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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1월호 / 통권 11호 / 불기 2538(1994)년 11월 1일 발행

 

 

 

 

초청강연

불교학 그 과거와 혀내 및 장래
/루이스 랭카스터

 

정각도량

종교 집단 이기주의/ 이도업 스님

 

정각논단

불교의 헌공의례와 민속/ 오출세

 

교리강좌

제석천과 금강 /편집위원

 

열린마당

올바른 지장 신행 / 정성호

 

신행단체

경주병원 불자회

 

불자탐방

강창순 관리처장/ 편집부

 

전등 이야기

차나 한 잔 들게/ 편집부

 

불심의 창

마음의 고향/ 이순용

 

동국과 불교

중앙불전의 개교 지도정신/ 편집위원

 

가람의 향기

범어사 / 편집부

 

비유와 설화

무량한 참회의 공덕 / 편집위원

 

불교 건강법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영지버섯/ 김갑성

 

 

 

초청강연
불교학  그 과거와 현재 및 장래 / 루이스 랭카스터

오늘 여러분들께 ''불교학의과거와현재 및장래''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도록 친절하게 초청해주신 동국대학교에 감사드립니다. 동국대학교는 현대 한국불교 전통적 유산의 중요한 부분이며,본인의 언급이 이 나라 불교학위 장래를 기획하는 데에 적지만 어떤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원래 부처님을 따랐던 제자와 신도들 가운데 상당수는 학문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아주 초기부터 불교인 공동체는 자체의 가르침들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데 열중해 왔습니다. 그러한 조망으로부터 우리는 불 교학이 불교 전통 자체에 속하는 것이며 후대의 학문적 기관이 발명해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있습니다. 부처님이 입적하신 후 첫 번째 승단회의는 교도들이 기억하는 교조의 가르침들을 결정하기 위한 명시된 목적으로 열렸었다고 역사적 전승들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사까지도 불교학적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후로 개발된 전통의 많은 부분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또 다른 측면은 불교가 그 자체의 역사와 학문에 영향 주어 온 바 다루기 쉽고 움직이기 쉬운 종교였던 사실입니다. 불교는 세계적 종교가 된 첫 번째 종교였으며, 사회 .정치 . 언어 .문화 , 민족 . 종교 등의 경계들을 자유롭게 박차고나간 첫 번째가 되었습니다. 불교는 광범위하계전파되어 마침내 아시아 전체를 통하여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공공기관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불교가 인도, 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물론 요즈음의 유럽과 북미를 연구하는 데도 관련된 이후, 불 교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요구를 더해 오고 있습니 불교는 종교적 수행과 모형들에 여러 가지 새로움을 더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짜이진 공동체 안에서 규범에 따라 생활하는 남녀 수도자 전형 및 수도원 창설과 더불어 새로운 종교 수행 형태를 불교가 처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수도원 전통은 마침내 대상 노를 통하여 전파되어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도 그 표현이 보이고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약간 변화된 형태로 채용되어졌습니다. 불교는 성체 유골들(사리 같은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불교가 유골을 종교적 대상으로 삼은 것 역시 대상 노를 따라 퍼져 기독교신앙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서아시아 종교들에게 영향을 확대해 간 이후 이 방면에 대한 불교 학내의 관심의 영역도 확장되었습니다. 불교 수행에 대한 연구는 이전에 생각되어온 서양의 수행들에 대한 이해보다 매우중요합니다.

불교 수도자들이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들을 보존하고 연구하며 해설한 것들과 그 교설들의 전파 및 그들의 수행들을 확장시켜 나가며 더 넓은 세계에 수도원 기관 및 새로운 체계들을 제공한 증거로부터 우리들은 이 분야의 복합성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교 연구가 전 아시아 및 유럽의 문화 생활을 이해하는 데 또한 중요하다는 징표입니다. 불교가 그렇게 먼 곳까지 전파되었고 다양한 환경 안에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던 사실로부터 우리들은 이들 각 지방에서 불교가 나름대로 규정되어졌던 방법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인도의 스승들이 본 인도 불교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식민지 통치자들이 본 불교와 매우 다릅니다, 모든 지역과 모든 시대를 총망라하는 단일한 불교 해석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불교를 하나의 통일된 동향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울러 각각의 특수 환경에 따른 참조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한 지역 조직으로 연구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인도와 불교 관련 인도 문헌 자료에 대하여 돌아본다면 우리들은 이들을 고찰하는 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가르주나(용수), 찬드라키르티 (월칭), 바바비베카(청변)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은 불교의 방향을 바꿔놓고 새로운 사상학파들을 도출해 낸 인물들로 보입니다. 인도 학풍은 그들의 역사를 旦라흐만적힌두 전통으로서 정통성을 강하게 확정하고 불교를 비정 통 체계처럼 바라보는 경향이었습니다.그리하여 불교는 인도의 원초적 종교처럼 동일시된 베타에 기초한 종교에 점진적으로 홉수되었고인도에서의 한 시대적 운동으로 보여졌습니다,이와 같이 불교를 취급하는 방법에는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첫째 문헌 중심적 전통은 신앙의 교의와 관념에 초점을 맞추고 수행이나 의례에 대해서는 보고서가 적습니다 이를테면, 명상법들을 묘사 설명한 것들은 많지 않은데 그들은 구전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브라흐만적 한두 전통은 이들의 후대 특징들이 개발되기 훨씬 오래전의 인도 역사에 소급되어 투영되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전 인도 대륙을 통하여 우세하였으며 완전히 개발된 베다 숭배와 반대된 것으로 보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얼마간의 연구가 이를 문제삼아 왔고 요즈음에는 석존 시대를 전후해서 인도가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수행들의 비정통적 혼성 세였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유럽인들의 인도 ''침입'' 개념까지 도전받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전과 같은 역사적 구조 속의 불교정의는 새롭게 평가되어야만 합니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입되면서, 오래전 문필 서사 전통 및 혼성된 철학적 논쟁이 지속된 하나의 매우 복잡한 문화와 접하게 되었습니다. 비문 화인들로 치부해 온 서방인들도 자기들의 것과 대등한 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충격 이후에 중국인들은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인도에서 가질 수 없었으나, 불교가 하나의 새로운 규정을 받아들이게 된 환경이었습니다. 불교는 중국권에 들어오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진전들 가운데 하나는 인도어(산스크리트 및 프라크리트)와 알려진 탓1연이 없는 중국어로 불교 문헌들을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교가 한국과 일본으로의 나머지 여정을 성취한 것도 바로 중국에서였습니다.

우리는 초기의 중국불교 논의에 부딪칠 때,''중국''이라는 용어에 의한 우리들의 이해를 지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마 중앙 문화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한-이라는 술어 사용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초기의 한족 가운데에는 불교가 큰 진보를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주변적 동향으로서 소수 중국인들만의 관심으로 보이었을 뿐 대중들의 주된 신앙이었다는 증거를 우리는 충분히 볼 수 없습니다- 동아시아 불교에 대한 우리들의 연구는 북방의 비한계 왕국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불교 전통미가장 큰 충격적 효과를 이룩한 곳은 한문화 밖에 있던 사람들이 지배하던 저 북방 집단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왕국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세우며 통치자들이 정당성과 합법성을 추구할 때 불교는 번성했고 엄청난 재정적 후원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저 북방 왕국들을 무시하고 오직 한나라의 장안에만 초점을 맞춘 불 교사만 유지시킨다면, 진실한 역사의 왜곡과 굴절은 피할 수 없을것입니다.

본인은 북방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상인들 및 유목민들 가운데서 발달된 불교를 위하여 ''실크로드 불교''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 ''실크로드 불교''는 보살과 미륵 신앙에 크게 주목하는 대승불교에 특별한 지원을 제공하였습니다.이 지역 왕국들의 제왕들은 그들의 권력과 왕위가 상당히 과거의 복압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기는 스스로를 전륜성왕(차크라바틴)과 동일시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질 때의 불교는 아마 ''한'' 불교보다 ''실크로드'' 불교가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중에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후 불교가 한문화 안에서 주류가 되었을 때, 이 종교는 강한 중국의 영향으로 변화를 가져왔고 그 과정에서 지식인 사대부 집단과 합체되어 갔습니다. 가장의미 깊고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교리 연구의 기본이 되어 온 많은 원전들에 대한 참조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그것들이 암송이나 필사본으로각 세대간에 전승되어 왔습니다. 원전들을 베껴써내는 필경사들이 하층 계급에 속하였을 때 그것들을 암송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보다 높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인도인들도 원전 문헌목록을 작성해 보려고 시도했었지만 경전 목록의 형성 작업은 인도 밖의 사람들에게 남겨졌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경전에 대하여 대단히 결정적 인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경전이란 국가 경영의치국적 정보를 담고 있는 ''고전''들의 목록이었습니다. 책을 쓰는 일과 더욱 중요시했던 책의 보급유포는 왕궁 조정이 밀접하게 통제하였습니다.-경''이라는 말은 옛 성인들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책들을 뜻하는 말인 ''고전''들에 대하여 썼습니다. 비한계(非漢系) 사람들이 통치하던 왔국들안의 불교인들은 그들의 불전 번역본에 ''경''이라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허용되였습니다, 그 전에는 고대의 중국 성인들의 것에만 제한되었었습니다.이는 많은 책들을 가질 수 있는 큰 변화였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도서관이나 복사 인쇄 기관에서는 ''고전'' 이외의 어느 것에도 특별한 경비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책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동 시대의 스승들은 ''경''을 쓸 수 없었기 배문에 불교 원전들은 특별히 부처님을 중심으로 고대 인도 성인들의 것을 번역하는 데 제한되었었습니다. 아무튼 많은 스님들이 특별히 중국 문화와 관련하여 불교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에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들이 출현되었는데, 이른바 위작 원전으로서 사실에 있어서는 동시대의저작이면서도 ''경''이라고 이름하고 범어 원전으로부터 번역되어진 것처럼 꾸며진 것들 입니다.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몇백 년이 지나서야 불교인들이 주석서를 쓰고 동 시대 저자 이름을 부칠 수 있었습니다.

문현들이 복사되고 유포되는 방법이 중국 안에서 불 교학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를 크게 결정지었다고 하겠습니다. 관청에서는 과거시험을 보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고전''들을 마련해 주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표준판 문헌들을 갖춤으로써 모든 중국의 학생들이 시험을 위해 동일한 자료로 공부할 수 있게 함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복사하는 데 있어서 착오들은 항상 걱정거리이고 최상의 필경사들도 살 수를 하고는 합니다 국가고시를 위한 표준 자료 유지의 목적으로 중국 각처에 복사 청이 발전된 데 이어서 불교인들의 서경원이 주요 사찰들에 설립되었습니다.이러한 구조 안에서 중국에서의 불 교학은 원본복사를 하던 인도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수도원들의 최고 학자들이 경전류 책들을 정확히 복사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북송이 궁성 조정을 개봉으로 옮기면서, 큰 석편에 새겼던 ''고전''들의 복사 원본들을 옛 도읍에 두고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 방면의 연구는 주요한 비약의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쇄와 복사 청에 송달할 새로운 표준판들이 목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불교인들도 이와 같은 과정을 따라 경전을 위한 인쇄용 목판들을 만들었고 이 목판들은 서경원의 표준들로 쓰여졌습니다,

북송의 목판 인쇄본 한 질이 한국의 왕에게 선물로 증징된 이후 한국에서는 이 땃흐쇄된 정경의사용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인쇄본은 한국 내에 목판 한 벌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그와 같이 모사되어 북송 판과 똑같은 복제품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쇄술의 이용과 사경 원들이 우리들에게 이곳 한국은 물론 다른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 문판 경전의 확보와 보편적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불 교학이 이러한 원전 연구에 의해서 결정되어졌으며, 인쇄를 통하여 신중하게 보전되어 왔습니다

 불교인들이 중국의 궁중 모형을 따라왔지만 그 전래적인 치국 책과 사회적 전통이 여러 가지로 문제되었음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유교 전통위반불교적 태도가 항상 아시아의 불교 연구에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불교는 자주 유교적 교육과가치들의 관점으로부터 심하게 비판되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평판이 나쁘게 되도록 애쓰며 불교를 지나치게 반사회적이고 가정과 사회에 유해한 것처럼 묘사하는 불교의 적들에 의해 일부의 불교 연구가 되어 지기도 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일본은 전혀 불교를 거부하지 않았고 문화의 주요 부분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이러한 지성적 생활과 불교와의 연계가 일본의 고등 교육에 불 교학이 번창하도록 용인하였습니다 오늘날 수백 명의 불교학자들이 종사하고 있고 모든 대학들이 불교 강좌를 제공하고있습니다. 이와 같은 후원 구조로부터 일본에 있어서의 불 교학은 그밖 의 전 세계 출판분량을 훨씬 초과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불교 연구가 훌륭하다고 칭찬되어오고, 우리가 이 방면에 상당히 많은 정보로 공헌

한 일본 학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일반적인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은 불교를 처음에 한국으로부터 받아드렸고 나중에는 중국 한문화로부터 다양한 형태와 학파들을 수용했습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같지 않게 일본인들은 각각의 이 학파들을 종파적 경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개인들은 스스로 어떤 한 종파의 일원으로 동일시하기 시작했고, 성직자들은 한 특정한 집단 소속으로 임명(수계)되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성직 임명의 경향이 보편적이며, 불교의 어떤 특정 종파적 부류에 일원이라고 동일시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종파적 특징은 일본에서 두드러졌으며, 그들의 학문에 강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의 다른 나라 학문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본인의 불교 정의는 불 교사를 일본 종파 집단의 발달사로 보아왔습니다 그들의 중국 불교사는 어떻게 특정 종파가 출현하여 일본에 전파되었는지를 투영하는 경향이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렇게 중요시했던 종파적 측면은 중국 불교의 발전 도정에서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은 불교 연구가 비교적 적게 이루어진 곳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았던 것처럼 한국은 북송 판 한문정경의 경판을 보존하고 있으며 학파나

 종파에 따른 별도의 수계 제도를 두지 않는 중국의 성직자 임명 전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지식인 사대부 사회 가운데서 불교의 전반적 배척이 벌어졌던 곳도 또한 한국입니다. 한국불교 연구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책들이나 문화에 대한 학문들에서 거듭거듭 서술되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불교는 한국에 들어와 삼국시대에 채용되었다.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 때 번성하였다. 여하튼, 고려시대에 불교 교단에 주어진 후원이 너무 컸고 불교 교단이 사용한 나라의 재원이 초과되어 억압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교단이 심하게 공격당할 때는 불교가 부패하여 왔기 때문에 공격당할 만했다 불교는 조선 이씨 왕조 아래서 쇠퇴했고 타락된 전통은 무속과 가깝게 연계되었다.''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여러 번 읽고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 대하여 만들어진 진술의 경우를 실증해 보려고 그 출처를 찾아보면서 본인은 그것들이 고려 후기나 조선시대의 유교적 귀족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술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려 왕조를 전복한 후에 그 땅에서 그들의 지배를 위협했던 유일한 조직이었던 불교에 대하여 공격함으로써 가장 많은 소득을 차지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집단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러한 진술들은 우리들이 직접 끌어낼 수 있는 어떠한 증거가 있는지 신중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우리가 같은 시기의 일본이나 중국 등 한국 밖의 지역들을 살펴볼 때, 그 곳의 불교 후원 정도가 고려시대의 것과 매우 비슷하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이웃 나라 안에서 우리들은 그 같은 불교 후원이 그 나라들에게 몰락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 비용이 나라의 재정을 파산시켰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왜 불교후원이 한국에서는 지나쳤다고 여겨졌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게 해석되지 않았는지 해답이 필요합니다. 본인의 연구로는 불교에 대한 그러한 공격들이 정치적이고 이념적이었다고 추정하게 되었으며, 검토되지 않은 사실을 순진하게 받아드리기보다 실제로 연구되어진 것과 같이 이 문제를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불 교학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인도 . 중국. 한국. 일본.독일 프랑스 영국.소련 .미국혹은이 세계 어느 곳이든 그 곳에서 발생된 불교 연구로서 만들어진 불교 관련 책이나 문서들을 봅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 방면의 연구에 있어서 이들 지역간의 차이들을 더 많이 인식하게되며, 어디에서부터 각각의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할지 그 곳에 도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좀 현대적 용어로서 불교학위구성 배제 형태, 즉 시간과 공간의 여과 없이도  불교학이 발생될 수 있다는 어떤 관념을 무너뜨리는 데로 유도하는 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우리들의 문화 형태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데, 이러한 렌즈는 대상을 바로 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기도 하고 굴절 혹은 왜곡시키기도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인들이 불교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들로서는 평가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한 흐름을 직면하게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 유품들을 본 사람들은 고고학적 유물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불교가 한때 인도대륙에서 고대 문화 생활의 한 주요 부분이었음은 알게 되었지만 그 수행상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와 남아시아에서는 왕성한 불교전통이 지금도 계속 생동하고 있고 그 수행상도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인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전통을 연구한 최초의 시도는 아시아로부터 불교 원전의사분을 확보한 후 이것들의 해독을 시도한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파리, 런던 등 유럽여라 곳의 이러한 접근을 하던 학계에서는 불교란 그들의 수중에 있는 문헌 자료에 의하여 정의되었습니다. 그들은 불교 자료들을 플라톤에 관한 희랍어 문헌이나 기독교의 희랍어 성경처럼 고전학자적 관점에서 연구하며 접근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연구는 가장 오래된 것을 추구하며''최선의 해옥''을 위한 조사 참 구였으며 그리하여 본래의 서술과 가장 근접한 것입니다. 불교 원전에 서술된 말들을 편집하는 작업은 수십 년간 문헌학자들에 의해 중시되었으며 요즈음까지도 학문의 한 분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류의 지식에 주요한 공헌을 해왔으며 불교문헌의 편집은 그 시대의 실제를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이나마 불교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불 교사의 발전이 기본적으로 사상사의 발전으로 다루어져 온 데 있습니다. 불교가 나가르주나(용수)로부터 찬드라키르티 (월칭), 바바비베카(청변), 아상가(무착), 바수반두(세친) 등 다른 위대한 스승들에 의한 계발처럼보여질 뿐입니다. 유럽의 도서관들이나 문서보관소들에 보존되어지는.대가들의 저작들로부터 불교 교리와 사상의 응집된 사실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문 한학이 독일인들의 불교 접근 방법을 지배하고 있을 때,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온전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인들의 활동과 민족학에 관심이 있던 프랑스인들은 문헌학을 통한불교 정의를 의문시했습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수행이 중요하게 생각되어졌으며 과거의 사람들이 수행하였던 불교의 방법을 찾아보려고 그들은 고고학적 증거를 찾았습니다 예술, 건축. 고분,비명, 유품 등이 큰 신도 집단들의 수행과 신앙의 징후들을 제공하였습니다 정경 문헌 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요소 등 기존의 불교에 알려지지 않았던 요소가 있었다는 증거가 중국 서부의 둔황에 숨겨졌던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제17동굴에서 발견된 수천 매의 필사본들 안에서 학자들은 이미 확보하고 있던 경전 안에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던 유일한 자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에, 기존 문헌들 안에서는 더 이상 묘사 서술되지 않았고 동 시대의 신도들에 의해서도디 이상 답습 되지 않던 중국 불교 수행의 모습이었었습니다 여기에, 파리와 런던에 보존되고 있는 저 필사본들을 본 사람들이 말했듯이, 수도 원안의 필경 집단에 의해 보존되었고 기존 문헌에서는 자주 무시됐었으며 발표되지 않았던 중국대중불교의 보다 정밀한 표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또한 불교 용어 및 그 지역 풍습들과습합된형태를 포함한 바, 고대의 도교 선생들이 지은 문헌 자료들도 있습니다. 이미 이 문헌들의 연구에 종사해 온 학자들이 말했던 바와 같이, 이것이 수도자들에 의한 상류문학에 포함되어 있는 것보다 중국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 이와 같은 언급들로부터 우리는 프랑스인들의 민속학적 문화 연구가 무척 다른 접근 방법의 한 부분임과 동시에, 독일인들의 문헌학적 자료 연구가 학문적 활동의 한 형태로서의 교육과 훈련의 원리들을 반영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들의 문한 자료로부터이거나 아니면 명문, 예술품, 혹은 대중적 종교 자료로부터이거나 간에 이러한 불교의 두 관점들이 연구와 학습에 대한 서구의 논점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들은 아마 불교에 대해서라기보다 서구 자체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교문헌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의 일부가 유럽인 언어로번역되었을때, 또 다른 독자 집단과 관심 있는 개인들은 나름대로 아시아의 종교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서양의 석가모니 부처님 해석을살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한 지역적 문화 형태가 다른 지역의 전통을 보는 방법에 윤색 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또 하나의 실례를 얻을 수있 습니다 석 존의 가르침과 그분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그분을 개혁가로 보았습니다. 그분은 카스트(인도의 신분 계급 제도)에 반대하여 말씀하셨고, 동물 회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분은 퇴폐와 자기 도취로 방종한 사회를 등진 분이기도 합니다 석 존은 그분 부친의 유산인 왕국을 거부하셨고 그렇게 그 시대의 체제를 깨뜨리셨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석 존의 견해는 ''프로테스탄트 불교(기독교의 개신교 같은불교)''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비평가들이 말하듯이 부처님을 마르틴 루터로 만드는 접근 방법입니다 그분은 모든 기성의 고의적 독단과 왕자적권력을 반대하시고 개인주의를 위해 노력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석 존은 국외자 혹은 젊은 반항자로 보이며 이렇게 인식하는 서양인들 집단의 영웅입니다. 아마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헤르만 헷세의 ''싯달타''보다 더 좋은 예는 없을 것입니다.그렇지만 개신교 적 관점의 부처님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요즈음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석 존은 그분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인도에서 널리 퍼졌던 고행 방법으로 수행하셨었습니다 그분은 카스트 제도가 굳게 정립되지 않았던 곳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 가운데 많은 것이 루터의 이상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운동은 수도원을 창설하셨고, 이를 세상에 제공하여, 그것이 대상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카톨릭 가운데 기독교 신앙 안에 하나의 조직된 형태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분은 유골(사리) 숭배 의식의 전파와 남녀 수도자들 같은 종교적 천직을 마련하는데도 도움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것블은 모두 루터가 배척했

던 일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부처님을 정신적인 면에서 루터처럼 서술하려는 것은 부처님이 창설을 도우셨던 바와 루터가 개혁을 시도했던 카톨릭이 많은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교 연구에 있어 또 다른 도전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전반적인 새로운 기술의출현입니다. 바로 중국에서의 목판 인쇄법과 한국에서의 활 판 인쇄법의 발명이 불교를 보존하고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조해 냈던 것과 같이,전자 기술은 이 분야에 있어서 우리들의 연구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며, 이 또한 하나의 창조적 혁명입니다. 해인사의 스님들이 오래된 목판에 담겨있던 대장경을 전산 체계에 입력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들은 어떤 단어나 글귀의 모든 용례를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전산으로의 회복이 완결되면, 우리들은 각각의 모든 예와 실증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일본의 학자들은 대 정판 대장경의 색인을 만드느라 열심히 일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로 우리들은 그렇게 힘들여 만든 일본판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 용어들의 출현이 더욱 정확한 조사를 손쉽게 담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입력은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데이터베이스가 준비된 이후, 학자들은 이것을 주의 깊게 점검하여야만 하고 전문 술어들 및 고유 명사들과 장소 이릎-들 같은 각각의 요소마다에 부전(택)을 불어 주어야만합니다. 이러한 부전들로 자료들을 기호화(마크업) 시킨 뒤에야 비로소 우리들의 검색 효과가 현재 사용되는 색인들과는 뛰어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작업에는 여러 해가 소요될 것이며 우리들 모두로부터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우리는 기록이나 인쇄술의 발명과 비견되는 기술과학적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년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기계 및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출현팁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새로운 응용 과학을 도외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은 새로운 과학 기술의 적용이 장래의 학문에 주요한 부분이 되는 것을 중지시킬 수는 없습니다.본인은 새 시대에 보조를 맞추고자 결심하고 기술 과학이 학문에 유익하도록 지도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불교학은 중요하며, 이는 어떤 때 이 신앙에 의해 지배되어졌던 지역들의 경계를 멀리 넘어가는 문화적 경향 및 영향들의 한 연구입니다. 불교는 전반적 의미로 판단해 보더라도 세계 종교라는 말에 합당하며 이것에 대한 우리들의 연구는 우리들에게 국제학계에 개방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넓은 학계에 한국 학자들의 전반적 참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세계 학계에 보고할 것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동아시아 불교에 대한 우리들의 현행 관점들을 교정할 대안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불교 연구로사십여 년을 지낸 뒤, 이제 본인은 불 교학이 본인의 이해 능력을 훨씬 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본인이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도 항상 크고 깊고 넓었습니다. 본인이 제 대학원생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듯이, 여러분들이 은퇴하기 전이나 혹은 그 후에라도 불교학위 완성에 대하여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통역 : 잔월 스님(버클리대학 불교학 박사과정)

 

 

 

정각도량
종교 집단 이기주의/ 이도업 (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요즈음 신문지상이나 방송 매체에서 자주 보고 듣게 되는 것이 집단 이기주의에 관한 기사이다 쓰레기 매립장설치 반대, 원전 시설 건립 반대, UR法국회 통과 반대, 행정 구역 개편 조정 반대 등등의 집단 이기주의가 표출되고 있다 이웃이나 사회 나아가서 국민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들 이익만을 챙기려 하는 소아 적 행위타

입으로는 국제화 개방화를 부르짖으며, 선진 문화 국민을 자처하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밥 한 그릇 놓고 혼자만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개와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聖이 아닌 俗에 사는 사람들의 이기주의도 지각 있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하물며 종교인들의 그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 종교 집단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가고 있다. 요약해서 보면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교리 해석의 이기주의이다 자기 종교의 교리만이 최상, 최선이며 최고라고 하는 편견과 독선에 빠진 교리의의기적인 주장이다 타 종교의 교리나 종교 행위를 자기 잘 대로 재려 하거나 자기 안경의 도수에 맞추어 놓고 왜곡하거나 혹평하려 드는 이들이 늘고 있으니 격정 되는 일이다.

둘째 물량적인 이기주의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노라 하면서,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전철 역에서 혹은 복잡한 차 안에서까지 떠들며 선한 목자연하면서, 기실은 자기 신자 머릿수 늘리기에 급급하거나 건물 확장에만 눈이 어두운 파렴치 종교인이 있다. 머릿수 하나에 얼마를 계산하면서 재물에 눈먼 종교인이 늘고 있다니 또한 한심한 일이다

 셋째 勢과시의 이기주의이다. 우리 교단에 총리 . 고관을 지낸 사람, 장관 판사 하던 사람 등이 몇 명이라는 식으로 남의 힘을 빌려 자기 勢를 과시하면서 군림하려 드는 졸장부 종교 성직자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다종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자기 완성보다 사회 봉사에, 자기 구원보다 이웃 구제에, 자기 과시보다 하심과 겸양에 참뜻이 있지 않은가.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혹은 무조건 적으로 관용하라고 가르치지 않父t는가. 부처님께서는 무어라 설파하셨는가- ''내가 깨달은 진리는 내가 오기 이전에도 내가 온 지금에도, 내가 열반에 든 후에도 영원히 있는常住의 진리다. 나는 그 법을 깨달았고 중성을 위해서 그 법을 訛할 뿐이다'' 이 말씀에는 자기를 위한 ''나''라는 독선이나 에고(ego)는 없다. 또 말씀하시기를 -너회 비고 들은 몸을 가릴 만한 정도의 옷가지와 간단한 밥 그릇 하나로 검소하게 생활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절약과 검소를 배워야 한다. 또 말씀하시기를 ''나의 교단에는 세간적인 지위의 고하는 없다. 누구나 먼저 온 사람이 윗자리에 앉을 것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출세간척인 평등과 겸손을 배워야 한다

종교의 집단 이기주의는 작게는 자기들, 교단 내부의 이익 쟁탈로 끝나기도 하지만 크게 확대되면 전쟁으로까지 발전된 예를 우리는 서양의 종교 전경사에서 보아 잘 알고 있다. 사랑과 평화, 자비를 실천해도 부족한데 전쟁의 참화를 가져 온대서야 반성해 볼 일이다

 

 

 

정각논단
불교의 헌공 의례와 민속 / 오출세 (국어국문학과 교수)

Ⅰ. 서 언

 

개화기 이전에 이 땅에 전래한 외래 종교 가운데 정상적으로 믿어졌던 종교로는 불교밖에 없다. 천년 이상을 연면히 이어져 온 종교로서 그 심오한 사상과 함께 우리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원효 의상을 비롯한 고승대덕들의 불교 사상과 수도 고행을 통한 깨달음의 방법을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특히 제행 무상관 인과사상 .윤회사상 . 내세사상 . 발원사상 등을 두루 섭렵하여 불교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대중들로서는 한계가 있다고본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한 이후, 신라시대에는 강력한 현실주의를 지향하는 호국불교가성했다, 국가적으로 호국이요,개인적 차원에서는 기복(起福)의 종교로 정착되어 민중에게 신불(信佛)되어 온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정작 아미타불을 외며 왕생 극락을 염원하지만 기실은 자손 발복과 부귀 영화를 기고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로 대중들에게 보급되었던 것이다.

한편 상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토속(v1속) 신앙과 습합되면서 다른 종교보다 토착화에 성공한 외래 종교가 바로 불교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불교와 민속의 만남인 민속불교가 싹튼 것이다. 이 러한불교 민속의 범위는 광범위하지만 본 고에서는 의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현공의례

 

우리의 사찰에서 행해지는 주요 의례 행사들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부처님의 탄일 .출가,성도. 열반을 기념하는 명절과 부처님에게 드리는 예배,곧 예불과 법회 등의 불사.

2. 사자(死者)의 명복을 비는 49제나 100일제, 고혼의 위령제인 수륙제(水陸祭)와생전에 미리 왕생 극락의 길을 닦는 생전 예수지 (生前豫묍i寨祭)등의 사령제.

3. 현세 복락(毛ㄸ世唱扇栗)을위한 소원 성취를 기도하는 각종의례 곧 자식 발원과 장수연명을 기원하는 칠성 기도,사업 성공과 번창을 비는 산신기도, 병마와 재액 퇴치를 비는 신중 기도등.

위의 세 가지 중 첫 번째의 부처님에게 드리는 예불과 법회 등의 불사는 전문적인 승려와 돈독한 불교 신도들의 정규직인 의례인 것이다. 반면 둘째와 셋째에 해당되는 각종 의례는 민간에서 신봉 되는 기도형(祈禱型) 불교로서 비정규적인 의례인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헌공 의례(獻供儀艅豊)가 따른다

 민간에서 신봉 되는 기도형 불교에는 여러 가지의 헌공 의례가 수반되는데 한국 불교가 행하고 있는 헌공 의례의 참뜻과 그 의례 행위 속에 내포된 우리 민속의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불자가 불전에기도, 향, 등, 차, 꽃, 과일, 쌀 등으로 공양하는 헌공의례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아래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 향 공양 - 告햐曷, 埋香

[2] 등 공양 - 燈偈, 然塾脅

[3] 다 공양 - 茶偈

[4] 화공 양 - 揭花, 香花偈,

             香花請

 

그 중 매 향 의례와 연등회만 살펴보기로 한다.

 

[1] 留共養 倫흡

告햐曷는 스승에게 향을 사르면서 법을 설해 주기를 간청하는 게이다. 고향 게는 불교 본래의 헌공의례인데 비해 埋香은 불교 의식이 민중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의례로 민간신앙 형태로 구체화되었던 의식이다.

香은茶.花.果.米와 함께 다섯 가지 공양 물에 속한다. 향이란 선인들이 제사를 올릴 때 불을 피워 사르는 나무를 말하는 것이다. 이 향을 태우는 풍속은 창공에 떠도는 영혼을 이끌기 위한 촉매이며 의식인 것이다. 향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으나 매 향에 쓰이는 향은 어떤 것인가. 『고려도경』에 사향(麝香), 독누(篤樓), 용뇌(龍腦), 전단(旅檀)등이 있으며 침수(愛北水)향을공회 때 태운다(『선화봉사고려도경』 제30권 기명 1)는 기록이 있다. 이 중침수향은 향목이 굳은 목심(木,已,) 부분으로 물에 가라앉는 것이 향기가 짙다고 한다

 향 중에서 가장 좋은 침 향을 불전에 올리거나 땅에 묻는 매 향 의식이 14, I5세기 여말산초의 변환기에 행해졌던 것이다. 이 매 향의 풍습을 기록한매향비가 현재 5一6기 전하고있어 주목을 요한다 건립 연대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성 삼일포 매향비

1309년(충선왕 1)

2) 정주 매향비

1335년(충숙왕 복위 4)

3) 영암 암각 매향비

1344년(충목왕 원년)

4) 사천 매향비

1387년(우왕 13)

5) 암 태도 매향비

1405년(태종 5년)

6) 해마 매향비

l427년(세종 9년)

 

위의 매향비들은 ''내세(來世)의 복을 빌기 위하여 향을 강이나 바다에 담가 묻는[매향]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매향처

1) 고성군 삼일포의 남쪽 호반에 있었다고 하나 비석은 없어지고 비문의 탁본만 전해진다.

2) 정주군 덕 언 면 침향동3)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854) 사천시 곤양면 홍사리(상무데미 )

5) 신안군 암태도

6)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

위의 1) 2)는 현재 비문 을 볼수 없는 실정이어서 3)~6)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은 1988년 지방기념물제119호로 지정됐으며 필자가'93년 8월, '94년 8월 두 차례 답사한 바 엄길리의 진산이라 할 철암사7부 능선에 위치해 있다 본래 엄길리 일대는 영암만의 만입처(현재 간척지)로서 은적산 계곡물이 해수와 마주치는 지점에 자연석 그대로 위치해 있다.

4)는 홍사리 주민들은 '상무데미산' (향을 묻은 산)이라일컬으며 '상무데미' 는 옛날에는 사천만에서 치솟은 바다줄기로 호수가 나들던 약40om 넓이의 바다이자 강이었던 곳으로 담수와 호수가 함수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1910년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간척 된 전답지이다

5)는 10여 년 전만 하여도 간척시 갯벌로 연결되던 독립된 섬이었다.

6)은 1978년 발견 당시 50여 년 전 인근 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그 뒤 부근에서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불가에 구전되는 것에 따르면 매 향의 최적지는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함수 되는 지점이라 한다 앞에 소개한 매향처들의 공통점도 해수가 유입되는 내만(內灣) . 첨입부(添入部)인 것이 그러면 왜 매향비와입지 조건이 해안 지방에 한정되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된다. 이는  을 볼수 없는 실정이어서 3)~6)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은 1988년 지방기념물제119호로 지정됐으며 필자가'93년 8월, '94년 8월 두 차례 답사한 바 엄길리의 진산이라 할 철암사7부 능선에 위치해 있다 본래 엄길리 일대는 영암만의 만입처(현재 간척지)로서 은적산 계곡물이 해수와 마주치는 지점에 자연석 그대로 위치해 있다.

4)는 홍사리 주민들은 '상무데미산' (향을 묻은 산)이라일컬으며 '상무데미' 는 옛날에는 사천만에서 치솟은 바다줄기로 호수가 나들던 약40om 넓이의 바다이자 강이었던 곳으로 담수와 호수가 함수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1910년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간척 된 전답지이다

5)는 10여 년 전만 하여도 간척시 갯벌로 연결되던 독립된 섬이었다.

6)은 1978년 발견 당시 50여 년 전 인근 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그 뒤 부근에서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불가에 구전되는 것에 따르면 매 향의 최적지는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함수 되는 지점이라 한다 앞에 소개한 매향처들의 공통점도 해수가 유입되는 내만(內灣) . 첨입부(添入部)인 것이 그러면 왜 매향비와입지 조건이 해안 지방에 한정되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된다. 이는 여말선초의 변혁기의 왜구의 창궐과 상관성이 있다고 본다.정치적인 불안과 왜구의 침탈이라는 현실적 위기감은 당시 민중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것이다.

결국 매향지의 민중들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감을 떨칠 수 있는 방법으로 미륵 신앙과 집합된 매 향을 택했던 것이다.특히 미륵 신앙 가운데서도미륵하생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미름하생 신앙은 상생 신앙이 상품인을 위한 것인데 반해 하품인을 위한 것이었고, 하품수자는 하생한 미륵의 용화회에 참여함으로써 정토에 왕생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품수자인 민중은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공양)자기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발원 내용을 매형비문에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결국 그들의 고통과 불안을 땅에 묻는 의식이었던 것이다.단순한 향나무가 침형으로 탈바꿈하는 때가 곧 미륵불이 출현하는 때이고, 그때 그들도용화 세계에 태어나 묻어 두었던 향을 꺼내 부처님께 올리고 해탈을 이루겠다는 소박한(민간 신앙과 불교 의례가 습합된소망이 매 향 의식을 낳았던 것이다.

 

(2 燈供餐鏃

원래 燈은 어둠을 밝혀 주는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지혜에 비유하여 불전에 등을 바치는 등 공양을 향 공양과 함께 매우 중요시해 오고 있다.

연등에 관한 기록이 여러 경전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佛訛施燈功德章邑』에 불 . 법 . 승을 믿어 약간의 등을 바치어도 그것으로 받는 혜복(惠駭)은무궁 무진하고 불멸(붙報滅) 후에 등을 탑사(黔)에 밝히면 현세에서는 3종의 청정한 마음을 얻을 것이요, 내세에서는삼십삼천(三-卜三天)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또 『賢愚祐에서는, 가난한 여인 난타가 정성껏 바친 한 등은 왕이 바친 다른 여러 등이 꺼지어도 끝까지 안 꺼졌다 한다. 『삼국유사』 권 제5 감동 제7 「省t季還生條」에도 불등(佛愷)의 설화가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참된 마음과 등의 소중함을 밝힌것이다.

이렇게 등을 밝힌다는 것이곤 연등(燃燈)이요, 연등을 보며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곧간등(看愷) . 광등(觀燈)이다-이러한 연등의례는 다시 전화하여 법회화(法會化)되었으니 이것이 연등회(燃燈숍) .관등회 (觀燈會)이다.

佛에 대한 공양의 한 방법으로서 인도 이래 연등은 이어져왔으며,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연중행사가 되었다. 신라 진흥왕 12년 팔관회 개설과 함께 연등회도 국가적 행사로 열리게 된다. 그런데 팔관회가 본래 불교 의식의 하나로서 일일 일야에 한하여 팔계를 닦는 것이었으나 풍수지리 도참 사상이나 오행사상 등을 수용하여 민중화된 불교로 변모되었다. 연등회 역시 순전한 불교 행사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신라인의 동해 용진 신앙(東海肴a承申信仰)은 농경 사회에서 농작의 풍흉이 풍신이나용신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 관념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정월 15일 간등(看愷)은풍우신으로서의 용산에 대한시동기원제인 용동제 (龍童祭)와 농사와 관련 있는 태알성수제(太一星宿祭)가 불교의 등공양탓1 연등(燃燈)과 습합되어 10월 팔관회와 함께 국가적인 행사(台蓼國佛孰)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고려 태조 왕건에 계승되고 있다.

「訓要十條」 제6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소원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천령, 오악, 명산, 대천, 용산에 봉사하는 것이니, 후에 간신들이 혹 이에 대해 가감을 건의하는 것을 금지하라.태조의 호국 신앙과 연관된샤만적 밀교 적 요소를 연등회 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규경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의하면 중국, 일본에도 연등은 있으나 집 집마다 장간(長竿)에 등을 다는 것은 진역(虞域)에서만볼수 있는 바그간두(竿頭)에는 치미(雉尾)를 부치는데 이것은 고려의 구풍(舊風)이라 한다 장대 끝에 꿩털을 다는 것은 조류 숭배신앙에서 오는 고대 종교 즉샤마니즘적 요소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고려사』 세가(世家)36 충혜왕 후 3년 6월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甲寅幸示桿寺 燈燭輩結香徒設祝齋於是寺 王神座齋筵.여기의 향도(香徒)라는 것이 민중 불교 단체인 것으로 보아 연등의 샤머니즘적 요소를 감지하게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자 태종 원년 8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하여 재래의 팔관,연등을 없앨 것이 주청(奏請)되어, 2월 15일 연등 대신 정월 15일 수륙제(야<趣祭)가 열리게 된다. 상원 연등(上元燃燈)은 없어지게 되었지만 오늘날의 초파일 행사로서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민간 신앙과 함께 민중 속에 살아 전해지고 있다.

이 연등회는 신라의 팔관회에서 시작되어 고려 초에는 정월 보름과 2월 15일에 행하다가 최이(崔,1'끔)가 4월 초파일로 고정시켰다 한다 석가탄알의 속절화는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온 풍속과 습합된 것이라보여진다. 즉 신라 때 새해의 풍년 기원제가 정월 보름에 행해진 듯하고, 또 그 이전 시월제천(十月祭天)의 추수 감사제와 같은 성격의 행사로 보여진다. 농경 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태일성(太一星)이나 달에 기고하는 민간신앙이 매년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동국세시기z에 정월(正月)상원(上元)을 등절(燈節)이 러한 것은 좋은 방증이 되고 있고, 불교적인 의미가 퇴색된 채 민 속화하여 일반적인 등석(燈夕) 또는 아동 중심의 명절이 되었음을 최남선은 『조선상식』에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옛날의 휘황 찬란한 연등놀이나 제등 행사는 볼 수없고, 다만 1970년대에 이르러 석가탄알도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불교 신도들의 대대적인 연등 행사 대열이 도시의 거리나 각 사찰에서 이어 지고있다 관등놀이할 때 불려지던민요로 「燈打令」이 전해오고있다

 

얼종덜종 호랑등은

만첩청산 어디 두고

 저리공중 걸렸느냐

 

 물색 좋다 초록등온

황새장사 어디도 고

저기 높이 걸렸느냐

 

꼬부랑 꼽잘 새우등은 얼 멍이 구멍 왜마다하고저리공중 걸렸느냐

(下略)

 

Ⅲ. 결연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불교헌공 의례에서 민중들의 소망이 담긴 갖가지 민속을 살펴보았다. 기원 자는 부처님 전에 나아가 불을 밝히고 향을 지핀 다음 정성스레 달인 차를 올린다. 향.등.차가불.법.승삼보를 공양하는 목적으로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삼보는 무분별 평등(無分別平等)의일심(一,已,)이며, 공양은 무엇인가를 바쳐서 '참생명을 기른다'는 뜻이 있다. 우리 민중들의 의식 속에는 불교의 '진실된 참 생명 정신'과 민간의 풍속이 어우러져 연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교리강좌
제석천과 금강 / 편집위원

제석천의 유래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이 현대인들에게는 갈수록 낯선 것으로 멀어져 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것이 주로 무당을 통해 전래하고 있다 그런데 무당들이 영험의 원천으로 섬기는 신들 중에서 소위 족보로 따지자면 가장 큰 신은 흔히 '제석신'이라 불리는 제석천(帝釋天)이다 제석천의 본래 명칭은 석제환인(吊對琶桓因)이다.

제석굿 또는 제석풀이는 무당이 제석신을 받들어 실행하는 굿으로 유명하다 이 '제석'이라는 말은 불교가 전래한 이후에서야 널리 통용되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외래의 신이라는 관념이 없이 우리 선조들의 일상의식을 점유해 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든 먹기 위해 애써 벌어야 한다는 취지가 ''제석 아저씨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속담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은 제석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유래한 것임을 안다 좀더 지식이 있는 사람은 제석천이 본래 불교의 신이 아니라 인도의 전통적인 신인 '인드라'를 지칭하는 것임을 안다.그러나 그 인두라 신이 어떻게 석제 환인 또는 제석천으로 표현되었으며, 어떤 근거로 무신론의 종교인 불교에서 자연스럽게 용납되기에 이르렀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드라 신이 석제황인을 거쳐 제석천으로 표현되는 과정은 한자로 번역된 불교 술어의 성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예로부터 인도의 유명한 신들은 여러 가지 수식어로써 표현되어 왔다. 특히 인두라는 천둥과 번개라는 자연 현상을 의탓1화한 신으로서 인도 종교의 초기에 가장 강력한 주신(主神)이었다 그래서 그는 흔히 '신들 중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 라는 의미로 호칭한다 이 의미의 산스크리트 표현을 발음대로 옮기면 '샤크로 데바남 인드라'(sakro devanam indrah)가 된다. 이 말은 '샤크라 데봐 인드라' (강력한 신 인드라年}는 복합어로도 표현된다. '강력' 을 뜻하는 '샤크라' (sakra)가 그의 수식어이자별명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 발음을 '석-제한인제리' (擲監重亘因提梨)라고 옮겼다 즉 샤크라는 '석' 으로, 데바는 '제환'으로, 인두라는 '인제리'로 옮긴 것이다 이것을 다시'석-제논 안 우로 약칭했다. 이것을 더 간략히 표현할 때는 제석(帝樗)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신들의 제왕' 이라는 뜻으로 제(帝)라는 표현을 앞에 내세웠다.제석 d이라고 칭할 때의 '천' (天)은 신을 의미하는'데바'를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제석천이라는 말 속에는 '강력한(샤크라 釋) 신(데바 天) 지배자(인드라: 帝)' 라는 본래의 주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설산 동자와 제석천

 

깨달은 자인 부처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불교에서는 인도의 많은 신들도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윤회의 등급으로 보면 인간보다 좀더 나은 위치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도의 불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면서 힌두교의 많은 신들을 불교 수호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인도의 민간인들에게 신앙 되던 불교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사원의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데, 주신이었던 인두라는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신으로서 경전에 등장한다 대승의 『열반경』에는 설산(雪山)동자, 즉 나중에 부처님이 될 수행자와 제석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아직 세상에 출현하지 않을 무렵, 한고행자(즉 부처님)는 보살 행을 닦고 있었다. 그는 설산(히말라야)의 산중에서 출로 나무 열매로 연명하고 지내며 좌선하고 있었다 제석천은 이 고행 자의 모습을 보 고도를 닦는 그의 정신에 감격하여 이 고행 자의 결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제석천은 나찰로 변신하고서 보살 행에 힘쓰고 있는 고행 자에게 다가가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읊어 주었다.

-제행은 무상하고 생멸하는 것이다.''(뚫替行無常 是生i蝕)

고행자는 이 게송을 듣고 기뻐서 나찰에게 후반부의 게송을 들려 주길 원했다. 나찰은 ''나는 굶주리고목말라미칠 지경이다 내가 먹고싶은 것은 인간의 따뜻한 육신이고 마실 것은 인간의 생피뿐이다.''라고 답했다 이에 고행 자는 ''나의 몸을 바쳐 공양할 테니 나머지 게송을 들려 달라.''고 간청했다. 나찰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생멸이 멸하여 완전한 고요함에 이른 것이 즐거움이다.'' (生滅滅已 叔쇌威爲樂)

이렇게 말하고서 고행 자에게 곧바로 달려들었다.''그대는 목적한 대로 게송을 들었으니 내게 몸을 던져서 공양하라.''고 다그쳤다. 고행 자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법에 대해 신명 (身命)을버린다.''라고 말하고서 나무 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 신체가 대지에 떨어지기 직전에 나찰은 본래의 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하여 공중에서 그 고행 자의 몸을 받아 대지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훌륭하다 그대는 진정한 보살이다. 반드시 장차 불도를 성취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때는 나도 구제해 달라.''

그리고 그 고행 자인 보살의 발에 예배하고 물러갔다,『열반경꾜의 이 이야기는 제석천이 부처님을 도우면서 불교에 귀의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는 아울러 신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두라 신도 부처님의 법력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인두라 신의고 강력함이 중국의 불전에서는 금강(金例u)이라고 번역되었다.

 

제석쳔의 위력, 금강

 

 금강은 가장 단단한 광석인 다이아몬드를 의미하는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금강의 원어인 바즈라(yaJra)는 본래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벼락을 의미하는 말이며, 인도의 신화에서는 천둥 번개를 의인화한 신인 인드라의 무기를 가리킨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서 벼락의 그 강렬한 위력과 빛에 견줄 만한 것으로는 다이아몬드가 가장 합당할 것이다

 금강이라는 말이 불교어로서 친숙하게 된 것은 '금강경'이라는 경전의 명칭에 기인할 것이다 『금강경』의 온전한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 혹은 '능단(能斷)금강반야바라밀다경' 이다 이 두 명칭이 모두'바즈라' 라는 말로 시작되는 산스크리트 원명을 번역한 것인데, 원래의 명칭에 가깝기에는 후자 쪽이지만 번역 명칭으로 이해되는 의미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금강경』의 산스크리트 원명에는 '잘라 내다' (能斷)라는 의미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라는 명칭에는 그 말이 생략된 채 반야 바라밀을 모든 것을 잘라 낼 수 있는 금강으로 비유한 듯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에 대해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 이라는 명칭은'금강마저도 절단할 수 있는 반야바라밀' 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경우의 금강(바즈라)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번뇌' 혹은 '벼락처럼 강력한번뇌'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상대적으로 반야 바라밀의 위력을 강조하기 위한 말인 것으로 이해된다

『금강경』의 명칭에 대해서는 인도인의 사고로 보면,금강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벼락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더 신빙성이 있다 이에 의하면 그 명칭의 본래 의미는 '벼락처럼 절단하는 완전한 지혜의 경전'혹은 '벼락도 차단하는 완전한 지혜의 경전' 인 것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불교에서도 '가장 강한 것' 이라는 의미로 혼히 쓰이게 된 '금강' 이라는 말은 인드라신, 즉 제석천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제석천 또는 사천왕이 불교 신앙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는 사실은 인도의 대승불교가 기존의 전통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용하면서 사상과 신앙의 폭을 확대하여 왔음을 반영한다 이런 포용력은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국가의 민간 신앙에도 반영되어 저마다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열린마당
올바른 지장 신행 / 정성호 (경주캠퍼스 관재과 과장)

1. 지장신앙의 전래와 수용

 지장 신앙은 예부터 인도에서 '프리티비(pritivi)' 이른바 大地의 덕을 의인화한 바라문교의 地猾神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장(壬欌)이란 말의 범어는 '크시티갸르바(kdhgarbha)' 이다. 즉 지장보살로 통칭된다. 크시티(ks汨)란 땅을 뜻하고 가르바(garbha)란 태(胎)나 자궁(子宮)의 뜻을 지니고있어 '함장(含藏)' 이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금강삼매경』에 의하면 ''지장이라는 이름의 보살은 이미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얻은지라, 모든 중생의 선군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하기를 마차대지가 온갖 초목을 자라게 함과 같다. 다라니(陀羅尼)로써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일제 중생에게 은혜를 베풀되 끝이 없고, 큰 보배의 창고와 같이 보배가 더욱 늘어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을 따서 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의 전 통신이 불교에 받아들여진 처음에는 그다지 널리 신봉 되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미래의 부처님이신 미름불이 출현할 때까지 이른바 無佛시대인 위탁 약세에서 번뇌와 죄업으로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일을 부처님으로부터 부축받은 보살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육 도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모두 제도하기까지는 자신의 성불을 뒤로 미루겠다는 커다란 서원(誓願)을 세우고 언제 어디서나 자비행을 행하는 보살로써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신앙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지장신앙을널리 믿게 된 것은 중국수나라(6C말~7C초) 때이며, 이어 7C 후반 중국불교의 전환기에 당나라에 유행한 정토 신 알과 더불어 지장신앙도 널리 신앙 되기 시작한 것 같 먼저 지장 신앙의 중심 경전을 살펴보면 『대승대집지장심륜경』과 여장보살본원경』이며 이 두 경전에 지장보살의 사상과 원력이 주로 설해져있으며, 『점찰선각업보경』에는 정법에 역행하는 죄과에 빠지는 것을 건지기 위하여 목륜상(木倫相)으로 중생의 업보를 점철해서 지장참의에 의하여 모든 업장을 소멸케 하는 실천법을 설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지장3경이라 꼽히고 있다.

지장 관계 경전들이 중국에서 한역되고(북경5C~당7C사이)부터 그 신 알이 해동 삼국시대에 전래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의삼수승지장의 설화에 의하면, 백제에는 지장상을 조성하는 공덕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원광,원효에 의하여 점찰법회가 행하여졌고, '반야호국지장'미륵지장' 외 신앙을 새겨 볼 수 있다고 하겠다.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국 지장의 모습과 위치는 8c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원 쪽에서 네 번째 손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원효(617-686)의 『금강삼매경론』 제8품 「총지품」에 의하면 ''여래께서 이르시기를.. 어떤 중생이 잡념 없이 이경을 염(念)하고 여법히 닦고 익히면, 이때 지장보살마하살이 언제나 화신을 다투어 설법하고 그 사람을 옹호하여 끝내 버리지 않으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야뇩다라삼먁삼보리 (無上IE等正覺,已,)를 얻게 한다.''라는 지장보살의 위격(位格)을'보리심지장' 우로 칭하였다.

 

2. 지장 의례의 역활

 

 지장 의례가 한국 불교에서 포교의 장으로 수행해 왔던 그역 할에 대해서 주로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내 보인다.

첫째는 현세 이익적인 측면에서 지상경 독송,십재일신앙(지장보살본원경에서 처음 발생)이대단히 중시된다.

둘째는 내세에 대한 준비 단계로서 예수 신앙,시왕 신앙이 중시된다,

셋째는 내세적인 일을 담당하게 되므로 현세와는 거리가 멀어지는데 망자의 천도 의례(인로왕신왕)에 있어서 시왕(명계의 재판장), 지장보살(변호인), 인로왕보살(중인)로서 기능면에서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생전 예수 신앙의 교리적인 근거를 보면 예수(煉섟多)란 살아서 미리 49재 의식을 미리 닦는다는 뜻이며, 그 연원은 자수(自퓜岺)라고도 한다. 사후에 권속이 베풀어 주는 천도의 공덕은 7분의 1밖에 못 받지만, 생전에 '스스로 닦아야' (自修)모든 공덕을 본인이 받는다는 뜻이다.

또한 시왕(十王) 신앙은 사람이 죽으면 49일간 중음(中陰)으로 있는 동안 생전에 지은 죄업을 심판하는 곳에서 그의 업과(業果)를 변론하고 결정한 뒤에야 그의 업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람이 죽으면 인과에 따라서 '몸'만 버리고 '습성'은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뜻이다. 부모를 의지해 몸만 받아 태어났음을 뿐 전생의 습성은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 몸만 바꾸어 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전에 일찍이 '스스로 닦아' 선군 공덕을 쌓아 나가야 함을 여장경』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3. 지장보살의 대비 원력

 

여장경』에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계시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하신 중에 지장보살의 과거쟁의 인연 담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셨다.

''부처님이 문수사 리에게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1 이 지장보살마하살은 과거의 이루 말할 수없는 오랜 겁 전에 큰 장자의 아들이 되었더니라그때, 장자의 아들이 맹세를 하되, 그가 이제부터미래제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는 겁에 저 고통받는 육도 중생(六오효衆生)을 위하여 널리 방편을 베풀어서 다 해탈케 하고서야 그 자신이 불도를 이루리라 하고 부처님 앞에서 대원(大暇質)을 세웠느니라. 그로부터 지금까지 백천만억 나유타의 말로 할 수도 없는 오랜 겁을 아직도 보살로 있느니라.' ''

따라서 지장보살은 영원히 성불할 기약이 없다. 이것이 보살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문수, 보현, 관음, 세지 등의 보살이나 그 밖의 제 대보살(諸大菩薩)과 지장보살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지장보살상온 보살의형상이 아닌 머리 깎고 주장자를 든 성문(聲聞)의 형상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로부터 미륵불이 출세ㅎ때 성불할 때까지의 말법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의 구제를 부축받았으므로 축생, 아귀, 지옥,아수라, 인간, 천상 등 육 도의 그 어떤 곳이라도一月千江으로 다투어 그들을 위해 설법하여 그들을 구제하려는 것이 광대무변한 지장보살의 대비원력 (大悲原頁力)인 것이다.

그리고 지장보살이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불 사의한 이익아 있어 현세의 보고들이 얻는 이익뿐만 아니라 발심해서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는 최상승법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지장경』에서설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말하였다 '듬거라, 내가 오늘 도리 천궁에서 지장보살이 인간과 천상에 이익을 주는 불 사의한 일과 성현의 지위에 뛰어오르게 하는 일과 십지(十地)를 증 득한 일과 필경 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서지 않게하는 일들을 드높이 찬탄하리라.' 이에 회중에 있던 관세음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이여! 이 지장보살마하살은 큰 자비를 갖추시고. . 지니신 공덕과 불 사의한 위 신력을 저는 이미 들었나이다'''

부처님의 도리천 회상에서의 '지장보살'이 마야 부인에게 그 무수한 지옥의 이름과 그 악독한 정보를 설하는 메세지적 의미는 무엇인가. 중생이 한량없고 중생의 행위가 한량없으므로 중생에게 고통을 주는 지옥 세계의 모습과 그 이름 또한 한량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옥 세계(지옥등으로 비유되는 삶)가 일어난 업(業)에 따라 발현된다는 뜻이니 업에 의해 고통을 불러 들였지만 스스로 발원(發願)에 의해 지옥의 몸을 돌려해 탈의 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본다. 업과 업보는 공(空)한 것이므로 지옥 중생이 단숨에 해탈의 땅에 오를 수 있으며 번뇌를 돌려 이래의 지혜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한 생각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열어  괴로움에서 벗어나[雜苦)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지어다.

 

4. 오늘낱의 지장 신행

 

지장 신앙이 한국 불교의 대표적 신앙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 '지장 성지' 라는 이름 아래 지장보살을 수불로 모시는 사찰이 잇따라 건립되고 있다. 관 음 신앙이 현세 중심적이고 아미타 신앙이 내세 지향적인데 비해 지장 신앙은 과거, 현재, 미래를 두루 포괄하는 신앙이라는점에서,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갖가지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기에 오늘날 재가 불자들에게 매우 적합하고 수용이 용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지장 신앙의 재조명' 세미나(91.5. 양명사 주최, BBS)를 계기로 지장신앙이 새롭게 인식된 점, 우란분절(음력 7.15.)을 생명 해방의 의미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일고 있다는 점, 여장경』의 쉬운 해석으로 된 법공양판(正一 스님 등) 혹은 『지장경』 해설 테이프(정일, 묘 허 스님 등)가널리 보급 되고있다는 점, 지장 의식에 있어 한글문의 지장청(壬獵請) 및 천도, 회향, 서식 의례를 한글 문으로 알아 듣기 쉽게 봉행하는 사찰이 늘어나고 있는점, 또한 지장신행의 근기를 쌓아 참선 수행으로 정진토록 하는 선방이 생겨 났으며, 이로써 최근지장 신앙이 크게 활성화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뜻밖에도 중국 안휘성 정부가 정식으로 구성한 「김지장 학술연구단」이 93. 10. 20.一10. 29.까지 국내(서울, 경주 동국대)에 와서 한 . 중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학술 강연회를 가졌던 것이다. 정년 우리가 신행하던 지장보살이 신라 땅에 분신으로 화현하여(신라 효소왕 5년,696년?) 24세 때 중국으로 건너가(신라 성덕왕18년, 719년?) 주화 산에 이르러 794년까지 무려 75년 동안 수도 고행 정진하셔 더 많은 중생을 교화하셨고, 육신 보살(등신불)로써 1,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화성사(化城寺) 육신 보전에 봉안되어 계신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됨에 모든 불자들의 지장 신앙이 불타 오를 것을 기대한다.

''당시 원시림이었던 구 화산은 8세기 때 신라왕족 출신 승려 김교각(696一794)에 의해 개창되었으며, 지장이 열반하신 지 3년 뒤(797) 건립한 김지장탑(육신보전)은 '호국 육신보전' 으로칭하며 불후의 역사적 기념이 되고 신라 고승 김교각은 지장보살 또는 지장 왕으로 추앙받으시고고 결과 현재까지 현지에서는 지장 신앙을 신봉하고 있다.''라고 석성부(手鞭富, 구 화산 육신 보전 주지) 스님이 그때 경주(본교)에 오셔서 직접 전하셨다

 이상에서와 같이 지장 신앙의 인식 태도는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이웃을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서원이나 발원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이러한 지장의 본원과 본 행이야말로 중생의 진실한 자기 모습이며 영겁을 따라 행해야 할 바른 삶의 길이다.

지장보살의 큰 원(本願)과 끝없는 행(本行) 그리고 무량한 서원의 생명력(生命力)이 하나가 되어 생사 죄업을 돌이켜 장애를 부수고 세세생생 자성(自性)의 도리를 깨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신행단체
경주병원 불자회

 우리는 흔히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아프면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부처님께 소원하여 고통을 잊으려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이 사람들이 고통을 치료하여 마음의 평온을 되찾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대의왕 이라고도 한다. 의사가 환자의 명에 따라 처방을 내려 치료해 주듯이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사람에게 알맞은 법을 설하여 그 고통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병든 마음을 고쳐 불성을 얻도록 하여 주신다면, 의사들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낫게 하여 주는 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픈이의 고통을 함께하여 그들의 아픔을 치료하여 준다는 것이다. 지난 92년 5월 소수의 경주병원 직원들이 초대회장 성작진 불자(의대교수)를 중심으로 모여 설립한 경주병원 불자회(회장 정필현 교수, 정형외과) 또한 환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불제자,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불제자가 되는 것이 그 설립 취지이며, 주된목적은 선행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 및 상호 화합이다.

병원불자회는 병원 내의 법당에서 법사 스님이신 해인 스님을 모시고 정기적인 법회(매월 첫주, 셋째 주 수요일)을 통하여 신심을 돈독히 하고 있으며봄, 가을 두 번 성지 순례를 다녀온다. 지난 10월에는 지리산 화엄사, 쌍계사 등지를 다녀왔다고 한다. 이제까지 병원의 내실화, 직원 간의 화합에 중점을 두느라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못했으나 지난해부터는 불우 이웃 돕기 일일 찻집을 하여 그 기금으로 불우한 이웃에게 온정을 베풀기도 하였으며, 여름에는 처음으로 울릉도에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불우 이웃 돕기와 의료 봉사 활동에 중점을 두어 활동하려고 하며, 그 첫 번째로 이달 중순경 불우 이웃 돕기 기금 조성을 위한 직원 바자회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처음 설립 당시에는 소수의 인원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모든 직원이 불자회 회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큰 불자회의 현 임원단의 구성은회장(정필현) 1인, 부회장(최영택, 김상범, 이홍화) 3인, 감사 2인과 네 개의 구성 조직으로 이루어져 운영되고 있다.

앞으로 경주병원 불자회가 많은 봉사 활동을 통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여 주기를 기대한다

 

 

 

불자탐방
강찬순 관리처장 / 편집부

「정각도량」 11월호에서는'불자 탐방' 으로(서울캠퍼스)강창순 관리처장을 방문하여 유익한 대담을 가졌다

기자 : 여러 가지 학교 업무로 상당히 바쁘실 렌데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교 불교학과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 붙교와 인연을 맺게된 배경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강 처장님 ' 선대부터 불교집안이었고 한때는 절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이 닿았습니다.이를테면 속세에서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 : 학교다니던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의 모습을 비교하여 느낌올 말씀해 주십시요

 

강 처장님 '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 당시는 건물도 별로 없었고 가건물 같은 곳에서 공부했습니다. 중강당을 짓고 두 번째로 졸업했는데 백성욱 박사님 총장 시절도 중강당에서 불교문화자 강의를 전교생이 받았지요 그 당시는 동국대학 문학부가 이름을 날렸지요. 양주동박사님이 계실 때는 농대를 가장 알아줬어요. 지금이야 학교도 방대해지고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 연구에 노력하고 있지않습니까.

 

가자 :  31년 근속하신 학교의 산 증인이신데 학교와 인연 맺게 된 일과근무해오면서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들려 주십시오 .

 

강처장님 : 학교 다닐 당시 많은 학생 활동을 했습니다.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채로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지요 그때는 불교학과를 나와서 대부분 교직이나 개인 사업에 종사했었지요. 30여 년 학교에 봉직하면서 기쁜 일도 있었지만 어려운 고비도 많았어요. 자유당말기, 4. 19 등 숱한 데모와 데모를 막기 위해 쏘아대는 가스 등으로 학생 지도에 어려움이 많았지요. 저는 그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늘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그래서 지금도 부처님께 감사하고, 늘 참회하며, 열심히 일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면서 하루 있을 시작합니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잘 해결되면 그때 보람을 느낍니다,

요즈음 학내 수용 공간의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동국관 건립 이후 약 10년 만에 동국 학술 문화관을 건립하는 불사가 진행중인데 특히 이 불사가 끝나면 많은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요즈음 학술 문화관 건립 불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고 이 불사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기자 :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에 대해 들려주시죠,

 

강 처장님 : 우리집 보살도 처음에는 전혀 불교를 몰랐었어요. 그렇다고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진 않았지만 제가 불교학과를 나왔고, 『법화경』을늘 독송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교에 귀의하게 되더군요. 지금은 오히려 저보다 더 신심이 두터운 것 같아요. 큰아들 이름은 西來이고 둘째 아이는 奉來(부처님을 받든다는 의미)인데 불교방송 P,D로 있다가 지금은 유학중입니다. 휴일에는 집에서 108배도 하고 맥화경』도 독송합니다. 젊었을 때 보다 요즈음 불교를 안다기보다는 불교의 깊은 의미를 느끼곤 합니다 늘 생활 속에서 부처님께 감사와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기자: 학문의 연구분위기 조성 및 교정을 정토화하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 처장님 : 요즈음 고충이 많습니다 주어진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학생이나, 교수님들은 각자 많은 요구를 해오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잘 보완하고 보수함으로써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 89년도 이후 학교가 학생운동으로 소용돌이치면서 관리가 잘되지 않았던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그래도 요즈음 많이 보수하여 개선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기쁨니다.

평소에는 일상의 업무를 처리하고 주로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보수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동국 학술 문화관은 지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본관 및 학림관등의 화장실 등 보수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또, 교수회관, 학림관, 명진관,금강관 등의 천정 공사를 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근래에는 3D 현상 때문에 냄새 나는 화장실 공사나 먼지 나는 천정 보수 공사에는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정각원 주변, 공과대학 앞 등 교내 여러 곳에 나무와 꽃을 심는 조경 공사를 통해 교정을 좀더 아름답게 꾸미고 있고 학생들의 휴식 공간을 조성하여 캠퍼스를 정서가 풍기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 및 각 건물예정수기를 설치하여 수돗물이기는 하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고 각 대학 독서실에 에어컨 설치,각 건물마다 컴퓨터 단말기를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취업 정보, 시간표 등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다소 불편한 점들이 개선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기자: 학교를 가꾸고 관리하시는 책임을 맡은 입장에서 동국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밀씀이 있으면 이 기회에 말씀하시지요.

 

강처장님 : 현재 공간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그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없지만 동국 학술 문화관이 완공되기까지 조금씩 불편한 점을 참아주었으면 합니다.

특히 우리 학교는 불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세워진 학교이지만 건학 이념을 구현하는 길이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종교적인 차이를 떠나서도 법당 앞이나 불상 앞을 지날 때 비록 멈추어 서서 합장은 못하더라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숙연하게 갖는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법당주변을 가꾸고 정각원에 써치라이트를 설치하여 야간 전문대학원 학생들에게 학교 정신을 홍보를 하고 있으니 지나는 길에 잠시 마음을 살피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저는 평소에도 학교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각 구성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각자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면 우리 학교는 안정적인 발전을 이룩할 것이고 그것이 건학이념의 구현일 것입니다- 작은 것이지만 한 방울의 물, 한 등의 전기를 아껴 그것으로 재투자를 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권리 주장에 앞서 자기 의무를 잘 이행하는 참된 주인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바쁘실텐데 긴 시간 탐방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계획하신 모든 일들이 원만히 성취되어 우수 대학이 되도록 정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전등이야기
차나 한잔 들게 / 편집부

조주선사에게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왔다. 조주선사가 객승에게물었다. "그 전에도 여기에 온 일이 있느냐.''

객승이 ''예 . 있습니다. '' 조주 선사는 그 객승에게 말하였다. ''차나 한 잔 들게 (喫茶去)'' 그런 뒤 얼마후에 또 다른 적승 이 찾아왔다 조주선사가그객승에게 물었다 . 그 전에도 여기에 은 일이 있느냐.'' 객승이 답하기를 ''아니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주 선사는 그 객승에게도 말하였다. ''차나 한 잔 들게 (喫茶去)''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원주(院主) 스님이 주주 신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일찍이 여기에 온 사람이나 오지 않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차나한잔들게' 라고 하십니까  도대체 그 참뜻이 무엇입니까?'' 이를 듣고 있던 주주 선사가 ''원주야.''라고 불렀다.

그러자 원주스님이 ''예'' 라고 대답하자 주주 선사가 말하였다, ''너도 차나 한 잔 들게 (喫茶去)'' 조주 종심 선사(778一897)는 일찍이 출가하여 깨달았으나 80세에 이르러 관음원(鱉吼音院)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이곳에서 40년을 주석하다가 120세에 입적하였으며 청렴을 생활 신조로 삼았다.

그가 도인으로 알려졌기에 전국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도를 물으면 언제나 일상 생활 속에서 도를 가르쳐 주었다.때로는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뜰 앞의 잘나무'' 라고 하기도하고, 또는 ''도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차나 한 잔 들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를 모르는 원주 스님은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을 것을 기대하였으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차나 한 잔 들게-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묻는 원주스님에게도 ''차나 한 잔 들게''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손님이 오면 차 한잔을 대접할 줄아 는 것, 이 속에 진리가 있지 않을까.이것은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며, 인간 관계에 있어서 첫 시작이다.

그러나 주주 선사는 이러한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않았다, 과거에 여기에 와 본사람에게나, 생민 부지의 첫 대면차나 할 것 없이 평등하게 차 한 잔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원주가 묻자 그에게도 차 한 잔을 권하였다 이 참뜻을 원주는 깨달았을까. 즉 진리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며 대지유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진리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있음을 . ..

''차나 한 잔 들게,''

 

 

 

불심의 창
마음의 고향 / 이순용(교수협의회 회장, 법학과 교수)

어떤 사람은 산이 있어 산에 간다고 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절에 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로 절에 간다라고 나에게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또한 특별한 마음을 내서가 아니라 저절로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갈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좋고, 둘이 가도, 온 식구들이 찾아가도 좋으며, 고민이 있어 가도 좋으며, 기쁜 일이 있어 찾아도 좋은 곳이 절이마, 그러기에 나는 산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편안해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다.솔직히 고백한다면, 나는 불교에 대ㅎ배 잘 알지 못한다. 또한 신심이 깊다고 느껴 본 적도 없다. 불교와의 인연을 생각하여 본다면 어언 40여 년 전 동국대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지금까지 그냥 향내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스민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더 깊은 인연을 생각하여 본다면 나의 어머님이 이 아들 잘 되게 해달라고 아침 저녁 혼자 뭔가를 위해 절을 하시던 모습과 정성스럽게 머리에 무언가를 이시고 나의 손잡고 절에 가곤 하던 추억이 마치 빛바랜 흑백 영화처럼 토막토막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혼자 읽으시던 것이 『천수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동국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였다 그 후로 절에 간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자연스러움이 되어 버렸다 언제 들리더라도 마냥 어머님 품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기에 학교에서 교수회의 소임을 맡고 있는 지금도 바빠서 좀처럼 절에 갈 기회가 없지만 교수회 사무실이 정각원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을 받곤 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마음에 떠오르는 절 하나가 있다 그리 크지도 않으며 화려하지 않은 절, 그러나 왠지 마음 끌리는 수덕사이다. 내포 땅 덕숭산에 있는, 서울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절을 자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찾곤 하였다. 지금은 내 모습만큼이나 변하여 옛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수덕사 하면 떠오르는 느낌만은 별로 달라진게 없다 왜 일까

내가 수덕사를 처음 찾은 것은 동국대학교 4학년 때라고 기억한다. 그때 나는 법 공부에 대한 회의도 있어서 어딘가로 흘연히 떠나고 싶었다. 과연 인간이 법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심한 고v1에 빠져 있었던 때이라고 생각된다. 왜 수덕사를 가고자 했는지, 무작정 수덕사를 갔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그때 마침 첫눈이 내렸는데 눈 덮인 산사는 그야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절은 아무 거부감 없이 자연과 조화되어 눈을 받고 있었다. 대웅전에 오르는 오랜 세월을 대변하여 주는 돌계단에 비집고 나온 이 롬 모를 풀들은 잠자코 눈을 맞으며 봄을 기약하는 것 같았다 소나무들은 눈을 떨쳐 내려고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절은 온화하게 그것을 감싸안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경외스러움이었다. 법당의 부처님은 말없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만공탑에서 정혜사 능인선원으로 돌계단과 정혜사 앞뜰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가을 하늘처럼 선명하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수덕사를 찾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덕사는 늘 새로웠다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일까. 지금의 수덕사는 더 이상 예전의 수덕사가 아니다. 도심의 상혼이 그 곳까지 찾아들어 관광지화되었다. 시끄럽고 떠들썩하기조차 하다. 세월의 변모를 이야기하여 주던, 이름 모를 풀들이 헤집고 나오던. 부처님께 조심스레 다가서기 위해 내디뎠던 돌계단은 자취를 감추었다, 육중한 대리석 계단만이 반길 뿐이다 변함없는 것은 말없이 나를 반기던 부처님의 미소일 뿐, 그것만이 세월의 GM름 속에서도 예전 그대로인 것이다

 

 

 

동국과 불교
중앙불전의 개교.지도정신 / 편집위원

불교전수학교에서 '中央奮莽敎專門學校 탄 명칭으로 승격인가가 난 것은 1930년 4월 7일이었다. 명칭에 대해서는 본래 '惠化專門學校' 루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불교란 두 자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불교전문학교로 하기로 한 것인데, 이미 일본에 경도불교전문학교가 있으므로 그와 구별하기 위하여 '중앙' 두 자를 붙여 '중앙불교전문학교 루 결정한 것이었다.

중앙불교전문학교로의 승격은 동국의 역사로서는 물론 한국불교의 근대화에 있어서 획기적인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1906년 명신학교 개교 이후 전 불교인 은줄기차게 명실 상보한 전문 교육 기관의 출현을 고대하고 염원해 왔다. 1921년 10월 중앙학림 학생들의 동ㅁ병 휴학과1930년 2월 불교전수학교 학생들의 맹휴도 이를 위한 것이었다, 교계의 혼란과 일제의 억압으로 중앙학림이 자진 휴교를 할 때에 5년이란 기한을 설정하고, 5년 후에는 완전한 전문학교를 만들겠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였다.그러나 그 후 5년을 넘기고6년 후인 1928년에 스스로 약속한 전문 교육 기관을 탄생시켰으나, 학칙은 전문학교 그대로이면서 교명이 전수학교로 되었을 때 그 실망감과 불만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다시 의지를 무아승격 운동을 전개하여 드디어 한국 불교계의 10여 년에 걸친 숙원을 성취하였으니, 이는 불교계와 우리 종람 학교에 실로 경하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 승격의 기쁨을 당시 「一光」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전략) 이로세 오랫동안 싸워오던 승격 운동 전은 개선가 속에서 폐막한 셈입니다.4월 7일 만세1 우리 만세 !(하략)

 

이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벅찬 감격의 표현인가. 한편 金泰洽은 '朝鮮佛敎의 新曙光'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중앙불전의 출현을 기뻐하고 있다.

 

去 4월7일부로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중앙불교전문학교의 탓1가 사령장이 道당국을 경유하여 나왔다. 조선全土의 一萬 盆捌2가 갈망하고 普成高普의 7백 雄徒가요청하며 佛敎專붉箸의 3백학도가 갈구하던 불전의 승격 문제가 해결되었다. 此에대하여 필자는 手舞足躇의그 환희 한 바를 이길 길이없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감회가 무량하다. (중략) 시대가 시대이유로 조선불교가 없다면 已어니와 그래도 萬法1區가 조선불교라는 간판을 背負한 이상에 대학은 장차 세운다 하더라도 우선 급한 문제로 불교전문학교 한 개라도 설치하지 아니한다면 도저히 조선불교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다. (중략)그런데 이에 대하여 破天荒의 好成績으로 平機日問에몽상도 하지 못한 중앙불교전문학교라는 명의로 인가가 나린 기상천외의 소식을 전 케 됨은 전혀 불타의 가호와 학교 당국과 총무 욈 당국의 수 뇌 간부의 민첩한 활동과 명철한 理智의 賜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략)조선불교 교육의 최고 기관은 이것으로서 첫걸음의 해결을 지은지라. 필자는 조선불교의 新曙光의 一數로 보려 하거니와 다시 諸氏에게빌고저 하는 바는 조선에서 민간 대학이 생기는 날에는 우리 중앙불교전문학교가 솔선하여 제일 착으로 승격되어 동양 문화를 대표하는 종합 대학이 되도록 노력하여 주기를 갈망ㅎ배 마지 아니한다.(「佛敎」 제71호1930. 5.)

 

중앙불전으로 인가가 난 후,4월 16일에 불교전수학교 학생으로서 중앙불전으로의 편입 시험을 치른 후 동월 25일수업식을 가짐으로써 중앙불전은 발족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로써 우리 중앙불교전문학교는 연희전문학교 . 보성전문학교와 함께 3대 사립전문학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다시 그 이듬해인 1931년8월 17일에는 문부성에 고등학교 고등과 및 대학 예과와 동등 이상의 학교로 지정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동년 12월5일 문서 불비로 수정 후 다시 제출하여 1932년 5월 31일자문부성 고시 제158호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이 지정을 받은 학교의 졸업생은 고등 시험(고등고시)에 응시할 때 예비시험을 면제받는 특전을 얻게됨으로써 중앙불전은 명실공히 고등교육기관이 된 것이다.한편 이 같은 중앙불전의 지도 정신, 즉 교훈은 1934년에확정되었다. 이 지도 정신은 본교의 설립 취지와 정신을 잘 알고 있는 원로급 교수들이 내놓은 안 중에서 취택된 것이다. 1934년 12월 3일에 열린 임시 비공식 교수회에 나온 안들은 다음과 같았다.

 

朴漢永 교장 안

安,已泣命

(安新賞'匣 立斯慧命)

遵敎力學

(恪遵救道 力究素學)

樂易慈和

(正容樂易 應物慈和)

超凡向上

(入俗以超 正路以上)

 

權相老 선생 안

信仰(奧理玄道 非信難入)善行(對境接物 擇善而行)慈悲(社會氏衆 拔苦輿樂)節儉(防絶奢檻 身爲象範)力學(字宙萬有 非學莫知)金映遂 선생 안

좋言實(勸勇좋言,已, 去浮就實)慈悲(慈悲善,已, 互相友愛)澈已,(暴Nl釜禪 以'1吾愛助)度世(救度迷世 非我爲誰))金映潭 선생안

誠信(至誠發信)

力學(力究魯學)

超脫(超俗脫塵)

慈悲(拔苦興樂)

 

江田{交雄 선생 안

信念

誠實

董姸

僉慈愛

 

이상과 같은 안들을 놓고 교수회는 우선 불전에 향을 사 루고 예배한 다음 이 중에서 추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결국 추첨 끝에 김영수 교수 안인'信實 . '慈悲' . '蘿心 . '度世'가 본교의 지도 정신으로 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것이다.

한편 교훈에 앞서 당시의 교가는 조선문학사의 강의를 받고 있던 雀南善의 작사로1930년 가을에 제정된 것으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校歌

1.

感化의 짙은 숲과 雙夕奚 맑은 샘 우리의 聖胎 담아 높은 집 있다大界가 다 한가지 東方을 볼 때하고 한빛이 서려 거리 넘치네.우리 了轍韋尸탰騈交

彖遠의 힘, 久遠의 빛.

2.

'룸비니' 복판 흙을 물려 물려서十方에 우뚝하게 모은 이 동산.드느니 나가느니 돌려 직히며더하야끝없을사 새 복 새 나무.

3.

한 目標 바라보는 願이 뭉쳐서瀏緞 金剛力이 여기 있구나.굴려서 서로 짓는 法輪의 밑에 깨끗한 딴 누리가 싹을 트리라.

4.

얽뱅과 어둠에서 앓는 무리들 건져서 시원하게 하는 一大事누에게 미룰 것 가본대 우리집다듬에 꾸준하지 않을까 보냐

 

 

 

가람의 향기
범어사 / 편집부

가을은 푸른하늘과 산과사람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 내는 계절이다. 산들이 불그스름한 옷으로 단장하며 사람들을 부르기 때문이다. 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신을 새로이 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본다. 그래서인지 기자가 금정산 범어사에 갔을 때 많은 등산객들이 산에 오르고 있었다.

범어사는 우리 나라 31본산의 하나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다. 또한 화엄 십대 사찰(華覩十大寺刹)의 하나이며 임진왜란 때에는서산(西山) 대사가 이곳을 승군(僧軍) 본부로 하여 승병을 모은 호국(讀國)의 도량이 되었으며,근세에는 영남 삼대 사찰의 하나로써 창건 이후 오늘날까지 그 사격(寺格)은 전국에서 언제나 수위(首位)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범어사가 있는 금정산은 큰 산은 아니지만 그 곳에 기암 괴석이 펼쳐져 있어 토산(土山)과 암산(岩山)이 매우 잘 조화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깊이는 7척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 우물(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라고 하는 절 이름(梵魚寺그을 지었다. ''

범어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으로는 1700년(숙종 26년)에 동계(東溪)가 편찬 간행한 목판본『범어사창건사적』 (梵魚.寺創漣事蹟)이 현존하여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금정산 법어사」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창건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한 것은 신라 문무왕 18년(서기 678년) 의상(義湘) 대사에 의해서이다. 문무왕 10년(670년) 의상 대사가 당나라로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우리 나라 국민들을 화엄사상(華覩,땁想)으로 교화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화엄 십대 사찰 중의 하나로써 문무왕 18년에창건된 것이다. 신라 당시의 가람 배치는 미륵석상과 좌우 부처 및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ㅎ배 모셨던 2층의 미륵전(彌勒殿)을 세우고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3칸의 대장전(샷濊殿)을 세우고 대장경과 삼본화엄경 (三本華最輕) 및 석7때래상을 모셨다.

이 밖에도 천왕신전(天王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筵樓), 강전(講殿), 식당(食堂) 및 33천(天)을 조성한 철당(鐵堂), 중료(衆寮) 360방사가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 있었다고 한다. 사적에는 이 러한사찰의 규모가 창건 당시에 다 갖추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된 규모일 것이다.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2년)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소실되었다. 1613년(광해군 5년)에 묘전(妙全),현감(玄鑑), 계환(戒環), 법인(法仁), 천원(天元), 덕균(德均) 등이 법당 및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집기들을 갖추어서중창하였다.

그 뒤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이름 아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절과 인연이 깊은 고승으로는 창건주인 의상과 신라십성(新羅十聖) 중의 한 사람인 표훈(表訓),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樂安),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靈i原), 근세의 고증 경허(蜜箋虛), 한용운(韓肯a雲), 동산(東山) 등이 있다. 敵

특히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에는 1613년에묘전이 중건한 이후의 역대 주지와 그 임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①주지시대(住持時代)132년간 87대 , ②승통시대 (僧統버戈) 166년간177대, ③총섭시대(摠蘿時代) 14년간 11대, ④섭리시대(麒時代) 4년간 3대 , ⑤주지시대 39년간8대로 구분ㅎ배 1947년까지 기록하고 있다.

 

가람 배치

 범어사는 산지 가람(山地伽藍)으로서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금정산 동쪽의 넓은 산지를 이용하여 그 아래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 등을 차례로 배치하고 다시 7m 높이의 축대 위에 보제루(普濟樓)를 배치하였다. 보지 루 좌우에는 심검당(勇劍堂), 비로전, 미륵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일반사찰의 경우에는 심검당과 대칭이 되는 곳에 강원인 강설당(講說堂)과 같은 건물이 놓이는 것이통례지만, 이곳에 법당이 있어 특이한 가람 배치법을 보이고 있다. 비로 전과 미륵전 뒤쪽에는 선원(禪院)이 배치되어 있으며, 선원 바로 아래 낮든 지역에는 요사채들이 있고 그 옆에는 종무소건물이 있다. 또 심검당 뒤쪽에는 강당(講堂)이있고, 강당의 뒤 건물들은 승려들의 일상 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후원(後院)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보다 7一8m 높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는 관음전이있으며,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濾殿僧)의 거처인일로향각(一爐香閣)이 위치한다.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고 그 뒤쪽에는서향각(西香閣)과 크고 작은 요사채가 있으며,그들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비켜서 팔상전(捌相殿), 독성각(獨聖閣), 나한전(羅漢殿)이 늘어서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산령각(山靈閣)이 있음도 특색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범어사의 가람 배치는 대체로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상단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 배치, 중간 부분의 보제루를 중심으로 한 가람 배치, 하단인 보지 루 아래쪽의 일주문, 천왕문, 불이 문을 중심으로 하는 건물들이다. 이와 같이 건물이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산지 가람의 지형에 따른 배치 방법이다.범어사 대웅전

보물 제434호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602년 중건, 1613년에 중수한 조선 중기의 목조 건축물이다 기단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탱주(撑柱)와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갑석(甲石)을 놓아 마무리하고 면식에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조각을 한 가구식(塢式) 기단으로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았는데, 전면 양 우주(兩隅桂)의 초석은 둥근 돌기둥 모양으로 되어있다. 主석 위에 세운 기둥들은 흘림두리기둥들이고 기둥 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平t方)을 놓아,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공포(拱包)들을 놓은 다 포식 (多包式) 건물이다.

 

범어사 석등

 경내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등으로서 부산직할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의상 대사가 범어사 삼층석탑(보물 제250호)을건림한 3년 후인 678년에 조성하였다고 하나,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삼층석탑과 같이 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하대석 위에 간주(竿柱, 중대석)를 세우고 그 위에 상대적은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그 위에 옥개석을 덮었는데, 각 부재의 평면은 모두 8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양식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형태이다.

 

범어사 삼층석탑

대응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물 제250호이다 이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삼층석탑으로서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따르고있으니 상하 기단의 면식에 탱주(撑柱) 대신 안상("艮象)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조성 연대는 범어사의 창건 시기인 830년경으로 추정된다.

 

 

 

비유와 설화
무량한 참회의 공덕 / 편집위원

불명경에서 "만일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이세상에서 더할수 없는 진리인 무상전등 정각)를 구하는 이면 먼저 온갖 모든 죄를 참회(儺隊)해야 한다.'' 하였고, 『업보차별경』(業報差別桎)에서는 ''만일 사람이 중한 죄를 저질렀으면 지은 뒤엔 스스로 깊이 책망하면서 참회하고 다시는 짓지 않아야 근본업(根本業)을 능히 제거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참회하지 않고 어찌 위 없는 보리(춈提 : 眞理9를 닦아 나아가겠는가. 그러므로 참회는 가볍거나 무거운 죄를 스스로도 참회하고 남도 참회하게 하며, 남이 참회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따라 기뻐하는 것이다. 참회할 때에는 전에 범한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어야 한다.

 

왕이 지혜 있는 세 사람을 친우로 사귐

 옛날 월 지국에 전단계니라라는 왕이 있었는데, 세 사람의 지혜 있는 이들을 친한 벗으로 사귀고 있었다. 첫째 분의 이름이 마명보살이요 둘째 분은 마 타라라는 대신이며 셋째 분은 차라 가라 하는 명의였다 왕은 그 세 분을 극진히 대우하고 있었다.

마명보살이 왕에게 말했다.

''만일 나의 말을 따르시면, 왕은 오는 세상에는 언제나 선(善)과 함께 하고 영원히 모든 재난을 여의며 길이길이 악취(惡趣)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 대신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하는 비밀스런 말씀을 누설하지 않으시면, 사해(四海) 안을 모두 다 얻을 것입니다.''

또 명의가 왕에게 아뢰었다.

-만일 신의 말씀을 따르시면, 왕께서는 일생 동안 끝내 횡사하지 않으며 온갖 음식 맛이 마음에 맞고 병환이 없을 것입니다 ''

왕은 명의의 말대로 하자 조그마한 병도 앓지 않았으며, 대신의 말을 따라 군사를 일으키면 가는 데마다 항복하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러나 사해 안에서 세 방향의 나라들은 모두 평정했지만 오직 동방만은 아직도 귀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즉시 군사를 내어 쳐들어가려고 먼저 여러 벗과 흰 코끼리들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 떠났다. 마침 총령(蔥嶺)에 이르러서 험한 데를 헤치며 넘으려고 하는데 타고 왔던 코끼리와 말들이 더 전진하려 들지 않으므로 왕은 이상하게 여겨 말에게 말했다.

''나는 그 동안 너를 타고 세 방향을 다 정벌하여 평정했거늘 너는 이제 어째서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느냐.''

그러자 대신이 왕에게 아뢰었다.

''예전에 왕에게 비밀스런 말씀은 누설하지 마시라고 했었는데 왕은 이제 누설하셨으므로 왕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죽을 것을 알아챘다. 그 동안 이 왕은 남의 나라를 정벌하면서 무려 3억여 명의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중한 죄를 받을 것을 스스로 알고는 마음 속으로 몹시 두려워하면서 곧 그 죄를 참회했다.

그리고 나서는 보시 (布施)를 하고 계율(戒律)을 지키며 스님들을 위해 승방을 짓고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등 여러 공덕을 닦으면서 부지런히 힘썼다.

궈1런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은 수근거렸다.

''왕은 그 동안에 많은 죄를 지었고 무도하게 많은 인명을 살육했다. 지금 아무리 복을 짓는다 한들 이전의 죄가 없어지겠는가.''

그때 왕은 이런 말을 듣고 나서 그들의 의심을 풀어 주려고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이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밤낮 이레 동안 불을 끄지 않고 계속 끓이게 한 뒤에 그 펄펄 끓는 물 속에다 왕이 끼고 있던 가락지를 던져 넣었다.

그런 뒤에 신하를 보고 그 끓는 가마솥 안에서 그 가락지를 집어 오라고 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은 왕에게 아뢰었다,

''저희에게 달리 죽을 데로 가라 한다면 갈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저 가락지만은 건져 올 수 없습니다.''이런 말을 듣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혹 다른 방편을 써서라도 집어 올 수 없겠는가.''

''있습니다. 아래서는 불을 때지 않고 위에서는 찬물을 부어 넣는 그런 방편을 쓰면 집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예전에 지은 죄는 마치 저 펄펄 끓는 가마솥 안의 물과 같은 것이요. 지금 모든 선행을 닦으면서부끄러위하고 참회하는 일은 마치 저 찬물을 붓는 것과 같거늘, 어째서 삼도(三途 : 지옥 . 아귀 . 축생의三惡道]의 중한 죄가 소멸되지 않겠으며 천상과 인간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단 말인가.''

모든 신하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이런 인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다.

(報寶藏經 중에서)

 

 

 

불교 건강법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영지버섯 / 김갑성(동국한방병원 침구과)

문화가 급속도로 발달되면서

이세는 못 먹어 병들고 죽는 경우보다는 잘 먹고 무절제한 생활에서 오는 문화병 즉 성인병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갖고 나름 대로의 건강 유지에 대해 여러 가지의 보신 제나 건강 식품을 구하여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또한 지나치면 건강 염려증이 되겠지만, 평소에 한두 가지의 건강 식품을 애용한다면 의사에 입장에서 굳이 부정적으로 만보기도 어려워졌다

 많은 건강 식품이나 한약재에 대한 환자나 주변 친지들이 갖는 관심과 질문 중에는 영지버섯이나수쿠알렌 또는 곰 쓸개를 복용하려고 하는데 어디에 좋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묻거나 심지어 관절염 환자의 경우 고양이 고기가 좋다는데 먹어도 좋으냐는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선물로 받는 경우도허다하여,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건강 식품을 먹어야 되는 경우도 있으니... ..

영지버섯1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니 이것부터 설명하기로 하자.

경지버섯은 이름 그대로 영험하고 신비로운 효과가 있다고 하여 靈芝라고 명명된 것으로 일명호유(虎乳)영지라 불리기도 하고,신초(神草) 또는 서초(i賂草)라고도 불리워지기도 한다 최근에 항암 작용과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바도 있지만 한의학에서는 이미 본초학의 성서로 대표되는 r신농본초경』에 지(芝作}는 이름으로 처음 수록되어있으며 다공균과에 속한 식물로 색깔에 따라 여섯 종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자색 또는 적색 올 제외한 다른 색깔의 영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므로 대게의 문헌에는赤芝(영지겻나 紫芝의 전주(全株)를 건조시긴 것만을 취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자색의 지(芝)가 많으나 문헌상에 나타난 약용의 지는 주로 적지를 사용하고 있다.

영지는 생장의 조건이 섭씨 30도의 온도에. 80% 이상의 습도가 유지되어야만이 야생에서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야생을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데다, 특히 우리 나라의 기후조건이 영지가 자랄 수 있는 계절은 여름 장마철 동안의 불과 며칠뿐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버섯의 포자가 발아하지 못하면 영지는 번식할 수가 없으므로 야생영지는 회귀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최근 중국에서 영지의 인공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영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지는 독성이 없고 맛이 감미로우면서 평이하고, 따뜻한 성질을 갖고 있어 속이 냉한 사람에게는 강장 작용이 있으며 기를 증진시키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제의 정기를 부양시키고 근본을 튼튼히 하여줌으로써 질병을 예방하는 면역의 기능도 갖고 있다

 최근 일본 미에 대학의 미야자끼교수가 발표한 실험 논문에서는 분자량 약 4만의 다당 위를 추출하여 동물 실험을 통한 종양억제 실험에서 항암 효과가 있음을 보고한예도있다

대체적으로 영지의 임상 응용법 위는 광범위ㅎ때 실제로 고혈압이나 만성간염, 천식, 심근경색에 의한 흉부의 통증, 위 .십이지장궤양과 같은 만성 성인병에 다양하게 응용되는 건강 식품이지자한약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실제 사용에 있어서는 속에 염이 있는 염성 체질의 소유자는 복용을삼가하여야 할 것이고 어느 정도를 복용할 것인가, 또는 전문적인 질병 치료를 위해서 복용하는 것이라면 한의사와 상담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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