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정각도량 40호

차례

이달의 법문/ 불자여 현실을 직시하자 / 보성 큰스님
정각도량 / 천한 사람 / 이법산 스님
법화경 공부 /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함 / 안중철
불심의 창 / 5월에 갖는 나의 단상 / 류인수
불서산책 / 선생경 / 김호성
이야기로 배우는 불교 / 벽지불과 중생 성불 / 정승석
열린마당 / 나는 누구인가 / 이현승
가람의 진수 / 관음도량 보문사 / 유문용


@이달의 법문
불자여 현실을 직시하자 / 보성 큰스님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인연' 이라는 두 글자를 버리고는 이루어지 않는다고 봅니다. 오늘 이 법회가 마련되기까지 한 생각이 일어나므로 한 장소에서 서로 좋은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인연의 도리를 버리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연도 좋은 인연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인연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좋은 인연을 바라지, 나쁜 인연은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연을 맺고 살고 있습니다. 이 인연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연입니다.

이제 스님께서는 '이제 '라는 바로 이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자가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목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일인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일인자의 안목자가 됐다고 할 때, 그 출발점을 생각해 봅시다.

나를 버리고 이루어짐이 없다고 할 때, 지금의 나는 어떤 자리에 놓여 있나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고 할 때의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에 따라서 해야지 남을 따라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나와 멀어져 갑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스스로 가니'를 잘 터득하게 되면, 바로 '이제'라는 이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 내일을 바라지만 속아서 사는 내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 시간 '나'라는 인연을 통해 희망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평화와 행복입니다. 우리 각각의 희망이 모여 우리라는 사회 즉, 한국이라는 한 국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오늘의 한국을 살펴볼 때, 지금의 한국이 어떤 처지에 가로 놓였는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IMF라는 환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남에게 물을 것도 없고, 맡길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할 일을 내가 살펴봐야 할 때입니다.

고인(古人)의 말씀을 빌리자면 목자라는 송광사에 계셨던 보조  스님의 말씀에 '땅에 넘어진 사람은 반드시 땅을 짚고 일어나거라' 라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잘되새겨 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해진 환경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화두가 될 수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귀중한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자신에게서 산출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되새겨 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해진 환경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화두가 될 것입니다. 즉 자기 안에서 찾는다는 사람은 지극히 드문 일입니다. 반면 지혜를 갖은 사람은 좋고 나쁜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불행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항상 깊이있게 자신을 살펴 볼 수 있는 여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이금 여러분께 제일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자유인이 됩니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어떻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개개인은 좋은 장부의 바탕을 저버리고 그저 봄날의 먼 산을 쳐다보고 달음질하는 노루와 같이 앞을 제대로 보지 않습니다. 바로 그 허약한 발거음이 오늘날의 환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치인과 경제인 심지어는 종교인까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불교를 믿으면 부처님의 근본 뜻은 무엇이고, 오늘 나와 요긴하게 대화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 생각해 보면 불교를 따로 믿는다고 자처할 것도 없고, 내가 좀 안다거나 모른다거나 할 것도 없고, 지식을 아무리 말해 봤자 지혜는 아닙니다. 그러기네 지식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마십시오.

"가다듬고 깨어 있는 자세를 가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을 뜨고 잠을 자고 있지 않다고 해도 속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 맑디 맑은 내 가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한 가정을 제대로 이끌어 가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자님들, 오늘부터는 현실을 직시하고, 강한 자부심도 가지고, 당당한 나를 소개할 수 있는 그런 개성을 가진 위인이 되도록 정진하시오.

 



@정각도량 / 천한 사람 / 이법산 스님

사람은 누구나 귀하고 소중하며 건강하여 행복해지고 싶고 그 부귀영화를 오래오래 누리고 싶어한다.

우리의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까이 있는 소금이지만 음식의 간을  내자면 그 소금을  손수 집어 넣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행복해짐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부터 정성껏 실천할 수 있을 때 음식 맛을 내고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행복감을 맛 볼 수 있듯이 부귀영화는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귀해지고 싶은 자 천한 마음을  갖지 않고 천한 짓을 하여 천한 업을 쌓지 않으면 결코 남에게서 천한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서 천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귀하여 존경받고 복되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숫타니파타經集)에서 부처님께서는 당시 인도 사회에서 가장 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며 부처님에게 '비렁맹이, 까까중, 천한놈' 이라고 비방하며 마치 사탄으로 여기던 바라문에게 어떤 사람이 천한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셨다.

"화를 잘 내고 원한을 품으며, 간사하고 악독해서 남의 미덕을 덮어 버리고 그릇된 소견으로 모함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생물을 해치고 동정심이 없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시골과 도시를 파괴하여 독재자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마을에 살거나 숲에서 살거나 주지도 않는데 남의 것을 가지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빚이 있어 돌려달라고 독촉을 받으면 언제 빚을 졌느냐고 잡아떼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얼마 안되는 물건을 탐내어 행인을 살해하고 그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증인으로 불려 나갔을 때 자신이나 남을 위해, 또는 재물 때문에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폭력을 써서 혹은 서로 눈이 맞아 친척이나 친구의 아내와 놀아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가지고 있는 재물이 풍족한면서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부모나 형제 자매 혹은 계모를 때리거나 욕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상대가 이익되는 일을 물었을 때 불리하게 가르쳐 주거나 숨기는 일을 알리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나쁜 일을 하면서 자기가 저지른 일을 숨기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남의 집에 갔을 때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면서도 그 쪽에서  손님으로 왔을 때는 예의로써 대하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바라문이나 사문 혹은 걸식하는 사람을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바라문이나 사문에게 욕하며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세속적인 어리석음에 덮여 변변치 않은 물건을 탐하고, 사실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며, 스스로의 교만 때문에 비겁해진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남을 괴롭히고 욕심이 많으면 나쁜 야심을  지녀 인색하고. 덕도 없으면서 존경받으려 하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깨달은 사람을  비방하고 출가나 재가의 제자들을  헐뜯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사실은 존경받지 못할 사람이 존경받을 사람이라 자부한다면 그는 이 세상의 도적이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오.

내가 당신에게 말한 이와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천한 사람이오. 날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또 태어나면서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오로지 그 행동에 따라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산다. 큰 꿈이든 작은 꿈이 든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는 데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꿈은 곧 삶의 생명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삶의 가치가 없으며, 생명의 보장도 없으므로 소극적이고 사회생활에서 도태되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사람으로 남에게 미움만 사고 천대만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만심에 빠져 남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남보다 약간 잘산다고 으시대며, 나보다 약하다고 짖밟으려해서는 안된다. 설사 작은 생명일지라도 그에게는 참으로 존귀하고 소중할 뿐이다. 언젠가 출근길에 전철에 앉아 무엇엔가 생 각에 잠겨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앞에 서더니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외쳤다.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었다. 마구 외쳐대는 그 사람에게 나는 할말이 없었다. 어떤 항변도 설득도 그 사람의 귀에는 결코 들리지도, 들을 사람도 아니었다. 침묵으로 가만히 눈을 감고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의 마음에 어서 빨리 맑고 밝은, 티 없이 아름답고 누구나 반길 수 있는 본심의 회복을 미소로서 기원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 산다고 하지만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잃고 자칫 남의 행세를 하다보면, 남을 괴롭히거나 남의 미움을 사서 참으로 천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세상은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다. 누구와도 더불어 같이 살고. 어느 환경에서도 더불어 함께 생활해야 한다. 독방에서 혼자 아무리 많이 먹고 편히 쉬고 싶어도 그것은 잠시고, 적막함에서 오직 불안하고 지겨울 뿐이다. 고집과 독선은 괴로움과 외로움을 가져다 줄 뿐. 누구도 어느 것도 더불어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병 가운데 가장 몹쓸병은 마음의 병이다. 몸의 병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있지만 마음에 든 병은 모양이 없고 증상만 있기 때문에 약으로 치유할 수가 없다. 몸에 든 병은 남으로부터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마음에 병이 들어 움추리면 외골수에 빠져 사람들에게 천대만 받고 미움만 사 처량한 신세가 될 뿐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천한 사람의 행위를 혹여 내가 하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 고 스스로 명물이다 기도로서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참선으로 마음을  깨달아서 비로소 제 모양을 갖춘다면 아름다운 사회(천당. 극락)는 저절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의 미래는 푸른 꿈의 열매만이 가득 찰 것이다.

 



@법화경 공부 /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함 / 안중철

 

법화경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일승 개성 사상(一乘 皆成 思想)과 구원 본불(久遠 本佛)의 재현(開顯)으로 대표되는 교리사상적 측면이고, 두 번째는 관세음보살보문보품 등에서 설하는 현세이익(現世利益)의 측면이며, 세 번째는 이 약왕보살본사품이나 법사품 등에서 설하는 불도수행(佛道修行)을 위해서는 몸과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不惜身命)는 실천수행적 측면이다. 양왕보살 본사품이란, 약왕보살의 본사(本事) 즉 전생 이야기의 장(章)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전생의 이야기를 본생담(本生譯)이라고  하고, 보살 등 부처님의 제자들의 전생의 이야기를 본사라고 한다. 이 품에서는 숙왕화(宿王華) 보살이부처님께 약왕보살이 어떻게 사바세계에 있게 되었으며 그 전생은 어떠했는지를 여쭈어 보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이 된다.

옛날에 일월정명덕불(日月淨命德佛)밑에 일체중생희견(一切衆生喜見) 보살이라고 이름하는 제자가 있었다. 이 보살은 일월정명덕불에게서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갖가지 여러 어려운 고행을 닦아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信三昧)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이 삼매는 일체중생의 형체를 자유로이 나타낼 수 있는 삼매이다. 일체중생희견 보살은 이 삼매를 얻은 것이 일월정명덕불로부터 법화경의 법문을 들은 공덕이라고 생각하고 그 부처님과 법화경에 갖가지의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공양이 몸으로써 올리는 공양만 같지 못하다하고 향을 먹고 발라서 자기 몸 전체를 향과 같이 만들어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이를 소신공양(燒身供舊) 또는 사신(捨身)공양이라고 한다. 이 광명은 천이백년 동안 80만억 항해사의 세계를 비추었는데, 여러 부처님들이 이것을 보시고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공양이요 진실한 법(法)공양이라고 찬탄하셨다.

이 보살은 소신공양의 공덕으로 일월정명덕불의 나라 정덕(淨德)이라는 왕가에 다시 태어났으며 일월정명덕불은 '나의 불법을 그대에게 부촉한다.' 또 '입멸 후의 내 사리도 그대에게 부촉한다'고 당부하고 열반에 드셨다. 그러자 보살은 여래를 연모(戀慕)하여 슬픔에 잠겼다. 그런 중에도 유해를 다비(茶毘)해서 사리를 8만 4천의 병에 담아 보탑에 모셨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두 팔을 불태워 공양하였다. 이 공덕으로 무량한 사람들이 보리심을 발하고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들의 스승인 일체중생희견 보살이 두 팔을 잃은 것을 보고 지극히 슬퍼하므로 일체중생희견 보살이 '나는 두 팔을 버린 공덕으로 미래에 금색신을 얻을 것이다. 이 일이 허망하지 않다면 나의 두 팔이 옛과 같이 되살아날 것이다. '라고 서원하였다. 이때 홀연히 두 팔이 옛과 같이 되살아났다. 이것이 양왕보살의 본사이다

(천태지자대사별전)에서 천태사지의는 일체중생희견 보살이 몸을 태웠을 때 그 빛이 널리 세계를 비추자 여러 부처님께서 "이야말로 참다운 정진이며, 이야말로 여래에 대한 참다운 공양"이라는 구절에서 활연대오 (豁然大悟)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부처님은 누구든지  생명을 끊는 것을 엄중히 금하신다. 그런데 이 품에서는 자기의 생명을 끊어 부처님께 공양함이 극찬되어 있다. 부처님께 공양함은 부처님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인데, 부처님이 엄중히 금하신 행위로써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은 일견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상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공양을 오리는 것은 보은하는 행위이기에 그 정성은 어떠한 제한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제일 소중한 것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행하는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치는 보은행위 즉 몸을 공양하는 이상의 공양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마저 아끼지 않는 지극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마음의 응결을 여기서 볼 수 있다.

2조 혜가스님도 초조(初祖) 달마스님에게 불도의 길을 물었을 때 달마스님이 믿음(信)을 보이라고 하자 지니고 있던 검(劍)으로 팔을 자르지 않았던가. 불도를 구하고 불법을 널리 펼치기 위해서는 몸과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그 신심과 그 희생정신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불심의 창 / 5월에 갖는 나의 단상 / 류인수

 

아마 그 때도 지금과 같이 초여름의 날씨였을 겁니다.

시골이었지만. 제법 도시화 된 탓에 그리고 50년대 베이붐에 태어난 시기여서 그랬는지 국민학교 수업이 2부제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는 길이란 주로 정해진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비포장된 신작로를 걸어서 가는 게 제1의 코스였고, 어린 나의 걸음으로 아마도 30분은 족히 걸어야 되었습니다.

그 날은 오후반이었습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방을 들쳐메고 씩씩하게 학교로 향했습니 다. 그런데 왠지 우리들의 주코스가 아닌 또 다른 길로 학교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길동무로 친구들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의 매일 데리고 다녔던 이웃의 누나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코스는 상류의 큰 저수지로부터 흘러 만경뜰의 일부를 적시는 수로를 따라가는 그 때의 나에게는 재미가 그만인 길이었습니다. 논과 밭에서 일하는 아저씨 아주머니들 밀과 보리가 익어가 는 냄새와 파랗게 자라고 있는 밭의 채소들 정말 무공해에 퇴비를 쓰는 유기농법에 의해 재배되어 생산된, 지금 같으면 최고의 품질로 환영받을 그런 상품들로 가득 했습니다.

인심도 무던히 좋았던 때라 내가 수로에서 놀면서 " 아저씨! 오이 하나 주세요?" 하면, 그 냥 알았다는 듯이  뚝 따서 "여기있다. 먹어라" 던저 주셨습니다. 그 길쭉하고 탐스러운 놈을 문질러 한 입 베어 물으면 싱그러운 향내가 입안에 가득하고 사각사각 씹하는 소리는 나에게는 듣기 좋은 음악소리 그대로였습니다.

그 오이 맛에 취한 탓일까? 아니면 수로에서 물장난치며 놀던 재미에 빠져 버린 탓일까? 그만 학교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후로 몇 개의 오이를 얻어먹은 뒤 머리를 짜내어 이쯤이면 학교가 파했을거니, 집으로 돌아가도 내가 오늘 학교에 가지않고 뚝길에서 놀고 온 것을 들키지 않겠지 굳게 확신을 하고 결론지은 끝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소와 같이 어머니는 "학교에 잘 갔다왔니, 공부 많이 배웠어?" 우리 막내둥이! 하시며 반

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으응. 엄마!" 그 때 까지 만해도 아무일이 없었습니다. 무사통과다!" 가방을 마루에 내동댕이치고 동네로 뛰어나갔습니다. 왠지 마음이 이상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동안을 혼자서 배회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무엇인가를 바삐하시다가 "왜 벌써 왔어 친구들이랑 더 놀고 있다 오지 오늘 선생님께서 내 준 숙제가 많은가 보지 친구들도 다 숙제하러 가던?" 표현은 못하겠지만 무엇인가 상황이 발생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조금은 넉넉한 편이어서  1 학년인 나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방이 있었고 나는 어머니 말씀을 못들은 척 댓구도 없이 그 방으로 숨어들어 소리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 귓가에 메아리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물리치기라도 할 양으로 더 소리를 높여 책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그날 숙제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흘렸습니다. 밖을  살펴보니 친구들 소리가 하나, 둘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젠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드릴까 몇 번을 생각하였으나 그런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막내야! 막내야!" "으응"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동네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고, 올 때 무궁화나무 가지 두서너개 꺽어오렴" 평소의 목소리 그대로 였습니다. 참, 이상하다. 회초리 같은 데 놀고 오라는 말씀은 또 무엇이람 그리고  화도 나지 않은 무궁화 가지는 어디에 쓸 석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하였고, 아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자란 곳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이라 집 사이의 경계는 주로 무궁화나무와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우리들에게 두 종류 나무는 놀이감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그 날 따라 들녘일이 늦어져 저녁식사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내겐 무척 고통이었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나신 어머니께서 내 방앞 툇마루에 오신 것입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회초리를 찾으셨습니다. 책상뒤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둔 무궁화나무 회초리 3개 . 힘없이 어머니 손에 전하였습니다. "종아리 걷어올려!" 나는 순종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진실을 말할 기회를 다 상실한 너무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한참 동안 시간이 흘렀습니다. "내가 자식을 잘못키워 하교에도 가지 않고..." "회초리 소리가 휙 하니 나는데 나의 종아리는 아프지 않고, 돌아보니 어머니 야윈 다리에 한 줄  두 줄  새 파란 줄이 그어지고 있었습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용서해 주세요." 어린 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정말 막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 그 댓가로 나의 종아리가 피멍이 들도록 터져야 당연한 순서인데 그게 아닌 엉뚱한 상황이 지금 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럴때는... 내 몸뚱이가 온통 작아져 어디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으련만.

이런 철없던 기억이 벌써 30년 전의 일이고 새벽이면 정안수를 떠 놓고 기도하시던 모습과 내 손을 이끌고 시오리길 절에 가던 기억들이 새롭습니다. 어머니 곁을 떠나 내가 경주에 온 지도 10년이 지났습니다. 나에게 이 10년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어머니' 라는 그 존재의 의미는 항시 마음의 고향이고 의지처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도 못하기고 극히 거동도 불편하여 내 목소리만 알아들을 뿐, 막내자식에게 하고 싶은 무수한 말씀들은 다 가슴에 가두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세월이 그 그분에게도 만 1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내가 경주에 온 시간보다 몇 개월이 많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집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월은 맑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달입니다. 어버이 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으며 '어린이 그리고 성년의 날'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달'로 정했나 봅니다. 이렇듯 거룩한 시간들을 가정을 위해 가족과 사회를 위해 이웃과 함께하여 서로 정을 나누고 아끼며 자비로써 감싸안아야겠습니다. 요즘 아픔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법우들에게 새벽이면 항시 그랬듯이 정안수 앞에  서 계셨던 그 분처럼 참회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렇게 미천한 저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청화 큰 스님의 보리방편문을 이 지면에 옮겨놓아 같이하고자 합니다. 부디 성불하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불서산책 / 선생경 / 김호성

"사는 게 뭔가? 사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현재 우리의 삶 역시 그렇지 않을까. 삶이 무엇인지 도통(도통)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쏟아지는 폭우의 빗살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옷을 적시지 않은 채. 그런 도통한 사람을 나는 꿈꾸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를 그토록 힘겹게 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부분은 "사람"이라 답할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문제이다. 어떻게 해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어떤 시사를 (선생경) 속에서 얻을 수 없을까.

 

사람들 사이에 삶이 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삶이 놓여있는 좌표를 (선생경)은 여섯 방향 속에 설정한다. X축과 Y축이 그리는 좌표, 즉 동. 서. 남. 북의 사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면적 공간일 뿐이다. 위[上]와 아래[下]를 더 추가할 때 비로소 입체적 공간이 된다. 시방[十方] 역시 이 육방[육방]의 사방에 간방[間方]을 나누었을 뿐 실제로는 육방이 분이다.

한 젊은이가 있다. 선생(선생)! 그 이름에 이미 착한 삶, 훌륭한 삶을 추구하는 그 착한 사람의 방법론에 다소 문제가 있는 듯 느껴진다. 매일 아침 성(城) 밖으로 나가서 목욕을 한 뒤 육방을 향하여 예배하는 것 아닌가. 그 광경을 목도(目睹)하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무슨 인연으로 이른 아침에 성을 나가서 원림(園林) 중에서 목욕을 한 뒤 여러 방위를 향하여 예배를 하는가?"

"저희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그대가 예배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동쪽. 남쪽. 서쪽. 북쪽. 위쪽 .아래쪽을 향하여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며 감히 어길 수 없었을 뿐입니다. "

이러한 신앙태도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아무런 근거도 없는 기복신앙이라 평가될 것이다. 그런 뒤, 무조건 배척하려는 태도를 보이기가 십상이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외형적인 형식, 즉 육방에 대한 예배 그 자체를 부정하는 대신 그 같은 예배 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 여기서 부처님의 지혜와 중생을 거두어 들이려는 따뜻한 모습이  연상되거니와 단순한 "방위와 예배"를  "사람의 예배"로 전환시키고 있다.

"부처님께서 선생에게 말씀하셨다."'마땅히 육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어떤 것이 육방인가? 부모님이 동쪽에 계시며, 스승님은 남쪽에 계신다. 아내는 서쪽에 있고, 친척은 북쪽에 있다. 근로자는 아래에 있으며, 성직자들이 위에 계신다."

기업하는 사람[長者]의 입장이라면, 그의 좌표는 동쪽[오른쪽]으로 부모님, 서쪽[왼쪽]으로 아내, 남쪽으로 스승, 북쪽으로 친척, 위로 성직자, 아래로 근로자와 연결[緣起]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과의 인연을 잘 가꾸어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선하게 하며 행복하게 해 줄 것이리라. 우리는 그 같은 입장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아내에 대해서 나만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나의 아내가 행해야 할 도리 역시 설해지고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상대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꿰뚫고 있음 때문일까, 쌍방의 윤리적 의무를 함께 설하신다. 이 점에서 일방적인 가부장제적 윤리덕목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가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볼 때, 여섯 갈래의 관계 중에서 특별히 의미 깊은 것은 '사제관계론'과 '노사관계론'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스승과 제자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만 되새 겨 볼 수 밖에 없다. 경전의 서술 방식과는 다르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경전의 내 용을 문답(問答)의 형식으로 편집하여 제시키로 한다.

 

문: 어떤 것이 스승을 모시는 법입니까?

답: 첫째,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려다.

둘째, 예경하며 공양하라. 셋째, 존중하며 우러러 받들어라. 넷째, 스승의 가르침에 공손 히 따르며 어기지 말라. 다섯째, 스승을 쫓아서 법을 듣고 잊지 말라.

문: 어떤 것이 제자를 지도하는 법입니다

답: 첫째, 법에 맞게 지도하라. 둘째, 아직 제자가 듣지 못한 새로운 것을 가르쳐 라. 셋째, 묻는 바에 따라서 그 뜻을 잘 해 설해 주라. 넷째, 스승으로서 모범을 보여라. 다섯째, 아는 바를 다 가르쳐 주어야지 인색해서는 안 된다.

 

 

                                   3

이 (선생경)은 아함부 중에서도 비교적 긴 경전들이 모여있는 장아함경에 소속 된 하나의 소경(小經)이다. 위에서 간략히 소개한 '인간관계론'을 언급하기 전에, 부처님은 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요청되는 윤리적 덕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전체적으로 윤리적인 경전이라 평가 할 수 있으나, 뒤에 재가 불자들의 윤리적 덕목을 제시한 《우바색 계경 (우바색계경) 》제14품 <수계품>으로 편집된 것도 그같은 배경에서 이해된다.

팔리어 역본(Singalovadasuttanata)도 있으며, 한역본 중에서 (육방예경(六方禮經)) 을 비롯한 여러 이역본이 전한다.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역본으로, 우선 불교시대사 출판본 (옥야경. 선생경. 수마제녀경)을 추천한다.

 


@이야기로 배우는 불교 / 벽지불과 중생 성불 / 정승석

벽지볼(벽支彿)은 인연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은 성자를 일컬으므로 독각(獨覺) 또는 연각(綠覓)으로 불린다. 벽지불은 불교를 실현하는 근본적인 입장 을 반영하는 개념이며, 그 취지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대표적인 벽지불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벽지불이 표방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이란 누구나 인생과 세계의 바른 이치를 스스로 사색하여 깨달음으로써 이상적 인격과 진리를 실현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다.

진리의 성취에 관한 불교의 이 같은 개방적인 입장은 대승불교에서 교리적인 개화를 이루는데, 이것의 본격적인 천명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전하는 불전으로서 대승불교를 유인한 『자타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형적인 예가 『자타카』 제408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벽지불이 된 네 왕의 이야기를 차례로 전한다.

408-1: 칼링가국의 카란두 왕은 시종과 함께 전원으로 가는 도중에 맛있는 열매가 가득 열려 있는 망고 나무를 보았다. 그는 코끼리 등위에 서서 망고 하나를 따서 먹었다. 왕이 지나간 후 대신들과 사제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열매를 따느라고 가지를 꺾고 익지 않은 열매마저 남김없이 따버렸다. 저녁 무렵에 왕은 그 망고 나무 곁을 지나다가 초라한 상태가 되어 버린 그 나무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나무는 아침에는 열매를 가득 달고서 빛을 발하며 서 있었는데, 이제 열매를 빼앗기고 가지는 부러져 초라하게 서 있구나.

왕은 열매가 없었던 다른 나무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저 망고 나무는 열매를 맺고 있지 않은 덕분에 보석으로 덮힌 산처럼 아름답게 서 있다. 이 나무는 열매를 맺고 있던 탓으로 이런 재난을 당하고 말았다. 가정생활은 열매를 맺은 나무와 같고, 출가 생활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와 같다. 재산이 많은 자에게는 공포가 있고, 없는 자에게는 공포가 없다. 나도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처럼 되어야겠다.

왕은 나무 곁에 서서 열매 맺은 나무를 대상으로 삼아 세 가지 진상, 즉 3법인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더욱 심화하여 스스로 깨닫는 지혜를 일으키고 나서는, 드디어 자기에게는 미혹에 싸인 생존이 없다고 생각했다. 왕은 벽지불의 자태로 바뀌어 허공에 서서 대중에게 설법하고서 허공을  날아 북쪽의 히말라야 산에 있는 난다물라 동굴로 갔다.

408-2: 간다라 국의 낙가지 왕은 보석으로 장식한 팔찌를 양팔에 찬 부인이 향을 바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 부인은 오른팔의 팔찌를 왼팔로 옮기고 향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쪽으로 몰린 두 팔찌가 부딪쳐 소리를 냈다. 이를 보고서 왕은 생각했다.

팔찌는 떨어져 있으면 부딪치지 않는데 다른 팔찌와 부딪치면 소리를 낸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둘이 되고 셋이 되면 서로 부딪쳐 다투고 논쟁한다. 나는 카슈미르와 간다라라는 두 나라의 주민을 지배하고 있다. 나도 하나의 팔찌처럼 다른 것을 지배하는 일이 없이 나만을 지배하며 살아가야겠다.

왕은 부딪치는 팔찌를 대상으로 삼아 세 가지 진상을  관찰하여 스스로 깨닫는 지혜를 일으켰다.

408-3: 비데하 국의 미니 왕은 고깃덩어리를 빼앗아 공중으로 날아 오른 독수리를 다른 독수리가 쫓아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서 '고깃덩어리를 빼앗은 새에게는 고통이 있고, 버리고 간 새에게는 안락이 있다. 5욕을  탐하는 자에게 는 고통이 있고, 그것을  버린 자에게는 안락이 있다. 나도 5욕을 버리고 안락하게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하여, 마찬가지로 세 가지 진상을 관찰하여 벽지불이 되었다.

488-4: 판찰라 국의 둠무카 왕은 한 마리의 암소를 발정한 다른 수소들이 쫓아가면서 서로 질투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서, '생물은 욕정으로 고통을 받는 다. 나는 그와 같은 욕정을 버려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왕은 마찬가지로 세 가 지 진상을 관찰하여 벽지불이 되어 히말라야 산의 난다물라 동굴로 갔다.

이상은 네 사람의 왕이 벽지불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벽지불이 되게 한 관찰의 대상이 다를 뿐인데, 그 차이는 우리 주변의 무엇이라도 그 진상을 바르게 관찰함으로써 벽지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일 뿐이다. 『자타카』에 있는 여러 가지 벽지불 이야기 의 골격은 모두 이와 동일하다. 단지 관찰자의 신분과 관찰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 점은 무엇이든 벽지불의 지혜를 일으키는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신분의 차이가 없이 누구나 벽지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다. 『자타카』 제450는 그러한 사실을 불 교적으로 잘 적용하여 천명하는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459-1: 두 사람의 친구가 각기 물병을 마련해 두고서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하는 도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물을 아끼려고 친구의 물병으로 물을 마셨다. 저녁 무렵, 그는 물을 훔쳐 마셨다는 기분으로 두려워하게 되어, '이 탐욕 이 증대한다면 나는 나쁜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 번뇌를 제압해야지'라고 생각하여, 물을 홈쳐 마셨음'을 대상으로 삼아 관찰을 심화함으로써 스스로 깨닫는 지혜를 일으켰다. 그리고 얻은 지혜를 사유하면서 서 있었다.

459-2: 농촌의 한 지주는 다른 사람 의 예쁜 아내를 보고서 음란한 생각을 일으켰다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생각을 반성하고 관찰하여 벽지불의 지혜를 일으켰다.

459-3: 아버지와 아들이 도적에 붙들렸을 때 고의로 거짓말을 하여 풀려났다. 아들이 그 거짓말을 반성하고 관찰하여 마찬가지로 벽지불의 지혜를 일으켰다

459-4: 촌장이 사람들에게 제사에서의 생물 살생을 승인했다. 자신의 한 마디로 사람들이 살생했다고 후회하고 벽지불의 지혜를 일으켰다.

49-5: 촌장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에게 음주를 승인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주정했다. 촌장은 그것을 보고 후회하여 벽지불의 지혜를 일으켰다.

 

위의 이야기들의 요지는 5계의 위반, 즉 투도와 사음과 망언과 살생과 음주를 반성하고 그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명상함으로써 벽지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타카』에서 벽지불에 관한 이야기는이 밖에도 다섯 가지가 더 있다.

『자타카』의 벽지불 이야기를 망라하면, 벽지불이 된 관찰자의 신분은 왕, 농부, 지주, 평민, 촌장, 이발사, 사냥꾼, 바라문이다. 이는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벽지불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또 관찰의 대상은 망고 나무, 팔찌, 새, 소, 5계, 보살의 가르침, 낙엽이다. 이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주변의 모든 것이 깨달음을  얻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관찰에서 공통하는 것은 세 가지 진상이라고 표현되는 불교의 근본 사고인 3법안이다.

결국 우리 주변에서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 진상을 깊이 사색하여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깨닫는 데서 불교를 구현할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 벽지불 이야기의 취지이다.

 



@열린마당 / 나는 누구인가 / 이현승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는 어느 날 문득 제기되는 물음이 아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가까이 왔던 자가 다시 안개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볼 때, 퍼붓는 빗줄기 속에 마지막 낙엽을 다 떨구고 그 자리에 앙상히 남아 있는 겨울 나무를 바라볼 때, 차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 길 위에 부적처럼 붙어 있는 강아지의 형상을 발견할 때, 가까이 지내던 자의 육신이 재되어 사라지는 화장터에서 돌아설 때,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물음이 바로 이런 물음일 것이다. 이 물음은 어느 날 문득 스치듯 떠올랐다가 사라져 갈 수도 있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그 영혼을 사로잡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물음이 이미 해결난 듯 자신있게 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어김없이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끌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비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중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사실 잘 모르겠다. 특별히 관심있는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을 보면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확신하며 자신있게 사는 듯 싶은데, 실제 사유의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물음을 놓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면 시지프스적인 반복의 비극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난 이 Report를 작성하면서 다시 한 번 이 물음의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자아가 본래 영혼과 신체를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며 타인 및 세계와 관계하고 문화와 역사를 이루는 존재이므로 완벽한 자아의 이해란 영혼과 신체, 언어와 세계, 자연과 문화 등 철학이 거의 모든 주제를 다 해명함으로써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무한한 문제의 영역이기에, 이 한 장의 보고서로써 그리고 나의 짧은 생으로써 끝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풀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찾을 틈도 없이 조금이라도 더 자라기 위해 힘써온... 근 21년 동안 부모님 품안에서 곱게 자라 아직 앞가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인 것이다. 지금까지 자라온 나는 작은 대학교의 학생이고  그 곳에서 더 큰 나를 만들려는 처음의 작은 풀이 아름다운 난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어느 책에서 읽은 문구가 있다.

<나>는 누구입니까?/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氣)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그런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각성(awareness 覺性) 만이 남는다. 그것이 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나는 몸, 무의식이 아닌 바로 생각하는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 진정한 나를 찾지는 못했지만 내가 죽는 그 날까지 진정한 나를 찾으려 한다....

 


@가람의 진수 / 관음도량 보문사 / 유문용

 

관세음보살님은 대자대비 하셔서 우리가 정성으로 발원을 하면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법화경의 보문품에 보면 해중(海中)에 보타락카(寶蛇洛伽: Potalaka)에 계시다고 했다. 관음보살님을 주존으로 모시는 성지는 해변이나 해중 섬에 조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먼저 찾아보았던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는 해변에 절경의 암벽 위에 조성되어 있었고 이 곳 보문사는 서해(西侮)의 장화 섬에서도 배를 타고 한 10분 거리에 있는 석모도(席毛島)라는 아름다운 심어 있다.

이 섬은 해명산, 상붕산, 상주산의 삼산 (三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삼산면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그 가운데에 보문사가 있는데 보문사의 뒷산을  낙가산(洛迦山)이라고 한다. 보타락가산에 관세음보살님이 가람을 조성하면서 보문사라고 한 것은 법화경에 관세음보살님이 모든 중생의 온갖 고난을  구제하고 소원을 만족시켜주고 널리 교화를 한다는 내용이 별도로 기술되어 있는 보문품(普門品)에서 기인된 말인데 법화경 제25품에 별항(別項)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이 처음 지어진 것은 신라시대인 선덕여왕 4년 635년에 회정선사(懷正禪師)에 의해서 창건이 되었다고 한다. 이 회정선사 는 지금 이북 땅인 금강산을 중심으로 관음기도를 하시고 문수, 보현, 관음보살님을 친견하신 분인데 금강산에 보덕암을 창건하고 이내 강화도에 나와서 보문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 절은 관음보살님의 영험이 많은 절 이어서 치성을 드리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데 특히 보문사의 석굴에 얽힌 영험담은 보문사에 중심이 되는 핵심이 된 다. 보문사를 지은 지 얼마 안되어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신라 진덕여왕 3년 649년 4월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여기 매음리라는 마을에 살던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는 잡히지 않고  사람모양같 이 생긴 돌들만 가득히 올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재수 없다고 바다에 도로 집어던지고는 또 그물을  내렸지만 그때마다 돌 사람들만 자꾸만 올라오니까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니 고기 잡는 일은 그만두어야겠다 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어째서 귀중한 것을 올리고도 몇 번씩이나 도로 버렸느냐? 우리들은 서 천국에서 아라한에 신통을 동방나라에 펴 기 위해 왔는데 타고 온 배는 돌려보내고 여기 바다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 데 너희들이 우리를 몇 번씩이나 버렸지만 무지해서 그런 것이니 용서를 할 것이다. 내일 다시 우리를 바다에서 올려서. 저 마을 뒤산인 낙가산에 쉴 곳이 있으니 거기 에 우리를 안내하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복록을 누리리라"고 말하면서 낮에 버렸던 바다로 사라졌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어부들이 모두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부지런히 서둘러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치니 역시 어제와 같이 돌 사람들이 가득 올라왔다. 이 돌 사람들이 서천국에서  온 나한님들인 것을 알고 정성껏 모시고 낙가산의 석실 앞에까지 오니까  석실  안에서 경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굴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니까 이미 나한의 대좌가 마련되어 있었고 향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어부들은 한 분 한 분 조심스럽게 봉안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지금 보문사의 유명한 석실법당에 모셔진 나한상이 그때  서천국에서 온 나한이라고 한다.

서천국은 인도를 말하는 것이다. 인도를 천축국이라고 하는데 서쪽에 있는 천축국 이어서 서천국 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여튼 경주 석굴암에 있는 십대제자상도 인도 사람의 얼굴모습과 의복, 신발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봐서 신라시대에 천축국과 교류가 굉장히 많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나한상의 돌의 석질을 조사해 봤더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돌이 아니고 한다.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지었다고 해서 전설 같은 얘기가 많이 나온다고들 하지만 여기 보문사의 관음의 영험 뿐 아니라 경주의 그 숱한 성보 문화재들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요즘에 첨단과학으로 풀어서 증명이 되는 것인데 여기 보문사의 나한상도 우리나라의 돌이 아니고 인도의 돌이라는 것은 옛 전설들을 전혀 허구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 설화들을 그림으로 표현을 해서 대웅전에 벽화로 그려놓았다.

보문사를 가려면 강화도의 외포리에서 한 십분 정도 배르 차고 들어간다. 승용차도 함께 건너 갈 수 있다. 배에서 내려서 절 앞으로 다는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로 가도 한 10분 정도 더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바로 일주문이 나온다. 안주 높은 기둥을 썼는데 기둥을 돌기둥을 써서 아주 견실해 보인다. 일주문에 "낙가산보문사"라고 편액이 붙어 있는데 명필로 유명한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이라고 한다.

여기서 절이 있는 쪽으로 올려다보면 절 뒷산에 아주 넓은 민둥바위가 보인다. 눈썹 바위라고 해서 관세음보살님의 마애불이 있는 바위이다.

이 보문사의 주존 법당인 대웅전은 최근에 새로 확장을 해서 지었는데 원래는 이 자리에 관음전이 조그맣게 있었다고 한다 . 이 절이 관음도량이었으니까 당연히 관음전이 주 법당이 되겠으나 지금은 대웅전을 새로 짓고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있지만 협시보살로 관음보살님과 대세지 보살님을 모시고 있고 또 이 법당에  관세음 보살님의 3천불을 봉안하고 있어서 관음도량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원래가 관음보살님을 주불로 모시는 가람에서는 주법당을 원통전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보문사에 주 법당을 새오 지으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큰 웅지를 내포하고 있는 대웅전을 마련하고 그 안에 관음보살님이 협시를 하는 아미타 부처님을 주불로 모셨는데 이 아미타 부처님은 극락정토의 주불이시기 때문에 여기에도 의미가 있다고 봐야 된다. 또 이 절이 관음도량이기 때문에 법당 안에 3천의 관음보살님을 모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주전법당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웅지와 극락왕생 하는 발원과 관음도량의 법당이 조화를 이루어서 관음성지로 완벽을 기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대웅전 계단 위에 수레바퀴처럼 생긴 것을 조각해 놓았다. 이런 조각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가 없는 그런 것인데 법륜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법륜의 모습을 보면 둥근 바퀴모양으로 생긴 모양에 안쪽으로는 8개의 살대가 있고 밖으로는 6개의 꼭지가 나와 있다. 꼭 바다를 향하는 배의 방향키 같이 생겼다. 이 법륜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큰 수레에  실어 나른다는 재승불교에서 큰 수레의 바퀴를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시무종의 의미도 있고 원한의 8개의 살은 부처님의 생애를 8폭으로 표현한 팔상도, 팔정도를 나타낸다고 하고 원의 바깥에 있는 6개의 꼭지는 6바라밀을 말한다고 한다.

이 기단의 조각상은 12지상과 인왕상 그리고 천왕상이 있고 연꽃을 조각해  놓았다.

여기 대웅전에 부처님은 주존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양 옆에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계시다. 그런데 그 양 옆으로 뚝 떨어져서 두 분의 관세음보살님이 또 계시다. 이 법당 자리에 관음전이 있었는데 96년도에 새로 지으면서 관음전에 있었던 관세음보살님이 왼편에 계시고 다른 부처님은 새로 봉안한 것이다.

이 법당 안에 관세음보살님을 3천불을 모셨는데 모두 옥돌로 조성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옥돌이 생산이 얼마 되지 않아서 중국에서 조성해서 모셔왔다고 한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