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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6월호 / 통권 16호 / 불기
2539(1995)년 6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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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식
법어 생명은 하나 / 녹원 큰스님(동국대학교
이사장)
5월은
우리 교주(敦主) 이신 세존(世尊)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달로서 일 년 중에
가장 좋은 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도솔천 내원궁의 불보살님이
상주하는 곳에 계시다가 사바세계를 관찰해보니
사바세계에는 죄악 중생이 많아서 내가고
국토에 태어나서 그 중생들의 좋은 벗이
되어 그들의 모든 고통을 덜어주고 안온하게해
주기 위해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중인도
가비라국에 있는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부모의 인연으로 하여 세상사랑들 저럼
태어나셨습니다.
부처님은
오시는 일도 자제하게 오셨고 , 가시는
일도 자제하게 가셨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무애자애하기
때문입니다. 법화경 에 보면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이다.' 라고 했습니다. 태어나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태어남으로 인하여 고통이 생기고 노병사(老病死)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적 생명관을 가지고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생명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생과 사가 끊어지고 초월한
자리로써 아무런 고통과 불가능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대무변한
이 우주공간 속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더위와
추위 등 자연적 조건에 자제하지 못하고
제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육체적 생명관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천지간에 존재하는 누구든지 다 태어나는
자는 살려고 하지 죽기를 좋아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결국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나는
문제를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이 불보살입니다. 바로 우리
중생들에게 생명의 본질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이
우주 간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고 따라서 무한한 국토가 벌어집니다.
이와 같이 무수히 다른 국토가 벌어지는
까닭은 각각의 존재들의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조건에서도 그 국토를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은 각각의 존재들이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물고기의
경우 물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지만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면 자재를 잃고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업에 따라서 몸의 형태가
달라지고 남녀의 차별, 수명의 장단, 수용하는
복락의 많고 적음등이 모두 업에 의해
차별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업에 따라 태어난 중생들은 모든 면에서
자재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인간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자기 뜻대로 되면 기뻐합니다. 사실 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업에 끌려
다니기 때문에 부자유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업에 끌려서 사는 것은 마치 자석에 쇳가루가
붙어서 자재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간에
서로 입력에 끌려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 간에 인력에 끌려 자재를 잃고 살아간다면
자재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어렵게
대학에 들어와서 인생의 원대한 목표달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남녀 간의
정에 끌려서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면 지금
당장은 달콤할지 몰라도 앞으로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어떤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 놓으면
바람은 바람대로 소통되고 소리는 소리대로
소통됩니다. 그런데 한번 집착하면 모든
것이 경계가 생겨 서로 소통되지 못합니다.
마치 기온이 내려가 물이 얼음이 되면
물이 가지고 있는 덕과 모양이 상실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물의 본질은 모양에
관계없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본질을 알지 못한 채 모양에
마음을 팔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양이
바뀌면 슬픈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업에
끌려다니는 중생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현재 이러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원인을 짓고 성숙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습니다.
자기 마음이 3선도도 만들고 3악도도 만들어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즉 일심이 청정하면 온 가족이
더 나아가, 한 사회, 한 국가, 한 세계가
청정해진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
입니다.
과거에는
육체적 생명관에 따라 본능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나쁜 업에 따라 부자유한 몸을
받았지만 오늘 수계법회에서 참회를 함으로
인하여 그 나쁜 업들이 연비 하는 순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온 산천초목도
성냥 한 개비로 다 태워버리듯 백 겁 동안
쌓은 죄업(百劫積集罪)도 한 순간 참회로
인해 모두 소멸되어 버립니다(一念頓湯盡).
''참회''의 ''참''이란 과거에 지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요 ''회''란 앞으로 나쁜
업을 짓지 않겠다는 맹세입니다 참회를
하면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나쁜 업을
짓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 받게된다는
이치를 안다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수계 식에서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이렇게 참회하여
비운 마음에 부처님의 법을 채우면 바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생각이 달라지면
업이 달라져 얼굴이 밝고 환하게 바뀌게
됩니다.
탐.진.치
3독심을 가지면 피가 검게 되고 생명을
살려주고 보시를 행하면 피가 맑아져 얼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 인류가 하나의 집안이며,
하나의 생명체로써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자연과 나와
생명체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명체가 하나라는 이치를 깨달으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해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에서만이
진정한 인류 평화와 평등이 실현됩니다.
두두물물이 본래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다른 존재를 해치는
것이 곧 자기를 해친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계(戒)는
왜 받아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다함께 평화스럽게 사는 한계선을
정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한계선이 불교의
계명(戒鈴)입니다 한편 진리의 교단인
사부대중이 건전하게 존재해야 부처님의
정법이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해줍니다. 바로 교단을 청정한
화합단체로 만드는데 기본적인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한 계 가운데 10선계(十善戒)는 재가불자가
이 세상을 잘살아가고, 크게는 부처님과
보살의 지위에 나아가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동국가족에게 부처님의 거룩한 십 선계를
내려주겠습니다 모두 후계합장을 하고
잘 받아 지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산목숨을 해치지 말고 고통받는 생명들에게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도록 하라
생명체들은 살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살도록 도와주면 복이 되고 이유없이 죽이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마침내 모두 성불할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체를
해쳐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세번째는
사음(邪姓)을 하지 않고 청정한 범행(什行)을
닦아라.
이상은
몸으로 짓는 업으로써 살생, 도적질, 사음은
악업이 되고, 방생, 보시, 범행은 선업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을 하라.
다섯째는
비단같이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고 정직한
말만을 하라.
여섯째는
이간시키는 말(兩舌)을 하지 않고 화합시키는
말만을 하라.
일곱째는
악한 말을 하지 말고 부드럽고 자비스러운
말만을 하라.
이상은
입으로 짓는 업으로 망어, 기어, 양설,
악구는 악업이 되고, 진실한 말, 정직한
말, 화합 시키는 말, 부드러운 말은 선입이
됩니다.
여덟째는
탐욕을 부리지 말고 만족한 생활을 하라.
아홉째는
화를 내지 말고 자비스러운 행동을 하라
열째는
어리석지 말고 지혜스러운 사람이 되어라.
이상은
생각으로 짓는 업으로 탐.진.치는 악업이요,
그와 반대되는 것은 선입이 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분입니다. 우리도
지혜로운 마음을 내서 10선업을 행하고
지금까지 받은 계명을 받아 실천하면 자비스럽고
복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정각도량 부처님과
함께 하는 마음 / 이법산 (서울캠퍼스
정각원장)
마음은
본래 빈 것이다. 그러므로 여유가 있어
넉넉하고, 맑고 깨끗하여 무엇이나 담고
그릴 수 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부처를
담으면 부처가 되고, 연꽃을 그리면 연꽃이
된다 참으로 훌륭하고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 모양도 볼 수 없고
색깔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모양과 색깔도
알고, 미워하고 사랑할 줄도 알며, 무엇이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머리에
있을까, 가슴에 있을까?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옛날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婆羅堤尊者)에게
,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존자는,
''견성
(見性)한 것이 부처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스님께서는
견성하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불성 (佛性)을 보았습니다 ''
''그
성 (性)이 어디 있습니까?''
''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보지 못합니까?''
''지금
현재 작용하고 있지만 왕 스스로기 보지
못합니다. ''
''내게도
그것이 있습니까?''
''왕이
만일 작용하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만일 왕이 작용하시지 않으면 그 본체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이
작용할 때에는 몇 군데에 나타납니까?''
''그것은
여덟 군데에 나타납니다. ''
''그
여덟 군데에 나타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
''태(胎)에
있을 때는 몸이요, 세상에 있을 때는 사람이며,
눈에 있을 때에는 보는 것이요,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 것이요,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를 맡는 것이요, 혀에 있을 때는 말하는
것이며, 손에 있을 때는 쥐는 것이요,
발에 있을 때에는 다니는 것입니다.
두루
나타나면 항 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를
모두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낱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이는 이것을 불성(佛'陸)이라
하고, 모르는 이는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
왕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열리어 깨달았다.
불성(佛性)은
마음과 다르지 않고 마음을 알고 작용하는
실체가 본성 (本'注)이다 사람의 본 성품은
샘물처럼 맑고 깨끗한 것으로 이를 깨달아
알면 견성(見'1生)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티끌이 섞인 더러운 물과
같고 꽁꽁언 얼음과 같아서 자기 본성이
갖추고 있는 작용을 다할 수 없다 그 마음의
티끌을 제거하고 얼음을 녹여버리면 물은
본래의 자기 성품과 작용을 할 수 있듯이,
한 생각 돌이켜 물든 중생심의 벽을 허물고
본래 청정한 자성(自'注)을 드러내면 곧
바른 깨달음을 성취했다 할 수 있고 이를
성불(成佛)이라 한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성불하는
길이며, 다시 말하면 삼귀의(三歸依)의
실천이 곧 성불로 가는 방법이다. 성불은
자기 성품의 본질을 깨달아 증득한 상태이므로,
모든 것에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모든
것을 비추어 잘 알기 때문에 무슨 작용이든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우리가
항상 작용하면서도 자성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청정한 마음이 흐려져 빛을 잃은
무명(無明)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
마음이 어리석어 자성을 알지 못하는 이를
중생이라하고, 한 마음을 깨달아 자성을
훤히 아는 이를 부처라 한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한마음의 어리석음과 깨달음의
정도이나, 한마음의 실체는 중생과 부처에
다름이 없다.
성불한다는
의미는 부처와 하나 된다는 의미이며 부처와
하나 됨은 곧 견성(見섀生)해야만 되는
것이다.
견성하여
부처와 하나 되면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이 모두 없어지게 된다.
부처와
하나 되어 부처님과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사십이장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자가
나에게 수천리 떨어져 있더라도 나의 계(戒)를
생각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비록 내 곁에 있으며 항상 나를 본다고
할지라도 나의 계를 따르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듯이 아무리 훌륭한 성인의 진리
말씀이라도 배우고 익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염불은
부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는 것이다.
마음에 부처님을 담으면 마음은 부처님의
세계로 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생활 자체가
모두 불교가 된다. 마음에 담기진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으로 손과 발에 명령하여
실천토록 해야 한다.
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면 우리는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부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는 부처님 곁에 있으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계율의 실천은 중생심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행을 길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부처님의 행동과 같이되면,
우리는 부처가 된다. 부처와 하나가 된다.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을 여읜 성자이듯이
우리도 괴로움이 없는 성자가 된다.
불교신자는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고 부처님으로 가는
길을 계율을 잘 지켜 생활화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불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 가신 지 오래고
부처님 태어나신 곳과 다르더라도 우리는
부처님과 함께 하게 된다.
계율이란
상징적 규범이며, 자성의 보호망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따로이 지키고 찾을 것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우리 생활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만지고, 걸어다니는 것이 마음에
있고, 마음의 본성을 알고 찾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곧 부처이고 깨달은 자가 부처님이다.
우리 모두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 부처님에게로 가까이 가고,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와 함께 하게 되리라. 성불합시다.
일주문 적당한
긴장 / 이만(불교학과 교수)
옛날
영국에서 있었던 일로서 그 때는 고기가
많을 때라 사람들이 먼 바다로 나가서
많은 고기를 잡아오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들을 산 채로 육지에까지 운반해
가져오느냐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이고 죽은 고기 보다는 살아
있는 고기가 항상 값이 더 나간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몰두하였지만
거의 다 실패하거나 별 무소득이었는데,
유독히 한 사람의 어부만큼은 산 채로
항상 고기들을 항구에까지 운반해 가져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결을 물었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예를
들어 멸치를 잡았으면 이 멸치들이 들어
있는 물탱크 속에 이들을 주로 잘 잡아먹는
갈치나 문어 등을 몇 마리 집어넣으면,
멸치들이 긴장(緊張)하여 끝까지 살아온다.''
고
하면서, 그 비결을 알려 주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시라도 마음을 까닭 없이 놓으면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무엇에 대하여 무조건 거부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경험하거나 근육 등이 굳어져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이 긴장감이 어수선할 적에 잘 나타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흥분되어 나타날
적에는 자연 말이 많다거나 뚜렷하지 못한
행동을 자주 하거나 무슨 공상을 하는
등 망상을 많이 펼 경우에 주로 일어난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어느 것이나 다 이 긴장의 고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인 긴장이 아니고 약간
여유가 있는 긴장은 오히려 우리에게 삶의
의욕을 보다 더 높여주고, 한 차원 높은
데로 정신을 향상시켜 준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모출생경(佛母出生經)에 보면 보살들의
수행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마치 일반
사람들이 먹고 마실 것이 많을지라도 그
곳이 도둑의 소굴이면 이를 두려워하듯이,
비록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늘 마음의
자제력을 잃지 않아 욕망이나 쾌락을 일으키지
말고 또한 이를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방심(放心)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보왕삼매론(寶王三 妹論)에서도,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얼마간의 잔병이
있으면, 그것을 항상 명심하여 근신하든지
욕심을 삼가 하면 오히려 이것이 더 좋은
약이 되어서 오래 산다(念身不求無驛尙
身排病難貪慾乃生 是故大聖八 以病苦爲良樂)고
강조하고 있는 것 등은 수행상의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으로써, 적당한 긴장과 철저한
절제는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안락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정각논단 등불은
켜졌다 / 이 종 찬 (국어국문학과 교수)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도 지난 지 벌써
1주일이 되었습니다. 그 때 켜졌던 등불은
아직도 우리의 도량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등불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밝아졌는지 다시 되돌아보고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저 등불은 밝은 낮의 빛에는
숨고 밤의 어둔 빛이 찾아와야 밝아집니다.
그러기에 어둠을 밝혀 주는 것을 등불이라
하나 봅니다. 하오나 부처님 오신 날에
밝힌 등불이 비록 어둠이 전제되어 밝히는
불이기는 하지만 이는 강한 햇빛에도 그
빛을 상실하지 않는 길이 밝히는 등불이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이 배우고 가르치는 도량의 뜨락을
지나며 머리 위로 장식되어 있는 이 정명의
등을 보면서 나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내 스스로
내 마음의 실체조차도 모르고 있으니 이
이상 딱한 일도 없습니다. 저 밖에 있는
등불이 아무리 밝아 이 무명의 중생을
밝혀주려 하여도 무명 그 자체로 굳어져
있는 중생의 마음속까지는 뚫지 못하는
것이 그릇으로만 존재할 때에 등불의 한계이고
그 그릇의 내용물로서 담겨져야 할 마음이
밝지 못한 중생의 무지함이 또한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이 안타까움을 알면서도 또 이 무지 무명의
어둠에서 벗어나지도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으니 더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등불이
아무리 밝아도 가려져 있는 물체의 저쪽까지는
밝히지 못합니다. 내 몸 밖에 있는 등불이
아무리 밝아도 마주하고 있는 앞쪽은 밝히지만
몸의 뒤쪽은 밝히지 못할 것이며 더더구나
육신으로 가리의 있는 마음의 깊은 곳이야
어떻게 밝히겠습니까?
그러니
내 마음을 밝히려면 내 마음을 끄집어내어
등불 앞으로 가져가든가 아니면 등불을
가져다가 마음마저 끌어들이든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란 것이 물건처럼 그리 쉽게 잡혀지지
않으니 우리 이 범상 대중들로서는 등불
따로 마음 따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빛을 되돌려 뒤집어 비추어보라 했나 봅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의 등불'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마음에다
등불을 켤 수밖에 없습니다. 저 도량의
뜰에 달려 있는 등불하나, 아니 반개라도
좋습니다. 마음 안에다 옮겨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길이 밝은 등불인 장명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때는 마음뿐만
아니라 등불마저도 제대로 잡히지가 않으니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마음이나 등불을 찾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배움의 도량은
이 작업을 하는 곳입니다. 이것을 일러
배움에 참여한다는 참학이요,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수양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으로 다져진 이 도량에 몸담은 우리
하나하나는 이 불 밝히는 결과를 얻도록
노력함이 바로 본분이고, 이 밝혀진 등불이
길이 이어지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에게
뒤따르는 수양에 달려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밝혀진 등불을 보리의 마음 등불이라
한라면 이 불이 꺼지지 않고 길이 밝혀지는
것은 계속되는 기름의 공급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 기름의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큰 대자대비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기름 공급이 계속 되더라도 기름을 태울
수 있는 심지가 없으면 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이 기름을 태울 수 있는 심지 이것이 바로
큰 발원일 것입니다.
서로
직분이 다른 것 같은 이 세 요소, 곧 빛의
당 체인 바로 그 마음의 실체와, 심지로
비유되는 그 깊은 믿음의 마음과, 기름으로
비유되는 큰 원력의 그 대비의 마음 이것
이 세 마음의 실체가 되어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한량없는
공덕인 것입니다. 우리 배웅도량의 직분이
바로 이것이기에 우리의 이 도량이 더
귀한 것입니다.
이
길이 밝은 등불을 밝히려면 우리는 이
등의 의미를 어떻게 따져 보면 좋을까,
잠시 달마대사의 장명등의 비유를 들어
살펴보기로 합니다.
몸으로
등불의 촛대를 삼고, 마음으로 등잔을
삼고, 믿음으로 등의 심지를 삼고, 계율로
등불의 기름을 삼고, 지혜로 깨달음의
등불을 삼아라(以身爲燈臺, 以心爲'燈盞,
以信爲燈炷, 以戒爲燈由, 以慧爲覺燈)
하였습니다. 이 불을 밝히려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깊은 믿음으로 정진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내 지혜의 깨달음으로
밝아진 등불이 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등불을 켜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됩니다. 등불을 세속적인 의미로만
풀이하더라도 등불은 제 몸을 불태워 대상의
물체를 밝혀주는 구실을 한다 합니다.
빛 그 자체는 제 몸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물체 때문에 존재합니다.
정명의 등불을 밝혔음은 위로 보리를 구하는
자리의 행위에 만족한 것 입니다. 빛의
본연의 임무는 대상을 밝혀 주어야 하니
아래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이 타의
행위가 바로 뒤따라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
도량은 바로 배움의 도량입니다. 배움은
가르침을 받는 것이요 가르침은 배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학생의 처지에서는
마음에 불을 켜기 위한 방편을 터득함이고,
가르치는 스승의 처지에서는 터득된 이
밝은 등불의 빛을 학생에게 비추어 주는
마주침입니다. 저 배움의 뜰을 훤히 밝혀주고
있는 등불의 빛이 이런 뜻을 담아 이 동산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비쳐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행복스럽습니다.
요즘
세속의 여러 삶이 너무 어수선한 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고해라 표현되는 사람살이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그러할수록 밝혀주어야 할 대상이
늘어난 것이라 한다면, 이렇듯 장명을
밝혀 놓고 있는 우리의 도량에 해야 할
의무가 더 늘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이 무거운 사명감을 연등을 맞이한 이
계제에 한 번 더 되새겨, 기왕 밝혀 놓은
등불을 이 남산 기슭에만 밝힐 것이 아니라
서울장안 온 거리, 아니 나아가 이 나라
3천리 방방 곳곳에 비출 마음자세로 되잡아
굳건히 정진합시다.
교리강좌 교양과
예불 / 편집위원
누구나
그 대강을 알고 있는 심청전의 이야기에서
사건의 꼬투리가 될 뿐만 아니라 소위
'해피 엔딩'의 원인이 되는 것은 '공양미
삼백 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양이
불교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행위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공양이란 부처님
또는 절에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을 바치는
일이라고 쉽게 짐작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짐작이 널리 통용되면서 하나의 상식을
형성한다. 즉 공양이란 국어사전에서 설명하듯이
''부처 앞에 음식물을 이바지하는 일''
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공양의 의미가
주로 음식과 관련된 행위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가 특히 불교 신도에게
널리 적용되면서 스님들이 식사하는 일도
공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제는 스님이
아닌 속인들에게도 식사를 공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불교 신도로서의 동질감을
표시한다.
그런데
공양이라는 말의 의미와 용도를 그러한
상식의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면, 불교의
중요한 신앙 행위가 오해되거나 그 질적
수준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여기서는
먼저 공양이란 부처님께 예배하는 예불의
여러 가지 형태임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부처님께
예배함을 예불이라고 한다. 흔히 염불을
표현하는 말인 것으로 알고 있는 '나무
아미타불'도 원래는 예불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 말은 '아미타'로 불리는 부처님께
경례 즉 예배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두 손을 모으는 합장으로 머리를
숙이면서 경례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반적인
예배이다. 경례하는 마음을 가장 경건하게
표현하는 예배로는 불가에서 흔히 큰 절이라고
표현하는 '오체투지' (五體投地)가 있다
이것은 두 발과 두 손과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온몸을 조아려 최대한의 경의를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 같은 예배는 결국
존경하는 마음을 신체적인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신앙의 정신적 표현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배의
신체적인 행위는 정신적인 존경의 표현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식의 표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 존경의
대상이 특히 위대한 분이라면 존경하는
마음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내고
싶은 심정은 더욱 간절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불탑 또는 불상을 예배하면서
향이나 꽃이나 음식 등을 바치는 관습이
일찍이 일반화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습을
공양(供養)이라고 한다.
'푸자'
(puja)라는 말의 번역어인 공양의 본래
의미도 존경 또는 예배이다 그러나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물, 향, 꽃, 음식, 등(燈)과
같은 것들을 바치는 예배 의례가 '공양'
이라는 말로 통용되었는데, 불교에서도
이런 관습을 받아들임으로써 공양은 정신적
존경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 예배형태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었다. 이리하여 불전을
정결하고 장엄하게 꾸미는 데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스님들의 수행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불교 교단에 제공하는 일을 공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초기의 교단에서는
음식, 의복, 침구, 약품을 제공하는 일이
소위 '사사(四事)공양' 우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공양은 물품을 바쳐서 존경해야 할 대상을
부양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 물품과
대상의 범위가 확대되어 일상 품 외에도
금전이나 토지 등을 삼보에 제공하는 일이
공양의 취지가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음악이나 무용도 공양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공양은 크게 부처님에 대한 불공양,
부처님이 깨달아 가르친 진리인 법에 대한
법공양, 교단인 승가에 대한 승공 양으로
분류된다.
고양의
세 가지 분류에 의하면, 대게의 사람들이
의식하거나 실행하고 있는 공양은 불 공양
또는 승공 양이다 그런데 이런 공양은
유형의 물질을 제공하는 신앙 행위라는
점에서, 공양하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물질적인
기부 행위를 공양의 으뜸인 것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는 물질적 기부의
능력과 신앙 즉 예배의 질을 연결시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그러나 불전은 법공양이
공양의 으뜸임을 설함으로써 공양의 진정한
의의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은
법공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으뜸입니다.
법공양에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 중생들을 이롭게 거두어 주는 공양,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 착한
일을 하는 공양, 보살이 할 일을 버리지
않는 공양, 보리심에서 떠나지 않는 공양
등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공양의 공덕을
법공양에 견준다면, 그것은 잠깐 동안
법공양한 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숫자와 비유로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함이 부처님을 출현케
하는 일이고, 보살이 법공양을 하는 것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의
이 설법에 의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법공양이며,
이 법공양은 부처님께 온갖 경의와 정성으로
예배하는 불 공양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이렇게 중요한 공양인 만큼 그것은 단절
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넓고
크고 가장 훌륭한 이 공양은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야만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허공계와 중생계와 업과
번뇌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이 공양도
다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계속하여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싫어함이 없습니다.''
법공양이란
결국 불교도로서의 진실한 생활과 의식이며,
공양의 참뜻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따지고 보면 물질적인 공양도 어법공양의
일환이 된다. 그리고 모든 공양은 바른
삶의 모범으로서 신봉할 만한 성자에게
그를 믿고 따르겠다는 존경의 표시라는
점에서, 예불의 일환인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불자들은 공양을 하면서도 공양의
공덕을 먼저 떠올릴 뿐, 그의 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듯하다. 공양을 요식 행위로
임하는 사람들에게 사십이장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경종이 될 만하다.
''악한
사람 백 명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착한
사람 천 명을 공양하는 것보다 오계를
지키는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낫다.
이와 같이 백억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낫고, 천억의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보다 분별없고 집착
없고 닦을 것 없고 증득할 것 없는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낫다.''
경전의
세계 부모은중경 / 편집위원
일반적으로
가족윤리에 있어서 동양사회에서는 어버이와
자식 간의 종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서양사회에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수평적인 관계를 주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그 개념에 있어서는 각 시대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종교관 등이
달랐던 데서 온 것 같다. 즉 삼국이나
고려시대에서는 개인의 수양이나 공부를
위해서 출가하여 그 부모로 하여금 자신을
잊게 하는 안심효(安心孝)가 근본적인
효 사상의 개념이었던 반면에, 조선시대에서는
자식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한 분신으로써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부모를 위한 철저한 행실 등을 함으로써
효를 다한다는 감지효(甘旨孝)가 그 근본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윤리개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유생들이 저들의 이념과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불교의 효사상을 철저하게
배척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그 응어리가
씻어지지 않고 계속 잔존해 있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가족윤리
특히 어머니와 자식 간의 윤리에 관하여
이를 대승불교사상적인 입장에서 상세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불설부모은중경
(了津說父母恩重經)인 것이다 이 은중경은
그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의 은혜는 매우
깊고 소중해서 그것을 감히 자식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즉
이 세상에서 남의 어머니가 된 사람은
자식을 갖게 되면 자그마치 열 달 동안이나
몹시 심한 신고(辛苦)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달에는 회태(懷胎)의 기운이
마치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이 약하기
때문에 이를 잘 보존키 위하여 모든 어머니
되는 분은 말할 수 없는 부담과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되는
달에도 그 기운은 아직도 미약하기가 땅에
떨어져서 엉긴 물과 같기 때문에 여전히
세심한 주의가 감돈다는 것이며, 삼, 사개월이
되면 이 기운이 점차로 커져서 이제는
엉긴 피와 같이 되고, 대강 사람의 모습
등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팔 개월이 되면 이때부터는 아이가 어떤
뜻과 슬기 등이 생겨나게 되고, 몸에는
눈 귀 .코 등 아홉 가지의 구멍이 뚫린다는
것이며, 그 아홉 달째는 아이가 무엇인가를
뱃속에서 먹기 시작할 때이므로 어머니는
철저하게 아이에게 좋고 나쁜 음식을 가리는데,
예를 들어 복숭아 . 배 마늘 등은 삼가하고,
다섯 가지의 곡식 즉 오곡(五穀)인 쌀이나
수수 보리 . 조 . 콩만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열 달이 되면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경전은 아이들의 성장에 관하여
이를 자세하게 생태학적으로 고찰하여
설명한 것 보통 3두(斗) 3승(升)의 피를
어머니가 홀려야하고, 성장하면서는 8곡(斛)
4두(斗)의 혈유(血乳)를 먹여야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자식을 잉태해서 낳기까지에는 오랜
각고의 시간이 요구되지만 이것만으로
그 도리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후에도
그에 대한 모성애는 한이 없으니, 이러한
어버이들의 은혜를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이 은중경에서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이를 배어서
이를 잘 보호해준 은혜가 그렇게 깊고
소중하다는 것이다(@耽守護恩)
둘째로
해산에 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이를 능히
감수한다(@産受苦恩)는 것이며, 셋째로
이렇게 지독한 산고를 치르면서 자식을
낳고서도 그 아이가 일단 탄생하면 이를
기뻐하면서 모든 근심을 잊어버린다 (生子忘屬恩)는
것이다.
넷째는
이 아이를 키우면서 음식을 삼가하는데,
만약 쓰고 거친 것이면 이를 자기가 먹지만
달거나 맛이 있으면 아기에게 먹여준다(@苦吐甘恩)는
것이고, 다섯째는 아이를 잠자리에 재울
때에는 방지리가 만약 따뜻하고 마른자리이면
이에 아이를 눕히고 대신 자기는 차거나
축축한 곳에서 잔다(@@乾就@恩)고 하며,
여섯째로 자기의 고혈을 서슴없이 언제고
아이에게 주어서 그 아이로 하여금 잘
자라게 한다(乳哺養育恩)는 것이다.
일곱째로
아이의 똥과 오줌 등을 항상 깨끗하게
씻어서 청결케 해주는 은혜(洗濁不淨恩)라는
것이고, 여덟째는 자식이 먼 길을 갔으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안심치 않고 이를
걱정하는 은혜(遠行意念恩)인데,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 둘 것은 이렇게 자식들이
먼 길을 떠나서 해가 서산에 걸쳐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 경우에 몸소 그 부모들은
나무(木) 위에 올라가서(立) 멀리까지
응시한다(見)는 뜻에서 이를 친(親)이라
했고, 여기에서 연유된 낱말이 부친(父親)이나
모친(母親)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아홉째는
이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어떠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이를 손수 한다(爲造惡業恩)는
것이며, 끝으로 열 번째는 늙어서 백 살이
된 부모라도 궁극적으로는 팔 십 먹은
자식을 걱정하듯이 부모는 죽을 때까지
자식들을 잊지 않는다(究竟憐愍恩)는 것
등이라고 한다.
본래
은혜(恩惠)라고 할 때의 은(恩)자는 그
상형(象形)이, 자식이 어렸을 적에 이불(口)
속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편하게 큰 대(大)로
자던 때를 상기하여 마음(心) 속으로 부모님께
감사하는 뜻(恩)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유교에서 불교의 효사상을 그들의 윤리
개념만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평시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예가 이미 저들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서도
증명되었던 것이니, 즉 그것은 이 부모은중경이
유교의 효경보다도 더 널리 사회적으로
보급되고 있었다는 통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은중경의 사상을 좀더 현대적으로
편집해서 그 이념을 널리 보급한다면,
아마도 오늘날과 같이 가족이나 사회윤리가
땅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매우 유익한 불교의 효경이 바로 이 부모은중경이라고
하겠다.
불심의
창 값비싼 골동품과 싸구려 밥그릇
/ 윤영해 (불교학과 강사)
젊은이는
미래를 설계하며 살고 늙은이는 과거를
추억하며 산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교를
두고 늙었다고 한다. 낡았다느니 시대에
뒤졌다느니 한다. 그래서 불교는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불교는 구시대의 골동품이라고
한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 거니 꽃이 피지
않는 고목 나무라거니 한다. 이런 혹평들이
듣기 좋을 리 없지만 부정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불교는
낡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도대체 왜 이런 소리를 듣는가?
시대에 뒤졌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정확히
꼬집어 말한다면 무엇을 가리키는가? 불교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말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적 생명체라면 자연 연령이
문제가 될 터이나 역사의 연령은 길면
길수록 오히려 빛나는 법이다 어떤 역사든
연령이 길면 긴만큼 인간정신의 보편성에
부합한다는 뜻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시대는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쳐 말하자면, 옛 것이라고 해서
다 낡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간직하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다. 불교가 오래되었지만
계속해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인간의 삶과
역사에 소중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인간의 삶과 역사에 소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을 벌爲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결국 불교를 두고 낡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연령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얼 두고 낡았다고
하고 무얼 두고 시대에 뒤졌다고 하는가?
골동품과
싸구려 밥그릇
골동품은
소중하다 그것은 값이 비싸다는 사실로
쉽게 증명된다. 골동품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한다.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에
아련한 향수와 은근한 위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골동품은 용기(用器)로서의
지금의 사용가치가 없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골동품은 멀리 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다루기 어렵고 가까이 하기 힘들다
그것은 부잣집 안방 탁자 위가 아니면
엄중하게 관리되는 박물관에나 있다 그것은
예사로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은 골동품에
견줄 수 없는 싸구려 밥그릇들이다 하루
새끼 날마다 우리들의 밥상에 올라오는
것은 값비쌀 골동품 도자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다루기 아주 편하다. 한두 개
깨지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들은
부잣집 찬장이나 가난한 집 밥상 위에나
아무데나 널려 있어 언제나 손만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다.
그렇다면
값비싼 골동품과 싸구려 밥그릇 중에서
우리는 어느 것이 되고 싶은가? 물론 골동품일
것이다. 그것은 고상하고 우아하며 편안하다.
누가
구정물 통에나 들어가는 밥그릇이 되고
싶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골동품은 없어도
그만이지만 일상의 식기들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비싸지만 없어도
괜찮은 것과 값싸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즉 현재적 용도(用途), 이것이 바로
값비싼 골동품과 싸구려 밥그릇의 결정적
변별점이다. 나는 바로 이 문법으로 앞에서
제기했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골동품
같은 종교와 밥 그룬 같은 종교
이러한
문법을 종교에 대입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값비싼 골동품 같은 종교와 싸구려 밥
그릇 같은 종교 어떤 종교가 되고자 할
것인가?
골동품
같은 종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골동품이
된 종교가 갈 곳은 부잣집 안방 탁자 위나
박물관뿐이다. 거기서 장식품이 아니면
구경거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한 종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종교는 화석(化頁)에
불과하다. 생명이 없는 죽은 물체다 종교가
박물관의 화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이려면
하로세 끼 매일 밥상에 오르는 싸구려
밥그릇이어야 한다. 종교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살아 있으려면 인간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과 단 한순간도 괴리될 수없는 생명줄
같은, 것이라야만 한다.
사실
이런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박물관의 화석이 아닌 살아
있는 종교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밥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밥그릇에 매일 매일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을
담아 낼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아 있는 종교는 시대의 보편적인
현안(懸案)에 헌신해야 한다. 살아 있는
종교, 즉 밥그릇이 담아 낼 내용물은 바로
시대의 보편적인 현안이다. 시대의 현안에
헌신하지 못하는 종교는 이미 과거의 종교,
즉 죽은 종교이다.
시대의
현안에 헌신하는 종교가 되려면 먼저고
시대의 현안이 무엇인지를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지금 이 세계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정확하고 빠르게 알아야만 한다. 우선
그것이 환경의 문제인지, 생명존중의 문제인지,
민족주의와 통일의 문제인지, 경제적 정의로서
평등의 문제인지, 사회적 정의로서 소외해결의
문제인지, 정치적 정의로서 소외해결의
문제인지, 아니면 종교적인 공존의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만 한다. 시대의 현안이
무엇인지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에 헌신할
수 없다 시대의 현안은 항상 산적(山積)해
있다. 그것에 헌신하지 못하는 종교는
다시 말하지만 골동품이자 화석일 뿐이다.
골동품이나 화석이 환 곳은 박물관이다.
그것은 인간의 현재하는 역사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그릇은
자신을 담지 않는다.
불교는
과연 시대의 보편적 현안에 헌신해 왔는가?
만일 그렇게 해 왔는데도 늙었다느니 낡았다느니
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혹평이다 그러나
불교가 시대의 현안을 돌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온당한 비평이 될 것이다. 만일
불교가 시대의 현안에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여유가 없었을까? 불교는 시대의 현안에
헌신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헌신해 온 것은 아닐까? 불교라는 자의식(自意@)으로
기울여 온 노력들이 시대의 보편적 현안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는가?
인류의
문화 중에서 종교는 나가 아닌 너와 너희를
위한 헌신으로 특별히 특징 지워 진다.
그릇은 자신을 담지 않는다. 그릇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릇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담아낼 것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릇다울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그릇으로서 확인 시키는 최선의
길인 것이다.
불자탐방 국악과
박상진 교수 / 편집부
지구에
인류가 출현 했을 때부터 예술은 인간의
모든 감정 (회.노.애.락)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만들어져 왔다. 특히 음악은
성스러운 신(神)의 교신 역할로 지역마다의
환경에 따라 더욱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할 때에는 불교에서
극락을 묘사하기도 하는데 그 곳은 비천(飛天)의
노랫소리가 언제나 들리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그 만큼 음악은 인간들에게 희망과
이상향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있다.
특히
국악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하면서부터
민족의 정서와 결합하여 민중의 생활 속에
같이 호흡해왔다.
이번
정각도량 16호에서는 경주캠퍼스에 95학년도부터
새로 신설된 3개학과(국제관계학과, 사회체육학과,
국악과)중에서 5월 2일 점등식에서 음악으로
부처님 전에 소리공양을 하여 행사를 빛내준
국악과를 찾아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신
박상진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님은 아침에 일어나 부처님께 여경을
올리고 식사를 하면서 가족끼리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크신 은혜 이 공양, 일체중생
발부리 마하반야바라밀' 이라는 발원문을
함으로 하루를 시작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몸에 배어있는 신행생활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의 인연에 의해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듯 하다. 교수님은 부모님들이
부처님께 지성을 올려 기도 끝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즉 교수님과 불교와의 만남은 어머니의
태 안에서부터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고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소풍을 절로 많이
갔는데, 다른 아이들은 대웅전 같은데
잘 들어가지도 못하고 절도 안 하는데
교수님은 불쑥불쑥 들어가서 절도 하고
그랬다 한다. 어려서부터 불교적 인정서
속에서 생활해 왔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잠시 동안 교회의 성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전공이
음악이었던 만큼 음악활동을 하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그 당시 사찰에서는 불교음악,
즉 찬불가 같은 것이 활발하게 대중적으로
불리워지거나 활동을 두드러지게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가대 활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종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특히 소대원 중 한 명이 자살하면서
종교에 심한 회의를 느꼈다 한다. 그 후
제대를 하고 나서 우연히 '불교음악'을
하는 사청업 선생님을 만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불광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곳 광덕스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아, 바로 저거다'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교회의 활동은 음악공부에
도움이 되니까 한 거지 종교적인 믿음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국악과는
신설학과라 많은 문제점 ,어려움과 겪어야
할 시행착오들이 산재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많은 문제점들을 교수님은 잔잔한
미소로 설명해 주셨다.
''
힘이 든다는 그 자체가 우리가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라
본다면 한편으로는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모두가 노력해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불교음악을 향한다면 그것 또한 보람된
알이 아니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의욕과 신심으로도 걱정이 되는 이유는
지방캠퍼스에 신설된 학과라서 음악 하는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따르는 문제,
그리고 학교 제반시설의 부족, 학과홍보에
대한 미비점, 지역문화의 보조, 기여도
훌륭한 교수님들의 초빙의 어려움 등 때문이다.
그런 점에 대해 교수님은 '무엇보다도
내실을 기해서 앞으로 국악과 자체의 불교음악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틀을 마련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불교음악을 할 수 있는 자질들을
갖추도록 하고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주력할 수 있는 길을 닦으려 한다.' 고
말씀하신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어려움이 드러나겠지만 학교에
처음 생긴 음악과인 만큼 학교측의 많은
협조하에 점차 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 같다. 전공에 대한 물음에 한마디로
불교음악이라 말씀하신다. 원래는 작곡,
대금, 지휘를 공부했지만 불광사를 10년이나
다니면서 불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사명의식을
갖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전공을 불교음악이라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국악과 불교음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 때문에 현 국악교육에
대한 평가를 날카롭게 해 주셨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국악과 불교음악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우리나라
음악교육은 유치원부터 전부 서양음악
위주입니다.
피아노
쳐 가면서 7음계를 가르치고 배우고 그러면서
서양음악이 우리 본래의 음악인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것이지요. 사실상 중 . 고등학교
음악 책을 보더라도 교육부에서는 30%이상을
국악을 가르치도록 되어있는데 실제적인
교과지도를 분석하면 국악교육은 10%를
겨우 넘거든요 그나마 음악선생님 대부분이
서양음악을 전공하셨던 분들이라 국악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국악이 다른 나라 음악 같고,
다른 나라 음악이 버젓이 주인 노릇하고
있지요. 그것이 안타깝고 아쉽고 그래서
제 작은 힘이라도 불교음악을 업으로 삼아
보태고 싶습니다. 불교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믿고 따르는 것에 반해 대 우주의 진리가
그대로 담겨져 있고 인생의 삶과 행동
등이 대자연의 일부라고 이해됩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는 종교라는 관념적인 의미보다는
삶 자제의 일부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불교음악' 을 여러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힘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앞으로
제 평생의 사명인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광덕스님이 지어주신 혜월(慧月)이라는
법명을 그런 업에 맞는 이름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제가 앞으로 불교음악을 계속할
것을 광덕스님이 아시고 지혜로운 달빛이
온누리에 골고루 비추듯이 앞으로 불교음악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망은 문제점과 어려움이
국악과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수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국악과의 앞으로의 일들이
순조로이 잘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확신에 찬 교수님의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국악과가 지역문화와 학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 몫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동국과
불교 해방 후의 대학 승격 / 편집위원
민족의
감격스런 날 815를 맞은 해전은 그해(1945년)
10월 다시 문을 열었다 환성과 감격의
물결이 지나고 난 뒤의 허탈함과 새로운
불안으로 소요하던 사회와는 아랑곳 없이
헤화전문학교는 홑어졌던 가족을 찾고
서로 모여서 잃었던 동산에 새 마음들을
심었다.
재단법인
조개학원도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내일의
약진을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재단의
대표이사이던 허윤(영호)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재건의 제반사무와 개학 입학 등 학사문제의
처리는 김동화가 도맡아 하였다. 혜전
폐쇄 당시 조명기의 주관에 의하여 뚝섬
봉은사로 옮겨졌던 도서들도 다시 찾아
왔다.
우리
것으로 완전히 되찾은 학교는 일본의 대륙정책과
관계 있던 異亞科를 文科로 이름을 고치고
그에 따른 교과목도 새로 정하였다 비록
그 교사요, 그 교명이지만 오늘의 혜전은
이제 어제의 그 혜전이 아니었다. 아무리
발전을 기약하여 증과 등으로 일반 전문학교로서의
위세를 갖추고 출발한 학교였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일제의 껍질을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오늘의
학원과는 같을 수가 없었다. 악몽은 가고
짓궂은 비바람도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누구라도 약진을 막을 수 없는 슬기와
힘의 줄기 찬 젊은 기운이 혜화의 동산에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한
학원은 1945년 10월말에 입학시험을 가졌다.
각양 각색의 차림과 연령의 차이가 많은
응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제
마음 놓고 우리의 것을 배우기 위하여
수난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이 교문으로
밀려 온 것이다. 경쟁률은 불 교과가 3대1,
문과가 5대1 이었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아직도 어수선한 환경이었지만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은 이토록 혜화의 배움터를
찾았던 것이다 수업은 11월부터 시작되었다
I944년 5월 폐쇄로 수업을 중단한지 만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1946년 9월 혜전은 다시 그 이름을 잃는다.
전문학교로부터 대학으로 승격되어 교명이
「東國」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건대 8. 15 조국 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정치상 또는 신분상의 굴레가 제거되는
것에서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우리 문화말살정책에서 벗어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역사상 선인들이 경험한
바 없는 민주입헌의 새 국가를 국민 각자의
의사에 따라 새로이 마련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국민문화의 창조의욕이 절실히 요망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본교가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화발길 아래 황폐해진
옛 교사를 되찾아 조용한 가운데서도 조국
재건의 사명감을 품고 개교를 하게 된
것은, 정치적인 광복과 함께 이루어진
민족문화 부흥의 계기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재개교된 혜화전문학교는 불교전문교육만으로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세계적인 신사조를
흡수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였다. 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조국의 번영과 인류복지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부응하는 교육내용의 충실과 기구
확대가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재개교와 함께 해전의 대학승격 여론이
일어나고 그 방안 모색이 뒤따랐지만 그것은
두터운 벽만을 실감케 했다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흡수할 지식의 폭을 넓혀 새로이
창조되는 새 국가이념을 모색해보려는
것은 우리 대학 당국자만의 요망이 아니었다.
실로 전국민적인 요망이었던 것이다. 본교의
문을 넓혀 오로지 불교종단의 私物이 아니고
전국민의 公@로서의 건전한 사학으로 육성하려던
종단측을 비롯하여 혜화전문학교장 허윤과
교수 및 학생의 일치된 노력은 이 같은
국가적인 요망에 부응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아직은 결실로 나타나기
어려웠던 바, 그것은 해방 후 미군 정청
문교당국의 고등교육 실시에 대한요강이
미쳐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교정신을
근본으로하는 혜전의 대학승격 실현이
지연되었던 것은 이 같은 문교 당국자의
무정견 외에도 현실여건 의 미비에도 그
애로가 있었다. 즉 대학승격에 가장 큰
지장은 학교시설과 재정적 뒷받침이었다.
전시에 일본군에 징발되었던 혜화동 소재의
교사는 다시 반환되었지만 이 270여 평의
부지에 세워진 2층건물 251평의 협소한
교사만으로는 아무리 과도기라 하더라도
우선 시설면에서 대학건설에는 손색이
많은 것이었다. 한편 재정 면에서도 본
학원을 경영하는 재단법인 조개학원의
기본재산은 해전의 불교 흥아 양과의 유지경영에는
부족하지 않았지만 승격될 대학의 유지
경영을 위해서는 너무 빈약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재단법인 조개학원에서는 대학승격 안을
성안한 다음 교사확보를 그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미군 정시의 과도기에
있어서는 이 새로운 교지의 선정과 확보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도심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환경이 대학교육에 적당하고
거기에 다시 언제라도 불교계에서 사회와
마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교지 후보지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조계학원
이사측과 해전교장 허윤을 비롯하여 학교
당국자 간에 수차에 걸친 회합과 토의
끝에 승격될 대학건설의 장소가 정해졌다.
곧 오늘의 동국 캠퍼스가 들어선 중구
필동 3가 26번지는 이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다.
본
대학 백년대계의 터전을 현재의 필동으로
정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이 지역은 대학교지 설정의 주요
요건 가운데 하나인 도심 지대와의 거리
문제에 있어서 여러 후보지 중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일제 시 조계종 양본산 別院 조계사의
소유였던 대지23, 987평과 목조 기와로
된 7동 61, 701평의 건물이 있어서 불교재단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여러 후보지
가운데 가장 광대한 것이었다.
특히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필동 3가 일대는
풍치가 아름다우기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심에 이웃하여 수도의 심장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승지로서
교육환경에 있어서는 당시 이 이상의 이상적
후보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승격을 위한 준비는 이렇게 이루어져 갔다.
대전 직후의 극심한 물자 부족을 무릅쓰고
승격된 대학의 책상, 교단 등을 만드는
소리가 주인 없는 남산 기슭의 고찰에서
홀려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46년 6월부터였다.
그러나 재단과 학교 당국자에게는 교지
선정에 못지않게 벅찬 또 하나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격될 대학을 경영
유지하기 위한 기본재산의 증자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람의
향기 부석사 / 편집부
*
창건
부석사(浮石寺)는
오늘날까지 규모를 잃지 않고 보존해 온
천년 대찰 중에서 그 창건유래와 역대
고승의 활약이 비교적 확실한 보기 드문
절이다. 부석사는 경북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衢戮山) 중턱에 있는 사찰로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6년 (문무왕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廣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고 하며, 삼국유사
에는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 창건설화를 보면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匏台)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에서 어느 신사(信士)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姦少)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부리심 (普壬琶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 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웜蚌)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
드리겠다.''는 원을 세웠고,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했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 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외상에게
공양하려는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외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磋君)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선묘가 변한 용은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으므로,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浮澍寺)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모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芍尊子)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 아래에서
생겨난 것이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 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 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濊涇)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疑)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 (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으며, 1372년 (공민왕
21) 에는 원응국사(同應國師)가 이 설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무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 (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憎堂) 만월당(滿月堂)
만세루(萬歲樓) 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으로는 국보 제 18호인 무량수전과
국보 제 19호인 조사당(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李老鐘樓)
원각전(鬪覺殿) 안양루(安箕奈婁) 선묘각(善妙閣)
응진전(應眞殿) 자인당(慈忍堂)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선 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 둔
곳이다. 범 종루는 시한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웅이므로
일반 사찹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충
누각에는 '봉황산 부석사(I麝k凰曲孚石寺)'
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 17호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46호인 부석사 조사당벽화. 보물
제 735호인 부석사 고려각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27호인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유물>
*
부석사 고려 각판
고려시대에
새긴 삼본화엄경 (三本華凰經)의 목판으로
보물 제 73호 이다
삼본화엄경은
동진(東晉)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여 권의 화엄경 진본(晉本)과
당나라 무주(武周) 때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의 화엄경 주본(周本),
당나라 정원(負元) 연간에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의 화엄경 정원본(貞元本)을
일컫는 것이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이들 화엄경판은 고려 때 새긴
원판(原女反)과 조선 때 새긴 보판(事酊板)으로
혼성되어 있다.
*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목조 불전(佛殿)이며
국보 제 18호 이다.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 (阿彌陀如來)를 본존(本尊)으로
봉안 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1916년
해체, 수리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1376년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에는 배흘림이 많은 기둥머리에 외1출목(外一出木)으로
된 공포를 올렸다 가구양식은 2중량인데,
변주(邊柱)위의 공포가 고주(高柱)의 주도
밑 기둥머리에서 나오는 퇴보를 받치고
있다. 건물 내부 바닥은 전돌(塼石)을
깔고 남향하는 건물의 서쪽에 불단을 만들고
그 상부에는 궁전형의 보개(寶蓋)를 두었다.
이 건물이 양식상 중요한 점은, 이것이
주심포(柱心包)집의 기본양식을 가장 잘
남기고 있으며, 또 가구방식이나 세부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장식적인 요소가 적다는 점이다
*
부석사 소조여래 좌상
무량수전에
주 존으로 봉안된 고려시대의 소조 불좌상
으로 국보 제 45호이다 무량수전 안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이 상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나발(療累髮)의 머리에 육계(肉渠)가
큼직하고 얼굴은 풍만한데 길게 올라간
눈꼬리, 날카로운 콧날, 두터운 입술 등의
상호(相好)에서는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불상의
당당하면서도 장중한 신체와 안정감 있는
자세, 그리고 우견편단의 착의형식(澮衣形式)과
옷 주름의 표현 등은 석굴암본존불을 모본(模本)으로
삼아 제작된 춘궁리철조 석가 여래 좌상
(보물 제332호)을 비롯한 고려 초기 일련의
불상들과 같은 계통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신행단체 보살
사상 연구회 보살 사상연구회는 올해로
활동 11년째를 맞이하는 불교 대학 내의
불교연구 신행단체이다
지난
85년 한국 불교 중흥을 위한 새로운 불교사상의
확립과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참된
불교를 구현하기 위해서 당시의 진보적
불교 사상을 지닌 선배님들에 의해 창립
되었다10여 년간의 활동 결과로 현재 많은
불교 단체에서 선배님들이 활약하고 계시고
동아리 내에서도 학습법회 활동을 통해
정진하고 있다. 매주 정기적으로 불교사상,
어학 등을 학습하고 정각원에서 법회를
통해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불교대에서
주요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러 동아리
중의 하나로서 회원 내부의 불교적 자질
함양을 위해 외부 활동은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다.
불교도
주간에서 활동하는 것이 외부활동의 전부이다.
작년
종단 개혁 이후에는 팔정도에서 불교 개혁의
과정과 동악내 학우들에게 불교적 교양을
심어 주기 위한 전시 작업을 했고, 이번
불교도 주간에는 불상 앞에서 단주 보시와
금호 1-6지구 철거촌 주민에게 손수 제작한
연등을 보시하여 점등식을 하였고, 진관
스님 초청 법회 등도 열어서 시민 학생
한마당을 개최 하였다.
불교대
내부 활동은 올해로 처음 1학년 신입생들에게
불교 공부의 틀과 방향을 제시 해주려는
취지에서 법륜 스님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내부적으로는
불교 사상. 신행 법회 학습을 비롯하여
매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8시에
불상 앞에서 예불을 드리고 여름 마다
정기 수련회, 가을에 용맹 정진 3000배
수련, 아침 7시 법화경 강독 시간을 마련하고,
체육 대회를 가을에 열어 회원 내부, 선후배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회원 간의 단합과 불교 사상의 바른 정립을
위한 열기로 저희 보살사상연구회는 용맹
정진해 나갈 것이다.
비유와
설화 필연적인 인과 / 편집위원
보시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와 무외시(無畏施)의
3종으로 나눈다. 보시는 주는 마음, 주려는
마음, 아끼지 않는 마음을 일컫는다. 깨끗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이다. 교만한
보시, 명예를 탐해서 하는 생색내기 보시와
세력에 아부하고 아첨하는 보시는 이미
보시가 아니고 더러운 때가 끼인 오탁악세의
업 을 짓는 6도 윤회의 업보가 있을 뿐
결코 청정한 복을 얻지는 못한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수달 장자는
말년에 몹시 빈곤하게 되어 재물이라고는
전연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품팔이를
하여 쌀 서 말을 얻어 밥을 지었다. 마침
아나율이 걸식하러 왔으므로 그의 아내는
곧 발우에 음식을 가득 담아 주었다. 뒤따라
수보리 . 가십 . 목건련 . 사리불능이
차례로 걸식하러 왔으므로 부인은 또 각기의
발우에 음식을 가득 담아 주었다 마지막에
부처님도 오셨으므로 또 발우에 가득 담아
드렸다. 수달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그 부인에게 밥을 달라했다. 부인은 ''만일
존 자 아나율이 오신다면 당신은 밥을
혼자 먹겠습니까, 손자님께 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수달은 대답했다. ''차라리
내가 먹지 못할지언정 존자님께 드리겠소.''
부인은
또 말했다 ''또 만일 가십 . 목건련 수보리
사리 불 내지 부처님께서 오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안 먹을지언정 모두 그분들께 드려야지요.''
그러자
부인은 남편에게 말했다.
''아침에
그 성인님들이 걸식하러 오셨기에 있는
음식을 다 드렸습니다.''
수달은
이 말들 듣고 기뻐하면서 부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좌가다 없어지고 복덕이
생길 것이요.'' 그리고는 가서 창고를
열어보자 곡식과 비단. 음식 등이 그 곳에
가득차 있었으며 그것을 쓰면 다시 또
생겼다. 이것은 모두가 그 과보로 인한
것이다.(雜寶藏經)
또
옛날 어떤 사람이 집이 가난하여 품을
팔아 보릿가루 여섯 되를 얻었다.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처자에게 먹이려고 돌아오는
도중에 마침 어떤 도인이 발우를 들고
지팡이를 짚고 걸식하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저 사문은 용모가 단정하고 의의가
의젓하여 매우 공경할 만 하다.
한끼를
보시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때에
그 도인은 그의 생각을 알고 그를 따라
어떤 물가에 이르렀다. 가난한 사람은
그 도인에게 말했다. ''내게 지금 보릿가루가
있습니다. 보시하고 싶은데 혹 잡수시겠습니까?''
도인은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그는
물가에다 옷을 펴고 도인을 앉힌 뒤에
한 되 몫의 보릿가루를 물에 버물려 한
덩이를 만들어 도인에게 주면서 속으로
이렇게 발원했다.
'만일
이 도인이 깨끗이 계율을 가지고 도를
얻은 분이라면 나로 하여금 현재에 한
작은 나라의 왕이 되게 하소서.'
도인은
그 떡을 받고는 가난한 이에게 말했다.
''왜
이리도 적은가, 왜 이리도 적은가?'' 그는
이 도인이 배가 커서 많이 먹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다지 한 되를 물에 버무려 같이
한 덩이로 만들어 주면서 발원했다. '만일
이 도인이 깨끗이 계율을 가지고 도를
얻은 분이라면 나로 하여금 두의 작은
나라 왕이 되게 하소서.'
도인은
다시 말했다 ''왜 이리도 적은가, 왜 이리도
적은가?'' 그 가난한 이는 생각하기를
'아마 이 도인은 아주 많이 먹는 사람인
것 같다 그만큼의 떡을 주어도 적다고
불평을 하는구나. 그러나 나는 이미 청했으니까
더 줄 수밖에 없다'고 하고 다시 두 되를
물에 버무려 같이 한 덩이로 만들어 주면서
발원했다. '만일 이 도인이 깨끗이 계율을
가지고 도를 얻은 분이라면 나로 하여금
현재에 세 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리는
왕이 되게 하소서.'
도인은
다시 말했다 '' 왜 이리도 적소, 왜 이리도
적소?'' 그래서 그는 나머지 두 되를 마저
물에 버무려 한 덩이로 만들어 주면서
발원했다.
'지금
이 사문이 만일 깨끗이 계율을 가진 도인이라면
나로 하여금 바라나국의 왕이 되어 네
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리며 또 도를 얻게
하소서.' 도인은 그 떡을 다 받고도 그래도
적다고 불평했다. 가난한 이는 도인에게
말했다. ''우선 잡수십시오. 만일 그것으로도
부족하시면 내 옷을 벗어 음식과 바꾸어와서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도인은
떡을 먹었다. 그러나 한 되 몫만 먹고
나머지는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가난한
이는 물었다. ''존자께서 아까는 떡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시더니, 왜 다 잡수시지
않습니까?'' 도인은 대답했다.
''그대가
처음에 내게 한 덩이 떡을 줄 때에는 바로
한 작은 나라의 왕이 되기를 원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 마음의 원이 작다고 말한 것이오.
둘째 번에 줄 적에도 두 개의 작은 나라의
왕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그래서 나는 그대의
원이 작다고 한 것이었고 셋째 번에 줄
적에도 세개의 나라의 왕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그래서 나는 그 대의 원이 작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넷째 번에 줄 적에는 바로
바라냐의 국왕이 되어 네 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리기를 원했고 또한 도를 얻게 해달라고
원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의 원이 작다고
한 것이지 그 음식이 부족하여 작다고
불평한 것이 아니오.''
그때
가난한 이는 의심하기를 '나로 하여금
현재의 다섯 개 나라의 왕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아마 거짓이리라'
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내 마음을 능히
아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이런 큰 복 받은 나를 속이지 않을것이다.'
라고 했다.
도인은
그의 생각을 알고 곧 발우를 던져 허공에
두고 그 뒤를 따라 날아 올라가서 큰 몸으로
화하여 허공에 가득 찼다가 다시 작은
몸으로 화하니 마치 가는 티끌과 같았다
한 몸으로써 한량없는 몸이 되기도 하고
한량없는 몸을 합하여 한 몸이 되기도
하였다. 또 몸 위에서는 물을 내고 몸
아래에서는 불을 내었다 물을 땅처럼 밟기도
하고 땅을 물처럼 밟기도 했다.
이렇게
열여덟 가지 신통을 나타내고는 가난한
이에게 말하기를 ''즐거이 큰 원을 내고
조금 의심 하지 말라'' 하고 곧 사라져
버렸다 이때 그 가난한 사람은 바라나시
성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서 어떤 재상을
만났다 재상은 그를 만나자고 형상을 자세히
보고는 자세히 말했다.
''그대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왜 그처럼 남루하게 차렸는가?'' ''어려서부모를
잃은 뒤에 집이 망하고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곤궁하게 되어 이처럼 되었습니다.''
재상은
곧 가서 바라나시 왕에게 왕과 친했던
아무개의 아들이 문밖에 있음을 알렸다
왕은 그 후에 이 아들을 가까이 곁에 두고
떠나지 못하게 하였고 왕이 돌아간 뒤에는
후사가 없어 신하들이 추대하여 바라나시의
왕이 되어 네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적은 보시라도 그 인과응보는 인생의 진리로써
남아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깨우쳐 주고
계신다.
나의
신행담 청화 스님의 미소 / 김 미 속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내연산
12폭포. 그 중에서 하나쯤은 감상할 여유가
생기기를 고대하면서, 보경사 답사 길을
떠나는 날 아침. 날씨가 맑았다 곧바로
떠오르는 생각은, 동해 바다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편리한 교통 탓으로 당일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시간을 번다는 면에서
여유를 느낄 수도 있으련만, 번번이 더
조급한 마음에 휩싸이곤 한다. 그래도
폭포 하나는 볼 수 있겠지 .. ...
입하가
막 지난 절기를 속일 수 없다는 듯, 포항은
이미 여름 날씨였다 낮에는 수은주가 벌써28
. 9도를 웃돈다고 한다. 포항도 대구 못지않게
더운 고장이라는 기사 아저씨의 설명에,
짙은 포항 사투리가 묻어 나왔다.
공단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는 바람이 차츰
옅어지자, 오른쪽으로 언뜻언뜻 바다가
보였다 해안선을 따라 동해선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자, 내연선 연봉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눈길을 끌었다.
사하촌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가니, 신라 때 세워진
고찰 보경사가 있었다.
절
입구에는, 고려 시대의 고승 원진 국사가
심었다는 회화나무 한그루가 일주문을
대신한 듯서 있었다. 보경사 경내에 있는
10여 채의 건물들을 둘러보고 나서, 절
뒤에 있다는 원진 국사의 부도를 보려고
요사채 앞을 지나다가 수령이 400년 되었다는
탱자나무 두 그루를 보았다. 탱자나무
흰 꽃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꽃이 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아쉬움 반, 피로감
반에 탱자나무 그늘에 주저앉고 말았다.
폭포까지 보고 갈 시간을 벌기 위해 점심도
거르고 취재에만 정신을 쏟았더니, 드디어
몸이 반란을 일으키는 듯 싶었다.
손톱만한
탱자들이 구슬처럼 달려 있는 가지 사이로,
내연선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한 보경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햇빛에
익지 않은 연녹색 새 잎의 활엽수와, 침엽수의
진녹색이 어우러진 산 빛의 향연에 오버랩되는
것은, 바로 서울 정각원에서 보는 남산의
봄빛이었다. 그리고 지금쯤 서울에서는
정화 스님의 법회 준비로 부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기억력은 대체로 30대부터 약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에 따른 기억력의 쇠퇴와는
상관없이, 그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기억의 단편을 몇 가지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더러는 흐릿해지기도
하여, 마음의 각색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는 회상일지라도 자신에게는 그지없이
소중한 일화로 남아 있는 기억의 무대는
누구에게나 망각의 영역 밖에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촬영
팀이 도착하기 전에 보경사 답사를 끝내고
촬영 각본을 완성해야 한다는 당면 과제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도 정각원에서 정화
스님을 뵐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커서일까 한번 주저앉은 탱자나무에서
쉬 일어나기 어려웠다. 지금 사라는 명목으로
절을 떠돌게 된 계기도, 바로 정화 스님의
말씀 몇 마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심한 억지가 될 것인가 1988년 봄, 그
시절 나는 세칭 '高試生'이었다. 학부
전공이 법학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시생의 자격 요건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생각하는 주변의 기대에 힘입어, 벌써
몇 년째 고시라는 수험 준비 외에는 거의
흥미가 없는 외곬의 '苦試生' 이었던 것이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내가 갈만한 길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내 인생에서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는 여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해 봄에도, 연례행사처럼
시험을 치루고 나서, 무등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기고 며칠이 지났을 때, 태안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후배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 후배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언니가
꼭 만나야 할 스님이 계신다.'' 는 것이었다.
기분 전환 삼아 가벼운 기분으로 태안사를
향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40여 명의 보살들을 위해서 설법하시고,
토굴로 올라가시려는 스님께 후배는 날
인사시켜 주었다.
''저리로
들어가지.''
종무소로
들어가자는 뜻밖의 말씀에 , 보살들도
환호하면서 다들 몰려 들어가, 종무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때에도 스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여는 정기 법회를 제외하고는
일반 대중이 친견하기란 쉽지 않은 터였다고
한다.
자리하고
앉으신 스님 앞에 후배와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릴 판인데, 대뜸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저는
절할 줄 모르는데요.'' 라는 엉뚱한 말이었다.
''절할
줄 모르는 것이 좋지.''
스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대중들의 웃음을
가라앉히셨다.
후배를
곁눈으로 보면서 삼배를 마치고 앉자,
스님이 물으셨다.
''지금
뭐하고 있는가''
뭘
물으시는지 잠시 생각하는 참에, 후배가
대신 답하였다
''저랑
같은 공부하고 있는 선배입니다.''
''나중에
시간 나거든 불법도 공부하고''
그
시절 나는 불법을 공부한다는 말의 표현에도
익숙하지 못했다 아니, 익숙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아예 생무지여서, 스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함이 맞는 말일 것이다. 단지
참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닌 분이라는 느낌만
오래오래 여운처럼 남았을 뿐, 그 날의
설법과 친견이 내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는 것은, 그 뒤로도
한참을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몇
주가 흐르고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결과는
예상했던 바와 같았고, 날마다 호숫가를
산책하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이제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막연한
각성만 앞설 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마치 진공 상태에 빠진 듯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생일을 기억한다는 후배의
짧은 글이 담긴 책 한 권이 날아들었다.
『임제록』이었다. 불경들 읽는 작업도,
''필사적인 투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는 번역자의 치열함에 반하여 단번에
책을 읽어 냈고, 불교에 대한 호기심은
그 제서야 호감으로, 그리고 점차 열망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후로 매주 한 번씩 무등산을 나가 시내에
있는 금륜회관에 들러 참선을 배우고,
몇몇 경전을 귀동냥으로 읽게 되었다.
정화 스님의 법회에도 몇 번 더 참석하면서,
마치 오랜 矛羚者인 듯이 어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 호기심은 고질적인 성벽대로
문자에 더 사로 집히기 일쑤였다 내 방안에서는
점차 법학 책보다 불교 책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고, 남은 것은 결단하는 일 뿐이었다.
흔히
우리는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력에 이끌리기
쉽다 언어의 허구성 내지는 말의 공허함을
절감하면서도, 쉽사리 말과 언어의 포로가
되고 만다. 내 인생의 길을 바꾼 뒤로,
뜻같이 쉽지만은 않았을 때, 항상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내 佛緣의 시작점이다 '불법을
공부한다.' 는 대명제를 떠올리고 나면,
모든 염려는 사그라지고 만다.
그리고
내 회상의 언덕 저편에는 언제나 정화스님의
미소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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