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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6월호 / 통권 24호 / 불기
2540(1996)년 6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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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봉축법어 慈悲公德의 실천으로
佛國土 이루기를 / 녹원 큰스님
친애하는
東國가족 여러분!
그리고
부처님을 예결하는 四部大衆 여러분.오늘은
찬연한 진리의 빛으로 온누리의 無明을
밝히신, 그리고 온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처럼 인연의 법칙에 따라오신
것이 아니라 生老病死 四苦로 혹은 그
밖의 생활고나 끝없는 욕망으로 고통받는
중셩을제도하여 고통이 없는 열반의 언덕으로
모든 중생을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은 무애자재한 해탈의 경지에서
正覺한 분이기에 그 거룩한 眞如의 모습으로
온 누리 생명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부처님의
위대함을 일러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은
분이 없고 (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에
부처님과 견줄 분이 없다. (十方世界亦灰比)라고
칭송한 法門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함에 있어 '허공 가운데 가득
찬 티끌을 다 헤아리고 사해의 바닷물을
다 마시고, 허공을 지나는 바람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재주가 있어도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은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야 말로 하늘 가운데 하늘이요(天中天)
성인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성인(聖中聖)이시라고
그 위대하고 거룩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생 온 흔히 한시적인 육신에 집착해서
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에게만봉사하고
육신에 끄달리며 모양에 팔려 사는 육체적인
생명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러한 삶은 인연 법에 따라 어떤 상황이
변해서 나타나는 잠정적이고 가시적인
유한한 삶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생명관과는 대조적으로 상황에 따라 결코
변하지 않는,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존재로
아는 自性과 自覺을 바탕으로 한 삶은
정신적 생명관이라 합니다.
이는
육체와 시간 그리고 환상과 관념에 얽매인
중생 심을 벗어나 우주 자연의 질서와
일체가 되어 생명의 실체를 바로 보는
佛'性에 바탕을 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정신적 생명관으로서
일체중생이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아니며(가깆生平滅)
더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不增不減),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동국가족 여러분은
먼저 위에서 언급한 육체적 생명관을 버리고
자신이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자성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첵를 체득할 것을 당부드립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身, 口, 意, 三梟을 깨끗하게,
바르게, 그리고 착하게 실천함으로써 가능할
것입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여 살생, 투도, 음심에서 벗어나고
말을 조심하여 거짓, 이간질, 아첨, 욕설
등에서 벗어나며 뜻을 정하게 하여 탐.
진. 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하게 안 사려야 안 살 수 없고, 그
이치는 마치 온누리에 봄이 오면 아름다운
꽃이 다투어 피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오늘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가치의 혼란과 인간상실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국의 이익만을 노리고있는
선진국들의 보호무역주의는 경제전쟁이라고
할 만큼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인류는 물질적 풍요를 얻은
대신에 정신적 타락과 방황을 겪고 있으며
집단이기주의의 팽배는 국가 간은 물론
사회와 개인의 불신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미와 격동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위기와
모순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600년동안
우리 민족의 전통적 종교로서 사상과 문화의
바탕이 된 불교는 이 땅에 위대한 불교문화와
예술을 창조하였고, 우리 민족의 생활과
가치관을 지배해 온 정신적 토양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불교정신의 근본은 자비와 지혜입니다.
자비와 지혜의 구체적인 실천은 보시와
공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교인은 무엇보다 '남을
잘 살도록 도와주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복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복의
씨앗을 뿌릴 줄 아는 '보시 공덕'이 곧慈悲요,
이 자비의 실천으로 佛國淨土를 이룩하고
참다운 불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국가족
여러분!
다시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의 큰 뜻이 동국인
여러분의 가슴에 환희 심으로 넘치기를
기대하면서, 여러분의 가정은 물론 온누리에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 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 가모니불!
불기
2540년 부처님 오신 날 아침
부처님
오신날 봉축사 동국 중흥의 초석이
되길 / 송석구(동국대학교 총장)
불기
2540년 4월 초8일. 올해도 어김없이 지혜와
자비의 빛으로 부처님은 오셨습니다. 암흑의
땅에는 광명을 놓으시고, 고통받는 중생에게는
감루의 단비를 뿌리고자 부처님은 오신
것입니다.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이고 마음과 불 보살님과
중생이 하나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인간
석가모니이신 부처님이 6년 간의 고행
끝에 정각을 하심으로서 본래 면목의 진리자리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이 자리는 언어와
사고를 훨씬 뛰어 넘어 있습니다. 그 본체
자리는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시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것입니다. 이른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여 '無始無綠'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한 이를
꿰뚫고 있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이를
증 득하셨기에 覺者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누구나 평등하게 이 자리를
증 득할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샛별을 보시고 견 성하신 순간
이미 진리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진리이면서
인간 석가모니부처님이시고,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이면서 진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 보살님께 귀의하고 여경하고 기도 참회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 간절한 願이 제 불
보살님의 가슴에 닿을 때, 우리와 삼세
제 불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시방 삼세
제 불 보살님 속에 우리가 녹아 들어 있고,
우리 속에 시방 제 불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서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근원적으로 평등하여 화합하고
협력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부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이
불교 속에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동국
가족 여러분! 머지않아 우리는 대망의
21세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국내외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하였습니다.
밝고 희망찬 도약의 내일을 가꾸느냐 아니면
실의의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중대한
순간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 동국인 모두는 동국중흥의
첨병으로서 선도적 역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동국발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입시다.
오늘
이 기쁨이 일시적인 축제로 끝나서는 안되리라고
봅니다. 생명이 참다운 가치를 누리는
일,그리고 그 확신에 찬 발걸음을 현실
속에 옮겨 놓는 것이 부처님 오신 뜻을
구현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큰스님, 내빈 여러분
그리고 교직원 및 학생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크신 자비원력으로 항상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불기
2540년 부처님 오신 날 아침
전등이야기 혜가의
斷臂求法 / 정성본(불교문화대학
교수)
보리달마는
중국 선종의 初祖임과 동시에 印度에서
부처님의 正法眼藏을 이어받은 28대 조사이다.
사실 달마의 존재가 중국 선종에서 너무나도
위대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선종의 初祖이기 때문인 것
만은 아니다. '
그는
印度에서 맥맥히 전래하고 있는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중국 땅으로 전한 좋導法 祖師인
역사적인 사명을 이룩한 인물이기에 더욱
존중되고 있는 것이다.
보리달마가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전하기 위해 멀리
배를 타고 중국(梁나라)에 건너와 처음으로
梁의 武帝와 만나서 나눈 이야기와 佛法天子인
梁武苗의 위대한 佛事의 업적을 한마디로
「撫功德」이라고 일축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달마는
양 무제와 뜻이 계합되지 않아 곧바로
양짜강을 건너 嵩山 少林寺에서 면벽 9년을
하고 있을 때 당시 神光이란 젊은 수도승이
찾아와 달마에게 佛法을 구하는 모습을
r조당집』 제2권 「달마전J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달마조사께서
少林寺에 이른 뒤에 神光이란 스님이 찾아
왔다. 그는 전에 洛陽에서 오랫동안 노자와
장자를 익히다가 나이 40살이 넘어서 조사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산광은
주사께 항상 佛法을 물었으나 조시께선
전혀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
탄식하면서 말했다.
'옛
사람은 法을 구하기 위해 뼈를 깎고 골수를
꺼내고 피를 뽑아 聖像을 그리며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서 진흙에 펴고, 벼랑에 몸을
던져 주린 범에게 육신을 공양하기도 했다.
옛 사람은 이렇게까지 求法의 苦行을 했는데
난들 법을 구하는 사문으로 무엇을 아끼랴!'
그리고
神光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太和 l0년(486)
12월 9일 눈오는 밤에 선 채로 하루 밤을
보냈다. 이튿날 달마조사께서 산광의 求法
의지를 보시고 물었다.
'자네가
눈 속에 서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이에
산광은 눈물을 올리고 슬피 울면서 말했다.
'바라옵건데
화상께서는 감루의 법문을 열어 뭇 중생을
널리 건져 주십시오.'
달마조사께서
말했다. '佛法의 위 없는 깨달음은 많은
생애의 수행을 통해서 이룬 것이거늘,
자네의 작은 의지로 큰 불법의 정신을
구하려 해도 끝내 얻기 어려운 것이다.'
神光이
이 말을 듣고 곧장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기의 왼 팔을 잘라서 달마 조사의 앞에
갖다 바치니,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이 佛法을 구할 때에 暑을
몸으로 삼지 않고, 목숨을 목숨으로 삼지
않았는데, 자네도 이제 팔을 끊는 求法의
의지를 보이니 가히 佛法을 구할 만한
인물이구나1'
그리고
神光이란 이름을 慧可라고 바꾸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전하고 또 역대의 조사들에 의해
전래한 正法aR藏을 전하였다.
혜가의
斷臂求法은 r열반경』에 雪山量子가 身命을
버리면서 半偈를 구한 구법 이야기에 비교되는
중국 선종의 유명한 구법 이야기로, 선을
통하여 불법을 구하는 수행자들의 용기와
의지를 새롭게 하는 귀감이 되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보리달마가
혜가에 불법을 전한 것은 인도에 전래한
불법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지역으로 전향시킨
역사적인 일이다. 그래서 혜가의 구법도
남달리 비장한 의지와 身命을 아끼지 않는
구법정신으로 이를 전해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혜가의 斷臂求法에 의해
佛法 東浙의 역사적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었던것이다.
정각도량 마음의
벽을 허물자 / 이법산(서울캠퍼스
정각원장)
우리의
마음에 언제부터 갈등이 있었던가. 마음은
본래 맑고 밝고 천진스러웠던 것인데 때가
묻고 번뇌망상이 본심을 가리고 막아 갈등의
벽을 쌓았다. 갈등은 막힘에서 온다. 갈등으로
인해 시비도 생기고,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을 막고 있는 갈등의 장벽은
불안과
초조, 오해와 번민만 줄 뿐이다. 우리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자. 닫힌 마음에서
오해와 반목이 형성된다. 마음의 벽을
튼다면 무한한 포용성과 분명한 이해력으로
누구와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된다.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
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움에 허덕인다.
"나의
<나>가 이미 없거니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재산인가" (法句經)
흔히들
세상사랑들은 공평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치우친 생각에 끌려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이쪽과
저쪽, 내 것과 네것, 많고 적음, 길고
짧음 등의 구별을 하고 평 가르기의 습성
때문에 항상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나의
자녀, 나의 재산이 영원한 내 것이라면
죽을 때도 내 것을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지중지해도 죽음을 따라
같이 가는 처자도 없고 지니고 갈 재산
한 푼 없다.
사람이
정신을 잃었을 때 몸이 어떻게 되었건
상관하지 않는다. 죽은 몸뚱이는 어떻게
해도 반기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냥
썩어가면서 말이 없다. 결국 내 몸도 영원한
내 것이 아닌데 무엇을 가지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분별을 지어 싸울 것인가,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므로 「제행무상(諸行旅常)」이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이 넓고 샘물과
같이 깨끗하여 모든 활용에 막힘이 없고
작용에 못할 것이 없는데, 구름과 같은
장애가 생기고 공해로 가려지고 더럽혀져서
빛을 잃고 어둡게 되었으니, 이 무명(無明)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되어버렸다.
자성의
본 마음이 아닌 <어리석은 마음>으로모든
일을 판단하고 일을 저질러 버린다. 어리석은
마음의 가려진 벽이 편을 가르고 치우친
생각을 일으켜 세상을 불안하게 하며 그로
인해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우리
모두 마음의 벽을 헐어버리자.
그러면
벽으로 가려진 어둠은 완전히 사라질것이다.
열린 마당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더불어
모두를 알게 된다면 서로 이해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으리라.
우리의
마음은 본래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천연(天然)
그대로 맑고 밝고 깨끗한 것이다.'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버리는 것, 나를 찾는 일이다
더럽히는 일이다.
모름지기
마음 속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도 사실은
일어남이 없다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죽이고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아라.그 일어나는 곳이 곧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는 것인가.' (禪家龜儺)
그렇다.
중생의 본심이나 부처의 본심은 똑같이
맑고 밝고 깨끗한 것이므로 하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심(本,乙,)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차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심의 자리에서 버릴 중생의 마음도 없고
찾아야할 부처의 마음도 없다는 말이다.
본심이란 청정 그대로이지 버릴 더러움도
찾을 깨끗함도없다.
우리
모두 본심에서 서로 마주해 본다면 그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좋아하리요. 한
생각 일어나 분별심을 지우면 미운정,
고운 정이 치우치는 대로 괴로운 지옥과
즐거운 극락의 두 갈래 길이 생기고, 기쁨(答)
.성냄(怒) .슬픔(哀) . 즐거움(樂) . 근심(憂)
. 안타까움(悲) .괴로움(苦) . 번거로움(惱)이
이어서 일어난다.말세는 투쟁견고(鬪淨堅固)의
시대라고 했다. 그러나 본래 정법(正法)
세상과 말법(末法)사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갈등과 투쟁으로 허물하고
싸우며 고뇌로 괴로워하게 되면 법을 지키지
않는 어지러운 말법사회가 되고, 본래의
밝고 맑고 넓은 마음으로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사랑한다면 꼭 바른 법을 찾지
않아도 그대로가 정법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행(幸)과
불행(不幸)은 오직 한 마음에 있는것이다.
청정한 본심대로 살면 날로 새로워지고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여러 생명과
더불어 다함께 즐겁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 집착을 일으켜 편파적으로
생각한다면 분단의 외벽은 점점 굳어지고
욕심.성댑.어리석음.아만.의심 등 번뇌의
불꽃이 더욱 맹렬하여 시비와 투쟁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꾀롭고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괴롭고
불행한 사슬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본래 착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마음인데 삶의 현상 속에서 만남과 부딪침에
물들어 청정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고,
물듦에 벽이 되고 사슬이 되어 갖가지
선악 시비에 놀아나고 있다.
우리
각자의 스스로 자기 본심을 찾자. 그러면
마음을 가린 벽도 자유를 구속하는 사슬도모도
소멸될 것이다. 내 스스로 해탈.열반의대자유를
실현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받고 불행한
생명들에게도 해탈의 길, 열반의 즐거움을
찾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
벽을 허물면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모든
생명과친 한 벗이 되어 더불어 즐겁게
살수있다.
초청강연 불교문학의
길 / 고은(시인, 소설가)
불교문학의
경우 우리는 너무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그것은
불교경전을 아우르는12부경 전체가 이미
그 문학적 형상화를 실로 다양하게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불교경전의 이 같은 다양성을
문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위대한 작자에
의해서 가능한 위대한 문학이거니와 어떤
의미로는 더 이상의 불교문학이 필요하지
않기 까지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양적으로도 한 지역의 문학사 몇 천년에
견주어지는 방대한 것이 불교경전이다.
그렇다면
불교문학의 작자는 석가모니 하나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행복이 불교문학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장경과 대승의 여러 논 장들이
성취해 놓은 업적 때문에 그 뒤의 불교문학이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사실이 지적되기
마련이기 때문이 다.
그래서
불교문학을 더 높은 단계의 문학적 지향을
진행시키지 못할 것인가.
하지만
불교는 이처럼 장엄한 경전문학의 과거와
함께 그 이후의 오랜 시대를 또 하나의
장엄성을 확보한문학자를 이어온 것이
사실이다.
마명
외 '불소행 찬(붓다차리카)'이래 한국
근세의 세종에 의한 '월인천강지곡'과같은
부처님 전기를 서사체로 완성한 문학은
마치 12부경의 하나인 본생담(자타카)문학을
현세 적으로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화엄경, 유미경과 같은 극적인 구성의
서사 성이나 비유의 확대, 게송들의 시적인
전개는 그 뒤 중국문학의 고대 적 배경을
두고 혜원의 정토 결사에도 인연이 있는
도연명과 사령이 있다.당시의 대표적 주자인
두 보는 그 후기에 선(禪)에의갈망을 노래함으로써
7조(七調)를 노래할 정도였다, 더구나
시불(侍佛), 왕유, 백낙천,한산습득을
지나 종대 소동파는 불교문학의 정신을
펼치고 있었다.
이같은
찬란한 계보는 한반도에서도 향가, 고려의
헤심을 이어 한용운, 최남선에 이르고
있다.
중국
명대위 '서유기'야말로 당 현장의 인도구도여행을
소재로 한 불교 소설문학의 커다란 수확물이다.
그것이 뒤의 김시습의 금오신화나 김만중의
구운몽으로 이어지는 소설사와 어깨를
걸고 있다.
고대
.중세 .근세 전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주종은 언제나 시 형식에 있었다.서양에서도
12세기 단테의'신곡'이 나온 이래 기독교를
주제로 삼은 문학으로서의 소설이 나온
것은 불과 몇 백년도 안된다.
동양에서의
불교문학도 오랫동안 문학이라면 시 밖엔
없는 시대를 시로써 감당해왔다. 이는
불교경전 l2부경이 이미 선보인 소설형식,
극형식, 다채로운 산문형식 시형식, 시와
산문의 혼합형식 따위의 여러 가지 장르를
시 형식 하나로만 계승한 셈이된다.
그것은
불교가 중국대륙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그 곳의 시적 풍토로부터 다른 형식의
문학을 유보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국
근세에 이르러 우선 소설형식으로서의
불교문학을 가능케 했고 그것은 신문학
제1세대인 한용운 등의 시와 함께 이광수의
불교소설을 통해서 보편화할 수 있었다.
이런
소설로서의 불교문학은 작자의 한계로서의
계몽성이나 시대의 제약에 따라디 높은
단계의 문학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다음
시대 의과제로 넘겨지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오랜 전통을 누리고 있는 시의
경우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상태이다.
그것은 중국과 한국의 선종이 발전시킨
게송으로서의선시의 맥락과는 또 다른
서정시의 계보에서 근대 이래의 「님의
침묵」과 그 뒤의 서정주, 조지훈 등의
활동에서 부분적으로 보여지고 있다.아마도
이런 언저리에서 최근의 신시 현상이 있게
되거니와 이것은 유치한 단계이다. 그것보다는
김성동의 소설에서 불교문학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면
불교문학은 앞으로 어떤 상황을 설정해야
하는가.
첫째,
불교문학을 현대세계문학의 시각에서 인식해야
한다. 이미 20세기와 함께 서구문학은
불교사상에 의한 경이적인 활로를 모색하고
있으며 실존철학 이후 불교는 그들에게
거의 불가결한 직관과 영감을 부여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 바에는 불교문학이야말로 현대세계의
각지역에서의 가장 오래된 자리이면서
가장 새로운 가치로서 문학의 여러 주제에
개입되기 십상이다. 이미 스페인어권의
아메리카 문학에서의 동양정신 내지 불교정신은
탈 기독교 문명의 뚜렷한 징후를 보이는
것이다.
둘째,
불교문학은 상투적인 불교에의 찬사로
되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그것이 문학인한
자기부정적 절 실성 없이는 문학이 아니기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일본의 한 작가가 묘사한'금각사'의
전말과도 이어질지 모른다.
불교문학이란
깨달은 자위문학인 것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깨닫지 못한 자의 문학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우리는 고전문학의 하나로서
불교적 주제를 가장 유연하게 설정한 '심청전'이
있다. 앞으로 불교문학의 가능성이나 영광스러운
기대는 바로 이 같은 것에서 그 비경을(恥匕,境)을
발견할 줄 아는 자세와 역량에 있다 하겠다.불교문학은
아마도 과거로서의 무게에 억눌려 있지
않으려면 미래로서의 무한한 공간에 충실히는
미학적 정진에 의해서만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불교를
가지고 어찌 오늘에 머무는 문학일 따름인가.
정각논단 신라불교와
흥륜사 / 김복순(경주캠퍼스 국사학과)
흥륜사는
주지하듯이 신라 최초의 사찰로, 前佛時代
七處 伽藍址의 하나인 天余竟林에 창건한
법흥왕과 이차돈,진흥왕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었다.
흥륜사를
始役한 법홍완은佛法을 처음으로 공인한
佛法造興의 왕이라는 의미의法興이라 하였고,
법명도 法空이라고 하였다. 그 후 진흥왕
5년(544)에 사찰이 완성되자, 왕은 大王興椧寺라고
腸額하였다. 眞興王의 이름으로 나오는
三麥宗, 深麥夫는 沙彌의 相似를에서 따서
붙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김철준),그의
법명은 法雲이었다. 법흥왕과 진봉왕은
모두 만년에 흥륜사에서 단기출가라 할
수 있는 手舍身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흥륜사가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 성왕에 비유하듯이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과 금륜(사륜)으로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흥륜사의 준공을
기념하여 진홍 왕은 이 해 3월부터 신라인들에게
출가하여 僧尼가 되어 부처님을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흥륜사는
현재 사정동에 비구니스님들이 재건하여
거주하고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즉, 미추 왕릉 동쪽에 위치하였다는
삼국유사 권1 미추왕 죽엽군조의
기록과 현재의 훙륜사 경내에서 '靈廟之寺'(
김 태중소장), '大令妙寺로蚩瓦' (경주국립박물관소장)의暴名文
기와가 출토되어 현 위치가 영 묘사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흥륜사가 위치해 있는 곳이 '흥륜들'로
호칭하여 온 것으로 보아서는 현재의 위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형편이다.곧
발굴을 한다 하므로 그 귀추가 주목된다.
흥륜사는
미추왕 또는 소지왕대에 阿道和尙이 머물었던
茅屋이 있었던 곳으로, 법흥왈이 천경림을
벌목하고 이 일대를 대사찰로 창건하였다.
초기의 기록이 없어 그 구조를 알 수 없으나,
후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흥륜사는 南門,
殿堪, 金堂(吳堂)과左余笹樓등이 左右廊臟로
연결된 구조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金堂(吳堂)에는
수불인 彌勒尊像과 左右 협시보살이塑{象으로
안치되어 있었는데,이는 金良曙가 선덕왕
때에密本法師의 은혜를 입은 데서 檀越을
한 것이다. 또 하루도 胛용지지 않고 종을
치고 북을 두드렸다는 湖山錄 의
기록으로 보아 錘裡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홍륜사의 南門은 吉達門이라고도 불렀는데,
진지 왕 대에 鬼橋를 만들었던 鼻荊의
무리 가운데 길달이라는 귀신이 만은 데서
유래된명칭이다. 이 남문은 여러 번 중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무열왕
4년(657)에 흥륜사門이 저절로 무너지는
일이 있었고, 문무왕 11년(671)에는 흥륜사
남문이 벼락을 맞기도 하였고,경명왕 5년(921)에는
불탔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金堂의
동 벽과 서벽에는신라 十聖의 塑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동쪽 벽에는 阿道,厭幟 惠宿,
安含, 義湘의 塑秊象이 서쪽을 향해 모셔져
있었고, 서쪽 벽에는 表訓, 蛇巴, 元曉,
惠空, 慈藏의 塑像이 동쪽을 향해 모셔져
있었다. 표훈이 경덕왕 대의 인물이므로
이 심성의 소상들은 신라 하대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금당의 벽에는 金色으로
佛畵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M대 경명왕
때 화재로 남문과 좌우당무가 불이 나서
靖和와 弘儺두 僧이 수리하면서 帝釋의도움으로
그린 普賢菩薩像이고려시대까지 존재하였다.흥륜사에
있었던 石槽가현재 경주국립박물관 본관과
고 분관 사이의 뜰에 전시되어 있는데,
그 크기(길이2.3M, 폭 1.1M)로 보아 많은
대중이 생활했었음을 짐작케한다. 또한
이 곳에서 출토된 인 면문 와 당은 국내
유일의것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가면
이 人面文瓦當의 모형이정표를 쉽게 볼
수 있다. 일제 때 반출된 것이 1972년에다시
돌아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흥륜사의
탑돌이가 기록에나요는 것으로 보아, 흥륜사의
탑이 유명했었던 듯하다.왕경의 신라인들은
2월 8일부터 15일까지 흥륜사의 전 탑을
다투어 도는 것을 福會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원성왕대에 김현이 호랑이와 사랑을
하게 된 것도 이 탑돌이에서였다.
흥륜사
앞 길은 사신을 맞이하거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에 이용되었던 곳이었다.흥덕왕
2년인 827년에 僧 丘他이 佛桎 若干函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오자, 왕과 여러 사찰의
송도들이 異幅寺 前路까지 나아가 맞이한
일이있었다.
흥륜사는
신라 말까지 그寺勢가 매우 훙대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藍浦
聖住寺 郞慧和尙 白月蔯光塔碑文>(雀致遠撰,
890)에 의하면, 문상대왕이 낭혜화상의
교화함을 듣고 임금의 덕화를 돕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매우 본받을 만 하다고
편지를 보내 크게 위로하고, 대사가 山中宰相에게답한
네 마디를 아름답게 여겨 사찰의 이름을
바쩌 聖住라 하고 大興輪寺에 예속시킨
사실은 국철로서 위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興輪寺 上座 釋彦琳은
中事省 內養 金文式과함께 경명왕의 사신으로
선사인 眞余唵師를 초빙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대흥륜사
와
왕실과의 관계가 하대에
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륜사는
아도화상 이래 많은 유명한 승들이 주석하였다.
眞智王 대의 眞慈師, 善{훙壬 대의 密本法師와
法懼,神文王 대의 開士 漸開, 憲德王 대의
永秀禪師, 景文王의師僧 範敎師, 憲康王
대의 釋賢暢. 景明王 대의 釋彦琳이그들로,
이들의 활약상으로흥륜사의 성격을 알
수 있다.흥륜사는 이차돈의 순묘로그 役事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만큼 이 곳에서의
이차돈에 대한 추모는 남다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마다 이차돈이 죽은 날인
8월 5일에는 신라인들이 社를 만들어 훗륜사에
모여 추모하는 법회를 열었고, 헌덕왕
9년인817년에는 훙륜사의 瑜伽僧인 永秀禪師가
이차돈의 무덤에 禮佛할 香徒를 결성하고
매달 5일에 魂의 妙屠를위해 壇을 만들어
法會를 열기도 하였다.
흥륜사는
진흥왕대에 준공되어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진흥왕대에 창설된
화랑과 관련하여 僧侶郞徒를 배출시켜
眞慈師, 範敎g瑁 등의 사적이 전하고 있다.
진시왕대의 승 箕慈師(혹
은
貞慈師)는 흥륜사 금당의 미름상 앞에
나아가 '우리부처님께서는 화랑으로 化身하셔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제가 늘 부처님의
얼굴을 뵈옵고 곁에서 시중하도록 하여
주십시요.'라고 소원을 하여 공주의 수원
사까지 찾아 갔다가 彌勒仙花를 알아보지
못하고 돌아와, 영 묘사동북쪽 길가에서
未尸郞을만나 그를 國仙으로 받들었다.
7년 여를 風流를 빛내고 홀연히 사라져
상심했으나,이후 도를 열심히 닦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세상을 마친 곳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경문왕
膺廉이 18세에 국선이 되었을 때, 승려낭도는輿鞠寺僧
氣敎師였다. 웅렴이20세가 되자 헌안왕이
불러'내가 딸이 둘이 있어 형은 금년에
20살이요 아우는 19살인데 냥의 마음에
드는데로장가를 가라'고 하였다. 이때
웅렴랑은 범 교사가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충고를 듣고 형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된 후고 이익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범교사가'당시에 왕과 왕비벽4서 뜻대로
되는 것이 기뻐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첫째 이익이요, 이로 인하여 높은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둘째이익이요,
필경은 처음부터 구하던 막내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셋째 이익입니다.'라고 답하여
왕이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이
두 승려의 존재는 봉륜사가 화랑을 지도하는
승려당도를 배출한 지도적 위치의 국철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다.
선덕왕대의
법칙과 밀 본은 밀교계통의 승들로, 흥륜사의장을
바르면 부스럼이 나았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흥륜사는 지병계통의 밀교 승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法偈은 흥륜사승으로서
선덕왕의 병을 치료하였으나오래 효과가
없자, 덕행으로 명성이 있던 密本法師가
대신 들어갔는데, 법사는 왕의 곁에서
藥師經을 독경하고는六環牀으로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환이 나았다. 또 승상
김양도가어렸을 때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
말도 못하고 몸도 쓰지 못하고 다만 귀신들이
보일 뿐이었다. 법류사승이 경을 전 독했으나
오히려 땅에 넘어져 피를 토하고 죽었으므로
일본법사를 청하였는데,법사가 이르기도
전에 대도신이 와서 귀신을 잡아 묶어가
버렸으므로 법사가 경도폐기 전에 병이
나아 말도 통하고 몸도 풀렸다. 이에 김영도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한 평생 게을리하지
않았다.밀본은 원래 金谷寺僧이었는데,
법칙을 물리친 이후興輪寺僧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김영도가 흥륜사 오당의
미륵손상과 좌우보살을塑{象으로 만들어
안치하고,금색으로 벽화를 그려 모신 것이
密本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한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흥륜사의
醬은 범에게 입은 상처에 특효약으로 쓰였는데,그것은
김현이 호랑이와의 인연에서 유래한 것으로
'호랑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醬을 그 상처에 바르고 그 절의
나발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이라는'처방에
의한 것으로, 이 역시흥륜사승들의 治病늙旴과
함께흥륜사의 陋諍旴的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하대에까지 흥륜사에
融善呪師(崔致遠, <新羅壽昌郡審夔國軾八角燈樓記>
東文選) 권64)와같은 승들이 있었던
것과도 통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리고
흥륜사승으로 비문을 刻字한 釋賢輻의
존재는 흥륜사에기예를 가진 승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하겠다.고려시대에 들어서서
흥륜사는 거란과 몽고,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하여 蜜塞까지 불에 타버렸다. 이에
道人 定堅이 갑진년인 1244년 고려 고종
31년에 南京(慶)留守 禮部 盧演의 도움으로
불탄 재 속에서 쇳조각을 수습하고 새로이
쇠를 합하여 일 만 근의 大鐘을 만들어
진정국사가 <흥륜사대종명병서>(
호산록) 권4)를 지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중수된흥륜사가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봉륜사는 완전히 폐사가 되어 百槽만 남은寺址에
집들이 들어선 것을 한탄하는 김시습의
<興輪寺址> 詩만이 전하고 있어,
그 옛날의 번창이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교리강좌 번뇌의
본질 / 정승석(불교대학 교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은 저마다 바람직한
삶을 개척하거나 영위하기 위한 보편적인
신조로서, 어릴 적부터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는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이와는 반대되는 속인도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로서 통용된다.즉
'아는 것이 병이다.'라거나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속인을 실감나게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옛사람들은 일찍이
그 경험을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모든 앎이 병이 되는 것은 결코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앎이 병이 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병이 되는 그
앎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적합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번뇌란
병이 되는 알이자 마음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로를 잘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상대방의 생활 환경은 물론이고
그의 성격과 쉽게 드러나지 않는 마음까지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몰상식적인
언행도 이해하면서 서로의 마찰과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우호적인 관계로써 상부
상조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당위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 관계란 이런 것이다.
다만 이 관계를 선별적으로 유지하면서
아무에게나 유지하려고는 노력하지않는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같은 관계를 선별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간 흑은 서로를 잘
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 대한
것보다 더 심한 오해를 유발할 수도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평범한 언행에 대해서,
지기만이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끌어내어 그 의중을 헤아리느라고 애쓰다가
나름 대로의 단정에 도달하거나 미심쩍은
의혹을 간직하게 된다. 이 경우에는 그
단정이나 의혹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잘 안다는 사실로 인해 부질없는
오해일 수 있는 심리적인 고충을 낳는다.
이와 같이 발동한 앉은 번뇌에 속한다.자신의
단정이나 의혹이 사실인 것으로 확실하게
판명될 경우에야 그 번뇌에 대한 심리적인
위안이 조금 있을 뿐이다.
좋은
기억력도 자칫하면 번뇌로서 발동하기
쉽다. 돌이켜 생각해 낼 필요가 전혀 없는
일까지도 기억해 내는 경우가 있다.예전에
A서로의 오해를 낳았거나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어떤 상황을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좋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굳이 기억으로
끌어낸다면, 이 기억은 지금의 좋은 상태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의
어느 구석에 없어도 좋을 앙금이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 같은 기억은 심리적
위안마저 되지 못하는 마음의병이자 번뇌이다.
재가
신도에게 훈시하는 경전에서 부처님이
'번뇌 때문에 나와 남을 파멸시키므로
번뇌는 바로 나의 원수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설한 것은 아마 위와 같이 발동하는 번뇌를
지적한 가르침일 것이다. 번뇌를
폭류(簾流)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켜 홍수처럼
휩쓸어 가기 때문이다.
번뇌는
우리가 뭔가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유래하는
심리적인 불편이다. 번뇌가 심리적인 불편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결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뇌는 결(結) 또는
계(繫)라고도 불린다. 번뇌의 여러 가지
별명 중에서 그것이 발동하는 양상을 지적한
별명은 누(漏)이다, 이 말은 마음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것이 곧 번뇌임을 뜻한다.
결국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우리의 모든 앎이 번뇌라는 병으로
도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며,또
한편으로 우리 모두가 번뇌를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번뇌를
만들기 위해 지식을 얻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이 지식이 번뇌로서 발동하는 것은 자신의
편향적인 성벽 탓이다. 하나의 사실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습관적인
버릇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식이
번뇌로서 발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의 본질은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습관적인 버릇' 즉 편향적인성벽이다.
불교에서는 번뇌의 본질적인 양상을 수면(隨眠)이라고
일컴는다. 언제라도 번뇌로서 표출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서 평소에는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싱-태로 내재해 있는
것이 곧 수면이다. 이 수면은 미세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잠복해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보통 번뇌로서인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편향성우로서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활동하면서
대개는 번뇌로 표출되고 만다. 우리가
겪는 온갖 번뇌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이 수면이며, 이 수면이 여러 가지
심리적 불편으로 표출된 양상이 바로 번뇌이다.
우리에게
잠복하여 있는 수면이 번뇌로서 발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편향적인
성벽을 고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노력할
때라야 아는 것은 병이 아닌 힘으로만
발휘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병이 되는 알이란 진실한 앎이 아니라
무지에 불과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실한
앎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앎은 번뇌로서
발동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계율을
잘 준수하거나 선정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수면을 제거할 수 없고, 진실을 깨우치는
지혜에 의해서 수면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번뇌는 단순히 감각적인
괴로움이 아니라, 진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표출되는 온갖 양상의
마음이다. 번뇌의 근원이 되는 이 무명을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앎 또는
자기 중심적으로 적용하는 앎을 가리킨다.
이로부터 탐욕과 혐오 등의 주요 번뇌가
발동하며, 자기의 앎이 옳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이고 비객관적인 기준으로 인해
우리의 앎은 병이 되기 일쑤이다,
경전의
세계 육도집경 / 이만 (불교문화대학
교수)
이
속세에 살고있는 우리중생들은, 무지와
편견 및 아집 등으로 인한 분별력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일으키는데 그 가지 수가
모두 8만 4천에달한다고 하며, 이에 관하여
일일이 그 해결책을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흔히 부처님이 평생 동안에 하신
말씀을 일컬어서 8만 4천 법문이라고도
한다.그리하여 현재 합천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8만 대장경은 소장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부처님 말씀의 전부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암리에 전하고 있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쌓게 많은 법문이지만 그것의 대강을
간략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사성제설(四聖諦說)이며,
그것을 또한 내용에 따라서 몇 가지로
분류하여 검토할 수도 있는데, 이를 본연부(本織部),
아함부(阿肯部), 반야부(般若部), 법화부((法車部),
화엄부(華殺部), 보적부(寶積部), 열반부(끊보槃部),
대집부(大集部) 및 경집부(余옆集部) 동의
9부로 나누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육도집경(六度集經)은
우리에게 약간은 생소한 경전으로써 그
내용상으로는 본연부, 즉 부처님의 전생
담이나 설화 둘에 관한 것을 한데 엮어서
만든 경전류에 속한다. 그리고 경영 자체에서
암시를 하여 얼마간은 알 수 있듯이 육도(六度),
곧 보살의 수행덕목인 6바라밀에 관한
것을 부처님의 여러 가지전생담과 관련시켜서
설하고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승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보살 행을 고양하는데 주된 목적을
두고 편찬된 호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름의전생담에
관한 내용도 간혹 인용되고 있으며, 반야경에
관한 사상을 이미 알고서 서술된 것이므로
이러한 면에서는 도행반야경(道行般若系怪)과
같은 계통에 속하는 경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것이다.
원전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 경전은 또한 육도무극경(六度無極桎),
잡도무극경(雜度撫極睾墮), 혹은 도무극경(度無極經)
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는데, 일찍이 오
나라의 강승회(康僧兮)가 번역(251一280년)한
것으로써 여기서 도무극이란 말을 신역에서는
바라밀[度]로 번역한데서 육도집경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6바라밀의 순서에 의하여
참고가 되는 보살 행들을 이에 배태시켜서
풀이하고 있는데, 그 권수에는 일부 9권본도
있다고 하지만 개 원석교록(開y접釋敎錄)
과대정장(大正藏 3卷) 동에는 8권으로
되어 있어서 일정치않는 느낌이다.
그
구성은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다시피
6바라밀에의거하여 보살 행이 차례로 설명되고
있는데, 맨처음의단나[布施]바라밀만 3권으로되어
있고 나머지 5바라밀은각각 1권씩으로
되어 있어서 총 8권의 분량이 되며, 그장(章)의
수에 있어서는 단나바라밀에 26장, 시라[戒]바라밀에
15장, 찬데[忍,辱]바라밀에 13장, 비리야[精로垈껴L라밀에
19장, 선나[禪定]바라밀에 9장 및 반야[智慧]바라밀에
9장 등 총 91장으로 짜이어 있다.
좀더
자세하게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먼저 그
권제1은보살본생(菩薩本生)과 살바달왕본생(薩婆達王本生)
등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여기에서는
여태가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에 많은 보시를
행하여 중생들을 구제하였던 내용을 소개하거나
국왕, 빈인(貧人), 재산가이었을 때에
행한 보살 행들이 기술되어 있고, 다음의
권제2에서는 파야왕(波耶王)과 살화단왕(薩和檀王)
등 4왕들의 본생 담이 소개되어 있으며,
권제3에는 화묵왕(和陜王)의본생 등 총
12가지의 본생 담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어서
권제4의 계도무극장(戒度無極章)에서는
예전에 보살이 청신사(淸信士)이었을 적에
당시의 혼탁한 사회에서 참된 수행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잘 닦아 그 나라의 왕을
감명시켜서 그로 하여금 과거를 회개케
했다는 등의 본생 담이 l5장으로나누어져
소개되고 있으며,권제5는 13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모두가 인욕에 관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권제6의 정진장(精進章)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본생 담이 19장으로 나누어져
기술되고 있으며, 그 권제7인선정장(禪定章)에서는
대체로 선정의 종류와 그 실천수행에 관한
내용을 9장에 걸쳐서 소개하고, 끝으로
권제8인 명도무극장(明度無極章)즉 반야바라밀장에서는
역시여래가 여러 형상으로 다투시어 중생들을
깨우친 설화내용들이 9장에 걸쳐서 기술되고
있는 것이 그 전부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경전은 성문 승이 고집멸도의사정제의
이치를 터득하고서 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연각승이 무명.행.식으로 시작되는 12연기의
도리를 관찰함으로써 저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살은어 6바라밀의 수행을
닦아서 생사의 고해를 넘어 열반의지 언덕에
도달함을 그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 경전은 6바라밀을중심으로 차원 높은
보살수행에 관하여 역설한 본생 담이지만
어디까지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내용이 그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것이며,
오늘날 이와 같은 부류의 경전을 읽고서
음미해야 할 것은 각박한 말법시대에 신선한
성동 감을 우리 중생들에게 준다는 점을
잘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동국과
불교 대학교 승격과 권상로 총장의
취임 / 이봉춘(불교문화대학 교수)
대학으로의
승격 당시 우리 대학은 국가의 기본이념에
부응하는 심오한 학술이론 및 그웅용과
전문적이고 현대화된 불교교육의 실시를
교육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당시 우리
대학에 설치되어 있던 불교학과. 문학과(국문학
전공'영문학 전공) .사학과의 3개 학과만으로는
크게 빈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학과를 증설하여 학문 연구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에
대학으로의 승격 다음 해인 1947년에경제학과와
정치학과를 설치하고, 학생모집과 함께
이내 강좌를 개설하였다. 대학 당국의
자체 판단에 따른, 이 일에 최호진.조동필교수등이
헌신적인 노력을 다했지만, 그러나 이
두 학과는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아직 종단의 인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의 교육부장관 유익 겸의
한결같은 반대와 고집으로 학과 증설의
인가가 벽에 부딪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하고 원칙의석용도 사정에
따라 달랐던 당시. 초대 학장 허윤의 의지는
분명하고 확고했다, 교육부의 인가와는
상관없이 해마다 학생을 모집하여 강의를겨]속해
나간 것이다. 이는 장차 종합대학의 승격까지도
염두에 두고 행해진 일이었다, 그러던
중 6 . 25동란이 발발했고, 따라서 1950년
까지는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은 거의 포기상태나
다름 없었다.
특히
부산의 임시교사로서의 인가를 신청한다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그러나 광대한 사찰소유 토지가 하루 아침에
토지 증권으로 그 소유권이 바뀌고만 당시에
있어서 시급한 문제는 전국의 寺有산림을개발하여
사원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여야만 불교의
명맥을 이어 나가게 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우리 대학에
농림학부를 설치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런
사정하에서 재단법인 동국학원으로서는1951년
11월 제10회 중앙교무 회에서 결정된 전국
사원소유의 산림을 농림학부의 경영과
유지에 충당한다는 목적변경의 취지를
만들어, 1952년에 설치된 임학과외 다시
농학과를 증설하여 농림학부 신설의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이와함께, 한편으로는
모든 분야에 걸쳐 불교를 이해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깊은 뜻에서 종합대학
승격의 추진에 박차를 가해나갔고, 그
결과는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 재단과
대학당국, 최원종 . 홍일범 등 실무자들의
숨은 노력, 그리고 본 대학이 40여 년간
우리 신문화 운동에 이바지 한 공적이
높이 평가되어, 1953년 2월 1일에 이르러
대학교육심의회의 까다로운 심의석상에서
만장일치로 승격 안이 통과된 것이다.
마침
당시의 교육부장관은 우리 대학의 대선배였던
고 김법린 박사였다. 그 영향이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대학교육심의회의를 통과한
동국대학교 승격 안은 교육부에서 급속도로
처리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3년 2월
6일에이르러 석사과정의 불교학과. 영문학과'
정치학과의 3개 과로 신설된 대학원을
비롯하여, 불교대학(불교학과 . 철학과),
문과대학(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사학과), 법정대학(법학과 . 경제학과
. 정치학과), 농업대학(농학과 . 임학과)의
4개 대학으로 된 동국대학교의 설립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우리
대학의 종합대학교 승격은 私學으로서는
고대, 연대, 이대 다음으로 이루어진 일이다.이로써
불교 중립의 우리 대학은 이 나라 사학
중에서 일찍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며 전통과
연륜을 쌓아가게 된 것이다.
전환기의
학원은 자칫하면 침체 상태에 빠지기 쉬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합대학교 승격의
희소식은 그런 학원에 전에 없던 활력소가
되었고, 학내외는 자못 희망에 차 있었다.그런
가운데 전체 교수 및 학생의 환영 속에권상로박사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879년
2월 경북 문경에서 출생한 권총장은1912년에
조선불교일 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23년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 불교일보사장을
역임하면서 불교중흥과 계몽에 많은 업적을남겼다.
그 후 1931년에는 우리 대학의 전 신인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에 취임하여 교육계의 최일선에 진출한
후 그간 「조선불교사」 「조선문학사」
등의 저서로써 그 당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불 교학 및 국학 분야를 개척해왔다.
따라서 이처럼 학과 덕을 겸비한 노교수를
총장으로 맞이하게 된 우리 대학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진실한 학풍수립의 기풍이
넘치고있었다.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은 그 운영에 수반하는사무량의 격증은
물론, 대학발전을 위한 진용의 강화 및
기구확장 그리고 제반 시설의 보완 등
많은 과제가 뒤따랐다. 그리하여 권상로총장의취임에
잇달아 신설된 대학원장과 불교. 문화.법정
.농림의 4개 대학장의 인선을 서둘러야
했다. 이에 대학원장은 총장이 겸임키로
하고, 불교대학장에 조명기교수, 문과대학장에
최봉주교수가 각각 임명되었다. 또 법정
.농림대학장은 적임자가 없어 잠시 그
임명이 보류되었다.
한폄
그동안 교무과. 학생과로 학무행정을처리하i간
기구를 교무처로 개편하고 서무과를서무처로
승격시켰다. 여기에는 서무처장에 장원규교수,
교무처장에 박춘해교수가 각각 임명됨으로써
대학원과 2개 대학, 2개 처의 기능이 원활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회고컨데,
생사기로의 전진을 뚫고 피난생활의 어려움을
견뎌내고 무사히 대학으로 복직한46명의
교수와 강사, 8명의 교직원, 그리고 987명의
학생으로 차려진 종합대학교로서의 우리
대학은 오늘날에 비교하면 작은 규모인
것이틀림없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으로도
당시에는 사학의 육영기관으로서는 굴지의
대학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이후 일련의 활동들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피난 지에서
추진되고 이룩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피난 수도에서의 이와 같은 획기적인
발전은 대학당국의 비상한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한 본
대학의 대선배이며 당시의 재단이사장인
고 이종욱선생님과, 역시 우리 대학 대선배로서
당시 교육부장관이던 고 김법린박사의
힘이 컸던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두 분 동국의 대선배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 우리 대학은 그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이 분들이 한국불교계가 길러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동국과 불교의 불가분의
연관을 새삼 가늠해 보게 된다.
비유와
설화 법을 듣고 환생하다 / 조용길(불교대학
교수)
(1)
아이가 물질과 '공'의 이치를 듣고 깨치다.
옛날
어떤 비고는 부지런히 법을 수호하면서
그가 외우는 이 반야 바라밀을 돔는사람에게는
모두 기쁨을 주었다.
어떤
아이가 있었다, 그 나이는 7세이며 성
밖에서 소를 먹이다가 비고가 경을 외우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곧 정사로 가서고
비구에게 예배하고 그 경의 진리를 들었다.
그
비고는 '색(色)'과 '공(空)'을 설명했고
아이는 그것을 듣자마자 곧 깨쳤다. 그
아이가 비구에게 물었으나 비고의 답이
옳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그 비구에게 해설해주었다.
그것은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이었으므로
비고는 아이의 지혜가 비범하다 하여 기특하게
여겼다.
그때
아이는 거기서 떠나 소를 쫓아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혔다. 아이는 목숨을
마치자 어떤 장자 부인의 아이로 잉태되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임신하는 첫날부터 밤낮 쉬지
않고 반야 바라밀을 해설하였다. 장자의
집에서는 이 부인을 괴상히 여겨 호귀병(呼鬼病)에
걸렸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은 비고가
그의 집에 갔다가 부인의 말을 듣더니
매우 기뻐하면서
'이것은
귀신 병이 아니요 다만 경전을 설명할
뿐입니다,'
고
했다. 부인은 비구에게 나아가 예배하고
그에게 설법하되, 남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묘한 진리를 해설했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기뼈했다. 달이 차서 부인은 남자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함장하고
꿇어앉아 반야 바라밀을 설명했고 그 부인은
아이를 낳은 뒤에는 예전처럼 회복돼 었다,
그
비고는 가서 말했다.
'이
아이는 참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잘기르십시오.
이 아이는 커서 일체 중생들의 스승이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되자 도법을 다 갖추어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지혜는 끝없어서 경전의
잘못된 것을 다 바로잡았다. 아이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장자 집의
어른, 아이 등 5백 인도 모두 아이에게서
배웠다,
이
아이의 설법으로 8만 4천의 사람들은다
위 없는 보리심을 내였고 5백의 비구들은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리어 대승을 구하고
법눈(法眼)이 깨끗해졌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의
그 아이는 바로 지금의 나요 그 비고는
바로 가섭불이시니라.'
<度無極集經>
2)
앵무새가 네 가지 진리를 듣고 천상에
가 나다
옛날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였다, 사위국의
수달(須達)장자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며
스님들의 단 월이 되어 여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했다.
수달
장자 집에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다, 첫째
이름은 유제요 둘째 이름은 사율제였다.
그들은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 말을 잘
알아들었다. 비고가 오는 것을 보면 먼저
그 집에 알려 영접하게 했다. 뒤에 아
난이 장자 집에 가서 그 새들의 영리함을
보고 그들에게 괴로움(苦) , 쌓임(集)
.사라짐(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설명 했다.
그
집 문 앞에 나무가 있었다. 그들은 법을
듣고 나무로 날아가 그 위에서 기뻐하며
법을 위 우고 그날 밤에 그 나무에서 자다가
살꽹이에게 잡아먹혔다.
그
법을 들은 선군 때문에 그들은 사천왕천(四天王天)에
태어났고 거기서 목숨이 다해 도리천(怖利天)에
났으며, 거기서 목숨이 다해서는 야마천(夜摩天)에
났고 거기서 목숨이 다해서는 도솔천(兜率天)에났으며,
거기서 목숨이 다해서는 화락천(化樂天)에
났고 거기서 목숨이 다해서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났으며, 거기서 목숨아 다해서는 다시
화락천에 태어났다.이렇게 차례로 다시
사천왕 천으로 내려오고 거기서 목숨이
다해서는 다시 타화자 재천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일곱 번 오르내리며 육욕천(六欲天)에
나서 마음껏 쾌락을 누리면.서 하늘의
천명을 다하는 동안 중간에서 일찍 죽은
일이 없었다- 마지막에 목숨을 마치고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 출가수도하여 벽지
불이 되었으니 첫째 분의 이름은 담아요
둘째 분의 이름은 수담마였다. 불교의
법문은 환생의 진리요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賢愚經>
불자교수회
월례법회 壽陀寺를 다녀와서 / 김영배(국문학과
교수)
미사리
쪽에서 팔당대교를 건너자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토요일이라 주말 나들이로 차가
정체될까봐서 일찍 떠나긴 했는데, 여기는
도로 확장공사 때문이었다. 한강 북쪽의
강변을 따라가는 도로공사는 그 지형상으로
어려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아직도
준공되기에는 한참 더 기다려야 할것이다.
지난
3월 법회는 대학원 연구발표회 때문에
빠져서 오늘 이 필자에겐 금년 들어 첫
번째 야외 법회참석,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에 있는 수타사로 가는 길이다.
잠시
강 건너 산을 보니, '아,, 신록이 언제
저렇게 푸르렀나' 할 정도로 연두색 보드라운
색감이,굼뜬 차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한다. 아무리 보아도
눈이 시리지 않은 저 자연의 빛에서 오늘
법회가 잘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은
개나리가 이미 다 노랑에서 파랑으로 바뀌었는데,
여기는 지금 한창 노란 빛이 곰다. 그밖에
진달래와 목련도 화사하게 피어 우리를
반긴다.
예정대로
세 시간 정도 걸려 절 입구에 도착, 버스에서
내려 좀 걸어갔다. 오른 쪽으로 老松 숲
저편에 浮屠군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아도 그 이끼 낀 품새 등으로 오랜
절의 내력을 말하는듯했다.
왼쪽으로
흐르는 淸流가 웬일인지 누런 흙탕물이다,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니, 위쪽에서 불도
저가시내 가운데서 공사중이었다. 다시
다리를 건너니, 거기에 바로 仁王門이
있고, 거기서 일직선으로 저 안쪽 위에는
큰 법당 건물이 보였다. 종루를 지나,
大寂光殿 앞뜰에 올라 합장했다. 절은
크지 않았으나, 6.25 난리를 겪으면서도
강원도 내에서 온전히 보존된 사찰이 아주
적었는데, 이 절도 그 중에 든다고, 후에
주지스님 말씀을 들었다.
법당에서
예불을 시작으로 법회가 시작되었는데,
반야심경 독송을 시작하자마자, 천정에서
흙부스러기(?)가 바로 필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순간 혼자서 흠칫하며 떠오른
생각은, 그 동안 신심이 부족했던 필자에게
경계하는 징조인가 하며, 심경의 독송을
마쳤다.
법당을
나와 주지스님의 사찰 내력을 듣고, 여기에
보관돼 있는 <月印手串譜> 제17.
18의 열람을 청했더니, 오히려 우리가
몰랐던 '부처님 전신 사리'까지 친견을
허락해 주시는 게 아닌가. 요사채 의한
방, 금고 속에서 사리와 <월인석보>를
모셔 내니, 일동은 합장하고 차례로 귀한
유물을 친견했다.조선조 世宗의 왕비인
소헌왕후가 돌아가자(세종 28년. 1446),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명해서 모후의 명복을
기원함에는 붙殆經을 번역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그런 불사를 하게 했다.
수양 안평대군은 당시 이름난 학자 金守홍亂과
더불어 <釋迦譜>를 중심으로 하고
여러 불경을 합해서 엮고, 이를 새로 만든
訓I民正音으로 번역해 내니, <釋譜詳節>전
25권(?)으로 간행한 것은 세종 29년(1447)이었다-
이를 본 세종은 <석보상절> 내용에
걸맞은 樂章體의 讚佛歌 580여 장을 지으니,
이것이 <月印千江之曲>(上 . 中
. 下, 上권만 전함)이다. 수양대군이 등극한
후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첨삭하여 내용과 단락에 따라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본하여 <월인석보>전
25권을 간행하게 된다.(세조5년. 1459).
그런데
이렇게 간행된 <월인석보>는, 현대의
인쇄술처럼 대량 인쇄가 되지 않았던 당시여서,
巴권완질로 한 곳에 전하는 것은 없고,
현재, 1 .2, 7.8, 9, 10, 11 .12, 13.14,
17.18, 21, 22, 25권과 같이 두 권씩 따로
전해오는 것이 많은 바, 수타사에 있는
제17.18은 본시 6.25전에 당시 주지스님에
의해 사천왕상 복장(忖匿裝)에서 발견되고,
1957년에야 세상에 알려져서, 때마침 연세대학교에서
國故聳刊으로 <월인석보>를 축소
영인 간행하던 중이어서 여기에 속간되게
된다. 제17은 처음 11張이(후에밝혀진
것으로 낙장은 1一10, 12 . 71의 열두張),
제18은 끝부분, 87장 후면부터 6장(?)이
낙장된바, 매장마다 배점을 해서 보존의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 10여 년 뒤인
1971년 10월에, 이번에는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의 寶*木寺에서 역시 사천왕상
복장품으로 150여점의 佛書가 발견됐는데,
그 중에 完本<월인석보>제17 단권이
있어서, 숱하사 본의 낙장 부분을 모두
補完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제18권은 숱하사 본이 唯一本이다.
이 두 권의 내용은 法華系甦 제16 如來壽量品에서
제 24 妙昔菩薩品까지이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호소하는 심정으로 적어 넣는
것은, 결본인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가
모두 발굴 공개돼서 이 방면의 연구에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導이번
4월의 월례법회는 이렇게 望外의 소득이
있었으니, 이 모두 부처님의 기피에 말미암았음을
감사하고 새삼 합장 頂禮한다
불자탐방 박물관
정향란 선생님 / 편집부
온방골
캠퍼스 안에 푸르름이 가득 차 있어 봄의
향기보다는 싱그러운 초여름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 경주는 봄이 짧다. 봄인가
하면 곧 여름이다. 교내의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고 있는 가운데 도서관
안에 위치한 박물관을 찾았다.
이번
6월호에는 개교 90주년 기념 장기근속
상과공로상을 받으신 분들 중에서, 한
부서에서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자리매김하신
박물관의 정향란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경주 외곽의 아파트지역
발굴작업이 한창이라 사무실에는 정향란선생님만
계셨다.
먼저
이번에 장기근속상과 공로상을 타신 것을
축하드리며 상 타신 소감을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정선생님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근속상은
10년이 되었으니 받지만, 공로상은 사실재가
받기는 과한 상입니다, 우리 직원들 중에
저보다 더 많이 열심히 일한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어떻게 공로상을 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좀 부끄럼타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박물관이 설립된 초창기에는 직원이 없어서흔자
일을 다해야 했지만 지금은 연구원과 조교,
근로학생 등의 인원이 늘어나서 처음보다는
덜 힘들며 아무런 일도 안 했는데.. 하며
송구스러워 하신다.선생님과 동국대학교와의
인연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학생으로 학교에 다니다가 졸업 후엔 박물관의
조교로 근무하다가 학교에 적을 두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 곳
경주캠퍼스불교미술학과 2회 졸업생으로
불교미술을 전공했다.'처음에 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례기는, 박물관 개관시기가
제가 졸업할 무렵이었습니다, 현재 고교미술사학과의
장충식교수님이 그 당시 불교미술학과의
교수님으로 계셨는데 박물관 개관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우리 박물관 특색이 불교유물을
주로 전시하고 불교관계만 연구합니다.
제 전공이 불교미술이고 사찰에 많이 다니며
접하다 보니 그런 인연으로 박물관조교로
들어온 것 같아요.'
처음
박물관 개관 했을 때는 도서관 4층에 전시실과
사무실이 있어 장소도 협소하고 불편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이
1층으로 내려오고 불편한 사항이 많이
개선되어 편리하다고 한다.
박물관에
있으면 발굴작업이 많을 것이라 여겨져서
학교의 발굴상황에 대해서 여쭈니
'박물관
초창기에는 발굴을 거의 안했어요. 주로
불교유적관계 지표조사나 야외 유적답사
같은 것을 많이 갔어요, 근래 2-3년전
부티 경주시내 발굴을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학교부지 내의 석상사지만 발굴을 한번
했습니다. 최근 2-3년전부터 발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경주지역이 발전하고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부터 상대적으로
유적 훼손이 많아지면서 박물관에서 발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경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유적이 많고 땅 속에
숨어있는 유물이 많아요. 요즘은 아파트
공사중에 발견된 유물을 발굴 중이라 연구원과
조교, 근로학생까지 현장에 나가 있어요.'
지금은
초창기와 달리 현장에 자주 나가지 않고
사무업무만 전담하고 현장과 신속한 연락
등의 편한 업무만 하고 있다며 잔잔히
웃으신다. 그래서 직접발굴에 참여한 일과
그때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처음
박물관 개관하고 나서 석장사지를 발굴할
때는 직접 참여했는데 요즘은 직접적인
참여는 안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86년도쯤에, 신라 석장 사지라고 여학생
기숙사 안쪽으로 들어가면 옛날 寺地가
있는데 그길 발굴할 때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왜냐면 제가 발굴을 처음 접한
것이 그 석장사지발굴할 때었거든요. 그
때는 한 달이 30일이면 비오는 날 빼곤
매일 발굴현장에 나갔어丸 그 때 고교미술학과가
처음 생겼는데, 고이사 1학년 모두랑 저랑
장충식교수님, 이희준교수님이 참여했는데,
그 당시 저희들은 모든 것을 젖혀두고
발굴에 매달려 있었어요.매일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래도 그 당시에는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아, 박물관은 이런
일만 하는가보다. 발굴은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비록 몸이 피곤해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고,교수님들도
매일 나오셔서 일하고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여겼어요. 그때 고이사
1회졸업생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학생들이 모든 일을 손수 다 했어요. 지금도
교수님과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해요. 요즘은
그렇게 발굴을 안 하거든요. 인부도 쓰고
휴일에는 쉬고요. 경비도 여유있게 나오고.그
당시엔 발굴 경비도 적었고 인부도 거의
안 쓰고 식사도 직접 그 자리에서 해 먹고
기숙사식당에서 밥해서 하루 세 번씩 나르고
모든 잡일을 학생들과 같이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 학생들과 천해요.'정선생님은
그때가 고생은 되었지만 되돌아보면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것보다는 즐겁고 재미있었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며 다시 현장에 직접
나가서 일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나가겠다고
하신다.
전공으로
인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선생님은
신행생활도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 가정에서의
신행은 어떠하신지 여쭈어보았다.
'신행생활을
별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고, 제가 불교를
알게된 것도 전공공부를 하면서부터입니다,
제 전공이 불교미술이다 보니 집에서도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고 또 불화 작업에
들어가면 우선 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나서 깨끗한 마음으로 그림에 임합니다.
처음에 그렇게 배웠어요. 마음가짐을 늘
바르게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곧 그것이 신행이라고 봅니다,'
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신행생활의 시작이라는 그 말씀에 기자도
나 자신은 어떻게 신행에 임하고 있는가
하고 돌아보게 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 말씀에서
진솔한 불자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학창시절
유적답사를 하면서 佛毛,을 키운 선생님은
수계도 유적답사 나가서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수계는
대학 3학년때 부적답사 다니면서 받았는데
내장사의 도문스님께 받았어요. 그때는
初發,已,때라 매주 사찰 다니면서 불화를
그리고 공부도 했어요, 제 선배 중에 도문스님
상좌가 한 분 계셔서 구절에 가게 되었는데
며칠 기도 하고 나서 도문스님이수계를
해주셨어요. 법명은 문수형이라고 지어
주셨어요. 그때는 뜻도 모르고 받았는데
지금은 너무 거창한 뜻이 내포된 법명인
것 같아요. 그때 수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도문스님과는 자주 만나뵙게되었어요,'
마지막으로
동국대를 졸업하신 선배님으로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드리니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신다.
'저희들때는
무엇을 하던지 열심히 했어요. 결과만
바라지 않고 그 과정도 중히 여겼어요,
열심히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너무 앞을 내다보고 계산적인 행동만 해요.
노력 없이 좋은 결과만 바라고 있어요.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도움을 주는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학창시절에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실력을 쌓으면 자기의 미래는 밝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부단한 자기노력만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얼마전
정향란선생님은 정각원에 직접 그리신
불화를 기증해주셨다. 「高麗 觀艇十六觀變相」이라는,
선생님이 86년도 제10회 불교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작품이다. 覩撫量壽傘篁의
전체적인 내용을 쉽게 풀이하여 도살한
그림이다. 심협을 기울여 그리신 작품을
정각원에 주셔서 고맙기 그지없고 앞으로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정향란 선생님이 떠오를 것 같다,
열린마당 더불어
사는 세상 / 최경희 (불교학부 조교)
내가
경주와 인연을 맺은 지도 5년을 지나 6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그전에 나의 기억 속에서의
경주라는 도시는 초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지라는
정도로밖에 인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4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나머지의 생활도
경주에서 하고 있으니 이 땅과의 인연이
보통의 인연은 아닌가보다.
처음
경주에서의 대학생활은 지금 내가 경주생활에서
느끼는 포근함과 달리 이 땅이 나에게
주는 낯설음으로 인하여 소외감 때문에
괜스레 혼자 외로워 하며 방황하던 시기였다,
이때 한 친구의 적극적인 권유로 '마음소리'라는수화(手話)동아리의
창단멤버로 활동할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마음소리'
는 수화(手話)를 통한 불교포교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나 나는 그러한
큰 목적보다는 친한 친구와 앞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더 많은 시간들을 이유로
활동하게되었다. 염불 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철부지 였던가보다.
처음
불순한(?) 동기로 시작한 일이라서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져서 정각원으로
매주 수화(手饍)배우러 다니는 일이 귀찮아져서는
농땡이를 부리게 되었다. 그때 마음소리를
함께 시작한 인원이 100명을 웃돌았는데
1
년후
10여명으로 대폭 줄어 든 것을 보면 불순한(?)
동기로 시작한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동아리 활동이 시들해져 있을 무렵에 제1회
수화발표회를 가지게 되었고 평소 부르던
찬불가와 당시 유행하던 가요도 수화로
배우면서 점점 더 수화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하지만 배운 수화를 누구에게 활용을
한다든지 봉사해야한다는 사명감 없이
그저 수화만 배우는데 그쳤던 나의 생활이
수화발표에서의 직접농아 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바뀌어 갔다.그때 우리에게 수화(手話)를
가르쳐 주시던강주수 선생님 (그때 부산에서
경주까지 매주 오셔서 무료로 우리에게
수화를 가르쳐 주셨다)께서는 농아를 한
사람씩 소개 해주시면서 이들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는 우리와 같이 수화를
배우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배워 평소 이들이
전달 받지 못하는 정보를 전달해 준다든지
정상인과의 대화가 가능하도록 수화 통역자가
다리가 되어준다면 이들의 장애는 장애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시며 또 말씀하시길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의 농아인의 수는
약30만명에 이르며 이들 대부분은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외로움과 소외의 그늘
속에서 사회생활과 유리된 채 자신의 장애를
비통해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그들의 비통은
자신의 장애를 비통해 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그들의 비통은 자신의 장애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무관심에
의한 것이라한다.
요즈음
TV 뉴스나 광고를 보면 수화 통역자가
나와서 수화 통역을 해 주는 등 농아 인들에게
약간의 배려를 해 주고 있지만 뉴스 오른편
하단의 조그만 공간조차도 정상인들은
용납해줄 수 없었던지 방송국에다 눈에
거슬린다고 없애자는 제보를 한다고 한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이기적이고 삭막해져
간다고 해도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고 보살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인간이 살아가는데에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시며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살아가라고 당부 하셨다.그리고
한 농아인은 자신을 욕하는 소리타도단
10분만 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10분이
과욕이면 단 3분만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비록 듣지 못하고 말하진 못하더라도
수화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손이 있고 남
도움없이 걸어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나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예전에 부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장애가
너무도 비참하여 정상인을 만나기도 싫고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이 울분 때문에 사람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안정되지 못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접하면서
부티는 나의 장애도 전생의 나의 업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고 매일 치밀어 오르는
울분도 인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해졌다.그리고 매주 절을 찾아가
법회를 하고 83년에는 '백화도량'이라는
한국 청각언어 장애인 불자회를 만들어서
좀 더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은
법회 때 통역을 해 주는 불자회를 만들어서
좀더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은
법회 때 통역을 해주는 불자 통역인들이
부족해 안타깝다며 나에게 수화공부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을
보면서 게으르고 나태한 나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정말로 장애인은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으로 그들과 마주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나 스스로 나의 마음 속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화(手話)공부도 열심히
하게되었고 스스로 힘든 일이 생기면 그들을
생각하면서 인내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으니
그들이 나의 참 스승이 아닌가 한다.
가람의
향기 분황사 / 편집부
不可論異故
可孑孕訛易同
平可訛同故
可t튱讒是異耳
위
글귀는 원효스님이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에
나오는 글이다. 이번 6월호에는 '원효
문예 대제전'이라는 행사를 거행한 경주
분황사를 찾아 보았다.
분황사는
전불시대(前1弗時代)의 가람 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년)에 용궁(龍宮)의북쪽에 건립된 사찰이다.
황룡사 지와 마주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복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창건설화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않아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 . 당(幢)
. 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最桎疏t
『금광명경소金光明桎磁』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의교학(敎學)을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펴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法城)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藩莘賈悤)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그 소상히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또한 이 곳에는 솔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의 그림은 희명의 「도천수대비가麝千手大悲哥」의
배경이기도 하다.
원효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소년시절에는 화랑의
무리에 속하였으나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자기 집을 헐어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세웠다. 648년 황룡사에서 출가하여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겠하였다.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여
한국 불 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스스로 정진중 의상과
함께 도당(度唐)의 길을 떠난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돌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후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는데
이실계(失戒)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스스로 복성거사( 卜陸居士)
또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다가 어느 광대의 춤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
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r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하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무애가旅碍哥」 라 부른다.
원효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 아니라,
민중 교화 승으로서 당시 귀족불교를 민중
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한문준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가 숙종6년(1101년)에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기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역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뒤 몽고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종각(錘閣)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등이
있다. 이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634년
분황사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기단(基壇)은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이며 현재 탑
신부는 3층까지 남아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을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 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산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요 닫게 하였다. 인왕상의 조각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의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金正횹)가
이를 확인하였고 현재비대에는 '此新羅和淨國師之碑蹟'
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 되어
있다. 또 탑 옆에 있는석정은 삼룡변어정(三籠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다. 우물 들의
외부는 8각,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8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지난
5월 16일에서 17일 양일 간에 걸쳐 '원효
문예 대제전'이라는 행사가 원효 학연구원주관하에
분황사를 비롯한 황룡사지 및 경주시내
일원에서 행하여 졌다.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라는 부제하에 행해진
이 행사는 원효사상의 세계사적 의의를
밝혀 드러내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민초들의 생활속에 그 사상과
정신을 널리 확산, 불교의 대중화를 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16일 원효성사의 입적1,310주년
기일에 올려지는 몽찬대계를 필두로시작하였다.
이번 행사는 원효스님의 사상만 강조하는
학술세미나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시민들과
함께 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로 펼쳐졌다는
것과 원효스님의 일심 .화쟁 .무애사상,
그 가운데서도 거리낌없는 노래와 춤으로
대승보살도를 실천했던 무애가무행(撫碍哥務行)을
재창조함으로써 무애가무의 현대적 의미를
되살려 이를 시.노래.음악.춤.극 등의
총체적 민족예술 한마당으로 펼쳐졌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보여진다.
불교
건강법 견비통 / 김장현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목
뒤 부분에서부터 어깨 팔꿈치에 이르는
통증을 호소하면서 몹시 당황해 하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치료를 받으리오는
경우가 많다. 대개 증상은 은근히 시작되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차츰심해지는
경우이고, 외상 후 일정시간이 경과한
다음, 돌연히 통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어깨관절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동통의 증상을 견비통이라고 하는데, 통증은
관절 또는 상박부 내측에서 자바퀴를 때때로
느끼며, 누르면 동통이 나타나고 통증이
팔꿈치나 등쪽으로 쭉쭉 뻗어나가 방산
되며, 시린감, 열감과 바늘로 찌르는 듯하다는
표현을 한다. 심하면 팔을 들어올리는
동작이 어려워지고 운동장애 등이 나타나고
야간에 이리는 듯한 통증으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며 때로는 목 뒤 부위의견인 통으로
고개를 자유롭게 들릴 수가 없어 일상생활을
수행하는데 매우 불편한 증상이 된다.
견비통의 원인에는 외상 등으로 인한 견관절의
어혈(비활성 혈액의 저류로 인한 염증),
견관절 주위 조직의 퇴행현상으로 범 발생적인
순환장애, 류머티스성 관절염 등 단발성
관절염증과 또한 경추관절의 이상으로
인한 견비통의 증상이 있다. 젊은 층에서는
주로 바르지 못한 자세가 원인이 되어
발병하는데, 가령 장시간 동안 의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의 경우 앉는 자세가
나쁘다면 어깨뿐만 아니라 허리에도 여러
이상이 발생할 수 있다.
찬
바닥에 어깨 관절을 대고 장시간 잠을
자거나, 또 버스나 지하철에서 조는 경우
대부분 경추에 나쁜 자세를 만들게 되어
목 뒤와 둥 및 어깨에 이르는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 경우 신경 경로에 물리적 압박이
일어나면 팔과 손에까지 연결되는 방산동
또는 저라는 증상이 동반되기도 한다.
견관절의
과로로 약해진 상태에서 찬 곳이나 습진
곳에 노출되어 순환장애가 일어나고, 어혈이나
비생리리적인 체액인 담이 뭉쳐, 근막이나
인대의 염증을 일으켜 통증이 발생되는
경우에는 운동을 하지 말고 충분히 휴양을
시키며 뜨거운 찜질을 하는 것이 좋다.
이런 경우는 무리를 하면 증상이 더욱
심해지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장년 층에서
임상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증상은 신장의
정기와 간장의 협부족한 상태에서 견관절의
무리한 사용으로 어깨 주변에 순환장애현상이
일어나 통증을 유발하는 증상이다. 이
경우에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전격적인
통증과 필운동의 제한이 일어나고, 야간에
자려고 하면 더욱 쑤시는 증상이심 해지는
괴로운 증상이다. 운동시 통증이 심하기
때문에 가급적 움직이지 않으려 하나,
오히려 수동적으로 관절운동을 충분히
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혼자 하는 운동의
요령은 팔을 고정시켜 놓고 몸을 움직여
관절운동을 하는 방법이 편리하다.
견비통의
예방으로는 평소 스트레칭과 같은 체조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인제는 움직여서
부드럽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여야만 건강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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