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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4월호 / 통권 22호 / 불기 2540(1996)년 4월 1일 발행

 

 

 

 

고승법어

깨달음과 현대 생활/오녹원 큰스님

 

전등이야기

불사선 불사악/정성본스님

 

정각도량

용기 있는 대장부/이법산 스님

 

정각논단

자연과 함께/윤주억

 

신행상담

평등심/장계환 스님

 

교리강좌

일심의 양면/정승석

 

경전의 세계

유마경/이만

 

동국과 불교

부산 피란 시절의 동태/이봉춘

 

비유와 설화

왕을 사양하는 형제/조용길

 

불자탐방

경주병원 조규옥 서무계장/편집부

 

불심의 창

봄을 맞는 창가에서/유인수

 

가람의 향기

화엄사/편집부

 

불교 건강법

땀 이야기/김장현

 

열린마당

미륵 부처님/이윤배

 

신행 단체

동림회/편집부

 

 

 

고승법어

깨달음과 현대 생활 / 녹원 큰스님


오늘 우리 대학의  총수이신 송석구 총장님을 위시하여 여러 사부 대중들과 함께 개강 법회를 갖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부처님의 크나 큰 은혜로 생각해 마지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항상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또한 마침이 있는 것이 흡사 기차가 출발역을 떠나 선로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과 같아서 처음 떠나는 것도 의미 있고 중요하지만 또한 선로를 따라서 달려가는 과정도 떠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떠나는 그 과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의 성취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며, 또 우리 모두가 희구하는 인생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나마 떠나기 전에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또 떠나서 중간 과정에서 사소하게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목적지에 거의 다가가서 단 몇 초 전에 좌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와 같이 뜻하는 바대로 목적하는 바대로 순리대로 성취되는 일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의문이 됩니다. 또, 더러는 이런 문제를 두고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로 치닫게 되고 또, 더 크게 나누자면 지옥과 극락으로의 분계선이 그어지기까지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신의 조화로써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생각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며, 행복과 불행, 성취와 좌절 이것은 모두가 우리들의 자심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므로, 각각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자심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매우 쉬운 문제인데 이 자심에서 일어나는 문제라는 확신을 갖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두고 어떤 종교에서는 모두가 신에게 구원을 희구하면 그 모든 것을 구원받는다고 하고, 또한 우리 인간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힘을 가진 어떤 특정계층에게 있다면 절대적으로 거기에다 기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교리를 가진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 종교들은 내 자신 밖의 차원에서 어떤 힘을 이끌어와 자기가 희구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르다는 점을 찾을 수 있고, 또 불교만의 다른 교리의 특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팔십 생애를 세상에서 머무르셨습니다만 지수화풍의 사대로 구성된 육신, 육신이라는 것은 성인의 육신이든지, 우리 범부의 육신이든지 간에 다 인연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인연에 의해 구성된 물체는 자연물이든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육신이든 모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한 시간 한 공간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변해서 사라지는 것, 마치 바다의 파도가 본래 물인데 바람으로 인해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났다가 다시 바람이 조용해지면 파도는 다시 또 물로 돌아가 원점이 되듯 그 파도라는 형상은 본래 바람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바람의 작용으로써 파도를 잠정적으로 일으켜 파도라는 것을 형상으로 모양을 만들어 우리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또 파도라는 형상이나 눈에 보이는 모양도 바로 우리가 그것을 보는 겁니다. 또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초적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과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정각원에 법산 원장스님이 법문 제목을 “깨달음과 현대생활”이라 붙이신 것 같은데 대단히 거창하게 붙여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음과 현대생활, 요즘을 과감히 말하자면 무엇을 자신이 깨닫기 전에 타인의 깨달은, 아까의 말씀과 같이 다른 특정 종교, 이 특정 종교와 같이 우리 마음 밖의 전지전능한 위대한 신이 있어 그 신만이 절대자여서 인간은 신의 절대적인 지배릎 받고 구원을 받아야만 할 존재로서, 상대적으로 우리 인간과 신이 격리되어 있는 종교는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자이고 우리 인간은 절대적인 신의 지배를 받아 단지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라면 희망은 영원히 상실되고 맙니다.

크게 역사의 창조는 인간입니다. 깨달은 부처님과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는 중생과 깨달은 진리, 이 세 가지를 불교에서는 근원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물이 바람으로 인해서 파도가 생겨나고 바람이자고 나면 다시 물로 되돌아가듯 그 근원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원효스님은 이렇게 예기했습니다. “화쟁일심하여 하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 중생을 위해 이익을 끼치려면 얼마든 무진장 끼치게 된다. 그래야 중생에게 이익을 끼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구족 하게 가지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원력 나오는 데로 생각 나오는 데로 중생에게 이득을 다 펼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자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말을 覺者라. 깨달은 분이다 할 때는 자질이고, 자기가 스스로 능력을 갖추어 깨닫게 한다는 것은 이타입니다. 그것은 남을 이익케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자기만이 알아서 수용하는 불교는 소승적이고 자기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대승적인 이타가 바로 대승적입니다. 오늘의 이런 시대일수록 자리이타심의 원력을 갖고 원효스님 같이 환기일심하여 이익중생하는 불교 본래의 모습이 등장할 때가 왔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깨달은 법과 부처님의 후보자인 스님네들이 도리를 행해 가는 이것을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데 삼보를 재가불자들은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삼보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곁에 계신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남기지 않으셨다면 부처님의 육신은 가버리고 나면 알 도리가 없고, 또 부처님의 법이 여기 있다 하더라도 그 법을 선양하는 스님들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존재물로 남을지언정 오랫동안 존재물로써 관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이 되려고 하는 후보자의 스님네들, 이것은 세 가지의 보배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귀의를 할 때 스님네들께 귀의하겠습니다 하고는 스님네들도 화식먹고 대소변 보는데 거기에 귀의할게 뭐 있어! 하는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스님네들을 하나의 육신인 인격체로 볼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사명감, 그 분이 걸어가고 있는 성스러운 길, 이런 걸 말하는 것이지 스님네들 개인적인 육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개인적인 인격체로서의 스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저 스님들은 부처님이 하신 그 일을 사명을 가지고 수행해 가고 있는 부처님의 후보자로서만 믿고 따라야 합니다.

불교가 갖는 종교성은 하나가 아닙니다. 나 하나 잘 난 것이 아니고 전부가 너도나도 모두 하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하나의 불성은 무어냐? 그것은 바로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또, 살리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더불어 사는 원동력입니다. 자연도 될 수 있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인간도 될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다 이 불성에서 비로소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든지 간에 해롭게 하는 것은 내 자신의 생명을 그만치 끌어내 버리는 것이고 그만치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다. 곧 세계 인류가 하나고, 이 지구촌이 전부 한 울타리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화합성이고 불교의 평등성입니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의 현대적 의미란 불교의 실천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여 여러 사부대중들이 열심히 수행하시기를 깊이 바랍니다.

 

 

 

 

전등이야기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정성본(불교문화대학 교수)



黃梅山 五祖弘忍선사의 문하에서 慧能이 깨달음의 詩偈로 敎授師인 神秀를 물리치고 홍인의 불법과 袈裟를 물려받고, 스승의 친절한 전송을 뒤로하며, 고향인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혜능의 뒤를 추적해온 慧明과 大庾嶺이라는 고개에서 만나게 되어, 행자의 신분으로 혜능 최초로 법을 전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조당집』홍인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行者(혜능)는 남쪽으로 내려 갔다. 弘忍禪師는 절로 돌아와 사흘이 지나도록 전혀 說法을 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大衆이 질문했다

‘스님의 法을 누가 전해 받았습니까?’ ‘나의 法은 이미 嶺南으로 갔다.’

神秀가 질문했다. ‘누가 스님의 법을 받았습니까?’ ‘能한 이가 얻었느니라!’

대중이 잠시 침묵에 잠기어 생각하다가 盧行者가 보이지 않음을 알고, ‘혹시 노행자가 法을 받은 것이 아닌가?’생각했다. 그때 700명의 대중이 동시에 노행자의 뒤를 쫓았는데, 그 중에서 慧明라는 스님이 제일 먼저 大庾嶺에 도착하여 살펴 보니 마루턱에 袈裟와 鉢盂가 놓여 있는 것은 보이나 노행자가 그 곁에 있지 않음을 보고, 가까이 가서 그 衣鉢을 손으로 주워 들려고 했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혜명은 자기의 法力이 부족한 줄 알고 산으로 들어가 행자를 찾았다. 행자는 높은 벼랑 위에 앉아서 慧明을 보고 곧 자기의 衣鉢을 뺏으려고 온 사람인 줄 알고 말했다.

‘和尙께서 나에게 祖師의 衣鉢을 주셨소. 나는 굳이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화상께서 두  세 번 거듭 받으라고 하시기에 부득이 가지고 오긴 했으나, 지금 저 고개 마루턱에 있으니 상좌께서 원한다면 가지고 가시오.’

그러자 혜명은 ‘내가 여기까지 쫓아 온 것은 衣鉢 때문이 아니라 특별히 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행자께서 五祖弘忍화상을 하직 할 때에 어떤 密語가 있었습니까?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노행자는 혜명의 求法이 간절하고 진실임을 알고 그에게 說法했다.

‘조용히 생각하고 잘 思慮하되 善도 생각하지 말고, 惡도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 혜명상좌의 참된 面目을 보리라!’

혜명이 다시 물었다. ‘홍인화상의 密語와 密意는 지금 말씀하신 그 것 뿐입니까? 아니면 그밖에 다른 뜻이 있었습니까?’

‘내가 이제 분명히 말했으니 비밀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자기의 本來面目을 스스로 얻으면 비밀은 도리어 그대에게 있다.’

이에 혜명은 ‘내가 비록 홍인 화상문하에 출가 했지만 참된 宗乘(조사선의 가르침)의 面目은 얻지 못했었는데 이제 행자께서 지시해 주신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행자께서 나의 스승이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道明이라고 고쳤다.

혜능의 법문은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에 혜명상좌의 본래 면목이 드러나게 된다」라고 하는 이 한마디이다. 『六祖壇經』에서도 「不思善 不思惡 都莫思量」하라는 법문이다. 善과 惡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개념이다. 이 말은 즉 일체의 사랑분별과 차별심에서 벗어나 한 面目이 드러나게 되는 선불교외 실천정신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법문이다.

 

 

 

 

정각도량

용기 있는 대장부 / 이 법 산(서울캠퍼스 정각원장)



자연에 순응하는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나 인위적인 사회는 괴로운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스스로 짓고 자신이 받는 것이다. 천지조화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것이므로 순응하는 자연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을 가리키지만, 인간 사회는 욕심에 따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파괴하므로 균형을 깨뜨리고 형태를 바꾸어 자기 편리한 대로 사용하려 함으로써 무리한 욕구의 실현에 의한 고통과 불행의 결과만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연의 이치는 진리이고 도(道)이므로, 여기에 순응하면 자연히 아름다워지고, 이를 거역하면 당연히 괴로워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조작하여 바꾸고 파괴하여 뒤집어 놓고, 결과적으로 닥쳐온 괴로움만 원망하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하여 지은 원인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나만 재수없이 당하고 억울하게 손해보는 피상적 원한만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바세계란 인고(忍苦), 즉 괴로움을 참고 사는 세계라는 뜻이다. 사람이 악업을 짓고 그 망상의 업 때문에 괴로움의 과부를 받지만 참고 감내해야 하는 사회이다.

괴로움을 받는 이 사바세계가 즐거움만 있는 극락정토가 되자면 악업을 지은 중생 스스로가 괴로움을 받는 현실을 충분히 참아 내어 새로운 선업을 지어 즐거움의 선과로 정진해 나아가야 한다. 달마대사는 ≪이입사행론≫의 보원행(報怨行)에서 괴로움을 만나거든 걱정하지 말고 달갑게 받아쳐야 한다고 하여 인수(忍受)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 업장이 소멸하고 업의 과보를 다 받아 넘기다 보면, 받을 과보도 없어지고 새로운 선업의 과보가 찾아와 자연히 괴로운 사바를 벗어나 극락에 태어나게 되고 중생의 탈에서 벗어나 부처로 변성하게 되므로 해탈(解脫), 열반(涅槃), 성불(成佛)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최후로 남기신 ≪유교경≫에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 사지를 갈기갈기 찢는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가져서 성내지 말고, 또한 입을 깨끗하게 지켜 나쁜 말을 하지 말라 성내는 마음을 그대로 놓아두면 자기의 도(道)를 스스로 방해하고 공덕과 이익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참는 일이 덕이 되는 것은 계(戒)를 지키거나 고행하는 일로도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참을 줄 아는 사람이라야 용기 있는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

사바세계에서 참을 줄 모르는 사람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소위 대장부라면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판단할 줄 알고 스스로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어느 시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 온 뒤에 비로소 소나무의 지조를 알 수 있고(雪後始知松柏操)

일이 어려울 때 바야흐로 장부의 마음을 볼 수 있다(事難方見丈夫心).


굳건한 인내력은 장부의 줏대이다.

욕심이 나도 참고, 성이 나도 참아야 한다. 욕심과 성냄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남의 꾸짖음을 감로수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도(道)에 들어선 지혜로운 사람이다.

성냄은 착한 법을 부수고, 좋은 명예도 헐어버리고, 재물까지 흩어 버리며, 친한 사람도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유교경≫에 또 말씀하셨다.


“성내는 마음은 사나운 불꽃보다 더 무서운 것이니, 항상 막고 지켜서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공덕을 빼앗는 도둑으로는 성냄보다 더한 것은 없다.”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즐거움의 가치를 인식할 줄 알고, 가난해 본 사람이 재물의 귀한 가치를 안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달게 받으며 괴로움의 근원을 알 수 있을 때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방편이 나올 수 있다.

벼락부자는 깜짝할 사이에 망할 수 있다. 또, 쉽게 모은 돈은 헛되게 날아갈 수 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알려는 생각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장부라면 쉽게 사는 세상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렇게 원한다면 대장부가 될 수없다. 결코 일이 어려울 때 비로소 기도도 되고 외로울 때 친지의 귀중함을 알 수 있다. 병을 앓아 본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오백생의 인욕행을 하고 전지전능의 위대한 중생의 스승인 불타가 되었다고 한다.

물질의 풍요만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물질의 풍요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위대한 대장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체 욕심과 성냄의 놀음에 놀아나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우주를 정복하고 지구를 마음대로 주물러 조작하려 하여도 인간의 힘은 언젠가는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자연의 보복은 인과응보일 따름이다. 덮고 자는 이불에 오줌을 싸고 방바닥과 벽에 담뱃불을 지지고 꽁초를 버리면 더러워지는 것은 자기 몸이요, 썩어 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과다한 욕심을 부리면 결국 모두를 잃게 될 것이고, 괜한 것에 성질만 부린다면 쓸쓸한 벌판에 피골이 상접한 처참한 모습으로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일체 중생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듯이, 남녀 귀천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장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면 우리 모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출격대장부가 될 수 있다. 부모와 스승과 선배를 믿고 올바른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 장부의 길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부처님께서 남기신 위대한 장부의 길을 부지런히 닦아간다면 사바세계는 극락으로, 졸부는 장부로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정각논단

자연과 함께  / 윤주억(식품공학과 교수, 생명과학연구소장)



물건을 소중히 아껴쓰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좋은 물건들을 싼 값으로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다 그것을 사서 소비해 주지 않으면 사회의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만다. 사서 쓰고 버리는 시대로 되었다고나 할까. 물건을 아껴서 오래오래 쓰도록 하려면, 경제생산활동도 질의 향상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빌린 돈의 상환연한은 짧게 잡혀가고 있고, 경제 사이클은 계속 가속화 되어가고 있다. 써서 망가지기 전에 먼저 고장이 나고, 그것을 수리하는 것 보다는 새것으로 바꾸는 편이 싸고 덕을 보게끔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다. 길바닥에 차를 버리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안타깝다. 이러한 일들이 곧 환경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한번 물건이 만들어지면 그 뒤처리가 필요함은 가정에서 식사를 마련해 낼 때나,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낼 때나 매한가지다. 생산하는 쪽이나 그것을 허가해 주는 쪽이나 또 이용하는 쪽이 뒤처리 문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자연파괴라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율(因果律)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업(業, 행위)의 응보(應報)는 스스로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불전(佛典)에서도「소욕지족(小慾知足)」을 가르치고 있다. 「존경과 겸손, 감사와 만족」그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마하 만가라)이라고 원시(原始)불교성전은 가르친다. 거기에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우리 주위환경을 더욱 더럽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불시대에 걸맞게 많은 차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운전중에 교통신호로 차를 세무고 기다리다 보면 담배꽁초나, 빈 깡통, 휴지 등을 차창 밖으로 내던지는 운전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공중도덕이 이처럼 사라져버린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적어도 우리 한국인의 문화에는 유럽에서 찾아보기 힘든 「부끄러움」의 의식이 있음은 많은 외국인들도 평가하고 있는데 말이다. 부끄럽다는 의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권리의 주장이 그 근원으로 생각된다. 전철이나 버스의 좌석에는 누구나 앉을 권리가 있다. 나이 많은 이가 앞에 서도 태연하게 발을 뻗고 만화책에 빠져있는 젊은이를 볼 수 있다. 똑같은 돈으로 승차권을 샀으므로 어디에든 앉을 권리가 있으며, 앉아서 안 된다는 법률도 없다. 공공 교통기관에 경로석을 마련해본 것도 이러한 권리주장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권리주장을 할 수 없는 늙은이는 거의 경로석에 앉을 수 없다.

부끄러움의 의식은 유교도덕의 영향도 크다. 불교에서도 사지(四知: 天知,地知,子知,我知)와 같은 사상이 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일을 생각할 때, 긴 세월을 지나면서 문화로서 뿌리를 내린 이 부끄러움의 의식을 다시 한번 환생(還生)시켜야 될 것 같다.「자전의 전환(自轉의 轉換)」을 대승불교의 학승 샨티데바(寂天)는 불교 최고의 가르침이라 하였다. 남과 자기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이 사상은 이미 원시불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나의 일이라 생각하고 남을 사랑하며,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남을 위하는 행위를 보살행위로 본다. 그러나 이상적(理想的)인 이타행위(利他行爲)도 자기부정으로까지 되어서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현대를 사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타리즉자리(他利則自利)」, 말하자면 남을 살리는 것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바로 그대로이다.

원시불전의 가르침은 재가(在家)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지키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어찌보면 재가자(在家者)들을 차갑게 떼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출가수행자를 위한 가르침으로서, 재가자들에게는 그들에게 알맞은 가르침을 따로 내리고 있다. 출가자들처럼 언제나 엄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재가자들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날을 잡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지켜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팔재계(八齋戒)(재가자들이 정한 날에 스스로를 반성하고 8가지 계율을 지키는 일)도 그 하나이다. 동국대학교에서는 자가용차의 이용을 자제하는 날을 정해 놓고 있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이다. 이러한 일은 불교의 재계에도 통하는 것이다. 여기에만 그칠것이 아니라 모든 생활속에서 자발적으로 에너지 절약에 협력하는 일이 곧 바로 환경보호에 이어지는 일이다.

인도 어느 지방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야자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고 한다.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람을 살게 하는 자연도 늘인다는 생각이다. 참으로 뜻이 깊은 삶의 지혜이다. 선진국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일이다.

지구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후진국의 폭발적인 인구증가 문제를 놓고, 한때 교황청은 성욕을 억제하면 된다는 해결책을 내놓은 적이 있다.

종교적인 견지에서 보면 틀림없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력이 있을런지 의심스럽다. 중절문제(中絶問題)도 유럽사회에서는 종교적인 해결을 보지 못한 상태이다. 이유는 신이 창조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일로 되기 때문이다.

며칠전 TV뉴스에서 미국 북부의 어느 주에서는 수렵으로 말미암은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사슴으로 잘못 알고 사람을 쏘는 사고가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냥꾼 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냥은 신이 내린 인간의 권리이다」라고 수렵채집으로 생계를 잇는 것도 아닌 사람마저 권리로서 주장한다, 그것은 신이 부여한 인간만의 권리라고 말이다. 이 또한 휴맨(인간) 본위주의(本位主義)이다. 사람의 오락이나 레저까지도 신이 내린 권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은 동물애호를 부르짖고 있지만, 본래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동물애호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육식을 엄하게 금한 중세의 카타리파등이 이단시(異端視)되어 박해를 받은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다.

석가모니는 육식 그 자체가 비린내 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맛 좋은 것만 찾아 헤메며, 옳지 못한 일이나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비린내 난다고 하였다. 불살생(不殺生, 아힘사)은 바라문교, 불교, 자이나교 모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한다면 내 목숨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한때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자들이 그것을 지켰다. 단식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칭송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는 고행을 그만두었다. 고행으로 삶을 끝내기 보다는 현실을 바르고 옳게 살아가는 방향에서, 인간들이 지켜야 할 법(法)을 가르쳤다. 사람들은 남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목숨마저 뺐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자각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의 정을 더욱 불러일으켰으리라. 그러한 종교적인 반성(참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목적이나 의의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개인의 힘을 넘는 집단의 힘으로 일으킨 행위를 불교에서는 「공업(共業)」이라 말한다. 공업에 대한 보답은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받아야 한다. 전쟁이나 환경오염은 공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업에 대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깊은 반성이 없으면 그것은 자꾸만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업은 행위이며 활동이다. 그 결과로서의 응보(応報)까지를 포함해서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업을 짓게 마련이다. 자업자득( 自業自得)의 응보 사상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현대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해치지 않고, 파괴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자연을 재생시키고 부활시켜 가는 것이 인간이 살고 그 삶을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함에 있어서 지켜야할 최선의 길로 된다.

불교의 법(法, 달마)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일을 말한다. 인간은 도덕행위의 주체이며, 스스로가 자각해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당체(堂体)이다. 사람으로서 깊은 반성은 우리들을 살아가게 해주는 위대한 자연에 대하여 감사와 존경하는 마음을 일깨워 준다.

「존경과 겸손, 감사와 만족, 그리고 적당한 때에 가르침을 받는 것....... 그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다.」부처님 말씀(숫타니파타)에서.

 

 

 

 

교리강좌

일심의 양면  / 정승석(불교대학 교수)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된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멀리 성인들에게서만 구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태우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며, 피를 뽑아 경전을 쓰고 팔만대장경을 줄줄 외며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보조 국사는 「수심결」(修心訣)에서 마음의 중요성을 이토록 강조하기 직전에,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뼈와 살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라고 전제해 두었다. 여기서 보조 국사가 ‘한 물건’이라고 표현한 ‘참마음’은 부처와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마음이며,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일심’(一心)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어에서 일심은 어떤 일에 오로지 몰두하는 전념, 또는 합심하여 일을 도모하는 협력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보조 국사가 열변으로 가르치는 취지에서 의하면, 불교에서 일심은 진리의 깨달음을 위한 마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듯 하다.

경전의 문구 중에서 일심을 표방한 것으로는 화엄경에 나오는 소위 ‘삼계유심’(三界唯毛,)의 게송이 유명하다. 즉 ‘삼계허망 유시일심작’(三界虚妄 唯是一心作)이라는 게송은 “우주의 삼라만상이 원래 허망한 것이고, 단지 이 한 마음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심의 ‘일’(一)은 산스크리트 경전의 원문에는 없었던 것을 중국에서 번역하면서 첨가한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일’이라는 말을 첨가한 이유는 보조 국사의 경우처럼 마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삼계유심’의 게송을 번역하면서 ‘일’을 첨가하여 마음의 절대성을 강조한 데는 그럴 만한 전거가 있다. 예를 들어 『심지관경』(心地観経)에서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대지로 비유한다.

“중생의 마음은 마치 대지와 같다. 온갖 곡식과 과일이 대지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마음이라는 땅은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선하거나 악한 모든 윤회의 존재, 성문․독각․보살과 같은 성자는 물론이고 성불한 여래도 낳는다. 이 같은 인연 때문에 삼계는 유심이라고 하여 마음을 ‘땅’ 이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일심이란 단순히 ‘유일한 마음’이라는 의미로 마음을 강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뇌로 인한 윤회와 깨달음으로 인한 해탈의 원천이 곧 우리의 마음임을 천명하는데 의의가 있다. 마음의 기능을 강조하는 그러한 ‘삼계유심’의 게송은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관념론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쉽다. 마음을 강조하는 이면에 관념론적 사고가 깃들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서 불교 특유의 입장을 찾을 수 있다.

불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고통과 무지이며,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여 깨달음의 이상 세계에 도달하느냐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삼계유심’의 게송도 인간 존재의 고통과 무지를 지적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지, 객관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를 따지는데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리 연구의 과정에서 후대에는 이 점을 토대로 하여, 마음의 작용을 통해 객관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경향도 등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 나름대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지만,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정화에 의한 해탈을 목표로 삼는다.

어쨌든 이후의 사상 전개에서 마음에 대한 고찰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하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부정한 무지의 요소를 중시하고서, 어떻게 그것을 대처해 가느냐하는 면에 중점을 두었다. 이 경향은 유식(唯識)사상으로 전개되어 ‘알라야 식’ 이라는 최심층 의식의 기능을 해명함으로써 수행의 방도를 제시했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반대 양상, 즉 깨끗한 깨달음의 요소를 중시하고서, 그것을 끌어내고자 하는 면에 중점을 두었다. 이 경향은 우리의 마음에 부처의 성품으로서 여래상 또는 불성이 깃들여 있음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위와 같은 두 방향을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마음의 양상을 냉정하게 고찰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후자는 우리의 마음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고찰하는 이상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위의 두 입장이 『대승기신론』이라는 유명한 논저에서는 ‘일심’으로 통합된다. 마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취지가 이 논저에서 어우러져 소위 ‘일심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대승기신론』은 우리의 마음, 즉 중생심의 분석을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그 중생심을 ‘일심’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 일심이 정반대의 두 가지 방향으로 발동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즉 본래의 청정심으로 발동하여 자신과 세계를 정화해 나가는 방향과, 일상의 부정한 무지로 발동하여 자신과 세계를 번뇌로 오염시켜가는 방향이다.

전자의 방향은 해탈로 나아가는 심진여문(心真如門)이고, 후자의 방향은 윤회로 나아가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의 절대적인 본질의 차원에서 관찰한 것이고, 후자는 현상적인 무지의 차원에서 관찰한 것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히 전자의 입장이다. 이에 비하면 후자의 입장은 파생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하면, 서두에서 소개한 보조국사의 열변을 이제는 수긍할 만하다.

 

 

 

 

경전의 세계

유마경 / 이 만(불교문화대 교수)



부처님께서 일찍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나 그 가르침을 형태에 따라서 분류하여 보면, 계경(契經 : sutra) ․ 중송(重頌 ․ 應頌 : Geyya) ․ 게송(偈頌 ․ 孤起頌 ․ 諷頌 : Gatha) ․ 비유 (譬喩 : Avadana)등 아홉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열 두가지로 나눌 수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이 문학적인 성격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적인 가치로 경전들을 평가하여보면, 아함경 계통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전생 설화를 다루고 있으며, 불소행찬(仏所行鑽)과 장로게(長老偈)등에서는 부처님의 전기(傳記)가 기술되어 있고, 유마경(維摩経)과 미린다왕문경(弥蘭陀王問経)등은 희곡적(戯曲的)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어느 경전보다도 문학적인 소재가 많은 유명한 경전인 것이다. 이와 같이 특수한 형식을 갖춘 유미경은 부파불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주로 자아 중심적인 관념에 집착하여 권위적인 자세를 가지고 비종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과감하게 버리고서 그러한 수행 대신에 사회적 내지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구원자와 중생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원리와 방법들을 전개하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은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재가(在家)의 신자인 유마힐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그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한다거나 못된 짓을 하는 자들을 선도케 하며, 술꾼들을 제도하고, 궁인(宮人)들을 교화하는 등의 묘법을 널리 선양케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독특한 내용을 가진 유마경은 본래 그 명칭이 ‘성스런 유마힐의 설법이라고 불러지는 대승경전’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経)으로 불렀는데, 때로는 유마힐경이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단지 유마경등으로 줄여서 부르고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이 경을 또한 불가사의해탈경 (자苟可思議解脱経) 이라고도 하는데, 이와 같은 의미는 촉루품(嘱累品)에서 이 경의 내용이 불가사의한 해탈법문이라고 아난에게 직접 부처님께서 일러준 데에 기인하지만, 실제로도 내용들을 일견해 보면 일부 대승경전 상에서 볼 수 있는 지식 위주의 이론적인 입장을 벗어나 불가사의한 종교적인 체험의 경지를 서술한 것으로써 여기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진 것이라고 사료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유마힐이라는 재가신도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면, 그는 중인도 갠지스강의 지류인 간다아크강의 연안을 따라 번창하여 당시 인도에서 최대의 상업도시로 널리 알려졌던 바이tif리(Vaisali)출신으로써 아내와 자식을 둔 부호의 재가자이다. 그렇지만 그의 입을 통하여 토로되는 부처님의 말씀은 그때까지 형식적이고도 보수적인 기성교단의 그릇된 관행을 과감하게 비판함으로써 그 시대의 불교이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여러 곳에서 지혜가 번득이는 설법을 함으로써 이 경의 우수성을 돋보이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대승불교의 재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승만경(勝鬘経)과 함께 그 존재가치가 한층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 경전은 그 구성을 보면, 3회에 걸친 설법내용이 불국품(仏国品)과 방편품(方便品)등 14품으로 나누어져 설해 있는데, 주인공인 유마거사가 병으로 앓아누워 있자 부처님께서는 사리불과 목건련 등 십대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문병케 했으나 이들은 모두 전에 유마힐과의 문답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으므로 이를 꺼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번에는미륵, 광엄(光厳), 지세(持世)등의 보살들로 하여금 그를 문병토록 했지만 역시 다루기 힘든 상대이므로 이를 망설임에, 마침내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로 하여금 유마힐을 문병케 하여 서로 문답한 내용 등이 그 줄거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질품(問疾品)에 보면, “중생들이 병에 걸려있으니, 보살도 병중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보살이 중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생사를 마다하지 않으며, 생사가 있는 곳에는 병이 있기 때문에 보살도 그 병 가운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서는 보살들의 깨달음에 관하여 둘이 아닌(不二)법문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데, 많은 보살들이 단지 더러움(垢)과 깨끗함(清), 아름다움(美)과 추함(醜)등 이원적이고도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법문에 들어가는(入)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문수보살은 입불이(入不二)란 사실 무언무설(無言無設)이라 정의하고, 모든 것에서 진실로 시비를 떠났을 때에 이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했던 것이다. 마침 이 광경을 곁에서 유마힐이 듣고 역시 묵연무언(黙然無言)함에 문수보살은 유마힐에게 크게 감탄했다는 일화는 후에 선가(禅家)에서도 자주 활용하는 내용인 것이다.

한편 이 유마경에 관한 한역의 현존본으로써는 지겸(支謙)역의 유마힐경【一名불법보입도문삼매경(仏法普入道門三昧経)】과 나즙(羅什)역의 유마힐소설경【一名불가사의해탈경 (不可思議解脱経)】및 현장역의 설무구칭경(説無垢称経)등이 있고, 이에 관한 우리나라의 주석서로는 원효 스님의 유마경소(疏)와 동 종요(宗要)및 경홍스님의 무구칭경소 등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동국과 불교22

부산 피란 시절의 동태 / 이봉춘(불교문화대학 교수)



뜻하지 않은 6.25전쟁의 발발로 대학본부가 남쪽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처지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현역군인으로 징집되거나 혹은 전시의 불안전한 직장에 임시 고용인으로 취직하기도 하고, 또는 고향 등지에서 제각기 생업에 종사하는 등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동안에 한차례의 큰 전세 변화가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9.28 수복과 더불어 한만 국경까지 진격한 것이다, 이로써 바야흐로 남북통일까지 기대하기도 했던 것이지만,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2월 14일에 서울이 재수복되고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이처럼 전세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이에 당황한 소련대표 파리크는 유엔에서 휴전을 제의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해 7월 8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래, 1I월부터는 회의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회담이 진행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같은 전세의 변화로 차츰 전선이 고정화되어가고 전쟁 또한 장기화할 것이 예상됨에 따라, 당시 부산 시청에 있던 교육부는 이에 따른, 교육시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2일 교육부가 공포한 「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요강은, 피난중의 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의 학생은 피난지의 각급학교에 등록해서 수업을 받거나 임시로 특설한 피난 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재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동시에 피난 중의 대학생에 대해서는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여 수업을 재개토록 하였다.

문교부의 이러한 조치에 따라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부산, 전주, 광주, 대전 등지에 설치된 전시연합대학에서 그 해 4월부터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미 동화사의 별원이었던 대구 남산 등에서 피난생활을 해오던 우리 대학의 교수들은 다시 그 대부분이 부산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런 관계로 역시 중립학교인 영도의 해동중학교에 설치된 부산전시연합대학에 많이 출강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교생들은 자연히 여기에 모여들어 수업을 받게 되니, 이 때의 동대생은 전부 504명이었다. 이 밖에 대전, 광주, 대구, 전주 등지에서 수강하는 학생도 218명에 달하였다.

전시연합대학이 1년 쯤 계속되고 있을 무렵, 부산에 모여든 교수들은 좀더 나은 교육여건과 체제를 만들고자 고심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회합을 갖고 드디어 본교의 단독 개교를 결정한 후 이를 교육부에 통고 하였다. 이 또한 우리 대학이 불교종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국 인들은 불교 경남교무원이 있던 신창동 1가 6번지의 임시 교사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정이 어렵고 궁색하던 전시형편에 교사인들 충분할리가 없었다. 당시 우리 대학이 사용할 수 있는 교사라고는 경남교무원의 사무실 6평 1실과 회의실 겸 교수실로 충당된 3평 1실, 학장과 교수의 숙직실로 제공된 6평 1실, 법당, 지하실의 칸을 막은 3개 교실 24평 등 모두 6실 39평의 비좁은 공간이 전부였다. 그러나 전란에 지치고 배움에 굶주리고 있던 본교의 재학생들에게는 그나마라도 유일의 배움터인 동시에 위안처이기도 한 것이었다. 1952년 3월에 이르러 복교한 학생은 670여명에 달했다. 본교는 여기에다 新興大学(현 경희대)으로부터 85명의 학생을 위탁받고 있는 형편이어서 사용중인 교사만으로는 도저히 강의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경남교무원 구내에 20평 1실과 15평 1실의 판자식 임시교사를 세워야 했다. 교사만 비좁은 것이 아니라 책상, 의자, 흑판 등 모두가 보잘 것 없는 설비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거칠어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학생들의 모습은 마치 감밀을 흡수하러 모여든 꿀벌과도 같이 모두가 희망에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그 당시의 학생 생활에 대해 박상수동문(한국외국어대 교수)은, 『당시 전진을 뚫고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은 7백여명이었다. 본교에 복교하지 못하고 각기 지방의 대학에서 의탁청강의 절차를 밟은 학생까지 합해도 전교생은 8백명 미만이었다. 부산 본교의 경우, 극도의 교실부족으로 교무원의 마루밑까지 판자로 칸을 질러 교실로 사용할 정도였다. 코를 찌르는 아세틸렌 등불의 악취를 참아가며 청강해야 했던 참상이었으나 모두들 참으로 진지하였다. 당시는 대부분이 그러하였지만, 내가 속한 국문과 학우들의 생활 또한 말이 아니었다. 대개는 점심을 못 먹기 일쑤였고, 굶주린 배를 움켜 쥔채 염색 군복바지의 허리띠만 조르는 학생이 많았다. 인생의 온갖 시련을 겪던 당시의 학창생활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당시의 비참했던 날들을 회상한다.

한편 피란 당시 교수들의 동태도 빠뜨릴 수가 없다. 전쟁의 발발로 말미암아 김기림․이재욱․이명원 교수 외에 많은 교수들이 봉변을 당하는 참사가 있었고, 부산까지 내려오지 못한 교직원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엔 제대로 강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재단인 동국학원과 대학 당국의 기민한 대처로 교직원보충에 성과를 거두어 195l년 9월부터 강의는 본궤에 오를 수 있었다.

상경계에는 신태환․고승제․오덕영교수가 취임하였고, 이 밖에 이숭녕․민병태․차상원교수가 강사로 출강하였다. 이들은 모두 본교의 교수 합숙소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혼란에 빠져 있던 우리 대학의 강의 정상화에 각기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전란의 생활고에 지쳐 사학과 주임교수 오봉순선생이 별세하는 등 자못 비통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본교의 교수․강사는 대낮에도 아세틸렌 등이나 석유등을 켜지 않고는 강의할 수 없었던 법당 지하실의 임시 교실에서도 불평 없이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 강의하고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교수실 겸 회의실로 지정된 3평의 일본식 방은 너무 비좁아서, 출강한 교수․강사들은 대부분 학장의 집무처 겸 교수의 합숙 숙식처로 마련된 6평의 일식 방으로 모여들기 일쑤였다. 교수들은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몸을 맞대며 한담하거나, 전황의 호전과 정상적인 교육의 재개를 염려하며 다음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고충들은 당시 그 어려움을 함께 했거나 그 광경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미쳐 짐작하지 못할 일들이었다.

 

 

 

 

비유와 설화

왕을 사양하는 형제 / 조용길(불교대학 교수)



그 옛날 십사(十奢)라는 왕이 네 사람의 왕비를 거느리고 살았다. 첫째 부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라마’라 하였는데, 라마는 뛰어난 용기와 힘이 장사여서 아무도 당해낸 이가 없었다. 둘째 부인도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을 ‘라만’이라 하였다. 셋째 부인한테서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을 ‘바라타’라 불렀고, 넷째 부인의 아들은 ‘멸원악(滅怨悪)’ 이라 하였다. 왕은 네 부인 중에서도 셋째 부인을 가장 사랑하고 귀여워하였다. 왕은 어느날 셋째 부인에게 속삭였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다 줄지라도 아깝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내게 말하시오.”

부인은 말했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더 바랄게 없습니다. 이다음 소원이 있으면 그때 말씀드리겠어요.”

왕은 그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언약했다.

그 뒤 왕은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게 되었다. 그래서 첫째 부인의 소생인 태자 라마를 자기 대신 왕을 삼고 머리에 천관(天冠)을 씌워 위의와 법도를 왕의 법과 같이 하였다.

셋째 부인은 왕의 병을 간호하다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지극한 정성의 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라마 태자가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고 마음에 시기심이 나서 왕에게 전날의 소원을 말하였다.

“이제 제 소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컨대 라마를 폐하고 우리 아들 바라타를 왕위에 오르게 하소서.”

왕은 이 말을 듣자 마치 목구멍에 무엇이 걸려 그것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 같이 되었다. 이제 와서 큰아들을 폐하자니 이미 왕으로 세운터요, 그대로 두자니 전날 소원에 대한 언약을 저버리게 될 판이다.

십사왕은 젊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일이 없었다. 또 왕의 법에는 두 말이 있을 수 없고, 먼저 한 말을 먼저 지키는 것이 그 도리였다.

왕은 사랑하는 셋째 부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라마를 왕위에서 폐하고 그 의복과 천관을 벗기었다.

그때 둘째 아들 라만은 분개하여 폐위된 형에게 말했다.

“형님은 뛰어난 용기와 힘이 있으면서 이런 치욕을 당하십니까?”

형은 대답했다.

“부왕의 뜻을 어기면 불효가 된다. 그리고 셋째 어머니가 우리를 낳지는 않았지만 부왕이 그분을 사랑하시고 좇아 하시니 우리 어머니나 다름이 없다. 동생 바라타는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여 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는데, 지금 내가 폭력으로써 부모와 동생에게 해를 끼칠수가 있겠느냐.”

라만은 이와 같은 형의 말을 듣고서야 잠자코 있었다.

이때 십사왕은 첫째와 둘째 왕자를 나라 밖에 있는 깊은 산중으로 보내면서 열 두 해가 지난 후에야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허락한다고 일렀다. 라마 형제는 부왕의 명을 받들어 조금도 원한이 없이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바라타 왕자는 그 전에 다른 나라에 가 있었는데, 곧 돌아오게 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바라타는 그전부터 두 형들과 화목하여 공경하던 사이였는데,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부왕이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뒤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모두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소행임을 알고 생모를 꾸짖었다.

“어머님은 어째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여 우리 집안을 망치려 하십니까?” 그리고 큰 어머니를 공경하기를 그전보다 훨씬 더 하였다. 바라타는 곧 군사를 이끌고 그 산속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형들이 보이자 군사들을 그 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혼자서 형들 앞으로 걸어갔다. 바라타가 오는 것을 보고 라만은 형에게 말하였다.

“형님은 전에 항상 말하기를, 우리 아우 바라타는 의리가 있고, 겸손하고, 공손하다고 칭찬하셨는데,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을 보니 우리 형제를 죽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형은 바라타에게 말했다.

“동생은 왜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가?'”

바라타는 형에게 말했다.

“길에서 혹시 도적떼를 만날까 두려워 군사를 데리고 왔을 뿐이며, 다른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형님은 어서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맡아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

형은 대답하였다.

“우리는 일찍이 부왕의 명을 받들어 이곳으로 왔는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느냐. 만약 우리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자식 된 도리가 아닐 뿐더러 부모에게 불효가 될 것이다.”

아우는 몇 번이고 간청하였지만 형의 뜻은 갈수록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우는 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형이 신던 가죽신을 얻어가자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새로 왕위에 오른 바라타는 그 가죽신을 어좌(御座)에 올려 놓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기를 마치 형을 대하듯 하였다. 그리고 자주 그 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형들이 돌아오기를 청하였지만 그때마다 기한이 되기까지는 부왕의 뜻을 어길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뜻을 지켰다.

그 뒤도 한결같이 자주 사신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형은 왕이 신발 공경하기를 형 대하듯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우의 지극한 정에 움직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바라타 왕은 왕위를 사양하여 형에게 돌렸다. 그러나 형도 사양하였다.

“부왕께서 아우에게 주셨으니 나는 받을 수없다.”

아우도 사양하였다.

“형님은 맏아들입니다. 부왕의 위업을 이어받는 것은 바로 형님이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서로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헝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들은 형제끼리 우의가 돈독하고 화목하였으므로 그 덕화는 나라안에 널리 떨쳐져 백성들끼리도 서로 받들어 섬기면서 효도하고 화목하였다. 인심이 순후하니 비바람도 순조로워  나라안은 가는데마다 오곡이 풍성하고 질병이 없는 태평성대를 노래했다.

<잡보장경(雑寶蔵経) 제 1권>

 

 

 

 

불자탐방

경주병원조규옥 서무계장 / 편집부



한파가 잦은 계절, 예년 같지 않은 겨울의 가운데서 차 한잔 따뜻하게 나눌 수 있었던 착한 충청도 사람을 이번 불자탐방란에 소개하고자한다.

그분은 동국대학교 경주병원 서무과에 서무계장으로 있는 조규옥계장님이시다.

조규옥계장은 병원 살림살이 중 서무관리업무, 건물 및 시설물 관리를 하고 있으므로, 그의 직함은 적임자를 만난 듯 했다. 더욱이 신심이 두터워 열심히 수행하는 분으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다. 불교 또한 좋은 인연을 만난 셈이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딸의 네 식구며 고향은 충남 온양이라는 조규옥계장님은 인터뷰가 처음이라 떨린다면서도 기자의 질문에 막힘없이 진지하게 임해 주셨다.

조규옥계장님은 부처님과의 인연이 어느 불자들과 다를 바 없이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멋모르고 다니면서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군복무 때 휴일에 군 법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찬불가와 불교교리를 배우고 익히게 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발심하게 된 계기는 제대를 앞두고 다리를 부상하여 대구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정신적 위안을 부처님의 말씀에서 받으면서였다. 그때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초파일 수계식에서 이청(離清)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바쁜 병원업무로 인하여 처음 발심했을 때 보다는 경전공부나 수행활동을 거의 못한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인 신행생활은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집 가까이에 백률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그 절에서 아침예불과 108배로 정진하는 것이 신행생활의 전부라며 웃으신다.

학교(동국대학교)근무를 할 때에는 여러 가지 불교활동에 많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부처님마을』이라는 신행단체에서 재무담당 소임을 맡아 소년, 소녀 가장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행사에 많이 참여했으나 병원근무로 바뀌면서는 거의 활동을 못했으며 병원불교 신행단체인 『불교회』의 정기법회와 성지순례에만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조규옥계장님의 처음 근무지는 학교였다.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91년 10월 병원 개원을 앞두고 6월부터 병원으로 발령받아 병원 개원준비 과정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벌써 만 5년이나 되었다며 잠시 그때를 회상하는 듯 했다.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학교근무에서 개원준비에 바빴던 병원업무를 하자, 생소한 업무와 인력부족으로 인해 퇴근시간도 없이 새벽까지 근무를 하기도 했었고, 지금은 무슨 일이든 자신있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낯설고 새로운 일이라 적응하기도 힘들었으며, 시설물 확충과 정리, 부서 정립이 덜 된 상황, 각종 인허가 문제, 개설허가와 장비설치 및 시험 등이 어려웠다고 말하며 그때 같이 고생한 분들이 많이 도와 주었고, 또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병원업무가 원활히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씀했다. 그리고 개원을 앞두고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던 준비과정이 오히려 보람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보셨다. 그때의 일들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는 질문에 계장님은 한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며 개원 점안식때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병원 개원하고 법당 점안 식에 비디오 촬영을 의뢰하고 행사 진행중에 비디오를 찍다가 잘못하여 음료수를 엎질러 버려서 비디오 화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안타까웠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신다.

현재 경북 동해안은 극심한 가뭄이 3년째 계속이어서 심한 물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바  특히 경주지역은 가뭄이 심하여서 전역에 제한급수를 하고 있는 실정이라 규모가 큰 병원 또한 여간 힘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물부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질문을 드렸다.

계장님은 빨리 비가 와야될텐대 걱정이라며 아침과 저녁때에는 30분, 점심때에는 20분씩

하루 세차례 제한급수를 하고 있으며 또 시당국의 특별한 배려로 30~50톤가량의 물지 원을 받고 있지만 가뭄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상당히 곤란해진다고 말씀하시며 병원 자체적으로 가뭄 극복을 위한 대책으로 지난 여름에 지하수를 개발하였지만 150톤 가량 공급되는 물의 양이 450톤이상 필요로 하는 실정이라 앞으로 2차 지하수 개발에 기대를 건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땅을 판다고 물이 무한정 공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사용하는 물을 한방울도 낭비 없이 사용해야 되며 물의 소중함을 알고 절약에 힘써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깨끗한 물을 많이 공급하지 못해 다소 미안하나 모든 시민들이 물부족으로 인해 그렇다고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며 비가 왔으면 좋겠다며 걱정하셨다.

계장님께 할 질문은 아니었지만 병원 내의 봉사활동과 호스피스의 역할은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불교인 입장에서 불교의 봉사활동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청했다. 계장님은 예기치 않은 질문에 당황하셨는지 헛기침을 하셨다. 경주병원은 300병상이 넘는 큰 병원이며 법당의 법사스님이 한 분 계시며 그분이 매일 그 많은 병상의 환자들을 정신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있다며 병의 고통과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에게 여러 불자들(특히 스님들의 말씀)의 정신적 위안이 크게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고 말씀해 주셨다. 특별한 봉사단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며 얼마전의 일을 말해주셨다. 소년, 소녀  가장돕기에서 만난 소녀가장의 동생이 뺑소니 사고를 당하여 우리 병원에 입원하여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처럼 몸과 마음 모두 상처받는 이들을 부처님 말씀으로 위로해주는 일이야 말로 우리 불자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끝으로 병원 내에서 실천중인 3S운동(서비스의 개선, 시스템의 개혁, 고객만족)에 대해 조금 설명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운동은 의료원이 95년을 동국의료원 위상정립의 해로 정한 후 실시한 운동으로 신뢰받는 병원, 깨끗한 병원을 위하여 의료 평가제를 도입하여 병원과 환자를 위한 운동이라며 그 실례로 원무와 접수 창구를 완전 개선하여 접수와 수납을 한 창구에서 할 수 있도록 병원서비스 차원을 높였다고 한다. 병원과 환자들과의 거리를 가까이하는데 기여한 좋은 운동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바쁜 업무 중에 시간을 내어 탐방에 응해주신 조규옥계장님께 감사 드리며 병원의 모든 분들이 노력하고 계시는 것을 보니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 앞으로 병원이 경주시민에게 신뢰받는 병원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의심치 않으며 병원 문을 나섰다.

 

 

 

 

불심의 창

봄을 맞는 창가에서 / 유인수(학생처 취업과)



어제 주말은 새봄을 맞이하는 설레임으로 하루종일을 보냈다.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있긴 하지만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고, 그 추위 덕택으로 나에게는 몇 가지 간직할 만한 일이 생기게 되었다.

별로 대수롭지는 않지만, 누적되어온 짓눌림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충동질은 그날 이후로 계속되어 이내 폐부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며 숨을 몰아쉬게 하고만다. 더듬어보니 지난 겨울 성륜사에서 보낸 3일 동안의 시간들은 기억 속에 묻어버리고 지나쳤다고 그냥 보낼 일이 아닌 것 같다.

이곳 경주에서는 한겨울에도 눈이 쌓이는 풍경을 보기란 그리 쉽지 않지만, 그 곳의 겨울밤은 바람마저 잠에 드는 듯 고요하기 그지없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눈이 내려와 쌓이는 소리가 소복이 들릴 정도로 눈이 많은 산사다. 요사체에서 대웅전 법당까지 새벽예불을 드리러 가는 길은 제법 멀어 마중 나오는 주위는 온통 백설의 바다인데, 그 꽤나 먼 거리를 비질하며 밤 세운 이 그 누구인가? 차라리 지나가는 바람이라면 땀이나 덜 났을텐데. 쉼없이 쓸며 지나온 시간은 과연 얼마 정도였을까? 걷는 이들의 신발 끝에 눈송이 하나 채이지 않도록 그렇게 말이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구도정신의 표상일까? 아니면 나 같이 무지몽매한 중생에게 그래도 깨우침을 갖으라 소리없이 던져논 암시일까? 그냥 그대로 上求菩提 下化衆生이 아닐런지!

그냥 보내버릴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성륜사를 찾고자 한 며칠 전부터 시작되었고, 사실 나의 참회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휴가 중에 홀로 집을 떠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나 혼자가면 홀가분해질 것 같은 생각에서 끝내는 식구들에게 쓸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야했고, 거기에다 큰스님을 친견하고 여쭙고 싶은 의문이 전부터 있었다는 얄팍한 꾀(잠시 뒤에 이야기 하기로 하며)를 보탠데서 나의 진실한 참회는 시작되어야 한다.

큰스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미국의 삼보사에 떠나 계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 지금쯤에는 조선당에 와 계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내 스스로의 추측과 억지로 별 의미도 없이 시간만 축내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과응보의 당연한 귀결임에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일이고…….

남쪽으로 봄을 맞는 창가에는 정월 대보름을 넘어온 달빛이 아직도 훤하다. 달빛을 보며 나의 알량했던 꾀(?)를 낱낱이 들추어내야 한다.

큰스님! 일전의 우연한 자리였습니다. 그 곳에는 몇몇의 존경하는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셈하며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별로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도 어디에서 또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르는 이상한 소리가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觀하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생전 보지도 못했거니와 그 뜻은 더더욱 모르는데 말입니다. 선배의 말씀은 “그래, 觀하는 것이 무엇인데?” 벙어리가 되어버린 나 자신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이 나를 조종하여 그렇게 하게 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가느다랗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피상적으로 흉내내고자하는 허망상에 사로잡힌 나의 일과로 고목나무 처럼 앉아 있으되 꾸벅꾸벅 졸음에 떨어지고, 기도하는 양하며 온갖 잡념에 끄들려, 단 하루 한시도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윤회의 구렁텅이 속으로 끝없이 내팽겨쳐질 저의 구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 여름에 内外가 一片이고 두두물물이 오직 부처라는 一相으로 하나의 성품자리(真如仏性)를 찾아 先悟後修하라고 가르쳐주시던 큰스님의 청정하신 음성이 이렇듯 귓가에 생생한데, 이러한 저의 업보를 무엇으로 어찌할까요?

이제라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미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하는 스므하룻 동안의 지극정성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 一相三味, 一行三味로 정진하고자 봄을 맞는 창가에 서서 참회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 아미타불

 

 

 

 

가람의 향기

화엄사 / 편집부



추운 겨울바람을 마주하며 자신을 비워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되리라는 생각에 혼자 길을 나섰다, 예년에 비해 올해는 유달리 추위가 기승을 부려서 봄이 성큼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화엄사에서 때마침 부처님 진신사리를 공개하고 있어 좋은 여행이었다고 느껴진다. 난생 처음 대하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고 각황전을 나오니 금방 菩薩이 되어 날아갈 것 같이 기쁜 마음이 듦은 부처님 말씀처럼 중생의 마음에 불성이 숨어 있어서일까.

지리산은 남도를 덮어내린 큰 산이다. 백두대간이 뻗어내리다 그 중추를 소백줄기로 뒤틀면서 용출해낸 웅장한 산이 지리산이다. 그래서 頭流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 그 산줄기가 이곳 남해에 이르러 끝마쳤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어진 것이다. 고래로 지리산은 봉래(蓬莱),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져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 여겨왔다. 그런가 하면 웅장하게 벌리고 높이서 있으니 깊게 서린 계곡도 많고, 온난한 남녘에 높이 올라 솟아 있으니 층층마다 다른 온갖 동식물도 무성하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먹고 살기에 풍족한 부산(富山)이며 자연생태계의 보고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래서 신라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다섯 산 중의 하나인 남악(南岳)으로 중시되었다. 이 웅장한 산 남쪽기슭에 있는 사찰이 바로 화엄사이다.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본사이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筵気)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고, 1936년에 찬술된 『大華嚴寺事蹟』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진흥왕 5년)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求禮績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여명의 승려를 입주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에 속해 있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년)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石刻)되어 장륙전의 사방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와같은 의문은 1979년에 신라 경덕왕 대의 화엄경사경(華嚴経寫経)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해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 실존인물이었음이 밝혀짐으로 인하여 창건연대가 신라 경덕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신라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禅師)가 퇴락한 건물을 증수하였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l424년(세종 6년)에 선종대본산(禅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에 각성(覺性)은 I630년(인조 8년)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만인 1636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그 이듬해 선종대가람(禅宗大伽藍)으로 격을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28년)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禅教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무르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등의 화엄학승(華嚴学僧)들이 머물렀으며, 특히 신라말 화엄학이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王建)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希朗)과 대립된 학파(学派)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은 중요시되기도 했다.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済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서 쌍탑(双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밖에도 영산전(霊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符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및 요사(寮舎)인 적조당(寂昭堂)이 있다. 이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仏)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다. 또한 현재 서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일반에 공개중인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났다.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灯)과 사사자석 탑(四獅子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오고 있다. 각황전 앞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등은 국보 제12호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써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서 탑을 받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끓어 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외에도 화엄사 경내에는 많은 유물이 있으며 마침 서오층석탑에서 발견된 부처님 진신사리를 비롯한 성보 유물들이 각황전과 부제루에서 전시중이라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부처님을 가까이에서 뵙기를 청하고 있었다.

 

 

 

 

불교건강법

땀 이야기 / 김장현(서울캠퍼스 보건소장)



우리는 쉴 사이 없이 땀을 흘리고 산다. 땀은 피부의 땀샘에서 분비되는 액체로서 그 중요한 역할은 증발열을 방산하여 체온을 조절하는 것이지만, 피지방과 함께 피부의 건조를 막으면서 피부의 겉면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작용도 한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끈적거린다던가, 심지어 땀띠가 나서 괴로움과 불편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은데, 반면 땀이란 나지 않아도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땀은 99%이상이 수분이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이 염분이며 요소, 젖산 등이 함유되어 있는 인체에서 분비되는 체액중 가장 묽은 액체이다. 하루 평균 총 발한 양은 약 600-700cc이지만 무더운 여름, 심한 근육운동, 과격한 운동을 할 때에는 수L에 달할 수도 있다.

땀샘은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가장 많이 있고 그 다음에는 앞이마에 많다. 소아들 특히 유아의 경우에는 신체보다 목 위 머리 쪽으로 땀샘이 많이 발달하여 있기 때문에 머리에 땀을 많이 흘리더라도 정상적이다.

땀에 관한 증상으로는 자한증(自汗症)과 도한증(盜汗症)이 있는데, 자한은 깨어있을 때에 특별히 심한 일을 하거나 두터운 옷을 입거나 열이 나지 않았는데도 비정상적으로 저절로 땀이 나는 것을 말하며, 도한은 잠잘 때는 땀이 나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곧 땀이 멎는 증상을 말한다.

땀이 나는 부위에 따라 머리에서만 나는 두한(頭汗), 손발에서만 나는 수족한, 가슴에서만 나는 심한(心汗), 사타구니에서만 나는 음한(陰汗), 몸 한쪽에서만 나는 반신한(半身汗) 등으로 분류한다. 두한은 陽이 허한 경우나 몸이 비습한 사람의 경우 잘 나타나며, 소족한은 胃에 열이 모여 있는 경우 또는 몹시 긴장을 하고 있는 경우에 나타나고, 가슴부위에만 땀이 나는 사람은 심장이 허약한 사람이고 腎의 陽氣가 떨어지면 사타구니에 축축하게 땀이 난다. 성인의 경우 열로 인한 발한은 손바닥이나 발바닥을 제외한 전신에서 일어나는데, 정신적으로 기인된 발한은 손바닥 발바닥 겨드랑이에서만 일어난다. 양기를 폭탈하게 되면 덥지도 않은데도 전신에서 쉴새없이 땀이 줄줄 흐르게 되니 이는 重病이다. 또 구슬 같은 땀이 솟아나나 흐르지 않는 것을 절한(絶汗)이라 하는데 이 것은 중환자에게나 나타나는 매우 위험한 증상이다. 자한은 일반적으로 폐의 기능이 쇠약해졌거나 인체를 외부에서 지켜주는 기능인 衛氣가 허약해 졌을 때 생기는 증상이다.

도한은 식은땀의 일종으로 땀을 흘린 후에 불쾌감, 피로감, 허약감을 느낀다. 보통 도한은 만성질환, 출혈과다 등 전신쇠약이 심한 경우나 陰, 血이 부족해서 火의 기능을 억제하지 못하면 나타난다. 폐결핵 환자에게서 도한이 많이 관찰된다.

 

 

 

 

열린마당

미륵 부처님 / 이윤배(전자공학과 2년)



올 겨울은 유난히 더 긴 것 같다. 어제도 눈발이 조금 날렸다. 나 같은 지방학생에게는 겨울은 더 춥게만 느껴진다. 지금 국․내외는 어수선하다. 중국은 대만을 향해 군사훈련을 강행하고 있고 국내에는 총선을 앞두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크게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당에서는 선거권을 18세 이상으로 낯춘다는데 조금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텐데.

내가 불교학생회에 들어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얼마 전 갔었던 겨울 수련대회다. 보통 수련 대회라고 하면 ‘수련’ 이라는 말처럼 108배하고 잠도 적게 자는 그런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 수련대회는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절을 돌아보는 사찰 순례형식의 수련대회였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접하는 기대 속에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말썽이었다. 처음에는 학교 비구니스님들의 봉고차를 빌려 타기로 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 rent car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회비가 엄청나게 비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피 때문인지 가기 전 날 밤에 봉고차를 겨우 빌릴 수 있었다.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참배한 곳은 백제 문화권이었으며 그 곳에는 미륵 신앙과 관련된 미륵부처님 상이 많았다. 원래 미륵(彌勒)이라는 명칭은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한역으로 자씨(慈氏), 즉 '자비한어머니'라는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보 불인 부처 보살로서 욕계 제4천인 도솔타천에 계시며, 다음 우리 인간계에 출현하여 성불하실 미타불․미륵존불 또는 미륵여래․응공․정변지 등의 십호를 구족 하여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지장보살 부처님은 많이 봐왔지만 미륵 부처님은 이름으로만 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영탑사였다. 영탑사는 신라말 도선 국사가 창건한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절이었다.

1000년의 역사답게 주변에는 몇 백년 묵은 고목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 마침 한 스님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셨다. 그 절에는 보물인 금동삼존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이 얼마 전에 도난당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처님이 일본으로 밀수되기 직전 그 절의 주지스님의 현몽에 의해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부처님의 위력을 직접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다음 우리가 간곳은 서산마애 삼존불이었는데 백제인들의 소박한 숨결을 그대로 느낄수 있었다. 그 다음날 들른 곳은 개심사였는데 보통 집을 지을 때 재목은 곧은 것을 쓰는데, 이 절의 기둥들은 굽은 것을 그대로 쓴 것이 인상깊었다. 수덕사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볼 수 있었는데 어느 보살님에 의하면 불심에 따라 사리의 모양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 다음 무량사에 들렀다가 제주도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회장님이 제주도 분이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무량사의 특징은 그 규모도 그렇지만 부처님이 내가 본 것 중 가장 컸었다. 과연 우리 조상님들의 불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간 곳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초인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대조사 미륵불이었다. 하지만 부여 정림사지는 아직 복원중이라 옛 절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넓은 절터에 남은 석탑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석탑 뒤편에는 보물인 아미타 부처님이 있는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부처님의 모습과는 달리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셋째 날 우리가 들른 곳은 관촉사였는데 석등의 규모에서 고려인들의 불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으로 가는 길에 동고도리 미륵 석불에 들렀다. 두 미륵부처님이 중간에 다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전설이 있을 것 같았지만 들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그리고나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인 미륵사 서석탑을 볼 수 있었다. 원래는 9층이었으나 한 쪽이 무너져있어 안타까웠다. 오는 길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망해사에 들러 나오는 길에 동짓날이라 따뜻한 팥죽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집에서는 팥죽을 잘 먹지 않았었는데 그때 그 팥죽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천불천탑(千仏千塔)의 전설이 남아있는 운주사였다. 지금은 부처님이 많이 소실되고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 옛날 불교의 번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절의 주지스님께 와불(臥仏)의 전설 등 여러 가지 재미있는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와불(臥仏)이란 즉 ‘누워 있는 부처님’을 말하는데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신라 말 어느 스님이 여러 석공들로 하여금 천불천탑을 만들게 하였는데 마지막 날 부처님을 만드는 도중 닭이 울어 와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셨다. 수련대회를 마치고 나니 비록 짧은 시간이라 많은 것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불교에 남아있는 우리 조상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불교가 많이 쇠퇴하였지만 언젠가는 신라시대처럼 불교가 활짝 꽃피우리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왜 백제 문화권에는 미륵 부처님이 많이 계실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백제가 삼국 중에 대체로 국력이 약했으므로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컷을 것이다. 그래서 곳곳에 미륵부처님을 세워놓고 나라의 안녕과 자신의 행복을 빌었으리라.

 

 

 

 

신행단체

동림회



동림회는 불교대학원을 비롯한 동대내의 여러 대학원에 재학중인 출가자들의 모임이다. 현재 재학생 회원으로는 비구 스님 119명, 비구니스님 58명 등 총 177명의 향학열 높은 학인 스님들이 돈독한 우의로 뭉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짊어질 사명감에 공감하면서 학술과 인격연마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326명의 동림회의 동문회원들도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불국정토 건설의 역군이 되어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고 있다.

동림회에서는 회원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도반으로서의 우의를 다져나갈 뿐 아니라 매학기 해외 학술교류 및 성지순례 등을 통하여 포교의 차원을 국제화할 기반을 마련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동림회의 모든 활동들은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학술과 인격을 연마하고 민족과 인류사회 및 자연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게 하여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는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건학이념에 다가서려는 작은 발걸음들이다

 특히 근간에는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학교발전에 주체적으로 동참하기 위해서 동림회의 전체회원이 힘을 합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모습들은 모든 동국인들에게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앞으로 대학의 교육이 대학원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면 동림회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는다. 그때에 이르러서 교정에 흩날리는 하얀 연꽃의 향기는 온 국토를 덮어서 불국토를 장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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