중요시 되었다.
4섭사를 좀 더 부연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보시섭(布施攝)이란,
재물(財物)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재물을
베풀고 법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법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이에 의하여 친애(親愛)의
마음을 일으켜서 차츰 가까이 되어 거기에
밀접한 인간관계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애어섭(愛語攝)이란,
아름답게 부드럽게 애정에 찬 친한 말로서
상대의 사람에게 말을 걸면 상대의 사람은
그 애어에 의하여 친애의 마음을 일으켜서
차츰 가까이 되어 거기에 밀접한 인간관계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다음에
이행섭(利行攝)이란, 사람들의 근기나
경우 등을 잘 살펴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도우며, 협력하며, 이익케 하는 것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친애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
가르쳐 이끄는 것이다.
이
4섭사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운용(運用)하기 위한 섭수하는 일이다.
가정에서 이 4섭사를 행하지 않으면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존경도 공양도 받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은 자식을 사랑과 지혜의
4섭사로 보살피어야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 이 진리의 실천이
가정 뿐이겠는가 더불어 사는 구성원은
모두 통솔자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실천을
해야 할 대중봉사의 윤리덕목이다.
@특집/
북한의 불교와 명찰 / 북한불교의 오늘
/ 신법타 스님
북한의
김정일은 오는 9월 9일 북한정권수립일을
기해 주석직에 공식 취임할 것으로 보인다.
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
북한 체제는 유훈통치로 일관되었다.
수
년간의 연이온 수해로 인한 산업마비,
식량난 가중으로 북한은 정권 유지조차
어려올 뿐만 아니라, 북한사회 자체가
좌초할 운명에 빠져 있음을 현실로 볼
때, 향후 북한사회는 개방이 예상된다.
예상된
미래지만, 아직까지 김정일의 국가경영
하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
이미
자신의 가신으로 체제를 구축한 김정일은
북한 단독으로 미. 일외교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김정일 정권과 주민은
미국을 가장 대표적인 제국주의로 증오할
뿐 아니라 6.25 한국전쟁시의 경험을 통하여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이
미국을 통하면 남북한 문제는 무엇어던지
해결할 수 있다는 미국의 힘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북한 정권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북한이
대미.일 외교를 통해 자국의 실리주의를
얻거나 통일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남쪽에
한국정부가 존재한다는 실체를 부인하는
상황 하에선 한반도의 통일은 있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가 남북의 분단 상황을
배제하고 북한의 불교를 본다는 것은 너무
현상에 얽매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북한 불교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것은 분단이라는 현실인식과 객관적인
자료에 의거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의
불교를 대표한 단체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이하 조불련)이다. 1979년
5월 16일 인도 원탁회의에 참가하면서
대외활동을 본격화하였다.
반면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불련의 조직은 특별한
기준없이 조직개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국가 시책에 부족한 업부를
추진하거나 외교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당의 지시로 조불련의 직제가 개편될
수도 있다.
조불련의
위원장은 학림 박태호 대선사이다. 그는
한국의 경우 북한불교의 종정격인 위치에
있으며, 현재 80세의 나이로 연로하여
실제적으로 조불련의 종합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은 우리의 총무원장과 격을 같이하는
서기장이 주로 맡아서 하고 있다. 그리고
외교적인 입장의 역할은 조불련상무위원인
유성철씨가 주로적인 일을 하고 있다.
그는 1984년 10월 북한이 한국에 수재지원
물품을 인도할 당시, 인천항을 방문하여
실부 대표를 맡은 바 있다. 그리고 홍화두
고문과 황병대부위원장 북한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소개된 사람은 총 20여명
안팎이다.
1997년부터
김정일 체제는 '식량난 극복'과
'경제회생'이란 두 가지 난제중에서, 조불련은
전자인 식량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해 남북불교 교류의 행보도 지난
1991년 미국 LA남북합동기원법회 이후
종교적인 측면에서, 당의 지시와 목적을
내포한 종교활동에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97년 과 금년 부처님오신날 봉축공동발원문을
발표하여, 한국 불교계의 주장을 수용하는
궤적을 남겼지만, 이후 한국의 불교계와의
교류태도는 한국내 불교단체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다각적이고 지속적인 방법으로
대북지원을 추동하고 있다.
우리
불교계가 1991년 이후 북한불교와의 교류시도에
조불련을 당사자로 인정한는 것은 통일한국이
도래할 때 불교의 역할을 신중히 고려.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간의 통일과정이나
통일후에 대한 준비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북한의 국보물급 문화재를 불교가 지켜오고
있는 정형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1984년
6월에 묘향산 보현사에 팔만대장경보존고를
건립하였고, 1992년 평양 광법사 복원과
승려교육기관인 불학원(佛學院)의 이전과
1994년 북한에서 최대규로의 종교시설물로
인정하는 평양 정릉사를 단군릉 복원에
맞추어 복원하는 등, 문화재의 복원과
복구 사업이 정부적인 지원 하에서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불교가
통일의 중요한 문화적인 동질(同質) 인질를
가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1995년 12월 26일에는 이례적으로 평양에
위치한 용화사에서 조불련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북한 종교계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공식행사를 가지는 등 대내외적인
기능과 역할을 보여주었다.
남북불교
교류시에 주요 시안으로 등장하는
분야에는 역시 사찰의 복원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조불련은 우리와 같은 독자적인
사찰복원이나 종교행사를 추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찰의복원문제는 한국의
문화재관리국과 같은 '유물문화총국'의
결정과 시행에 의존하고 있으며, 기타
종교의 교류도 당으로부터 직접적인 허가를
통해서 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남북한간의 불교경전 등 학술적인 내용의
교류도 마찬가지다. 지난 1989년에 해제판으로
발간된 해인사 고려대장경과 동일한 팔만대장경
해제본 전 15권의 경우, 북한 정부의 지와
지원 하에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소장
홍기문)가 단독으로 역경사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조불련과 연관이 깊은 사찰의 복원과 역경
사업이 북한 정부의 관할 하에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조불련의 역할에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은 북한의 모든 종교가
활동에 통제와 제한을 받고 있는 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불교는 1988년부터 북한 당국에
의해 복원된 사찰과 불교경전의 역경사업이
꾸준히 추진되고, 사찰에 스님이 살고
있으며, 부정기적으로 법회가 열리는 등
종교의 본질적 기능에서는 부족하지만,
우리는 문화재 성격의 사찰 복원, 불교경전
번역과 사찰법회 등을 통해 북한 불교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수 있다.
@특집/
북한의 불교와 명찰 / 금강산의 명찰들
/ 정재훈
금강산은
부처님의 정토이다.
그리운
금강산의 노래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금년 가을에는 금강산 답사 길이 열린다하니
벅찬 기대감이 인다. 지금 우리는 IMF사태
속에서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실직당한
수백만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이 절박한 시대에, 금강산을 찾아가서
부처로 경계하기 위하여 쓰는 군사비를
모두 털어서 그 돈으로 남북의 구조조정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경제안정기금으로
사용해도 되는 세상이 되도록 해주십사
하는 소망이다.
금강산을
찾아가는 날에 우리는 금강산의 명찰들을
답사하게 될 것이다. 금강산의 대표적
명찰들을 열거해본다.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에 위치한 신계사(新溪寺)터가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로 조선시대에
중창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20여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에 전부 소실되었다.
신계사 대웅전은 정면 3단칸(길이 12.45m)측면
3칸(길이 7.5m)의 다포집 건물이었다.
대웅전 마당에는 고려시대 3층 석탑이
서 있다. 이탑은 상륜부가 없으며 층 높인느
4m에 이른다. 1층 기단에는 천인상이 조각되었고,
2층 기단에는 한면에 좌우 2구씩 8구의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앞으로 이
신계사를 남북의 힘을 합해 복원한다고
하니 참으로 뜻깊은 사업이 될것같다.
유점사(愉岾寺)는
고성군 월비산리에 있다. 유점사는 금강산
안데 있는 60여 사찰의 대본산(大本山)으로
금강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신라시대
창건으로 조선시대에 중창되어 대웅보전.
능인전 . 산영루 등 6전(殿), 3당(堂),
1문(門), 3루(樓)를 비롯한 40여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1951년 모두 전소되었다. 우리는
저 유명한 유점사 53불의 기록을 잘 알고
있다.
조선
말기에 세운 9층석탑과 임진왜란 때 승군
대장인 사명당(四冥堂)의 초상등이 유점사에
보존되어 있었다. 유점사에는 1729년 (영조
5년)에 주조한 범종이 현재 남아 있는데
높이 1.5m, 둘레 3.6m, 무게 7.2톤에 달하는
큰 범종이다.
장연사(長淵寺)는
금강군 내강리에 있는데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2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2층기단 면석에는
탱주가 양각되어 있는 제 각면탱주를 양분한
좌우면에는 각 1구씩의 신장상을 조각하여
각면 2구식 도합 8구가 배치되어 있다.
신장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정교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이다. 1층 탑신에는 직사각형의
감실이 있고 그 안에 금동 장식판을 붙여던
자리가 남아있다.
금강군
내강리에는 금장암(金藏庵) 사사자탑(四獅子塔)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높이가 3.87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히고
중앙에 비로자나불좌상을 안치하고 그
위에 탑신부를 형성하였다. 석사잔느 대석과
동체를 한돌로 조성하였는데 앉은 키가
1.1m이며 부리부리한 두 눈과 모발등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석사자 중앙에
앉은 비로자나불상은 높이가 88 cm이다.
이러한 석사자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조성한
전남 구례화엄사 석사자석탑을 필두로,
고려시대 석탑인 충북 제천의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석탑문화의
이채로운 형태미를 보여주는 귀중한 석탑이다.
금강군
내강리 봉래동에는 삼불암(三佛岩)이 있다.
이는 바위의 크기는 높이 8m, 폭 3.7m,
가슴너비 1.3m의 마애불 3구가 새겨져
있고 바위 뒷면에는 60개의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금강산 내금강의 삼불암과
표훈사 사이인 금강군 연래동에는 백화암(白樺庵)터가
남아 있다. 백화암에는 7기의 부도와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승장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부도와 비가 이곳에
있다. 이 부도와 비는 1632(인조 10년)에
세운 것이다.
표훈사는
금강군 내강리에 있다. 이 절은 문무왕
10년(670)에 창건되어 한국전쟁 당시에
전소되었으나 전후에 복구하였다. 반야보전과
영암전 어보각등이 있다.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이다. 표훈사는 유점사와
아울러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절이였기에
원(元)나라 황실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표훈사에는
무게 500근이나 되는 놋시루(살 40말의
밥을 지을 수 있었음)와 53개의 불상을
새긴 철탑등이 있어 유명하였다.
정양사(正陽寺)는
금강군 정양동리에 있다. 신라시대 창건으로
전한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반야전 약사전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전후에
복구하였다. 반야전은 정양사의 중심건불로
합각지붕의 다포집이다. 약사전은 6각형의
아름다운 건물로 쇠못하나 쓰지않고 건립되었다
하는데 다포양식의 집이다. 정양사 3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2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조성되었는데 현재 높이는 3.97m이다.
상륜부에는 복발과 양화. 보륜. 보개.
보주가 남아있다. 3층석탑 앞에는 고려시대의
아름다운 사각석등이 서 있는데 화사석에
둥글고 크게 낸 화창이 특이하다.
보덕암(普德庵)은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만폭동에 있다.
보덕암의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현재 건물은 1675년에
건립된 것인데 높이 약 7m쯤 되는 한 개의
구리기둥이 3층의 건물을 떠 받들고 있는
모양으로 절벽에 달아 맨 건물인데 건축기교가
대단히 특이하다. 높이 20m의 굴이 있으며
이 굴을 보덕굴이라 한다. 이 보덕굴 벼랑벽에
달아 본전 건물을 짓고 그 위에 건물을
또 올렸다. 이 집들은 초익공 양식인데
맨 아래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가운데
지붕은 맛배지붕, 맨 위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각기 다른 지붕형태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묘길상(妙吉詳)은
금강군 내강리 사선계에 있는 마애불로
고려말의 나옹스님이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묘길상은 미륵대의 절벽에 새긴 미륵좌불인데
높이 1.5m, 너비 9.3m로 북한에 서 제일
큰 마애불이다ㅣ. 이 마애불 앞에는 높이
3.66m의 거대한 사각형 고려등이 서 있다.
우리가
금강산을 답사하는 날에는 금강산의 이
귀중한 불적들을 소중하게 보호하고 정성껏
가꾸어 나가는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화엄경의
세계 / 화엄경의 개요 / 이도업스님
경(經)의
종류
현존하는
화엄경에는 『60화엄』 『80화엄』 그리고
티베트어로 된『 장역화엄(藏譯華嚴)』
등 세가지 종류의 완전본과 이 경의 일부분인
「입법계품」 만을 번역한 『40화엄』이
있다.
이
가운데 『장역화엄경』을 제외하고, 우리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고 또 자주 읽고 있는
세 가지 화엄경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자.
첫째
「60화엄」은 3본 화엄경 중에서 가장
오랜된 것이다. 불타발타라가 동진(東晋)의
수도 건강(健康)에 있는 도량사라는 절에서
2년 3개월 에 걸쳐 번역해 낸 경이다.
418년 3월에 번역을 시작해서 420년 12월에
교정을 마쳐 완성해 냈다고 한다.
이
경은 60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60화엄』이라
하고 동진 때 번역되었기 때문에 진역(晋譯)이라고도
하며, 신역(新譯)에 대한 대칭의 뜻으로
구역(舊譯)이라고도 한다.
다음
『80화엄』은 실차난타가 695년부터 699년까지
4년에 걸쳐 번역해 낸 경이다. 이 번역작업에는
보리유지와 의정 그리고 중국 화엄의 대성자
현수 법장(法藏)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
경은 80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80화엄』이라
하고 당대(唐代)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당경(唐經)이라고도 한다. 9회에 걸쳐서
설해졌는데 39품으로 되어있으며 『60화엄』
보다 ]문장이 아름답고 그 내용 또한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다음
『40화엄』은 완전본이 아니라 「입법계품」만을
떼어 번역한 것으로써 「입불가사의 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
이 경의 본래 이름이다. 줄여서 「보현행원품」이라고도
한다. 반야(般若)삼장이 798년에 번역한
것인데 40권으로 되어 잇다.
재미있는
것은 『69화엄』이나 『80화엄』에는 전형없는
보현보살의 10종 대원 이 첨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60화엄경』이나 『80화엄경』의
「입법계품」에는 없는 보현보살의 10종대원(十種大願)이
40화엄경의 제일 마지막 권인 제 40권에,
그것도 이 권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들어
있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원을 첨가해서
번역한 반야 삼장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경(經)의
구성
화엄경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7처 8회
34품으로 되어있는 경과 7처 9회 39품으로
되어있는 것이 있다. 전자는 60화엄경이고
후자는 80화엄경이다,
60화엄경을
중심으로 해서 이경의 구성을 살펴보면,
제
1회 적멸도량에서는 제(1) 「세간정인품」과
제(2) 「노사나불품」의 2품이 설해지고
있는데, 80화엄결에서는 「노사나불품」을
그 내용에 따라 세분화해서 5품으로 나누고
있어 결국 이 회(會)에서 6품이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번역자인
실차난타의 구상에 의한 품수(品數)의
변화일 뿐 그 내용상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
제
2회 보관법상회에서는 제(3) 「여래명호품」에서부터
제(8) 「현수보살품」까지 6품이 설해지고
있는데 이 2회(二會)의 설법은 지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제3 도리천궁회에서는
제(9) 「불승수미정품」으로부터 제(14)
「명법품」까지 설해지고 있고, 제4 도솔천궁에서는
제(19)품 제(20)품 제(21)품의 3품이 설해지고
있다. 그리고 제5 야마천궁회에서는 제(15)
「불승야마천궁계찬품」으로부터 제(18)
「보살10무진장품」까지 4품이 설해지고
있다. 제6 타화자재천궁에서는 제 (22)
10지품으로부처 제 (32) 보광여래성기품가지
11품이 설해지ㅣ고 있고, 이상의 4회의
설법은 천상에서 설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80화엄경에서는
이 회에서 제 (22) 10지품만 설하고 나머지
10품은 장소를 바꿔 지상의 중각강당(重閣講堂)에서
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60화엄경에서는
없는 10정품이 새롭게 추가되어 설해지고
있다. 제 7회 보광법상중회엔서는 제 (33)
이세간품 1na만이 설해지고 있고, 제 8회
서다원림회에서는 이 경의 마지막 품인
l제 (34) 입법계품이 설해지고 있다.
한
장소에서 한 부처님께서 하나의 경을 전부
설하고 있는 경우와는 달리 장소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다시 지상으로
옮기면서 여러 보살들이 교대로 나와서
설법하는 형식으로 이 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연출이라 생각된다.
경(經)의
특징
이
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경의 특징은 성도후 2, 7일 때, 중생들의
근기에 관계없이 깨달은 진리를 그대로
해인삼매 속에서 설했다고 하는 점이다.
세친은 이 경의 설시(說時)를 성도 후
2, 7일 이라고 말하고 있고, 법장은 이
경을 해인삼매정중설(海印三昧定中說)이라
말하고 있다.
둘째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경을
설법장소를 지상 →천상 →지상으로 옮기며
설하고 있다는 점과 장소에 따라서 붓다는
침묵하고 있고 여러 보살들이 돌아가면서
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각 품을 성립사적인 면에서 보면 시간상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0지품」은 그 성립연대가 상당히 이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4성제나 12연기설과
같은 초기불교의 교설이 매우 자세히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왕여래성기품」은
그 성립연대가 상당히 늦은 것을 알수
있다. 중기 대승불교사상인 여래장적인
사상이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이 경의 주제(중심사상)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이 경에는 단일의 주제가 설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내용이
설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엄경을
여러 사상의 보고(寶庫)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다음 회에서 ,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해
볼까 한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깁갑주 부총장 /편집부
경주캠퍼스
정각운 이봉춘(불교학부 )법사는 8월 19일
신임 부총장 김갑주 교수와의 대담에서
취임 소감과 본교 발전에 대한 의지를
들어 보았다.
이봉춘
법사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을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갑주
부총장님: 앞으로 저는 건학이념에 철저히
입각해서 자비사상을 실천하고 교육개혁에도
이바지 하겠습니다. 우리 동국가족과 함께
불교인의 자존심을 지켜 동국발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앞장 서겠습니다.
이봉춘
법사님: 부총장님께서는 한국사를 전공하시고,
불교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의 사원경제연구'와
오늘의 문제와는 어떻게 연결할 수 있겠습니까?
김갑주
부총장: 노동력의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오늘의 우리가 크게 본받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실록에도 나와 있듯이 승려
한 사람의 노동력은 평민 서 너명의 몫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파서 누워있던
승려라도 운력을 한다면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동참했습니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억불정책
하에서도 국가에 재난이 닥쳤을 때에는
공동체 의식을 잃지 않고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동참하였는데 오늘날의
우리들은 적당히 너무 쉽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타깝습니다.
또다른
예를 들면 문민정부 때에 국방부 훼불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사장 큰사님께서 정부와의
면담 요청으로 대통령을 접견했을 때라고
합니다. 정부의 사과와 함께 불교계의
많은 협조를 부탁했을 때, 이사장 큰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국가가 아무리
불교를 억압하고 탄압을 해도 우리 불교는
국가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도와주고
헌신하는 호국불교 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가 사회 비판적인 세력이 아니었고
승가는 긍정적인 대자비심으로 이 나라를
지켜왔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많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었고 사원경제 연구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봉춘
법사님: 불교의 인접 학문은 정신에서
물질에 이르기까지 개척, 개발하면 할수록
불교를 떠나서는 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부총장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김갑주
부총장: 한국문화의 뿌리는 신라문화입니다.
신라문화는 바로 불교가 뿌리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의 지주는 불교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해도
전통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불교가 맞습니다.
사실 경주는 기독교인들의 선교 제 1대상지역입니다.
불교의 보급지역의 정서를 흔들어 놓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만은 우리나라의 정서에는
불교가 알맞고, 저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국대학교에 재직중이고 또 역사를 공부했고
더욱이 사원경제를 연구하다가 보니까
불교와 더욱 친밀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봉훈
법사님: 불교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었는지요?
김갑주
부총장님: 저의 집이 종가입니다. 위로
누님이 다섯 명이었습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어느 절에 잘 아는 보살님이 생남불공을
잘 해줘서 바로 위에 형님과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랬었기
때문에 어머님께서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는 한국사를 공부하게
되고 사범대학을 나와서 동국대 대학원과
인연이 닿았고, 사원경제를 연구했고,
동국대에서 교수를 하게 되었기에 아마도
저는 전생으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이어져서
동국대에 머물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봉춘
법사님: 부총장님께서 평소에 좋아하는
경구(警句)가 있으시다면은 어떤 것입니까?
김갑주
부총장님: 평소에 저는 반야심경을 수지독송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능인 고등학교
재학 당시에 들었던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저를 불교인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가 참 재미있는 것이 옛날 어느
절에 두 스님이 살았는데, 하루는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 갔습니다. 절집에서
동생이 되는 한 스님이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다른 길목에서 기생들과
춤을 추고 노래하는 형이되는 스님의 행각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여 절로 돌아홨답니다.
그동안 형님이라고 믿고 따르고 의지했던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에 사형이 돌아오기만
하면 따져 보리라 작심을 하고, 뒤늦게
돌아온 사형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에 화를 내는 사제에게 사형은 "나는
그곳에서 나의 유흥을 두고 부처님 전에
돌아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속의 유흥에
화를 내고 있느냐?" 그랬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굉장히 크게 와 닿았습니다.
때문에 '방하착의 교훈', 그 지혜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어느 절대자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니
차별없는 자율성이 저의 믿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봉춘
법사님: 바쁜 시간 재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동국가족에게 부탁 말씀해
주십시오.
김갑주
부총장님: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를 생활화
하자' 그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절에
다녀야 하고 염불을 해야 하고 절도 해야
하겠지만, 저는 학생들에게 단정한 모습으로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 실천할 수 있는 일이고, 바로 보시라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더불어서 마음 속에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자비심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불심의
창 / 깨달음과 미 / 김대열
가섭(迦葉)이
꽃을 보고 부처님께 미소로 답한 의미는
물엇인가?
우리
인류는 언제부터인지 꽃을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완상(玩賞)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꽃"하면 바로 "아름다움"과
연관되며, 그밖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도
꽃을 들어 비유하고 있다.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만상삼라가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듯이, 이처럼 꽃은 대자연중의 아름다움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아름다움"은
과연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꽃이
피었다"함은 식물의 일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즉
하나의 씨앗이 발아해서 성장의 과정에는
적당한 토양, 온도, 습도 등이 유지되어야
하며 폭풍우의 역경을 이겨냄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다. 이처럼
생명의 성장이 쉽지 않으므로 우리는 식물의
성장을 통하여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리
생명의 희열과 고난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름다움이란 바로 생명의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하겠다.
우리는
피는 꽃을 보면서 기쁨을 만끽하기도 하며,
지는 꽃을 통하여 애석함과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 즉 생, 노 , 병, 사의 인생의
전과정에서 꽃을 선물로 주고 받는데:
아이의 출생, 입학, 졸업, 취업 등에서
학업의 결속과 장래의 전도를 축복하기
위하여, 또한 결혼식에서의 꽃은 새로운
두사람의 결합을 축복하기에 아주 적합한
사랑과 기쁨의 상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사고나 발병의 위문에 있어서의 꽃은 축하의
뚯이 아니라 위안과 쾌유의 뜻이 담겨
있으며, 장례에서는 고인의 명복, 고별,
슬픔 등을 상징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꽃을 주고 받는 것이 아름다움을
서로가 나누어 향유하고져 함에 있다며,
이 아름다움은 앞 서 와 같이 인생의 길,
흉, 화, 복을 대신하고 있어 그 내용은
아주 복합적이다. "꽃"이란
단순히 혹은 생물학적으로만 말하자면
단지 식물의 생식기관에 불과하다. 꽃이
피는 것은 한그루의 식물이 그의 생명이
성숙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자아완성을
이룬 생명은 자기를 확대하고 연장하는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꽃은
바로 생명의 확대와 연장의 상징이며,
사람들은 꽃의 형상, 색채, 그리고 향기에
대해 사랑을 느낀다.
만약
우리가 꽃의 형상, 색채, 향기를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이는 모두가 "생식"을
위한 것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꽃의 찬란한 색채는 벌, 나비를 끌어들여
화분을 전파시키기 위함이며 향기 또한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듯이 꽃의 생명은 아주 짧아 어느 것은
이삼일 어느 것은 길어야 일주일 정도
유지하다 시들어 버린다. 봄은 화분수정이
제일 적합한 계절이므로 모든 꽃들이 다투어
피어 화려한 색채, 짙은 향기로 곤충을
유인하여 짧은 기간동안에 "자기
확대", "자기연장"의 업무를
마치게 되는데, 이처럼 꽃이 기승을
부리며 아름다움을 뽐내는데는 생명존재의
노력이 숨어 있다.
우리는
꽃을 사랑하고 꽃의 생명에서 아름다움
느끼며, 이를 다은 사람과 나누어 향유하고자
함은 바로 우리가 꽃을 통해서 자기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은 그와 함께 꽃의 생명을 나누어
즐기고자 함이며, 우리는 꽃이 피고
지는 모든 과정에서 그때 그때 마다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바로
자기의 생명에 대한 애착과 그립고 아쉬움에서
오는 마음의 표출인 것이다.
가섭은
이런한 생명의 진제를 꿰뚫어 보고 스승에게
미소를 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염화미소(炎火微笑)"의
고사로 여기서 "깨달음"과 "아름다움"을
잘 말해주고 있다.
부처님은
생명의 도리를 전포(傳布)하는 인류의
스승으로 항상 꽃피고 아름다운 숲속에서
생명의 진제를 가르쳤다. 어느날 법회
중에 돌연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꽃 한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모두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두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가섭만이 미소로서
답한 것이다. 스승은 기뻐하며 그 꽃을
가섭에게 전해주게 되는데, 이는
바로 일체 생명의 진제를 언어문자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다.
이는
또한 "꽃"을 매체로 하여 생명의
진면을 이해시킨 최초의 예라 하겠다.
한
송이의 꽃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은"깨달음의 미(美)"의
시작이며, 역시 "깨달음의 예술"의
시작이라 하겠다.
@수행의
길 / 불교의 수행과 실천 / 정성본 스님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각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즉 기독교 나 이슬람교처럼
절대적인 존재자로서의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처럼 단순히 부처님을 신봉하는
믿음의 종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직접 자각의 체험을 통해서 설하여
가르치신 일체의 모든 법의 진실된 도리를
각자의 수행을 통해서 추체험하고 확인하여
자아의 인격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 모두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개발하여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실되고 참된 자아완성의 인격과 행복된
삶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실천적인 구조를 일반적으로 신(信),
해(解), 행(行), 증(證),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각자가
확신하고, 잘 이해하며 스스로 실천을
행하여 직접 진리의 세계를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信)의 대상은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 이며, 도한 각자
불타가 될 수 있는 근거이며, 자각의 주체인
불성이다. 여기서 신(信)이라는 말은 범어
sraddha로서 구(俱)도론에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信)은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적에 유훈(遺訓)하신 말씀
가운데에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도록 하라 (自燈明 法燈明)」는
것은 불교의 믿음이 교주인 석가모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리의
가르침에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불법의 대해인 진리의 세계에 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은 신심을 가져야 하며, 깨달음의
지혜로서 무사히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를 배우고 스스로
불법의 세계에 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화엄경(華嚴經)에서도
「믿음은 불도의 근본이며, 모든 공덕을
낳는 어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의 신심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출발이며 현관인
것이며, 불법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통로로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실천행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기본적인 교설인 사성제와
팔정도, 그리고 육바라밀의 보살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팔정도란 모든 존재와 진실을 올바르게
볼 줄 아는 안목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올바른 생각과 바르고 부드러운 언어(正言),
올바르고 점잖은 행동(正業)으로 올바르고
밝은 자기의 생활(正明)을 방일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며(正精進), 건전한 사려와
주의(正念)로서 언제나 선정을 통한 안정(正定)과
편안함으로 자기의 삶을 진실되고 행복되게
구현하는 실천덕목인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의 정견은 사성제의 진리와 연기의
법칙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깨달음의 힘을 말하며,
이것은 대승불교이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의
지혜에 해당된다.
사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의 수행과 실천은 스스로의
자각을 통한 일체의 존재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불유교경(佛遺敎經)에서「
지혜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이 고해(사바세계)를
건너 갈 수 있는 배와 같고, 무명(無明)의
둠을 비추는 밝은 등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환자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양약(良藥)이며, 번뇌의 나무를 찍는 도끼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법문을
듣고 사유하며, 스스로 지혜를 키워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지혜는 제법의 실상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 있는 직관적인 힘인 것이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올바르게 이해하여 위와
같은 실천을 거듭 반복하여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된 종교적인 통찰력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곧 제법의 본래 모습을
올바르게 체득한 자각에 의한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각적인 지혜로서 모든
사물(法)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여
스스로의 인격을 일상 생활에 평안하게
전개하는 것이다. 이를 생활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불법의 참된 도리를 깨닫고 지혜를
체득한 사람은 自內證(自覺)의 세계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慈悲心)과 서원(誓願)을
일으켜 지혜의 광명을 밝히어 사바세계의
고해에서 허덕이는 몽매한 중생들이 모두
불법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보살행을 전개해야 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인격의 구현은 이처럼 각자의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보살로의 실천과
교화를 전개하는 「上求苦提下化衆生」의
自利利他의 보살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불·보살의 지혜광명이
중생구제의 자비로서 승화되는 것이기에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
일주문 / 자연과 인간 / 이법산 스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복제 인간까지 생산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며 자연에 생명을 의탁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해
가면서 함께 존재하는 것일 뿐 독자적인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아무리 첨단과학이
인간을 구제하고 편안하게 해도 천재지변에는
속수무책이다. 인간이 즐기기 위해서 건설한
골프장이 산사태의 원흉이 되고, 시원하게
살기 위해 설치한 에어콘 ·냉장고에서
흐르는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문명의 이기를 만드는 공장이나 편하게
다니기 위한 자동차에 서 내뿜는 매연이
깨끗하게 마셔야 할 생명선인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비록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문명의 이기로 비명횡사하는 생명이 얼마나
많은가. 이번에 게릴라성 기습 폭우로
휩쓸려간 재산과 흘러간 생명도 원인을
논한다하면, 인간의 방심과 자만에 자연이
철퇴를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개발도 그만하고 공장도 그만 지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게 겸손해야 한다.
지구 구석구석에 감추어진 온갖 에너지를
샅샅이 파먹어 버리고 나면 후세의 사람들은
무엇에 생을 의탁해야 할런지....그리고
지구는 어느 한 인간의 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고 있다.
대형사고와
천재지변이 속출하고 있는 현실은 자연으로부터의
인과응보임을 각성해야 한다.
과학의
발달과 자연의 무리한 파괴적 개발은 반드시
인간의 파멸을 가져올 징조일 것이다.
인간만이
인간을 전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
있고, 인간만이 서로 시기하고 남을 죽이기
위하여 온갖 꾀를 부리고 있다.
석가
·예수 ·공자 등 모든 성자는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적 윤리와 도덕을
존중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더불어 살 것을
호소하였지만 인간은 성자의 근본 가르침을
등지고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뺏을 것만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학문을
하여서 무얼 하며, 수행을 해서는 어디에
쓰자는 것인가.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학문이어야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영원할
수 있으리라.
하늘을
보고 침을 뱉으면 자기 얼굴을 더럽힐
것이요, 그렇다고 땅에다 뱉으면 자신이
돌아 갈 곳이 없으리라.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곳, 서 있는 바로 이
곳에 침을 뱉지 않고 담배꽁초, 휴지를
버리지 않는 것이 자연보호의 첫걸음이다.
인간! 나의 생명이 귀중하다면 부디 자연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신행상담
/ 유의와 무위 / 장계환 스님
불교교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깊이가 있는 반면에,
또한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요즘은 유식(有識)에 관심이
있어서 그 방면의 책을 읽고 있는데 생소한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에 대한 설명은 몇 번 되풀이하여
읽어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옆에다 사전을 두고 찾아보기도 하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화를 들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사회과학대학
신문방송학과 : 송일도)
질문하신
유위와 무위는 보통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용어입니다. 먼저 유위란 여러 가지 요소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 즉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적인 존재를 통털어서
지칭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고 연을
쫓아서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상(無常)의 현상을
옛날 스님들은 물 속의 달이나 아침 이슬,
혹은 번개불과 구름, 그리고 불거품과
꿈 등에다 비유하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비바사론(毘婆沙論)에는 이러한 비유가
나옵니다. 유위법은 열등하여 여러 인연의
힘을 빌려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무위법은
수승한 작용이므로 인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열등한
사람들은 남을 의지하려고 들지만, 자신이
있는 사람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위법은 우리가 되도록 이면 초탈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멀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병'이나 '재앙'에다
비유하여 부르고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위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분에 자성이 없고, 또한 이것에 집착하면
고뇌만 생길 뿐이지요, 그것은 마치 뜨거운
금덩어리와 같아서 보물이긴 하지만 손에
쥐면 화상을 입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유위의 세계는 생멸변화가 끝없이 이어지는
무상의 세계인데 반하여, 이를 초월한
무위의 세계는 인연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구불변한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가르킵니다.
따라서
무위란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토끼의 뿔 (토끼는 귀가 있을 뿐, 뿔은
없으니까 결국 존재하지 않은 것의 비유)과
같이 (無體)이고 또한 어떠한 인연법으로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애(無碍)를 본성으로 삼고 있어서
허공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강물이 흘러들어 큰 바닷물을 이루듯이
무위 또한 법성이 평등하므로 바다에다
비유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모든 사물을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지만, 우리네
주변만 살펴보더라도 금방 알 수가 있듯이
책상, 신발, 옷 그 어느 것 하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들 육신도 무상하기는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즉 유위법으로
이우어진 것들은 생멸을 거듭하지만, 반대로
인연을 초월한 열반이라든가 불성 등은
무위법이므로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이 어느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명할 것입니다.
@신간안내
/ 인도철학과 불교의 실천사상 / 정태혁
박사
1.
우리
불교학의 학맥(學脈)을 이어온 큰 스승들의
삶과 학문세계에 대해서는, 참으로 송구스럽지만
, 아직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전해받은 전통이 무엇이며,
또 그러한 전통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학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무지한 형편이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연구사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우리 불교학 연구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은 앞으로 후학들의
연구를 위해서 큰 의미를 갖는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름으로
'학문의 큰 산 ' 이었던 학자들의 논문과
글들 모으고, 정리하여, 펴내는 일이 긴요하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향운(香雲) 정태혁박사의
논총≪인도철학과 불교의 실천사상≫은
하나의 모법사례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2.
정태혁
박사의 학문세계는 남달리 호환하고 방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실로 평생을 거쳐서 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자신의
학문 영역을 넓혀왔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먼저 박사님의 학문적 영역과
특성을 몇가지로 정리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범어(산스크리트어)와
서장어(티벳어)를 통한 원전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교리해석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한문으로 번역된 2차 자료에만 의지하여
불교를 연구하던 종래의 연구 풍토를 일신(一新)한
것이로서 불교학 연구의 신기원을 연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불교학 연구에
뜻을 둔 후학들이 범어와 서장어를 학습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이같은 박사님의 선구적 업적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둘째,
인도의 철학·종교 연구를 개척한
업적을 들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 인도철학과
종교에 대한 연구는 1964년 동국대에 인도철학과가
창설된 이래로 본격화된다. 그 이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중심으로 인도철학과 관련하에
불교를 행하는 것이 하나의 '東國學風'
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박사님이
회장을 맡고 있는 "인도철학회"의
활동은 순전히 그러한 흐름이 모여서 더욱
큰 흐름을 만들고 있는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특히 요가와 밀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으셨다. 불교학의 여러 부문 중에서,
어떤의미에서는 , 가장 난해한 영역이
밀교라 할수 있다. 그것은 밀교 속에 비불교적인
인도문화까지 습합되어 있으며, 원전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해독이 불가능한 문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3.
위에서
살핀 것은 양적 측면이며, 이제 질적인
측면을 살펴 보기로 하자. 박사님의 호환한
학문 세계를 한 마디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것을 찾자며, 바로 "실천"해
오신 이래, 한 사람의 "지사(志士)"로서
뜻을 세운 삶을 살아 오셨다. 때로 민족운동,
때로는 문학, 때로는 구도(求道)의 길을
걸으셨다. 교육자의 길 역시 국민학교
교사로부터 대학 교수까지 역임하셨다.
이러한 삶의 맥락 속에서 태어난 학문이기에
자연의 여가 ·진언 ·염불·
禪 등의 "수행"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시게 되었으며, 또 불교의 현대적
현실적 "실천"을 지향해 오셨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논총을 한마디로
≪인도철학과 불교의 실천사상≫이라 제하게
되었던 것이며, 인도철학회는 같은 제목의
강연을 준비하여 박사님의 법문을 청법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인도철학과
불교의 실천사상≫은 전체 22편의 논문을
3부로 나누었다. 1부는 원리편, 2부는
수행편, 3부는 응용편이다. 편집의 실무담당자였으며,
박사님의 제자인 동국대 정승석 교수의
편집자 서문과 부록에 붙인 박사님의 삶과
학문세계 등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그러나
, 무엇보다도 이 책의 백미(白眉)는 책머리에
붙인 〈나를 보는 후학에게 〉이다. 사실
일생의 학문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남다른
감회가 구구절절 없지 않으셨을 터인데,
어떤 시보다도 더 깊은 울림을 울게 한다.
지난
날은 아름답고 오늘은 만족한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직
회한과 아쉬움만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속에서도 불법을 만난 고마움과 불덕의
무량한 빛에 싸여있는 나를 보았으니,
이보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
가람의 진수 / 미륵도량 금산사 / 유문용
전북
김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수평선이 아니라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반도지역
이여서 수평선은 얼마든지 볼 수가 있지만
국토에 70%가 산으로 된 우리나라이ㅔ
이 넓은 평야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수리사업을
했는데 지금도 잘 남아 있는데 농수로에
제방과 수문(水門)이 남아 있는데 그 유명한
벽골제(碧骨堤)라는 제방도 있다. 이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제방인데도
지금도 3키로 300미터나 남아있다. 백제
비류왕 27년 서기로 330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수로는 지금도 사용을
하고 있다.
금산사는
이 김제평야 동쪽에 모악산(母岳山) 서기편기슭에
있다.
이
절이 있는 산은 원래는 우리말로 "엄뫼"라고도
불려졌고 "큰뫼"라고도 했다고
한다. "엄뫼"는 어머니산이란
말이 되고 어머니산이 모악산이 되었다고
한다. "큰뫼"는 금산이 됐다고
하는데 금속 중에서 금이 가장 으뜸이라서
말에 음역으로 비슷한 금산으로
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악산 정상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바위가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라고 한다.
김제평야에 벽골지라는 못에서 물길을
대서 농사를 지었는데 여기 벽골지로 흘러
들어오는 물줄기가 모악산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줄기가 모악산에서 흘러온다고 해서
근원(根源)이란 뜻으로 어머니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금산사
사적기에 보면 금산사에 창건은 백제 법왕
1년 서기 600년에 왕에 복을 빌기위해서
헤워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큰
규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진표율사에 의해서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12세기에
금산사에서 계법을 받아 스님이 되었고
불법을 정진해서 미륵과 지장에세서 계법을
전해 받고 신라 경덕왕 21년 769년부터
766년까지 4년동안 중창불사를 했다고
한다. 이때 미륵장육사을 조성해서 전각에
모셨다고 한다. 아마 지금 있는 3층 건물의
미륵전이 이때 처음 세워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때 진표율사는 왕에게 보살계를 주고
왕실의 종친들에게도 계품을 주어 그 보답으로
받은 조 7만 7천석과 명주 500필, 황금
50냥을 받아 가지고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존상을 주존으로
모시고 미륵정토의 도량을 이룩하여 금산사가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그
이후 고려시대에 혜덕왕사가 대가람으로
다시 중창을 했다고 한다. 혜덕왕사는
당시 법상종의 대종사이며 주지로 있으면서
불경을 간행하고 법석을 여는 등 법상종에
대총림으로서의 대가람을 조성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오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가람 전체가
소실이 되고 3년 후에 다시 불사를 시작해서
3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불사가 이루어
졌고 인조 13년 163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대가람이 준공되었다고 한다.
절의
입구에서 모퉁이를 돌아보면 미륵당이라는
집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미륵부처님은
근래에 다른데서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매표소옆에 성문이 무너진 것 같은 것이
보인다. 이러한 성문형식은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이런
성책을 쌓고 성문을 만드는 것은 주로
왕사나 국사가 주석을 하고 있거나 왕의
원찰이 되었을 때 이런 성책을 쌓게 되는데
낙산사의 성문은 지금도 잘 남아 있지만
이 금산사의 성문은 거의 허물어지고 성문에
있는 홍예돌하고 일부 육축만 남아 있다.
모악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류를 왼편으로 끼고 가다가
보면 다리를 지나가게 된다. 마음과 몸을
이 맑은 물에 말끔히 씻어버리고 성지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일주문에는
"모악산 금산사"라는 현판이
있다. 대개 이 문은 산사에 들어가는 첫
문이기 때문에 산문이라고 한다. 이 집은
1975년도에 새로 지은 문이다.
오른편에
보면 돌각담으로 둘러 처져 있는 속에
부도가 서 있다. 이 부도는 처사 "김준영"의
부도인데 이 절에 공헌이 많고 공덕이
많았던 모양이다.
가람의
입구에 금강문이 있는데 이 금강문에는
"모악산 금산사"라는
편액이 내리다지로 길게 돼 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편액이 아니다.
절에
들어가면서 있는 당간지주는 보물 28호로
지정된 것인데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성보 문화재이다.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잘 남아 있다.
곧바로
들어가면 보제루가 있는데 대 법당에서
큰 법회가 있을 때 예불장으로 활용되는
곳이다.
오른편에
거대한 미륵전이 있고 마주 보이는 곳에는
엄청난 대적광전이 있다. 그런데 이 대적광전은
1986년 겨울에 방화범에 의해서 불에 타고
없어졌던 것을 최근에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화재 직전에 정밀 실측이 있었고 그 설계도면에
의해서 복원된 것이다.
대적광전은
정면에 있어서 대적광전이 주 법당인 것으로
보여지지만 백제시대의 진표율사의 이념대로
미륵정토의 정수인 미륵전으로 본다면
규모로 보나 위용으로 봐서도 미륵전이
주 법당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문헌자료에 의하면 백제시대 초창기에는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존상을 조성하여 금당에
모시고 금당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는 모습을 그려서
모셨다고 한다. 조선조에 와서 임란이후에
대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미륵전이 원래
모습대로 3층에 법당을 복원하고 미륵삼존상을
모시게 되고 대웅전과 약사전 전락전이
통합되면서 대적광전을 조성한 것으로
봐서 꽤 많은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대적광전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전당으로서는 제대로 갖춘 법당이다.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을 주존으로 하고
양편에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아미타불,
약사불에 5불을 모시고 그 사이마다 6보살을
봉안했는데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셨다
원래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부처님만 독존으로
모시고 적광전(寂光殿)에는 비로자나를
주존으로 석가모니와 노사나불의 3존불을
모신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면
3존불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에 5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대적광전과
미륵전 앞마당에는 노주(露柱)라는 것도
있고 다층석탑도 있다. 이들 모두 다른
절에서 보기 힘든 성보문화재이다. 노주는
보물 2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노주는
우리 학계에서도 그 용도를 모르고 있지만
한자로 "이슬로(露)"자와 "기둥주(柱)"자로
쓰고 있어서 혹시 노천에 있는 공양대가
아닌 가도 생각을 해 본다. 이 노주는
조각의 수법으로 봐서 고려시대로 보여지고
있다.
보물
23호로 지정된 석조 연화대는 좌대의 한
변이 무려 건물 높이의 한 층이 되는 3,27미터가
되고 그 높이도 2.1미터나 돼서 엄청난
불좌대이다. 좌대가 한 돌로 돼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이 돌의 무게가
줄잡아 12톤은 돼 보인다. 이 좌대는 그
규모로 보아서 미륵장육존상이 입상으로
있었던 불좌대로 보인다.
이
석연대 앞에 까만 돌로 여러 층에 납작한
옥개석들이 겹쳐있는 탑이 있는데 보물
27호로 지정된 탑이다. 육각으로 되어
있고 돌의 재료가 오석(烏石)으로 되어
있다. 이 탑의 형태와 비슷한 다층 석탑이
몇 되는 데 해인사 원당암에 있는 다층석탑과
법주사 여적암에도 있고, 대구 동화사의
염불암에도 있다. 해인사에 다층석탑은
통일 신라시래의 것으로 보여지고 그 나머지
다층석탑들은 고려 초기로부터 중기까지의
탑들 이어서 이미 이런 다층석탑의 형식이
통일 신라 말기부터 유행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금산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3층에 법당이 미륵전이다.
이 미륵전은 국보 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미륵전에 평수는 1층이 78평, 2층이
50평, 3층이 27평이 돼서 모두 연 건평이
155 평이 된다. 높이는 20여 미터나 돼서
요즘 아파트에 층수로 7층 높이에 버금간다.
이
법에 현관도 3층에 걸려 있는 현판에 크기는
가로가 3.95미커가 되고요 세로로는 1.5미터가
된다. 그리고 1, 2, 3,층에 모두 현판이
달려 있는데 1층에는 "대자보전"
이층에는 "용화지에" 3층에
"미륵전"으로 되어 있다. 대자보전은
미륵님에 대자대비를 말하는 것이고, 용화지회는
미륵이 석가모니 입열 후에 56억 7천만년
후에 사바세계에 부처님으로 현신 하실
때 용화세계에 용화수 밑에서 설법을 하신다는
의미이다.
법당
안에 엄청난 높이에 고조들이 10개가 서
있는데 그 중에서 한 개는 한 나무로 쓴
것도 있다. 고주의 높이가 평균 높이가
13.5미터가 되니까 우리 아파트에 높이로
기둥하나에 높이가 4층이 춸씬 넘는다
.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에 높이가 10.4미터이다.
이 금산사에 미륵전언에 천정 높이가 15.48미터가
되니까 다보탑이 들어가고도 남을 높이가
된다. 용마루까지에 높이는 아파트 7층
높이에 해당하는 20미터가 된다. 법주사에
5층 팔상전이 보다 약간 적은 규모이지만
전각으로 는 이 미륵전이 제일 높은 집이다.
이
미륵전 안에 미륵 부처님에 높이가 1035미터가
되는 좌대를 포함해서 11.5미터가 되고
어깨 폭만 해도 2.63미터가 양옆에 계시는
협시 보살님들도 높이가 8미터에 어깨
폭이 2025미터가 된다. 불단 위에는 살대를
끼운 난간으로 했고 부처님에 밑에 부분까지
볼 수 있도록 불단에 밑면에도 모두 살대를
끼워서 속을 훤하게 들려다 볼 수 있게
해 놓은 특별한 구조이다.
이
집네 단청은 1897년 고종 당시에 그려진
것이 일부 보이고 있고 대부분은 1946년에
단청을 개체하면서 변모된 것이 라고 본다.
그러나 특기 할 만한 것은 이 집에 벽체와
포작사이에 있는 포벽에 돌아가면서 약
30여곳에 벽화가 조성도어 있는데 여래좌상을
비롯해서 사천왕도 있고 미륵보살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시왕도, 제석천도, 각종신종도,
인왕도, 나한도, 청의(靑衣)동자도 , 천인상도,
등 불가에 나오는 모든 신장 보살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나무에 그려진 문양도 운학도(雲鶴圖)와
봉황도, 황룡도, 황룡을 그렸고 거북,
기린, 용, 봉에 사령도(四靈圖)도 있다.
미륵전
뒤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고 그 앞에
5층 석탑이 있다. 5층 석탑은 보물 25호로
지정되었고 방등예단도 보물 2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5층석탑은 법당 안에 있는 사리탑이 아니고
방등계단 안에 있는 탑인데 고려시대에
탑으로 보여진다. 이 탑에 특징은 1층
탑신 밑 부분에 괴임돌이 한 단 첨가되는
부분이 고려시대의 특징이다. 그리고 각층에
옥개석에 밑면에 계단식으로 된 받침도
신라시대에 것과 다르게 맨 밑에 받침이
둥글게 조각된 것도 고려시대의 특징이다.
이
탑을 1971년에 해체수리를 하였을 당시에
"모악산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라는
종이에 쓴 기록문이 나왔고 구리로 만든
사리함과 비로자나불상, 관음입상, 금강상과
역사상 그리고 지장보살상 등이 금동불로
나왔고 "조선통보"라는 엽전
7개가 나왔다고 한다. 이 묵서명에 중창기에
고려시대인 982년에 중창되었고 그 후에
많은 보수가 있었다고 되어있다.
방등계단은
우리나라에 몇 군데 있지만 특히 통도사에
금강계단이 가장 유명하고 여주 신륵사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계단"이란
말은 계율을 받는 단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예전에는 스님들이 계를 받을
때에 이 계단에 와서 계법(戒法)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방등(方等)이란 말은 사부대중에게
골고루 계를 주는 곳이라고 해서 방등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이
방등계단의 구성은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널찍한 2중의 기단
위에 석종형 부도가 있고 넓은 기단 밖으로
난간이 둘러쳐져 있고 난간과 2단의 기단에는
모두 부처님 나라의 천인과여래, 보살이
조각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미륵신앙에는
상생이 있고 하생이 있다고 한다. 하생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하생인데
석가모니 입멸 후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올라가 수행을 하면서 있다가 56억 7천만년
후에 용화수밑에서 3회에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 상생은 우리가
죽은 후에 미륵이 계시는 도솔천에 가서
있다가 미륵이 하생해서 3회 설법을 할
때 같이 내려온다는 말에 의해서 도솔천궁이
있는 미륵부처님에 정토가 되고 외원에는
보살과 천인들이 거처하는 세계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방등계단을 보면 상생에 도솔천을 상징하는
곳 중에서 내원이라고 하는 곳은 사리부도가
있는 곳이 미륵정토이고 그 밑에 있는
곳이 미륵정토이고 그 밑에 있는 두 단에
기단에 조각된 보살님들과 천인상에 조각부분이
외원에 표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외곽에
둘러쳐져 있는 난간에 천왕상들이 있는
곳이 하생이라고 한다.
이
사리부도는 다른 곳에서 볼수 있는 일반적인
석종부도(石鐘浮屠)와는 다른 모습이다.
부도
윗면에 9마리에 용두가 있고 상륜이 우람하게
돼서 위에 상륜까지 합해서 보는 느낌은
다른 석종부도와는 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부도에 대리석이 또 좀
특이한데요 낮으막한 대좌를 두었다. 이
대석 위에 한가운데 부도가 앉을 자리를
마련했는데요
부도좌(浮屠座)에
연화문을 나지막하게 조각을 하고 네 모서리에
사자머리를 조각을 했는데 윗면에만 살짝
올려서 조각을 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부도위에
구룡석(九龍石)이 있는데 "계단도경"에
보면 "팔공덕을 베풀기 위한 공덕수(功德水)를
토하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물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계를 받는 수계자(收戒者)들에게 이 공덕수를
맞게 한다는 의미의 용으로 본다. 또 부처님의
출생하실 때 9마리의 용이 나타나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계를 받는
수많은 수계자들에게 아홉 방향에서 내
품는 공덕수를 맞게 해서 마음과 몸을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 부도가 있는 곳을 도솔천에 내원으로
본 것이다.
외원은
상하단의 기단으로 보는데 여기에는 모두
74분네 보살들을 모셔서 외원에 보살님들이
내원에 부처님을 외호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상하단에
기단을 둘러싸고 사천왕과 신장상들이
있는데 지금은 어수선하게 되어 있지만
주변에 난간을 둘렀던 돌들이 있다. 모두
21개가 있는 석상 중에서 10개는 인물상으로
되어 있는데 사천왕과 난간석주, 보살상들이
있다.
이
금산사는 미륵도량의 근원을 볼 수 있는
가람이지만 이 외에도 명부전, 대장전,
나한전, 삼성각을 고루 갖춘 대 총림을
이루고 있다.
@열린마당
/ 나의 신행일기 / 이익수
내가
처음 절에 나가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어머니를
따라서 였지만 그것이 신앙으로 발전한
것은 동국대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특히나
학과가 불교학과가 된만큼 자의든 타의든
나는 성실한 불교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불교인이라는 것은 나를 제약도
했지만 내가 자제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때
7년째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무척 슬퍼하셨지만 나는 그런
마음이 적었다.
오히려
할머니 입장에서는 고생하시던 모습이
평생 나와 함께 하게 될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고등하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주변의 친구들 중 여섯 명이나 사고
등으로 세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 3때에는
제법 친한 친구 녀석도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고 나서 나는 대학진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감작스런
진로 변경으로 인해 나는 1년을 학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곤 재수하는 1년동안
과학기술대에 다니던 친구가 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대학 진로는 불교
관련학과로 제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나름대로 고민도 많이 해 보게 되었다.
왜
우리내 인생은 이런 일들을 겪어야만 하는가...
벌써
대학 생활의 3/4이 지나갔다. 불교학과
4학년쯤 되면 남들은 불교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거라고 들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 그렇지 못하다. 다만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지금 아무리
골머리를 싸고 고민한다 해도 현세에서의
죽음은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학과
일에 전념하는 대신 나는 많은 시간을
불교학생회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교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과에서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회라는
것을 경험했고 수련대회를 치렀다.
특히
수련대회는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었다.
불교학생회에서는
일년에 두 번 이상 수련대회를 개최하는데
그 중 핵심은 역시 발우공양과 용맹정진이다.
수련
대회에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얻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발우공양은
자기가 덜어온 음식에 대해서 밥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으며, 설거지도 그 자리에서
스스로 해결한다.
발우고양에서는
음식이 자기에게 오게 된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해 음식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절약으로
이어져 나의 생활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또 용맹정진은 나를 바로 보게 하고 자신감을
길러준다. 3000배를 일반적으로 하게 되는데
석가모니불을 염하기도 한다. 정진을 마치고
나면 스스로에게 환희심을 느끼게 되어
신심이 돈독해 지고 자신감을 생기게 된다.
수련대회에
참가하면서 얻은 위의 두 가지는 이제
나의 삶과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나의
삶, 생활방식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는 요즘 나의 삶은 한층 더 부처님과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정각원에서 아침 일찍 예불을 올리면서
하루가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5시에 예불을
올리면서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하루가
길어졌다.
하루가
길어진 만큼 나의 생활도 보람되고 알차게
되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에 대한, 믿음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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