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월간 정각도량 / 11월호 / 통권 19호 / 불기
2539(1995)년 11월 1일 발행 |
|
|
|
고승법어 오늘을
사는 지혜 / 무진장 스님(전 조계종 포교원장)
오늘
설법의 주제가 '오늘을 사는 지혜'입니다.
원래 법회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전해 드려야
하는데 오늘은 강연 형식으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어느
서구인의 글 중에 보면 현대문명을 세
가지 관점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핵무기에 의한 세계 인류의 대량살상이
문제이다.
둘째는
공해에 의한 완만한 세계 인류의 대량살상이
문제이다.
셋째는
가치관의 혼란에 의한 세계 인류의 정신적인
대량살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법문은 세 번째 문제인 가치관의 혼란에
의해 일어나는 인류의 정신적인 대량학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부처님 출가 당시의 시대상황과 출가동기를
살펴보면서 부처님께서 무엇을 고민하셨고,
그 해결의 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시기는 철기시대 후반으로 인도는
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운석가족이라는
조그마한 부족국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할 당시 두 가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를 나아준 어머니는 왜 일주일만에 돌아가셨는가?
둘째는
주위의 강대국 속에서 내가 태어난 이
조그마한 부족국가가 장구한 세월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어머니가
일주일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에 대해서
삶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서 자주 명상에
잠겨 生.老.病.死의 苦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인도의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군소부족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위협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들이 출가의 동기를 제공하고
출가 이후 오랜 수행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삶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 이후 새로운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의 카스트라는 계급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어떻게 평등한 사회구조로 바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인간의 평등주의를 주장하면서 능력제의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둘째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생, 노, 병, 사의 고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하는 고민 속에서 고통이 없는
세상을 갈구하는 해탈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왜 인간은 전쟁을 하고 살까? 전쟁을 하지
않는 인류는 존재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
을
하면서 반전과 평화를 갈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은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인가?
왜 행복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지속되지
않을까?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의 조건이란 평등. 자유. 평화 그리고
반전사상이 우리들의 행복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 당시의 청년의 고민과 오늘날 청년의
고민은 무엇일까? 부처님 당시 청년의
고민은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인간의 고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핵심사상은 우파니샤드의 철학이 있습니다.
이 우파니샤드 철학은 業과 輪@사상으로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業과 輪@說이 불교의
핵심사상인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불교의 사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업과 윤회사상이 인생의 苦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당시 청년의 고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시대 청년의 고민은 무엇일까? 오늘날
청년의 고민은 단세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고민, 즉 경제적인 욕망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시대 사람에게 있어서
생. 노. 병. 사 따위나 평화, 평등. 자유니
하는 그러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욕망 하나만 채워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모든 종교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치품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는
황금만능주의 속에서 들치기를 하고, 부부가
서로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부모와
자식이 죽이고 죽이는 이러한 상태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색되어진
우리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
가하는
것이 오늘날 가장 큰 과제로 등장한 것
것입니다. 돈에 의해 과대포장 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올바르게 보는 길은 우리
국민이 고요를 즐기는 것 밖에 없습니다.
고요하지 않으면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옛날 거울이 없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이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빗물을 받아 그
속에서 얼굴을 보았습니다. 강의 흐르는
물속에서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고요 속에서 자기의 가치본질을
찾아내는 지혜를 증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무질서의 시대, 황금만능의 시대를
구원할 메시아는 과연 누구인가? 불교의
미름, 기독교의 예수, 이슬람의 마호메트,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 등 그 누구도 이
시대를 구원할 메시아는 아니다. 오늘날의
진정한 메시아 부처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은
부처의 탈을 쓰고 스스로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있다. 탈을 벗어라. 그러면 내가
바로 부처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줄 진정한 메시아인 것입니다.
객관적인 메시아는 오지 않습니다. 개개인
스스로가 이 세상을 구원할 주체임을 확신하는
것이 참 메시아인 것입니다.
부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움직이고,
동작하고 있는 바로 그가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본래 면목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내가 널리
일체 중생을 돌아보니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혜덕성을 갖추고 있다. 다만 망상 집착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육조스님의 말씀 중에
'우리 마음의 바탕에 거짓이 없는 것을
율법이라 하되 그 마음의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을 일러 定이라 하폭 우리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일러 지혜라고 한다.'
이것을 바로 戒. 定. 慧 삼학이라 한다.
우리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는 객관적인 인식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정을 이루었을
때 가장 선명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깨달음의 종暴 지혜의
종교인 것입니다.
간단하게
결론을 말씀드리면 오늘날 가치관의 혼란을
통한 인류정신의 말살을 막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가치본질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내재하여 있는 참 본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본성을 주는
지혜가 바로 불교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신으로의 회귀를 통하여 오늘날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각도량 사물(四物)의
본 뜻 / 이도업(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요즈음
「우리적인 것」에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사물놀이」 행사를 자주 보게 된다.
사물(四物)놀이는 「풍물(風物)놀이」라고도
하는데 '바람이 일어나는 놀이' 라는 뜻일게다.
바람이란 물론 신바람이다.
농부들이
한해의 농사를 지어놓고 꽹과리 북 장고
그리고 징의 사물을 두드리면서 신바람이
나게 자축하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리라이
사물놀이는 우리네 민속놀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거리였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좀 다른 데 있으며 불교 사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큰
절에 가보면 예외없이 사물(四物)이 걸려
있다.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운판(雲板)과
목어(木魚)가 그것이다. 절에서는 단 하루라도
거르는 일 없이 이 四物을 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과 저녁에 가사 장삼의
단정한 모습으로 四物을 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는 60만 내지
100만 까치의 생명체가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합치면 그렇게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J 「십지품 에서는
일체의 생명체들을 열 가지 종류(十類
衆生)로 분류하고 있고, 좀 더 줄여서
불교에서는 태, 란, 습, 화의 네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즉 태(胎)에서 태어나는
것, 알(卵)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濕)에서
태어나는 것, 무엇인가가 갑자기 변화(化)해서
생겨나는 것의 네 가지로 나눈다. 이것을
사생(四生)이라 하며 부처님을 四生의
자부(慈父)라고도 한다.
절에서
조석으로 범종과 법고 그리고 운판과 목어의
四物을 치는 것은 이 네 가지의 생명체를
위한 것이다. 만 생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는 梵鍾을 치고 사족(四足)
동물의 영혼을 위해서 법고를 두드린다.
날
짐승의 영혼을 위해서는 구름 모양의 운판(雲板)을
물고기들의 영혼을 위해서 목어(木魚)를
두드린다. 四生의 영혼들은 四物소리를
듣는 동안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다.
예를
들면 무간(無間)지옥에서 지옥고(苦)를
받고 있는 인간이 범종 소리를 들으면
듣는 그 동안만은 모든 시름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네발짐승의 영혼들은
법고 소리를 듣는 동안은 안락해 질 수
있다고 한다.
종소리가
길면 길수록 좋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절에서는 새벽에 33번 저녁에
28번 종을 치는데, 종을 한번 칠 때 1분간
울린다면 지옥의 중생들을 33분 동안 지옥고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한번 침에 3분간 울린다면
99분 동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중생들은 일분일초라도
더 오래 종이 울려줬으면 한단다. 옛날부터
우리네 선조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염원을
담아 오대산 상원사의 종이나 경주의 에밀레종을
만들었던 뜻이 여기에 있다.
절에서
치는 사물(四物)에는 산 생명은 물론 죽은
영혼들까지도 편안하게 해준다는 믿음과
염원(念願)이 담겨져 있다.
일주문 부처님의
환술(幻術) / 권기종(불교문화연구원장)
부처님
재세시 사위국의 왕이었던 파세나디라는
재가제자가 있었다. 파세나디왕은 재가불자가
알아야 할 일이나 또 궁금하게 생각하는
많은 문제들을 부처님께 여쭈었다.
재벌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나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든지, 또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돈을 좋은 일에 쓰지 않고 아끼기만 하는
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또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나에게만 보시해야 복을 얻고 다른
이에게 보시하면 복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는지,
파세나디왕은 대단히 비대한 사람이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이 비대증을 줄일 수 있는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일일이 성실하게 대답을 주셨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사문 고오타만은 환술(幻術)을 알아 세상
사람들을 돌이킨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 말이 사실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사실입니다. 나에게는 환술이
있어 세상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시었다. 그렇다면 그 환술이란 어떤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는 사람은 그
죄가 많지만 살생을 하지 않으면 그 복이
한량이 없다. 이와 같이 도둑질, 음탕한
짓, 삿된 소견을 가지고 행동하면 죄가
무겁고 그러한 짓을 하지 않으면 복이
무량할 것이오. 내가 아는 환술(幻術)이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라고 답하셨다.
이
말을 들은 파세나디왕은 '그렇습니다.
그 어떤 중생이라도 이 환 술을 알면 큰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같은 부처님과 파세나디왕의 대화를 통해서
몇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오늘 우리들의 일상에서 있을 수 있는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견해와
입장이요,
둘째,
부처님의 환 술은 우리들의 이성을 초월한
그 어떤 신비적 요소가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며 정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환술이란 일반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환술이며,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파세나디의 생각처럼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환술을 배워 실천해야 할 것이다
정각논단 불교와
중국 시가(詩歌) / 백승석 (중어중문학과교수)
불교가
중국에 전래한 초기에는 중국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중국사회 또한 불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략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귀족의 상류사회에서부터
중시되기 시작한 불교는 결국 중국고대문화의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위진(魏晉)이후의 중국문학은 불교의
영향으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시가(詩歌),
산문(散爻), 소설(小說), 희곡(戱曲) 등
여러 장르의 표현형식과 내용은 물론 창작이론방면에서도
이전의 전통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중요하고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불교 경전의 문체와 불교의
가치관, 생활관, 생명관 및 불교선교 방법에
의한 충격과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중국시가에
대한 불교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 불경의
전래와 번역으로 말미암은 범어학(梵語學)의
영향은 중국인 스스로 자신들의 언어에
사성(四聲)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에 시인들은 음성의 조화를 꾀하기 위하여
피해야 하는 여덟 가지 규칙인 '팔병설(八病讒)'을
놓게 되었으며, 결국은 새로운 시제인
영명제(永明體)를 만들게 되었다. 중국의
고시(占詩)는 격률상 비교적 자유로운
고제시(古體詩)와 엄격한 평측(平 )의
조화를 추구하여 일정한 성운과 형식상의
규칙에 따라 짓는 근제시(近體詩)의 두가지로
나뉘는데, 이러한 근체시가 바로 영명
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영명 체에
있어서 성음의 조화를 지키기 위한 팔
병설의 이론 기초는 평(平).상(上). 거(去).입(入)의
사성에 있고, 사성은 불경의 전래와 번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니 근체시의 탄생은 불교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
사상은 시가의 내용에 많은 자극을 주어
시가의 면모를 더욱 다양하게 하였다 중국사단은
위 진대에 이르자 불안한 현실 사회로
말미암아 대자연의 산수와 상상의 세계를
그리워한 나머지 유학(懦學)이 몰락하고
노장(老莊)사상이 발흥하여, 현학(玄學)사상이
시가의 기조를 이루었다. 이와 동시에
불교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시인의 시가
창작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동진(東晋)
시대의 불교 반야학(般若學)의 학자 지둔(支遁)은
당시의 뛰어난 불교 시인이었다. 현존하는
그의 시는 대개 노장사상과 산수자연을
결합한 것이다 진송(晋宋) 무렵의 대시인
사령운(謝靈雲, 385~433)은 역시 불학(佛學)을
같이 연구했던 작가로써, 그는 자연경치의
묘사에 뛰어났다 그는 지둔을 이어서 시가
작품 속에 산수와 불리(佛理)를 결합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석벽정사환호중작(蔚壁考舍還湖巾作))을
보면 다음과 같다 : '昏旦變戮候, 山水含淸暉,
淸暉能娛人, 瀞좋憺,E梟붉, 出谷日尙早,
加舟陽已旅 林壑斂暝色, 雲霞收夕露, 芟荷邕映蔚,
淄釋相因依, 披拂越南俓, 愉悅Y匿東屬,
慮澹物輕, 意'眸理無i奎, 寄言攝生客,
試用此道推 (아침저녁의 날씨 변화 심해도
산천은 언제나 아름다워라, 아름다운 경치는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어 나그네의 고향생각
잊게 하네. 이른 아침 계곡을 나왔는데
배를 타니 해는 이미 어두워지네. 숲 속
계곡은 붉은 저녁노을을 모으고 노을 진
구름은 저녁안개를 거두네. 무성한 마름과
연꽃은 서로 비춰 빛나고 창포과 돌피는
서로 뒤섞여 얽혀 있네. 숲 속을 헤쳐
나와 남쪽 길로 접어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동쪽 마루에 눕는다. 마음 비워 고요하니
세상사 절로 가볍게 보이고, 만족스런
기쁜 마음,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라 양생에
힘쓰는 이들에게 전하노니 이 방법을 한번
써보는 것은 어떨지.)' 이 작품은 비록
명백하게 불교교리를 선양하고 있지
는
않지만 불교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현언시(玄言詩)가
쇠퇴하고 산수시(山水詩)가 성행하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당대에
이르러 일어난 선종(禪宗) 역시 시가에
영향을 미친다. 선과 시는 모두 내심의
제 흠이 필요하고 모두 어떤 계시를 중시하며
또한 모두 언외의 뜻(言外之言)을 추구하는
유사성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었다. 당대에
유명한 몇몇의 시인들은 선에 심취하여
시를 짓는데 선리(禪理)와 선취(禪纏)를
표현하였고, 선사(禪師)도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인생의 이상과 경지를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선 이 시가 속으로 스며들어가
당대 시가 창작에 새로운 면을 열게 되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 왕유(王維, 70l一761)를
들 수가 있다. 그의 字는마힐(串詰)로
이름조차도 <유마힐경(維摩經)>에서
따온 것을 보아서도 그의 독실한 불교에
대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백을
시선(詩仙), 도보를 시성(詩聖)이라 하는
것 저럼 왕유를 시불(詩佛)이라 하고 있다.
왕유의 시들은 산수 시가 대부분인대 전원
산수의 묘사를 통하여 은거의 생활과 불교의
선리를 선양하였다. 그의 <녹채(鹿柴)>
같은 작품을 보면 '空山不見人, 但聞語響,
返景深林, 愎照靑苔上. (텅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단지 사람의 말소리만 들려오는데,
석양의 노을은 깊은 숲 속 파고 들어와
푸른 이끼 위에 다시 환히 비춘다.)' 먼
산의 들리는 사람 소리는 산의 공허함을
두드러지게 한국 황혼 무렵의 석양의 희미한
빛이 깊은 숲 속의 푸른 이끼에 반조(返照)되는
것은 세계의 무상(無常)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선종의 교리에 의거하여, 녹채(鹿柴)의
깊은 삼림 속 저녁 무렵의 경치묘사를
통하여 적멸무상(寂滅無常)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또한 그의 <신이오(辛夷l高)>를
보면 : '木未深蓉花, 山中發紅夢, 同戶寂無,
紛紛開且落. (나무 끝에 피어난 부용꽃
같은 목련꽃, 산속에 붉은 꽃송이 터뜨렸는데,
골짜기 오막살이엔 그윽이 인적이 없고
꽃들만이 어지러이 피었다가 떨어지네.)'
그윽한 깊은 계곡 속에서 신이화(목련꽃)가
한창 피었다가는 또 져서 떨어지는 것을
읊고 있다. 이것은 꽃이 홀로 피고 지는
모습을 통하여 작자의 운명에 맡기는 염당공령(恬淡空靈)의
심경을 표현하였는데, 바로 선종의 인생
처세 태도의 형상적 표현이다 왕유와 같은
유형으로 맹호연(孟浩然, 689~740). 위응물(韋應輧,?).
유종원(柳宗元, 773~819) 등과 같은 시인들이
있다. 이밖에도 통속적인 언어로 불교사상을
표현한 시인들이 있는데, 왕범지(王梵志).
한산자(寒山子). 습득(拾得)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들은 초. 중당 시기의 승려로서,
의식적으로 게송(偈頌)의 형식을 빌어
시가의 표현방식을 개조하려고 하였다.
먼저 왕범지의 작품을 보면 : 志畝看襪,
人皆道是錯, 乍可刺爾"良不可隱我岬.
(내가 양말을 뒤집어 신으니 사람들이
모두 잘못 신었다 야단이네. 잠시 너 회들의
눈에 거슬릴지언정 내 발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도다.)' 평이하고 통속적인 언어로
세속의 견해를 부정하고 초탈의 심경을
추구하는 불교사상을 표현하였다. 한산
자의 <모동야인거(茅棟野人居)>
: '茅棟野人居, 門前車馬疏, 林幽偏聚鳥,
略潤本藏魚, 山果拜亭兒摘, 鼻田共婦鋤,
家中何所有, 唯有一牀書. (초가집 야의
거처이기에 문 앞에는 수레와 말의 소리
적네. 숲은 깊어서 오로지 새들만 찾아
들고 시내가 넓어서 본래 고기가 많았어라.
산과일은 아이 데려가 따고 물가 텃밭에는
아내와 함께 김을 맨다. 집안에는 무엇이
있을꼬? 오직 책상 가득 책 뿐일세.)'
작자의 청유냉담(淸幽冷淡)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이 같은 층리 시인들의 통속적인
시가들은 당시의 시단에 영향을 주었다.
그 주요 인물로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있는데, 그의 <만춘등대 운사남루증상선사(映春置大雲寺南樓贈常禪士)>를보면
: `花盡頭新白, 登樓意若何, 歲時春日少,
世界苦人多, 愁醉非因酒, 悲吟<是歌,
求而治此病, 唯勸言賣楞岱u. (꽃이 지고
나니 머리가 새롭게 희어 지는데 누대에
오르는 뜻은 어떤 것인가. 해마다 봄날은
적고 세상에는 괴로운 사람이 많네. 근심에
취한 것은 술 때문이 아니고 슬픈 읊조림은
노래 때문이 아니리라. 스승을 찾아 이병을
고치려면 오직 능가경을 읽을 것을 권하
노라.)'
다시 그의 <회조밀한실사상인견과(喜照審閑實四上人見過)>를
보면 : '紫抱朝士白髮禽, 輿俗乖兢與道通,
官秩三逈分洛下, 交遊一半在僧中, 泉碣世界終須出,
香火因緣久願同, 齊後將何充供菱, 西軒泉石
匕窓風. (자주빛 도포 입은 관리가 백발의
노인인데 속세와는 멀리 떨어져도와 통하네.
관직은 세 번이나 낙양에 머툴게 되어
사귀는 사람은 스님이 절반이네. 냄새나는
속세에서 벗어나서 향불 피우는 불가와
인연 맺은 지 오래네. 재를 지낸 뒤로는
무엇으로 공양드리나, 서쪽 채 샘물 흐르는
바위와 북창으로 불어 드는 바람으로 들여
볼까나.)' 백거이도 만년에는 불교에 심취했던
시인으로 여기에서도 그 면모를 살펴 볼
수 있겠다. 그는 특히 만년에 스님 여만(如滿)과
더불어 향화사(香火寺)를 만들어 향산(香山)을
왕래하며 스스로를 향산거사(香山巨士)라
칭하기도 하였다.
송대(宋代)에서도
선종이 계속 유행하였는데, 많은 문인들도
불교를 믿어 참선을 하고 승려들과도
교류하였다. 대표적인 시인으로 소식 (蘇輒
1036~1101)을 들 수 있는데, 소식의 <제서림벽(題西林壁冷)>
보면 : '橫看成倫成峰, 遠近高좋氏各平同,
不識廬山面目, 只綜身在山中. (가로로
보면 깊은 골짜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이네,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 각각 다르구나,
예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함은 다만 제
스스로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네.)' 또한
그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歷能줄稟舊)>를
보면 다음과 같다 : '森生到處知何似,
應似儁민蹟雪泥, 促上偶然留指斥, 鴻埇那手算計東西,
老僧巳夕成新塔, 餐壁無由見舊題, 往日畸
還記否, 長人困寒驢嘶.(이 세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일들은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그것은 날아온 기러기가 눈
녹은 흙탕을 밟은 것 같으리, 흙탕에 우연히
기러기 발자국이 남을 수 있겠지만, 기러기
날아가 버린다면 어찌 다시 그 방향을
추측이나 하겠는가. 노승은 이미 죽어
새로운 탑을 이루고 허물어진 사원의 벽에는
지난날 우리가 써놓은 시구는 보이질 않네,
그대는 지난날 힘들었음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길은 멀어 피곤하고 바꾸어 탔던 나귀의
절름거리며 울던 울음소리를.)'
이밖에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유명 시인으로 왕안석(王安蔚,
1021~1086)과 황성견(黃庭堅,
1045~110l)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불교와 종국시가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밖에도 종국시가의 한
형태인 원명(元明)시대의 산곡(敗曲)도
대부분 은일(隱逸)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불교의 영향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교리강좌 회향
/ 정승석 (인도철학과 교수)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미덕이란 대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남을 도와주는 행위이다.
우리의
전래 민담에서, 추수가 끝난 가을밤에
서로의 볏가리를 몰래 오가며 자기의 볏단을
상대방의 볏가리에 얹어 주길 반복하다가,
구름 사이로 터져 나온 달빛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고서야 자기의 볏가리가 줄어들지
않은 이유를 알게되면서 더없이 훈훈한
형제애로 얼싸안은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감동을 자아낸다.
이
이야기에서 두 형제의 행위는 당연히 미덕으로
칭송될 만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형제간이 아니라 협연 관계가 없는 이웃이었다면,
그 행위는 지극한 미덕의 표본으로 회자하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미덕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음으로써 자신에게
도래할 유형적이거나 무형적인 혜택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길 진정으로 바란다면,
이 정신은 그야말로 미덕의 극치라고 다른
미덕과 구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미덕의 극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정신을 보살이 지녀야 할 당연한 자세라고
강조한다. 그 보살에게는 '미덕의 극치'보다
더한 어떠한 칭송도 무의미하다. 그 과보가
자신에게 되돌아오길 전혀 바라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특별한 수사(修辭)로써 치장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만, '숭고한 정신'이라는 표현
정도로는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특히 대승 불교에서는
'회향'(廻向)이라고 한다. 여기서 회향이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 어떤
선행의 과보를 다른 사람에게 가도록 돌리는
것이다. 아울러 또 한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불교에서의 수행이나 도덕적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기 때문에, 자신이 실천한 모든 노력의
결과가 그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향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실천한 선행을 자기의
깨달음이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향의 정신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처음
예배 공경함으로부터 중생의 뜻을 그대로
따라 받아들이기까지, 그로 인한 공덕을
온 세상에 있는 일체 중생에게 돌려보내,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합니다. 나쁜 짓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길의 문은 닫아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어 보입니다.
중생들이 쌓아 온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부를
내가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없이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힘씁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회향합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회향은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회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자기의
선행을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보리 회향'과 남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중생 회향'이다. 보리 회향은
선행의 공덕이 실생활의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보다도
깨달음을 성취하는 결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다. 한편 중생 회향은 자신이 실천한
선행의 공덕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돌리는 것, 즉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리 회향은 불교의 수행과 실천에서 궁극이긴
하지만, 중생 회향은 보리 회향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리 회향보다 더욱 귀중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면 '중생을 위해
선행을 닦아 보리 즉 깨달음에 회향하는
것은 비가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자신을 위해 해탈을 구하는 것은 비가
육지로 내려가 이내 다시 말라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다.
회향을
3종으로 분류할 때는 위의 두 가지에 '실제(實際)
회향'을 추가하는데, 이는 불교 정신에
입각하여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진실한
회향이라고 이해된다. 그 의미는 '무상한
것을 멀리하고 진실한 이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선행을 평등하고 불변하는
진리 자체로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쉽게 말하면 아무런 집착이 없이
불도를 실천하는 정신을 회향과 접목시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진실한 회향은
회향하는 자도 회향하는 법도 회향하는
곳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 실제
회향이란 바로 이 진실한 회향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뭔가의
결과에 집착하는 '취상(取相) 회향' 이라고
불린다. 대지도론에서는 ''만약 집착한
뭔가의 결과를 얻음이 있어 회향한다면,
큰 이익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향은 독을 섞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에
독을 섞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하면서
진실한 회향을 강조한다.
불교
신자들이 보통 선호하고 있는 것은 이상과
같은 3종의 회향보다는 중국의 정토 신앙에서
정립된 2종의 회향이기 쉽다. 당나라 시대의
담란(曇鸞) 스님이 「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
정립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왕상(往相)
회향'과 '환상(還相) 회향' 이다.
왕상
회향은 자신의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돌려,
함께 아미타 이래의 안락 정토에 태어나길
기원하는 것이고, 환상 회향은 정토에
태어난 끝에 다시 생사의 세계로 되돌아와서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함께 불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환상 회향은 일단 정토에
왕생한 사람이 자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다시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서 다른 사람을
교화한다는 대승 특유의 보살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이미
선의 이상향을 인식한 자가 다음 단계에
현실 세계에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다. 이 같은 사고와만 견주어
본다 하더라도 회향의 정신은 인류가 꿈꾸는
진정한 이상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불가결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경전의
세계 심지관경 / 이 만(불교화과 교수)
부처님께서
일찍이 설하신 말씀은 그 내용이나 형식
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전달되는데, 그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특히 중요한 것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sutra)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전 중에서도
어떤 것은 한 가지의 주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 있는가하면, 다른 것은 여러
가지의 사상이나 수행 등에 관하여 이를
종합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보고자 하는 심지관경(心地義區經)은
그 구성으로 보아서 후자에 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전인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경전이 인도의
대승 불교 말기에 성림된 것으로써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사상을 거의 모두 섭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구체적인 것을 보면,
우선 이 경전에는 반야경과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 열 반경 및 밀교사상에 관한 것
등 대 승부교사상에 관한 것을 총망라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출가주의를 원칙으로
하여 그 요체가 되는 계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지관(止觀)
등의 수행을 통하여 마음속에 번뇌나 망상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란야(Aranya:
阿蘭若, 寂停處)에 머물면서 불도를 이룰
것을 역설하는 관심주의(蘿心主義)에도
상당한 할애(割愛)를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심지(心地)를 설명함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과거 인 행시(因行時)의 본생담의
내용을 간혹 그 비유로 인용하고 있어서
관심이 더 가는 것이다. 이외에도 부모나
국왕등 네 가지의 은혜에 관하여 보은해야
할 것 등을 강조하고 있어서 이와 같은
추측을 한층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 때문에 이를 일명 대승본생
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이라고도 하는데,
총 13품에 걸쳐서 대승불교사상과 그 수행론이
설해져 있지만 단순히 앞에서 든 대승경전들의
사상을 답습 만한 자세가 아니고 이들
보다 한 걸음 진보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들은 대개 화엄경 등에서
설하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내용을 유가유식(瑜伽唯識)의
관점에서 서술하거나 밀교직인 수행법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한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들 사상이 마침내 실제적인
덕목인 네 가지의 은혜로 귀결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서품에서는 이 경을 설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 앞에서 큰 빛으로 현재 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세에 걸친 일체 사물을
다투어 보이자 사자 후 보살이 이와 관계되는
심지관문(心地觀門)을 설해 줄 것을 권청한
내용이 쓰여져 있고, 보은 품에서는 세간과
출세간에 걸친 네 가지 은혜의 도리와
이사(理事)의 두 관 법에 대해서 설하고
있으며, 염사품(厭事品)에서는 출가에
따른 9가지의 수송한 내용을, 무구성품(無垢性品)에서는
출가인 이 닦아야할 지관법과 일상생활에
관하여 각각 설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5의 아란야품에서는 아란야에 머물었을
때에 얻어지는 바의 것에 관하여, 이세간품(嵯世間品)에서는
앞에서 품에 이어서 아(我)와 아소(我所)
및 7만(七慢) 등에 떨어지는 공포를 면하려면
역시 아란야에 머물러야한다고 설하며,
염신품(厭身品)에서는 37가지의 부정관에
관하여, 바라밀다 품에서는 상근키의 출가
보살이 닦아야 할 10가지의 바라밀에 관하여
각각 설하고 있다. 제 9 공덕장엄품에서는
아란야에 머물 수 있는 수행 조건과 공덕에
대하여, 관심품(觀心品)에서는 상계유심의
도리와 마음으로 얻을 수 없는 경우를
보이고, 발보리심품에서는 공에 관한 관념을
파하고 보리심을 일으킬 것을, 성불품에서는
삼밀가지 (三密加持)의 공덕과 그 수행법을
설하고 있으며, 끝으로 촉루품(囑累品)에서는
부처님께서 문수보살 등에게 이 경전을
잘 호지하고 유통시길 것을 부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심지관경은 다른 대승불교의 그것과
같이 궁극적으로는 중생들이 어디에든
걸림이 없는 마음을 내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자재 하는 해탈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관점에 있어서는 철저한 유심론적인
방법에 있기 때문에 섭대승론 등의 설이
함께 설해져 마침내 화엄교학의 내용에까지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례를
들어 보면, 관심품에서 문수보살이 심지(心地)를
어떻게 관할 것인가를 물으매, 부처님께서
이에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선남자여,
삼계 중에서 마음으로써 주인을 삼아라.
능히 마음을 잘 관찰하면 마침내 해탈할
수 있지만, 관찰함이 없으면 도리어 침륜(沈淪)하게
된다. 중생들의 마음은 마치 대지(大地)와
같아서 오곡과 오 과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마음에서는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 등 모든 것이 여기에서 나오며, 선과
악도 여기에서 나오고 오취(五趣), 유학(有學)과
무학(無學) 독각, 보살 및 여래 등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러한 까닭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마음을 대지(大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라고
한 내용이 그것으로써, 여기에서 보면
유심직인 방법과 함께 유기적인 수행을
통하여 이를 관찰할 것을 설하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마음은 허공과도 같아서 안도
없고 또한 밖도 없으며, 그 중간에도 있지
않는 것이 마음의 근본자리이므로 이를
떠나서는 보살심 뿐만 아니라 신. 구.
의(身.口.意) 삼일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이 경전의 최후의 이론적인 입각지로써
이를 심지관경이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동국과
불교 학부 분리와 학원명 개칭 / 이봉춘(불교학과
교수)
우리
대학이 처음부터 지녀온 사명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우리 문화 창조의 선구자 양성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민족문화의 부본과 함께 폭
넓은 외국문화의 섭취에 내실을 기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였다. 그러나 대학으로의
승격과 더불어 설치된 불교학과 . 문학과
. 사학과의 3개 학과와, 교양의 습득이
설치 목적이었던 전문부위 문화과만으로는
그러한 기대에 제대로 부응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1947년 5월 혜화동 소재 전문부
교사에서 우리 대학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경제학과와 정치학과의 학생을 모집하고
이어 문학. 정경 두 학부를 분리 설치했던
것을 우리 대학으로서는 분명 약진의 초석이
되었다. 이로써 문학부 학생이 정치. 경제학
분야의 강의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고,
정경학부 학생 또한 문학부 각 학과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는 곧 문화와 학문의 폭이 서로 확대
. 교류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로 분리 설치된 우리 대학의 당시
학부 구성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문학부
: 불교학과, 문학과(국문학 전공, 영문학
전공), 사학과
정경학부
: 정치학과, 경제학과
이같은
구성에 따라, 문학부장에는 문학과 주임교수였던
양주동 교수가 취임하였고, 신설된 정경학부장에는
경제학과 주임을 겸하여 최호진교수가
취임하였다.
대부분이
고령인 불교학과 교수와, 학문의 성격상
복고적 경향이 짙었던 국문과와 사학과의
강의에만 귀익어왔던 문학부 학생들에게
정경학부의 신설은 새로운 바람이었다.
최호진 교수의 새 분위기의 강의와, 홍안의
청년 교수 조동필의 '옥스포드 . 캠브리지는
10리 밖에서도 공부하는 바람이 씽씽 불어오는데
우리네 대학은...' 하며 비분강개 조로
학생들을 자극하고는 짙은 안경 너머로
천정의 한 곳을 쳐다보며 시작하던 열강이
모두 새롭기만 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연령차가 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수 . 강사의 연령과 교육경험의 차이도
현저하였다. 당시의 강의풍경과 학원 분위기를
민규호 동문(전 시사통신 이사)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중학시절
동급생이 하나는 교수고 하나는 학생으로서,
그 강의를 청강하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노(老)학생이 많았던 대학부에서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전문학교시절의
후배가 강단에 서고 선배는 그 학점을
받아야 했던 진풍경도 간혹 있었다.
강의하는
모습도 칠순에 가까운 노교수의 천공(天空)을
달리는 듯한 노련한 강의가 있는가 하면,
일본교육을 받은 26-7세의 청년강사는
'우달(友達)' '사달(私達)' 이라는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써서 학생들을 아연케 하고도
태연히 단을 내려오는 웃지못할 일들도
있었다. 그래도 실력 있는 젊은 교수나
강사는 노학생들의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40여
세의 노학생이 30세 전후의 청년교수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광경도 유쾌한 추억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우리 대학 내의 진풍경은, 사회 .문화적으로
격변기였고 과도기였던 당시로써는 으례
있을 법한 일이었다. 전문부에서 좌익계
교수이던 백남운. 전석담. 김태준 등이
좌익계 학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고
있었던 것 또한 이와 같은 사회적 과도기에서
있을 수 있는 현상이기도 했다.
한편
학부에 정경학부가 신설된 데 이어 우리
대학을 유지 경영하는 재단법인 조개학원도
증자와 명칭의 변경이 있었다.
즉
1947년 11월 1일에 개최된 제4회 한국
불교 조계종 중앙교무회의에서는, 대학의
건축 자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38선 이남에
소재하는 전국 사찰림의 2할을 각 사찰에
비례 배분하여 조개학원에 기증키로 의결하였다.
이때 의결된 전국 사찰림의 2할은 l6.
311정보나 되는 광대한 것이었다. 이 증자로써
우리 대학의 교사건축과 시설확장에 서광이
보이게 되자, 이 기회에 재단법인 조계학원을
동국학원으로 개칭한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학과 학원의 운영도
분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대학과더불어
조개학원의 대표까지 겸임하던 허윤학장은
오직 동국대학의 학사행정 책임자로 국한시키고
새 동국학원의 대표에는 김법린 동문을
선출하였다. 우리 대학의 경영과 학사행정의
분리는, 자칫하면 사립학원의 경영에 있어서
빠지기 쉬운 1인 독주의 폐단을 견제하고,
또 학장으로 하여금 대학운영에만 전념토록
하려는 것이 그 주안이었다.
한편
대학의 교사 건축을 위한 전국 각 사찰의
증자가 결의되기는 했지만, 학교의 제반
설비문제는 시급한 것이었다. 증자의 조속한
이행도 그러하였고, 더구나 교사 건축은
학생들의 큰 기대와 함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이와 같은 기대와 관심은 <東國>
창간호에 실린 「학생회가 보내는 긴급동의」
제화의 한 구절을 통해 몇 볼 수 있다.
「괴테가
<빔헬름 마이스타>에다 그려낸 학교는
여덟 모난 홀을 회화로 장식하여 널따란
꽃동산을 향하고 있다. 음악에는 기악과
성악 외에 숲 속에서 오는 자연음악이
있다 학원이란 것은 이렇게 환경, 설비,
배치, 분위기가 가장 명랑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자연의 음악이 풍부한 우리
학원은 설비에 있어서 너무나 빈약하였다
동년 6월에는 신축이 시작된다는 당국의
언명(言明)이었으나, 학교와 학교 설립자와
학생 제위께 간절히 부탁한다.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설립재단으로서의 약속한 출자는
물론이요 그것을 넘어서 많은 도움을 보내주기를...」
학생들은
신축될 교사가 시설부족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를 넘어서 이상적인 캠퍼스를
그리면서 학교당국과 재단의 그리고 학생자신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학생들의 이런 기대가 아니더라도 새 교사의
건축은 당시 우리 대학으로서는 한 단계의
도약을 위해 서둘러야 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 사실이었다.
불자탐방 김경제
교수 / 편집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교정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하였고 하늘이 높아만
가고 있는 가을은 만남의 계절이다. 이번에
불자 탐방에서 만난 사람은 누구보다 가을을
사랑하고 수확의 풍요로움을 감사드리는
풍부한 감성을 지닌 불자 교수회 부회장이신
식물자원학과 김경재 교수님이시다.
'교수님께서는
신심이 깊으시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쯤이십니까?'
'어머니가
불심이 깊어 절에 자주 다녀서 따라 다녔습니다.
7살에 무위사에서 어머니 따라 합장하고
참배를 드리는데 어머님이 다음에 제가
자라나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열심히 일을
하라고 축원을 드렸을 때부터 마음의 의지처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나를 다스리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법, 즉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평범한 진리를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을 하는데 교수님은
감명 깊게 읽은 불교서적이 있으시면 다른
불자들을 위하여 한 권 추천해 주십시오.'
'불교의
역경사업은 활발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이전에도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들을 접하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는데, 아직도 불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고승염전에 빠져서
밤마다 열심히 탐독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불교를 접해도 이렇게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불교서적을 만난 기억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효봉스님이나 동산스님의
일화를 감명 깊이 읽었는데, 동산스님의
'육신의 병만 고치지 말고 정신의 의사가
되라'는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
연구실의 전화벨은 상당히 바쁘다. 전화를
받으시고 돌아서면서 교수님은 요즘 연구하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 문의 전화가 계속
와서 바쁘다고 말씀하신다.
'사찰
경제가 불자님들의 보시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앞으로 사원경제도 생산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원예를 전공하시고 과거에는 사찰원예를
강의하신 적도 있으신데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교에서는
생산적인 측면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찰은 많은 산지와 농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방식의
자연관리나 농사방식이 아닌 현대식으로
전환하여 산림에 유실수 심과 농지에 그
사찰의 토질과 기후를 고려하여 원예작물
재배 등의 다양한 임야 이용법이 개발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재 묘지 문제로 국토가
황폐화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불교의
화장 방식이 적극 도입되어 묘지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사찰의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적극적인 재정확보 방안을
강구하였으면 합니다. 이 문제는 동국대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영탑(납골당)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만
불자들이 묘지문제에 대하여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우루과이라운드의
타결로 한국이 전면개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방정책 앞에서 한국농업의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현재의 농업 정책으로는 한국 농업의 방향은
상당히 어려운 상태입니다. 농업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1차 산업인데 투자효율이 낮고
투자속도가 느리다는 어려움으로 사향사업으로
접어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곡물의
자급률은 2% 정도이고 73%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번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보여준
식량이 무기화 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한국의 식량 확보는 심각한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습니다. 한국의 여건상 고임금의
인력확보 어려움이나 지형의 어려움이
있지만, 유휴지의 활용 방안 강구, 농토
확장으로 기계화 실현, 특용작물 재배
등 다양한 방법이 강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농업은 단순한 1차 산업이 아니라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그 심각성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곡물을 심었을 때와 곡물을
심지 않은 무 경작지일 때 자연으로부터
발생하는 산소의 양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환경에 있어서 산림의 보존은
곧 생존영역의 확대로 해석되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보다 우리 국무1들이
농업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상당히 힘들어하시는
표정이셨다. 원예를 전공하신 이후 한국
농업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받은 수없이 많은 공로패들이 앞에 놓여
있지만 오늘날 어려운 한국 농업의 현실
앞에서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을 나타내신다.
'가을은
문화의 계절입니다. 한국의 사찰은 그
자체가 문화재이고 자연입니다. 이 가을에
다녀보신 절중에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저희
교수불자회에서는 한 달에 한번 성지순례를
다닙니다. 이번 달에도 무주 구천동에
있는 백련사에 갈 예정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절은 강진에 있는
백련사입니다. 그 곳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던 곳이어서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주고 절 입구에 있는 자연 동백의
진풍경은 남도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풍성한 남도의 들녘과
유서 깊은 선철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일
것입니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새로운 힘이 생겨나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소박하면서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신 교수님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니고 계신 것 같다. 가을은 많은
종류의 옷을 지니고 있는 멋쟁이이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주는 수확은 이 가을을
더욱 풍요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가을은
만남의 계절이다. 이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며 겸허하게 살아가리라.
불심의
창 수행의 원동력 / 홍영식(컴퓨터공학과교수)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큰절에서 지내면서 수련회에
참가한 감흥은 독특하고 마치 그윽한 향기처럼
일년내내 이어진다. 입제식에서부터 해제
식까지의 2박3일 혹은 4박5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새벽 3시부터 시작하는 하루 일정은 다소
고되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수련회가 있을 무렵이면 만사를
제쳐 놓고 수련회에 참가해야겠다고 벼른다.
3년전 해인사에서 있은 교직원 수련회에
참가함을 시작으로 송광사 하계수련회,
좌선 회에서 주관한 신흥사와 수덕사 수련회,
지난 1학기말에 있은 통도사 교직원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삼보사찰과
사대총람을 짧은 기간에 두루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다.
큰절에서 지내면서 느끼는 분위기는 절미다
다르고 독특하다는 것은 제 흠을 통해서만이
느낄 수 있다.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아서도
잠시 산문을 들어서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그 진한 감흥을 얻기는 어렵다. 더욱이
사대총람의 방장스님들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는 것은 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더위가 유별나게 심했던 작년 여름에 4박
5일간의 송광사 수련회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짧은 출가 긴 깨달음'이라는
표어는 이 수련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흡사 군대에
입대하듯이 모든 소지품을 보관시키고,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허용되지 않고 해제할
때까지는 묵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새벽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꽉 짜이진 일정은
그 곳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고 더욱이
하루에 6시간을 참선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공양의 법도는 소화불량을 일으킬 정도로
엄숙했고 음식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농사지은 사람들의 공에 감사하는 의식은
참으로 경탄스러웠다고나 할까. 육식을
하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비결과, 집에서 먹던 음식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를
알 수 있었다.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가차없이 귀가조치가 되거나, 후원에서
일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전향되었다 참선
중에 여기저기서 터지는 장군 죽비 소리는
수련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여 명이 참석한 수련회에서
십 명 정도가 도중하차를 하고 대부분이
마지막 날 철야 용맹정진을 통과했다.
걷은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흠 빽 젖은
법복을 짜면 소금물이 흘렀다. 이렇게
힘든 수련임에도 4대 1 정도로 신청자가
많았다고 하니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참석자 중의 한 사람의 말을 빌면, 이러한
수련회는 약 7년 정도의 약효가 있었다고
한다. 귀갓길에 퍼붓는 잠을 이길 수 없어
동참 교수와 함께 길옆 땅바닥에서 햇볕을
쬐면서 잠을 청하던 일들이 지금도 어제임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속세에
인연이 많은 사람으로서 하루 6시간의
참선은 마음쓰기에 따라서 고통과 평온히
지극히 가깝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조사스님들의 말씀 중에 '법을 얻자면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정진에 힘쓰시는 수행스님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솟는다. 수년 전부터 해오는
단전호흡 훈련으로 좌선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조신(調身)과 조식(調息)과 조심(調心)과
원력과 신심이 어우러져야 수행이 제대로
된다는 법사님들의 말씀과 이 중에서도
신심이 수행의 원동력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이해되었다, 지극히 귀한 것을
얻자면 그만한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일제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번뇌망상이 가려서 자성(自性)을
보지 못함을 누구를 탓하리오. 한순간의
바른 생각을 내고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내세에 큰 공덕을 쌓는다는 신심이 필요한
것 같다.
신행단체 목탁소리
목탁소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여
널리 펴고자 하는 서원으로 1993년 8월에
창립되었다. 적은 인원으로 시작한 목탁소리는
학과 내(內)의 동아리로 출발하였으나
衢년도부터는 불교문화대학 내(內) 동아리로
발돋움하였다. 그리하여 불교학과뿐만
아니라 타 학과 학생들도 같이 활동하게
되었다.
현
회원은 13명뿐이지만 모두 성실하고 불심이
가득한 불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홍보부,
학술부, 편집부, 종교부, 총무부의 5개부서로
회원 모두를 간부화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도록 이끌고 있다.
주요
활동은 불교 교리학습을 통한 회원 간의
우호 정진과 불교 용어 바로 알리기와
부처님의 말씀(게송) 전파이다. 첫 번째로
불교 교리 학습은 회원들 간의 토론을
통해 불교에 대해 많이 알고 스스로 불교인임에
자긍심을 느끼자는 것이고 둘째로 불교
용어 바로 알리기는 일상용어 중에는 불교용어가
많이 있는데 우리들은 용어의 유래는 물론
올바른 의미에 대해서조차 모르고 있다.
이에 우리 목탁소리에서는 불교 용어를
바로 알려 용어의 어원과 그 유래, 의미에
관하여 일반 학우들에게 자부를 통해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제 회원들
누구나가 자보를 쓸 때 자신있게 웃으며
불교 용어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다.
세 번째로 부처님의 말씀(게송)을 전하는
것은 각 건물 화장실을 비롯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과 공공장소 등에 게송을
부착하여 항상 어느 곳이든지 부처님의
말씀이 보이도록 하여 포교의 한 몫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교지「목탁소리J를
발행하여 이제 제4호를 발간하게 된다.
작은 힘이나마 포교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회원들 모두가 제4호 발간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지도교수님이신 이봉준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과 선배님들께서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셔서 우리 목탁소리
가족들이 힘든 일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힘을 모아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더 많은 학우들이
포교에 관심을 갖고 우리와 뜻을 같이
했으면 하는 것과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꾸준히 하여 부처님말씀을 더 많이 널리
전하는 것이다.
비유와
설화 현명한 왕의 판단 / 조용길(불교학과
교수)
부처님께서
사밧타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일이다.
그 나라에는 빈두로타사라는 바라문이
있었다. 그 아내는 얼굴이 추하게 생긴데다가
두 눈까지 시뻘겠다. 그에게는 시집간
딸만 일곱이 있고 아들은 없었다. 그 집도
가난하였지만 그 딸들도 궁하게 살았다.
아내는 성질이 포악하여 항상 남편을 들볶았다.
그리고 딸들은 번갈아가면서 친정에 와
무엇이고 달라고 하여 가져갔다.
요구대로
주지 않으면 갖은 앙탈을 부렸다. 또 부랑한
그 집 사위들이 몰려들면 집안에 남아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혹시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까봐 그는 전전긍긍하였다. 밭에
곡식을 두고도 일손이 달려 거두지 못하다가
남의 소를 빌려 거두어 들이고 나서는
그 소를 잘 지키지 못해 그만 늪에서 잃어버렸다.
바라문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생각하였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온갖
재난이 가실 새가 없는고, 안으로는 포악한
아내에게 시달리고 딸들한테 들볶인다.
사위 놈들이 몰려오면 온갖 행패를 부리는데
그 위에다 남의 소까지 잃어버렸으니,
웬 놈의 팔자가 이리 기구할까.' 그는
소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다가 심신이 함께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숲길을 지나다가 나무 아래 앉아 계시는
부처님을 우연히 뵙게 되었다. 바라문
온 지팡이에 의지하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문 고
타만은 지금 가장 안락하다. 못된 아내의
욕설이나 다툼도 없고 딸년들한테 들볶이지
않으며, 부랑한 사위 놈들 치다꺼리 할
일도 없을 거고...' 부처님은 바라문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말씀하셨다. '당신
생각과 같소. 나는 아무 걱정 근심도 없소.
당신은 집을 떠나고 싶지 않소?' 이 물음에
그는 정신이 번쩍 났다. '지금 저한테는
가정이란 무덤처럼 보이고, 처자들과 얽힌
인연은 마치 원수들 속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저를 가엾이 여겨 출가를 허락하신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부처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시고 그를 위해 설법하셨다.
그는 일찍이 선근(善根)을 심었으므로
이내 번뇌에서 벗어나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의
시자 아 난다는 이를 보고 찬탄하였다.
'부처님의 교화 방편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 바라문은 전생에 어떤
복을 지었기에 온갖 고뇌에서 벗어나 아라한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마치 깨끗한 천이
쉽게 물드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저
바라문은 오늘만 내 은혜를 입어 안락을
얻은 것이 아니라, 지나간 세상에서도
내 은혜로 온갖 재난을 면하고 안락을
얻었느니라. 그 옛날 단정(端正)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그는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게 했다.
그 나라에 단니기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늘 주림을 면하지 못했다.
가을이
되어 밭에 익은 곡식이 좀 있어 남의 소를
빌려다 추수를 했었다. 추수를 끝내고
주인에게 소를 돌려줄 때 그 집 문 앞까지
몰아다 놓고는 주인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왔다.
주인도
소를 보았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줄 알고 몰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소를
잃고 말았다. 이 일로 해서 두 사람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다. 그래서 소 주인은
단니기 바라문을 데리고 왕에게 나아가
소를 찾으려고 하였다. 바라문은 때마침
길에서 왕궁의 마부를 만났는데, 마부는
그에게 달아나는 말을 붙들어 달라고 했다.
단니기는
말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돌을 집어던진다는
것이 그만 팔다리에 맞아 말은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마부도 단니기를 붙들고
왕에게로 함께 가기로 했다.
그들이
왕궁으로 가던 도중 강에 이르렀는데,
건널 곳을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마침
목수 한 사람이 입에 끌을 물고 양 손으로는
걷어올린 옷자락을 붙잡고 저쪽에서 건너오고
있었다. 단니기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건널 수 있소?' 목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그만 강물에 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끌은 없었다. 목수도
단니기를 붙들고 왕에게로 함께 갔다.
이때 단니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시달렸을
뿐 아니라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길가
주막에서 술을 한 사발 얻어 평상에 앉아
마셨다. 그런데 포대기 속에 갓난애가
있는 것을 모르고 깔고 앉는 바람에 아기는
숨이 막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주모인
아기 어머니는, '이 무도한 놈이 우리
아기를 죽였구나' 하고 대성통곡하면서
단니기율 붙들고 왕을 찾아 나섰다.
단니기는
어느 담장 밑을 지나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불행이여, 온갖 재난이 한꺼번에닥치는구나.
이대로 왕에게 간다면 죽게 될지 모른다.
차라리 여기에서 도망을 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훌쩍
담장을 뛰어 넘었다. 마침 담장 밑에는
직조공(織造工)이 있었는데, 그가 떨어지는
바람에 깔려 죽고 말았다. 곁에 있던 직조공의
아들은 그를 붙잡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왕에게로 갔다.
얼마를
가다가 그는 어떤 나무 위에 앉아있는
꿩 한 마리를 보았다. 꿩은 그에게 물었다.
'단니기님, 당신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는 앞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낱낱이
들려 주었다.
꿩은
한 가지 청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왕궁에 가시거든 나를 위해 대왕께
말씀해 주시오. 나는 다른 나무에 있으면
내 울음소리가 듣기 싫은데, 이 나무에만
있으면 내 울음 소리가 아름다우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고요.' 다음에 그는 독사를
만났다.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는 말에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죄다 이야기했다.
독사도 그에게 부탁했다. '당신이 대왕에게
가시거든 나를 위해 말씀드려 주십시오.
나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올 때는 몸이 부드럽고
연하여 아무 고통이 없는데, 저물어서
집으로 들어갈 때에는 몸이 거칠고 뻣뻣하여
몹시 아프며, 문에 걸려 들어가기가 어려운데
무슨 까닭인지 물어봐 주십시오.' 단니기는
그 부탁도 들어주기로 했다.
먼
길을 거쳐 그들은 마침내 왕 앞에 이르렀다.
그때 소 주인은 왕에게 아뢰었다. 단니기의
사정도 들었다. 현명한 왕은 다음과 같이
판단을 내렸다. '너희들 두 사람에게 다
잘못이 있다. 단니기는 말로 알리지 않았으니
그 혀를 끊어야하겠고 소 임자는 소를
보고도 챙기지 않았으니 그 눈을 뽑아야
하겠다.' 소 임자는 이 말에 소를 잃고
말겠다고 하며 단니기와 화해했다. 마부가
나와 아뢰었고 단니기도 끓어 앉아 아뢰었다.
왕은
마부에게 말했다. '너는 저 사람을 불렀으니
네 혀를 끊어야 하고 저 사람은 말을 때렸으니
그 손을 끊어야 하겠다.' 마부는 놀라서
단니기와 화해했다. 이번에는 목수가 나와아뢰었다.
왕은
단니기에게도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왕은
목수에게 말하였다. '그는 너에게 길을
물었으니 그 혀를 끊어야겠다. 그리고
연장은 손으로 드는 법인데 너는 이빨로
물었다가 떨어뜨렸으니 네 앞니를 두 개
뽑아 버려야겠구나.' 목수는 펄쩍뛰며
서로 화해하였다. 왕은 주모에게도 판결을
내려 화해시키고 직조공 아들에게서도
사정을 듣고 판결을 내려 화해를 시켜주었다.
그때
단니기는 자신의 일이 모두 무사히 끝나자
기뻐하면서 물러가지 않고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독사의 간청을 여쭈었다. 현명한
왕은 대답하였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느니라.
집에서 나올 때는 아무 번뇌가 없어 마음이
화평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몸도 또한 그렇다.
독사가 밖에 나오면 새나 짐승들이 그를
침해하기 때문에 잔뜩성이 나서 온몸이
거칠어지고 커진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갈
때에는 문에 걸려 심한 고통을 받는 것이니라.
만일 밖에 나와서도 마음을 단속하여 성내지
않으면 그런 걱정은 없을 거라고 뱀에게
일러 주어라.' 그는 또 아뢰었다. 꿩이
부탁한 것을 여쭈었다. 왕은 말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느니라. 그 나무 밑에는
금으로 된 큰 가마가 묻혀 있어 그 위에서
울면 소리가 화창하게 울리고 다른 곳에는
그런 금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맑게 울리지
않는 것이니라.'
왕은
이어 단니기 바라문에게 말했다. '너는
허물이 많았지만 나는 다 용서하였다.
너는 집이 몹시 가난하다. 그 나무 밑의
금으로 된 가마는 내 소유라야 하겠지만
그것을 너에게 주니 파서가거라.' 단니기는
왕의 지극한 배려에 감사하였다. 그는
부자가 되어 안락하게 지냈느니라.'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그때의
왕은 바로 이 몸이요, 바라문 단니기는
지금의 저 빈두로타사니라. 나는 그 옛날에도
그의 온갖 재난을 구제해 주었고, 이승에도
그의 고통을 덜어 해탈케 했노라.'
가람의
향기 봉은사 / 편집부
이번
호에서는 서울지역의 사찰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여 지역 주민포교에 열심인 봉은사(奉恩寺)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봉은사는 서울
강남의 무역센터 종합전시장 맞은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뚝섬 봉은사'로 알려진 이 사찰은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되던 조선조 때 '禪宗의 首寺刹'로
크게 각광받았으며, 일제때는 31본사(本寺)로
수도 서울(京城)과 경기도 일원의 韶여
사찰을 관장한 우리나라 최고의 수사철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년(794년)에 연회국사(緯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 하였으나 창건의
자세한 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이후 조선 초기까지의 변천도 거의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 견상사는 연산군
4년(1498년)때 정현왕후(卨顯王后)가 성종
선릉(宣陵)을 위하여 능의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奉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1551년(명종 6년)에는 이
절을 선종(禪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삼았다.
그리고 광릉의 봉선사(奉先寺)는 교종(敎宗)의
수사철로 되었다.
이때
보우(普雨)를 주지로 삼아 불교를 중흥하든
중심도량이 되게 하였다. 보우는 1562년에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宣陵)
동쪽으로 옮기고 절을 현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그러나 이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7년(인조
15년)에 경림(敬林)과 벽암(碧庵)이 모연(慕緣)하여
중건하였다. 1665년(현종 6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92년(숙종 18년)에
왕실에서 시주하여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
. 약사여래 등의 삼촌불상을 안치하였고
1702년(숙종 28년)에 왕이 이 절에 전백(錢帛)을
하사하여 중건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시대에는 서울(경성) 일원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당시의
가람으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향각(大香閣).
화엄경판전(華皺 甦板殿). 선원(禪院).
영산전(靈山殿). 심검당(尋劒塞) . 강선전(峰仙殿)
. 독성각(獨聖閣)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39년 실화로 대웅전, 동서의 승당과
진여문, 만세로 등이 소실되어 1941년에
도평(道平)스님이 대웅전과 동서의 양
승당을, 1942년에 영산전, 북극전(北極殿),
만세루(萬歲樓) 등을 새로 세웠다. 또
l943년에는 이 절의 서쪽에 있던 종남산(綠南山)
명성암(明性庵)을 이곳으로 이건(移捻)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은사는
여러 번의 화재로 옛 문화재가 거의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에 남아 있는 최고의
문화재는 동종(鉤種)과 판전(板殿)건물과
板殿현판, 팔전내에 있는 경판(短板) 등이다.
또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물 제321호로 지정되어
지금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인 향로가
있다. 이 향로에는 고려 충혜왕 5년의
명문(銘文)이 있는 고려청동루은향로(高麗靑鋼銀香爐)인데,
일명 오동향로(烏銅曺爐)라고도 한다.
사명당(四溟堂)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선불당(選佛堂) 마루에
걸려 있는 봉은사 동종은 연대가 명확한
고려 말년 조선 건국초(1392년)의 종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비록
꼭지 부분인 용누(龍級)와 음통(룹筒)이
떨어져 나갔지만 종신(鐘身)은 완전하게
남아 있어서 이 종의 특징과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상부
어깨 위에는 입연대(立蓮帶)가 촘촘히
배치되어 있는데 다른 고려 종과 흡사한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상대에는 연꽃무늬가
비교적 세밀하게 양각되어 있고, 그 아래의
4군데에 유곽(乳廓)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종신부위 보살상 옆에 3행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조성사찰, 조성연대, 조성시주,
작가 등이 있어서 고려말 조선 초기 범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웅전
본존불상 뒷벽에 걸려 있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석가 불과 석가일행을
군도식(群圖式)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중앙에 석가불어 있고 좌우에 가섭.아난존자가
시립 해 있으며 좌우에 3보살씩 대각선으로
배치되었다. 화면의 상단좌우에는 지국과
다문천이, 하단의 좌우에는 중장과 광목전이
배치되어 사방을 수호하는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상부에는
제자와 화불들도 배치되어 조선 후기 배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이들 불보살군들은
전제적으로 엷은 붉은 색조를 나타내고
있어서 화면의 분위기는 19세기 말기 양식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시대 불화 가운데 상당히 뛰어난 기법을
구사하였으므로 당대 불화 가운데 수작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판전(板殿)은
봉은사의 경판(經板)을 봉안해둔 건물인데
봉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이며 특히
이 판 전에서 중요한 것은 판전현판이다.
秋史 김정희의 말년의 명필이기 폐문인데
서툰 듯 고졸한 듯하면서도 품격을 나타내고
있는 판전필(板殿筆)은 김정희 마지막
명작으로 그의 독창적인 筆法이 함축되어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한국 서예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봉은사는
통일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그 당시의
상황은 알 수 없고 고려시대에는 견상사로
이 지방에서 알려진 사찰로 믿어진다.
그러나 봉은사가 유명하게 된 것은 선릉의
봉릉사원(奉陵寺院)으로 제수될 때부터이며,
이때부터 봉은사는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와 능침 사찰에서 벗어나
선종 본산이 되었고 다시 해방 후에는
조계종 총무원 소속의 사찰로 변모하였으며
19삯)년 전후하여 사찰이 전소하였다가
중창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에서 조선시대의
능찰로써의 가람구성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불교건강법 신경성
질환 / 김장현(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복잡한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은 질병을 지니고 산다. 그런 까닭에
각종 불편한 증상도 그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결국 신경성
질환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경성이라는 말은 정신신경과 전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환자를 정신병 환자로
만드는 중대한 이야기임에도 전공이 아닌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의학적으로
보면 정신의 활동이 모두 오장육부(五聯六略)와
관련이 되어 있어 정신적인 과다한 자극이
오장육부에 그 영향을 미쳐 선제에 병이
들게 하는 것이니 신경성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원인을 말하는 것이 되겠다.
사람에게는
서差이라고 하는 희(喜), 노(戀), 우(憂),
사(思), 비(悲), 공(恐), 경(驚)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인
활동으로서, 그 정도가 지나쳐 노(怒)함이
많은 사람은 氣가 위로 솟구쳐 肝에 病이
들과 너무 회(喜)하면 氣가 緩해져서 毛,에
病이 들고 생각을 많이 하면 氣가 흐르지
못하고 結하여 脾에 병이 들 꿔 憂(悲)
즉 슬퍼하거나 너무 울게 되면 氣가 @耗되어
肺를 상하게 되괴 놀라면 氣가 下하여
賢에 병이 들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혼 한 병증은 육울증(六航)이 잘
나타나는데 氣가 울결(鬱結)이 되면 목에
가래가 항상 붙어 있는 듯하고 복부에
가스가 차서 거북하며, 아무 이유 없이
자꾸 눕고만 싶고 식욕이 떨어지며, 숨이
차서 숨쉬기가 힘들다. 이런 증상이 오래
되면 복부에 덩어리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생기며 실제로
종양과 같은 질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편,
뚜렷한 이유가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하며 누가 잡으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충증(柾沖症)을 호소하기도 하며,
마치 가슴속에 물고기가 들어 있어 꼬리를
치는 것처럼 까닭 없이 벌렁벌렁 거리는
승상을 호소하기도 하는 경계(驚悸)의
증상도 모두 이러한 원인으로 온다.
뿐만
아니라 전과는 다르게 잘 잊어버리고 생각이
잘나지 않으며 또는 쓸데없는 생각을 되풀이하고
꿈을 많이 꾸게 되는 경우도 이런 이유로
발생이 되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대하는 욕구불만,
정서적인 갈등, 충격적인 소식, 억압적인
긴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病挫 또는 糖神身體醫學에서
나타나는 자율신경불안증, 정신신경증이
다 이와 같은 것에 속하는 병이다.
보통
일반 사람들은 신경성 질환이라고 진단을
받으면 살아 있는 사람이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 갈 수 없으니 별 다른 치료
방법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불편하나마
내 병은 신경성 질환이니 그냥 참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적극적인 치료 방법은 신경을 안
쓰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서 안정시키고 氣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漢臀學과 佛심이 만나는 곳이다.
또한 한의학에서는 수천 년 전이나 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승상을 오장육부와 연관시켜
이진탕, 육울탕, 사칠탕, 온담탕, 귀비탕,
분심기음 등 많은 도움을 주는 주옥같은
처방과 지법이 연구되어 있다.
그러나
근래 잘못 발달한 @@@@에서 탈피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탐욕과 질투심을
끊고 聖人의 경지를 얻은 우파사나처럼,
참된 마음으로 공덕을 쌓는다면 부처님의
광명이 다다르게 될 것이다.
전등법어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 법산스님 (정각원장)
마음은
본래 모양도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없고 눈으로
분별해 알 수도 없다. 마음은 물건도 아니며
물건 아닌 것도 아니다. 형색이 없으니
물건이라 할 수도 없고 작용이 분명히
있으니 물건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형색
없는 마음은 세상의 온갖 물건을 만들고
갖가지 작용을 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을
꺼내어 씻을 수 있다면 씻을 사람도 많고,
마음을 끄집어내어 보여 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형색 없는
마음이기에 숨길 수도 있고 빼앗아 올
수도 없다.
참으로
묘한 것이 마음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이
마음 짓이다.
참선은
이 묘한 마음을 가만히 정돈시켜 가느다란
먼지까지 조심스럽게 잘 닦아내는 작업이다.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을 벽을 마주하고 마음을
관찰하였다고 한다, 벽을 마주하는 것은
마음 밖에 있는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의 모든 경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마음 바탕에 인식되어 있는 망상
분별의 번뇌를 가만 가만히 달래어 녹여
버린다는 의미이다.
참선이
마음을 깨닫게 한다는 것은 뮤-명의 마음에
지혜의 등을 켠다는 의미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각자 깨달음의 심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심지에 불을 붙이면 마음의
등불이 켜지 괘 마음에 등불이 켜지면,
밝은 마음이 되어 모든 사리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말이다.
전등은
마음의 심지에 깨달음의 둠 불을 켜 준다는
의미이며, 이는 마음으로서 마음에 전해지는
것이므로 어떤 형색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달마대사는
제자 혜가에게 어떤 공부도 가르쳤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허曄가는 달마 대사를
모시는 동안 한시도 가르침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언의 가르침 속에 묵묵히
젖어들었다.
어느
날 혜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들려 주십시요.'
'부처님들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하오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케 했다.'
달마는
이렇게 혜가의 마음에 지혜의 등을 밝혀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