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우주와 인생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장 바르고 참되게 깨달은 정각자(正覺者)이며,
모자람 없는 인격을 갖춘 위대한 인간의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참삶의 길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일깨우기 위해 여러 가지 교화 방법을
사용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의 특성은 다양한
교화 방법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크게 위의교화(威儀敎化)와 설법교화(設法敎化)의
2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위의교화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고 마음을 일깨워 주는 방법이다. 녹야원에서
5명의 수행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붓다는
한마디 말이 없이도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또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살인자 앙굴리말라(Angulimala)와
아자다사뜨루 (Ajatasatru)왕이 붓다를
시기하여 풀어 놓은 술에 취한 코끼리를
굴복시킨 이야기 등이 그좋은예이다.
이에 비해 설법교화는 언설(言說)에
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교화 방법이었다,
그런데 봇다의 설법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독특한 점이 많다. 체계적 논리적으로
진리를 설하는가 하면, 노래의 형식인
게송(偈頌)으로서 그것을 다시 요약해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유나 인연담(因緣譚)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여러 형식의
문답을 통한 대화도 붓다가 즐겨 사용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주로 제자들을
상대로 하거나 또는 다른 종교인물들과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이밖에 위의교화와는
또 달리 침묵 그 자체로써 상대방에게
하나의 대답을 주는 일도 있었다. 붓다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교화 방법과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교세는 빠르게 확대되어
갔다. 당시 인도의 종교 사상계에서 볼
때 붓다는 한 사람의 사문(沙門)에 불과했다.
그런 붓다의 가르침에 계층의 구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치면서 급속하게
번져 나간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기성 종교인들은 붓다와 그의 고난을
질시하고 유해를 가해 왔다. 바라문들이
여인을 시켜 임신을 한 것처럼 꾸며 붓다의
아이를 가졌다고 사람들에게 외치게 하여
망신을 주고자 하는가 하면, 탕녀(蕩女)를
죽여 묻어 놓고는 붓다의 교단에서 한
것이라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갖가지 방법의
비방과 모함이 소용없자 심지어는 음식에
독약을 넣어 붓다를 살해하려고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오히려
붓다를 더 유명하게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기르침에 더욱더 귀 기울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게하는
진리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현실생활을 보다 진실하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 었으며, 행복의 삶을 이루게
하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붓다는 외도(外道)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던 앙굴리말라를
구제한 일도 있었고,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삶의 진심을 일깨워 주고,
허영과 교만에 찬 여성으로 하여금 참된
길을 걷게도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에게는 정법(正法)에 의한 선정(善政)을
설하는가 하면, 이웃나라 사이의 전쟁을
미리 막아 평화로운 국교를 유지케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가르침과 교화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그러나
붓다도 그 말년에는 몇 가지 불행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사촌 동생인 데와닷따(Devadatta)가
교단의 분열을 꾀하였고, 몇 차례나
붓다의 살해를 기도하기까지 하였다. 또
코살라의 쁘라세나지뜨왕의 아들 비두다바(vidudabha)가
즉위하자, 그는 왕자 시절에 샤캬족에게서
받았던 수모를 갚기 위해 카뻘라와스뚜를
침공하여 샤캬족을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붓다의 아들 라훌라 그리고 두 큰제자
사리뿌뜨라와 목갈라니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도 붓다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되었다.
붓다는 80세를 끝으로 45년간의 긴교화활동의
막을 내렸다. 그는 충실한 시자(侍者)였던
사촌 동생 아난다와 함께 라자그리하의
영취산(靈鷲山)을 뒤로하고 마지막 전도여행
길을 떠났다. 도중 베살리에서 우안거(雨安居)를
보내면서 심한 병에 걸렸다.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3개월 후에 열반(Nirvana, 涅槃)에
들 것을 아난에게 예고하였다. 그후 건강이
다소 여행을 계속하던 붓다는 파와(pava)는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Cunda)로부터
음식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탈이
되어 심한 식중독을 앓게 되자, 붓다는
쿠쉬나가라(Kusinagara) 변두리의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가 두 그루의 큰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 곳에서
붓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든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으면 묻도록 하였다. 대중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마라. 자기 스스로를 광명으로
하고 법을 광명으로 삼아 남을광명으로삼지마라.(대반열반경)
이렇게 최후의 가르침을 남긴
뒤에, 붓다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을
향해 누워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이를
흔히 입멸(入滅)이라고도 표현한다. 이것은
붓다가 80세 되는 해 베사카(Vesakha))달의
보름달 (滿月日] 밤이었다.
붓다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과 신도들은 붓다의 유해(遺骸)를
화장했다. 붓다의 몸에서는 많은 사리(sarira,
舍利)가 나왔다. 장례에는 여덟나라의
왕들도 참석했는데, 이들이 서로 사리를
차지하려는 바람에 자칫 분쟁이 일어날
뻔했다. 다행히 한 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는
여덟 몫으로 똑같이 나누어졌다. 사리를
담았던 그릇과 유해를 태운 재를 얻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각자 자기 나라로 가지고 돌아가서 탑을
세워 모셨다. 이것이 불탑(佛塔)의 효시로서,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불교도들은 이
탑을 그들의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붓다는 2,500여 년 전에 세상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러나 생애를 통해 보았듯이,
그의 구도(求道)와 성도(成道) 그리고
교화(敎化)와 입멸(入滅)의 과정은 참으로
위대한 일생이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명과 깨달음을 주었다.
또한 오늘에 와서는 붓다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닌 지혜와 자비의 인물로 이 시대의
사람들 앞에 다가온다. 붓다는 진정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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