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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20호 / 불기
2539(1995)년 12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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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초청 강연
한국의 선
/ 고형곤 박사
고승대덕들을 모신 자리에서 외람되게 제가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먼저 선(禪) 일반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고, 교(敎)와 禪의 차이점과 교선일치(敎禪一致)의 통불교적(通佛敎的)인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 조계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옛날 중국 설화에 “여화가 하늘에 구멍이 뚫리자 치마폭에 돌을 잔뜩 주워 모아서 하늘을 메웠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전(現前)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환경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일산화탄소가 너무 많이 배출되어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는 오존층에 구멍이 뚫림으로 해서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마침내 바닷물이 육지를 덮칠 것이라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화(禍)이며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서양은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봉건사회가 막을 내리고 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자 농경문화는 공업문화로 바뀌고, 사회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체제로 대체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아시다시피 이윤의 추구를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들은 환경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자연을 오염시키는 공장폐수를 마구 흘려보내 온 나라의 강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이윤만을 축적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뭇 생명에 대해 큰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같은 한 하늘 밑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끼친 해는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폐수를 홀려 보낸 사람 자신도 결국은 오염된 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나와 남을 분별하는 주객대립의 오염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들도 국민생활 속에 자신의 정치적인 이념을 실현하여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에 국민을 위한 정치행위 자체에 만족하고 충실해야 하는데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정치를 하고, 표를 얻고자 인기에 영합하게 되면 전시행정이 되고 결국 정치판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에 충실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구조가 원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서양의 유명한 예술가 레오나르도다빈치는 “인간 이외의 다른 사물들은 제 자신으로서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결핍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의식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늘 자기 스스로 서지 못하고 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항시 공허하고, 또 그 공허한 것을 채워야 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늘 대상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가가 권력을 잡으려 하고, 기업가가 이윤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의 의식이 공허를 느끼고 그 공허를 채워야 하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이나 명예 또는 돈과 같은 대상에 대해 집착을 갖는 것도 우리 중생이 의식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상을 집착하기 때문에 대상만을 볼 뿐 대상을 가능케 하는 의식작용이나 어떤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은 잊어버립니다.
불교에서는 의식 속에서 의식되어지는 의식내용을 법집(法執)이라 하고, 의식 밖에서 직관을 통해 보는 사물을 실재성이라고 합니다. 객체와 실재성을 통틀어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내적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표상들에 집착하고, 외적 생활도 공간적 형태를 가진 사물들의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어 내는 그 행위작용에 대해서는 잃어버리고 은폐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객체와 실재를 대상일반이라고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색(色)과 상(相)으로 구별합니다. 색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이나 지각을 통하여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를 보는 것을 말하고, 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적생활에서의 의식내용으로써의 여러 가지 표상들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색은 실재하는 사물들이고, 상은 내재적으로 체험되는 의식내용들이라고 구별합니다. 결국 색(色)도 상(相)도 모두 대상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통틀어 상(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통 지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고 행하여 아는 각각의 차별지는 그것과 상관되는 각기 고정되고 일정한 대상이 따로 있습니다. 예를 들면 쾌․불쾌는 감정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지각이나 의욕으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차별지는 능소대립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즉 차별지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듯이 대상의 세계를 집착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차별지 이전에 순수작용으로서의 지혜가 있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평등지라고 합니다. 이 평등지는 대상의 있고 없고 와는 상관이 없으며 모든 차별지를 가능케 하는 지혜입니다. 차별지가 대상의 집착을 벗어버리게 되면 바로 평등지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평등지가 바로 大機大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생이 대상의 집착과 아집을 모두 버리면 평등지를 이루고 대기대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괘 부처님이 깨치신 세계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원래 敎라든가 禪이라는 구별이 없습니다.
敎는 부처님이 깨치신 세계, 즉 오랜 수행 끝에 증득한 果佛의 세계 즉 원융법계의 세계를 경전을 통하여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禪은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 즉 因佛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집착만 버리면 바로 果佛을 이룰 수 있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이고, 선은 부처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으로 구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교와 선의 근본 이치는 대기대용을 깨치는 것이고, 대기대용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교와 선은 결국 하나입니다. 교는 果佛의 세계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고, 또한 부처님이 깨친 세계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볼 수 있지 중생은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깨치신 圓融法界는 조그마한 겨자씨 속에 온 우주가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러한 불가사의한 세계를 우리 중생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세계는 끝없는 수행을 통해 십지보살을 넘고 묘각에 이르러 세상을 벗어나고 다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는 그러한 세계를 터득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에서는 부처님의 세계란 무한겁의 수행을 해야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비해, 선에서는 자기 자신 속에 因佛도 들어 있지만 果佛도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에 대상의 집착에서 벗으면 곧바로 부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一超直入如來地”라는 말이 있듯이 능소대립만 아주 없애 버리면 원융법지의 세계에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와 선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그 이치는 똑같이 대기대용을 깨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敎와禪이 각기 접화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교나 선이나 모두 대상의식 즉 능소대립의 차별지를 버림으로써 대기대용의 平等智가 생기는 것이므로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교와 선을 나눌 까닭이 없습니다. 교는 깨친 세계, 원융의 세계, 법계의 세계에 중점을 두고 생각을 하는 데에 비해, 선은 그러한 세계가 나타내는 작용면, 기용면에 중점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어디에다 강조를 두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하는 것도 차별지의 세계이지, 평등지의 세계가 아니므로 선과 교의 구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각각의 주장에 따라 교와 선으로 뉘게 되었지만 원래는 敎禪一體입니다. 교와 선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중국의 청량징관과 규봉종밀도 禪敎一致를 주장했는데, 규봉종밀 뒤에는 敎宗이 한풀 꺾이고 禪宗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普照國師는 규봉종밀의 선교일치 사상과 李通玄 長子의 『華嚴新論』을 받아들여 선교일치의 통불교적인 禪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것입니다. 규봉종밀이 교종의 입장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한 데 반해 보조국사는 선의 입장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했는데, 보조국사는 선에 입문하기 전에 聞解信入의 한 방편으로써 교학도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禪家에서는 不立文字를 내세워 경전의 연구를 무시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을 보아야 합니다. 달을 보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불립문자는 문자를 아주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문자를 실상으로 집착하지 말하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깨쳐서 얻은 所證의 세계를 如理라 하고, 그 깨치는 대기대용을 如知라 하는 데, 거기에 다시 '如'자를 합해 如如知 또는 如如理 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이치와 같은 지혜이고, 변하지 않는 지혜와 같은 이치이기 때문에 如如知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如知 이외에 所證되고 能證되는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이치를 터득하는 이외에 따로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理知圓融을 말씀하신 분이 涵虛得通和尙인데, 이지원융은 선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선교일치를 매우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보조국사의 선교일치 사상과 臨濟宗의 알맹이가 해동 조계종으로 일관되게 내려 왔지만, 이것도 사실 보조국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원효스님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보조국사도 『圓頓成佛論』 등에서 원효스님을 인용하고 있듯이 원효의 사상에서 이미 선교일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효의 저술 중 대표적인 것이 『大乘起信論疏』와 『金剛三昧經論』인데, 기신론은 중생에게 성불할 수 있다는 신념을 주는 것으로 聞解信入의 근원이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삼매경론은 무장론의 입장에서 선의경지를 나타내는 것인데, 보조의 無思契同의 근원이 원효의 삼매경론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조국사의 聞解信入은 기신론에 그 근원이 있고, 無思契同은 삼매 경론에서 그 근원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효의 사상에서 벌써 선교일치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법통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한국의 조계종은 원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보조국사와 진각국사의 선교일치 사상이 해동 조계종의 알맹이입니다.
정각도량
오분향
/ 이법산(서울캠퍼스 정각원장)
향과 초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필수품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축하를 할 때 꼭 있어야 하는 것이 향과 초이다. 향과 초는 정성의 상징이다.
향은 자기의 몸을 태워 향기로 주위를 맑고 향기롭게 해주고 초도 자기 몸을 태워 빛으로 주위를 밝고 아름답게 비추어 준다. 우리의 마음이 향이 될 때 더러운 욕심과 깨끗하지 못한 질투와 시기는 사라진다. 우리의 마음에 촛불을 밝히면 어두운 어리석음과 번뇌망상이 사라진다. 향과 초는 우리의 마음에 지혜와 향기로움을 주어 안정과 창조를 갖게 한다.
불교에서 새벽과 저녁에 예불을 할 때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고 오분향(五分香)을 염송하며 예를 올린다.
오분향이란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이 오분향례는 중국선종의 제6대 조사인 혜능대사가 대중들의 마음에 과거의 모든 허물을 참회하도록 한 뒤, 끓어 앉은 대중들에게 향을 사름에 5가지 의미를 마음에 새기도록 말씀하셨다,
“첫째는 계향이니 곧 자기 마음 가운데 잘못이 없고 악이 없으며 질투가 없고 탐욕과 성냄이 없으며 겁해(劫害)가 없는 것을 계향이라 한다.
둘째는 정향이니 즉 모든 좋고 나쁜 경계를 보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을 정향이라 한다.
셋째는 혜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이 걸림이 없이 항상 지혜로써 자기의 성품을 관조하여 모든 악을 짓지 않으며, 비록 많은 선을 닦더라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염려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불쌍하게 여김을 혜향이라 한다.
넷째는 해탈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에 반연(攀緣)이 없어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걸림 없음을 해탈향이라 한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니 즉 스스로의 마음이 이미 걸림이 없으나 공(空)에 빠져서 고요함만 지키면 옳지 않으니 모름지기 널리 배우고 많이 듣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부처님의 이치를 통달하며 빛을 화(和)하여 사물을 접(接)하되 나와 남의 구별이 없으면 바로 깨달음의 진여 성품에 그대로 이르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 한다.
선지식이여. 이 향은 각기 스스로의 마음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달리 찾을 것이 아니니라.” (六祖壇經 懺悔品)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며 마음은 모든 일의 주체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고 하였다.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 것이다. 천진(天眞)하다는 것은 본래 참되다는 의미이며 천진면목(天眞面目)이란 마음의 본 모습은 한 점 티없이 맑고 깨끗하여 착하다거나 악하다는 분별과 시비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착한 사람도 많이 나빠지게 된다. 나도 모르게 악에 물들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는 선악의 분별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악에 물들어 악이 나쁜 짓인 줄도 모르고 스스로 저지르게 되었다. 그래서 악은 반복되면서 더 큰 악화를 불러오고 있다. 악에 물들어 악을 짓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잘 단속하여 악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한다.
오분향(五分香)은 마음을 향기롭게 만들기 위하여 본심으로 돌이키는 수행이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계행을 잘 지켜 몸으로 나쁜 짓을 안 하게 되며,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으면 어떤 쓸모없는 유혹에도 말려들지 않아서 성낼 일이 없으므로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이 고요하여 편안하게 된다.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사리판단이 밝고 분명하여 반야(般若)의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나아가면서 모든 괴로운 사람도 더불어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나아간다.
선악의 경계에 끄달림이 없이 해탈을 성취하고 연꽃에 물이 묻지 않듯이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 중생세간에 자유자재로 노닐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기쁜 마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본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하루의 시작인 새벽과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마다 오분향의 예를 부처님 앞에 맹세하며 예배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오분향의 실천으로 향기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종자와 열매는 동일한 것이다. 콩을 심으면 콩의 열매를 팥을 심으면 팥의 결실을 거둔다. 한 해의 끝은 새해의 시작이다. 결산은 연말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월말도 있고 주말도 있으며 일일결산도 있다. 찰나생찰나멸(刹那生刹那滅)함에 시작과 끝, 종자와 결실은 찰나에 이루어지고 있다. 찰나를 새롭게 살면 찰나의 결실은 충실할 것이다. 찰나의 시작과 끝도 이처럼 중요한데 어찌 하루, 한달, 한해의 시작과 끝을 뉘우쳐 고침 없이 그냥 넘겨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마음에 오분법신의 향이 꺼지지 않고 타오를 때 우리의 마음은 찰나찰나 시시각각 새로워질 것이며 부처님 법신과 만남은 날로 가까워질 것이다. 마음의 본모습을 덮고 있는 객진번뇌를 털어내고, 중생에 본래 구속해 있는 여래 성품이 부처님 성품에 계합될 때, 우리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 되고 부처의 마음은 나와 하나 되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본래 차별없다.”는 『화엄경』의 말씀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향과 촛불처럼 마음을 사르고 몸을 태워내 마음과 몸을 향기롭고 밝게 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향기롭게 밝게 하자.
오분향의 예불은 해탈로 가는 길이요 날로 새로워지는 성불의 계단이다.
정각논단
불교와 중국 소설
/ 백승석 (중어중문학과교수)
중국의 선진시대부터 한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들은 소설을 “하찮은 작은말” 혹은 “길거리나 골목의 잡담”, “길거리에서 주워듣고 지껄이는 것”이라고 여기고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대 이후 육조(六朝)시대부터는 민간에서 지괴(志怪)소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당(唐)의 전기(傳奇)소설, 송(宋)의 화본(話本)소설, 원명(元明)의 장회(章四)소설 등이 점차로 문학의 무대에 등장하여 결국 시가와는 다른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중국의 고대소설들은 보고 읽는 것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듣고 즐기는 오락으로서도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작품의 제재가 일반적으로 현실생활 속에서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육조 이후부터 현실생활 속에 중요하게 차지하고 있던 많은 불교적인 성분들이 소설작품의 제재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게 되어 그 형식과 사상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먼저 불교가 소설의 형식적인 발전에 공헌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괴상한 얘기의 기록이라는 육조의 지괴소설과 기이한 것을 전한다는 당의 전기소설은 그 발생과 발전에 있어서 불교 경전의 풍부한 우언고사와 비유로 교리를 설명하는 문예형식의 포괄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송의 화본소설은 바로 당대(唐代)의 변문(變文)으로부터 발전 변화한 것이다. 변문이란 본래 불경(佛經)을 알기 쉽게 해설하기 위하여 강설(講說)에 가창(歌唱)을 섞어서 민중들에게 들려주는 불교 속강(俗講)의 대본으로부터 나온 새로운 문체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변문이 후에는 불경과 전혀 관계없는 고사 즉 《오자서변문(俉子胥變文)》․ 《왕소군변문(王昭君變文)》․《순자지효변문(舜子至孝變文)》․《장의조변문(張醫潮變文)》 등과 같은 작품을 연출하게 되었고, 이것은 당인(唐人)의 “설화(說話)”에 영향을 주었다. “설화”는 일종의 설창예술(說唱藝術)로써 고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인의 “설화”는 후에 발전하여 송대의 “설화인(說話人)”이 설서장소(說書場所)에서 “설화”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 설화의 대본이 바로 “화본(話本)”이다. 화본은 “강사(講史)”와 “소설(小說)”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대부분은 쉬운 문언(文言)을 사용한 장편의 규모를 갖추고 있고, 후자는 대부분 백화로 쓰여진 단편이다. “강사”의 화본으로 설경화본(說經話本)인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후행자(侯行子)가 서역으로 경전을 얻으러 가서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경전을 얻어 돌아온다는 내용으로 전편을 상․중․하 3권 17장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 작품의 내용은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던 현장(玄藏)의 취경(取經)에 관한 불교적인 고사에서 발전한 것으로 후에 《서유기》의 저본이 되었으며, 명청 장회소설의 장회를 나누어 제목을 붙이는 형식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고 있다. 《삼국연의(三國演義)》․《수호전(水滸傳)》․《서유기(西遊記)》․《봉신연의(封神演義)》․《금병매(金甁梅)》․《홍루몽(紅樓夢)》과 《유림외사(儒林外史)》등이 바로 명청 장회소설의 대표작이다. 장회소설은 고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산문체를 사용했지만, 그러나 중간에 “詞曰”, “有詩爲證” 등과 같은 운문체를 끼워 넣어서 불경문체에 운문과 산문이 서로 섞여 있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중국의 전통사상에 매우 큰 충격을 준 불교의 전파는 문학창작 주제의 발전에도 많은 변화가 있게 하였다. 불교의 인생여몽(人生如夢)․일체개공(一切皆空)․육도윤회(六道輪廻)․선악보응(善惡報應)의 관념은 중국문학작품, 특히 고전소설의 주제와 사상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였다. 당인의 전기 중에 《침중기(枕中記)》에서 묘사된 소년 노생(盧生)의 한바탕 꿈속 인생역정이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서 주인공이 술 취한 후 꿈을 꾼 한평생등은 “인생여몽”을 표현한 것으로 그 주제사상이 바로 불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윤회전생(輪廻轉生)과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육조소설(六朝小說)에서부터 줄곧 반복 표현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먼저 《곽소옥전(藿小玉傳)》을 살펴보면, 이 전기소설은 곽소옥과 배신한 문인 이익(李益)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익의 배신은 곽소옥이 분으로 죽게 되고 죽은 소옥이 귀신이 되어 이익에게 보복을 가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또한 송의 화본소설 《착참최녕(錯斬催寧)》이 있는데 후에 명(明) 풍몽룡(馮夢龍)이 《성세항언(醒世恒言)》에 편입시켜 제목을 《십오관희언성교화(十五貫戲言成巧禍)》로 바꾼 작품으로 억울한 누명의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최녕과 진이저(陳二姐)가 억울하게 피살되지만 그러나 최종에는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악인은 처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역사 제재의 소설 속에서도 인과응보로 역사적인 사건을 해석한다. 송대의 강사화본인 《신편오대사평화(新編五代史平話)》에서 한(漢)의 유방(劉邦)이 공신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진희(陳稀)를 시기하여 그들의 가문을 모두 죽여 버린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여기에 예술적인 수식을 가하게 된다. 즉 이 3명의 공신들은 천제(天帝)에 억울함을 호소하자, 천제는 그들이 무고하게 피살된 것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각각 조조(曹操)와 손권(孫權), 유비(劉備)로 환생시켜 유방의 천하 삼분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불교의 인과응보와 영혼불사(靈魂不死)의 범주 안에서 묘사된 작품이다. 이밖에도 매우 많은 명청 소설의 우수한 작품들은 비록 예술적으로 이미 상당히 성숙되었다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불교사상의 영향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유명한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瀁瀁長江浙水, 浪花淘盡英雄, 是非成敢轉頭空, 靑山依舊在, 幾度夕陽紅, 白髮漁樵江渚上碇, 貫看秋月春風, 一壺淘酒相遙, 古今多少事, 都付笑談中. (장강은 도도히 동으로 흐르는데, 물보라 속으로 사라진 많은 영웅호걸들 시비 성패가 모두 헛된 것이로구나, 청산은 옛날과 다름없는데, 몇 번이나 석양은 붉었던가, 강가의 저 백발어부는 언제나 가을달과 봄바람을 맞이할텐데, 탁주 한 병 들고 반가이 만나면, 고금의 많은 이야기들 그저 웃음속에 부치겠지.)” 이것은 바로 불교적인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줄거리의 전개에서 촉(蜀)의 실패와 제갈공명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는 내용등은 다분히 숙명론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또한 당시의 세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음서(淫書)로 알려져 있는 《금병매》도 실은 인과응보의 불교적인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 소설은 서문경(西門慶) 일가의 흥성에서 쇠락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정진결재(精進潔齊)와 예불 그리고 스님에게 시주하는 것 등등 당시 세간의 종교생활을 자세히 묘사하여 종교사에서 중요한 재료로 삼을 만한 것도 있는데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강한 불교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즉 서문경은 탐욕으로 죽고 그의 처 오월랑(吳月娘)은 보정화상을 통하여 유복자 효가(孝哥)가 서문경의 탁생(托生)임을 알게 된다. 결국 보정화상이 그들을 교화시키니 효가는 출가하여 명오(明悟)라는 법명을 갖게 된다. 오월랑도 노비의 봉양으로 여생을 보내게 되어 작품 전체의 줄거리는 인연속으로 귀결되었다. 끝으로 하나의 시로써 작품을 마감하고 있는데, “閥閱遺書思망然, 誰知天道有循環, 西門豪橫難在祠, 經濟顚狂定被殲, 樓月善良終有壽, 甁梅浮佚早歸泉, 可憐金蓮連惡報, 遺臭千年作話傳. (홀로 앉아 글을 읽고 아득한 생각에 잠기는데 천도가 돌고 도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호사했던 서문경은 대를 잇지 못하고 진경제는 미쳐 날뛰다 몸을 망쳤다. 선량한 옥루와 월랑은 천수를 누렸는데 음탕한 이병아와 춘매는 저승길이 빨랐다. 가련하게도 금련은 악의 보복을 만나니 더러운 그 이름 천년까지 전해지네.)” 도덕적인 훈계의 내용이지만 역시 업보(業報)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홍루몽》의 주제도 불교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두 가정의 흥망성쇠를 묘사한 작품으로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임대옥(林黛玉)․설보채(薛寶釵)의 애정과 혼인의 비극이 중심사건이다. 1回의 “甄士隱夢幻識通靈(진사은이 꿈길에서 동령을 알아보고)”에서 마지막 回의 “賈雨村歸結紅樓夢(가우촌은 홍루몽의 이야기를 끝마치다)”에 이르게된다. 진사은은 진짜 사실을 숨긴다(眞事隱)는 말과 발음이 같으며 가우촌은 가짜 이야기를 남긴(假語存)다는 말과 발음이 같다. 즉 작가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빌어 사실을 숨기고 허구로 이야기를 전개했음을 암시하였다. 공공도인(空空道人)이, 선도(仙道)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가보옥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기까지, 꿈에서 시작하여으로 꿈으로 끝나는데 곳곳 묘사된 남녀간의 서로 얽혀있는 정분이나 부귀영화의 즐거움은 모두 결국에 곤궁 초라해지고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을 묘사하였다. 전편에 걸쳐 불교의 인생여몽․인과응보․세상무상(世事無常)의 사상이 관통되어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불교와 불교문학의 전래는 일반민중과 함께 소설작품 속으로 그대로 스며들어 고대 중국소설의 형식과 사상내용 방면에 새로운 일면을 개척하였다.
전등법어
영우와 지한 선사
/정무환(불교학과 교수)
선불교의 어록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진리를 직접 체험하고 깨닫도록 철저하고도 냉정한 지도를 하고 있는 스승의 교육정신을 전하고 있다. 선불교의 法統과 붓다의 慧命은 이러한 선승들의 엄격한 지도와 구법정신에 의해서 傳燈되고 있는 것이다.
「전등록」제11권 향엄지한선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단이 있다.
향엄지한(香嚴知閑)선사는 위산영우(僞山靈祐)선사의 문하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었다. 위산은 지한이라는 젊은 수행자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고 그를 개발시키기 위해 어느 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네가 평생 배워서 알고 있는 견해와 경전이나 책에서 배워 기억하고 있는 지식을 묻지는 않겠다. 그대가 아직 부모님의 몸을 빌려서 출생하기 이전에 東과 西를 구분하기 이전의 本分의 一大事와자네의 本來面目을 말해 보라! 그러면 나는 자네에게 인가를 내리겠다.’ 라고 말하였다.
향엄지한은 어리둥절하여 한마디의 대답도 못하다가 오랜 생각 끝에 몇 마디의 자기 견해를 말했으나 위산은 이를 모두 허용치 않았다. 그래서 향엄지한은 위산영우선사에게 나아가서 ‘스님! 저를 위해 한마디만 말씀해 주십시요.’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위산은 ‘내가 說하는 것은 나의 견해이다. 자네가 진리를 깨닫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냉정히 잘라 말하고 나무라며 돌려보냈다.
향엄은 곧 자기의 방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수집해서 읽고 배운 여러 경전과 제방 선지식들의 말씀(어록)들을 뒤져서 살펴보았으나 위산의 질문에 대답할 말을 한마디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향엄은 ‘그림의 떡으로는 배고픔을 면할 수가 없다.’라고 한탄하면서 경전과 어록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나는 今生에 佛法을 배울 것을 포기하자. 이제부터 한 사람의 평범한 수행자로 살면서 힘든 求道 생활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살리라!’ 라고 결심하고는 울면서 僞山을 떠났다. 향엄은 뒤에 南陽의 慧忠국사가 살던 암자에 머물며 한가히 지냈다. 어느 날 뜰 앞의 잡초를 제거하고 청소를 하다가 빗자루에 쓸려간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하는 소리를 듣고 깨치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급히 방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는 스승이 계시는 위산을 향해 절을 하면서 말했다.
‘스님의 大慈大悲하신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높습니다. 그 당시에 스님께서 만일 나를 위해 한 마디 일러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 내가 이렇게 통쾌히 진심을 깨달을 기쁨을 맛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위산을 향해 수없이 절을 올렸다.
제자를 위한 과잉교육의 서비스는 제자의 능력을 말살하며, 바보로 만들고, 장래를 망치는 일이 된다. 참된 교육은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제자의 능력을 끌어내 주는 산파술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일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교리강좌
방편과 자비
/ 정승석(인도철학과 교수)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편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한 사람은 불교를 곡해한 것으로 오해 받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방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한 사람은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바른 식견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의 일상어에서 방편은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일을 쉽고 편하게 치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의미하면서 흔히 편법과 통하는 말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편법이라는 말은 목적보다는 주로 수단과 방법의 편리성을 지칭하여 사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편은 수단과 방법의 편리성보다는 그것이 적용되는 목적을 더 중시하는 말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일생 동안 베푼 모든 교설은 깨달음을 성취케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뗏목에 비유하여 설하는데, 이때 방편을 의미하는 뗏목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유 수단이다. 즉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어 놓고 나는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서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부처님은 설한다.
방편은 바르고 좋은 목적을 성취한다는 진실성과 누구에게나 사용될 수 있다는 보편성을 지닌 수단과 방법이다. 이 점에서 방편은 자비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방편은 애초부터 편리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는 것이라는 오해의 소지를 항상 안고 있다. 실제로 불교에서 방편이라는 말은 진실이라는 말을 상대로 하여 사용되며, 이 경우의 방편은 중생에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잠정적으로 시설되는 교묘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방편의 이 같은 취지는 「법화경」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법화경에서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의 사용을 여러 가지 비유로 예시하는데, 단적인 예로는 거짓말도 방편이 된다. 이 방편은 환자에 대한 의사의 거짓말과 같은 것이다. 잘못된 약을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자식이 아버지가 주는 특효약을 먹지 않으려고 하자, 아버지는 자신이 죽었다는 거짓 비보로써 자식의 정신을 차리게 하여 약을 복용케 한다는 비유가 그것이다. 또 어떤 도시를 향해 험난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지쳐서 중도에 포기하려 하자, 그 목적지를 신기루처럼 가까운 곳에 환영으로 보여 줌으로써 원기를 회복케 한다는 비유도 있다.
이 같은 비유에서 방편은 진실이 아닌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방편의 사용이 원천적으로 자비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비심으로 인해 중생을 이끌기 위한 탁월한 교화 방법으로 강구된 것이 방편이며, 따라서 방편은 자비가 발현한 지혜에 다름 아니다.
불교에서 방편의 효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이다.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은 애초에는 전도나 설법을 주저했다고 하는데, 율장의대품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생각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고생 끝에 얻은 깨달음을 지금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탐욕과 혐오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며, 미묘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탐욕과 무지로 뒤덮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와 인생의 바른 이치를 흔히 진리라거나 진실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각고의 수행 끝에 직접 알려질 뿐, 말이나 글로는 깨달은 그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해 온 현자들에게 그 한계는 공통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마하바라타」라는 인도의 서사시에도 그 같은 공통의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은 아무에게나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法)의 진행은 미묘하고, 또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설법 주저는 그러한 공통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며, 설법해 달라는 간청을 받아들인 것은 자비심의 발로이다. 즉 석가모니는 생명을 얻어 살고 있는 중생에게 대한 자비심으로 세상을 보고 마침내 설법의 간청을 받아들여, “불사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전도의 개시를 선언했다고 한다. 이후 석가모니에게 설법의 언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 되며, 중생에게 방편은 진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방편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좋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그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편은 자비의 대체 개념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자비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이지만, 중생들 사이의 자비는 ‘이타적 배려’로써 실천된다.
불교어에서 자비는, 계율이라는 말이 ‘계’와 ‘율’의 합성어이듯이, 원래 ‘자’(慈)와 ‘비’(悲)라는 두 개념을 합성한 말이다. 친구라는 말에서 유래하는 ‘자’는 ‘순수한 우정’ 혹은 ‘친애하는 마음’을 뜻하고, ‘비’는 동정을 의미한다. 논서의 해설에 의하면 ‘자’는 ‘즐거움을 주는 것’(與樂)이고, ‘비’는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拔苦)이다. 이 경우, 자와 비는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자비는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이 전혀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으로 비유되면서 중생과 세계 전체에 미쳐야 할 것으로 강조되는데서 그 취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숫타니파타』의 일부인 소위 「자비경」에서는 “마치 어머니가 자기의 외아들을 목숨과 같이 소중히 하듯, 살아 있는 모든 것 위에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라고 설한다. 『심지관경』(心地觀經)에서 ‘자’는 ‘아버지의 은혜’로 비유되고, ‘비’는‘어머니의 은혜’로 비유된다.
부모의 은혜로 비유되는 자비는 이타적 배려의 보편성과 무차별성음 내포하고 있다. 유교의 ‘인’(仁)이나 기독교의 ‘사랑’도 불교의 자비와 같은 취지를 지니긴 하지만, 불교의 자비는 바른 법을 성취하고 실천하는 방편과 통한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실천정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대승 불교에서 방편 즉 자비는 ‘깨달음의 지혜’와 항상 짝을 이루고 있으며, 보살에게는 자비심으로써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맹세인 서원을 세우도록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경전의 세계
원각경
/ 이 만(불교학과 교수)
이 원각경(圓覺經)은 본래 그 갖추어진 이름이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서 대방광원각경(大方廣圓覺經)이라고 하거나 원각수다라요의경 (圓覺修多羅了義經) 혹은 원각요의경(圓覺了義經) 등으로 흔히 불리워지며, 앞부분에 방광(方廣)이나 때로는 방등(方等)이라고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경전은 횡적(橫的)으로는 시방(十方)에 두루 하는 방광보편(方廣普遍)한 실다운 이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종적(縱的)으로는 범부나 성인 등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평등(平等)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이를 방광 또는 방등 등으로 표현하여 대승경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원각경은 대승불교사상에 입각하여 원만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설해진 경전으로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의를 잘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그에 따른 지관행(止觀行) 등의 실천을 통해서 그러한 목표가 가능하다는 것을 교설한 경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전에서는 중생들이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무엇보다도 진리를 터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자기의 교육이나 환경 등에 알맞은 실천방법 즉 참선이나 요가, 염불 및 지관법 등을 개발하여 지속적으로 이를 겸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라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부처님께서 문수, 보현, 미륵, 원각 등 열 두 보살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대원각의 묘리를 이해시키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이 경전이 중국에 소개된 것은 당 나라의 지승(智昇)이 저술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綠 : 개원(開元) 18년(730) 지음)에 의하면, 북인도의 계빈국(罽賓國) 출신의 불타다라(佛陀多羅 : Buddhatrāta : 覺救)가 백마사(白馬寺)에서 처음으로 번역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주석서로는 몇 가지가 있어서 주목된다. 즉 그것을 보면 유각(惟慤)의 동 소(疏) 1권과 오진(悟眞)의 소 2권, 견지(堅志)의 소 4권 및 도전(道詮)의 소 9권 등이 그것이고, 송나라 때부터 명․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하여 주석을 했지만, 특히 당나라의 규봉종밀(圭峰 宗密 : 780~841)은 이 경전에 더 집중적으로 주석을 가하여 근 십여 종류의 주석서를 남겨 놓았으므로 이 방면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밀이 남긴 주석서를 보면 총 9종에 달하는데, 이를 보면 먼저 대방광원각경대의(大方廣圓覺經大疏) 12권이 있고, 이외에도 동 약소(略疏) 2권과 동 대소과(大疏科) 2권, 동 약소과(略疏科) 2권,동 대초(大鈔) 13권, 동 약초(略鈔) 6권, 동 도량수증의(道場修證儀) 18권, 동 예참약본(禮懺略本) 4권 및 동 도량육시례(道場六時禮) 1권 등이 그것으로써, 어느 한 사람이 한 경전에 관하여 이렇게 많은 주석서를 남긴 것은 중국불교 교학사상 드문 일로써 그만큼 이 경전의 교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이 경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사찰의 전문강원에서 스님들이 여러 교과목들을 이력(履歷)할 적에 사교과(四敎科)에서 금강경(金剛經)과 능엄경(楞嚴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이 원각경을 배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주석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져서 현존하는 것의 거의 모두가 조선시대부터 찬술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을 보면 함허(涵虛)가 지은 원각경소(圓覺經疏 : 大方廣圓覺經解) 3권과 유일(有一)의 원각사기(圓覺私記) 2권, 의첨(義沾)의 원각경사기(圓覺經私記) 1권 및 종말의 동 약소초(略疏鈔)에 대하여 여산(如山)이 다시 협주(夾注)한 것을 조선의 세조 때에 언해 한 원각경언해본(圓覺經諺解本) 10권 등이 모두 조선시대에 간행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원각경은 어떠한 내용과 그 수행법을 설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모두 12장으로 구성된 내용 중에서 그 제1장인 문수보살장에서는 깨달음에 관한 문제를 들어서 그 원리를 설하고 있다. 즉 누구나 본래부터 소지하고 있는 원각(圓覺)에 환원하기만 하면 생사가 곧 열반이며, 윤회가 곧 해탈이라는 것이며, 다음의 제2장인 보현보살장에서는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얻어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보현보살이 부처님께 물으니, 부처님은 이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본성은 본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에서 범부의 소견으로 환상과 같은 몸과 마음이 일어나므로 이를 잘 조절하여 수행해야 한다고 설하셨고, 3장인 보안(普眼)보살장에서는 중생들은 어떻게 사유하여야 하며, 어떻게 머물고, 어떠한 방편으로 제도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대답하기를, 지혜롭게 생각하고, 바르게 머물며, 방편 없는 방편을 써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먼저 여래의 지관(止觀)에 의하고, 계행을 굳게 지키며, 대중들과 함께 살면서 조용한 곳에서 항상 생각을 깊이 하는 것 등이 그 첫걸음이라고 설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하의 장들에서도 그 깨달음의 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 이 원각경의 대의이다.
동국과 불교20/동국대학시대
학장 경질, 대학 본부 착공
/ 이봉춘(불교학과 교수)
교사와 시설의 확장이 초미의 관심사로서 급무가 되고 있는 가운데, 1948년 5월 경부터 교내에는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재단, 교수, 학생들의 일부에서 대학운영에 대한 허윤 학장의 독주 경향을 비판하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허학장의 학사행정에는, 단시일 내에 대학의 발전을 이룩하려는 의욕이 넘쳐 약간의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폭넓은 포용력을 높이 평가하여, 허학장을 절대 지지하는 교수와 학생들 또한 적지 않았다.
따라서 교수와 학생은 허학장의 진퇴 문제를 놓고 찬반으로 의견이 맞서게 되어, 마침내 이 문제는 학교 밖에까지도 번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허학장은 이 이상 학장의 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대학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것을 느꼈고, 또 개인적으로는 장차 민의원에 입후보할 의사도 가지고 있는 터여서 같은 해 11월말에 스스로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허학장의 용퇴는 그것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양주동․이하윤․김진섭․채희순․최호진․조동필․오종식 등 허학장의 사임을 만류하던 21인의 교수단이 허학장의 사퇴와 때를 같이 하여 모두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만 것이다. 이 사태는 마치 갑자기 밀어 닦진 파도와도 같았다. 허학장과 더불어 진퇴를 같이하여 21명이나 되는 교수단이 한꺼번에 떠나버린 교정은 적막하였고, 더구나 교육의 지도와 강의에도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에 재단으로서는 화급하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948년 12월 1일 이내 후속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재단이사장 박원찬은 사태수습안으로서, 불교계에서 인망이 높고 중앙학림시대부터 교수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한바 있는 김영수 교수를 학장으로 임명하고, 김동화 교수를 부학장에 임명하여 학장을 보필토록 한 것이다.
또한 학생처장에는 김인홍(金寅弘), 교무처장에 이부열 등 일부 보직자가 새로 임명되어 허학장 사임 후의 혼란해진 학사행정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같은 달 중순부터였다. 이후 학장비서 양외득이 동분서주한 결과, 동기방학이 끝나는 1949년 2월말 경에는 대학의 학사행정도 정상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특히 1949년 5월 14일에 있었던 현재의 본관 건물 건축용지의 정지공사 착공은 학교의 시설 확충을 고대해온 학생들을 광희케 하였다.
祭典
北斗星 내려와 陳치는 자리
바람을 모돔아 布帳을 두르면
바다처럼 흔들리우는 香煙속에
燈臺 빛나는 눈하고 사람들은 모였도다.(下略)
이는 당시 문학과 학생이었던 동문 박항식박사가 기공식상에서 읊은 즉흥시로서, 참석한 학생은 물론 교수와 재단이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뜨거운 감격의 순간으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대학본부의 건축공사 착공은 모든 동국인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는, 당시로서는 일대쾌거였다. 늦봄의 공기를 진동하는 불도저의 굉음마저도 교수․학생들에게는 대학발전의 힘찬 합창으로 장래에 대한 약속인 듯 여겨졌다. 그러나 허학장 사임의 상처를 아물리며 이 같은 희망이 부풀어 나던 것도 잠깐이었다. 우리 대학에는 또 어두운 구름이 덮이고 있었다. 김영수 학장이나 학장보필의 중책을 맡고 있던 김동화 부학장의 俗務에 대한 경험부족과 거기에 새로 임명되어 학교행정을 담당하던 실무자마저 사무에 어두운데서 기인하는 학내외의 우려와 불만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끝내 현실로 드러났다. 잘못된 예산집행과 낭비요소의 방지소홀 등이 겹쳐 급기야는 대학본부 건축공사의 중단이라는 비관적인 사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공사의 중단은 교수와 학생들만을 실망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건축비의 일부를 부담한 학부형에게도 충격을 주어 마침내 사회문제로 비화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태는 실무자의 무능과 과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미 학외에까지 물의를 일으키게 된 이상 대학의 최고책임자인 학장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김학장은 그 책임을 통감하고 1950년 4월 말에 사퇴하고 말았다. 초대 허윤 학장의 용퇴에 이어 김영수 학장이 취임한지 1년 5개월이 채 못 되어 다시 학장직을 사퇴한 것이다. 이 같은 불상사는 발전도상의 우리 대학으로서는 치명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재단법인 동국학원의 이사회에서는 즉시 사후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이는 교수회에서도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시점은 특히 당시 국내 여러 대학의 졸업시즌인 5월을 앞에 두고 있었다. 우리 대학의 학부로서는 제1회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념할 만한 졸업식을 당장 눈앞에 두고 있는 때였다. 그리하여, 어떤 형식이든지 학내가 정리되어 경축 일색의 졸업식을 가져야한다는 교수일동의 배려에서 5월 2일에 교수회가 긴급 소집되었고, 이 교수회에는 직권을 넘어 후임학장의 인선문제까지도 논의하게 되었다.
긴급 교수회의 석상에서 토의된 후임학장인선에 대하여는, 교수 간에 전혀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학장이었던 김동화 교수를 학장으로 추대하자는 데 이견을 모을 수 있었고, 이사회에 후임학장에 대한 교수측의 견해를 밝히게 되었다. 이에 이사회에서도 개교 이래 이적인 교수회의 인사문제 개입에도 선뜻 그 뜻을 받아들여, 소정의 절차를 거쳐 같은 달 13일에 김동화 교수를 제3대 학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렀다.
경북 출신의 김동화 교수는 일찍이 출가하여 상주 남장시를 거쳐 일본의 立正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우리 대학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혜화전문학교를 거친 바 있다. 따라서 학내의 여러 가지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재단측과의 관계도 원만하여, 대학본부 신축이라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학장으로서는 가장 적임자라고 믿어졌다.
학내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취임한 김동화 학장의 주제하에 1950년 5월 20일 성대한 졸업식을 치를 수가 있었다. 우리 대학의 학부로서는 최초의 졸업식이었던 만큼 이날의 식전은 개교 이래 보기 드문 盛典이었다.
대학으로의 승격 이후 l950년에 이르는 3년 동안에 제3대에 이르는 학장경질이 있었음은 우리대학의 초창기 사정이 순탄하지만은 못했던 것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어쨌든 김동화 학장의 취임으로 대학본부 건축공사의 재개 등을 포함하여, 모든 동국인들은 다시 우리의 대학발전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불심의 창
산사의 사색
/ 박승필(불교문화대학 교학계장)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날은 우리 문수회 회원이 영천 은해사로 성지순례하기로 한 날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대문을 나서 출발지인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약속시간을 조금 넘기었고 기다리던 일행은 늦장 부린 나를 자비의 미소로 감싸주었다. 모두들 인상이 밝았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멀지 않는 곳으로 순례를 떠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 일행은 학교버스에 몸을 실었고 플라타너스 나무 늘어진 국도를 주로로 시골길을 보조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차창 밖의 시골모습은 보면 볼수록 더욱 정겹기만 하고 차 안에서는 통상적인 의식절차로서 자비로운 회장 인사, 실천 큰 사무국장의 성지순례일정 안내가 있었고 테이프를 통하여 어느 큰스님의 법문을 새겨듣는 동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먼저 은해사(銀海寺)에 대한 내력을 소개할까 한다. 이 절은 경상북도 영천에 소재하고 있고 팔공산 동쪽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이다. 809년(현덕왕)에 혜철국사(蕙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 하였다. 현재 이 절은 말사 39개소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이 절과 부속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우리 일행은 절 대문인 보화루(寶華樓)를 통과하자마자 세련된 구도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가끔씩 절을 찾다 보면 사람마다 약간의 변화를 보게 된다. 대개의 경우 입이 무거워 지게 된다. 일행 중 평소 입담 좋고 덕담에 일가견 있는 P씨, J씨 등 몇몇은 엄숙하게 복짓기에만 분주하다. 나도 예외일 수 없어 평소 지어온 구업(口業)을 속죄하는 바램으로 경내 약수 세잔을 연거푸 마시고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독송하고 난 후 일행들과 함께 대웅전에 가서 향사루어 참배를 마쳤다.
사무국장으로부터 이 절의 주지이신 일타스님의 법문이 여의치 않음을 전해듣고는 다소 섭섭한 마음으로 그 곳을 나와 경내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현재 당우(堂字)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이 ㄷ자형을 이루고 그 주위에 종루, 복성각, 승당, 요사채가 흩어져 있는 별로 클 것이 없는 아담한 고찰이다. 이 절의 근황은 일타스님이 주석한 이후로 최근에 지은 듯한 지장전 외에 이곳 저곳에서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스님들이 찾아들고 있어 수행과 기도의 청정도량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심검당에 딸린 식당에서 점심공양을 받았다. 보살님들의 보시가 대단하였다. 오후에는 8암자 중 하나인 백흥암(百興庵)을 선택하여 순례하기로 하였다. 나는 고행의 길 대신에 모처럼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에 알량한 핑계를 대어 절에 남기로 하였다. 일행의 출발을 지켜본 후 다시 된장국에 비빔밥을 배불리 먹었던 심검당 마루 난간에 걸터 앉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노라니 모든 것이 연기하여 일어났다. 정혜결사(定慧結社)라는 역사적 사건이 기억났다. 고려 중기 고승인 지눌(知訥)이 이 거조사(居祖寺)에서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하여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취지문을 선포하고 정법불교에로의 복귀를 위하여 용맹정진한 실천운동이자 개혁이었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기운이 이 절에는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현재의 우리 동국인에게 뭔가 교훈을 줄 게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우리 대학은 현재로서는 학제개편 및 제도개선을 통한 시작에 불과한 교육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정체된 우리 대학이 앞으로 전개될 치열한 대학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요 생존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개혁의 주체는 남이 아닌 바로 우리 동국인 전체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 모두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 동국은 총체적인 위기국면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진보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동국발전의 걸림돌인 만연한 부정심리, 무질서심리 등 비생산적인 요소들을 척결하고 건전한 비판과 창의적인 제안을 통하여 예지를 모으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 강력한 지도력(Leadership)과 실천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개혁=사정」이라는 개혁논리에 부합되고 간단없이 밀어닥칠 숱한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강한 지도력이 요구되어지고 있는바 이러한 지도력은 자율과 통제의 조화를 통한 민주적인 것이라야 한다. 한편 지도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천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학교에서는 간혹 용두사미(龍頭蛇尾)로 장식되는 일들이 있었다. 이는 일에 있어서 머리는 있되 손발이 움직여주지 않는 꼴이다. 결국 우리 개개인의 보살 정신이 부족했던 점을 시인하면서 이제는 우리 모두 알뜰한 손과 발이 될 것을 자초하여 보자.
셋째, 확고한 학교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교육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직제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합리적인 학사운영의 토대를 구축하여야 한다. 또한 교육여건 조성에 필요한 많은 재원을 확보할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여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윽고 백흥암으로 떠났던 일행이 여유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백흥암 극락전의 주불 3존을 안치한 불단인 보물 제486호로 지정된 수미단(須彌壇)의 화려함과 비구니 스님만 계신 암자를 지키는 2마리 진돗개 이야기를 귀띔해 주었다.
산사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경내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뒤로한 채 돌아서 나오는 우리들에게 지눌스님의 “개혁과 동국발전을 위한 노력에 정진하라”는 말씀이 귓전을 울렸다.
일주문
절망이라는 이름의 폭군
/ 윤호진(불교학과 교수)
욕망은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손에 넣고자 한다. 욕망은 절대로 만족을 모른다. 욕망은 채워주면 줄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진다. 갈증은 바닷물로서 해소할 수는 없다. 욕망 역시 욕망으로서는 충족시킬 수 없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金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할지라도 사람의 욕망은 채울 수 없으리라.” “비록 雪山(히말라야)만한 금덩어리를 얻는다 해도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욕망은 暴君처럼 우리에게 군림한다. 우리는 노예처럼 그의 부림을 당한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누가 폭군과 맞설 수 있겠는가.
요즈음 온통 세상은 전직 대통령이 “欲望이라는 暴君”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한 나라의 대통령일지라도 욕망 앞에서는 얼마나 맹목적이고 나약하고 바보가 되어 버리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번 더 욕망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출신의 한 청년이 하급장교가 되었다. 그 하급장교의 가장 큰 꿈은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장군이 되고자 했던 욕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욕망은 국가 최고의 자리인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총이나 칼로서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하급 장교였을 때는 작은 아파트라도 자신의 집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얼마 후 그 욕망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것으로 그의 욕망은 잠재워 지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게 되자 그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돈은 경전에서 말한 것처럼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단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현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가 모은 돈은 雪山(히말라야) 높이 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백두산 높이 보다는 더 높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아마 5년 밖에 대통령자리에 앉을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되었을 것이다. 한 번 더 5년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더라면 그가 쌓아올린 돈 더미는 경전의 표현처럼 雪山 높이 만큼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욕망은 충족되어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욕망은 사람을 얼마나 맹목적이고 바보로 만드는지를 우리는 “대통령의 例”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써도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돈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모으려고 했는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불과 몇 년 전에 그의 친구가 욕망이라는 폭군으로부터 온갖 망신과 고통을 당했던 것을 보고서도 어떻게 꼭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욕망은 폭군처럼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은 그 폭군 앞에서 무방비 상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은 욕망으로 인해 인도되고 욕망으로 인해 괴로움을 받는다. 욕망이야말로 모든 것을 예속시킨다.”라고 주의시킨 것이다.
가람의 향기
선암사
/편집부
송광사에 이어 두 번째 전라도 행이라 낯선 땅이라는 생각이 처음보다는 다소 감하였지만 그래도 기자가 자라난 경상도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느낌이 듦은 아마도 지역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낯선 곳이라 순천과 가까운 광양에 사는 선배에게 미리 연락을 취하였더니 직접 차를 끌고 마중을 나와서, 복잡한 버스에 시달리지 않게 되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리고 집이 아닌 곳에서 반가운 이를 만나 오랜만에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며 친우들의 소식이며 그동안 궁금했던 소식들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여행을 더욱 뜻깊게 한 것 같다. 먼저 송광사를 돌아보고, 오랜만에 가 본다는 선배를 길잡이로 선암사로 향했다.
선암사 가는 길은 순천에서 선암사 입구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입구에 내려 매표소에서 1.2km 정도 걸어가야 한다. 매표소를 지나서 조금 들어가면 화산(華山)대사를 비롯한 향서당(向西堂)과 호암당(護岩堂) 드의 사리탑이 운집해 있는 부도림이 나온다. 부도림을 돌아 들어가면 옛날 7선녀가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계곡 옆으로 제400호인 석조 무지개 다리인 승선교(昇仙橋)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강선루(降仙樓)가 자리하여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마침 비가 오고 있어서 그 운치가 만들어 내는 풍경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유래>
전라도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는 신라 진평왕 3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처음으로 개창한 사찰이다. 처음에는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또 한때는 운암사(雲岩寺), 용암사(龍岩寺)와 더불어 호남 3암사의 하나로 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창건되었을 때는 암자 규모의 비로암(毘盧庵)으로 창건되었고, 그 뒤 신라 35대 경덕왕 원년(724년)에 도선(道詵)국사가 중창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仙岩寺)라 하였다.
고려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이후로 거의 폐사로 유지되다가 조선조말 순조 24년에 해붕(海鵬)대사가 사판(事辦), 눌암(訥庵)의 공덕, 익종(益宗)의 도감(都監)으로 그 삼사(三師)의 힘에 의해서 대규모 중건을 이룩하였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冥府殿), 약사전(藥師殿), 적연당(寂然堂), 명경당(明鏡堂), 대장전(大藏殿)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 무집당(霧集堂), 영풍루(迎風樓), 지장전(地藏殿), 용화당(龍華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 1년)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枕肱)이 많은 당우(堂宇)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除夕)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禁戒)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1823년에 또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 눌암, 월파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찰령 寺刹令>이 발표되고, 다시 같은 해 7월 반포된 <사찰령 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 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기도 하였다.
<유물>
조계산 기슭을 가득하게 채운 당우가 서로 이가 맞물린 것처럼 서 있다. 대웅전의 거대한 위엄, 천불전의 중후한 제압, 장경각의 정숙한 古態 등이 어지러울 정도이지만 지금은 대소 20여 동의 건물만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20여 동의 가람만으로도 결코 선암사의 寺格을 낮추어 보이지는 않는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인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單層八作)지붕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대웅전의 기단(基壇)과 석계(石階)는 고려시대의 것이었으나 계측(階側)의 조각은 근세에 이르러 모두 고쳐졌으며 그리고 다포식으로서 각 閣門에는 무궁화를 조각하였고 내부는 우물 天井을 만들었으며 또한 단층의 정교한 수법은 조선조 중기 이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다포식(多包式) 건물인 원통전은 경참․경준․문정 등의 3대사가 중수할 당시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또 국사전이라고도 하는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탱화를 비롯하여 도신․서산(西山)․무학(無學)․지공(指空)․나옹(懶翁) 등의 우리나라 고승과 33조사(祖師)들의 영정을 봉안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1기가 있는데, 동서로 건립된 2기의 석단 중 하나로 2층 기단 위에 건립된 삼층 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중석(中石)을 한데 붙여서 짰고, 중석 각 변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 하나씩 모각하였다. 이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으며, 옥개 위에 角, 弧, 2단의 괴임을 두는 수법의 불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선암사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된 금동향로(金銅香爐) 1기가 있으며 또 대웅전 후불벽면을 꽉 채운 초대형의 영산회상도, 이것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 석가본존불은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초대형으로 중상단(中上段)에 걸쳐 배치하고 있으며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로 작게 그려져 있다. 이 불화는 압도하는 구도, 대담한 형태, 강렬한 색의 대비 등으로 장엄한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경내에 서로 처마가 맞물리게 배치된 당우들을 보고 나오면서 자연과 잘 조화가 된 그런 모습으로 자리한 선암사가 후세에까지 고색창연한 옛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일주문 앞에서 부처님께 빌어보았다.
비유와 실화
공덕과 구업(口業)
/ 조용길(불교학과 교수)
가난한 여인의 공덕
비나야약사(毘奈耶藥事) 품의 이야기이다.
사밧티(舍衛城)에 한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여인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이집 저집 다니면서 밥을 빌어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어느 날 온 성안이 떠들썩한 것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나라의 파세나디왕이 석 달 동안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공양하고 오늘 밤에는 또 수만 개의 등불을 켜 연등회(燃燈會)를 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성안이 북적거립니다.”
이 말을 듣고 여인 온 생각했다. ‘파세나디왕은 많은 복을 짓는구나.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어떻게 할까? 나도 등불을 하나 켜서 부처님께 공양했으면 싶은데.’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그 부처님을 뵙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나는 가난해서 아무 것도 공양할 것이 없으니 등불이라도 하나 켜서 부처님께 공양할까합니다.” 여인의 말에 감동한 가게 주인은 기름을 곱절이나 주었다. 여인은 그 기름으로 불을 켜 부처님이 다니시는 길목에 걸어 두고 마음속으로 발원하였다. ‘저는 가난한 처지라 이 작은 동 불로 부처님께 공양하나이다. 보잘 것 없는 등불이지만 이 공덕으로 내생에는 지혜의 광명을 얻어 모든 중생의 어둠을 없애게 하여 지이다.’ 밤이 깊어지자 다른 등불은 다 꺼졌지만 그 등불만은 한결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으로 시자인 아난다는 손으로 불을 끄려고 하였다. 그러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가사자락으로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았다. 부채로 부쳐 꾸려고 했지만 그래도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 그것을 보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등불이므로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공덕으로 그 여인은 다음 세상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파세나디왕은 부처님께 나아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석 달 동안이나 부처님과 스님들께 큰 보시를 하고 수만 개의 등불을 켰습니다. 저에게도 미래의 수기(授記, 예언)을 내려 주십시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불법이란 그 뜻이 매우 깊어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며 깨닫기도 어렵소.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써 얻을 수도 있지만, 백천의 보시로도 얻기 힘든 경우가 있소. 그러므로 불법을 바르게 깨달으려면 먼저 이웃에 여러 가지로 보시하여 복을 짓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 많이 배우며, 스스로 겸손하여 남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뒷날에 반드시 불도를 이루게 될 것이오.” 왕은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을 말한 내력이다.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 難陀品)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는걸 보면, 일찍부터 불교교단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진정한 보시와 공양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넌지시 말하고 있다. 보시와 공양에는 밖으로 드러난 물량(物量)보다 정성과 청정한 서원(誓願)이 전제되어야 공덕이 된다는 의미이다.
말 많은 자의 재앙
보살은 재상의 집에 태어나 장성한 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 왕은 시도 때도 없이 말하기를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 왕이 한번 입을 열면 다른 사람은 전혀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보살은 어떻게 하면 왕의 이와 같은 버릇을 고쳐줄까 하고 궁리를 했다. 마침 그때 히말라야 밑에 있는 한 호수에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 백조 두 마리가 먹이를 찾아 날아와 서로 친해졌다, 하루는 백조가 거북이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던 히말라야 중턱에는 눈부신 황금 굴이 있는데 우리와 함께 구경하러 가지 않겠소?” “내가 그 먼데까지 어떻게 갈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가 당신을 데려다 드리지요. 당신 이 입을 다물고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요.” 거북이는 다짐했다. “입을 다물겠소. 제발 소원이니 나를 그 황금 굴에 데려다 주십시오.” 두 마리 백조는 나뭇가지 하나를 거북의 입에 물린 후 자기들은 그 양쪽 끝을 물고 하늘을 날았다. 백조가 거북을 데리고 가는 모양을 쳐다보고, 동네 아이들은 떠들어 댔다. “야, 저것 봐라. 거북이가 백조에게 물려가고 있네.” 거북이는 자신이 백조에게 물려간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다. 꼬마들에게 욕을 해주고 싶었다.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가는데 너희들이 무슨 참견이냐. 이 고얀놈들,......”
거북이는 말을 하고 싶어 물었던 나뭇가지 생각 없이 놓아버리자, 그만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때 백조는 빠른 속력으로 궁전의 상공 지나가던 참이었다. 왕은 궁전 뜰에 떨어져 조난 거북이를 보고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되어서 거북이가 떨어져 죽었을까요?” 지혜로운 스승은 차근차근 대답하였다. “이 거북이와 백조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을 것입니다. 백조가 거북에게 히말라야로 데려다 주겠다고 입에 나뭇가지를 물리고 공중을 날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 많은 거북이가 입을 다물었을 수 없어 무엇을 지껄이다 나뭇가지를 놓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말이 많은 사람은 그 말 때문에 언젠가는 이와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부터 왕은 말을 삼가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자타카에 있는 이야기이다.
‘입은 재앙의 문’이란 말이 있듯이 입을 잘 놀리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게 된다. 세상이 이같이 시끄러운 것도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자고 함부로 쏟아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숫타니파타」 같은 초기경전에도 다음과 같은 교훈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우리는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는 입으로 말을 쏟아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지도자는 자신 말보다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지혜의 샘을 깊게 한다. 입에 말이 적어야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는 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신행담
부처님 공부
/ 김남희(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이 원고를 쓰기에 앞서 지난 그동안의 나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부처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마음으로 내가 과연 어디까지 와있고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송광사 수련대회 때 좌선을 하다가 무릎을 치며 ‘바로 이거다.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거다’라는 확신이 간 후부터 지금도 그것을 향해 가고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었다. 지난 여름날들의 일을 돌이켜 몇 가지를 짚어보고 나서 곧 백팔참회를 해야 했다.
“공부 헛했다. 부처님공부 한다면서 그동안 무얼 배웠나! 그동안 마음공부를 했다는 결과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지난 여름을 보내면서 이 몇 마디가 계속 한숨과 같이 나왔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공부를 하고 있건만 지난 여름 일생의 고비에 부딪혔을 때 나는 아무 손을 쓰지 못하고 마음은 계속 아파하고만 있었다. 너무나도 힘없는 부처였다. 새삼 그동안 문자로 배운 부처님 공부가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않음을 알았다. 지식만 늘었지 지혜는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생활과 신앙은 따로따로 였었나보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였었다면 그 힘든 기간을 잘 넘길 수가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마음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젠 책을 그만 보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다시는 아파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먹지만 부처님공부로 단단히 무장하지 않는 한, 마음은 자꾸 아파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외부충격에 무척 약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산으로 더 깊이, 더욱 사람 없는 곳만 찾아다녔다, 도피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산속에 있을 때는 평온하다가도 도시의 제자리로 돌아오면 외부충격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 또 끄달리고 만다. 산에 있을 때의 도인의 마음을 下山한 후까지 유지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 작은 변화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을 이렇게 살고 말 것 같다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두 가지, 외부충격을 차단을 하거나 외부충격을 흡수하여 소화를 해 낼 수 있을 만큼 커야만 한다. 한 번도 시원하게 수행다운 수행을 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수행은 스님들만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던 게다.
사실 아침저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방안의 벽을 보고 앉아서 호흡을 챙겨왔다. 나의 벽이 나의 모든 사연을 알고 있을 만큼 자주 대좌하여왔다. 그러나 지난 여름 나의 ‘휘청거림’은 이런 면벽이 마음공부와는 전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었다. 앉아있는 동안 최면의 효과만을 누려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목적이 너무나 뚜렸했었기 때문이었을까? 다리를 포개고 앉으면서도 나는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데 어쩌면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큰 효과가 없음에 계속 불평불만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나를 죽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 잡혀있었다. 점차로 도대체 ‘나’라는 놈은 어떤 놈이기에 아무리 ‘나’를 죽이려 해도 또 ‘나’라는 고개를 들고 나오는 걸까? 이런 끝없는 싸움은 언제까지 해야하는 걸까? 하고… 이런 공부는 어떤 힘이 되어 줄 수 없음을 근래에 깨달았다.
그러나 한가지 나에게 작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신기한 일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 공부를 시작하고서 부티 자주 나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남에게만 쏘아대던 화살이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스님께 들었던 법문 가운데에 “일체가 나로 인해 생긴 것이니 나로부터 풀어야 합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나를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게 해주었다.
이만큼 크기까지 부처님이 2500년 전에 說했던 그 가르침이 얼마나 큰 의지처가 되어주고 있는지 모른다. 참으로 부처님 가르침의 가피를 많이도 입었다. 오직 삶의 피난처는 부처님 품안 밖에 없음을 뒤늦게 알았다. 지금은 물기를 빨아들이는 마른 스폰지처럼, 목마른 아가가 엄마 젖을 먹듯이, 감로수처럼 달디단 말씀 하나하나가 다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주고 있다. 생활가운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부처님은 이런 경우 어떤 말씀을 하셨었나’ 하고 경전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가 2,5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아직도 살아있음에 매번 크게 놀라고 만다.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는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통점이 많은가보다.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 하나하나가 우리의 현재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작은 실천이라도 따라준다면 이 세상은 道人人口가 늘어날텐데… 나도 도인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三歸依의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를 할 때마다 많은 삶의 통증을 가라앉혀 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통을 잠시 멎게 하는 진통제로 알고 먹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진통제로 쓰지 않고 병의 근원을 제거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이젠 苦라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방법, 밑동까지 파 들어가는 작업이 하고 싶어진다.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싶다. 진정한 수행다운 수행을 한 번만이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대장부처럼 일생일대의 변혁을 위해내기 나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싶다. 곧 작은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다.
열린마당
나의 감정
/ 이경한(불교학과 4년 日空스님)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어느 싯구절에 가을이 되면 함부로 노(怒)했던 것이 후회스러워진다는 그런 말이 있답니다. 오늘 아침 울긋불긋 물들어 가던 우리 절 뒷산이, 때마침 내린 가을비에 더욱 맑게 보여 나를 감동케 하더니 문득 일상을 경영하는 나의 감정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옛 스님들은 平常心이 道라고 했다지요! 그렇지만 나는 아직 젊은 스님인 까닭인지 사람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여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습니다. 또 화도 잘 냅니다.
잘 웃는 것은 흉이 아니라 하실지 모르지만, 마음을 조복하여 경망한 경계가 생기지 않아야, 그런 묵연함이 흔들리지 않아야 수좌의 위의라고 일컫는데 우수운 재담 한 마디에도 손뼉을 치고 소리내어 웃으며 또 이러함을 즐겨하니 이는 승체전무(僧體全無)라는 말에 조금도 빠짐이 없어 스스로 졈연쩍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본래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그런지, 혼자 있다가도 괜히 실쭉실쭉 잘 웃고 이따금 도반 스님들을 만나면 다들 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니까 그리 싫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가벼워 보이고 채신없어 보일 것 같아 요즘은 각별히 조심하는 바입니다.
잘 우는 것도 큰 허물입니다.
세상 살다보면 항상 마음에 맞지만은 않는 탓에, 속도 상하고 마음이 언짢을 때도 많은데, 그러함에 당하여 오래두지 않고 훨훨 잊어야 장부답다 할 것입니다. 나는 좀 지나면 털고 일어나기는 하는데 일어서기까지 혼자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어느 쩍엔 혼자 방에 틀어박혀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울다가 자다가 한적도 있습니다.
우리 은사 스님께 일 년 넘게 찾아가지도 않다가 혼자 외로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죄송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에 며칠을 그랬고, 2학년 때던가 유난히 찬바람이 일렀던 추석 명절에 아픈 몸으로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 썰렁한 자취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아마 제일 나쁜 감정일 겁니다.
나는 화가 나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예전엔 이것 때문에 어른 스님들께 버릇없다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습니다.
또 겉모습이 화난 사람 같아 보여서 처음 보는 이들에게 오해 받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성격이 급해서 별일 아닌 것 가지고도 화내는 적이 많습니다. 같이 학교 다닌 스님들은 다들 잘 아는 웃지 못 할 일들도 몇 번 있었습니다. 졸업하기 전에 내가 걷어차서 부숴놓은 석림회실 문을 꼭 고쳐놓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화를 내고 나면 돌아서서는 꼭 후회를 하지만, 그 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것도 무슨 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감정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라니, 웃고 우는 것도 선택 받은 축복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온갖 인연을 다 버리고 부처 되겠다고 집 나선 사람이 감정의 동요를 갈피 잡지 못하면, 세간의 머리 긴 사람과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수행이 덜 된 탓이고 마음에 먹물 빛이 덜 든 까닭이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에도 깨친 이들은 삼매에 들어 무상함을 관했을 뿐이지만, 아직 번뇌를 여의지 못한 이들은 슬피 울었다고 하니 크게 본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내게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있어서 이것은 아무리 해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른 새벽에 예불을 마치고 고개를 들면, 검푸른 하늘빛에 어슴츠레 비치는 부처님 얼굴은 나를 항상 환희케해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내가 아주 귀여워하는 김천에 사는 초등학생 꼬마가 연필로 더듬더듬 편지를 적어 보내 왔을 때, 그 천진함에 감동해 버리는 나는 좋아서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를 먼 훗날, 내가 수행을 열심히 해 큰스님이 되고 삶과 죽음의 모든 반연을 모두 끊어 버릴 때, 열반의 기쁨을 알아버릴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를 겁니다.
신행단체
반야회
“맑고 깊은 지혜, 깨어 있는 자아”라는 시비 이전의 뭉클함이 가슴에 와 닿으면 그것이 반야이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60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불교는 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우리 젊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체계화하여 역사와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널리 포교에 이바지해야 할 때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생명 존중과 평등사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어야 할 때인 것이다. 각자의 내심으로는 신심을 내어 신앙심을 깊게 하고 타인에게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가르치며 불국정토를 이루도록 하자.’ 이것이 반야 회칙전문의 내용이며 반야회를 만든 정신이다.
반야의 처음 시작의 인연은 1991년 5월 동국대 불교학생회 모임에 전산원생이었던 반야1기 회원선배가 우연히 참가했고 그 자리에서 동국의 건학이념과 교육목적에 맞는 학생 신행동아리가 동국대학교 전자계산원에도 있어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님이시던 지수 스님의 많은 도움으로 창립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반야회를 거쳐간 회원들이 동문회를 결성하여 정기모임은 물론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반야회는 동국대전산원에서 유일하게 불도를 접할 수 있는 동아리이며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침묵이 아닌 불법의 지혜로 풀어나가는 모임이다.
신행활동으로는 매주 정각원에서 법회를 통하여 스님께 법문을 듣고 한 달에 한번은 도심 근교의 절에서 동문 선배님들과 같이 나들이 법회를 한다.
방학기간에는 수련회 겸 성지순례를 통해 지역의 특수성을 간직하고 변화해 온 한국불교의 참모습을 보고 배우고 있다. 아울러 법문의 내용을 실천함으로써 참다운 인생관 실림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동아리이다.
현회원은 26명이며 회장은 1학년의 조학수 학생이며 부회장은 1학년의 박점숙 학생이다. 각부는 교화, 활동, 화술, 문화부서로 세분화된 부서를 이루고 있다.
지도법사님으로는 원융스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며 지도교수님으로는 백원기 교수님께서 수고해 주시고 있다.
불교건강법
장 불안증
/ 김장현(서울캠퍼스 보건소장)
지속적인 설사나 변비 또는 설사와 변비가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변비와 복통이 있다가 차츰 묽은 변이되면서 배변 횟수가 늘고 복부 팽만감, 복부 불쾌감 등이 같이 나타나면서 변이 가늘어지고 변을 본 후에도 뒤가 무주룩한 감이 계속되는 증상으로 심하면 점액변이 되기도 하는 증상인데 이와 같은 장 불안증을 과민성 질환이라고 한다.
전신증상으로 두통 현기증 피로 우울 식욕부진 등의 증상을 동반할 수도 있다. 긴장상태가 되면 빈뇨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긴장상태가 해소되면 증상도 없어져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앞에 언급한 증상이 지속하여 나타나게 된다.
원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정서불안을 주원인으로 꼽는데, 물론 현대인의 경우 모든 병에서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닌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러나 그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개체의 특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이 경우 유전적인 소인, 나쁜 음주습관, 나쁜 식사습관, 나쁜 배변습관 또 스트레스에 지나치게 민감한 성격 등이 스트레스와 복합되어서 하나의 증후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스트레스는 받고 있지만 그 스트레스에 지나치게 민감하여서 그 반응이 육체에 질병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여유있게 반응하면서 같은 정도의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로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에 대하여 각자 이겨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 또한 규칙적인 식사 습관과 배변습관이 중요하며 개인에 따라서 특히 어떤 음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 경우에는 꼭 삼가 해야 한다. 그 외는 골고루 먹는 것이 좋다. 과지방식이나 자극적인 음식은 장에 부담이 되므로 삼가해야 한다.
이병의 치료는 주로 나타나는 증상에 따라서 치료법이 달라지는데, 우선 설사가 주증상이면서 그 원인이 너무 깊은 생각 즉 신경과다가 원인인 경우는 칠정을 다스려야 한다. 이때 쓰이는 主藥이 柴胡(시호)라는 和解之劑(화해지제)이다. 장기의 기능이 허약하다고 판명되면 비허, 신허, 기허 모두 脾胃腎(비위신)을 따뜻하게 하여 장 기능을 활발하게 하는 것이 좋다. 대표적인 약으로는 파고지, 육두구, 정향, 육계 등의 약물을 쓴다. 변비가 주증상인 경우는 복통이 잘 병발하며 이 경우 평소 식습관을 잘 살펴보아서 섬유질음식 섭취가 충분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복근운동도 좋은 방법이 된다. 한방에서는 승기탕류나 도인과 같은 약물을 사용한다. 변비와 설사가 반복하면서 나타나는 과민성장증후군이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각자 체질 특성에 따라서 신중하게 처방하여야 한다.
예방법으로는 매실차나 매실엑기스를 장복해보면 도움이 되며, 한약재 중 현지초를 차로 다려서 꾸준히 마시면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소 여유있는 마음가짐, 절제 있는 생활이 가장 중요하다.
정각리포트
4백50년 전 미이라에서 陀羅尼 찍힌 옷 최초 발굴
지난 11월 6일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릉리에서 조선조 중종 때 정5품 찬의(贊儀) 벼슬을 지낸 鄭溫의 묘소 이장작업을 하던 중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불상과 다라니가 찍힌 옷가지가 발견되어 불교계와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부장품은 놀랍게도 4백 50년 전 매장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비단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옷가지 4점에 목판본으로 추정되는 불상과 다라니 등의 만다라가 찍혀 있다. 특히 비단저고리의 앞가슴 양쪽에는 불상과 비천상이 각각 붉은 색으로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고 저고리 아랫부분에는 ‘옴마니 반에 훔’ 진언이 범어로 새겨져 있다. 치마에는 다라니 경판 4폭이 찍혀 있으며, 무명천에도 부적 형식의 다양한 만다라가 찍혀 있다.
지금까지 옷에 경전이 쓰여 있는 것은 상원사에서 보관중인 세조어의(보물 제793호)가 유일한데, 출토복식 가운데 다라니 경판이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당시 불교생활상과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목관 내부도 목판본 불상과 다라니가 찍힌 화선지로 사방을 장식하고 있는데, 관의 내부에 불상과 다라니 경판이 찍힌 예는 아직 학계에 보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는 조선 전기까지 수의와 관에 다라니를 찍는 장례문화가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교미술사가 이기선씨는 옷과 관에 다라니를 새기는 것에 대해 “다라니는 시신과 음택에 나쁜 것이 끼지 않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으로 관 자체가 곧 반야용선을 의미한다”고 설명 했다.
이번 발굴은 조선시대의 불교가 숭유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반에 광범위하게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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