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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0월호 / 통권 26호 / 불기
2540(1996)년 10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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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어 불교는
지혜를 낳게 하는 깨침운동 / 오녹원
큰스님
풍요로운 중추기절 2학기 개강을 맞아, 송석구 총장님, 법산 정각원장스님, 교수 직원 여러분과 이런 법회를 가지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동국대학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인격도야를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북돋우는 이런 회상(會上)은 참으로 의의가 깊은 자리라 할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적인 면과 인간의 일상적인 의식을 초월한 면, 이것을 승가에서는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를 다 포용하는 종교입니다. 세간법은 대단히 인간적인 삶의 세계로서 철학적으로 굳이 표현한다면 형이하학적인 측면이 강하고, 출세간법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의식의 계층을 초월해서 여기 되는 형이상학적 차원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가장 쉬운 표현으로 불교를 말하면「깨치는 운동」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청정히 해서 지혜를 낳게 하는 각(覺)운동이 불교입니다 형이하와 형이상이라 말했지만 이것은 깨치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의 언어적 구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고, 깨우치면 보살이요, 부처인 것이니, 이 자리의 대중 여러분도 한 생각 돌려 깨치면 바로 불지(佛地)에 드는 것입니다. 숙제와 진제가 둘이 이 나고 중생과 부처가 별물(別物)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중생 속에 불상종자가 함장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종자를 잘 보아 키우고 닦으면 부처님 지혜를 얻는 것인데 문제는 어디로부터 시작하느냐, 이것입니다.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三乘)이 다 그 방법을 논한 것인데, 오늘 나는 식(識)을 가지고 법문을 진행할까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의식(尨識)이란 말을 쓰고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용어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의 설산 수행으로 증 득하신 것은 인생의 생명의 본질과 우주의 본 바탕에 관한 것인데, 깨치고 보니 인생살이란 「식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식(識)이란 무언가?
눈이 보는 알음알이(色)가 안식이요, 귀가 듣는 알음알이(磬)가 이식이요, 코가 맡는 알음알이(香)가 비식이요, 혀가 맛보는 알음알이(味)가 설식이요, 몸뚱어리의 접촉을 통한알음알이(聯)가 신식이요, 마음과 생각으로 아는 알음알이(法)가 의식입니다.
식이란 우리말로 알음알이인데, 안. 이 .비.설.신.의는 모두 각기의 대상을 가지고 인식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여섯 가지 뿌리(六根)라 하고 이에 대응하는 대상을 여섯 가지 경계(六太竟)라 하며, 각기 알아지는 내용을 식이라 하는것입니다.
의식이란 여섯 번째의 의(意)가 아는 알음알이를 말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우리들 마음의 인식활동 전체를 두고 이 말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여섯 번째의 의식(六識)외에도 일곱 번째의 마나스, 여덟 번째의 아뢰야식을 말하여 식(識)을 팔식(八識)까지 보고 있습나다. 육식이 식의 전부라는 것은 아직 한 단계 아래지요.
자, 여러분, 그럼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식이란 무엇인지 대충 아시겠지요.
우리가 인생을 산다는 게 뭡니까? 잘 따져보세요. 안.이.비.설.신.의, 이 여섯 가지 활동을 떠나서 따로 또 무엇이 있습니까.자, 눈으로는 좋은 색을, 귀로는 좋은 소리를, 코로는 좋은 냄새를, 혀로는 좋은 맛을,몸으로는 좋은 촉감을 바라는 것이고, 뜻으로는 선악 시비를 가져 아옹다옹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중생들의 일상적 삶이라 할 것입니다.
산다는 게 식 놀음이라 하는 것은 인생이육근, 육경, 육식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겠는데, 부처님의 말씀은 이것들만이 인생의 전부라는 것이 아니라는 데 참뜻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우치신 것은 「식놀음 인생」은허망하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상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볼 줄 안다면 여태를 볼 것이다」라는말이 있습니다 상(相)이란 형상(形象)을 뜻하는데 이게 바로 형이하적인 것이지요.그렇다면 형상 있는 것들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게 다 아까 말한 우리들의 식(識)의 소생이란 말입니다. 즉 식의 집착으로 생기는것이지요. 아름다운 색깔이란 눈이 있어 가능하고, 고약한 악취란 코가 있어 존재하며,보드라운 살결이란 몸이 있어 알 수 있듯이 형상적 존재란 모두 이런류로 식이 있음으로써 현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이와 같은 형상이 있는 것들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은 첫째로 이것들의 존재근거가 되는 우리들 인간의 식(后識)이 영원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이 세상 삼라만상이 저 홀로 고기독존(孤起凌爵存)할 수 없는 연기(豕彖起)속의 존재란 사실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금감경의 「상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귀절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신 말씀인데 부처님은 세상의 범부 중생들이 이 형상 있는 것들에만 매달려 형상 없는 참 진리를 볼 줄 모르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귀와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상(相)에 속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범부 중생은 이것이 허망한 것인 줄 모르고 거기에만 일생을 매달리다가 아무 소득없이 죽고 맙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줄 아는 것은 부귀와 명예 같은 이런 상이 뜬구름처럼 허망한 존재란 것을 진실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부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상의 세계입니다. 전생의 업보든 인연의 소치든 어쨌든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세상은 상(相)의 세계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내가 일시적이나마 있다는 것, 이러한 인식은 우리들의 현실적 삶에 대한 긍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상의 세계가 허망하다고 일단 깨우치는 것은 긍정 다음의 부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삶 그 자체로 자연의 법칙에만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 텐데 하고 우리가 의단을 갖는다면 이는 내가 몸담고 있는 상의 세
계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상이 바로 출가자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음에 오는 것은 또 다른 긍정,즉 변증법적 용어를 빈다면 종합입니다 여래 즉 부처를 본다는 것은 자기 생명의 본원을 본다는 것입니다, 불(苧羚)의 본원은 청정 법신 비로자나이며, 비로잖아 법신은 일체 생명의 근원이므로 금강경에서 여태를 본 다함은 생명의 실상을 깨우쳐 본다는 뜻입니다. 불교를 허무주의적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불교의 이런 긍정, 부정, 종합의 변증의 오도(悟道)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승속이 불이(不二)이며 세간과 출세 간이 둘이 아닌 도리가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까 불교의 각 운동을 식에서 찾아보자고 말을 시작했는데 이제 맺음을 해야하겠습니다. 식에 대한 설명에서 어느 정도 얘기가 됐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육근으로 이루어지는 식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육군으로 이루어지는 식을 영원한 실재(實在)인 것처럼 생각하며 여기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식 놀음 인생이니, 이것은 현실적 상의 세계에만 매달려 생명의 실상을 깨우쳐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금강경을 인용한 것은 이 식의 세계가 허망한 존재임을 일깨우기 위함이었고, 일단의 부정을 통하여 또 다른 차원의 대공정의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금강경 결구에 일체 유위법(有爲法)이 꿈같고, 환(幻)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라 할 것은 우리들 의식(灑職)이 짓는 모든 상이 영원한 참 세례가 아니란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한 것입니다.여러분! 인생 80은 따지고 보면 풀잎의 이슬 저럼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기가 눈 먼 거북이 망망대해에서 나무 한 토막 만나기 만큼이나 어렵고, 더욱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몇 억겁의 선현을 쌓아야 합니다. 생명을 얻기가 이렇게 어렵고, 사람으로 생겨나기란 더 더욱 어려우나 우리가 누리는 생은 더 없이 짧습니다. 허나법계(法界)는 무진하고 평등합니다.
이 무진 평등한 법계 가운데 영원한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식으로 만들어지는 상에 매달리지 않고, 상이 상이 아님을 볼 줄 아는 지혜를 닦는다면 우리는 육도 윤회를 벗어나 참 생명으로 사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지혜를 닦는 것은 마음을 닦는 것인데 마음 닦는 수행으로 참선 만한 것이 없습니다.요새 대학에서도 「자아와 명상」이라는 과목이 대인기라고 들었습니다. 참선이란 쉬운 말로 명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명상이란 눈 감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되는 게아닙니다. 착심(屑,已.)을 끊어야 합니다. 아까 식을 말했지만, 식에 얽매이는 게 착심이란말입니다. 이 식에 매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선(禪)에서는 불입문자(不入文字)를 내세우는 겁니다.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니까 아예 글 한 줄 안 배우고 마음만 보면 되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너무 잡다한 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우리 속담에 아는 게 병이라는 것이 있지요. 즉 식자우환이라는 것인데, 중생들 세계에선 항상 이 섣부른 지식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희랍의 플라톤이라는 철학자도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인간이 가지는 편견이 얼마나 깨부수기 어려운 우상인가를 말한 게 있습니다만, 한 번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가지면 그것이 설사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옳다고 믿기 때문에 버리고 다시 바로 갖기가 쉽지 않은 것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팔정도 첫머리에 「바로 보라(正見)」고 하신 것은 잘못보고 잘못 안 지식이 얼마나 많은 해독을 우리들에게 끼치는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선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이 진리를 깨침에 있어 한 터럭만큼의 오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불성 그대로의 가장 바른 앎을 깨우치는 것이 선이므로, 선에서는 우선 지금 가지 우리가 갖고 있던 잘못된 알음알이를 버리고들어오도록 합니다.
옛날 선사들 대화에서 기상천외의 문답이 오고 간 것은 이 섣부른 경험자를 타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주의 종심 선사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한 스님의 물음에 없다(無)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倖'陸)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라면 개에게도 틀림없이 불성이 있는 것인데, 종심 선사는 없다고 했으니,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종심선사의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일겁니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네가 그저 피상적으로 들어서 그것을 아는 지식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것을 깨침으로 알아야지 그저 들어서 아는 것은 각(覺)의 본분이 아니다. 그리고 깨치려면 지금까지 가졌던 식을 버리고 다시 의문을 가지고서 침구에 침구를 더하면 활연히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없더란 무자(無字)는 부정입니다. 종심선사는 없더란 부정사로 일단 언어도(言語道)를 끊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라, 대체로 이런 것입니다. 선은 언어도가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묵언 장자불와가 이와 같은 도리를 우리들에게 가르칩니다 대학의 학문은 정연한 이론이지만 선이란 이처럼 언어도가 끊어진 자리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깨치는 수행입니다. 선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금구(金口)로 하신 말씀 외에 마음으로 전한 법(眞理)이란 뜻 입니다, 그러니까 불법에는 교가 있고 선(佛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 밖의 자기 마음을 모두 세 곳에서 전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그 첫 번째는 영산회상의 염화미소고, 두 번째는 다자탑(多子塔)전의 반분좌(半分坐)이며 세 번째가 쌍림의 관(棺)속에서 발을 내민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부처님께서 말씀 없으신 가운데 마음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앞의 둘은 생전의 일이요, 뒤 세 번째는 열반하신 직후의 일입니다. 꽃을 들어 보이시고, 자리를 반분하여 앉으시고, 관속에서 두 발을 내 보이신 이 행동들은 오로지 마하가섭에게 부처의 마음을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심전심의 신비한전교(傳敎)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 경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시니, 많은 대중들 중 오직 마하가섭만이 미소로 답하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마하가섭이 알고 미소 지은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벌써 이때 마음으로 가섭에게 인가를 하셨던 것입니다. 뒤 누기지 일은 이와 같은 심인(心印)을 객관화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마음으로 마음을 전하고 미움으로 마음을 닦는 것이 참선공부입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닦는 참선은 아까도 말했지만, 버리고 갖기입니다 버리는 것은 허망한 식의 세계고, 갖는 것은 언어도가 끊어진 가운데, 다시 하나의 난문(難問)을 지니는 것이지요. 생노병사,회노애락의 집착심을 끊고, 이 뭣고?. 무라 하는 등과 같은 의단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말머리(話碩)로 가지고 일념 삼매에 들면 어느 때 확 마음이 터지면서 깨침이 오는 것입니다, 산하대지가 탁 트이고 막혔던 의식이 뚫리면서 심신이 자유로와지는 것입니다. 이한소식 깨침을 위해서 우리네 승가에선 여름과 겨울에 안 거 결제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참선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확실히 인생의 다븐 한 차원이 마음 속에 훤히 열리게 되지요. 걸림이 없게 돼요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이것이 무애인데, 불교에서 말하는 무어인이란 자유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해탈이란 자유의 증 득을 뜻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속박에서 벚어나 우리가 대 자유를 누리는 것, 이게 해탈의 점지입니다 아무것노 걸림 없는 세상살이, 이것이 대장부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심임명이란 꺼릴 게 없는 마음의 평화를 뜻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의 분발을 바랍니다.
일주문
청산리
/배의용 (철학과 교수)
내가낯이 좀 익나보다 잠잠한 걸 보면.
아침에 이 구역에 들어설 때면 가끔 떼거리로 꽥꽥 소리를 질러 대며, 위협을 하기도 하지만, 일단 들어서서 지나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나 보다. 녀석들, 정말 귀엽단 말이야.
이제는 어지간히 낯이 익을만도 한데, 그래도 가끔 집단적인 항의시위나 무력시위를 하는 데는 아무래도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무슨 까닭이 있겠지. 난 그저 저네들이 이 곳에서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흐뭇하고 감사하기까지 하다. 내가 산책을 즐기는 이곳이 아직 오염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그다지 많이 찾지 않는다는 증거이니까.
그러나 이런 나의 안도감은 가끔 무너진다. 엊그제 일요일에는 미리 성묘하러 온 사람들이 산등성이의 공동묘지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잡초를 베는 전기 낫 소리가 여기 저기서 울려퍼지고 있었다.어느 묘지에서 잡초를 베던 한 청년은 내가 옆을 지나가려니까 내 들으라는 듯이, ''저 사람은 성묘도안하나?''라고 옆 사람에게 말하기도 했다. 난 못 들은 듯이 지나왔다. 이튿날, 베어진 풀들을 밟아가다가 늘 다니던 길목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바로 앞에 꿩들의 보금자리가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혹시나 하던 나의 마음은 그만 아득해지고 말았다. 길섶의 작은 덤불숲, 앞이 툭 터져 있어서, 나 같은 적이 갑자기 나타나도(난 대개 그 부근을 달려서 지나가니까) 얼른 날아가기 좋은 지형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앞으로는 한꺼번에 일가족 여남은 마리가 후두두 날아가는 장관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야 그렇다치고, 그네들은 대체 어디서 보금자리를 새로 틀었을까?
청산리들은 오늘도 나를 훔쳐보면서 열심히 올 방울을 뜯고 있다. 너희들과 난 얼마나 깊은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 걸까? 나를 경례하는 너의 마음이나 발아래 시가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주어진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처지도 마찬가지고, 너 회들이야 정해진 본성에 따라 살면 그만이지만 우리네 인간은 부질없는 시름으로 울곤 해야 한단다.
정각도량
잘난사람
/법산스님 / 서울정각원장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는 트로트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못났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스스로가부족한 점을 모르기 때문에 제멋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줄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결코 제멋대로 산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 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잘난 듯이 뻐긴다고 해서 절대 잘나지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잘난 것을 인식하고 알아줄 때 비로소 인생이 편안하게 된다. 설사 남들이 잘났다고 칭찬해준다고 해서 거기에 매료되어 우쭐되어서도 안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듯이 겸양과 공경은 스스로를 낮추고 스스로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익어가는 벼처럼 알차고 아름다워진다고려시대의 야운(野婁)스님은 『후학들에게 주는 글』 속에 이렇게 말씀하셨다.''어진 행동을 닦는 데는 겸양이 근본이고, 벗을 사귀는 데는 공경과 믿음이 으뜸이 된다. 나니, 너니 하고 교만이 높아지면 삼악도(三惡道 지옥의 어두운길, 아귀인 굶주린 길, 축생인 무지의 길)의 고해만이 더욱 깊어진다. 밖으로 나타난 의의는 존귀한 듯하지만 안은 텅 비어 썩은 배와 같다 벼슬이 높을수록 마음을 낮게 가지고, 도(道)가 높을수록 뜻을 겸손히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다, 남이다 하는 집착이 없어지는 곳에 도(道)는 저절로 이루어지며,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는 온갖 복(福)이 저절로 돌아온다.''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기의 표현은 분명해야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과장에 가깝게 되기 때문에 타인으로 하여금 역겨운 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분수를 지켜라' 혹은 '주제 파악을 하라'는 등으로 주의를 받는 수가 있다.인간은 누구나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의 위치를 잃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만(印陽)은 반드시 실패의 원인이된다. 그러므로 안다고 자만하고, 있다고 자만하고 힘 세다고 자만하고, 이겼다고 자만하는 등 자만의 위에는 꼭 방심(放,已,)이 쫓아와서 남을 무시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이로 인하여 성공을 파괴하고 쓰라린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컵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약간 적게 채우는 것이 좋고,맛이 있다고 배를 가득 채우는 것보다 조금 적게 먹어 여유를 두는 것이 위장에 부담이 덜 가고 소화하기에도 더욱 좋다.마음에 여유를 가지면 그 마음의 그릇이 큰 그릇이다. 여유있는 그릇에 더 담을 수 있는 포용력이 있다. 마음의 그릇은 자신이 만들어 갖는 것이요, 활용하기에 따라 실적이 다르다.
여유있는 마음에서 겸손과 공경히 우러나온다. 꽉 차서 여유가 없는 마음은 답답하여 틈이 없으므로 다소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욕심은 항상 배고픔의 원인이 된다. 욕심의 배는 끝이 없다.무조건 집어 넣으려고만 하는 속성으로부터 결국 자신의 그릇에 만족하지 못하고남의 것을 뺏어 오려니 시기와 질투의 성냄이 남을 해치고 괴롭혀 원한을 사게 된다. 그 원한의 근원은 곧 내 마음에 남아 스스로 지옥의 괴로움을 찾아가게 된다.자만은 쓸 데 없는 욕심을 부리게 하고 볼썽사나운 성질을 내게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하여 가정의 불화와 친지와 동료들 간의 괴리감으로 자신의 설자리를 잃게 하고 만다.
자만을 버리면 비로소 아름다워 진다.자만이 없으면 행복하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만나면 반 갈고 함께 하면 즐거워 하게 된다.
자만과 용기는 전혀 다르다. 자만은자기만을 위하는 것이지만 용기는 남을 위하는 것이다. 자만하는 자는 불리하면도망가지만, 용기있는 자는 어려울 때일수록 의협심으로 더욱 값진 일을 한다.자만은 사리판단을 흐리게 한다. 자기만을 최고로 알기 때문이다. 용기는 가정과 직장과 동료와 이웃,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므로 누구와도 더불어 잘살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방편이다.야운스님은 노래했다.
''교만한 티끌 속에 지혜 묻히고 나다 너다 하는 산에 번뇌 자라니 잘난 체 안 배우고 늙어진 뒤에 병들어 신음하니 한탄뿐이네.''
한번 이겼다고 교만하면 다음은 꼭 지게 된다. 뭡 좀 안다고 교만하면 배움의 자리에 나아 갈 수 없다. 돈 좀 있다고 자만하고 나면 그는 반드시 게을러진다.언제나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자. 그러면 항상 새로워 질 것이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행동하자. 그러면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과 더불어 살며 중생의 괴로움을 알고,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니, 사랑으로써 중생을 보살피고 참된 생명의 길을 가르치셨으니, 세상에서 가장 높은 스승인 세존(世蔞)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공자도 예수도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스스로 귀하다는 자만심보다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한 까닭에 존경받고 흠모 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조용히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해 보자.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정좌하고 참선하면서 기도해 보자. 그리고 스스로의 위치와 분수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나는 진정 잘난 사람인가?
산에 가면 산이 되고, 물에 가면 물이되자.
정각논단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의 발전과제
/ 대원스님 / 불교아동학과 교수
유아교육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노력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왔다. 인지 이론의 대두로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심리학적 근거가 보다 확고해지고, 핵가족화와 더불어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등 급변하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유아교육에 대한 요구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조류에 힘입어 우리 나라의 경우도 유아교육진흥법 등 유아교육과 관련된 각종 법규가 제 . 개정되고, 5세아를 기준으로 한 유치원의 취원율이 해마다 증가하면서 유아교육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추세는 불교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2년 월정사의 포교당인 강릉 관음사의 '금천 유치원' 과 1928년 통도사의 마산 포교당에 '대자 유치원'이 설립된 것을 기점으로 한 이래 1995년 현재 전국예약 i70여개 이상의 불교 유치원이 세워졌으며, 비인가 유치원까지 합치면 실제 수치는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이처럼 사회적 경향에 발맞추어 불교 유아교육기관의 양적 팽창이라는 긍정적인 성과는 이루었지만, 그 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체계적인 좌표를 설정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 러한질적인 내용에 대한 논의는 불교 유아교육기관이 불교적 철학과 교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설립 .운영 주체 상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필연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불교 유아교육 기관만의 독자적인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보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현실적 여건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현재 불교 유치원이 교육부의 유치원 교육과정령을 주축으로 하면서 불교적 철학과 교리를 가미한 프로그램을 병행 운영해야 한다는 상당한 부담 요인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아기는 발달 특성상 구체적인 불교 사상이나 내용의 암기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러한 모든 정황을고려한, 보다 현실적이고 타당한 방법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교육적 환경 속에 불교적인 분위기와 정험을 자연스럽게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이들 유아들이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구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이 시기 유아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올바른 인격 형성과 신앙심을 키우고 유아 스스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행 유아교육과정과 종교 교육이 자연스럽게 병합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선 우리 나라 불교 유치원에서 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내용 중에서 독자적인 불교 유치원 프로그램으로 개발할 수 있는 바를 되짚어 보는 작업이필요하다. 여기에 대한 필자 나름 대로의 견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실시되고 있는 불교 유치원의 교육계획안에서 유아들의 정서와 사회성 발달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는 불교적 프로그램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과반수 이상의 유치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어린이 법회 예식과 入定은 바른 자세와 바른 마음, 인내심을 길러주어 유아의 정서 및 인성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근래 불교 유치원에서 많이 하고 있는 요가 수업도 유아들의 정서 발달 뿐 아니라 신체 활동을 통해 창의적 표현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다도를 포함한 우리 고유의 민속예절에 대한 프로그램 운영은 우리 것에 대한 애착심과 자부심을 갖게 함으로써 점점 서구화되고 있는 교육 현실에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연간 행사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석가탄신일, 성도 재일 행사, 욕불식, 백중행사, 열반일 행사 등은 매 절기마다 적절히 삽입됨으로써 유아들이 불교에 자연스럽게 친화될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연간 행사에 친숙해지게 함으로써 유아 종교 교육 및 포교를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이룬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한 올바른 인격 형성과 신앙심 고취, 그리고 불교적 가치관 경험을 통한 전인적 교육을 실시하는 합리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본다
셋째, 불교 유치원이 위치한 실.내외환경을 논의함에 있어서는 다소의 異見이존재한다. 즉, 대다수의 불교 유치원이 사찰 안이나 사찰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서,사찰이 가능하면 靜的이어야 한다는 점을감안한다면, 대단히 動0흰인 유아들의 발달특성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종교적 분위기에 접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유리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사찰순례나 법당 예배, 큰 스님 초청 연설 등이 러한 이점을 십분 발휘하고 이용할 수 있는 보다 세부적인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불교 유치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부모 교육에도 일반 유치원과 여러 가지로 구별되는 불교적 특징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불교 입문 및 종교 강좌, 불교 행사 참여, 부모 좌선 모임, 찬 불가노래 교실 등 불교 이념에 기반한 적극적 부모 교육 활동은 결과적으로 불교인의 확산이라는 부가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것이며, 부모들의 관심을 사찰에 대한 관심과 후원으로 유도함으로써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이며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본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긍정적 논의를 통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의 발전 과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보다 광범위한 기초 연구와 이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양한 기초자료와 조사, 현장의 의견 수렴과 향후 발전에 대한 논의는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가능하며, 이러한 경로를 통해야만 현실적으로 활용 가능한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보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러한연구를 위해서는 종단을 비롯한 관심 있는 후원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현재는 곧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미흡한 현실에 대한 반론과 비평이 아닌 관심과 애정 어린 배려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연구 수행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유아기에 속한 아동들의 종교 발달이곤 장래 불교의 미래를 가름한다는 투자적가치를 생각할 때 이러한 지원이 결코 무의미할 수는 없다. 또한 연구자들은 지속적이고 활발한 연구 활동을 통하여 현재 불교 유아교육 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실제적으로 통합하여 체계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불교유아교육 관계자들의 협동 체제도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체계적인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및 보급은 다양한 기초 연구를 통해 수행되어야 하며 여기에는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수적인요소이다. 일부 연구자들의 연구 진행에 있어 불교 유아교육 기관의 협조가 미약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 여건이 아직은 미약하지만 민간적인 차원에서의 지원과 격려는 보다 전문적인 불교 유아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또한 관계자들끼리의 다양한 정보 교환을 위한 불교 유아교육 세미나 및 연수회 등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지원해 주는 실제직인 힘이 될 것이다.
불교 신앙을 가진 전문 인력의 양성도시급하다, 불교 유치원의 교사는 유아의 모델로써 信心과 불교적 소양 및 자질을 지녀야 하며, 이러한 교사의 심성은 곧 그들의 일상 생활과 교육 활동을 통해 유아들에게 자연스럽게 內在化 된다. 본교 불교아동학과에서 교사들을 배출하고는 있지만,아쉽게도 지역적인 여건상 전국에 산재해 있는 불교 유아교육 기관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신앙심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종단의 보완이 필요하며, 현재 중앙승가대학에서 보육교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사료된다.같은 의미에서 현재, 채용되어 있는 교사나 원장, 원 감에 대한 연수 및 재교육 과정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 과정은 앞서 논의했듯이 정보 교환의 역할 뿐 아니라 불교적 소양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현재 매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있는 '전국 불교 유아.유치원교사 연수회'도 유아 교사들의 욕구 조사를 토대로 하여 그 체계와내용, 방법 등을 검토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교사 자신들도 자신의 구도는 물론 유아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불교적 유아교육 방법 및 프로그램 활용에 대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신행상담
깨달음
/ 계환스님 / 불교대학 교수
우리들은 바로 '깨달음'의 유무(有無)에 따라서 부처님이 될 수도 중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깨달음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회진 양이 질문한 깨달음의 세계란 일률적인 대답이 사실 어렵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자기의 독특한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각자가 가지는 깨달음의 세계 역시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객관화시킬 수-도 없고, 바로 나 자신의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선명하게 아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자각하게만 된다면 그때는 모든 욕망에서,성냄에서, 어리석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더 이상 윤회의 사슬에 걸려들지 않고 대지유인이 되는 것이라고 개념적인 설명밖에는 할 수가 없군요.
우리가 부처님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눈 뜬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눈을 감은 사람이 되겠지요.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잘못을 저지르고 착각 속에서 살고있습니다. 즉 깨달음이란 바로 '눈을 뜨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고,또한 그것을 살뜰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설탕이 아무리 달다고 설명하더라도 직접 먹어 보는 사람만이 그 단맛을 정확히 알 수 있듯이,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역시 체험이 중요시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와 같이 부처님의 깨달음은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지요. 따라서 미망에서 벗어나고 보면 '나'는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타인과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 뜬 사람이 코끼리의 모양을 아무리 잘 설명해 주더라도 장님이 자기의 아집(我執)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장님의 잘못입니다. 바로 무명(撫明)이 장님의 눈 뜨는 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무명의 제거야말로 눈 뜨는 작업, 즉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교리
강좌
반야와 지혜
/ 정승석 / 불교대학 교수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는 분별이 사실은 허망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반대되는 진실한 것은 당연히 무분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어에서 무분별이라는 말은 지혜롭지 못한 경솔함이나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지'를 추가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말한다면,이 말이 결코 어리석음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인 열반의 경지는 항상 분별이 없는 인식 상태로 묘사된다. 심지어 열반마저 그 반대 개념이자 범부 중생의 삶인 생사와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분별의 인식을 진정한 열반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이 진정한 열반을 '무주처(無住處) 열반'이라고 칭한다. 생사와 열반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는 간주하지 않기 때문 에그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는 경지가무주처 열반이다.
무주처 열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이 지혜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무분별 지라고 부른다. 무분별 지를 성취한 보살은 생사 윤회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이로 인해 정신이 구속되지는 않는 자유를 누린다. 아무런 걸림이 없는 그가 이제 치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자유의 평안을 얻도록 돕는 일이다. 불교는 이 같은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보살을 지향하기 때문에 자비 실천의 종교가 된다,불교에서 강조하는 이 지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과는 구별하여 종교적이거나 초월적인 인식을 가리킨다. 그 전형적인 예로는 석가모니가 연기(移起)의 이치라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의 인식 상태를 가리킨다, 아울러 이에 준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에게요고 되는 인식 상태도 포함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지혜를 세간적인 지식과 구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반야(般若)라고 칭한다.
무분별지인 반야로서의 지혜가 그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범부 중생인 우리에게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이, 가치 있는 것일수록 그만큼 구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온갖 노력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은 될지언정 아예 도외시하거나 포기할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추구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성취의 길이 열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 즉 반야를 좀더 쉽게 표현하고자 할 때는 흔히 직관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종종 자신의 직관이 발휘되는 경우를 경험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데도 그 대상을 보자마자 그것에 대한 총체적인 앎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여러 가지 지식으로 검증해 본 결과,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그 총체적인 앎을 우리는 흔히 직관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직관은 선입견이 없이 이루어지는 앎이라는 데에 그 특성이 있다.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에서 그러한 직관은 대체로 특수한 경우에 또는 우연히 발동하고 그친다. 만약 직관이 지속적으로 발동하면서 우리의 인식을 형성한다면, 이 인식이 곧 불교에서 강조하는 지혜이자 반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분별을 일삼는 범부의 의식 속에는 숱한 선입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직관이 지속적으로 발동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 요구되는 것이며, 이 수행 끝에 직관의 지속적 발동으로서의 지혜 즉 반야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지혜와 반야가 반드시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인 것은 아니다. 지혜는 서로 독립된 의미를 지닌 지(智)와 혜(慧)를함께 일컫는 말이다. '지'는 부처의 경지에서 얻은 지식 내용을 가리키며, 보통불지(佛智)라고 표현된다. 이에 대해'혜'는 원래 반야의 번역어로서 도리를 바르게 변별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러나 불교 일반의 용도에서 그 둘은 동일한 취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더욱이 초기의 경전인 아 함경에서는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우리의 입장에서는 지와 혀를 굳이 구별하여 이해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그 구분에 의하면 헤는 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고 헤는 당연히 지로 이어지므로, 지혜라는 말은 주로 혀에 더 비중을 두어 사용된다고 이해하는 정도로 그 구분을 무시해도 좋다.
부처 즉 각자(覺者)의 경지인 '지'에도달하기 위한 '혜'를 지혜로서 중시하는 입장은 대승 불교에서 '반야 바라밀'을무엇보다도 강조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대승 불교에서는 특히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데 작용하는 혀를 반야 바라밀이라는 이름으로 존중했다. 그리고 대승의유식학에서는 이 반야 바라밀, 즉 깨달음에 이르는 혀를 무분별 지라고 규정했다.이제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혜는 무분별지인 반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혜에서 불교의 목표인깨달음의 특질을 발견할 수 있다. 무분별치 또는 반야는 선입견, 인습, 주관 등과 같은 다른 경험의 개입이 없는 직접적인알이다. 직접적인 앎은 또한 초월적인 인식,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일상적인 앎을 초월한 인식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반야가 요원한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일상에서 적용하는 것이 꼭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자기의 선입견, 인습, 주관 등을 최대한으로 배제하며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때, 지혜의 문은 저절로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스스로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경전의
세계
비화경
/ 이만 / 불교문화대학 교수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부처님이 신격화된 것이 아니라 수수하게 모든 사람들과 함께 걸식을 하거나 취침 등을 하셨기 때문에,그 말씀도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데, 이것이 경전의 형태로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이 신격화되었는가 하면. 첫째로 많은 제자들과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이들과의 사이에 상하 등의 구분이 없게 되어서위계상에 문제가 발생함으로 인하여 자연 어떤 차별적인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며, 두 번째는 후세에 올수록 많은 사람들의 근기가 떨어져서 부처님과 같은 분이 자연스럽게 훌륭하게 보여짐으로 해서 신격화되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은 모든 것이 바로 이 세상살이에 보탬이 되는 아주 친근한 이웃 할아버지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로 시대와 지방에 따라서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첨삭이 되다 보니까, 각각 그 뜻들이 변화하여 더 쉽게 전달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더러는 어렵게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여기에 소개하는 비화경(悲華經)은그 이름이 대승비분다리경()K乘悲分陀利숑恐)이라고 하거나 비련화경(悲蓮華經) 등으로 불려지는데, 이러한 의미는 이를 자비의 백련화(白蓮華) 혹은 연민의 백련화라고 해석되는 데서 이 경전이 설해진 취지의 일부를 알 수 있는것이다. 즉 이 경전은 다른 모든 부처님들이 정토(淨土)에서 성불하고 그 곳에 안주하여 중생들을 교화함에 반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오탁악세(五濁惡국悽)인 예토(穢土)에 나아가 그 곳에서성불하고, 그 곳의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진력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부처님들이 일상적인 꽃이라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도를 정토이게 한 무량한 자비심을 지닌 흰 연꽃이라는 뜻에서 이를 백련화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 경전에서는 석가모니께서 이 세상에 출세하게 된 과거제의 인연을 다른 부처님들의 그것과 비교해서 설하고있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하겠다.
이 경전의 성립은 여러 정토경전류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 오(吳)나라의 지엄 이전에 성림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한역 연대로 볼 때에 인도에서 용수와 세찬 등이 출현했을 무렵에 널리 독송 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1역은 서진시대(265一365)의 축법호(竺法횹蓼)가 번역한 것으로 한거경(閑滸經)이라고 하였지만 비화경과 동본이역이며, 제2역은 진 나라 때(384一417)에 번역된 것으로 8권 30품이 있었고, 제3역은 북량(北凉)의 도습(道襲)이 번역한 것으로 10권이 있었지만 전해지고 있지않으며, 제4역은 북양의 현시(玄始) 8년(4i9)에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것으로서 오늘 날 전해지고 있는 10권 6품의 본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 비화경외 내용의 일부가 토카라어 불전 속에 단편들로 들어 있으며,중경목록(衆經目錄) 제3권인 대승중역경목(大乘重譯웅篁n)에 보면 이 비화경외 소재(素‡才)가 무려 20가지를 넘은 경전류로되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이는대승경전이며, 많은 내용을 갖추고 있었던 경전으로 보여지지만 그들이 모두 전해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경전은 아촉불경이나 대 아미타경 (大阿彌陀經)등의 경전들이 정토에 관한 사실만을 설하고 있는데 반하여, 석 존의 예토성불과삼승교화를 찬탄한 내용이 그 특징으로 부각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 경전의 각 품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먼저 전법륜품(轉法輪品)에서는 기사굴산에서 부처님이 보일광명(寶日光明)보살로부터 연화존불의 성도(成道)와그의 국토 장엄 등의 사실에 관한 물음에대하여, 연회장 세계의 장엄과 불퇴 전의용기로 법륜을 굴린 연화존불의 교화담을서술하고, 다라니품(1호右羅尼品)에서는 연화존불의 본연담(本牽彖d耳逐)등을 설하고 있는데, 이 두 품에서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와 같이 연화존불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을 그 도입부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시품은 이 경전의 본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적의보살(寂意菩薩)이 부처님께 정토에 낳지 않고 예도에 다투신 까닭을 묻자, 부처님은 이에 무쟁념왕(無諫爭念王)의 본생 담을 들어서 설하고 있다.제 보살본수기품(諸菩薩本授記品) 에 서는무쟁념왕이 보 해의 권청에 의하여 정토 성불의 서원을 일으키므로 이에 보장여래로부터 장래에 무량수불이 되리라는 수기를받는다. 이밖에 천 명의 왕자들도 차례로관세음, 대세지, 문수사리, 보현 및 아촉불등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으며, 보해 혼자서 500의 서원을 일으켜 약세에 나서 성불하길 바라므로 보장여래가 이를 찬탄하고 백련화와 같은 4법정진의 보살, 대비 보살이라고 칭하면서 사바세계에서는 석가여래라고 호칭할 것이라고 수기한다. 단바라밀품({竄波羅審品)에서는 대비 보살의 보살행 과 보시 바라밀을 주로 한 여러 가지의 본생 담이 서술되어 있고, 끝으로 입정삼매품(入定三昧品)에서는 부처님이 적의 보살로 화신 하여 삼세와 시방의 제불은다 그의 권화로 무상의 보리심을 성취할 것이라고 밝히며, 보장 여라는 사바세계부처님의 본연 담을 설하고서 삼매에 들어서 대 신통력으로 일체의 수행문(修t꿍門)을 연설하면서, 최후로 이 경전을 해료일체타라니문(解了一切陀羅尼門) 내지는 비화경(悲華經)이라 이름하라고 부촉하고는수지독송의 공덕을 설하면서 이 경전의 설법을 모두 마치고 있는 것이다.
동국과
불교
백성욱 총장 취임과 서울 환도
/ 이봉춘 / 불교문화대학 교수
권상로 총장의 퇴임에 따라 재단에서는 그 후임의 물색에 여러모로 고심하며 토의를 가져왔다. 그 결과 1953년 7월 21일의 이사회에서는 국외의 교육사정에도 밝은 당시 한국광산주식회사 백성욱사장을 제2대 총장으로 맞이하기로 결의하고, 취임 교섭 일체를 이종욱이사장에게 위임하였다
제2대 총장으로 취임이 발표된 백성욱박사는 일찍이 14세에불국사 최하용 대선사에게 사사하여 튱度한 이래, 1919년에는우리 대학의 전신인 중앙학림을졸업하고 곧 기미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였던 독립투사였다,
1920년에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수학하고,1925년에는 독일 볼쓰블록대학에서 「佛敎純全哲學」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혁신운동에 투신함으로써 불교 청년층으로부터 큰 지지를 얻고, 또 주로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조국해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건국 후에는 한 때 내무부장관에 취임하기도 했으나 51년 i월에 한국광산주식회사 사장,동년 10월에는 본 대학 동창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52년에는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던 다채로운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불교인으로서 학식과 졍륜 그리고 추진력을 겸비하여 본 대학총장으로서는 이 이상의 적임자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백박사는 당시 국영기업체의 사장으로 재직중이어서 총장취임의 응람여부가 염려되었다.다행히 이사장 이종욱의 권유로 재직중인 회사의 잔무를 처리하는데 요구되는 상당한 기간은 겸무케 한다는 양해 하에 본대학교 제2대 총장의 취임을 수락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7월31일 부산시 창신동 소재 본대학교 가교사의 총장실에서 화기에 찬 분위기 속에 권장로 전총장으로부터 사무를 인계받은 백성욱박사는 취임식도 갖지 못한 채 그 다음 날부터 집무를 시작,열성을 발휘하였다.
이같은 새 총장의 취임은 마침 휴전협정체결과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었고, 따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적절한 때에 대학이 서울로 환도하는 일이었다. 당시 비록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또 언제 시국이 급변할지 모른다는 것이 6.25사변을 겪었던 피난민 사이에 퍼져있는 지배적인 의견이었다.때문에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한 다음에 환도하자는 의견도 일부에서 대두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우리 대학으로서도 조기 환도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백성욱 총장은 확고한 신념으로 분분한 세론을 일축하고 정부의 환도와 함께 우리 대학도 환도할 것을 결정, 그 준비를 엄하게 지시하였다. 이에 망설이던 학교 간부측에서도 준비를 서둘러, 8월 20일에는 그 제1진이 서울 본 교사로 향해 떠날 수 있었다. 고달프기는 했지만 그동안 비약의 발판을 마련하여 그런대로 정이 들었던 3년간의피난지 가교자 생활을 청산하게된 것이다.
대학본부의 서울 환도에 뒤따라 교수 학생들도 점차 서울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서울 시내의 다른 대학들보다 수개월 앞선 9월 상순에는 거의 강좌시간표대로 개강이 될 정도로 모든 계획이 정리, 조정되었다. 그러나 긴급한 문제는 전화로 전교사가 파괴되어 학생수용을 위한 공간과 설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인한 시설의 황폐는 형언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전문부로 사용하던 명륜동 교사는미 헌병대에 징발되어 사용할 수 없었고, 동란 전에 학부로 사용하던 필동 교사도 축대통로 등이 파괴된 채 넓은 터에는 잡초만 무성하였다. 거기에 필동의 교사(현 본관건물)는 1949년4월에 전지공사만 해 놓은 상태였고 현 사범대 자리에 있던 목조기와의 일본인 사찰 7동 가운데 2동은 폭격으로 불타버린 채였다. 그 빈터에 판자건물 2동을새로 세워 겨우 7동 602평의 빈약한 시설로는 종합대학교 승격으로 확장된 기구와 증가된 학생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그러나 협소한 대로 긴급한 곳부터 우선 보수를 하는 한편, 본대학과 연결되어 있던 조명기 교수가 개인적으로 계약하여 사용하던 필동의 대지 3300평의 國華유치원 및 일본인 사찰 1동84평의 건물 사용에 대한 쾌락을 얻어 교사의 부족을 메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피난 지 부산의 경남 교무원 법당 지하실에 비하면 천양지차가 있었다
부족한 대로 강의에는 심한 불편이 없었지만 문제는 대학의 심장부라 할 도서관의 재건이었다.6 . 25당시로 개교한지 어언 45년을 경과하였던 본 대학은 그간 희귀본 불교경전을 비롯하여 문집,저서, 잡지에 이르기까지 대학도서관으로서는 손색없는 장서를 구비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해방 후 서적상들에게 쏟아져 나온 경성제국대학 교수들의 희귀본 서적 및 한국인 개인 장서를 널리 구입하여 駱,勖여부의 도서를 구비한 도서관을 개설하였던 것이다. 그런 도서관이 6.25사변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어 그대로는 대학 도서관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6.25동란 중에 공산군 얼개부대가 옛 승전 전을 사용하고 있던 이 도서관에 본부를 두고본 대학 교사에 주둔하게 되자,적지 않은 부수의 귀중 도서가 무식한 병사들의 휴지 포장지 등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거기에 1 .4후퇴시에는 다시 중공군이 본 대학에 주둔하게 되어 전 만주 20만분의 1지도를 비롯, 귀중한 총 서류와 地誌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도서관의 수난은 아군에 의해서도 발생하였다. 국군이 수도를 탈환한 1952년 5월경에는 모 기관원이 화물차로 도서를 반출하기도 하였다. 마침 이를 발견한 중부서원이 대전 근교의 한과 수원까지 미행하여 그 전말을 부산의 본 대학에 알려 옴으로써, 급히 대전까지 달려가 약 8할 정도를 회수하여 대구 능인고등학교에 임시 예치했던 장서의 수난사까지 있었다.
몇 차례의 피해를 겪은 후위도서관은 서고의 외모만 보더라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피난 지에서도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수집해 둔 각종 도서와 능인고에예치해 두었던 서적을 되찾아와 동간을 메꾸고, 낙질본을 조사하여 발견되는 대로 이를 수집하였다. 때마침 고서의 거래가 활발하던 때였으므로 청계천 노점점포에 전 관원을 출장시켜 결본을 메꾸고, 유명서점을 통해서는 원서 중 고전적 가치와 학문적 자료가 될 만한 귀중 본 등은 가격을 불문하고 수집하였다.그러나 6.25사변의 상흔이 워낙 컸고, 또 정리와 수집에 세심한 주의와 기술 및 열의를 필요로 하는 도서관의 재건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불심의
창
출가 4박5일
/ 박정극 / 화학공학과 교수
이 뭣고......, 이 뭐꼬.....,. 도대체 이 뭐꼬의 이가 뭐꼬.......
매일같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광대무변한 우주는 언제, 왜 생겼을까? 그 속에 셀 수없이 많은 성운들, 은하계들, 태양계와 지구,지구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들, 인간, 동식물, 미생물, 바이러스들, 또 그들을 이루고있는 수많은 형태의 물질들, 분자들, 원자들,전자들, 쿼크(QuarK)들, 파동들, 에너지들.......언제부터 어떤 연고로 이렇게 무한 속에 존재해 왔고 또 어디로 무한히 흘러가고 있을까?이 뭣고.,.... 이 뭐꼬....... 그 무한의 시공(時空)속에 이렇게 숙명적으로 유한한 한계성을 지니고 나타난 각기 다른 형태의 생명체는 어떤 인연으로 누구는 물과 돌로, 누구는 바이러스로, 누구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누구는 우주인으로, 지구인으로, 미국인으로,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이 뭐꼬....... 같은 인간인데도 나는 뭐고 너는 뭔가. 부모는 뭐고 자식은 무엇이며 남녀는 뭐고노소는 뭔가. 잘난 것은 뭐며 못난 것은 무엇인가. 건강한 건 뭐고 병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 진리는 무엇이고 비진리는 또 뭔가. 생겨나는 것은 뭐고 죽어 없어진다는 것은 무슨일인가. 보이는 것은 뭐고 안 보이는 것은 뭔가. 이 뭐꼬....... 나는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쩌다가 요정도의 의식 차원에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아 점점 답답해진다. 고함을 지르면서 절규라도 해야 될 것 같다. 안되지 이러면, 가슴으로 한번 큰 숨을 쉬어야 될 것 같다. 온갖 세속의 부귀와 행복을 툴툴 털고 올연히 출가를 결심하실 때의 부처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이 뭐꼬....... 궁금증과 괴로움으로 인생의 최저의 밑바닥을 헤매고 나면 뭔가 알아질 수도 있는 것일까. 도대체 우리가 산다는 것,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디론가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를 향하여서 너는 이쪽으로 나는 저쪽으로 흘러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슨 일일까. 만해(卍海) 선생님은 '알 수없어요'에 대한 해답시는 도대체 언제나 쓰실계획이신가. 아! 점점 발목과 엉치관절이 아파오고 등에 통증이 오는구나, 가슴으로 심호흡을 한번 더 하고 허리를 다시 세워보아야지.아직도 몇 분이나 남았을까. 한참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통증을 전혀 못 느꼈었는데 갑자기 느끼게 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아픔이란 것은 도대체 무슨 현상인가. 삼십 분도 못 앉아서 이렇게 온 몸이 쑤시기 시작하니 이래 가지고 무슨 참선을 한다고, 야 참 너도 한심하구나...,... 아니 화두(話頭)를 놓치면 안되는데! 이 뭣고....... 도대체 부처님은 이 어려운 공부를 6년씩이나 어떻게 참아내셨을까. 뭔가 내가 모르는 다른 차원의 삼매경에 드셔서 고통을 못느끼셨을까. 아니면 아프다는 현상의 본질을 분석 파악하셔서 더 이상 아픔이 아픔으로 생각이 안되게 되시어서 아픔을 즐거운 느낌으로 변화시킨 것일까.만일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나도 한번 꼭 배우고 싶다. 비워진 마음의 공간(그릇)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이 스스로 들어오고, 머무르고,어느덧 사라지고 잠시 아무 상념도 없다가 다시 또 한 생각이 자리를 차지한다. 도대체 아무 생각이 없는 빈 마음의 공간(사이)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텅 빈 공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존재의 실상일까.이 뭐꼬....... 이 뭐꼬.,..... 갑자기 ''탁''하는소리가 고막을 찌르-고 뇌로 전달되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깜짝 놀라 깨었다. 다행히 도내가 아니고 옆에 앉으신 선생님의 졸음을 견책하시는 조교스님께서 등짝을 후려치는 소리였다. 나도 졸았는데 휴! 안들켰구나.
이번 여름 송광사(松廣寺)의 출가 4박 5일프로그램을 알고 나서 이미 등록이 끝났지만 뒤늦게 정각원의 고마운 도움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교직원 좌선 회에 학기 중에 수요일 아침 7시 반부터 한 시간씩 참선공부에 참가하다 보니 조금씩 재미가 붙어줌 더 깊이 배워보고 싶던 차인 터라 송광사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저절로 예불 문과 반야심경이 되뇌어졌다. 마침 공과대학의 홍영식, 이금석, 김병식 교수님들과 함께 참석하게되어서 마음 든든하였다. 송광사 등록 처에서는 좌선복 을 내어주며 지갑, 시계, 전화카드, 담배 등을 압수(?)하여 일절 외부와의 연락을 못하도록 하였다. 4박 5일 내내 묵언을 지켜야 만했기에 모처럼 입을 계속 다물고 지내니 답답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나의 존재의 내면의 세계를 좀 더 관(觀)할 수 있어서 지도스님들께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전국에서 모인116명의 교원선생님들로 구성된 반으로서 계속되는 좌선의 강의, 강사스님들의 법문, 좌선실습, 조석예불 참가 등으로 모처럼 집중적으로 공부에 참가해보니 힘은 들었지만 모두들법열(法'1兌)이 스며든 얼굴이었다. 마지막 날은 철야 정진으로서 좌선과 몸의 온 마디가 끊어지는 듯한 k)80배로 보내고 끝까지 엄격한 발우공양이 실시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광주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누어 마신 한잔의 시원한 생맥주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네 사람이다 같이 동시에 느낀 그 시원한 느낌이야말로 우리가 다 같이 공통으로 간직하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佛,已,)이요, 한마음(一,已,)이고 차가운 맥주잔은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의 본질(眞如佛性)을 담고 있는 마음 그릇이요,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따라 식도로 흘러내려 몸 속에 퍼질 때는 부처님의 말씀(佛法)이 나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부처님과 내가 한 마음이, 한 몸이 되는 것 같은 황홀경(禪悅)을 느꼈다.4박 5일 내내 뒷바라지를 해주신 스님들과 주방 보살님들, 그리고 자원봉사반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는 꼭 자원봉사반으로 신청하여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아무런 경전지식도 없고 불심도 약한 마음으로 쓴 이 글이 많은 선배 불자님의 佛,已,의 窓에 먼지를 묻힐 까봐 무척 송구스럽다.''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시아본사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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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이야기
4조 도신과 우두 법융
/ 성본스님 / 불교문화대학 교수
『祖堂集』 제3권에는 牛頭山 幽棲寺의 기슭에 은거하면서 옷 한 벌만 걸치고 수행하며 뒤에 중국 선종의제4조 도신 선사의 법을 이어 독창적인 牛頭宗이라는선풍의 一派를 창시한 牛頭法融(594-657)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法融선사는 특히 『法華經,j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신통을 얻어 범, 이리, 사슴 등 짐승들과 같이 살면서 신령스런 귀신들이 갖다주는 공양을 받는 등 神通한 스님이었다.
어느날 중국 선종의 제4조 道信(500-配1)이 우두산의法融선사를 직접 찾아가서 법을 전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도신화상은 우두선 쪽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江東의 우두 산으로 올라가니 법융선사가 참선을 하면서 사람이 찾아와도 합장하며 인사할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도산화상은 법융선사의 암자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했다. '선남자여! 갚은 삼매(甚深三昧)의 경지에만 빠져 있지 말라.'라고 말을 건네자 그 제서야 법융은 눈을 뜨고 쳐다 보았다.
도신화상은 '西天 28대의 조사가 ,已,印을 전하고,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오셔 법을 전하여 4대가 되었는데 자네는 그 사실을 아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법융은 깜짝 놀라면서 '저는 항상 4조 도산화상이 계시는 쌍봉 산을 바라보면서 지심정례하고, 가서 뵙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도산화상은 '四祖를 친견하고자 한다면 바로 내가 四祖다'라고 말하자 법융은 벌떡 일어나 인사를 정중히 올리면서 법을 청하였다.
'대개 백천 가지의 묘한 法門은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고, 갠지스 강의 모래처럼 많은 공덕도 모두가 마음 자리에 있다 온갖 선정과 일체의 지혜도 모두 본래부터 구족하고, 신통과 妙用도 모두 그대의 마음에있다. 번뇌와 業障이 본래 空한 것이며, 일체의 果報도본래부터 구족 되어 있다. 三界에서 벗어날 것도 없고,깨달음을 구할 것도 없다. 사람과 일체의 존재가 형상은 다르지만 성품은 평등하다.
大道는 비고 넓어서 생각과 분별이 끊어졌으니, 이러한 법을 그대가 이미 얻었다.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부처와 다름없고, 다시 성불할 법도 없다.
그대는 다만 마음에 내맡겨 두라. 觀하려고도 하지말고, 마음을 응집하지도 말며, 탕진치 삼독을 일으키지도 말고, 근심걱정을 품지도 말라. 탕탕하여 일체에 걸림도 없고, 뜻에 맡겨 자유자재하니, 善을 짓거나 惡을 없애려고도 하지 말라. 行住坐臥에 눈에 띄고 만나는 인연 그 모두가 부처의 묘한 작용이어서 즐겁고기뼈, 근심이 없기에 부처라고 한다.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은 毛,法이다. ,已,法이란일체의 모든 法(존재)은 마음이 만들王- 짓는 것이다.근심 걱정의 일체의 불안이나 개 달음을 통해 체득한 지혜나 열반의 경지도 마음에 있는 것이다 『華麟隻經』에서 설하고 있는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조작한 것이라는 「 -切唯,已,오亐」는 이러한 사실을 한마디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에는 부처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와 자비의 공덕, 인격을 구비한 {念섀生이 구족 되어 있다. 그래서 佛法을 밖에서 구해서는 영겁이 지나도 얻거나 깨달을 수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참된 보물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旅盡藏의 보물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已,中의 보물은 밖에서 구하고 추구하려는 헛된 마음을 돌려 萬法의 근원인 각자의 마음에서 한마음 전환시켜(暫貶'1'吾) 깨달음으로 개발하고 지혜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도산화상이 설하고 있는 것처럼,마음을 억지로 조작하여 밖이나 안을 향해 진리니 깨달음을 추구하지도 말고, 善을 추구하고 怒을 멀리하며,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범속함을 멀리하는 일체의 차별 심과 분별심을 여의면 그대로가 본래의 자기 부처의 자리로, 텅 비고 탕탕하여 무에 자재롭게 걸림 없이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신통묘용이다.
비유와
설화
바히야의 구법 (求法)
/ 조용길 / 불교대학 교수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밧티 교외의 제타숲아나타핀디카 장자동산에 계셨다.
그때 숫팔라카 해안에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자 바히야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경배받으며 찬양과 공양을 한몸에 받아 옷과 음식, 또는 침구와좌구, 그리고 약품을 얻고 있었다.
어느 때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다음 과같이 생각하였다. ''무릇 세상에는 아라한을향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고 가운데 한 사람이 될까?''
그패 전생에 바히야의 친척이었던 천인이었었는데 그는 동정심이 많고 사람들의 이로움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바히야의 생각을 알고 그 곳에 모습을 나타내고 말하였다.
''바히야여! 그대는 아라한도 아니요, 아라한을 향하는 길에 들어선 자도 아니다. 그대의 길은 아라한의 길도, 아라한을 향하는 길에 들어서는 길도 아니다尸
''그렇다면 하늘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누가 아라한-이며, 누가 아라한을 향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까?''
''바히야지 북쪽지방에 사밧티라는 거리가 있는데 지금 그 곳에 아라한이며 올바르게 깨달은 분이신 저 부처님이 계신다. 바히야여!그분이야말로 세상의 스승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아라한이 되는 법을 설하신다.''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이 천신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려 곧장 숫팔라카를 나와서 각각의 쉼터에서 I박만을 했을 뿐(도중의 어느 곳에서도 오래도록 머무르지 않고) 사밧티 교외의 제타숲 아나타핀디카 장자의 동산에 예시는 부처님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런데 그때 수많은 비고가 문 밖을 경행(經行)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그 비고들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스승들이시여! 아라한이며, 옳게 깨달은 분이신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저는 아라한이며 참다 이 깨달은 분이신 부처님을 뵙고자 합니다.'' ''바히야지 부처님께서는 탁발하러 거리로 들어가셨습니다.''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급히 제타숲을 나와 사밧티 거리로 들어가 거리에서 부처님을뵈었다. 그때 부처님은 청정하고 아름다우며,감관을 잘 가라앉혔으며, 마음이 고요하고 다시없이 스스로를 제어하였고, 마음의 평온에도달하셨으며, 자기를 다스리고 강관을 지키며, 강관을 가라앉힌 코끼리처럼 탁발하며 다니고 례셨다, 바히야는 부처님을 뵙자 그 곳으로 나아갔다.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경례한 뒤 부처님께 아뢰었다.
''스승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저를 위해 법을 설해 주소서. 존귀하신 이씨 저에게 영원한 이로움과 안락함을 가져다 주는 법을 설해 주소서.''
이말을 들은 부처님은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에게 말씀하셨다. ''바히야여! 우리는 탁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법을 설할 때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부처임께 아뢰었다.
''스승이시여! 부처님의 수명에 언제 어떤장0쨉가 있을지, 제 수명에 언제 어떤 장애가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스승이시여1제게 이로움과 안락을 가져다 주는 법을 설해 주소서.''
다시 한 번 부처님은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에게 말씀하셨다.
''바히야지 우리는 탁발하고 있는 중이어서 그럴 때가 아니다.''
재삼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가 간청 하자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바히야여! 그대는 다음과 같이 수행해야 한다. 보이는 것 속에는 보이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리는 것 속에는 들리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되는 것 속에는 생각되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지된 것 속에는 인지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바히야씩 그대는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 그대 가본 것 속에는 본 것만이 있을 뿐이고, 들은 것 속에는 들은 것만이 있을 뿐이고, 생각한 것 속에는 생각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지한 것 속에는 인지한 것만이 있을 뿐이므로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바히야여1 거기에 그대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혹은 그 가운데에서나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끝인 것이다.''
바히야는 부처님의 이 같은 간단한 가르침에 의해 그 즉시 집착이 사라지고 온갖 번뇌로부터 마음이 자유롭게 되었다. 부처님은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에게 이 간단한 설법을 마치신 후 떠나가셨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떠나가시자마자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어린 송아지를 데리고 지나던 어미소와 부딪쳐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때 부처님은 사밧티 거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공양하신 후 수많은 비고 들과 함께 거리를 떠나 오시다 도중에 바히야의 주검을보셨다. 그리고 비고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바히야의 유해를 침상에 올려 가져가서 나비를 하도록 하라. 그를 위해 탑을 세워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처럼 청정한 행을 닦은 자가 목숨을 마치었구나.''''그리 하겠나이다. 스승이시씩''라고 비고 들은 부처님께 답하고 나서 바히야의 유해를 침상에 올려서 가져가 나비를 하고 그를 위해 탑을 세운 뒤에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와서 경례하고 곁에 앉았다. 비고 들은 세존께아뢰 었다.
''스승이시여.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의 유해를 대비하고 그를 위해 탑을 세웠습니다.그는 어떤 경지를 향하겠습니까? 그의 내세는 어떻겠습니까?'' ''비구들이여! 현명한 사람 바히야는 법에 의거해 실천하였고 법에 대한 논쟁으로 나를 성가시게 한 적이 없었다. 비구들이여! 나무껍질 옷의 바히야는 완전하게 열반에 들었다.''
때에 부처님은 그것을 아시고 이러한 우다나를 노래하셨다,
물.흙.불.바람으로 이루어진 것을 소유하지 않은 곳에는 별은 빛나지 않고 태양은 비치지 않는다. 달은 그 곳에 비치지 않고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올바르게 깨달았을 때, 성자인 바라문은 성자의 지혜에 의해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것,즐거움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불자
탐방
문재옥 계장
/ 편집부
비가 내리고 맑고 개운한 바람 덕분에 가을인가 싶더니 한낮의 기온이 다시 여름의 뜨거움을 느끼게 한다. 사계절 어느 절기 하나 쉽게 지나치지 않게 하는 자연의 속을 어떻게 짐작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아침저녁 살갗에 닿는 청량함은 초가을의 속 깊은 베려가 아닐런지. 새벽 안개 비켜간 정각원 가는 아침 길은 소운동장의 흙 발을 떨어내는 순간부터 접어드는 이속(屹律谷)의 경계가 예사롭지않다. 눈 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햇살에 들킬세라 꽃잎을 다문 달맞이꽃 하는 양이 그러하고 사철 바람소리로 자태를 드러내는 수련(水蓮)이 하는 일 그러하고 이방인의 드나듦과는 상관없이 나무를 옮겨 다니는 다람쥐 하는 장단이 그러하다.
사계절 어김없이 속을 바꾸어가며 하는 자연의 일들을, 이 곳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은 말하지 않을 뿐 짐작하고 있을 일이다. 다만 시방세계를 열어놓은 부처님 계신 길을 밟아보지 못한 이들만 모르고 있을뿐.
''하루라도 부처님을 친견하지 않으면 하루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미루어 놓은 듯 하고 부처님께서도 저를 나무라실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대 교학과 문재옥계장님은 소탈한분이었다. 불교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 계장님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스스로를 낮추는 꾸밈없는 겸손함이 한사코 인터뷰를 요청한 사람의 수선스러움을 부끄럽게 했다.
그는 대구에서 오는 통근버스에서 내리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각원 법당을 찾는다,때문에 그의 부지런한 신행생활은 알게 모르게 칭찬거리가 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생활불교의 바람직한 벼리가 되었다.
''불제자가 부처님을 매일 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다른 이들보다 조금 자주 와서 발원하고 기도하는 일일뿐 남들 앞에 이름 석 자 내놓는 일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82년 2월 18일자로 발-령 받은 후 지금까지 학교 근무는 십 년하고도 오년째다, 불교와의 인연을 물었더니 몇 년 간의 회사생활 후 학교 근무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때가 바로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인연이라 한다, 어릴 적에는 공직생활을 하신 부친의 영향으로 불교적인 가르침으로 자랐다. 부친은 삼보사찰의 수련법회에 열심이셨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시는 분이니, 그분의 슬하에서 자식노릇을 하는 그의 정성스런 신행생활은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겠다.
직원들의 불자모임안 「문수회」에서는 부회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캠퍼스 「보현회J의 영향으로 92년 7월에 창립된 「문수회」는 햇수로는 올해 오년째다. 직원들의 올바른 신행생활을 통해 상호간의 단합을 도모하는 문수 회에서 그의 말대로라면 이름뿐이고 형식뿐인 벼슬이라지만 말보다 먼저 견고한 신행생활을 보여줌으로써 힘이 되고 스스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 운수회의 든든한 어른이 아닐까. 성지순례에서 인상에 남았던 도량은 예산 수덕사의 단청이 안된 대응 전을 손꼽는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건물이지만 쓸 데 없는 장식을 전혀 하지 않은 소박함, 정확한 균형에서 오는 안정감, 빛바랜 단청들이 보여주는 담백함 그리고 목조건물로서 근 700여년의 세월을 버텨 낸 견실함이 수덕사 대웅전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감상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묵묵함이 아무래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대신하는 듯하다.문수회 활동 중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법회 참석률이 자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법회에 나오면 업무상의 어려운 일이나 밀린 안부를 묻고 사사로운 우애도 돈독히 할 수 있는데 회원들의 동참이 소홀하다. 법회가 아니면 만나서 딱히 얘기할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 현대생활인의 모습이고 보면 가장 적실한 장소와 때가 법회 날이 아닐까 하는 바램도 털어 놓는다.
무더위가 71승하던 지난 여름에는 4박 5일간 해인사 수련대회에도 다녀왔다, 평소에 다져 두었던 재력으로는 만만치 않은 시간들이었다 잠시 여유도 없는 수련기간 동안 측량할 수 없는 부처님세계의 견고함은 새롭게 마음을 일으킬 수 있었던 선연(善蔘澈)이었음에는말할 것도 없겠다.
수련회 기간 중 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간 경도 했다. 절은 하면 할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신심도 가지런해 지고 가야산 산행을 피로함 없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 한다.수련회 기간 중 『부모은중경」을 세 편 읽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3말 8되의 응헬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를 먹인다고 했다,따라서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왼편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편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살갗이 닳아서 뼈에 이르고 뼈가 닳아서 골수에 이르도록 수미산을 백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콜촌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그 은혜에 보답하여야 함을 모르는 이 어디 있겠는 가마는 자식은 자식일 뿐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정각원 법당에서 서원(誓置")하는 것은 바로 부모님께 자신의 걱정을 덜어 드리는 일이다.
두 명의 아들에게도 부처님 오계와 보시하는 마음을 일러주는 일도 부처님 말씀처럼 살면 우애가 생긴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부처님이 말씀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도 그른 것도 없으니, 따르고 지키기만 한라면 바라는 모든 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일이다.
신행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은 참선이라고한다. 참선을 하려 하면 갖가지 망상이 자신보다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도 고요함을 주지 않고 마음 속의 평화로움을 모두 거두어 가 버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혼란함이 도리어 생긴다. 신행생활의 로J이가 견고히 깊어질수록 참선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찾아 망상보다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는 일이 그의 화두가 아닐런지.
불교
건강법
환절기
/ 김장현 /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씨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서 맑은 하늘이 보이고 상쾌한 날씨가 계속되면, 찌뿌드드한 몸은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런 환절기에는 기침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가을은 건조한 계절이다. 호흡기계통은 적당히 따뜻하고 촉촉한 것을 좋아하는데, 냉한 기운과 건조한 날씨로 이어지면 호흡기기관의 기능에 이상이 나타나면서 약해지고 평소에 기관지에 담음(痰飮)이 잘 생기는 사람은 폐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위로 솟구치면서 기침의 증상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 담음은 왜 생기는 걸까? 담음을 쉽게 설명하면, 인체내의 진액이 그 생리적 기능이 저하되거나, 상실되어 저류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강물이나 시냇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면 각종 찌꺼기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인체에도 나타나는데 가장 흔한 예를 들면 가래 같은 것이다. 이 담음이 사실상 각종 질환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한의학에서는 예로부터 십병구담이라는 말이 있다. 기혈의 순환기능을 상실하면서 제 역할을 못하는 체액의 응결로 인해 많은 병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담음병은 외부 병균의 침입, 음식을 과도히 먹는 것, 또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과도한 흡연 외에도 환경오염으로 인한 폐기문의 손상 등이 원인이 된다. 평소에 감기 증상이 자주 일어나고 흔히 뒤끝에 기침의 증상이 나타나면서 주로 아침이나, 차가운 공기 등에 노출되면 콧물, 재채기 코막힘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보통감기증상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담 음성 체질로서 흔히 한랭에 의한 자극에 민감하도록 되어치는 현상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고, 쉽게 낫지 않으며 증상이 빈번하게 반복되게 된다. 심하면 천식의 증상이 나타나기도한다.
담음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려면 먼저 생활의 절도가 있어야 한다 규칙적인 생활, 적당한 운동, 과로를 피하는 것 등이며, 또한 음식의 절제가 필요하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하면 몸속에서 담음이 되어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과음은 물론 흡연은 담 음성 체질에는 금물이다. 담음을 치료하는 방법은 화담이기(化痰利氣)이다. 삭히고 기운을 돌린다는 뜻이다. 담음을 삭히는 데는 일반적인 차, 특히 유자차, 모과차, 생강차, 녹차, 심지어 적당량의 커피도 도움이 된다. 이들은 기운을 돌려주는 작용이 있어 울체된 현상을 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에 가래가 생기고 기침이 자주 나타날 때 쉽게 쓸 수 있는 이붕고라는 한방처방을 소개하면, 배의 위 부분을 옆으로 자르고 속의 씨를 도려낸 다음, 그 속에 봉사(월석) 2g과 꿀을 넣고 잘라낸 위 부분으로 뚜쩡을 덮어서 중탕하여 즙과 익은 배를 먹으면 가래를 삭혀서 기침을 멎게 한다
불교어
산책
생활속의 불교 언어
/ 편집부
언어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다.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인간 삶의양식>이라고 규정한다. 즉 각 언어는 어떤 특정한 삶의 양식의 표현이며 그와 상관관계를 이룬다고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개념을 일단 이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한국인의 언어생활 가운데 불교적 언어 문제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불교언어는 의외로 우리 생활 속에 깊게 용해되어 알게 모르게 한국인의 한 삶의 양식을 이루고있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불교 자체의 입장은 극과 극의 대조를 보여준다 붓다께서 설하신 45년간의 설법, 그 방대한 내용과 분량의 대장경은 분명 언어를 매개로 한 진리의 향연이다. 인간이 처해 있는 갖가지 상황에 대한 갚은 통찰과 그로부터의 구제를 위한 자비의 길이 모두 언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통발이며 손가락에 비유된다. 고기를 잡고 달을 보았으면 버려야할 도구와 수단들인 것이다 따라서 45년간의 '광장설'은 일찍이 한 말씀도 하신 바가 없는 것이 되고, 그것은 다시 '不立文字'로 이어진다. 가히 有言과 無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얕은 근기를 위해서는 무수한 연설이 필요하다. 또한 진리의 높은 경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니게 마련인 언어는 부정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불교의 有言을 논하고자 하는 마당에無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가령 '不立文字'는 어떤가, 그것은 이미 하나의 언어이다.소리의 마디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미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이다.언어의 개념은 매우 광범하다. 일상적인 자연언어 뿐만 아니라 수학이나 논리에서 흔히 사용하는 기호 또한 인공언어가 된다. 언어철학 분야에서는 소리나 기호는 물론 상점 .표정 .동작, 심지어는 침묵까지도 언어의 한 형태로서 간주된다. 그런 뜻에서, 불립문자를 표방하든 원을 그리든 주먹을 휘두르든 그것들은 이미 기호화되고 상징화된 하나의 언어란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유언과 무언은 결국 차이가 없는 셈이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린다면 언어에는 본질적인 특성이 없다.그것은 때론 유언으로 때로는 무언으로도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유언에서 무언에 이르든, 무언에서 유언으로 되돌아 오든 양자가 다 가능하고 유용한 것이 된다. 우리는 민족의 문화유산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민족의 정신 속에 깃들여온 언어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의 정신 속에 깃들여온 언어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않는다 만일 국보급 청자라도 한점 파손되거나 도난 당했다 치자, 큰일이 났다고 '야단법석'을 떨것이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소멸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언어도단'의 현실이 여기에도 있다
생활속에 매몰된 채 변질.소멸되고 있는 불교언어를 찾아내어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고 그 뜻을 바르게 살려 쓰는 일은 옛불상이나 청자를 신중히 하는 행위에 못지 않다. 그 일이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화두'이다. 민족의 정신문화를 더욱 새롭고 풍부하게 가꾸어내는 '첩경'이 바로 거기에도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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