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36호 / 불기 2541(1997)년 12월 1일 발행
선사상의 본질/ 박성배  뉴욕주립대 교수 동국대 석좌 교수

사람마다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는데. 그런 일을 하게 된 배경에는 꼭 원인이 있습니다. 저 는 지금 불교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불교학을 하게 된 배경에는 언제, 어디서, 어째서, 이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여건들이 있습니다. 동기가 무엇이고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처음 불교를 만나기 시작한 것이 아직도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진리를 구할려고 나서서 불교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방황을 하다가 불법을 만난 것이고, 그때 저에게 불법을 전해 주신 분이 참선하는 스님이셨습니다. 그것이 아직도 저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때 저에게 첨선하는 분이 아니고 강사나 교수였다면 저의 오늘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불법을 만날 때 참을 하는 스님 을 통해 불법을 만났고, 오늘날도 제가 무슨 생 각을 할 때 참선하는 스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 불교학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선이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이후로 여러 큰스님을 뵈어도 선사와 인연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에는 저의 내면적 욕구와 외면적 조건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학생들에게 불교학을 가르치는데, 그 학생들이 불교를 구도적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 대학에서는 다른 문화와 종교를 공부해야 할 의무가 있고 전교생이 자기 문화밖의 공부를 해야합니다 . 그런 학생을 상대로 어떻게 선에 대해서 강의를 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말이 끊어진 경지입니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좋은 질문을 했는데도 고함을 친다던가 몽둥이로 때린다던가 하는 이른바 방(椿).할(喝)의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말로 알아 들을 수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제 얘기를 못알아 들으면 문제제기가 되질않고, 문제의식이 제대로 없으면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수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알아 듣게끔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선사들의 게송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만약 잠깐이라도 여러분이 참선을 하게 되면
그 공덕은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 많은 칠보로
탑을 쌓는 것보다 더 수승하다.  
약 인 정 좌 인 수유 (若 人 靜坐 忍須 臾)
승 조 항사 칠 보 탑 (勝造恒沙七寶塔)

내 생각에는 탑 하나라도 쌓는 것이 낫지 가만히 앉아서는 나은 것 같지가 않은 데도 선사들은 기가 막히게 좋다고 하고 아침. 저녁으로 읊고, 제자를 보고도 읊으라 얘기하고 하는데, 저는 그것이 의심이 났었지요. 아마도 여러분들도 그 시를 아시는 분은 아마 저와 비슷한 의심이 났을 지도 모릅니다. 금강경 가운데 선사의 말과 비슷한 사상이 있습니다. 금강경의 복덕사상. 공덕사상은 독특합니다. 처음에는 재물을 가지고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한다고 하는데, 대중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보시사상이거든요. 보시사상이 있기 때문에 대승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갠지스 강 모래알이 나옵니다. 그 많은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재물로 남을 도와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재물을 가지고 보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공덕은 금강경을 한번 읽는 공덕, 한 권 다 못 읽더라도 그 중에 자그마한 게송 하나라도 자기가 외우면 그 뜻을 남에게 설명해 줄 때 그 공덕이 보시공덕 보다도 크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선사들이 잠깐 앉아 있는 것이 칠보탑 쌓는 공덕보다 더 크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아주 유사한 논리입니다. 금강경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금강경의 사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보시는 보시인데 재물이 아닙니다. 목숨입니다. 자기 목숨을 던져서 보시를 하고 남을 돕고, 목숨도 한 목숨이 아니라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 많은 목숨을 그러니까 세세생생 죽고 또 죽는다 하더라도 그 목숨을 일체중생을 위해서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시한다는 것입니다. 보시의 극치죠.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바쳐서 일체 죄인들의 죄를 대속(代贖)했다.' '마더 테레사가 20세기 창녀다' 라고 하는 것을 연상해 볼 때, 누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접어 두고서라도 이론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금강경에서는 보시의 극치를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보시의 극치 그것 보다 도 목숨을 바쳐서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 많은 목숨을 바쳐서 보시를 한다 할지라도 그 공덕과 금강경을 수지독송고 시간이 없으면 그 게송 중에 하나라도 자기가 외고 실천하고 그리고 남을 위해서 설명해 주는 공덕은 비교가 안된다는 것과 똑같은 얘기거든요. 지금 선사의 싯구에서 재물보시로 다시 신명(身命) 보시로 얘기가 계속 됩니다만, 일관된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칠보탑을 쌓는 것 보다 잠깐 참선하는 것이 더 낫다는 그 논리, 그러한 논리가 금강경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그러면 금강경의 논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논리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르다는 점을 문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왜 그러냐는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잠깐 앉아 있는 것이 칠보탑 쌓는 것보다 나은 것이냐. 왜 그 많은 재물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4구계 하나 외고 실천하고 남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 나은 것이냐. 심지어 제일 소중한 목숨을 그것도 세세생생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4구게 하나 외는 것이 낫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은 원래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 니까 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성스러운 면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성(聖)은 속됨과 함께하는 성이지 속됨을 떠나 있는 성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습니다. 결국 자기의 눈으로 봤을 때 자기의 눈의 밝음의 정도에 따라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보는 것도 다를 것입니다. 종교의 속됨을 보는 사람에게는 종교의 더러운 면만이 보이는 것이고, 종교의 성스러움을 보는 사람에게는 성스러움만이 보일 것입니다. 결국 보는 사람의 관심과의 함수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그 사람의 보는 관심에 따라서 종교계는 원래 이상한 집단이라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부처님이 이상스런 소리 밖에 하지않았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태연히 하는 것, 그런 것 밖에 안되는 데도 2,500여 년이 되도록 지리적으로 인도.중국. 한국, 요즈음은 미국 할 것 없이 사회 문화적으로 모두 다른 지구의 표피를 덮는 법문이 되고 있는데, 과연 그럴 수가 있느냐. 몇 천년을 두고 지리적으로는 몇 만리나 되고 많은 문화권,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말씀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하면 불법 속에 그 진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불법은 진리가 가져다 주는 진리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살든지간에 어디에서 살든지간에 생명이 있는 것이면 중생을 지탱하는 진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와 불법이 맞으니까 그것이 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대응하는 것이 없으면 밖에 있는 것이 들어가질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설영해야 할 것이냐. 왜 금강경 4구게 하나 외는 것이 대단한 것아냐. 전 재산을 바쳐서 보시하는 일이나 한 생명 바쳐서 보시하는 일이 그 분 보다 못하다니 그런 가지가지 비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나가기 때문에 불교경 제가 발달이 안 되었다, 불교과학이 발 달하지 못했다 등 다 다른 비판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오직 정말 구도자들이 또 구도자에 앞서서 부처님 자신이 허튼 소리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금강경 속에서도 그런 말이 있거든요. 부처님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진실만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제기는 거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우선 불교공부를 한다면은 그 정도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치는 이러하다고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그 설명을 남에게 해 주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납득을 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납득시키기도 전에 담에게 포교론의 이름으로 해봤자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납득되는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강경을 처음에 펴 보면, 이 금강경은 지혜가 밝다고 몹시 칭찬받는 수보리라는 제자와 부처님간에 주고 받았던 대화, 또는 질문자 답변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보리가 부저님께 질문을 합니다. 내 가 구도의 길에 들어 섰는데, 부처님의 진리에 관한 말씀을 듣고 아뇩다라삼먁 삼보리(최고의 진리)를 얻으려면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쉽게 얘기한면 구도자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로 들어 섰는 데. 엉뚱하게도 구도자답지않은 생각이 생겨 나는 거예요. 구도를 한다고 해 놓고 또 어느샌가 구도자답지 않은 마음이 생각으로 대체된다구요. 이것 때문에 고민을 해요. 이런 때는 부처님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요. 그러니까 수보리의 질문은 아주 일반적인 질문입니다. 일반적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고민, 자기가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다면 아주 일반적으로 피력한다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답변은 이렇게 나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 불교적으로 일체중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돕는 것, 그것도 최고로 돕는 것,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돕는 것,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구도자는(금강경에서는 보살은) 중생을 도와도 모든 중생을 부처님이 되듯이 부처님을 만들듯이 돕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일체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처럼 마음을 가져라 하는 것입니다. 불교인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이 서원사상이죠. 맹세코 하고야 말겠다, 말하자면 구류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것이 서원사상이예요. 서원사상이야말로 자기의 구도자답지 않은 불교인답지 않은 마음보를 고칠 수 있는 약이라는 것이죠.
 금강경에서는 이와 같이 무량무변 무수중생, 한량없는 모든 중생을 제도해 마쳤는대, 처음에는 어름하게 나왔지만, 맨 마지막에는 딱 마쳤다는 현재 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그렇게 봐야 합니다. 실은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논리와 또다른 논리를 만나게 됩니다. 잠깐 앉아 있는데 칠보탑을 쌓는 것보다는 낫다, 목숨을 바쳐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게송하고 수지독송 위타인 설하는 것이 낫다,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하고 마쳤는데 실은 한 중생도 제도 한 사람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겁니까? 여기서는 또다른 논리가 나옵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마쳤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 중생도 제도한 적이 없다고 하셨는가. 우선 그러한 논리와 사고 방식과 우리의 논리와 사고방식의 차이에 의문을 파악해야 한다고요. 그런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은 구도자라 함은 얼굴에 아상이 없어야 한다, 아상이 있게 되면 나(我)라는 것이 있게 되고, 나 아니라는 것이 있게 되면 나와 나 아니라는 존재의 틀이 있게 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게 되고, 아상. 인상.수자상.중생상이 있게 되기 때문에 구도자는 상이 없어야. 한다고 부처님의 답변은 일단 거기서 끝납니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 모순이 있는데, 생사의 저 반대편처럼 절대 모순이 사실은 똑같은 것이란 것은 동일성입니다. 절대 모순과 자기 동일성,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목숨을 바쳐 일체중생을 제도한 것보다 나은 것인가. 우리는 어디서 막혀 있는가. 선적으로 선학적으로 말하자면, 순전히 나의 답변은 불교의 진리는 수행없이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사상의 제일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시 실친해야 합니다. 불교의 모든 핵심을 꼬집어 말한다면 수행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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