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36호 / 불기 2541(1997)년 12월 1일 발행

아름다운 폭동(4) / 이상우

"내 출가한 지 삼십 년이 되네만 딱 두 번 놀랐네. 겁이 있다는 것은 아직 수행이 형편없다는 것이지 젊은 시절, B사에 있을 때였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목을 매단 여자의 시체를 보았지. 죽은지 얼마나 지났는지 상당히 상한 채 걸려 있더군. 지게까지 벗어 내던지고 아래로 도망왔었네.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랬다손 치더라도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부끄럽네. 처자의 인기척을 듣고 바깥을 보는 순간 사람으로 보이지 않더군."
"쥐새끼, 쥐새끼 하던 말씀이?"
"그건 나중 얘기고... 비를 흠뻑 맞고 머리는 늘어뜨리고... 옷은 찢어지고... 한 쪽은 맨발이고... 영락없이 귀신이지. 밤에 이 암자에 그런 위인이 찾아올 리 만무하지"
'그것 대문에 난리를 치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게 그거지. 자신에 대한 미움을 다스리는 방편이었으니까."
"스님, 차 한잔 더 주세요."
말이 없던 처녀가 대화에 끼어드려는 듯 빈 찻잔을 스님 앞에 내밀었다.
"어이쿠! 찻잔을 채우는 것을 깜빡했네. 많이들 마셔. 가슴이 풀리고 손발이 녹을꺼야."
"스님...죄송해요. 그냥 무작정 도망오느라 이런 꼴로..."
"알고 있어. 참 징한 것이 사람이지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인간을 겁탈하려는 짐승만도 못한 것이 있으니... 쯧쯧쯧"
 처녀는 스님이 따라놓은 찻잔을 공손하게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을 보니 조금은 안정을 찾은 듯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참! 입에 담기도 힘드네 그려."
"제가 말씀 드릴께요."
갑자기 힘이 실린 당돌한 말투가 그녀로부터 튀어 나왔다.
"그래에? 아가씨가 어디 다시 설명해보게. 아까는 나도 어지러운 상태에서 들은 상황이라..."
"저어...사실은...오늘 저어..."
"더듬을 거 없어. 더듬는다고 말에 뜸이 드는 것은 아니야. 자아, 빈찻잔이나 이리 밀고..."
"예. 말씀드릴께요. 저 사실은 오늘 저, 죽어버릴려고 했어요. 그래서 준비한 것이 저것이고요."
그녀는 스님의 탁자 위에 놓인 하얀 약봉지를 가리켰다. 반쯤 젖은 쭈글쭈글한 덩어리였다.
"글쎄, 이것이 쥐약이야. 쥐새끼를 죽이는 것이 쥐약이지 사람 먹으라는 것이 쥐약이야. 에이, 못난 처자야."
스님은 그것을 좀더 밀쳐버렸다.
"저걸 사들고 무작정 차를 탔고 버스에서 내려 이 산길을 걸었어요."
나는 갑자기 낯선 사막에서 동족을 만난 것처럼 유대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활동했다. 어디서 출발 했습니까, 어느 버스를 탔지요, 어떤 책깔의 버스였습니까, 그리고 어디에서 내렸지요. 연거푸 쏘아댈 화살이 잔뜩 준비된 것처럼 할말이 많았다. 그것을 꾹꾹 참으며 그녀의 입을 바라보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모든 여성이 나와 일치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선뜻 그녀 앞에 펼쳐놓고 싶었다.
"빗속을 마구 걸었어요. 점점 어두워 지더군요. 반듯이 눕기에 좋은 자리를 찾기엔 비가 너무 쏟아 지고 어둑어둑해지는 주변이 원망스럽더군요, 조금씩 무서워 졌어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어둠 과 외로움인가봐요. 산길의 양쪽에 늘어선 나무들이 머리채를 늘어뜨린 괴물 같았어요. 주머니 속에 든 약봉지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떨렸어요, 그때 산길 아래 쪽에서 환한 불빛이 나를 찾는 탐조등처럼 굽이굽이 산길을 비추며 올라오는 거에요. 반가웠다는 것이 내 솔직한 그때 심정이었어요. 트럭이었어요.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바심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불빛을 향해 손을 반쯤 들었던 것 같아요.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그 불빛은 또다른 외계로 나를 실어줄 것이라고 순간적으로 판단을 했었던 것 같아요.태워주더군요. 그러나...그러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훌쩍거렸다.
"어허! 또 무슨 청승을 떨려고! 늙은 중이 또 난리를 쳐야하겠느냐? 맺힌 응어리를 폴어주는 것은 청승이 아니야. 단정한 자세로 후련하제 털어내버려라." 스님이 소리들 버럭질렀다.
"죄송해요. 트럭이 굽은 산길을 십여 분 가더니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아무 말도 없이 차를 세우더니... 술냄새를 풍기는 그 사내를 나는 필사적으로 밀쳤어요. 옷이 찢어지고... 여기저기 마구 부딪쳤어요. 전등인지 뭔지 손에 잡히는 것으로 나는 사내의 머리를 힘껏 치고는... 차문을 열고 산길을 마구 달려 이 암자의 불빛을 본 것이예요."
"인기척이 나서 방문을 열어보니 영락없이 귀신의 몰골이드먼. 그놈도 참 징한 놈이지 비가 쏟아 지는 산길에 누가 있다고 사람을 그렇게 대하노. 사람 귀한 줄 모르는 게 이승의 병 중중 큰 병이야."
"스님을 보는 순간 약을 털어넣어 버릴려고 했어요. 훌륭한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우째 지 생각만하누. 늙은 중이 새파란 처녀의 시체나 치우는 일을 하라고?"
"어쩌면 저의 욕심이고 제 나름의 쇼였던 것 같아요."
"흠-알기는 아누먼. 쇼에는 쇼로 대해야지."
"그런데... 무슨 연유로 죽을 생각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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