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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0월호 / 통권 18호 / 불기 2539(1995)년 10월 1일 발행

 

 

 

 

고승법어

불교인의 생활 자세
/오녹원 큰스님

 

일주문

역사 가꾸기/ 목정배

 

정각도량

참회의 공덕/ 이법산 스님

 

정각논단

신앙인의 자질/ 최현각스님

 

불교 건강법

차 이야기/ 김장현

 

열린 마당

옥천사 / 강창구

 

교리 강좌

유행과 순례/ 정승석

 

경전의 세계

승만경/이만

 

불자탐방

공과 대학 학장, 장재명 교수/ 편집부

 

불심의 창

아름다운 친구/ 배선옥

 

나의 신행담

지난 여름의 서원/ 강상준

 

동국과 불교

대학 최기의 대립과 관용/ 이봉춘

 

비유와 설화

파멸의 길/ 조용길

 

가람의 향기

실상사/ 편집부

 

신행단체

동국대학교 불교합창단

 

 

 

 

고승법어
불교인의 생활자세/ 오녹원 큰스님

모든 일이 佛事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행하면 다 佛事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동참하신 총장님을 위시한 스님, 교수, 직원 그리고 멀리서 이 불사를 기쁜 마음으로 돕기 위해 오신 여러 보살님들은 오늘 부처님과 좋은 因緣을 맺었습니다.

우리 불교는 불자들의 돈독한 信心과 정성으로 1600년, 그 무성한 세월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오늘을 이어 왔습니다. 모든 불자들의 깨끗한 佛心의 맥이 오늘 우리 한국 불교를 지켜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한때 세계 속에서 대단히 영광스럽던 불교가 지금은 많이 쇠잔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중국불교가 그러하고 일본불교가 그러합니다. 또 남방불교는 너무 형식에만 집착한 나머지 세계의 새로운 문화발전 진원에 크게 동참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류 가운데서 우리나라 불교가 禪과 敎의 일치라는 것은 그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행복의 뒷받침이 될 수 있는 것은 作福입니다. 즉 스스로 복을 짓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복을 바라지만, 복을 짓지 않는데 행복이 스스로 와서 안기는 법은 동서고금 역사상에서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인생에 있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원초적인 소원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 행복의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길을 닦는 데는 인색하고 행복을 가지는 데만 급급해 하는 병폐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문화인류학자들은 20세기말의 인류가 앞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이제 막히고 있지 않느냐며 우려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 불교는 부처님께서 교시한 가르침, 본래의 가르침을 잇고 그 맥이 시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선원에서는 용맹정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또 우리 동국대학교의 여러 스님 교수 학생들을 위시해서 불교도 여러분의 호법의 뜨거운 열기가 밤낮으로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아 한국불교의 맥은 앞으로도 계속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처음 일어났으나 지금 인도에서는 불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또 중국에서도 불교가 한때 융성했으나 반세기에 걸친 공산치하에서 많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이웃 일본은 너무 세속적인 불교를 회고 하는 바람에 불교가 갖는 본래의 정신이 거의 멸진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남방불교는 너무 소승적인 불교로만 치우쳐서 불교의 본래 목적인 중생구제에는 대단히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그동안의 여러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1600년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상화해왔으며 교육과 우리의 문화가치성의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불교가 들어온 후에 우리 역사는 비로소 이 지구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원대한 이상과 의식을 불교에 심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우리 동국대학교는 한국불교의 희망의 산실인 동시에 교육의 전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대학 중 유일하게 부처님의 이상과 정신을 갖고 있는 대학이기 때문입니다.

서양문화는 과학문명의 한계점에 봉착해서 동양문화로 회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동양문화를 대표하는 사상은 불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시점에서 가장 크고 밝은 횃불을 들 수 있는 대학이 우리 동국대학이라는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대학이며 불교정신을 실천화하려는 한국불교의 교육문화의 산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각자들은 90년전에 부처님의 원력에 교육이상을 병행하여 이 동국대학교를 개교했습니다. 이제 내년 개교 옛 주년을 맞는 시점에 있어서 송석구 총장님이 금년 3월에 취임을 해서 우리들이 과거에 다 청기지 못했던 나태함과 좋지 못했던 결함들을 자각하는 토대 위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방향설정을 하고 분발하는 활기찬 대학으로서 또 기대와 긍지를 갖는 대학으로서 나아가려 합니다.

누구던지 한번 오는 기회를 놓치면 그 기회를 다시 갖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기회도 없다,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는 영광도 없다. 그것은 마침내 사멸이 있을 뿐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동국 인들은 새 역사에의 도약이라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의 중흥이라는 기회가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다 하고 모든 일에 앞장서서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그런 대학의 풍토로 개선해 나가는데 온갖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여 '대종을 하나 만들어 다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100년이 가까운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학에서 종 만드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들의 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 불교가 1500년전에 들어 올 적에 신라에는 민족 고유사상이 심하여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하게 된 후로 부처님의 정법이 이곳에 정착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 오도록 한 것은 이곳이 한국불교에 있어 초진법륜지리는 겁니다. 그런 이곳에 우리 동국대학이 캠퍼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뜻 깊은 일입니까.

 기공식 축사에서 총장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이 신라의 에밀레종처럼 온 법계에 사무치는 그런 범종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종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종소리가 無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별심으로 나는 소리가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처럼 둥근 소리, 圓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입 속에서 어렵게 불사를 한 끝에 만들어져 세계에서 인정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세계인의 귀의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작하는 이 불사는 그에 비할 수는 없지만 종 불사에 동참하고자하는 여러분의 귀중한 뜻이 모이진 것이므로 그 못지 않는 불사라고 저는 말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동참함으로써 여러분은 부처님의 정법에 귀의해서 倦t艮올 심고 功德올 지은 것입니다.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일은 대단히 경하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대종 불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한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부처가 될 수 있는 椿t艮을 심은 것입니다.

물건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정성을 실어 보내는 것입니다. 물건과 정성이 아울러서 시주를 했다 하면 그건 큰 공덕입니다.

이러한 일례로 부처님도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늘 법문 마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밝은 달이 어느 산천을 비추지 않으리오만 달이 어느 산천은 먼저 비추고 어느 산천은 나중에 비추겠다 하지는 않습니다. 달은 낮은 산이니 나중에 비추고 높은 산이니 먼저 비추겠다는 분별심이 없습니다. 無心합니다. 그냥 비추는 거지요. 순서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치는 높은 봉우리에 먼저 달빛이 비추어지고 낮은 봉우리는 그 다음 비추어집니다. 부처님에게 인연도 그와 같습니다.

대자대비한 불보살님은, 어느 중생은 먼저 제도하고 어떤 중생은 나중에 제도하는 차별 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연 있는 중생에게 먼저 제도의 손길이 미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인연을 짓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惡@을 짓지 말고 善@을 지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인연 있는 중생부터 부처님은 제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차별심이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그냥 모든 중생들을 애휼(愛恤)이 여기는 마음으로 제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하고 잘 살게되었지만 정신적인 면으로는 어느 시대보다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운 삶으로 위안은 될지언정 우리 마음의 평화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사람 마음만 거칠게 할 뿐입니다.

비하건데 목마른 자가 소금을 타 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물질이 풍요로우면 그것에만 매달려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져 버립니다. 이리하여 남을 원망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해버립니다. 부처님은 綢년전 이것을 심각하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慧眼으로 覺眼으로 열린 마음으로 보셨으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내다보시고 걱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 교육을 어디에 주안점을 둡니까? 바르게 살고 정직하게 남을 위한 복되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복 되는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복을 남에게 미루어 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남에게 이로운 일을 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선입을 짓게 한 것입니다.

베푼 만큼 언젠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因果法입니다. 이것은 남을 도와주기만 하는 것이 아닌, 도와주는 것 자체가 자기가 잘 되는 길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自他一時 成佛道인 것입니다.

요근래 '소쩍새 마을 사건'을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중생들이 삿된 마음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정직하지 못하고 교육에 힘쓰지 않고 미래 후학들에게 인색하게 구니, 사기에 넘어 간 거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건 자기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물체를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이 어두워지므로 마음마저 어둡게 되고 이러니 보고 판단하는 주체가 어두운 겁니다. 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없으니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불교에서는 마음 하나만 바로 밝혀 놓으면 그 곳에서 극락도, 부처도, 보살도 나온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으라 했습니다. 마음을 밝은 곳으로 반전시키라. 본래 밝은 것인데 탐. 진. 치 3독심에 가려서 어두운 것이니 밝게 하라 했습니다. 해와 달은 본래 밝은 것이지만 먹구름이 가리면 천지가 어두워 지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 또한 日月과 같은데 탐. 진. 치 3독심으로 인해 마음이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을 밝게 하는 수행에 힘쓰면 우리가 앉은 이 자리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法이 바로 佛法인 것입니다.




 

 

일주문

역사 가꾸기 /목정배(불교학과 교수)


역사는 정기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아니면 역사는 비어있는 공간으로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공처럼 파랗게 비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역사를 훼손하는 난동자가 있고 분탕질 하는 방해군 이 득실거리고 있으니 역사 공간은 폐품 처리장처럼 물들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이해와 인식, 아니 그 수용이 너무나 비참하다. 역사는 지나간 것, 과거의 일들처럼 생각하고 미루고 마는 경우가 많다. '아 옛날이여'할 때 느끼는 의미가 무엇인가. 옛날을 그리는 마음이 앞서고 있기에, 옛날에서 추스를 것이 있기에 '아 옛날이여'하고 노래하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역사를 대하는 자세가 정말 허물어지고 있고 무잡하게 되어 있다.

역사 인식의 생각이 동떨어진 행태를 부리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쓰잘데 없는 낡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전통적인 문화가 재현됨 수 없다. 행여 재현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더라도 적당히 하거나 얼렁뚱땅 식의 작업으로 일삼기 때문에 그 오래되고 민족의 손때가 묻은 것이 버림받게 된다.

독립기념관이 세워진지 몇 년이 된다고 지붕이 새고 벽면이 갈라지는가.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데 돈벌이로 일하는 마음들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경주 불국사는 어디서 묘미가 나는가. 관람자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청운교 백운교가 자리한 돌 축대는 자연미가 나는 견고미 조화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축대는 어디서부터 축조하였기에 천년의 세월이 흘러가도 훼손이나 파괴가 되지 않고 역사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가. 그것은 산언덕에서 내려오는 자연 암석을 기반으로 하여 쌓아 내려 왔고 청운교, 백운교 언저리에는 자연미가 풍미하게 축조하였기에 견고한 우아미가 표현된 것이다.

우리들은 역사공간을 순수하고 무궁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공력을 쏟아 넣어야 한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므로 우리와 무관한 유물 유적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역사는 생명이다. 민족의 정신과 정서가 함초로히 꽃피게 되는 문화이다.

문화는 정성의 돌봄이 있을 때 장엄된다. 역사 공간을 바르게 가꾸는 마음이 불가의 안뜰에도 형성되어야 한다. 제일 먼저 불교인이 깨달음의 문화를 전승하는 역사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정각도량

참회의 공덕 /이법산 스님


참(僭)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이며 회(悔)는 생각을 돌이켜(恨) 고친다(改)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국가 최고의 권력인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며, 오늘날도 누군가 확실한 대권의 자리를 한 신짝처럼 버릴 수 있을 때, 보는 견해는 역시 옛날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한 생각 돌이킨다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워 보이지만 어떤 결정적인 곳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련이란 가질 것이 못된다.

그러나 미련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가 없다. 만약 미련을 붙들고 집착해 있다면 그 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손바닥을 눈에 대어보자 손이 더럽고 깨끗함을 볼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일위판단은 일단 거리를 두고 보아야 정확한 판단이 서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볼 수 있고 자기의 잘. 잘못을 알고 판단 할 수 있다면 그는 미련을 가질 것도 없고 후회로 마음 아파할 것이 없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때때로 잘못을 고쳐서 새롭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희망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생은 욕심이 많고 뜻대로 안되면 성질을 부리고 성질을 부리면 안으로 마음이 상하고 밖으로 남을 해치거나 사물을 부수어 어리석은 죄를 짓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또 다른 욕심을 부리므로 잘못은 거듭 죄를 저질게하고 죄는 괴로운 과부를 가져다준다.

참회는 잘못을 알아 좋은 일로 고쳐 가는 길이므로 참회의 길은 밝고 곧고, 평탄하여 그 길로 거듭 가면 날로 새로운 업(業 : 마음과 몸으로 짓는 행위)을 지어 좋은 결과가 때때로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참회는 참으로 좋은 생활요법 이다.

<화엄경>의 보현보살행원품에 참회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업장(業障)을 참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나간 세상 끝없는 세월에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탓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악업이 한량없고 끝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 나쁜 업에 형체가 있다면 가없는 허공으로도 그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제 몸과 말과 생각의 청정한 업으로 법계에 두루 한 많은 부처님과 보살들 앞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나쁜 업을 짓지 않으며, 항상 청정한 계휼의 모든 공덕에 머물겠다.」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야만 나의 참회가 다할 것이다. 그러나 허공계와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참회도 끝나지 않는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이 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을 것이다.'

보현보살은 이와 같이 참회의 원을 굳게 세우고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참회하신다. 참회는 끝이 없다.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할 때까지 보살의 서원은 끝이 없다.

우리의 모든 소원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의 참회도 끝이 없어야 한다. 참회가 없이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참회야말로 성공의 아버지이다.

<육조단경>의 참회품에서 혜능대사도 참회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제 너 회에게 무상참회(無相慽悔)를 주어 삼세(三世)의 죄와 허물을 없애고 몸과 말과 생각의 세 가지 업을 청정하게 할 것이니 나를 따라 이와 같이 부르라.

「제가 순간순간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미련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교만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교만하고 진실하지 못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무상참회이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은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른다. 그러하기 때문에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연이어 생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 참회라 할 것인가.'

사람의 죄나 허물의 근원은 욕심에 있으며, 그 저질음운 몸과 말과 생각에 있다. 죄를 적게 짓자면 몸과 말과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한다. 욕심의 분노가 행 할 수 없는 충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

언제나 무슨 일이 저질러지기 전에 조심해야 한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한번 뱉은 말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일이 잘못된 후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므로 언제나 조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참회의 올바른 길이다.

점점 복잡하면서도 신속을 요하는 세상살이 깜짝하는 순간 실수하기 쉽다. 교만과 질투는 허물을 지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혹이다. 교만과 질투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무아(撫我)를 말씀하심은 교만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나>라는 것이 없다면 무엇을 집착하여 <내 것>이라 하겠는가. 욕심이 없다면 시기질투 할 꺼리가 없다.

참회는 반야바라밀로 가는 길이며 성불로 가는 대로이다.



 

 

 

정각논단

신앙인의 자질 /최현각 (선학과 교수)


연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기도 도량에서 우연히 노보살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보살님은 행색이나 말을 걸어 오는 거동으로 보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궁금증이 있기에 그럴까 하고 말을 듣자 하니 이 신도님은 배움이 미천하고 머리가 영특하지 못하여 원아발원이 명석한 사람이 되고 싶어 십여년 동안 조석으로 金剛桎 독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 제13장 如法受持分에는 흰 부처님이 나오는데(須菩提 白佛首.......)그 휜 부처님이 어떤 부처님인지 설명을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마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 노란 옷을 입으신 부처님으로 모셔져 있으니 흰 옷을 입은 백의의 부처님은 또 어떤 부처님일까 경을 독송하며 궁금증이 생기셨던 모양이다.

이 보살님의 얘기를 하다 보니 필자는 불현듯 어린 시절 속담풀이를 배우면서 참으로 답답해 했던 斷想이 아련히 떠오른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인데 이 '맞들면'을 '맛들면'으로 받아들여 백지장이 어떻게 맛이 들까 선생님께 질문도 하지 않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해 보았으나 궁금증의 폭만 더욱 증폭되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또 언젠가는 홍보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가전제품 가운데 '전자자' 역시 저게 무슨 말일까 낯설기만 했던 일이 있었다. 전자자의 뒤에 字는 영어의 Jar인데 앞의 한자와 영어를 혼합하여 놓으니 혼돈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이런 일은 비단 필자만이 느껴야 했던 우치가 아니고 경우는 다르다 하더라도 누구나 한두 번 쯤 겪었을 것이다.

진지하게 질문을 했던 신앙심 깊은 그 보살님의 흰 부처님 이야기는 정작 흰 부처님이 아니라 字句 해석을 잘못하다가 보니 일어 난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이 白이라는 글자가 착각을 일으킨 것인데 이 자는 물론 희다는 뜻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는 어른께 말씀드린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이 章에서는 수보리라는 제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려 금강경을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는 것인지를 여쭈어 보는 내용이 들어있다. 옛날 대문에 문패 정도 반듯하게 내 걸고 사는 이가 자기 때문에 붙어 놓은 경고성 구절 '맹견주의 주인 白'이라는 말은 최소한 주인 입장에서 우리 집에는 사나운 개가 있으니 양상군자는 담장을 얼씬도 하지 말라는 주인의 메시지다.

 필자의 설명을 다 듣고 난 그 보살님은 그렇게 궁금증을 더해 갔던 일들이 일순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말았던지 '그런것을,..,...' '그 걸 가지고......,'를 연발 하시며 예전처럼 법당을 향하였다. 비록 육신은 어제의 육신이었으나 마음은 질문하기 이전의 그 마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이 신도님의 신앙심이 얼마나 더 깊어졌는지 필자는 알 길이 없다. 통성명도 없었을 뿐더러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착수함에 있어 사전에 그 일의 성공 여부를 논하면서 소질이나 소양, 자질 등을 거론하기 일수 이다.

그 타당성이 높아야 성공 가능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도하는 일에 아예 착수를 하지 않기 마련이다.

신앙인의 자질은 사전에 타당성 같은 것이 필요 없으니 참 손쉬운 자질론이 성립된다.

옛말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하였다.

이리 저리 헤아려 자기 궁량에 맞으면 옳고 그렇지 않으면 그르치고 말 일이라고 판단하여 이내 포기해 버리고마는 세속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兩舌을 습관적으로 하여 몸에 벤 사람은 자기 입장이 불리하면 시치미를 떼는 행태는 주변을 어지럽히는 열등한 신앙인임에 틀림없다. 분별심을 내어 말하고 행동하는 이의 생활은 미숙아의 어릿한 몸짓과 같아서 부자유스러움이 금방 드러나게 된다. 감언이설로 상대를 회유하려고 하는 것이 집단에서 세상살이가 되기도 하지만 실로 설득이라면 진실을 능가하는 웅변은 없다고 생각한다.

메리암(Mem)은 정치권력론에서 정치가의 자질론을 Mmarida와 Crdenda로 나누어 말했다. 이를 사탕과 채찍이라고도 하는데 미란다는 예술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미화시키고 대중을 동원하여 위력을 과시하며 책임을 중시하고 창조적이어야 하고 대중의 지지를 밑바탕에 견고히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크레덴다는 권력유지수단으로서 지성에 호소하여야 하며 정통성을 유지해야 하고 복종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도 그 도가 지나쳐 형평성을 상실하여 기울게 되면 대중은 그 지도자나 권력에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독재자의 일생을 통해서 그 실증적 사례를 충분히 엿 볼 수 있는 일이다.

상대를 인정하는 나의 삶이 신앙인의 바른 삶이 아닐까. 상대편을 편안하게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는 행동은 참된 신앙인의 우량한 자질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보배임에 틀림없다.

사람의 심성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글귀를 탐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 말을 하여 사람들이 놀래지 않는다면 죽어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학자의 속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아무리 좋은 글귀를 줄줄이 토해내고 경천동지하는 언변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의 언행이 따로 따로 놀아난다면 그런 사람의 삶은 학자적인 소양은 지니고 자족할는지는 몰라도 타인의 귀감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배움이 적다손 치더라도 그의 행동은 진솔하고, 사실을 표현함에 그 표현이 다듬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적이고 가식 없는 표현일 때 배움이 높은 자의 가식 보다 설득력을 더 갖게되지 않겠는가.

가을 햇볕이 들녘의 곡식을 알알이 영글도록 검증이라도 하듯이 따갑기까지 하다. 신앙인의 자질도 가을 햇살같이 검증 받을 수 있는 여과 과정이 절실히 요망된다. 그 짐승은 너와 나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탈각 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 탈각은 탐욕심으로 부티의 탈각이고, 이타심과 명리에서 탈출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적인 방랑자는 학문의 세계를 항해하지만, 신앙인의 순수함은 일체중생의 삶을 풍요하게 하며 인천의 사표가 됨을 인식하게 하는 맑은 아침이다.



 

 

불교건강법

차(茶) 이야기 /김장현(서울캠퍼스 보건소장)


차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녹차로서 생산지와 채취과정 제조방법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있으나 그 원류는 하나이다. 녹차의 성분 중에는 카페인이 들어 있어서 중추신경을 흥분시키므로 각성 작용이 있어 수험생의 졸음은 쫓는데 크게 기여를 한다. 또한 머리를 맑게 하는 작용도 있다. 뇌동맥의 혈류를 촉진시키고 신경을 자극 시키므로 의식을 깨게 하고 신진대사 기능을 왕성케 하기 때문이다.

평소 몸이 찌뿌듯하고 무겁게 느껴지며 몸이 잘 붓는 사람은 녹차를 오래 장복하면 강심이뇨효과로 심근의 수축력을 높여주므로 몸 안에 있는 불순물을 몸 밖으로 쉽게 배설시키므로 몸이 가벼워지고 눈이 맑아진다. 보약의 효능으로 자주 거론되는 경신익기(輕身益氣)가 바로 이런 효과를 말하는 것이다.

덩굴차는 남부지방에서 야생하는 돌외, 거지덩굴의 전초를 차로 만든 것인데 학습능력을 높여주는데 효과가 있고 신경세포활동의 흥분과 억제 효과를 고르게 증강시켜 주므로 사고의 집중과 지속에 도움을 준다. 또한 덩굴 차는 신경통 관절통에도 효과가 있다.

한약재로 쓰이는 칡은 간장 내에 알코올이 축적되는 것을 방지해 줄 뿐만 아니라 쉽게 분해하여 배설시킨다. 뿌리로 만든 칡차도 좋지만 꽃인 갈화는 주독을 풀어 숙취를 없애주는 데는 으뜸이다. 칡꽃을 차로 복용할 때는 끓는 물에 10분 정도 넣었다가 복용하면 향기롭고 맛도 좋다.

두충차는 민간에서 건강식품,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하며 팔고 있는 것을 자주 보는데 한방고서에도 불로장수의 약효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간장과 신장에 작용하여 근골을 보해주니 노화방지에 도움이 된다. 한방에서는 신기가 허하여 요통을 호소하는데 쓰는 대표적인 약이다. 약에는 나무껍질을 쓰나 두충잎을 차로 장기복용 하여도 좋다고 한다.

모과차는 허리와 다리가 약한 사람에게 좋다. 다리의 근육에 경련이 잘 일어나는 사람에게는 모과차를 권하고 싶다. 대제로 은은한 모과의 향내와 색과 맛은 겨울철이 제격이지만 유자차, 생강차, 대추자 등도 모두 쌀쌀한 달씩에는 제 맛이 난다. 인살, 구기자에 생강, 대추를 함께 넣어 차로 삼아 늘 상복 하면 긴장과 피로를 풀어주며 원기를 유지하는 데는 아주 좋다.

어떤 차를 많이 마시면 몸에 좋은 가요? 라는 물음을 던지는 분들이 있다. 이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사실 어떤 차이든지 차 한 잔을 하는 차분하고 여유 있는 그 마음이 보약이지 몸에 좋다고 많이 마시는 자세는 보약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차를 오래 마시면서 생활화하는 사람을 자인이라고 한다. 이 차를 통해 생활규범, 정신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 걷은 경지에 이르는 것을 다도(茶道)라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것은 맑고 깨끗한 마음을 바치는 정성이 되는 것이다.



 

 

 

교리강좌

유행과 순례 /정승석(인도철학과 교수)


'운수 납자(雲水納子)'라는 말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선방이나 선사(禪師)를 찾아 참선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을 주로 가리킨다. '납자'라는 말은 기운 옷을 입고 다니는 수행승을 가리키므로, 운수 남자는 누더기를 걸치고 구름처럼 물처럼 이곳저곳을 흘러 다니면서 스승을 구해 수행하는 스님을 뜻한다.

그래서 운수 남자를 행각승이라고도 한다.

운수는 행각과 통하는 말이고, 불교의 보다 전통적인 말로 바꾸면 유행(遊行)이 된다. 좀 생소한 말인 두타행(頭陀行)은 그러한 말들의 연원이 된다. 두 타란 인도의 불교어의 발음인 dhuta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제거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달라붙은 먼지를 세척하는 것'이니, 곧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이 두타행이다. 그 제거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걸림이 없는 간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몇 가지 덕목이 제시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유행'의 취지를 이해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유행이라는 말이 불교도에게 익숙하게 된 것은 아 함경 중의 '유행경'이라는 짤막한 경전이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고서 제자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가던 도중에 열반에 들게 되는데, 유행경은 그 짧은 기간의 전말과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실천하고 제자들에게 권한 수행의 작은 한 부분을 전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취지를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열반경」으로 아주 새롭게 확장하였다.

불교에서 권하는 유행이란 단순히 '떠돌아다님'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출가한 수행승들의 생활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며, 온갖 집착을 떨쳐 버리는 스스로의 수행에 전념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각지를 편력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토한 이후에 보낸 여생은 유행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운수 또는 두타행은 그러한 유행에서 남을 교화하는 측면보다 자신의 수행에 전념하는 측면을 일컫는 생활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운수는 유행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아무 곳으로나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편력하되 각지의 사찰이나 암자에서 수행하는 생활이다.

이제 재가 신도의 수행법 중에서 출가한 스님들의 유행과 가장 유사한 것이 바로 순례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출가 수행자의 유행에는 중생 교화라는 목적도 내재하여 있었던 만큼, 재가 신도의 순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목적이 내재하여야 함이 당연하다. 단지 자기의 신심의 표현이나 확대로 그친다면, 그것은 그 본래의 취지를 모두 살리는 일이 아니다.

순례가 경건한 신심의 확인이자 실현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순례의 전통은 부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기리는 불탑 숭배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다. 부처님의 감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곳에서 더욱 절실하게 부처님을 흠모하고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고통과 불행으로부터의 구제가 있길 바라는 불교인의 돈독한 신심이 저절로 순례의 길을 나서게 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유행과 순례는 그 출발의 취지가 다른 듯하다. 그러나 유행은 철저한 수행으로 중생을 이끌고 순례는 그 인도를 신뢰하면서 따른다는 점에서 그 둘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순례의 장소는 부처님의 행적과 유행의 장소 중 그분의 가르침을 생생히 떠올 탈 수 있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순례의 장소로는 이미 초기의 성전에 네 곳이 열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를 권하는 팔대영탑명호경(八大靈塔名號經)이라는 짤막한 경전도 비교적 일찍이 성립되었다. 여기서 열거하는 8대 영탑 즉 성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 중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거나 중요한 가르침을 설했던 곳이다.

초기 경전 중의 대반열반경에서 열거하는 4대 성지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 성도의 장소인 보드가야, 최초로 설법한 장소로서 바라나시 교외에 있는 미가 다야 즉 녹야원, 열반의 장조인 쿠쉬나가라이다. 한편 팔대영탑명호경에서 열거하는 8대 성지는 다음과 같다.

제1은 카필라 성의 룸비니 동산.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며, 슛도 다나 왕의 도읍이다. 제2는 마가다 국의 나이란자나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 부처님께서 정각을 성취하신 곳이다.

제3은 가시 국의 바라나시 성. 부처님께서 대법륜을 12가지 모양으로 굴리신 곳이다. 제4는 슈라바스티국의 제타바나 즉 기원정사. 부처님께서 삼계에 충만하시면서 대 신통력을 보여 주신 곳이다. 제5는 상카쉬야 국의 곡녀성.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곳이다. 제6은 왕사성. 즉 죽림정사가 있었던 곳. 부처님께서 수행승들의 분열을 잘 선도하여 자비를 베푸신 곳이다.

제7은 바이샬리의 영탑. 여래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명을 깊이 생각하는 곳이다. 제8은 쿠쉬나가라성의 사라 나무 숲.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불교가 인도 밖에서 널리 흥성한'후대에 이르러, 위의 8대 성지만이 순례의 장소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인도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수행함으로써 찾는 이들에게 깊은 감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면 불교도에게는 성지가 된다. 물론 인도의 성지를 순례할 수 있다면 더 깊은 감화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례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순례의 장소보다는 순례자의 자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극도의 고행을 포기하고서 부동의 좌선 수행으로 정각을 성취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전통에 따라 불교의 수행에서는 고행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버리라고 권한 것은 유별나고 기교적인 고행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그릇된 의식과 수행이지 고행의 가치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세간의 인습과 상식을 초월하는 수행은 그 자체가 고통의 인내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유행이든 두타행이든 순례든, 이 모두는 틀에 박힌 기존의 고행을 순화한 불교적 고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광 여행의 들뜬 기분에 어느 정도 편승하여 출발하는 순례의 길도 어쨌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고 작은 고행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순례자가 스스로 느끼는 고행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순례의 효과도 그만큼 크게 발휘될 것이다. 만약 순례의 효과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새기면서 충실히 따르게 되는 것으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이 경우는 순례가 아니라 관광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경전의 세계

승만경 /이 만 (불교학과 교수)


본래 불교의 경전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취했든지 간에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인생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내용이 그 기본양식으로 되어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부처님이 설법을 보살에게 부촉("秒囑)하거나 드물게는 유마경(維摩桎)에서와 같이 일반 재가신도인 거사(居士)에게 위임할 경우가 있는데, 이 승만경(勝影配)에서는 특별히 여성에게 그것을 일임하고 있어서 관심의 정도가 더 하는 것이다. 즉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勝翟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桎)이라고 하는 이 경전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승만이라는 부인이 일찍이 일불승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사자후를 한 대방 편의 대승경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승만 부인은 인도 사위국의 바사익왕과 말라카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써 후에 아유 타국 우칭왕의 왕비가 되어 생활하던 중에 친정 부모들로부터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라는 권유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면서 그가 깨달은 바를 부처 앞에서 선설(善說)하면 이를 부처님이 인가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어 있고, 더 나아가 정차는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부처님으로부터 받자 이에 고무되어 열 가지와 세 가지의 서원을 세워 그 스스로의 신앙심을 고취시켜 나가는 내용으로 전체적인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경전은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써 기원전 3.4세기경에 인도 대승 사상가들에 의하여 성립되었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한역 된 것은 중인도 출신으로서 435년에 중국에 온 구나발타라(求那釵陀羅)가 그 이 듦 해에 앞에서 말한 승만경을 번역한 것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인도 출신으로서 693년에 당 나라에 온 보리류지(菩提流志 : 일명達磨流支라고도 함)가 713년에 완성한 대보적경(大寶積經)의 제48회에서 이를 개역 (改譯) 하여 '승만부인회(勝翟夫샷k會)라는 명칭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보적경은 총 49회에 걸쳐서 120권의 경전들을 각각의 특색에 따라서 단행본 형식으로 집적(集積)한 것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성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이 승만경의 원전은 산실 되어 전해지지 않지만 구경일승보성론(究覓一乘寶性論)이나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등에 그 상당한 부분이 인용되고 있으므로 산스크리트의 단편이 일부 전해지고 있는 셈이며, 이의 서장역은 한역의 보리류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한편으로 이에 관한 중국의 주석서로는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의 동 의기(義름己)와 길장(吉藏)의 동 보굴(寶窟), 규기(窺基)의 동술기(述記)및 둔황에서 출토된 동 '주소(註貳)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진흥왕 37년(576)에 안홍(安弘) 법사가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이 경전을 가지고 왔는데, 이에 관하여 후에 원효와 도륜(道倫)등이 동 소(珷)를 지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어느 것도 전해지고 있지 않다.

이 경전은 전체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분에 해당되는 제1장의 여래 진실의 공덕 장(如來眞實義功德章)에서는 중만 부인이 불교에 귀의하는 과정과 부처로부터 성불하리라는 예언인 수기작불(授記作佛)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고, 본론격언 제2의 십수장(十受章)부터 제14의 진자장(眞子章)까지에서는 주인공인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10대 서원과 3대 원을 세우는 한편으로 올바른 교법에 관하여 자기가 생각한 바를 부처님 앞에서 설하여 이를 인가 받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 올바른 교법이란 삼승에 관한 가르침은 사실 모두 대승불교의 대의인 일승에 귀일한다는 것과 중생들이 번뇌에 쌓여 있지만 본성은 무구청정(無垢淸淨)하여 여래와 마찬가지인 성품[如來藏 : 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공(空)과 불공(不空)의 두 면에서 아는 것이 정지(正知)이며, 이 여래장에 의거하여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획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전은 순수 대승불교의 핵심인 이승사상과 여래상사상을 천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으로써 이는 법화경 등에서 설하는, '일승은 진실이요(一乘眞實), 삼승은 방편이다(三乘方便)라는 이념을 다분히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은 대승불교의 재가주의(在家主義)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정되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여래장사상 등이 능가경(樗伽桎), 무상의경(無上依桎), 불성론(佛'性論), 보성론(寶性論), 법계무차별론(法界無差別論)및 기신론(起信論)등으로 이어져 발전하여 마침내 중국에 와서는 화엄 교학에 흡수되는 한편으로 이에서 대성 되었다는 것이다.

제15장인 승만장(勝翟章)은 유통분으로써 이 경을 받들어 널리 펼 것을 강조하는데, 실제로 승만 부인은 자기 나라에서 이 대승교법을 펴서 일곱 살 이상의 모든 남녀가 이에 귀의하는 대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승만경에 얽힌 역사적인 사실 한 가지만을 들어 보면, 백제의 의영(義榮)은 일찍이 구유식(舊唯識: 일명 전제의 유식)과 신유식(新唯識 : 일명 현장의 유식)이 그 제식(諸識)과 불성론 등의 이론(異論)으로 말미암아 서로 논쟁할 때에 현장의 제자인 자은사(慈恩寺)의 규기(頀基)가 이 승만경의 삼승설을 들어서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을 주장하자 의영은, “규기가 비록 번경(飜桎)을 집필한 문장의 대가이지만 승만경을 해석함에는 어찌 그렇게 졸렬한지 모르겠다. 승만경을 다 보아도 사승(四乘)이 진실교이고, 일승이 방편 교라는 내용은 없다. 오류를 범한 것이다.”

(日本 最澄撰 守護國界阜)라고 지적하여, 중국 법상종의 비대승적인 견해를 통박하여 논술한 것은 백제불교의 교학 사상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볼 여지를 남기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불교사상이 당시에 얼마나 수준 높았던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고 사료되는 것이다.



 

 

 

불자탐방

공과대학장, 장재명 교수 편집부


첫 만남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첫 만남은 얼굴을 대면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공과대 학장님과의 인연도 전화를 통해서 먼저 인사를 드리고 다음날 약속을 정했었다. 다음날 약속 시간에 맞추어 학장님실을 방문하였다. 학장님실은 생각보다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방에는 책상과 옆에는 책장이 있고, 앞에는 용접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회의 책상이 전부였다.

'학장님 방이 검소하신 것 같습니다.'

'뭐, 특별한 게 있습니까. 역대 학장님들도 그랬고 지금도 이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공대 교수님과 학생 수는 얼마나 됩니까?'

'교수님이 55명 정도 되고, 학생이 삼천명 정도로 농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과대학입니다.'

대화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고 얼마 후 여직원이 작설차를 한잔 가지고 들어 왔다. 한잔의 차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마력이 있다. 차를 한 모금 드신 후 학장님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셨다.

'어릴때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불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은 공군사관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에는 군에 불교가 없었습니다. 공사를 마치고 그 곳에서 교수를 하다가 71년도에 동대로 옮겨오면서 불교와도 첫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불교를 배우고 싶어 73년도 해인사로 교수연수회 갔을 때에는 함께 참석한 불교대 교수님께 많은 가르침 홀 받기도 하였지 만 그때는 초심자라 어려운 불교용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4년전에는 정각원에서 수계식도 받았고 고승법회에도 참석하여 배우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불교를 잘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미소를 머금으신다.

'학장님께서는 불교를 참 좋아하시는데 절에서 생활해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특별히 절에서 생활한 적은 없습니다. 이번에 통도사 하기 교직원 수련대회에 참석하여 생활한 것이 가장 길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교수님들과 직원이 함께 생활을 하면서일 체감도 느꼈고 불교를 좋아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닫는다면 수련대회나 법회에 참석하여 불교를 좀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불교는 다양한 신앙형태가 있습니다. 가령 기도나 절, 참선, 염불 등 많이 있는데 학장님께서 주로 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 불교를 잘 모르기 때문에 특별히 열심히 하는 것은 없습니다. 보통 스님들은 '쉬운게 불교다. 살아가는 이치가 불교다.'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절은 아침마다 집에서 가까이 있는 관악산 관음사 법당에 들러서 참배를 드립니다. 법당에 들어서서 합장하고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리고 나면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평소 마음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이 기도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그러시다가 이내 불교를 접한 이후 불교계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말씀하시면서 불교는 화합을 위주로 하는 종교이니까 앞으로도 더욱더 화합된 모습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여담을 들려주셨다.

'공대하고 불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불교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종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연구를 위주로 하는 공대에서 오히려 불교를 공부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연구하기에 더욱 좋습니다. 실제로 농대에서 공대교수님들이 불심이 더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정말로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일을 하든 마음이 안정되어야 좋은 성과가 생길 것입니다. 학장님은 기억에 남으시는 스님이 있습니까?'

'스님들은 모두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스님들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통도사 수련회 갔을 때 서운 암에서 만난 성파스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스님들이 평소 열심히 공부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천을 하고 계신 스님을 만나 뵙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직접 절에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고, 또한 팔만대장경을 도자기로 구워서 만드는 엄청난 불사를 하시며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산을 개간하여 감나무를 심었는데 앞으로 그 수익금으로 연구소를 설립하여 정년퇴임한 노교수님들을 모셔다가 연구 활동을 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그러한 원력이 원만히 이루어지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정각원이나 정각도량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정각원에서는 수계식, 고승법회, 교직원법회, 정각도량 등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고승법회에는 큰스님들께서 오셔서 법문을 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듣고 배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앞으로도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지 않고 내실 있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이 동참하여 듣고 배워서 실천하는 불교인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끝으로 정각도량도 더욱 발전을 하여 풍부한 내용으로 불자들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화가 끝나자 찻잔도 차도 식었다. 옛 선사 말씀 중에 '차나 한잔하고 가세'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마신 한 잔의 차는 잔잔한 여운이 되어 향내음으로 남습니다.



 

 

불심의 창

아름다운 친구 /배선옥(불교학과 졸업, 불교뉴스사 객원기자)


팔월.

뜬구름 사이로 소나기라 이름하며 내리는 빗줄기를 밟으며 팔공산 갓바위로 오르는 길은 참으로 신이 나는 일이었다.

흔하지 않은 빗님이 오시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된 친구와 함께 오른 길이라 더욱 그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비엔나로 유학 갔던 단짝이 귀국을 했다.

졸업식이 있었던 91년 2월 이후 처음으로 돌아온 시간이니 조금은 낯설은 해후, 제법 그럴싸해진 제스추어라든지 능숙한 독어 솜씨는 그 아이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노라 한다.

유학생활의 어려움이란 처음에는 당황해서 울고 나중은 외로워서 많이도 서러워 했다고.

지금은 종일을 제 도판과 씨름해야 하는 허리의 피곤함을 빼고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두 달 정도 되는 방학기간 동안 우리나라 전국을 여행했었다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면 팔공산 갓바위라 했다.

만난지 15분, 찻잔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좌석버스를 타고 그 아이가 제일 가고픈 곳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길마다 변화 해 버린 도시 구석구석의 새로움에 방긋방긋 웃음을 터뜨리던 친구.

고향땅에서 다시 이방인이 된 듯 여러 친구들의 안부를, 짝사랑하던 총각 선생님의 생활을 묻는다.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실들을 사뭇 신기해하며 까르르 웃는다.

대구 공항을 지나 팔공산 입구로 향하는 길가의 가로수 빛은 그야말로 절정 이었다.

금방이라도 온통 초록 물이 배여 버스 앞으로 흥건히 흐를 것 같은 팔공산의 산자락은 물기를 머금어 폭염 속에서 지친 심신을 산뜻하게 해 주었다.

어중간한 한낮의 시간이라 사람들의 모습은 드물었지만 친구와의 산행은 한가롭다.

잘 정돈된 돌계단, 맑은 공기, 물기 배인 흙냄새, 녹색 나무들은 저마다 한여름의 기염을 토해 내고 있었다.

푸-하, 숨을 내쉬는 우리들의 입에선 뽀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허리춤으로 긴 막대를 의지 삼으며 오르는 산행은 즐겁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내내 오르던 길을 친구는 처음 오른다고 한다.

무심하지만 왜 당신들이 이 길을 오르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괘 가만히 앉아 있는 돌부처에게 왜 공양미를 가지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멀리 떠나가 있는 동안 턱없이 부족한 어학실력으로 바보처럼 굴었을 때나 독감으로 2평 남짓 작은 방에 몸져 누었을 때 날으는 새만 보아도 눈물 날 때 의지가 되었던 에너지는 아마도 그네들의 기도 덕분이라 한다.

친구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착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했단다.

1시간 10여분이 지나 갓바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어느새 산안개 머리를 풀고 우리 턱 앞까지 내려와 흔들리고, 쇠파이프 관을 자르르 공양미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알싸한 향냄새와 함께 연한 목탁소리가 염불소리가 산을 울리고 있다.

산안개를 이고 계신 약사여래불,

그를 향한 구원의 삼배는 끊이질 않고 있었다.

두개의 촛불을 켜고 합장을 했다.

무엇을 발원했을까.

친구는 한참을 꼼짝 않고 있다.

말갛게 비 그친 정상은 온통 안개 숲이다.

더러는 오르고 더러는 내려가는 사람들의 입술에는 '약사여래불' 이라 후불하는 옅은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절실하게 하는 것일까.

망연자실, 밋밋한 중생인 나는 그들의 절실함 앞에서 부끄럼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안개 숲 가장 먼 쪽으로 옮겨 놓았다.

약사여래불,

중생들이 뿌려 놓은 모든 근심 걱정을 거두어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달래주는 여래보살.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절밥이 맛있다는 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빠듯한 시간에 쫓겨 다시 도시로 내려오는 길, 친구는 그랬다.

삶이란 고(苦)라고.

고(苦)라는 말씀이 무슨 영문인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유학생활이 솔직히 힘든 게 사실이라 고백한다고 했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의 이름으로 아침에 눈을 뜨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어둠이 해를 삼킨 늦은 밤 다시 눈을 감는 일이 참으로 힘든 일이라 했다

다시 돌아갈 일이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유학생활의 힘겨운 날들을 웃으며 쏟아내는 그 아이의 작은 어깨 앞에서 나는 무심코 던진 말이 삶은 고(GO)라고 했다.

나 또한 알 수 없는 일이 세상사지만 어른이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겠구나.

아무리 잘 다져진 지름길을 안내 해 준다 한들 결국 그 길을 밟고 지나가는 우리 자신은 혼자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나간 시간보다는 지금과 앞으로 만들어 엮어 나갈 사연이 더 많아 목표한 일에 신나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모든 장애를 극기한 연후에야 비로소 단단하게 여물어 진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더 씩씩하게 커가야 한다고 감히 나의 지론을 말했었다.

우리의 나이를 훨씬 지난 먼 나중에, 지금의 나이가 젊음이 버거워 많이 울었다 해도 밤을 뒤척이게 하던 고민거리 하나 있었노라 회상했으면.

시행착오.

모든 일이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아주 빗나갈 수도 있을테지만, 그 시련을 감내할 노력의 시간들 실수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부모님 품 안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말씀들을 이제는 더 큰 세상에서 부대끼며 스스로 배워 깨달아야한다는 모두 나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산으로 오르는 시간의 반쯤이 지났을 때 우리는 다시 내려왔다.

비 그친 팔공산 숲 속에서는 매미소리가 자지러진다.

푸-하, 다시 내려온 도시.

달 할 것도 더 할 것도 없이 5년쯤 더 공부해야 한다는 친구는 그렇게 해어져서 떠나는 날 아침,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오리라는 목소리를 수화기로 들려주고는 다시 이방인의 이름으로 떠났다.

산으로 오르던 그날, 친구는 기원했으리라.

다시 유학생활로 돌아가 혼들 리고 힘겨울 때 5년을 지나온 것 저럼 그렇게 연연하지 않고 다시 5년을 새롭게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십사 하고 말이다.

한동안 까맣게 잊었던 나의 참회의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아주 가까이 있었던 구원의 시간을 찾게 해 준 멀리서 온 아름다운 친구, 그 아이의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자비의 말씀 따뜻한 시절 인연이 부디 함께 하시길.



 

 

 

나의 신행담

지난 여름의 서원 /강상준(사회복지학과 3학년, 불교학생회 13회)


2년에 걸친 마른 물난리로 땅이 바짝바짝 마르던 지난 여름,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경주 서면이라는 곳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학과의 특성상 이론과 함께 실전의 경험도 중요하기에 3학년이 되면 방학을 이용해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곳으로 배치를 받아 소중한 체험을 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실습이 끝나고 나면 학교에서 배우던 것과, 실제 현장에 있어서 나타나는 격차를 실감하고 그것을 토대로 남은 기간 자신의 공부나 진로에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습을 나가는 기관이나 시설은 복지관. 노인시설 . 장애인시설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일선 행정기관 같은 곳도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한다. 내가 면사무소를 택한 이유를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생활보호대상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떻게 힘이 들고 열악한 주거환경과 고용기회의 어려움 등이 그들을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 속에 빠지게 하는가 등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어서 였다. 또 도시보다는 농촌지역의 빈곤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항상 뇌리에서 맴돌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곳으로 정했던 것이다.

5천6백여명의 인구에 7%정도 되는 380여명이 생활보호대상자인데. 놀라운 사실은 대상자들의 대부분이 노인세대라는 것이다. 농촌의 노인문제가 위험수위에 다 달았다는 것은 강의시간이나 신문지상을 통해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피부로 느끼는 상황은 절망적이라 할 만큼 현재의 농촌노인문제는 어려운 실정이다.

독거노인세대 대부분은 분명히 호적상 의무부양자인 아들이 있어서 법적으로 따지면 생활보호를 받을 수 없지만, 그 아들들이 돌보려 하지 않고 연락도 끊은 채 인륜을 저버리는 경우라든지, 비록 타지에 나가 일을 하더라도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는데도 힘이 든 도시노동자들이 대부분인 경우여서 구호비 지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령으로 인한 근로능력의 상실로 더 이상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어 국가에서 나오는 한 달 생활비 62,810원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게 되는 분들이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멀리 소말리아나 아프리카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땅에 같이 발붙이고 사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실습기간 동안 가슴이 아프고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 차마 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라는 것이 부끄러웁기까지 할 정도였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 생활보호대상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면접을 하는데 혼자서 살고 계신 할머니를 방문하게 되었다. 집은 매우 허름한 흙집이었고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집안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건강의 상태부터 시작을 해서 식사는 잘하는지, 필요한 것은 더 없으시냐는 것 등 이런저런 조사를 하다가 호적상 아들이 몇 명 있기에, '할머니 큰 아드님은 어디 계세요?'하고 물었더니, 나를 쳐다보시던 할머니의 눈에는 금세 물기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답없이 먼 하늘만 쳐다본 채 계시더니 '애미 버리고 나간 놈을 와 물어보는고 지들이 어미 살리려면 벌써 찾아왔지 이제까지 연락 한번 안하겠는겨, 그놈들은 아들도 아이니더.'

나는 뭐라 할 말을 잊은 채 서류만 뒤적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할머니 그럼 많이 외로우시겠습니다.'했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계시는데 뭐가 외로운겨. 하나도 안 외로우니뎌'하시는 것이었다. 마지막 삶의 안식처를 하나님께 정했다는 할머니의 말은 나에게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무안하게 하였다. 건강하시라는 인사와 함께 그 동네의 여러 집을 다녀보면서 '그들의 주님'께 자신들을 맡긴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에게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을 만날 때면 종교가 무엇인지 물어 보는 것이 질문사항 중의 하나로 추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입에서는 여지없이 '우리 주님'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행여라도 '부처님의 자비'라는 반가운 말이 나의 귀에 들리기를 기원해 보았지만 그것은 기원으로만 끝날뿐 현실로 다가올 것 같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마을로 들어갔다가 생활보호대상인 한 할머니의 집을 찾아 갔는데 계시지 않기에 옆집 사람한테 물었더니 마을 끝에 위치한 절에 가면 있을 거라는 반가운 소식 아닌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그렇지'하며 그 절로 찾아갔다.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고 절로 흥이 나오는 대상자 방문이었다.

마침 할머니는 절 마당 잔디에 물을 뿌리고 계셨기에 나에 대한 소개를 먼지하고 법당에 들어가 3배를 했다.

가람양식이 무척 특이한 건축형태를 띤 절은 2층의 현대식 건물에 대리석으로 치장을 해서인지 마음과는 약간 괴리된 모습을 보였지만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할머니와의 면접을 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은 할머니와의 면접이 끝난 후 일어났다. 할머니께서 스님이라고 소개하는 분을 만났는데 화장을 짙게하고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에는 큼지막한 반지가 끼워져 있는 여자를 스님이라니,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혹시' 라는 생각은 이내 '그렇군'으로 확신을 하게 만들었다.

법당에 불상을 모셔놓고 부처를 팔아먹는 무당이었던 것이다. 00종단이라고 하기에 종정스님이 누구시냐고 했더니 '몰라요'라는 대답을 서슴없이 하며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후 며칠동안 나는 생. 보 . 자 조사를 나갈 수 없었다. 창피스러운 건 둘째치고 분한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 간판을 내걸고 불상까지 모신 채 징을 두드리고 오색 신장대를 흔드는 일이 법당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末法시대에는 사문을 사칭하고 불법을 팔아먹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계셨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그렇게 된 데에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더 크다는 반성이 든다.

진정한 가르침과 진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당장의 福을 구하는 데에 급급한 중생들의 욕심이 씨앗이 되니 그 열매가 옳지 못한 것 당연하지 않겠나 한다. 우리 스스로의 자정과 참회가 진실하게 있고 난 후에야 이런 되먹지 못한 일들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습기 찬 방안에 보건소에서 타온 약을 위안 삼아 복용하고 천정만 바라본 채 하루종일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좀더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현세의 부모만을 봉양하기 보다는 몇 겹의 전생을 통해 내 부모였을지 모르는 그분들 또한 돌봐드리는 것이 輪廻와 因緣의 법칙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 된 도리라고 보며, 교계차원의 적극적 활동이 벌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

법회의 마지막 의식노래로써의 '衆生無邊誓曖羈度'가 아닌 참된 보살의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候益衆生'을 실천해야만 궁극에 가서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고, 불법을 팔아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무리들도 진정한 歸依를 할 수 있으리라 ale는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동국과 불고

대학초기의 대립과 관용 /이봉춘 (불교학과 교수)


학문을 담론하고 아름다운 우정이 어우러지던 대학에서 학생들간에 분열과 감정대립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우리 현대사의 한 불행한 단면이기도 하였다. 당시 정계와 학계를 막론하고 사회는 좌익과 우익으로 대립되어 골육상잔의 참극을 되풀이하던 극단적인 혼란기였다. 따라서 학생들 간에도 좌우대립으로 인해 서로 감정을 폭발시키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여기에 겹쳐 본 대학만이 내포하고 있던 과도기의 학생 분열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었다. 바로 종교적인 대립이 그것이었다.

원래 우리 대학은 불교를 건학정신으로 건전한 전문학술을 교수하는 것이 校是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종교상 신앙에 관계없이 문호를 개방하여, 교수의 초빙과 재직기간은 물론 학생의 입학과 재학기간에도 종교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만큼 학생의 종교분포는 다양하였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불교신자 학생들의 활동은 물론, 대학당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학생회의 활동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도 부인하는 좌익계 학생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신앙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과 간장이 상존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同舟格인 이들 사이에 정면 충돌이 거의 없었던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불교를 건학이념으로 삼는 대학이지만 교수나 학생 상호간에 종교상의 갈등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오늘날에도 사회에 진출한 본교의 졸업생들은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에 대해서는 대체로 상당한 이해와 호감을 갖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대학 승격 후의 정치 사회적 혼란기에 보여준 바로 그 종교적 관용과 협조정신의 전통이 계승되어 오고 있는 데서 끼쳐진 영향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상의 이해와 관용적 분위기에 반하여 좌우익의 대립은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던 학생들까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표면화하였다. 그 가장 절정에 달한 사건이 l946년 10월에 일어난 「國大案 반대사건」이었다. 당시 미군정부에서 발표한 종합대학교로서의 국립서울대학교 안은 반대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이에 방향 의식을 상실한 국립대학생들의 호소에 응하여 1946년 10월 말부터 각 사립대학도 國大案반대에 대한 동정맹휴에 돌입하게 되었다. 정치적 과도기인 미군정 외 失策을 은연중 기대하고, 또 학생층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있어서도, 좌익계열에서는 이 國大案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같은 좌익계의 교사를 받은 본 대학 좌익계 학생의 일부는 11월초부터 '동정'의 동맹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전문부에서는 11월 l4일에 최계명 .최취사 등의 강력한 저지를 무릅쓰고 학생총회에서 동맹휴학이 의결되어 맹휴에 돌입하였다. 한편 학부에서는 동월 16.17 양일 간에 걸쳐 전학생의 진지한 토론을 거쳐 무기명 표결키로 되어 있었다. 이 때, 월북한 좌익계 金모군이 '조국의 전도에는 배움의 길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눈물을 홀리며 동맹휴학에 반대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외윤. 이영무. 김창호 등의 맹렬한 동맹휴학 반대활동에도 불구하고, 학부의 표결 결과는 총 87명의 참가 학생 중 찬성 44명 반대 43명으로써 동맹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동맹휴학의 형태는 매우 융통성 있게 진행되었다. 만약 동맹휴학이 정해진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면 타 대학과 별로 다름이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본 대학에서의 그것은 매우 유연하게 진행되었고 수습되어 갔다.

이는 異河閏 교수의 회고에서도 보이는 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이 격심하던 때에 기적이라고 할 만큼 상호의 이해가 깊었고 친위가 두터웠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즉 무기맹휴로 돌입한 2.3일 후부터 학부사학과 학생들은 좌담회라는 형식을 빌어 김상기 주임교수를 모시고 수강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일은 전교생들의 의결을 유린한 이단적 행동으로 규탄될 만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정'이라는 얇은 명분 하나로 기한 없는 학업의 포기에 나서는 것은 이성을 가진 학도가 취할 태도가 못된다는 것이 일부 사학과 학생들의 생각이었고 동태였다. 이에 대하여 혈기 있는 전문부생들은 격분하여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지만, '好學의 학우들을 괴롭히지 말자'는 온건파의 주장이 더욱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좌담형식 수업이 묵인 속에 계속되다가 어느 새 다른 과에서도 정상 수업의 상태가 회복되고, 그렇게도 극단론을 주장하던 전문부위 강경파 학생들도 11월 말경에는 슬금슬금 강의실로 되돌아 왔다.

이는 대학초기의 대립과 관용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할 만 하다. 이처럼 본 대학의 학생들은 민족문화의 부흥과 신문화의 창조에 젊은 혈기를 불태우며 극도로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서도 이성적인 관용의 미덕을 견지해 왔던 것이다. 종합지 「東國」 창간호(1948년 6월刊)에 게재된 許允학장의「大學의 使命」이라 題한 글의 일절에서는, 당시 본교 학생들의 이 같은 관용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격려하고 더욱 강조하고 있다.

「대학은 국가의 최고학부이다. 그만큼 대학의 교수와 학생은 국가에 대한 책무가 적지 않다 혹은 이 책무를 곧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정치를 통해 이행될 책무는 아니다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도덕의 실현을 통해서 이행되어야할 책무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끊임없는 연구가 요청되고 눈물겨운 수련이 요청되는 것이다....중략...관용이 적은 것은 확실히 조선사람의 단점이다. 학문에까지 관용성이 적었다는 것은 하루 바삐 고쳐야 할 것이다. 관용성이 적은 연구는, 고루와 진리의 경화 이외에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늘 반성할 것이다. 관용이 없는 곳에 조화가 있을 까닭이 없으며, 조화가 없는 곳에 진리의 재구성이 있을 수 없다. 세인은 진리는 고정된 존재처럼 여기나 실은 刻刻으로 새로운 구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진리의 탐구가 없는 곳에 대학의 사명이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진리의 탐구가 없는 곳에 국가의 전운 . 국민의 향상이 또한 있을 수 없다. 대학의 소장은 국가의 성쇠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 그 사명에 충실 할 것이다.」



 

 

 

비유와 설화

파멸의 길 /조용길(불교학과 교수)


네 사람의 수행자가 나무 밑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인가'에 대해서 저마다 자기 소견을 펼쳤다.

한 수행자가 말했다.

'이 세상의 괴로움 가운데 이성에 대한 욕구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화내는 일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을걸.'

또 한 사람은,

'이 세상의 피로움 중에서 배고프고 목마른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을라고.'

네번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건 다 모르는 소리. 모든 괴로움 가운데서도 불안과 공포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을거야.'

이와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 그들은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이때 부처님이 그 곁을 지나다가,

'무슨 일로 서로 다투느냐?'

라고 물었다. 그들은 일어나 예배드린 뒤 이야기의 내용을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아직 괴로움의 뜻을 온전히 모르고 있다. 이 몸보다 괴로운 것은 없느니라. 배고프고 목마른 것과 추위와 더위, 미워하고 화내는 것,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 색욕과 원한도 모두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육신이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며 재난의 뿌리다. 우리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애를 태우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중생들이 서로 해치면서 다투는 것이 이 몸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적멸(寂滅) 즉, 열반을 구해야 한다. 생각을 거두어 들여 이러가지 욕망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부처님은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음욕보다 더한 불길이 없고

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

이 몸보다 더한 괴로움 없고

열반보다 더한 즐거움 없네


조그만 즐거움과 미미한 말재주

반딧불만한 지혜로 그치지 말고

모든 것을 살펴 큰 것을 구하라

그래야 비로소 큰 기쁨 얻느니라,


부처님은 이 게송을 읊고 나서 수행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그 옛날 다섯 가지 신통을 가진 수행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정진력(精進力)이라 하였다. 그는 깊은 산속 나무 아래 앉아 고요히 선정(禪定)을 익혔다, 그때 비둘기와 까마귀와 뱀과 사슴 등 네 마리 짐승이 그의 곁에서 의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네 마리 짐승은 저희들끼리 서로 물었다. 무엇이 가장 괴로운 일인가를, 그때 까마귀가 먼저 말했다.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가장 괴롭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봐. 온몸이 나른하고 눈이 어두워지며 정신이 어지러워 그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작살이나 칼날도 돌아보지 않게 돼. 우리가 죽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야.'

비둘기가 말했다.

'나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가장 괴로워. 음욕 이불길처럼 일어날 때는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게 돼. 그때만은 죽어도 좋다지 뭐. 그래서 몸을 위태롭게 하고 목숨을 잃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이번에는 뱀이 말했다.

'성내는 것이 가장 괴로워. 독한 마음이 울컥 일어나고 보면 친하고 멀고를 가리지 않게 돼. 그래서 남을 죽이기도 하고 스스로 죽기도 한다.'

끝으로 사슴이 말했다.

'나는 불안과 공포가 가장 괴롭더라. 숲 속을 거닐면서도 혹시 사냥꾼이나 늑대가 나타나지 않을까 무서워.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면 나는 놀라서 달아나는 거야 그러다가 구렁에 빠지기도 하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여, 어미와 새끼가 서로 헤어져 애를 태우며 슬퍼한다. 그러니 내게는 불안과 공포가 가장 괴로워.'

그들은 이렇게 저마다 자기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때 정진력이란 수행자는 짐승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희들은 아직 괴로움의 뿌리를 모르고 있다. 이 몸은 괴로움을 담고 있는 그릇이므로 모든 근심과 고통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몸을 탐하지 않고 괴로움의 뿌리를 끊으려고 열반의 길을 가고 있다.'

'수행자들아, 그때 네 마리 짐승은 바로 오늘의 너희들이다. 전생에 이미 괴로움의 뿌리에 대해서 들었으면서 어째서 까맣게 잊어버렸느냐.'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祈園精舍)에 계실 때였다. 새로 비고가 된 네 사람이 벚나무 아래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벚꽃이 한창이어서 빛깔도 공고 향기도 그윽했다. 출가한 지가 얼마 안된 그들은 좌선을 하다말고 꽃그늘 아래서 잡담을 털어놓았다. 한 사람이 불쑥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 세상 만물 가운데서 우리가 아끼고 사랑할 만한 것으로서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일까?' 한 사람이 말했다. '한창 봄이 무르녹아 초목의 빛이 눈부실 때 들녘에 나가 봄놀이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지.'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잔치가 있어 친구들이 한데 모여 술잔을 나누면서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일 걸.' 다른 사람은 말했다 '많은 재물을 가득 쌓아 두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 수레와 말과 옷이 찬란하여 남들이 놀라워하고 부러워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가장 즐거운 거야.'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아름다운 처첩(妻妾)들이 고운 옷을 입고 향긋한 향기를 피울 때, 그들과 마음껏 어울리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집을 나왔지만 아직도 세속의 탐욕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살피고 그들을 부르셨다. '너회들은 나무 아래 모여 앉아 무슨 얘기들을 그토록 신나게 하였느냐?' 그들은 솔직하게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은 모두가 근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며, 위태롭고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영원히 평안하고 안락한 길이 아니다 보아라, 천지만 물은 봄에는 무성했다가도 가을과 겨울이 되면 시들어 떨어지지 않더냐. 친구들끼리 모여 노는 즐거움도 반드시 헤어지는 것이며, 재물과 수레와 말 따위는 언젠가는 모두 다섯 집의 몫이 되고 만다. 다섯 집의 몫이란 관청으로부터의 몰수, 도적들의 약탈, 수재, 화재, 방탕한 자식들의 낭비를 말한다. 그리고 처첩들의 아름다움은 애증과 갈등의 뿌리이니라. 범부들이 세상에 살면서 원망과 재난을 불러 일으켜 몸을 위태롭게 하고 집안을 망치는 것이 모두 그런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을 나온 비고는 세속의 미련을 버리고 도를 구하되, 그 뜻을 무위(無爲)에 두어 영화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열반을 성취한다. 이것이 가장 즐거운 길이다.' 부처님은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에서 벗어난 이는 근심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리. 욕락에서 근심이 생기고 욕락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욕락에서 벗어난 이는 근심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리.

애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애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에서 벗어난 이는 금 심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리.

계행과 식견을 두루 갖추어 바르게 행동하고 진실로 말하며 자기 의무를 다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사랑을 받는다.

말할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생각한 뒤에 말하여 온갖 욕망에서 벗어난 이. 그는 생사의 흐름을 거슬려가는 사람.

그때 네 사람의 비고 들은 이 가르침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크게 뉘우쳤다



 

 

 

가람의 향기

실상사 /편집부


학교 재학 때는 가고 싶어도 시간이나 여건이 맞지 않아 여러 번 전라도 여행을 포기해야 했었다. 그때마다 아쉬움에 마음 한구석에는 전라도, 특히 智異山 자락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랄까 향수 같은 것을 품어 두었었는데 올 여름 끝자락에 전라도 땅을 밟게 되어 마음의 동경을 지우게 되었다. 가을을 맞이하여 '가람의 향기'에 어느 곳을 소개할까 하던 중 九山禪門의 한파였던 實相山門의 중심지로 오랜 역사를 가진 실상사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實相寺를 찾게 되었다.

실상사는 경주에서 서대구로 가서 서대구에서 다시 남원행 버스를 타고 남원에 가서 다시 지리산 마 천행이나 산내행 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복잡한 도심을 떠나 좋은 경치를 보면서 맑은 공기를 음미하면 차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나 피로가 가실 것이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天皇峯) 서쪽 분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며 신라말 불교계의 새 흐름으로 사상계뿐 아니라 정치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로 개칭된 곳이기도 하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신라의 불교가 한창 성할 때 고승들이 중국에 들어가 達磨禪法을 받아가자고 와서 宗風을 크게 일으킨 아홉 개의 山門을 말한다.

아홉개의 산문은 (1)洪陟國師가 실상사에서 開山한 實相山門 (2)普照體挺 국사가 장흥 보림사에서 道纛국사를 宗祖로 삼고 開山한 迦智山門 (3)鷲日 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開山하여가장 번창한 도굴山門 (4)惠哲 국사가 곡성 태안사에서 開山한 桐樓山門 (5)無染 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開山한 聖住山門 (6)道允 국사가 화순 쌍봉사에서 宗風을 드날리고 그 제자 挺曉가 영월 흥녕사에서 開山한 師子山門 (7)智詵道憙 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계산한 曦陽山門 (8)玄昱 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開山한 鳳,林山門 (9)利嚴尊者가 경순왕 5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창으로 해수 광조사에서 開山한 須彌山門으로 되어 있다.

실상사는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중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屠攣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여 도의는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 하였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 크게 절을 중창하고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 화재로 전소된 뒤 2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 왔다.

현존하는 당으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한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선리수도원(禪理修筆道院) 둘이 있다. 또한 실상사는 국보 1점, 보물 11점, 지방유형문화제 3점 등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이다. 특히 불상에는 많은 보화가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하여 훼손된 적이 있었으며, 그 불상의 복장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桎疏) 등의 보기 드문 서적도 있었다 한다. 당무 중에서 보광전은 홍척과 소철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50년의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84년에 중건한, 정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특이한 양식의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 국보 제10호인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현재의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남아 있어 석탑 바로 뒤의 석등과 같이 현 위치가 원래 위치가 아닌가 생각되며 기단부위 구조와 각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여주는 이른 바 공예직인 이형석탑(異形石塔)이라 하겠다. 실상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인 실상사 부도는 보물 제36호로 8각원당의 일반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8각으로 된 지대석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다. 형태는 약간 고준(高峻)하여 안정감이 없어 보이지만 정제된 편이다. 약한 석질의 탓인지 조각은 간소하고 -소박한 편이며, 특히 상대적 윗면의 귀 꽃 표현은 기력이 없어 보인다. 상대적 양련과 탑신 괌대의 연판배치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으로 주목된다.

보물 제37호인 실상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실상사의 중심 법당인 보광전(普光殿) 앞에 동서로 건립된 2기의 삼층석탑이다. 석탑들은 규모. 양식. 보존상태 등이 같으며 특히 2기 모두 상륜부가 거의 완전히 남아 있다.

기단부에서의 탱자 수와 옥개석 받침 수의 감소, 기단부 갑석 상면의 심한 경사, 전체 형태의 고준화 등은 건림시기의 하강을 시사하며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실상사 개기가 신라 흥덕왕 3년이라 전하므로 석탑의 건림도 이 때쯤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승탑(僧塔)인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稜伽寶月塔)은 보물 제33호로 實相山門의 제2조사 소철화상의 탑이다. 신라 석조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 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높직한 8각지대석 위에 건립되어 있다.

보물 제41호인 약사 전 안에 봉안된 철제여래좌상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두 발을 양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현재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사각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은 넓적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고 이마는 좁은 편이지만 박진감이 넘치고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활짝 편 시무외인(施撫畏印)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랑은 맞잡고 있는 모양인데,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므로 이 불상이 통칭 약사불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짙다. 이불 상은 9세기 중엽경에 조성된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禪風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실상사는 대대적인 복원 중창을 앞두고 있으며, 지난 1990년 11월 조계종의 중견승려들에 의해 조직된 수련 결사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선우도량」이 근본 도량으로 삼으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신행단체

동국대학교 불교합창단


가을이 갓 태어난 어느 저녁, 불켜진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있습니다.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5층 불교합창단 실에서 약 50여명의 남녀 학생들이 지휘자를 중심으로 11월에 있을 제26회 정기공연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1970년 제1회 정기 연주회를 발판으로 창립된 동국대학교 불교합창단은 국내 유일의 대학 불교합창단으로서 교내연주는 물론 각종 대외행사에 참가함으로써 학교와 불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26년간의 발자취를 대략 살펴보면, 창단 10주년기념 정기연주회(76년, 문화체육관), 일본 Y . B . A합창단 초청합동공연(77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국제 무용제 찬조출연(88년, 국립국장) 그리고 대한민국 종교음악제(90, 호암아트올)등등 크고 작은 불교음악공연에 참여해 왔습니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 국제무용제에서 한국출품작으로 '하얀초상' 에 찬조출연하여, 각종 매스컴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이후 대외적인 섭외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 경인지역 대학연합합창제에는 해마다 참가하여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과 같은 찬불가를 연주하여 대학가에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포교활동에 기여하여 왔습니다.

단원간의 사랑을 최고로 여기는 우리 불교합창단은 어느 동아리보다도 가족적이며, 항상 웃음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불교음악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고 보급하여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불교합창단 회장  : 박병호(전기공4)

        정지휘자 : 양성호(산공3)

        부지휘자 : 임선향(지리교육2)

        반주자 : 박정이(지리교육1)

        행사부장 : 추현철(컴퓨터공1)

        회계 : 최영자 (가정교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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