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간 정각도량 / 9월호 / 통권 25호 / 불기
2540(1996)년 9월 1일 발행 |
|
|
|
총장특강
■ 건학이념 실현의 길
/ 송석구 (동국대학교 총장)
교직원 연수회 및 신임 교직원 수련대회를 황학산 직지사에서 갖게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동국대교수가 됐고 직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마다 각각 자기 욕망이 있을 것이고 현실에 대한 자기 비판도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이 동국대학교에 몸담고 산다는 것이 행복하고 더 없는 복이라 생각을 하면서 이 자리에 동국 가족이 모두 참석한 것에 커다란 의의를 느낍니다.오늘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 동국대학의 건학이념인 불교에 대한 것과도 번째 동국대학의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동국대학교의 건학이념인 불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으리라봅니다마는 불교를 어떻게 믿어야 되고 불교사상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불교는 학문적으로 노력하는 부분과 동시에 믿음의 세계를 져버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열심히 불교를 믿고 연구하였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바꿔지지 않으면 그 불교는 하나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경을 수백, 수천 번 읽고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바꿔치지 않고 편안하지 않으며, 또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바꿔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를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교의 교리적인 면보다는 불교의 형태적인 면에서 잘못된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불교를 가르치는 분들도 불교의 무상성에 대해서만 0召기해왔지불교가 진정 우리 탓1간의 삶과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못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의 산업문명시대에 들어오면서 물질위주의 세계로 변하여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베 말라져서 인간의 삶에 대한회의가 일어나고 인간이 하나의 부분품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그러한 인간의 생명적으로 사는 데는 불교가 필요하고 그 필요한 명상의 세계를 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도사실입니 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 역수입되어 오고 있는현실입니다. 그것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 불교의 독자성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것의 믿음의 체계 또한 잘못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론을 하면서도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이론을 하면서 믿음을 안 갖고 또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론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반목 되는 것이 아니고 어울러져야 되는 종교의 두 축인 것입니다. 동국대에 와서 계신 신임 교수직원 선생님들께서는 불교를 그 동안 접해 오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과거에 잘못했던 그런 오해직인 것을 지금부터 불식해야 될 것이라고 봅니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그러한 의식 행태 면의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진정한 불교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 있어서 불교를 어떻게 봐야하느냐? 불교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하는 것이 바로 동국대학의 건학이념인것입니다. 불교는 한마디로 깨달음입니다.무엇을 깨달음인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세상이 허무하지 않다고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진정한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어떤 것에든 집착을 버리는것입니다, 즉, '부처'라는 말은 깨달음이라는 말이고, 깨달음의 내용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심청장이 깨달음이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칭찬해 줘야 합니다. 칭찬하지 않는데서는 생명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불교는 수행주의도 고행주의도 아닙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내용인 심청정을믿는 것입니다. 심청장은 내 마음이 본래 맑고 깨끗하니까 상대방의 마음도 맑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그 마음의 불성은 심청장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꼭 이해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동국대는 이것이 건학이념의 하나로서 대립하지 말고 화합을 하여야 하는것입니다. 교수와 학생, 직원과 교수, 직원과 학생, 보직자와 비보직자 사이에 대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교의 자비사상이란 바로 이 심청장을 수행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실천으로 행하는 화합하는 정신이야말로 불교의 위 대한정신임을 우리들 스스로 이해하여야 할것입니다.
두 번째 동국대학교의 앞으로 비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학내적으로 볼 때 신임 교수와 직원들 간의 권위주의적인 자세를 지양해 주기를 바랍니다. 대학에서 직원은 신임교수에 대해서도 평상시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인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교수도 자기가 가르치는 것이 제일이지 모든 사람에게 권위적으로 존경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원과 교수 간은 적대관계가 아닙니다. 직원이 일을 잘못하면 교수가 일이 안되고,교수들이 직원을 부정적으로 보면 또 서로 갈등이 되어서 안됩니다. 이렇게되어서는 대학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서로 인식하고, 교수와 직원들이 서로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먼저 인사하고 화합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동국대학은 새로운 도약대위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9일날 개교 90주년 동국후원의 밤에 재단과 학교 그리고 동문들이 참여하여 많은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 또한 일산의 제3캠퍼스 건립과 불교종합병원 건립추진 등이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 전교직원이 하나가 되어 이러한 일들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 대학은 교육개혁을 가장 먼지 실시하면서 21세기 새로운 동국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교육개혁의 내용을 교수님들은 철저하게 읽어보고 개인의 학문적 발전과 더불어 과의
발전도 필수적인 과제임을 인식하여야할 것입니다. 대학의 발전이 있어야 교수님들의 발전도 있을 수 있으며, 내 학문 발전만으로는 대학의 발전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의 활발한 화합을 통하여 교육개혁의 성과가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노력을 당부드리며, 더불어 전체를 볼 줄 아는 그런 안목을 키우도록 노력해 주셨으면 합니다. 근래에는 교수님들도 교육개혁에 의해서 열심히 공부하시고 가르쳐주고 하지만 교직원들도 본관 건물은 밤 10시가 지나도록 꺼지지 않고 일하고 있음을 알고 서로서로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말한 동국대의 건학이념인 불교의 올바른 가르침이란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맘에 있는 것이 현실에 있고, 남을 칭찬해 주고, 그러한 것을 믿는 것이 심청정이며, 이것이 곧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학교에 대해선 교수, 직원들이 화합하는 것입니다. 화합하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다 각각 자기 본분을 지켜서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육개혁을 통한 학교 홍보를 여러분들이 홍보인 이 되어 달라는것입니다. 아무쪼록 불교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행력을 길러 나가 동국 발전의 주역이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일주문
■ 참된자비
/ 장계환 (불교학부 교수)
지난 학기 학생들에게 불교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몇 가지를 적어내라는 설문조사를 해보았다. 단연코 1위를 차지한 것은 '자비''였다. 그러나 자비에 대한 이해는 결코 1위가 아니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자비는 현재 하나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 자와 비는 의미가 다르다. 먼저 자(慈;Maitri)는친구를 의미하는 Mitra에서 파생하여 참된 우정이나 애정을 가리키고, 이에 대하여 비(悲=kariuna)는 애민, 동정이라는 뉘앙스가 강한 말이다. 따라서 <대지도론>에서는 자(慈)를 여락(與樂) 즉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라 하고, 비(悲)를 발고(拔苦) 즉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타인에 대하여 잘 되라고 바라는 마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자비의 원점을 석 존이 가르친 범위 내에서 살펴보면, 자기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상당히 알기 쉬운 관념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개념은 그 자체가 아주 명쾌하여 어떠한 설명을 요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어느 방향으로 찾아보아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타인에게 있어서도 제각기 '자기'가 가장 사랑스럽다는점이다. 자기가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울수록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자기'는 역시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로부터 희생되고 상처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타인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이다. 이는 바로 자기와 타인을 동등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하여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비를 다른 세상에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현실사회에서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때, 무조건 부드럽게 안아주는 것만이 과연 자비일까? 제각기 개성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지식한 감상주의가 결코 자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식을 사랑하는 까닭에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 제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F학점을 주는 교수의 경우, 모두가 훌륭하고 적극적인 자비 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매를 들어야 할 때 가만히 있고, 야단을 쳐야 할 때 나무라지 않는 것은 결코 참된 자비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태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특히십일면 관음보살상을 살펴보면, 앞의 3면은 자애로운 표정이고, 왼쪽의 3면은 분노하는 모습임에 비해, 오른쪽의 3면은 미소를 짓고 있으며, 뒤의 1면은 크게 웃고 있는 폭소상이고, 정상(頂上)의 1면은 바로 부처님상이다. 이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이렇게 자비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과연 어떤 모습이 어떠한 행위가 참된 자비인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일이다.
정각도량
■ 돈으로 할수 없는것
/ 이도업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우리 불가(佛家)에서 금기시하는 것중에 오욕락(五慾樂)이라는 것이 있다. 시대의 고급이나 지역의 동서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갖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재욕(財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명예욕(名譽慾) 그리고 수면욕(睡眠慾)의 다섯가지다. 이 다섯가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거의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하고 본능적으로 이어서, 범인(凡人)으로서는 끊거나 절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신라 원효(元曉)스님께서는 '자락(自樂)을 능히 버리면 성인(聖人)과 같이 신뢰받고 존경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신뢰받거나 존경 받고자한다면 자락(自樂)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원효스님이 말씀하시는 자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오욕락(五慾樂)이다. 요즈음 스승의 권위가, 가장(家長)의 위엄이, 공직자의 명(命)이 서지를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자기들의 즐거움은 버리려 하거나 절제하지 않고, 자락만을 너무 탐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돌(石)보기를 황금같이 하지 않으면 국제 경쟁력에서 살아 남을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도 잘 안다. 그러나 돈은 어디까지나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님은 자명(自明)한 일이다. 하지만, 요즈음 우리 사회에 돈이 생활의 전부인 것으로, 인생의 목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듯 해서 하는 말이다.
야운(野雲)스님께서는 '삼일(三日)의수심(修,已,)은 천년의 보배가 되지만 백 년간 돈을 모아 봐도 그것은 하루 아침의 티끌과 같다.''고 하셨다.
돈을 우습게 여기라는 말씀이 아니다.돈이 나쁘다는 말씀은 더더구나 아니다.돈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음을 말하고자함이 다.
편안한 잠, 육신의 건강, 신뢰나 큰덕, 무상(無上)의 불법(佛法)과 같은 소중한 것들은 돈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심(修心)에 의해서 구해 질 수 있으며 용심(用毛,)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오직 돈(財物), 오직 사랑(異性的), 오직 보신(食補), 오직 명예(權勢), 오직편함(睡眠), 그리고 오직 신(神)이 절대 보배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가짐'의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자 함이다. 현대인들은 너무 밖에서만 구하려 하고 있다. 행복은 가정에서부터 이뤄가야 하고 안정은 개개인의 마음 안에서 찾아야할 것 같은데1
이것이 부처님과 역대 선지식들께서 간절하게 가르치신 경구(警句)가 아닌가.
정각논단
■ 無常을 산다
/ 윤주억 (공과대학 식품공학과)
물건을 본다는 것
'물건을 본다'는 것은 그 물건의 본질을 알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컵을 예로 들어보자.
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우리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컵이란 물을 마시는 도구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것 은컵을 그 기능면에서 파악한 것이 된다.유리로 만들어 진 것이며, 규소라는 원소의 화합물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분석적인 면에서의 답이라 할 수 있다. 컵은 옆에서 보면 사다리꼴, 위에서 내려다보면 둥글다고 대답하면 이는 형태적인 면에서 본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유리컵을 파는 장사집 주인은 800원에 사들여1000원에 파는 200원의 이득을 보는 물건이라고 답할 것이며, 이 경우는 컵을 경제적인 가치에서 본 답이 된다.
이와 같이 컵을 놓고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즉 관점이 다르면 답도 달라지며 이 관점은 무수히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무수히 많은 답 중에서 컵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답은 어느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파악된 내용이라는 것은 그 물건을 나타내는 진리임에는 틀림없으나 어디까지나 '어느 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라고 하는 조건 아래서 이해할 진리이다.
지성의 작용
물건을 보는 관점이 무수히 많다는 것은 그 물건과 그것을 보는 나라는 인간사 이가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보는 나와 보게 되는 대상은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주객(主客)이 분리된 조건하에서 파악되는 진실은 반드시 인간의 사고를 통해서 얻어지는것이다. 즉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분별(分別)이라고 하며,역으로 말하면 사고는 주객이 분리되어야만 비로소 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고는 관점에 따라서 결론을 달리하며, 반드시 사고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사, 성격이나 기질, 환경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고의 작용은개별적이며, 사고를 통하여 파악된 진리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 다만 관점이 같아지면 같아질수록 거의 같은 결론을 얻을 수가 있게 되므로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객관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절대적인 진리로 되는 것은아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것은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다든가 절대적으로 그렇다 든다 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절대는 그 사람만 절대라고'생각하고'있을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절대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절대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절대'가 여러 개 있게 되며,여러 개 있는 절대는 실은상 대이며 절대라 할 수 없는 법이다. 절대는 어디까지나 입장이나 관점, 전제 등이 다르다고 해서 달라져서는 안되며 무한정(無限定)으로 절대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은 10사람 있으면 10가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사고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고를 통해서 '생각해 내고,만들어 낸 것'에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사고를 통해서 '안다' 또는 '본다'고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고에 의하여 파악된 것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기 전에 이미 개념화되고 추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컵이 물을 만 시는 도구라든가, 규소라는 원소의 화합물이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사고를 통해서 표현된 '개념'이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그 생각의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컵에 대하여 그 모양,기능, 조성 등을 남에게 알려주고, 컵이라는 존재를 상상하게끔 하므로 컵이 어떤 것인가를 사람들에 게 communicate하는데는 유용하지만, 손에 만져보고 실제로 물을 마실 수 있는 컵 그 자체는 아니다.마치 그림 속의 떡과 같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뜻으로 우리들이 컵을 안다든가 하는 것은 사고라는 작용을 통해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하는 조건이 붙은 진리에 지나지 않으며, 둘째로 추상화된 개념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사실 그것과는 구별해서 생각되어야한다. 학문이라든가 과학이라든가 하는 것도 바로 이 세계속에 성립되어 있는것이다. 어떠한 분석도, 어떠한 경우도'이 면에서 본다면'하는 특정한 관점에서서 본 진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가 그렇게 보게 되므로 그것은 객관적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며,사물의 객관적 사실을 제시한다는 학문인 과학의 능력(기능)의 유용성과 그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상을 탄식(歎息)한다
물과 산을 보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산은 높은 곳에 있다고 하는 인간적인 해석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콜1은 곳에 연기(緣起)의 도리(道理)에 따라 스스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작용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거기에 따르는 생활이어야 한다. 불교에서(기독교나 힌두교에서도 마찬가지라고생각한다) '본다'든가 '안다'든가 하는 것은 결코 지성의 이해가 아니다. '이룬다'는 뜻이며 그리고 나 자신의 살아가는 길에 작용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물건을 '본다'는 것은 서로 다른 많은 관점에서 '보고'있다는 사실과, 다른 면에서는 '이룬다'고 하는 이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상에 대해서도 불교문화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로 고찰되어 왔으며 따라서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가지고 전승되어 왔다. 그것을 정리하면 세 가지 뜻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상을 이 세상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보는 견해, 그리고 불교적 삶에 직결시켜 스스로기 무상을 이룬다고(무상으로 된다고) 받아들이는 방식의 세가지이다.
무상이란 원어(原語)인 anitya, 또는amiccaa를 번역한 것이다. nitya는 항상(恒常)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부정하는 말 a를 붙여서 anitya라는 말로 되었다. 그러므로 anitya,는 향상이 아닌것, 즉 무상(無常)을 가르킨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은 언제나 변하며, 영속(永續)성이 있는 것은 없다고 하는 생각은 굳이 불교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미 고대 인도의 불교 이외의 문헌에도 이 말은 흔하게 쓰여지고 있으며, 인도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 젊음, 번영과 같은 좋은 일, 언제나 그러하기를 바라는 일들이 사라져 갈 때의 허무함을 무상이라는 사실로 아쉬워하며 받아들였다. 아니 이 허무함이 먼저 있은 다음에 무상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불전(佛典)에서도,
재물로 장수(長壽)를 얻을 수 없고 재산으로 늙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생명은 짧고, 영속되지 않아 변화를 면할 길이 전혀 없구나 (테라가타 782) 하였고, 특히 죽음을 무상의 maximum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목숨은 이다지도 짧은 건가 백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는구나. 더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늙어 죽는구나 (숫타니 파타 804)
이와 같은 표현 속에는 사람의 목숨이나 명성 등은 어이없이 사라져가니 붙들 수도 어쩔 수도 없다는 슬픔을 나타내고있다.
석가모니가 깨닫고 가르친 무상은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있던 것이 없어지고,번영이 몰락으로 변하는 슬픔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전락되었다. 무상의 사실은 '부질없다'고 하는 정감(情感)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도 사람의 목숨이 뜻하지 않은 일로 끊어지는 것을 보면 '허무한 세상, 정말 무상하구나'하는 말을 무의식중에 하게 된다.
무상의 합리성
그러나 무상을 허무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무상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을 나태 내는 말일뿐,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상이기에 사람은 죽는다. 이는 슬픈 일임에는 틀림없다 동시에 무상이기에 태아는자라고, 태어나고, 커가는 것이다. 무상한 사실은 언제나 슬픈 일하고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죽음이나,목숨이나, 권력이나, 건강과 같은 영속되지 않고 변해가는 것에 대한 허무함, 슬픔을 나타내는데 많이 쓰어져 왔을 뿐이다.
무상은 만물이 변한다는 객관적 진리(자연현상)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옳고 바른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우리들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은 무상이다 하는 것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동시에 자연현상의 근본적인 진실이기도 하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최근에는 그 이상세분 할 수 없는가 장작은 실체가원 자를 구성하는 양자나 전자라는 생각은 무너져 버렸다. 물질 존재의 구극(究極),즉 기본은 quark임이 밝혀졌다. 만약에 그렇다면 불교의 세계관은 과학이 보는 세계관과 잘 맞아 떨어진다. 유럽의 역사는 언제나 과학과 종교의 불화(不和)와양자의 협조를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 왔다. 그런 만큼 제행무상은 불교의 과학성과 합리성을 나타내는 좋은 보기가 된다.불교에서 무상이나 연기(緣起), 공(空) (이들 술어는 같은 진실의 작용을 다른 국면(局面)에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을 중시(重視)하고 있는 점은 불교가 논리적이고 합리성을 갖춘 종교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상을 본다
그러나 불교의 unique함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불교는 과학적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과학적인 합리성이나 그 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의미'를 찾고, 인생의 괴로움을 초월하는 삶의 방식을 찾는길이다. 석가모니는 무상인 사실을 알고서, 거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자기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는 저쪽에 놓고 냉엄(冷嚴)하게 객관적으로 모든 것은 무상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나 자신과 무상이라는 사실이 하나로 작용하고 있는 세계, 즉 주어를 1인칭으로 하여 '내가 무상하다'라고 말하는 거기에 무상의 불교적 의미가 전개되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늙는 일과 죽는 일루대표되는 무상인 사실에 대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괴로워만 하지말고 무상인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거기에 오히려 슬픔이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석가모니는 가르치고 있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만 하지 말고, 그렇다고 그 사실에 눈을 감고 현실에서 도피해서도 안된다. 쓰라리더라도 사실을 응시하고 피하지 말며 무상인 사실을 내 몸에 받아들인다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상은 이런 것이다'라는 지식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무상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도 '나'나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음(非我)을 알고, 욕망을 억제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인생의 괴로움을 초월하는 수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아니 무상은 그 뜻 자체가 '수행하는 것이다.'무상을 자기 안에서 볼 수 있고, 그리고 무상 안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힌두교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을 슬퍼하지 말라''죽은 자는 다시 삶을 얻게된다'고 하였다. 힌두교의 사생관(死生觀)에는 윤회전생이 전제되어 있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은 죽었지만, 그 넋은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게 된다.비록 사는 곳은 다르다 하더라도 살아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같은 무상을 보는데, 다만, 번뇌의 화살을 없애라고 할 뿐이다. 윤회를 전제로 하지 않는데에 석가모니 가르침의 특징을 볼 수 잇다.
동시에 죽은 뒤에 세계에 대한 설명도 없고 기도하는 대상도 주지 않는데, 과연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석가모니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서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 또한 석가모니 가르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상을 산다.
'무상을 산다'는 말을 쉽게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들의 육체(色),느끼는 작용(受), image를 만드는 작용(想), 일정한 image가 정해지고 그로부터 의지나 충동적 욕구가 형성되게 하는 힘(行), 인식작용(議), 이 모두가 무상이라는 것이다 육체(色)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가지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인간은 육체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생각이다. 색, 수, 상, 행 식을 오온(五蘊)이라 하며, 이들은 우리 개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기본요소이다. 이들 색, 수, 상, 행, 식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탐욕으로 부티 벗어날 수 있고,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해탈(解脫)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무상을 사는 것이다.
또 오 온은 개인 존재 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로도 이해되고 있으며, 이 경우 색은 육체가 아니고 널리 '물질이나 '형태가 있는 것'을 가르치는 말로 된다. 어떻든 오 온은 다섯 가지 요소 하나하나가 무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존재 자체가 무상이 된다, 이렇게 '나'를 있는 그대로 무상이라보고, 그래야만 나 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탐내는 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라는 것에 대한집착을 버리라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다. 무상을 안다, 또는 본다고하는 것은 결국 무상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무상의 길을 알고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다.
아집을 억제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아집만을 끄집어내어 억제하는 것은 아니다. 번뇌(煩惱)가 작용하지 못하도록 자기를 조정하려면 그만한 결심과 불법(1羚法)에 대한 믿음과노력, 실천을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 작용시켜 나가야 한다. 무상을 본다는 것은 결국 무상을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을 산다는 것은 순간 순간 변하고 있는 지금을, 아니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다.
과거를 쫓지 말라, 미래를 기대하지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로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때마다 살펴보고, 흔들리지 말고 흐트러지지 말고 잘지켜보며, 그것을 고쳐나가라. 오늘 해야 할 일에만 최선을 다하라.죽음은 내일 올지도 모르는 것, 아무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가. ('중부경전'132경)
이렇게 해서 무상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객관적 사실을 나타내는 말임과동시에, 자기를 되돌아 보고 불법(佛法)안에서 살아가는 마음을 정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결국 '무상을살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으로서 이러한 무상관은 불교의 긴 역사를 통해서 변함이 없다.
불교는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는철학이며, 발상방법(發想方法)에서 과학과는 차이가 있으나 모순되지 않은 사고구조를 가진 종교이다. 철학에는 순수한 형이상(形而上)의 문제와 실증(實諪)이전의 자연과학적 문제가 포함되는데, 후자는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지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무상도 이제 철학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증된 과학적 사실로서 다루어야 할 때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참으로 과학시대의 종교이다.
교리강좌
■ 허망 분별
/ 정승석 (불교학부 교수)
우리의 일상어에서 분별력은 이성과 상통한다 그래서 이성이나 지각의 상실을 지적하여 보통 분별력을 잃었다고 비난한다. 이때의 분별력은 구분하여 판단하는 능력을의미하며,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독특한 정신 능력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분별력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능력이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 온 대부분의 교육은 분별력을 함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고, 이 결과로 우리에게는 지식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분별이 인간의 삶에 유익하다고 믿고 있는 것은, 그 분별이 진실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옳다는 전체가 암묵적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중시하는 분별이 그 같은 전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허위가 될 가능성이 있다, 분별의 내용이 옳지않다면, 그것은 거짓과 다를 바 없게 되고,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과연 분별의 내용이 항상 옳을 수 있을까? 혹은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옳다고는 인정하지만, 그 내용이 정말 자신은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반영한 것일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재고할 경우, 우리는 분별의 한계를 인정하지않을 수 없게 된다. 분별의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판단한 것도 역시 분별에 의한 것일진대, 이 분별의 근거가 또 진실임을 계속 입증해야 하는 선결 문제 해결의 난관에 부닥치고 마는 것이다. 이 난관을 간과한 상태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분별은 이미 선결 문제 미해결의 오류에 빠져 있는셈이다.
따라서 분별은 그 내용이 확실히 옳을 때 유익한 것일 뿐, 그 내용이 옳지 않은 분별은 우리의 삶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 왜곡한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옳은 분별은지혜이고, 옳지 않은 분별은 무명이다. 그런데 범부가 일으키는 거의 모든 분별은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에 빠져 있으므로, 항상 그릇된 내용을 형성하기 쉽다. 불교에서 분별을 무명의 소산이거나 무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경우, 그 분별은 범부 중생의 분별을 일컴는다.
진실이 보장되지 않은 분별은 허망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같은 분별은 망상으로 규정되며, 진실이 보장된 분별인 지혜와 구별하여 '허망분별' 이라고 불린다.중생을 무명의 존재로 파악하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는 분별은 거의 모두 허망 분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수긍하기 어렵다. 분별력을 지식의 수단으로 삼는 인습이 우리에게 너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무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불교 일반에서 분별은 지혜가 아닌 인식작용을 뜻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혹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식 작용에 대해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인식 작용이란 간략히 말하면,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제가 있는 것으로 아는 우리의 습관적인 사고를 가리킨다.그런데 분별과 망상을 대립 개념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은 “분별에 의한 지식이 어떻게 망상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낳는다. 이 의문을 풀기위한 선결문제는 바로 그 분별의 실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는 보통 분별의 실상을 간과한 채, 분별에 의한 지식은 망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에서 망상이라는 말은 망견(妄見),망심(妄毛,), 망집(妄執) 등으로도 표현되국분별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망 분별이라는 말은 분별이 망상임을 명시한다 망상이든 분별이든 이 둘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원래 '허망분별'이라는 말로 표시된다.
우리가 분별을 통해 어떤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분별은 이미 형성된 지식과 지금 대면하고 있는 대상을 비교하려는 인습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분별은 이미 형성된 고정 관념과 결부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단적인 예를 r유마경J에서는 지혜 제일의제지로 알려진 사리 불을 끌어들여 제시한다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 우마 거사를 문병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천녀(天女)가 나타나 꽃을 뿌렸다.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꽃을 떼어 내려 애쓰는 제자들 중 사리불에게 천녀는 '왜 그 꽃을 떨쳐버리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사리 불은 출가자가 꽃으로 몸을 치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답변으로 대꾸했다. 이에 대해 천녀는 다음과 같은 응답으로 사리불의 분별심을 추궁한다.
'꽃으로 몸을 치장했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 꽃은 아무런 분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스스로 분별하는 마음을 냈을 뿐입니다..., 당신께서는 아직 번뇌가 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꽃이 당신의 몰에 그대로 붙어 있는것입니다. 번뇌가 다 없어지면 그 꽃은 떨어질 것입니다.'
천녀가 말하는 요지는 사리불의 고정 관념 즉 인습이 분별을 낳고 그 분별로 인해 아직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리 불마저 분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못했다면, 우리가 분별에 빠져 있으면서 그 분별의 허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마치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한, 꿈 속에서 겪고 있는 경험의 허위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그릇된 상상이나 습관이라는 잠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는 섬광으로 눈을 뜨지 않는 한, 자신들의 지식이라는 경험이 지닌 환각적 성격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그릇된 상상이나 습관' 이 바로 분별이자 망상이다,
우리의 지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분별의 순환에 의해 형성된다. 먼저 간접적인 경험을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인 양심 층 의식에 내장하국 이것을 지식으로 삼아 대상을 분별한다. 이 분별에 의한 지식은 다른 분별의 자료가 됨으로써 결국 분별이 분별을 낳는 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경전의
세계
■ 밀린다왕문경
/ 이만 (불교문화대학 교수)
'밀린다의 물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빨리본밀린다판하(milindapan)가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이다. 한 역본으로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扇墮)으로 번역되었다. 한 역본은 서두에 언급되고 있는 두 사람의 전생이야기 중에서 나선비고가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나선비구경'이라고 한 것이고 빨리 본은 밀린다 왕이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밀린다판하'라고 한 것이다.한역본에서는 '경으로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경으로 분류될 수 없다. 따라서 발리 본에서는 'panha(물음)'라고 했고 스리랑카에서는 이를 빨리 삼장속에 포함시기지 않고 있다.
이 책은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서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인 국왕인 밀린다(Milida)와 유명한 불교 돈사인 나가세나(Nagasenaa) 장로가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마침내 왕이 출가하여아라한과를 성취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밀린다 왕은 불교를 제대로 알고있지 못한 그리스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경'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왕의 질문은 아 함경의 경설에 입각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질문의 내용도 불교의 경전과 교리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등의 몇 가지 이유에서 밀린다 왕은 상당한 불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경은 그리스 왕과 불교논사의 대론서로 알려져 있지만 '대론'이라고 할 수 없는 면이 많다. 경에서는 일방적으로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스님께 묻고 답하는 문답식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대론은서로의 주장을 전 개시키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논박하고, 상대방은 이를 반증하는 형식이'일반적이지만 이 경에서는 거의 그러한 면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대론서라기 보다는 일종의문답사라고 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이 경은 크게 나누어 다음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의 전생이야기를 기술하는 서화, 2. 두 사람이 3일간대화를 계속하는 것으로서, 서로 사제가 되는부분, 3. 밀린다 왕이 주로 불교 교리상의 난문을 제기하고 부처님의 말씀 중에서 모순되는 곳을 지적하여 그 설명과 해석을 나가세나 스님께 구하는 대화, 4.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비유로써 밝히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왕의 질문에 대하여 나가세나 스님은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명채하게 답하는데, 불교의 입장을 번잡하지 않은 사고나 설명으로 표현하여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왕의 질문은 영혼의 존재, 개체의 구성, 윤회의 주체 등 불교 교학에서 중요하고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다양한 문제에 걸쳐 있다. 이 중에서 무마설의 논증과 윤회설은 언뜻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한 것이 아니 가하는 의문을 적적한 비유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무마설에 대한 논의에서 왕은 논 사의이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에 돈사가 '나가세나'라고 불린다고 하면서, 그 이름에는 어떠한 인격적 실체가 없다고 답한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인격적인 실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스님들에게 공양을 베푸는 자도 그 공양을 받아 쓰는지도 있을 수 없괴 계행을 지키는지도 수행하는 자, 수행을 통해 열반을 얻는 자 등도 있을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과연 '나가세나'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나가세나는 인격적 실체를 육체적인 관점에서 찾기 위해 머리카락, 손톱, 이 등의 신지 각 부분이 나가세나 인가라고 묻는다, 존 자가 아니라고 답하자 이번에는 존재 전체를 분석하여 오 온 중의 어느하나가, 오 온을 합친 것이, 오 온 이외의 다른 것이 나가세나 인가라고 뭄는다. 논서는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가 세나가 아니라고 답한다. 더 이상의 나가세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자 이번에는 돈사가 왕에게 묻는다, 논서는 왕이 이곳까지 타고온 수레는 무엇이 수레탓1가하고 묻는다. 왕은 수레체, 굴대, 바퀴, 차체, 차틀 각각에 대해서 수레가 아니라고 답한다. 또 이것들을 합친 것 툭 이것 이외의 다른 것에서도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답한다. 다시 한번 논서는 왕에게 수레가 무엇인가를 묻자, 왕은 '이 모든 것이 어울려 수레라는 명칭, 호칭,가명이 생간다''고 답하자, 이에 만족한 논사도나가세나라도 신체의 각 부분과 오 온의 각 부분이 어울려 이루어진 것이지, 실제로는 거기에 인격적 실체는 없다라고 무아의 문제에 결론을내린다.
무아설과 함께 경에서는 윤회의 문제도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윤회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논서는 '한 존재가 이 땅에 태어나 여기에서 죽국 여기에ㅅ) 죽어 다른 곳에 태어나 다시 그 곳에서 죽는 것' 이것이 윤회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망고를 먹고고 씨를 심으면 다시 망고가 나와 자라게 된다.그 망고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그 망고를 먹고 다시 심으면 망고나무가 생피 자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왕은 인격적 실체인 기술만을 염두에 두고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대어 날 때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존재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논서는 비유를 들어, 한 사람이 한 등불에서 다른 등불에 불을 붙인다고 가정할 때, 이 등불이 다른 등불로 옮겨 간 것이 아닌 것처럼 윤희 하는 주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다. 경에서는 열반을 성취하는 직접적인 방편으로 지혜와 五善을 제시하고있다. 경에서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사랑과 욕망을 끊추 모든 악과 애착을 끊는다고 한다, 또 보다 구체적으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괴로움과생과 사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므로 자해를 선의 첫째라고 한다. 오선도 결국은 지혜를 성취하는 방편이다. 1) 誠信(saddha)은 삼보와 아라한의 존재, 삼세의 존재,선행과 악행의 과부 등을 굳게 믿는 것이다. 2)孝順(aila)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이다. 계율은 모든 善의 근본이 된다고 한다. 3)精進(viriya)은 善을 굳게 유지시키고 善을 돕는 것으로 정의한다, 4)念善(sati)은 마음으로 모든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5)일심(sama야)은 三昧 또는 定으로 번역되는 것으로서, 경에서는 일심을 모든 신법 가운데 첫째라고 하여 만약 일심이 된다면 다른 모든 신법이 그것을 따른다고한다.
밀린다왕문경은 불교 교리상의 여러 문제를번쇄한 아비달마적인 입장에서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좌부위 전통에서 해답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설명과 풍부한 비유가 돋보이는 몇 안 되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국과
불교
■ 승격당시 교과과정과 권총장의 퇴임
/ 이봉춘 (불교문화대학 교수)
해방 이후 38선의 설정이라는 인위적인 민족 분열은 우리 민족의 사상분열을 조장하였고, 이어 북한의 남침이 빚어낸 동족상잔의 비극은 우리 민족의 최대비극이 되었다. 따라서 사상의 분열과 6.25로 인한 인명피해는 유괴 문화계 전반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거니와, 대학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6.巴동란으로 입은 인명 피해의 영향은 우리 대학의 교과과정 편성과 학생교육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무엇보다도 동란을 겪는 중에 피랍되거나 자진 월북자가 발생하였고, 오봉순교수(사학과 주임 .서양사)가 병으로 타계하기도 하였다. 참고로피랍. 월북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허윤교수(언어학 . 불교학) 초대학장
김효경교수(불교학)
●피랍자
김기림교수(문화개론 . 시학)
박윤진교수(심리학 . 논리학)
이재욱교수(한국사,서지학) 국립도서관장 겸임
이부열 교수 대학사무장 점 전문부 사학 강사
야외득교수 대학 서무
박봉석강사(전문부 국사)동문 국립도서관 부관장
유응호강사(국어국문학)
백석기강사(전문부 국사)동문 서울특별시 학무국장
고암선강사(전문부 미학), 월북자
이명원교수(동양사), 전석염교수(경제학)
백남운강사(전문부 경제사), 김용준강사(미술사)
김해진강사(범어학), 곽서순강사(전문부 국사)정지용강사(문학)
이상과 같이 적지 않은 인원이 피랍되고 또는 자진 월북함에 따라, 교과과정 편성 과히 과정의 적임 교수를 초빙하는데 큰 난관과 진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특히 허윤학장이 사임할 때 거취를 함께 하였던 양주동.최호진. 이하윤,채의순교수 등을 비롯한 소위 21인 교수단은 시기상 처음부터 교섭대상이 되지 않아, 대학 당국으로서는 그 인선의 난관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 일은 매듭이 지어졌다 신태환. 김성환. 서돈각. 김기두, 조자호,오석규. 이정환 . 고승제 등 교수와, 신설의 농림대학에는 이승우. 이덕봉교수가 새로 임명되었고, 이숭녕 . 민병태.김성효1 . 김형규.김장수.차상원 , 김학엽 등여리 외래강사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새로운 교과과정의 편성을 마치고 이에 따른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설된 대학원은 그 운영의 신중을기하여, 첫해인 1953년도의 석사과정 신입생을 엄격히 선발하였다. 그 결과 불교학과에안계현, 영문학과에 이호성 2인만이 합격하고, 정치학과는 해당자가 없어 합격자를 보류한 채 그해 4월 1일에 개강을 보게 되었다 우리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개강한 대학원의 교과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학과(제1학기)
① 대각국사사상연구 조명기(2시간)
② 한국불교사상사 조명기(2시간)
③ 한국불교고고학 이홍직(2시간)
④ 화엄학 개설 김임석(2시간)
영문학과(제1학기 )
① 영문학사 최봉수(2시간)
② 미국문학사 최봉수炙2시간)
③ 비국문학연구 최봉쉰2시간)
④ 20세기미국소설 최봉수<2시간)
불교학과(제2학기 )
① 하엄오교장 김인석(2시간)
② 한국불교서지학 조명기(2시간)
③ 한국불교사상사 조명기(2시간)
④한국볼교고고학 이홍직(2시간)
영문학과(제2학기 )
① 사옹(沙翁)극 최정수(2시간)
② 미국소설사 최봉수(2시간)
③ 영국소설발달사 최봉수(2시간)
④ 시사영어 최봉수(2시간)
한편 종합대학 승격 후 여러 가지 사무가 크게 변하고 그 업무 또한 급증하여 과(課)를 처(處)로 승격시켜도 완전히 해소되지않았다. 그러나 피난 지에서의 개강이었던 까닭에 사무실 및 예산의 부족으로, 서울에서 낙오하였던 전직원 2 . 3명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종합대학교의 승격과는 달리 실제 면에 있어서 이에 따르는 실무체제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무량의 격증과 함께 당시 74세였던 권장로 총장의 노환이 겹쳐 사무처리는 큰 지장을 받고 있었다. 확장 초기 학내 사무처리의 지체는 곧 대학 발전의 장래를 우려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권총장은, 그 스스로 쾌연히 용퇴할 것을 표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재단측으로 본다면 교계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대학의 승격을 위해 노심 진력한 권총장이 노쇠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결의한 자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의 상 어려운 점이 없지 않았다.
대학측과 재단측에서 이 문제를 놓고 숙의를 거듭하였으나 어떤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l953년 5월 [교육공무원법]이 공포되었고, 권총장 자퇴문제는 이 새로운 법에 준하여 해결되었다. 동 법령 제52조에는 '교육공무원은 65세를 그 정년으로한다'는 만 65세의 교수 연령 제한이 명기되어 있다. 우리 대학은 사립대학이기 때문에 이 법령의 조문에 구애받을 어떤 이유도 없다는 일부의 강력한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 법령 부칙에 '사립학교의 교원도 이에 준한다'는 것이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령의 권총장에게 힘든 세속의 업무를 맡겨 더 이상의 심려를 끼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학교와 재단측의 수차에 걸친 논의 끝에 1953년 7월 25일 재단법인 동국학원 이사회는 권총장의 사의를 만류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이로써 권상로총장은 취임기간 불과 6개여월만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기간 중에 권총장이 남긴업적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에 따른 우리 대학의 대.내외적인 인상에 권총장의 학덕과 인품은 큰 몴을 하였고, 더구나 불교 종립대학으로서의 이미지 제고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실무에 있어서도 승격에 이은 기구 확장 및 각 단과대학의 교과조정, 1952년 2월부터 실시된 학도 군사훈련 실시에 따른 대학차원의 준비와 실시 등 크고 작은 업적을 남기고 스스로 융퇴하신 것이다.
불자탐방
■ 이순용 전 교수회장
/ 편집부
무더운 여름도 말복을 지나면서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 캠퍼스도 개학을 앞두고 수강신청을 하는 학생들로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고 있고, 방학을 맞아 시작되었던 학교 곳곳에 공사도 마무리되어 새 단장을 하였다.이제 얼마 있으면 수확의 계절을 맞아 들녘은 풍성함으로 가득 찰 것이다. 정각도량에서는 이제까지 대학발전과 학문적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정년퇴임을 맞이하는 교수회 회장을 만나보았다.
'학교에는 평교수 협의회와 교수회의 두 가지 교수 모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회는 어떤 조직으로 되어 있으며, 어떠한 활동을 하는 모임임 니까r'
'교수회는 모든 교수들이 의무적으로 가입이 되어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기구입니다. 특정한 권한은 없으며 학교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의 향토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학발전에 대한 조언과 협조 그리고 교권수호 및 교수 복지개선을 위하여 일을 합니다.'''회장님은 불자 교수회에도 열심히 참석하여 활동하고 계신데 언제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었으며, 자주 가시는 사찰이 있습니까?''
'절에 처음 가본 것이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49쩨 때입니다.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절에서도 잠시 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다니는 절은 아내가 능인선원에 다니면서 교리공부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평소죠 용한 정각원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하거나 시간을 내어 조용한 산사를 찾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사찰에서 잠시 생활하였다고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여러 곳의 절에서 생활해 보았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도봉산 망월사 칠성각에서 6개월 정도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곳 주지스님께서 속인도 절에서 생활하면 예불에 참석하라고 하여 예불을 하면서 신심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산할 때 스님께서 부처님을 한 분주 시면서 잘 모시라고 하셨는데,집에서 부처님은 사가에서 모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다시 절에 가져갔으나, 주지 스님이 출타하여 상좌 스님에게 맡겨놓고 내려온 기억이 아직도생생 합니 다.''
옛날 어른들은 부처님을 사가에 모시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사가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조석으로 참배하는 것을 많이 권장하고 있다. 교수회의 사무실은 정각원 앞에 있어서 회장님을 자주 만나지만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지니고 계신다.잔잔하면서 포근한 그 미소속에서 평소의 생활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회장님을, 대화 속에서도 그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꿈속에서 교정이 보여서 대학을 지키라는 사명감으로 알고 대학을 안정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교수님의 말씀에서 마음속에 지니고 계시는 학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있었다.
'불교를 믿으시면서 주로 독송하는 경전이나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수행 방식이있으십 니까?''
'경전은 금강경을 좋아하고 항상 독송을 합니다. 혜화동 가산문화원에서 지관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선을 좋아하여 정각원 법당이나 조용한 산사를 찾으면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참선을 권장하여 마음을 다스리게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절에 다니시다 보면 많은 스님들과 인연을 맺게 되기도 하는데 특별히 친분이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특별히 친분이 있는 스님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 종정이셨던 서옹스님을 친견한 적이 있는데 스님께서 아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습니다.그 때 말을 잘못 전달하여 스님께서 아주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스님에게 커다란 실수를 하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농대에 머무시면서 학교나 불교계에 바라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동대는 불교 종립대학입니다. 현재 교육개혁 이후 농대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변모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상징적인 특징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계 속의 한국이란 가장 한국적인 것을 지녀야 된다고 생각할 때 세계 속의 대학으로 진일보하기 위해서는종립대학으로서의 위상이 강화되고 불교의 교육적 지표를 높여 나가야 할 것으로생각합니다. 종단적으로도 중립대학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가져서 적극적이고 과감한 지원을 통하여 불교 교육에 중요성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 입니 다.''
스님들의 옷은 너무 무거워 보인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식이 평상과 의식 복으로 바뀌었으면 세속사람들이 스님들을 접하기가 쉽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웃으신다. 불교가 좀더 현대 생활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하시면서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셨다.
특별한 무엇을 바라지 않고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 교수회장님과의 대화 속에서 일상 생활 속에서 잊혀 지기 쉬운 불자들의 검소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가을의 풍성함을 이웃에 나누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으면 한다.
전등이야기
■ 그림자는 형상에 의지한다
/ 이법산 (서울캠퍼스 정각원장)
씨앗은 열매와 같고 열매는 곧 씨앗이 된다. 원인은 결과를 낳고 결과는 다시 원인으로 작용한다.그렇다면 씨앗과 열매와의 관계는 서로 인(潟)이 되고 과(果)가 된다. 세상만사가 인연-을 벗어난 이치는 있을 수 없다.
부모와 자식의 관례도 자식이 부모 되고 부모는 자식을 낳고 하여 종족의 생명이 이어지며 스승과 제자의 계승도 마찬가지이다.
달마대사에게 법동을 이어받은 혜가(慧可)대사는 선종정맥을 3조 승찬(僧璨)대사에게 부처님의 심인(,已了n)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가차로서 향거사(向居士)도 혀가 대사의 법등(法燈)을 인가 받았다.
「경덕전등록」 제3권 향거사조에 보면 향 거사는 서신으로 법을 물었다.
'그림자는 형상에 의하여 일어나고, 메아리는 소리에 따라 일어나는데 그림자를 버리고 형상을 쫓는 것은 형상이 그림자의 근본임을 모르기 때문이요, 소리를 내면서 메아리를 없애려 함은 소리가 메아리의 뿌리임을 모르기 때문이니, 번뇌를 제하고 열반에 나아가려는 것은 형상을 버리고 그림자를 찾는 것과 같고, 중생을 떠나서 불과(佛果, 깨달음)을 구하려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메아리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혹함과 깨달음이 한 갈래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다르지 않습니다.이름이 없는데 이름을 지으면 시비가 생기고, 이치가 없는데 이치를 지으면 이치에 의하여 논쟁이 일어납니다. 허황하고 참되지 않거늘 이치를 지으면 이치에 의하여 논쟁이 일어납니다. 허황하고 참되지 않거늘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허망하여 진실이 없거늘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으리요. 얻은 바가 없고 잃어도 잃은 바가 없음을 알고자 하지만 나아가 뵈올 겨를이 없으므로 애오라지 이 글월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해답하여 주소서.'
이에 2조 혜가대사는 자세히 살펴보고 인가(印可)의 해답을 얻었다.
'참되고 그윽한 이치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본래는 마니주(摩尼珠)를 잘못 알고들 자갈이라 하였으나, 활연히 깨치고 보니 진주임이 틀림없다. 무명과 지혜가 차별 없이 같으니 만법이 모두가 그러한 줄 알아라. ....'' 몸과 부처가 다르지 않음을 관찰하면 남음 없는 열반을 찾아서 무엇하랴.'
불법(佛法)에 출가 재가가 따로 없음도 이 이치와 같으니 다만 부지런히 정진하면 법동은 누구에게나 밝혀질 것이다.
비유와
설화
■ 죽음을 부르는 탐욕심
/ 조용길 (불교학부 교수)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여러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 세리 바 지방에 세리 바라는 상인이 있었다. 그는 탐욕심이 많은 친구 한 사람과 함께 테라 바흐라 강을 건너 안다푸라 시(市)로 들어갔다. 상품을 사고 팔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각기 홑어져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 시에는 한때 갑부로 이름을 떨치다가 죽은 이가 있었다. 그의 협족이라고는 딸과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지금은 남의 집 고용살이로 겨우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집에는 옛날부터 간직해온 황금 그릇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그릇들과 함께 버려진 채 먼지 속에 묻혀 있어서 딸이나 노모는 그것이 황금 그릇인 줄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탐욕심 많은 세리바의 친구가구 집 앞을 지나며 외쳐댔다. '-보석 사시오.보석 사시오.' 이 소리를 들은 딸이 할머니에게 달려와 말했다. “할머니, 장식품 하나만 사주세요.” 밥도 겨우먹는 판에 무엇으로 장식품을 산다는 말이냐?' 그러자 딸은 미리 생각이라도 해놓은 듯이 말했다. '다락에 먼지 쌓인 그릇이 있는데 그것을 팔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두말 않고 상인을 불러들이고 나서 황금 그릇을 꺼내 놓고 말했다 '이 그릇을 장식품과 바꿉시다.' 상인은 그릇을 한참 만져보다가 바늘로 그릇 밑을 살짝 긁어 보았다, 상인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틀림없는 황금 그릇이었다. 순간 상인은 자신의 물건은 하나도 주지 않고 이 그릇을 공짜로 빼앗으려고 생각을 하였다.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이 그릇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반푼어치의 가치도 없습니다.'그는 그릇을 땅에 던지다시피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얼마 후 다른 상인이 '보석을 사라'고 외치며 그 집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처녀는 다시 할머니에게 장식품을 하나 사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할머니는 짜증 섞인 말을 했다. '아까 그 상인도 땅에 던져 버리고 갔는데, 무엇으로 사달라는 거냐?' '할머니,조금 전의 그 상인은 언행이 난폭했지만 이 사람은 말씨도 상냥하고 매우 온화하게 생겼습니다, 혹 바꿔줄지 누가 압니까?' '그렇다면불러 보려므나- 상인이 마루에 걸 터 앉자 그 그릇울보여 주었다, 세리 바 상인은 그 그릇을 보자 금방 황금 그릇인 줄을 알고 말했다. '이 그릇은 십만 금의 가치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값어치의 물건이 없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말했다, '조금 전에 어떤 상인은 반푼어치의 가치도 없다면서 땅에 던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십만 금의 가치가 된다고 하니 이는 당신의 공덕에 의해 황금 그릇으로 변한 것일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신에게 드릴 것이니 아무 장식품이나 하나 주고 가져 가십시오.'그러자 상인은 천금어치의가치가 있는 물품을 그 할머니에게 주면서 말했다. '나에게 황금 그릇은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저울 하나와 부대와 여덟 냥의 금만 주십시오.' 상인은 그 길로 나루터로 가서 여덟 냥의 금을 사공에게 주고 배를 탔다, 상인이 떠난 얼마 후, 탐욕심이 많은 상인은 다시 그 집에 나타나서 할머니 에게 말을건냈다. '조금 전의 그 그릇을 주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물건을 드리겠습니다.'할머니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나무라듯 말했다.'당신은 십만 금의 가치가 있는 황금 그릇을 반푼어치의 가치도 없다고 했소. 당신의 일행처럼 보이는 한 상인이 천금을 주고 그것을 가져갔소.' 세리바의 친구 상인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실신한 사람처럼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지고 온 상품을 문밖으로 팽개치더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옷도 벗어 버리고는 그 상인의 뒤를 쫓아갔다. 그가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 상인은 이미 나루터를 등지고 있었다. 어이 뱃사공, 배를 돌려라. 같이 가야 한다.' 세리바의 친구 상인은 미친 듯이 외쳐줬지만 그 상인은 배를 돌리지 못하게 하였다. 탐욕심이 가득 찬 상인은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볼수록 분통이 치밀어 올라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마침내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심장이 가물 때의 논바닥처럼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어진 상인에게 원한을 품은 채 이내 숨지고 말았다.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한 다음 다시 비고들에게 말했다. '그때의 탐욕스런 상인은 지금의 제바달다이고, 어진 상인은 바로 나였느니라.'빈곤한 사람은 필요한 것만을 원하지만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것에 눈이 어두워진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려 하는 사람은 단지 물고기를 얻지 못할 뿐 후환은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히 하려는 방법으로 당신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죽도록 애쓴 뒤에 반드시 화가 따를 것이다,
불심의
창
■ 문수회 성지순례담
/ 이강석 (경주도서관 수서서무계장)
동국문수회 96하계 성지순례일정이 시작되었다. 상구보리(上求普理), 하화중생 (下化衆生)의 마음이다. 때는 5월 3.4일양일간, 전북일원 내장산, 내장사, 대둔산 안심사, 모악산 금산사 성지를 순례한다. 문수 회 13번째 성지 찾기다.
와! 냉방차! 고행이든가 순례이든가 지난 해 일정이 생각난다. 37명의 법무 모두 좋아한다.경주 IC를 뒤로한 달리는 법당에는 불교음악이 흐르고 회장님 인사와 순례일정안내가 있었다. 우리들의 안내자 유인 수 사무국장은 고향땅 순례라며 웃어보인다. 늘 그랬듯이 정성껏 만든 백설기를 나누어 먹는다. 동대구 IC 부근에서 일행을 40분가량 기다린(출발지연) 박장승법우를 박수로 맞고 88올림픽고속도로를 달린 일행은 지리산휴게소에서 숨을 돌린다.
차안에서 어떤 어린이 법우에게 물었다 '예야, 저 들판에 푸른 것(벼)이 뭐꼬'' '잔디!' '왠 난해한 법문인가?
순창 IC를 벗어나 국도를 따라 내장사를 향하고 있다. 안내자가 좋았든가? 선정에 들었든가? 고향 가는 길이 혼미롭다. 대형버스가 비포장 길, 공사 길을 헤매기를 30분, 그래도 회귀(回歸)하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다가올 점심공양의 효용은 더욱 높아질 터이고...
정읍사 용산동 추령(秋嶺,380M)을 넘어 내장사 입구에도 착하니 오후 2시가 가깝다. 소요시간 약 4시간, k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하고 내장사를 참배하였다.
내장사(內藏寺) - (이명) 한때 영은사(靈隱寺), 비련사(臂蓮寺)라고 불렸다. (위치)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50번지 내장산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연혁)636년(백제 부왕 37) 조사 영은(靈隱)이 창건하여 영은 사라고 했다. 1557년(명종 12) 희묵(希黙)은 양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하였다. 문화재로는 동종(絅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과오층석탑 1기, 부도 등이 있다.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을 맞이하기 전에 있는 당무가 oo樓인데 해독이 되지 않아 문헌을 찾아보니 정혜루(定慧樓)란다.내장산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어린이 법무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어른 법무들이 더 소란스럽다. 장군봉과 서래봉을 앞뒤에 두고 기념촬영도 바쁘다. 내장산! 가을 단풍으로 잘 알려진 익숙한 산이 아니던가? 지금은 녹음이 무성하다. 그 녹음 속에 단풍과 가을이 숨어 있는가?다음 일정이 시작된다. 정읍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를 질주,삼례Lc를 벗어나 왼쪽방향으로 국도를 한참이나 달렸다 맞은편 산정상에 자연이 빚은 부처님의 열반 상이 뚜렷이 보이는 대둔산 자락에 자리잡은 안심시에 도착했다. 내장사에서는 매우 먼 길이었다.
안심사(安,已,寺) - (위치)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26번지 대둔산(大屯山)에 있다(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연혁)638년(신라 선덕여왕 7)자장(慈藏)이 창건했다고 한다.(유적,유물) 현존하는 건물로는 소규모의 인법당(茵法堂)만이남아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터의 초석과 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1⑤호), 석조(蓀槽), 사적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h0호)등이 있다.
주지(명오)스님께서 따뜻이 맞아 주시고 방사정리에도 손수 안내를 해 주시며 어린이 법무
를 위해 VTR를 설치하시고는 빌려준 테이프를 되돌려 받으러 어디 횬가 차를 몰고 나가신다.법당을 참배하고 저녁 공양후,주지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스님께서는 '원을 세우고 끊임없이 정진하고 기도하면 그 원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아상을버리고 빈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나감으로써 이 땅에 불자촌을완성하는 것이 당신의 원''이라하셨다 여러 가지 말씀 속에 깊은 감동이 전해온다, 마침 안심시에서는 영가 천도를 위한 천일기도 중이었다. 주지스님께서자시(곳時끼도를 제안하셨다.약간의 휴식을 가진 후, 자시 기도를 위해 법당에 들어섰다.왠 어린 법무들이 참배를, 아니108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린이는 주의를 주어도 오래가지 않는 법, 요사채(반지하)지붕에서 떠들고, 소란을 피운 죄에 벌(?)이라 아침 공양도 받지 못할 뻔했다.
자시 기도도 주지스님께서 직접 주관해 주셨다, 6.25 당시의 격전지인 이곳의 많은 무주 영가들과 우주 영가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셨다.
1배 또 1배...
지장보살지장보살. 지장보실지 장보살. 지장보살지장보살...
내 아버님, 할아버지, 할머니,여러 조상님들.
내 친척, 그 중에 4.3년전에사고로 불귀의 몸이 된 젊고, 어린 종제, 재종제
내 고향에, 내 직장에
내가 아는 모든 영가의 천도를 자극으로 기도했다.
방석은 땀으로 젖고, 무릎은아파온다, 다 못 떠올린 영가들1숨은 아직 고르지 못하다.
'내'字를 없애자!
병으루 산업재해로, 사고로, 천재지변으로 망자가 된 모든 영가들의 천도를 시심으로 기도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미래의 부처님이신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이른바 무 불시대인 오탁악세에서 번뇌와 죄업으로 고통받는 육도 중생들을 제도하는 일을 부처님으로부터 부축받은 보살로서 육 도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서야 자신의 불도를 이루리라 하고 부처님 앞에 대원을 세운 보살이 아니던가?
子時를 다 보내고도 요사채의 여름밤은 무더웠다 다시 새벽예불이 시작되고 잠을 설쳤다.이튿날 일정이 시작된다. 금산사 행이다. 익산乃c에서 금산사I,C까지 호남고속도로를 달렸다.
금산사(金山寺)
[위치]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 모악산(母岳山)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연혁]600년(백제 무왕 1) 창건했다 근래에 월주(月珠) 큰 스님께서 주지로 취임하여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 보제루,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승당, 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셨다. 또한 문화재로는 미륵전(국보 제62호)과 노주(보물 제22호), 석련대(보물 제23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膳塔碑:보물 제24호), 오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당간지주(보물제28호) 등이 있다.
일정에 있던 주지스님 법문은 여의치 않았고, 3층 미륵전본존(1l.82m)의 위용이 우리를 경탄케 한다, 경내 순례를 마친 후 점심공양을 끝으로 성지순례의 막은 내린다. 어설픈 졸고도끝이다.
참회하고 또 참회한다. 공부하리라. 정진하리라, 원을 세워본다. 또 참회할지라도...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項質供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불교
건강법
■ 어떤 운동이 좋을까요?
/ 김장현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어떤 운동을 하면 좋겠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평소에 운동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상 운동을 하려니 시간도 일부러 낸다는 것도 그렇고, 막상 어떤 운동을 하면 좋을지 막막하다는 것이다.
사실 마음먹기가 중요하지 할 수 있는 운동의 종류가 문제이겠는가만 예를 들어보면 가장 손쉬운 간단한 체조, 조깅, 자전거 타기 등에서부터 배드민턴, 수영, 테니스, 스쿼시, 볼링, 돈이 좀 드는 골프까지 또 운동이라고는 하기가 좀 뭐하지만 단전호흠, 기공, 스트레칭 등등 다양하다. 부지런하면 헬스클럽도 이용할 수 있겠다.
그러니 운동도 나이에 따라 적당한 운동이 있겠고 운동마다 특성도 있다. 대개 운동이란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쩌다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지겨워지거나 싫증이 나면 슬며시 꾀가 나서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운동 가운데서도 싫증이 나지 않는 운동을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운동이 조깅이다. 조깅의 주자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혼ㅎ1 조깅을 아침에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꼭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할 필요는 없다. 젊은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도되겠지만 사실 심장 질환이나 고혈압 등이 있는 사람들은 해뜨기 전 음기가 성한 시간에 운동을 하는 것은 무리가 갈 때가 많다. 실제로 건강해지려는 욕심으로 이른 六잴벽 찬 공기에 운동을 하다가 심장마비 같은 변을 당하는 분들도 드물지 않게 있다.
조깅의 좋은 점은 첫째 돈이 안들고, 둘째 심장을 튼튼히 해주고, 셋째로 기분을 좋게 해준다. 달리면서 주변의 환경이 바뀌는 운동은 지겹지 않기 때문에 정신 건강에도 매우 좋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자전거를 타는 운동도 좋다. 역시 변하는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천히 하는 운동은 별로 몸에 무리도 따르지 않고 지구력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관절에 이상이 있는 분들은 조깅보다는 수영을 권하고 싶다. 수영은 물에 떠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고 심폐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는 좋은 운동이다. 안이 비인 후질 환이나 피부질환이 있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수영이 나쁜 점은 없다. 특히 수영 후에 뜨끈한 물 속에서 몸의 긴장을 한껏 풀어 보는 것도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그만이다.
젊은 사람들은 순발력을 키우는 테니스, 스쿼시 같은 운동을 위주로 하고 40대 이후에는 순발력보다는 지구력을 키우는 운동이 적당하다. 여러 사정으로 운동이 어려우신 분들은 스트레칭, 단전호흡,기공 같은 유산소운동이 좋다.
더운 계절도 끝나 가는 요즘, 적당한 운동을 선택하여 체력을 키우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이는 하나의 방편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