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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9월호 / 통권 9호 / 불기 2538(1994)년 9월 1일 발행

 

 

   

 

고승 법어

안심법문/청화 큰스님

 

정각도량

신토불이/ 이도업

 

교리강좌

진언과 주문 / 편집위원

 

경전의 세계

약사경/ 편집위원

 

불심의 창

맑고 향기롭게 보낸 하계 수련대회/ 안재봉

 

전등이야기

이 손안에 있소이다

 

열린마당

자연이 건강해야 인간도 건강하다 / 황옥자

 

열린마당

우리도 잊지 못하는 바다 / 한정호

 

신행단체

한방병원 불자회

 

동국과 불교

불교전수학교의 개교/ 편집위원

 

비유와 설화

우파구제의 구업/ 편집위원

 

일주문

말의 진실성/ 정승석

 

불자탐방

이종찬 교수 / 편집부

 

가람의 향기

은혜사 / 편집부

 

불교건강법

요통 /김갑성

 

 

 

고승법어
안심법문 / 청화 큰 스님

 부처님 법문은 우리.마음을 안락하고 평화롭게하는 안락(안심)법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 안락법문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참다운 부처님의 대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상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린대 우리 중생들은 상에 집착하지 않-色면 상을 여읜다고 생각하지만, 본래 상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우주의 대법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진리 그 자체, 우주의 질서 그 자체가 부처님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 법으로 보면 나라는 상이나 너라고 하는 상, 또는 일체 현상이 본래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허망 무상한 거짓상을 떠나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 느끼는 것은 모두가 상인데 그 상이 왜 비었다고 ㅎ(는가라는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은 상이인연에 따라 잠시 모양을 다툰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대승의 인연 법은 법계 연기를 알아야 합니다. 법계 연기는 우주 만유가 진여 불성으로부터 잠시 모양을 다투어 찰리의 머무름이 없이 변화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 만유가 변화무상한 것을 잘못 보고서 상을 내는 것입니다. 이 상에 걸려서 우리는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자기 몸이라고 해도 사실은 자기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는 공사상어 있습니다, 제법이 공이라고 하지만 내 몸이 항상 있어 보입니다.또 내 몸이 하나의 현상으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없다고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명백백히 우리의 몸은 사대로 구성되어 본래로 없습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을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분석해 보면 전자나 양자, 중성자 등의 미세한 알갱이로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운동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곧 미세한 알갱이가 실존적인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존재형식에 불과한 것이며 어느 단계에서 가상을 낸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따라서 본래로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결합 또는 운동 형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공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것을 모르고 현상적인 상에 집착하여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물질이 실존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고가발생됩니다. 따라서 이 상을 여의어야 만이 안심임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여 불성은 우주의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여 불성은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바로 불성이기 폐문에 하나의 원리가 아닌 생명 그 자체의 실상입니다. 생명의 실상은 우주의 본체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공덕을 포함합니다. 그 공덕은 끝도 가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여 불성의 자리가 얼마나 많은 공덕을 가진 자리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우량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무량공덕은 바로 우리의 자성공덕입니다. 우리의 진여 불성 가운데는 그것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개발을 미처 못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공덕, 우리의 공덕이 우량무변한 것을 확실히 믿어야 만이 그것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모든 상은 본래로 상이 아닙니다. 물질을 분석해서 공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공이 라는 뜻입니다. 분석을 통해 공이라 생각하는 것을 석공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참다운 반야의 도리가 아닙니다- 물질은 물질 그대로가 본래 공입니다. 공이기 때문에 진여 불성의 자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공의 도리를 미처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수행을 합니다. 화두를 참 구하기도 하고 염불을 하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량세로 지어온 입장이 우리의 잠재의식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순수하게 정신을 몰두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마음과 틈이 비워집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님니다. 우리는 본래 없던 것인데 인연에 따라 부모의 몸을 빌어 잠시 모양을 갖추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본래 없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입장을 녹이면 자기 몸과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입장을 녹이는 일이므로 시간을 정할 수 없습니다.

업장을 녹여 자기의 몸과 마음이 비워지면 그것이 곧 상을 여의는 것입니다.

관심론에 보편은 범부를 초월해서 성자가 되는 것이 눈 깜박할 동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는 것이 눈 깜박할 동안에 있는데 어찌 수고롭게 애쓰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저도 사십년이 넘게 참선만을 했지만 사십이 넘어서야 자리가 잡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바른 정신과 바른 수행을 했더라면 금방 되었을 것인데 애는 퍽 썼다고 할지라도 지금 회고해 보편은 바른 정신을 가지고 바른 수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른 정신은 부처님의 무한 공덕이 내 자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이미 선정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공덕은 육 바라밀의 정진 바라밀입니다.이 믿음의 공덕은 나머지 오버라 밀을 능가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여 불성의 자리를 여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범부를 넘어서 눈 깜박할 동안에 성자가 집니다.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일미 평등의 진여불성입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삼 독심에 가리워서 미처 보지를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그 자리를 분명히 보고 체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차만별의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본래의 성품은 모두가 다 하나의 진여 불성이라고 분명히 먼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바른 수행입니다.

조사 스님들의 말씀들은 일관되게 우리의 중생심이 먼저 선지식을 만나서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라는 이 자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화두나 염불은 그런 때문에 있습니다.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염불이나 화두나 주문,이 모두가 다 상을 여의고 본래 면목을 갖는 공부입니다. 화두를 드는 것만이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두를 의심하는 것도 참선법이요, 화두 없이 잠자코 본래 면목을 지켜보는 목조도 하나의참선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염불도 하나의 참선법입니다. 다만 참선법이 꼭 되기 위해서는 수행을 위한 방편을 떠나서 본래 면목의 자리에 우리의 마음이 안주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사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으로는 '오 주여' 틀 왼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자리가 진여 불성의 본래 면목 자리에입 각했다고 할 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성자의 말씀은 다 상을 여의고서 본래면 목자리 본체를 관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산란스런 마음만 너무 세서 우리 마음이 흐트러진 것이지 부처님 법따라 공부하다 보면 그때는 마음이 익어져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은 자기 몸과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바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 자체입니다. 생명은 곧 광명입니다. 빛입니다.눈부신 빛이 아니라 한계가 없는 광명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광명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번뇌에 가리의 어둠을 보고 흐림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몰을 대하나 미운 사람 몸을 대하나 모두가 조금도 한계가 없는 광명으로 된 것이구나 하고 정견으로 공부할 때 우리의 마음자리에 도달합니다.

여러분께서 설사 게으른 분이셔서 이승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그런 진여 불성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성으로 공부해서 내 생명의 광명을 순간순간 접촉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참다운 불자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각도량
신토불이 / 이도업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었다. 인간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인자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작은 존재임을 망각하고 자연에 대해 교만한게 기고만장해 왔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로 가축은 물론 뱀, 개구리, 심지어는 굼벵이까지 싹쓸이로 살생하는데 용감했고, 생활환경을 보다 넓고 편리하게 하겠다는 욕망에서 몇십년이나 된 나무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낸 후 산등성이까지 까뭉게 아파트 세우는 데만 정신이 없었다. 몸도 깨끗이, 집도 깨끗이, 자동차도 깨끗이 해서 그 알량한 독선의 문화인이 되겠노라고(자연계의 구성인사들 쪽에서 보면 인간 중심적인 문화병은 분명 독선이다) 화학상 세제를 마구 쏟아붓고 산업용 독수(毒水)를 무차별로 흘려 보내툇강까지 모두 죽였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 된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냈고 산등성이까지 황폐화시켰으니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올 리 없고 이 땅의 자랑이었던 청정수가 솟아날 리 없다. 그 결과 이 땅의 인간들은 지금 그 과부를 톡톡히 받고 있다. 공기가 탁해져 기관지에 고통을 호소하고 식수가 오염되어 똥물을 마실 지경에 이르렀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 속에서 무차별로 살생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정복해온 인간들이 이제야 조금눈을 뜬 듯하다. 교만과 독선으로 자연계 위에 군림하려던 인간들이 신토불이(身土平二)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니 말이다. 요즈음 신문지상에 방송매체에 신토불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제야 조금 각성하기 시작한 듯하다.

신토불이, 신(身)과 토(土)가 둘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신을 인간으로, 토를 자연으로 본다면 인간과 자연이 곧 하나라는 뜻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물 한 방울이 내 몸과 같이 소중한 것이며 하루살이와 같이 단 하루를 살다가는 미물의 생명이라도 우리의 생명과 똑같이 존귀한 것임을 잊고 있었다. 그 결과 생태계를 파괴해왔고 마구잡이로 살생을 저지르는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게 되어 급기야는 살인에 해당하는 낙태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그 많은 실천윤리 중에서 ''산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는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첫 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곰곰이 음미해봐야 한다.

우리는 개척과 정복이라는 인간 중심적인 서구의 사고에 너무 깊이 빠져 있지 않았나 ㅈ네해 볼 때가되었다. 동양적인 사고 좀더 좁혀서 불교의 정신은 개척과 정복에 있지 않아 만물동근(萬物同t毆)이라는불이(平二)의 정신에서 공생 공존(共生 共存)하는 데 있다. 인간(人間)을 포함한 우주 만물이 자기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독선적이지 않고, 서로 공존하면서도 동화되어 하나로 홉수되지 않는 존재의 모습이자연계 본래의 그러해야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며, 그것이 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에서 말하는 법계 연기 (法界緣起)의 세계인 것이다.

서구 사상적인 안경과 잣대로 자연계의 모습을 재려했던 오류에서 벗어나 만물동군인 신토불이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 신토불이의 정신인 불교의 만물동근의 사상에 이미 있었음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것이 유감스럽긴 하지만!

 

 

 

교리강좌
진언과 주문/ 편집위원

불교에서의 주문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엄밀하게 따져 보면 결코 진실할 수가 없다 다만 진실에 가깝게 묘사될 뿐이다. 불교에서는 일찍이 언어의 이런 진상을 간파하여 인간의 모든 언어 표현을 '임시로 세워진 것' 즉 가립(假立)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애초부터 진실을 가장한 거짓된 말들도 낑 행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세속의 모든언어는여기여1 속한다. 이에 반해 성직자의 말만은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긴 성직자의 말이라도 그것이 세속에 쉽게 영합해 버릴 경우에는 오히려 속인의 거짓말보다 더한 화근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인도에서는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과 추리보다 정확하고 진실한 것을 성언(聖言)이라고 하여, 이성 언 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이 성언온 진실을 그대로 표현한 신의 계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굳이 종교적 관점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고차적인 탐구 활동에서 말은 진리를 표현하고자 한다.이런 말들이 진리 그 자체로 간주되면서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큰 위력을 발휘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말의 이러한 위력이 종교적 관점과 결부되면 어떤 특별한 말은 인간 세계를 포함한 우주에 편만해 있는 진리를 함축할 수 있으며, 그 말은 자체의 효능으로서 진리를 실제 생활에 끌어낼 수 있는 힘을 지닌다고 믿을수 있게 된다 이런 말들을 객관적인 표현으로는 '진실한말' 즉 진 실어라고칭 할수 있다 흔히 통하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주문이다.

진실어는 진실한 말을 외움으로써 상식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성취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진실 그 자제에 내재하여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 힘에 의해 지극히 한 실적인 소원을 성취코자 하는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진 실어는 일종의 주문인 것이다. 세속의 대중을 교화하기 위한 자타카(본생담)와 같은 불교의 설화 문학에서는 그러한진 실어의 효능을 설하는 예가 흔히발견된다.

예를 들어 어떤 가난한 여인이 자기의 가슴을 베어서 아이에게 먹이는 것을 본 남편은 ''이렇듯 경탄할 만한 행위는 아직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라는 진 실어를 외침으로써 그녀의 가슴이 원래대로 회복되길 기원했는데, 그의 기원은 진 실어의 힘으로 성취되었다고 한다 또 남편으로부터 정조를 의심 받는 아내가 ''이 진실이 나를 지켜 주기를 그리고 나의 남편을 지켜 주기를 내게는 남편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으니, 이 진실을 말함으로써 남편의 병이 나을 수 있기를.''이라고 말했더니, 남편의 의심은 풀렸다고 한다.

위와 같은 진 실어는 진실 자제에 간직되어 있는 힘, 또는 소리나 언어에 내재하여 있는 신비한 힘에 대한 믿음에 기인하는 소박한 주문으로서 칼반적인 종교 감정을 이용하는 주술에 속한다 이런 주문이 불교에서도 대중 교화를 위해 수용되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주문은 세속의 주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수행의 보조 수단, 깨달음의 성취 수단, 중생 구제의 서원(誓厦頁) 등으로 승화되어 가면서 단순한 주술의 영역을 넘어 선다 이렇게 세속의 주술적 차원을 초월한 주문을 불교에서는 진언(眞言) 또는 다라니(陀羅尼)라고 한다. 따라서 ''술가가 술법을 부리는 데에 외는 글귀''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불교의 주문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진언과 다라니

'진실한 말'을 의미하는 진언은'만트라' (mantra)의 번역어이다.만트라의 본래 의미는 '생각하기 위한 수단' 즉 '사고의 수단'이다 사고의 수단이란 '말'이며, 특히 '신비한 힘을 지닌 주문'이다- 일찍이 인도에서는 제사를 집행할 때 여ㄹ]종류의 제관들이 읊는 주문 . 찬송 .영가를 만트라라고 했고, 이 만 트라는 신들까지도 주술적으로 구속하는 성스런 힘을 지닌다고 간주되었다,인도고대의 성전인 네 가지 베다는 대개가 그러한 만트라들을 집성한문헌이다.

제사를 만능으로 삼는 기존 종교(바라문교)의 관행과 사고 방식을 거부하면서 출발했던 불교는 초기에는 그러한 주문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러다가 『반야경J 등의 대승 경전에서는 기존의 주문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라니(陀羅尼)를 설하게 된다 여기서 다라니는 삼매에 깊이 도달함유로세 얻게되는 힘이다 다라니의본래 의미는 '간직함' '기억하여 잊지 않음'인데, 이런 의미의 다라니가 중국에서는 총지(騈) 또는 능지(能持)라고 번역되어 널리 통용되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통용되는 다라니는 '간직하여 기역함' 또는 '기억하여 잊지 않도록 하는 능력'을 뜻한다 무엇을 기억하여 잊지 않는가? 부처님이 깨달은 법 즉 진리를 바르게 보전하고 그 진리를 설명한 말씀을 바르게 기억하여 항상 잊지 않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진리를 설한 말씀이나 경전을 간직하여 기의 하고 잊지 않도록 하는것, 또는 그러한 능력이 다라니 이 이런 다라니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후렴으로 반복하는 '반야바라밀다 주' 이다. 원어대로 발음하면''가테 가데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이고, 그 의미는 피안에 완전히 도달하면 깨달음이 있으니 축복하라는 것이지만, 이 다라니를독송하는 데서는 원래의 발음이나 의미는 거의 무시된다 그 이유는다라니가 앞에서 설한 진리를 모두 담고 있으므로 이 다라니를 외우는 자체가 앞에서 설한 가르침을 잊지않고 간직하게 하는 힘을 발한다는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라니 자체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다라니와 관련된 가르침을 되새겨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인도 불교 후기의 밀교에 이르면 진언(만트라)이라는 말이 다라니의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된다 진언이 그때까지 다라니가 지니고있던 의미를 획득하고서 성불의 필수적인 한 가지 수단으로 자리잡게됨으로써 진언은 불교의 교의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밀교에서는 비로자나불(大日여래)이 스스로 내적으로 증 득한 경지가 진언과 무드라(印契)와 만다라로 설해졌다고 하고, 이 세 가지 비밀의 표지를 이치대로 생각하여 명상함으로써 대일여래와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설한다 이것이 즉신성불(卽身成羚)이다 그런데 이 경우, 진언은 대일여래의 말씀이라는 비밀을 표현하는 언어로 간주된다

대숭불교의 여러 경전들에서는 다라니 또는 '다라니 문(門)' 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고, 밀교 경전에서는 만트라(진언)라는 말이 정착된 이유는 만트라가 즉 신성불의 한 가지 수단이라는 점 외에, 밀교에 이르러 비로소 인도 민간 신앙의 숭배대상들이 대일여래의 만신 전 속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때 불교 이전의 인도 사상 속에정착되어 있었던 '만트라' 라는 말이 근원이 되어, 불교 특유의 의의를 지닌 '다라니' 라는 말이 밀교에서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진언 다라니'라는 말이 통용된다. 이 말은 '진언을 다라니로 삼는 것'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라니는 원래 수행자가 마음의 산란을 방지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교법이나 교리를 잊지 않고 간직하도록 사용된 주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진언 또는 다라니는 말이 지니고 있는 '존재 또는 진실 환기의 효능'을기대하면서 나아가서는 사물이나 현상을 지배하길 기대하는 진실어(즉주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주문은 외부의사 물이나 현상을 지배하는 불가사의한 초자 연혁의 측면보다 진실한 가르침의 환기와 간직이라는 측면이 중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경전의 세계
약사경 / 편집위원

어떠한 종교라도 이 인간의 세상에서 그것이 신앙될 때에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인 안심입명(安毛金命)이 지대한 과제가 되는 것 같다. 즉 마음에 갈등이 없으면 하루를 사는 것도 그리 부담감이 없지만, 깊이 신앙하지 않아서 확신이 부족하면 오히려 머리만 무겁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서 생활에도 자신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만이 쌓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젓한 생활자세가 종교인에게는 필요한데 지은 업이 많기 때문에 악몽의 나날이 계속된다고볼수있다.

이와 같은 종교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의 설화나 비유 등을 들어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소개하는 약사경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한경전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대의 왕으로써 중생들의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교화하신 것이 그의 본연의 임무였기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끝없는 불 세계를 지나면 깨끗한 나라가 있는데, 이 세계의 부처님을 약사유리광야래 (藥師瑠璃光如來)라고 하며 , 그는 보살도를 행할 때에 12가지의 큰 원을 일으켜 많은 중생들이 구제될 곳을 얻게 하였다...'로 시작되는 이 경전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형상으로서 큰 연화 위에 있으면서 왼손에는 약병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맺고 있는데, 이는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중생들의 질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연장하여 주며, 재난을 소멸시켜 주고 의복과 음식 등을 만족게 하여 주는 한편으로 부처님의 복덕과 지혜를 닦아 무상보리의묘과를 증 득할 수 있도록 함을 표현한 것이다.이 경의 본명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瑠璃光如來本塚a功德系墾)으로써 현존하는 한 역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 나라의 달마급다가 번역한 '불설약사여래본원경' (1권)이 있고,둘째는 당 나라의 현장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1권)과 역시 당의 의정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2권)이 그것이다.여기에서 달마급다의 것은 12대원을 먼저 열거하고 이어서 이 경의 공덕과 위력을설했으며, 유暴분에서는 12신장과 야차신 등이 삼보에 귀의한 내용을 실었다. 현장의 것에서는 위의 것과 그 내용이 비슷한데, 다른 것은 일찍이 약ㅅ배래가 아득한 옛날에 보살 행을 닦은 공덕으로 성불하여 일체중생의 병고를 구제하게 되었다는 요지를 밝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의정의 것에서는 앞의 것들과는 달리 서부에서 8대원을 발원한 것을 볼 수있는데, 이는 문수보살도 보살도를 수행할 때에 역시 8대원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으며, 정종 분에서는 7불이 각각 4에서 12대원까지를 서원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유통분에서는 앞의 것들과 같이 12신장들이 이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들을 수호할 것을 서원한 내용은 같으나 단명과 병고 혹은 횡사 등 일체중생들의 고뇌를 없애줄다라니주(陀羅尼呪)를 읊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다시 말하자면 이 경에서 약사(藥師)란 의사 등이 그러하듯이 부처님은 사람들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 독심과 모든 고통스러운 마음을 소멸시켜 주고, 자비희사(慈悲眷捨)의 사무양심과 육 바라밀의 보살 행을 닦도록 가르쳐주므로 이를 약사에 비유한 것이며, 유리(瑠璃)는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보배이듯이 마음의 본체를 밝혀주므로 이에 비유한 것이며, 광(光)은 물론 어둠을 없애주는 지혜 그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경을 수지하고 지성으로 독송하면 모든 부처님의 경전이 그러하듯이 절대적으로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여기에서 발원되는 12대원은 약사여래만의 서원이 아니라 병고와 죽음에 직면한 모든 중생들이 살아 있을 때에 마음 속에 늘 간직해서 잊지 말아야 할 염원들이라고 여겨지는 내용들이다. 말하자면 각 개인이 항상 명심해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할 덕목들이다. 그래야만 병고와 두려움 등이 없는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것이다.

12대원의 내용을 보면, 첫째로 자신이 성불했을 때에는 그 나라에 태어나는 모든 중생들도 자기와 같이 원만한 상호를 구속할 것을 바랐으며, 둘째는 깨달아 유리처럼 투명한 일월이 되어 중생들을 비쳐주고, 셋째로 방편과 지혜로 중생들의 생활용품이 부족하지 않게 하고, 셋째로 삿된 행위를 하는 중생들을 올바른 곳으로 안내하며, 다섯째로 계를 지니고 생활케 하며, 여섯째로 이래의 명호를 자극으로 부르면 불구자도 완치될 것이며, 일곱 번째로 병고잖아 빈궁한 사람도 호명하면 안락을 얻게 될 것이고, 여덟째 여인도 남자로 태어날 수 있고, 아홉째 악견이 없어지고 정견이 구족하며, 열 번째 난리 등을 당했을 때에 벗어날 수 있고, 열한 번째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 이를 벗어날 수 있고, 끝으로 열두 번째는 약사여래의 명호를 자극으로 부르면 가난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비단 약사여래만의 서원일 수없는 것은, 자기의 구원은 자기에게 있다는 자력종교인 불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더러 가는 길이 늦더라도 먼 길임을 생각해서 차분하게 자기 일에 힘쓸 것이며, 남을 내 몸 같이 먼저 염려하는 자비심이 생활화되어야만 이 세상의 병고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각성시킨 경전이 약사여래 경인 것이다.

 

 

 

불심의 창
맑고 향기롭게 보낸 하계 수련대회 / 안재봉

6월의 넷째 주 금요일.

동국의 한 가족이 된 신규 교직원 선생님들을 포함한 불자 40여 명은 하계 교직원 수련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정각원 앞에모였다.

마침 아침부터 시작된 월드컵축구시합 독일과의 경기 때문에 예정된 시간보다 집합시간이 늦어 출발이 지연되었다.여름의 문턱에 선 날씨는 등줄기에서 땀을 흘러내리게 하였지만 냉방장치가 돼 있는 학교버스에 몸을싣고곧더위를 잊게 되었다.

일상의 잡무와 걱정 그리고 도심의 매연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연의 품을 향해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흔쾌하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정각원장보광스님께서 일정과 함께 수련기간중지키야 할 사항을 간곡히 당부하셨다.

이번 수련회 장소가 이사장님께서 주지로 계신 직지사로 많은 신도와 외부탓1이 출입하므로 교직원들의 언행에 무척 신경이 쓰이시는 듯 하다.

망향휴게소에 들러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맛있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보니 넉넉히 준비해 간 도시락이 남아 성 춘화 보살이 휴게소에서 일하시는 분들께 공양 보시를 하는 마음이 다사롭다.

뿌듯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 계속 달리니 오후 1시 20분경 목적지인 直指寺에 도착하였다.봉장하고 깔끔하게 단장된 일주문을 지나 숲사이로 들어서니 말로만 듣던 거창한 국제회의장 건물과 연이어 선방과 수련장으로 쓰이는 법당, 요사체,대웅전이 눈앞에 나타난다.차에서 내리니 경주 식구들은 이미 도착하여 우리가 환영을 받는 격이 되었다.

반갑게 11사를 나눈 후 2층 숙소에 방을 배정받고 짐을 정리한후 3층 법당에 모여 결재 식을 마친 후 3박4일간의 일정안내와 불교 기본의식에 대한설명을 정각원장님으로부터 듣고 양캠퍼스의 법사님과 실수를 맡고 계신 이상섭 스님의 주관하에 합장, 참배, 예불 등 기본의식을 수련하였다.

의식실수 후 직지사 수련원장으로 계신 이앙길 법사님으로부터 직지사의 유래와 현황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직지사는 불교 전래 초기인 삼국시대에 이미 그터를 잡아 1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라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식의 국제회의장과 경내시설물 둥 불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많은 기업과 정기단체에서 수련장으로 직지사를 찾는다는 말씀에 불교의 사회활동 참여 확대라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사의 풍경이란 풍유에 퇴락한 기와지붕 위에 듬성듬성 돋아난 풀 포기 하며 퇴색된 단청, 고즈넉한 풍경소리가 어우러지는 산사를 연상하게 되어 시멘트로 단장된 말끔한 모습의 사찰은 낯선 느낌을 안겨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좋은 말씀과 푸른숲, 시원한 바람도 좋지만 저녁공양시간은 즐겁지않을 수 없다.

특히 신선한 야채와 산나물을 맛깔스럽게 장만ㅎ배 차린 상은 군침을 돌게 한다.

몇년 전 군종후보생 하계수련회 때 봉선사에서 경험했던 발우공양의 곤혹스러움 때문에 절집에서의 공양에 은근히 걱정스러움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요즘같이 온갖 산업폐기물과 생활쓰레기로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오염 문제를 생각해 볼 때발우공양이야말로 자원의 절약과 자연의 보호를 수십 세기 전에 내다본 불교의 예지가 아닌가 싶다.

맛있게 저녁공양을 마치고 잠시 쉰후다시 법당에 모여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 갔다.정각원장님과 노교수님들을 필두로 수련에 참가한 80여 명의대중이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오체투지 하며 무아의 경지에 드는 108참회의 시간이었다.스님들은 108배 , 1080배 ,3000배를 통하여 번뇌 망상을 씻어내고 무아의 경지에 드는 정진의 수단으로 삼는다는데 평소 불규칙한 생활과 운동부족으로 허약해진 우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중 앞에서 소리없 이 참배하는 원장님과법사님, 그리고 정각원 조교 스님의 기계적인 몸놀림을 따르기에 바빴다.

10배, 20배, 40배....

휫수가 늘어갈수록 머릿속은 텅 비고 오직 스님의 죽비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뇌리를 때리는 가운데 서울을 떠나올 때 놓지 못했던 상념들도 하나, 둘씩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이것이 108참회의 묘미던가? 어느 순간 이어지던 죽비 소리가 뚝멎 으며 여기저기서 긴 한숨과 함께 숨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법당안은 후끈한 열기와 진한 땀내음으로 가득했으나 몸과 마음은 개운하다.

매일 108참회를 통ㅎ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마감하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신앙생활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데도 좀더 적극적이고 성실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땀을 식힌 후 이사장큰스님을 모시고 설법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큰 스님께서는 전언을 통해 우리들이 108참회 한 것을 알고 계셔 격려의 말씀과 함께 불교란 지적경험을 통하여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부단한 참선수행을 통ㅎ때 혜안으로 우주만 물의 이치를 직시ㅎ배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해주셨다.

설법이 끝난 후 우리는 빙 둘러앉아 싱싱한 수박과 참외로 갈증과 출출함을 달래며 각자의 소개와 수련회에 참가한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한분 한 분 돌아가면서 본인 소개를 하고 소감을 듬는 가운데 산사의 밤은 깊어가고 순서가 끝났을 때 내일을 위해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에 들었다.

 

문득 잠결에 들리는 법고 소리에 눈을 뜨니 사방은 캄캄한데 벌써 새벽예불 시간인가 보다,시계를 보니 03:30분.

한방에 계신 임영순, 임규빈 부장님과허찬 선생님은 벌써 일어나셔서 세면 준비를 하신다.세면을끝내고 법당에 드니 어제의 피로도 잊은 채 빼곡이 자리를 잡은 식구들의 결의가 대단하다-

새벽예불을 드리고 다시 108참회와 참선의 시간.

엊저녁 108참회로 휘청거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168배를 하고 나니 힘들기는 해도 근육이 풀리며 정신도 맑아진다.

좌선을 마치고 나니 조공시간까지는 아직 일러 주변 청소를 간단히 마치고 부족한 수면에 아침잠에 대한 유혹이 일었으나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경행과의 이 원조 교수와 법당 옆에 자리한 건물을 구경하다 이 양길 원장님의 거처에 들러 손수 끓여주신 녹차를 마시며 말씀을 들었다.

요즘은 출가하여 수행하고자하는 스님도 적고 절 살림을 도와 주는 보살이나 공양주도 많지 않아 큰 사찰은 살림살이가 쉽지 않다는 말씀이다.

사찰운영도 이제는 스님들이 직접 하기보단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야 할때가되었나보다.

조공 후 경주 정각원장님의 의상조사법 성게에 대한 설법과 교원대 김상현 교수님의 ''원효와 그 역사적 위치''라는 주제의 강의가 있었다.

중식 후에는 혜화전문 출신으로 유식학의 대가이신 직지사소실 관용 큰 스님을 친견하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큰 스님께서는 직지사에서 홀려다 보이는 산중턱 암자에 기거하시면서 속세와의 접촉을 끊고 오직 수행정전에만 전념하시는데 정각원장님들의 특칭으로 우리의 친견을 하략해 주셨단다-

직지사를 출발하여 20여 분 후임자에 도착하니 선학과를 졸업하셨다는 주지스님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셨다.암자에는 주지스님 이외 본교출신 스님 두 분이 수행중에 있어 오랜만에 만나보는 감회가새로웠다.

큰 스님은 암자에서 좀 떨어진 정자에 거처를 정하고 계셨다.사방이 탁 트인 정자에는 간단한 생활도구 몇 가지가 있었고 정자 앞에서는 맑은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화한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는 큰 스님은 8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직지사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 그리고 불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이사장님의 불사에 기울이신 노고에 치하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경주 정각원장님께서 한말씀청하시자 '내가 뭐 아는 게 있다고' 하시면서도 기꺼이 화엄경에 대하여 명쾌한 해석의 말씀과 정자 기둥마다 쓰어진 글귀에 대한 풀이도 해주시면서''이곳까지 왔으니 대접할 것은 없으나 찐 감자라도 들면서 쉬어서들 가라-고 하신다.

우리는 합장하여 인사드린 뒤 암자로 내려왔다, 주지스님께서 어느새 준비하셨는지 찐감 자와 수박을 가득 담은 쟁반을 내오시며 권하신다. 우리는 둘러 앉아 감사한 마음으로 찐 감자와 수박을 맛있게 먹었다. 별미였으나 이 높은 곳까지 음식거리를 가지고 올라오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스님들의 귀한 때꺼리를 축낸 미안함이 동시에 일어났다.

저녁공양후에는 다시 108참회그리고 송석구 부총장님의 특강이 있었는데 부총장님도108참회에 동참하신 후 땀을 닦으시며 곧바로 강의에 들어가셨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마홈에 따라 생멸하므로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보람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하다''는말씀이셨다.

'일체유심조' 라고 마음먹기에 따라 삼라만상이 달라 보임을 알면서도 이 마음을 다스리기가 그리 어려운 것인가?

'맑고 향기롭게' 라는 이번 수련대회의 주제처럼 청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이야말로 진한 향기를 발하는 게 아닐까?

낮에 뵈었던 관용스님의 정갈하고 온화한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특강 후 대중공양시간에 소감을 들어보니 한결같이 108참회의 어려움과 끝난 후의 개운함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이번 수련회의 백미는 역시 108참회가 아니었나 싶다.

도시생활에 찌든 몸과 마음을 땀으로 말끔히 씻어내고 무심 청정케 함으로써 솔솔 향내가 나도록 한 것이 정각원에서 계획한 수련의 진의가 아닌가 생각된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에 세심한 배려를 해주신 정각원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전등이야기
이 손안에 있소이다 /  편집부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있는 TV드라마중 凌明會' 라고 하는 사극이 있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적극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한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젊었을 때 그는 이 세상의무든 이치가 자신의 손안에 있다고 여기면서 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늙어가면서 그의 흉내를 그대로 낸 젊은 세대에게 밀리고 말게 된다.세속적인 명예, 권력, 부 등은 한 손에 있다가 언제 떠날는지 모른다. 그러한 것이 자신의 손안에 있을 때에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諷下無人으로 살다가 하루 아침에 떠나고 나면 허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것이다. 이러한 것이 어찌 세속뿐이겠는가?

(碧廳) 제97則의 콸竇禪師(980-1052)의 頌에 보면 다음과 같은 詩가 있다.

''귀한 보배가 손안에 있으니(明珠在掌) 有功者가 있으면賞으로 주리 라(有功者賞)- 고하였다. 참으로 귀중한 보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손안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껏 희롱할 수 있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이 보배는 누가 나에게 쥐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구해왔다고 한다면 또 언젠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고말 것이다. 그러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그러할 염려는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자신에게 이러한 보배가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아예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손안에 있는 보배는 알지도 못하고 남의 주머니에 있는 것만 탐을 낸다. 자신의 것이 남의 것보다 훨씬 귀중하건만 보잘 것 없는 남의 것에 대ㅎ쪄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자신의 손안에 남의 것을 넣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다가 일시적으로 넣었다 하더라도 그때부터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死生縯으로 살아간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남의 것을 빼앗지만, 그 후부터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최초의 약속은 空勺으로 끝나고 만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오래간다면 역사 앞에 준엄한 심판을 받은 韓明會의 꼴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석가세존은 우리들의 손안에 있는 보배를 바로 가르쳐 주셨다.  i堅槃經)에서는「一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셨고, 다른 경전에서는 如來藏,戴智慧라고도 하셨다. 내 손안에 있는 般若智慧의 보배를 찾았을 때 우리는 영원히 풍요하게 살 수 있으며, 미망에서 벗어나 대 광명 속에서 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성취하였을 때 그야말로 가장 큰 공로자가 되어 최상의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심기일전하여 남의 보배를 넘보지 말고 자신의 손안에 있는 영원한 보배를 찾자.

 

 

 

열린마당
자연이 건강해야 인간도 건강하다 / 황옥자 (경주캠퍼스 불교아동학과 교수)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흘, 배고픔, 갈증, 수면휴식과 같은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야만 한다. 일단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면 인간은 그 이상의 다른 욕구에 관심을 가지게되는데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기를 희망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속한다.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은 오랫동안 인류의 꿈이었고 소망이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오래오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건강에 관련된 정보나 상품들이 유난히 인기가 있고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때문이다.그러나 제아무리 최첨단의 과학적 방법이나 기술에 의해 제조된 건강상품들이라 할지라도 자연적인 것, 천연의 순수함을 지닌 것만큼 가치를 인정받지못한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연적인 것, 우리가 항상 가까이 할 수 있는 천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루에도 여러 번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자연과 같거나, 자연과 거의 비슷하다라는 의미로 인위적인것. 가공적인 것을 배제한다.매우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생활이 각종 산업시설에 노출되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 누릴수록 천연 그대로의 자연물을 더욱 그리워 하고요 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을 멀리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11간의 몸이 지수화풍(迪水火風)의 4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봄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둘이 아닌 하나의 근원으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생명은 곧 나의 생명이라는 불교의 자연관을 형성한다.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은 서로 뗄 수 없는 상호직인 것이고 그 뿌리를 같이 한다고 본 것이다.이것은 서양에서 만물을 선의창조로 보는 자연관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의 질서나 규칙을 따르는 것은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삶을 순리로 해결해 간다는 지혀대롭고 현명한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인위적인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을 찾는다.산이나 들판에서 우리는 무한한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자연을 만끽할 수가 있다. 이 배 느끼는 안정감, 평안함, 즐거움은 도시에서 느끼는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과 자연의 순수한 만남 속에서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마주하고, 호흡하며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연과 접촉함으로써 얻어진 에너지는 인간에게 어떤 부작용도 없으며 경제적인 부담을 염려할 필요도 없어 그 어느 영양제 보다도 경제적이고 우수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의 공원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각광받는 자연공간이다. 흙보다는 콘크리트에 익숙하고, 숭늉보다는 커피에 길들어진 도시인들이 삭막하고 메마른 콘크리트를 잠시 벗어나 손쉽고 부담없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 경주에도 소나무숲이 울창한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이 공원 안에는 공설운동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기도 하는 곳이다. 그러나 더욱 이 공원이 유명한 까닭은 특히 새벽 산책이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기 때문이다.내가 처음 이 황성공원을 찾은 것은2년전, 그러니까 이 공원 근처로 집을 옮긴 해 가을부터이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건강의 이상으로 내과병원 문을 두드린 나에게 의사선생님은 적당한 운동을 권장하였다.t不는 그 지시에 따라 이 공원을 선택하여 찾게 되었고 지금까지 즐겨 찾는 단골이 되었다.하지만 공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나의 심정은 몹시도 비참하였고 슬픔과 두려움으로 가득하였기에 공원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산책하기 보다는 의무적인 방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공원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산책하고 달리고 뒤로 걷는 등 아침운동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나무, 파이란 하늘, 풀, 이끼까지도 사랑의 눈,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매일 만t不는 사람들과의 가벼운 인사 한마디도 정겹다.-일찍 나오셨습니다.'' -건강하세요.-

서로의 마음을 열고 따뜻하고 훈훈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말들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선과 악, 미와 추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울창하게 잘 자란 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이 공원 안에도 혹사 당해 상처를 가슴에 안고 자라는 나무들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소나무와 도토리나무가 유난히 많은 이 공원은 가을이면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그러나 믿음직스럽게 성장한 나무마다 대접 만한 크기부터 함지박 만한 크기까지의 구멍들이 어김없이 눈에 띈다.그리고 이 함몰된 구멍들은 나무의 수난의 역사를 증명하듯 비틀리고 퇴색되어 있다. 어떤 나무는 구멍이 길게 늘어져 있어 어린아이가 그 속에 들어가 놀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사람들이 구겨넣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기도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구멍은 도토리를 따려는 사람들이 수십 년에 걸쳐 돌멩이질한결과였다.

도토리는 익으면 떨어지게 되어 있다. 나무를 매질하여 떨어뜨린 것은 아직은 덜 익거나,떨어질 때가 안된 것일게다. 우리가 국v1학교 시절 소풍 가시보물찾기 하였던 것처럼, 떨어진 도토리를 찾아다니는 것도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다. 부모의 모범적인 행동은 어린 자녀에게는 그대로 현장교육이 된다.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건전한 시민 의식을 심어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공원의 아름답고 울창한 나무숲은 사람들에게 맑은 공기를선사한다. 만일 공원에 나무가 없다면 그 곳은 이미 공원이 아닌 빈터가 된다. 빈터는 자동차를 주차하기에는 좋은 장소일지 몰라도 자연을 호흡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곳은 아니다.나무가 울창한 숲은 각양각색의 새들이 지저귄다. 그뿐 인가다람쥐의 놀란 모습, 풀벌레의 가냘픈 날갯짓도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자연이 파괴된 공원은 인간을 멸망시킨다. 자연의 생명이 곧 인간의 생명이듯 자연의 손상은 바로 우리의 미래 생활을 어둡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자만심이요, 무명(無明)의 탓이다. 자연은 말이 없지만 행동으로 보여준다. 자연은 언제까지나 인간에게 베풀기만 하는 보살 행을 취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애게 무례하고 겸손하지 않을 때 자연은 인간을 거부하게 될것이다.

자연을 가꾸고 보전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자연이 건강하면 인간도 건강하고, 자연이 병들면 인간도 병든다는 이치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애게 거역하고 겸손하지 않은 탓으로 쇠약해진 육체는 자연의 에너지로 치유해야 한다. 푸른 나무, 녹색의 숲은 인간의 건강과 장수를 도와주는 동반자라 할 수 있다.가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가을이 다가올수록 도토리나무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익어간다. 올해는 이 나무들에게지 발 수난이 없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고 빌어본다.

 

 

 

열린마당
우리도 잊지 못하는 바다 /  한정호 (고고미술학과 조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특정한 날을 택하여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있다. 그 가장 작은 단위는 빛과 어둠으로 대별되는 하루로 인간들은 대자연의 섭리에서 비롯된 하루를 바탕으로 일주일, 한달, 일년을 만들어 내고고 시작을 지난 일을 반성하고 새로운 일들을 설계하는 생활의 안전장치로 활용해 왔다. 이처럼 편리한 문명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세시 (歲時)에 둔감하여 무계획의 계획으로 일관하는 필자에게도 작심의 시간이었으니 바로 매학기 시작과 더불어 갖는 동해구(東海口) 도보답사이다. 학부생활의 반을 넘긴 어느 봄날 우현(友玄) 고유섭 선생의 글에 인도되어 찾였던 동해고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일출을 뒤로 하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에 마주섰을 때는 낀 어스름 저녁의 눈물겨웠던 감동, 여행객들이 모두 떠난 저녁 조용한 산사로 변한 석굴암의 자태는 나의 피로를 일소했고 그 배의 느낌은 나로선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대체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라 호기심을 갖고 묻는 이에게는 다음 번에 동행할 것을 권했다. 이렇게 시작된 동해고 도보답사가 이번으로 다섯 번째를 맞았다. 시일은 3월 셋째 주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2학기에는 문무대왕의 승하 일인 음력 7월 1일이다. 여정은 민박 촌에서 1박 후 새벽에 일어나 대왕암의 일출을 보고 출발, 자칼발과 산길을 걸어 석굴암을 거쳐 불국사에 이르는 쉽지 않은 행군이다.

3월 18일 금요일, 출발에 앞서 동행 희망자가 많아 걱정이 앞서더니 막상 출발시간에 임박해서 나타난 인원은 불과 3명, 모두다 겁없는 신입생들이다. 특히 예년과 달리 두 여학생이 따라 나서 새로운 걱정이 뒤따른다, 한번 동행한 남자들 중에는 두 번 다시 가겠다는 이가 없었다는 엄포에도 막무가내여서 무책임을 담보로 동행을 허락하였다.

버스에 오른 후 미리 복사해온 우현 선생의  경주기행(慶갯d,l紀行)의 일절(一節))을 펼치자 이내 차는 출발하였다.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偉績)을 찾으라.-는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는 문무왕의 위 적을 찾아 떠났다. 붓황사탑, 황복사탑, 그리고 표암선생의 글에 언급된 유적을 하나하나 더듬는 동안 버스는 평활산성을 굽이돌아 동해로 향한다. 다음에이어지는 것은 암곡동의 무장사(釐簇寺), 그러나 그 밑에 원효가 주석했다는 고선사(高좋山寺)는 경주박물관에 실향민(?)이 된 석탑을 남긴 채 덕동호속의 수장사(水藏寺)로 변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옛말을 실 감세 한다. 문득 흩어지는 생각을 붙들자 어느새 차는 황룡상선을 넘어 달빛 물든 감은사탑을 스쳤다.

차를 버리자 우선 달려드는파도소리, 백사장을 더듬는 은은한 파장은 내 귀가 비록 난청이나 감지함에 어려움이 없다.코를 진동하는 짭짤한 바닷냄새와 어둠 속에 아련히 보이는 대왕암의 그림자, 그리고 바다의 풍광에 굶주린 이들의 말을 대신하는 감탄사가 우리의 동해고 입성을 깨우친다. 숙소에 당도해서 간단한 여장을 푼 후이고 바다 동해고에 숨겨진 무한한 이야기 거리의 입문을 위한 (삼국유사) 강독은 나의 짧은 한문에도 탁자를 둘러앉은 초롱초롱한 눈빛에 힘입어 막힘없이 暑낼 수 있었다.

삼경 (三更)에 이르러 바닷가로 나간다. 대왕암 전의 백사장,1940년 7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의 어느날 오후, 우현 선생이 찾았던 바로 그 백사장이다. 이곳에서 욕진왜병(鱗倭兵)을 위해 옥체 (玉體)를 불사 루던 문무왔의 정신과 만파식적의 안타까움을 까막까치(烏鵲0에게 감정을 옮겨 시를 읊고 식민지 조국지식인의 시름을 한 잔의 세욕탁진제 (洗欲韋翟塵劑)로 달래며 민족혼의 부활을 꿈꾸던 선생의 모습이 눈에어린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우리가 이곳에 섰다. 향을 파워대왕과 선생 전에 예를 올리고 모닥불을 피워 둘러앉아 이곳을 스쳐간 여러 선인들을생각한다. 불법을 받들어 호국룡이되겠다던 문무왕과 그 장례 행렬, 감은사의 창건, 만파식적을 받아든 신문왕. 저 멀리 보이는 이견 대의 그림자.... 진실로 이곳은 불교의 성지요 민족의 성지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여름이면 여행객들의 먹고마시는 환락의 장소로 변하고, 밤이면 길목을 지키고 서서 성지를 유린하는 예배당의 붉은 십자가 봄빛은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았다- 분한 마음에 술을 따라 속세의 썩은 찌꺼기를 씻어낸다.

아하! 이곳에서의 한잔 술은 우리에게도 평생에 잊지 못하는 세욕탁진제로세.

새벽 6시. 해를 맞이하기 위해 선잠을 껜다. 아직 3월이라 쌀쌀한 새벽공기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노라니 대왕암 뒤 수평선 위로 아침 태양이 불끈솟는다. TV 애국가에서나 일출을 보던 이들의 호들갑스런 환호성에 한층더 힘을 주는 모습이 새 생명의 분만을 보는 듯, 나의먈생을 보는 듯, 언제나 새로움이 동해에 물결친다.

''나의 잊지 못하는 바다" 우환 선생이 이곳에서의 느낌을 적었던 수필의 제목이자 선생의 30주기를 맞아 제자들이 건림한 기념비에 새긴 문장이다.여장을 챙기고 나서 이곳에서 간단한 발단식과 기념 촬영을 마치니 이제 이곳은 ''우리도잊지 못하는 바다''이다. 대왕암, 이견대, 감은사, 동해고 3대 유적을 차례로 답사하고 동해고를 뒤로 한다. 넓게 펼쳐진 대종천(l川)의 발원지인 석굴암을 향해 내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 뒤따르던 후배 녀석들은무에 그리 즐거운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재잘대더니 펼쳐질 험로를 깨달았는지 이내 말이 없어지고 이제는 자갈돌 밟는 사각거림과 간간이 배어나오는 신음 썩인 한숨소리 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외줄로 흐르던 시내가 두 줄기로 갈라지니 한쪽은 골굴암과 기림사로 드는길이다. 애초에 계획했던 골굴암은 무리임을 판단하고 자갈밭에 주저앉아 땀을 식히는 동안 후배 녀석은 그새를 놓치지않고 신발을 벋어 물집타진 발꿈치에 반창고를 댄다.

저멀리 토함산 중턱에 분진으로 아련한 석굴암 종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장항리를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좁아 든 시내의 맑은 물이 석굴암이 멀지않았음을 일깨운다. 물을 움켜 목을 축이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자 흘연히 길을 막는 장항리 석탑과 마주한다. 사광(斜光)을 받아 약동하는 인왕상과그 위를 층층이 누른 5층석탑은 이른 봄 고즈넉한 봄기운에 잠겨 늠름한 자태를 과시한다.한참동안 넋을 잃고 감상하는 동안 뒤따르던 후배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아 떨어진다.금당지에 우뚝 놓인 돌덩어리는 돌부처가 딛고 섰던 연꽃대좌로 돌사자가 이끼를 쓰고 숨어 있다. 이 위에 섰던 불상은 석회 물로 얼룩져 미소를 잃고 허리가 잘린 채 경주박물관 한편에 서 있다. 어려웠던 시대유리 문화재의 수난을 대변하는고 얼굴이 떠오를 때면 어김없이 이 자리를 떠나야 하기에 석탑 밑에 고이 잠든 후배들의 단잠을 깨워 짜증 썩인 얼굴 들을 뒤로 하고 산을 오른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 자석같이 발을 붙드는 가파른 산고개, 가쁜 숨은 목에 차고 입안에선 알싸한 단내가 맴돌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체념섞인 목소리 "내 다리는 기계적으로 물리적으로 오그라졌다 펴졌다" 녀석, 용케도 어제 읽었던 글귀를 기억해냈다. 그래 힘을내자. 이 마루를 홀라 서면 석굴암 문수보살이 감로수 잔을 들고 우리를 반길 것이다.

산길을 헤치고 통한 것은 석굴신작로. 끝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석굴암이 눈앞에 다가섰다. 벅찬 감격에 단숨에 내달아 석굴로 향했으나 관람객들의 방해로 기대했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분향 후 간단한 예불을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향령 (香偉, 김대성이 석굴암을 세울 때 뚜껑들을 다듬던 중 돌이 셋으로 갈라졌다. 이를 안타까이 여기다 잠든 사이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만들어 놓고 갔다. 이에 대성이 남쪽고개에 올라 향나무를 태워 천신께 공양하니 이로써 이곳을 향령이라 이름했다.一삼국유사一)에 올랐다. 향령에 서서 우리의 잊지못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가 딛고 오른 길을 돌아보는 동안어두었던 얼굴에 생기가오른다. 이제 우리의 답사를 정리해야 할시간, 향령비에 기대서서 옛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도 향를 사룬다. 힘든 길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는 매정한 선배를 불평 없이 따라와 준 재완, 은이, 정윤이가 기특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타 들어 가는 향불과 함께 했던 명상의 시간을 끝으로 하산에 임한다.

새로운 마음, 벅찬 감동을 가슴속에 새기며 산을 내려 기쁨을 담소하는 동안 새벽부터 우리를 따라오던 태양은 어느덧 선도산 낙조(仙持山 落照)를 이루었다.

 

 

 

신행단체
한방병원 불자회

부처님을 대의왕(大聲王)이라고도 한다. 어진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어 병자를 낫게 하듯이,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것에 알맞은 교법을 설ㅎ배 그 고통을 없애고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라면 의사는 몸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환자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준다는 점일 것이다.

지난 ' 92년 5월 21일 11명의 한방병원직원들이 초대회장 자영한 거사(서무과)를 중심으로 모여 설립한 부속 한방병원불자회(회장 정지친 제5내과 과장) 또한 환자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불자들의 모임이다.

불교정신에 입각ㅎ배 회원 각자의 덕과 지혜를 함양하고 나아가서 불교계의 발전 및 병원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 찐 이 모임의 3대 목적 사업은 신심 고양, 봉사 활동, 후원 활동이다.이 중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목적 사업은 역시 한방병원의 특성을 살린 의료봉사 활동이다.

이제까지 3회에 걸쳐 실시된 이 활동은 지난' 93년 9월 19일 경주시 서면 도리 도동 분교에서 84 명을진료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10월 31일 경주시 산내면 대 왕사 66명, 올해 2월 6일의 경북 예천 꽃마을의51명 진료에 이르기까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 모임에서는 경주캠퍼스 학내 동아리인 정열 응원단과 함께 소년 . 소녀 가장 돕기 활동을 벌이는 등 후원회 활동도 게을리 않고 있다.

그러나 3대 목적 사업 중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은 신심 고양 사업이다. 물론 일년에 한두 차례성지순례를 다녀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직장이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해 가며 신심을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회원들의 근무 시간이 일치하지 않아 만날 기회가 적은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또한 법당이 마련된다면 그 혜택은 한방병원불자회에게만 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괴로움에 시달리는 고달픈 환자들의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귀의처를 마련해 주는 뜻있는 일이기도 했다.

발족 당시 11명에서 34명으로 늘어난 이 모임은 이제 2학기를 새롭게 맞이하며 올 가을에는 2~3회 더 의료봉사를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성지순례와 의료봉사활동을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는 한방병원불자회의 모든 사업이 원만히 성취되기를 기원해 본다.

 

 

 

동국과 불교
불교전수학교의 개교 /  편집위원

청년 불교11들이 주동이 되어 각 황사에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앞총무원」을 설치한 것은 1921년 봄의 일이었다. 이는 30본산 연합사무소 대신 실질적인 중앙통제기관의 필요성과 함께 불교에 대한 인가 등 행정관청(총독부)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자주정신의 발로에서였다. 이에 대응하여1922년 12월에 이르러서는 30본산 연합사무소측의 본사 주지들도 전국의 사찰로부터 기금을 출자 받아 예단법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조직ㅎ배 역시 각 황사에 사무소를 두게된다.

이로써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교 . 총 양원은 대림과 갈등이 불가파하였다. 그러나 각 본사 및 그 말사에 대한 운영권과 재정권을 가지고 있는 교무원 측에 대ㅎ배 청년 승려들의 정렬과 의욕만으로 버텨온 총무원측으로서는 무한정 대림만을 계속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25년 1월에 접어들어 교 . 총 양측간에 타협이 이루어져r재단법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으로통합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런 와중에서 1922년 5월 29일 30본산주지총회에서는 일제의 중앙학림에 대한 강제 폐교의 기미暑 감1},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전제로 5개년 기한 부로 그 휴교를 결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중앙학팁 휴교 이후 교계에서는 불교 종단의 전문교육기관 설림때2 대하여 계속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 같은 사정은 r불교」지 제7호(1923년)에 실린 '조선불교의 현안을 해결하라'(五峰山人)의 글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점으로 보면 寺法 개정은 전문교육기관 살림문제에 대비하면 도리어 지엽적인 문저대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의 근본문제 뿐 아니라 불교의 생명인 完備한 전문교육기관이 없는 것은 일반 憎俗이 기실 유감으로 셩각하는 바이다. 즉 말하자면 조선불교계에 아직까지 종려 양성에 대해 시대에 적당한 불교전문학교가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조선불교의 쇠퇴를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동시에 우리 조선승려의 일대 수치가 아닌가....다년간 현안으로 되어 있는 불교청년회관 건축문제, 기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도 우선 寺法 개정과 불교 전문학교를 설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같이 여론이 아니더라도 1922년 5월의 중앙학림의 휴교에 대한 아쉬움과 전문학교로의 승격에 대한 갈망은 당시 불교인들의 골수에 사무쳤을 것이다.

재단법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외 평의원들이나 이사들도 이 점은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그들대로 고등교육기관의 실림에 대하여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교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온 힘을 이 고등교육기관의 실림에 집중시킬 사명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음에 더욱그러하였다. 중앙 교무원은 년1회 개최되는 평의원회와 평의원회에서 선출한 이사회로 구성되고,평의원회의 결의를 이사회가 집행토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불교전문학교(가칭)의 설립 원칙은1925년의 평의원회에서 확인되었고, 이에 따라 전문학교의 설립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당시 설립 준비의 진행상황을 보면, 그 첫째 사업목표는 교지의 확보였다. 이 문제는 빌려 사용하던 대지의 불하 및 새로운 대지의 매입방법으로 추진해 갔다. 즉 중앙학림 당시 사용하던 땅은 정부로부터 벌린 것이었기 때문에 부지 2,716평,건평 296평, 밭 898평과 건물 19동 158칸반과 부속물 등을 대금 14,276원 16전에 총독부로부터 1925년 11월 1일에 불하를 받았다. 이어 동년11월 M일에는 혜화동 1번지 밭 2,78判, 동 2번지 대지 55평 및 지상건물 등을 宋백작으로부터 14,221원에 매입함으로써 교지 문제는 매듭이 지어졌다.

둘째의 준비작업은 교사의 신축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1926년 6월 14일에 개최된 임시 평의원회에서 불교전문학교의 건축비, 그리고 1923년6월 천도교로부터 인수, 경영하여 오던 普成高普를 수송동으로부터 혜화동 1번지로 옮겨 세우기로 하고 그 신교사의 건축비 등을 합하여116,000원의 예산을 세웠다. 또한 이 건축비위조달 방법은 1925년도 및 26년도에 불교전문학교 건축비로 매년 1만원씩 적립한 금액과 부족액9만여원은 제1종 재산에서 이를 끌어 쓰되, 그 淳鴦방법은 수송동의 보성고보 부지 및 건물을 매각하여 그 대금수입으로 환충키로 대체적인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보성고보의 부지인 혜화동 1번지는 8,850원을 투입하여 정지 공사를 마치고,1926년 7월 24일 입찰을 통하여 낙찰액 61.300원으로 건축 착공에 돌입하였다. 또 불교전문학교 공사는 동년 12월 11일에 입찰을 하여 36,240원에 역시 보성고보의 낙찰자인 渡邊傳四郎勝M매 돌아갔다.

舊 非闕廟能요 중앙학림의 터였던 명륜동 1번지에 불교전문학교 교사가 완공된 것은 1927년 10월 27일이었다. 2층 벽돌 251평의 이 교사는 그 이듬해의 개교 이래 1950년 6월까지 수많은 학생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온 것이다.

교사의 준공에 이어 1928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대망의 학교살림 인가가 나왔다. 그러나 불교전문학교의 출현을 목메어 기다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校名이 1轍專門學校가 아니고 爺蓴♠釜飜로 인가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애당초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 원에서 학교살림인가 신청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기에 앞서 총독부와 사전 접촉한 바 있었다. 이 때 총독부측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전문학교 인가에 난색을 표하였다. 첫째, 중앙학림의 후신으로 등장 될 학교인데 중앙학림이 3 . 1운동을 전후해서 항일투사의 양성소나 다름 없었고 그 기지 역할을 했던 점을 들어 인가를 주저하였다. 그러다가 불교계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해 필요한 학교라면 곧 포교사 양성을 주안점으로 하는 것일 텐데 굳이 專門學校라고 할 필요가 없으리라는것이었다. 둘째는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은 출자액이 60만원으로 이로써 보성고 보까지 倂常한다면 재단이 약하니 증자를 하지 않는 이상전문학교의 인가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총독부 학무국 관계자의 이 같은 말을 듣고 중앙교무원칙에서는 부득이 불교전수학교로 인가 신청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쉬움을 안은 채, 인가를 얻은 지 1개월 뒤인4월 30일에 불교전수학교가 개교하였다. 어쨌든이는 6년 동안에 걸친 중앙학림의 장기 휴교 끝에 동국의 역사가 다시 이렇게 이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비유와 설화
우파구제의 구업(口業) /  편집위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

쁜 말을 한 죄는 중생으로 ㅎ배금 지옥과 축생과 아귀에 떨어지게 하고 설령 인간세상에 태어난다 해도 두 가지의 과보를얻게 되나니, 첫째는 항상 나쁜 소리를 듣는 것이요, 둘째는 말을 할 적마다 다툼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고 하쳤다.

모든 중생들 중 인간의 다툼은 거의 가다 입으로 인한 것이대부분이니,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맡을까 하노라-하는 옛 우리네 선조의 시에까지 등장한다.

 

<우파구제의 구업 (口業)>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그때 그 나라에 우파구제라는 범지(梵志: 바라문 제사장)가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배운 것이 많았으며 옛 것을 더듬어 새 것을알았다.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비고가 되기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만일 제가 비구가되어 지혜와 변제가 사리 불과 같이 되면 마음이 홉 족하겠지만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할 바에는 집으로 돌아 가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그렇게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범 지는 도(道)닦기를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부처님은 비고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은 지 백년 뒤에 저 바라문은 깊은 교화를 받아 여섯 가지 신통을 이루고 지혜가 많아져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리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아 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죽은 뒤에 보든 경장을 모두 너에게 부축하노니 그것을 받아 지니어 세상에 널리펴라.-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난이 그 법을 받들었다. 그뒤에 또 아 난이 목숨을 마치게될 적에 그의 제자 야세기에게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모든 경전을 네가 보호하고 지녀야 한다" 하고 다시 말했다 "바라다국에 구제라는 거사가있는데, 그는 우파구제(優跛毬提)라는 아들을 둘 것이다. 너는 그를 데려다 도를 닦게 하고네가목숨을 마칠 때는 너의 법을 그에게 부촉해라""아 난이 세상을 떠나자 그 이세기는 불법을 받들어 세상을 널리 교화했으므로 재도된 사람이 매우많았다. 그는 또 바라냐로 가서고 구제기사와 서로 알고 지내면서 자주 내왕했다. 첫아들을 낳아 우파구제라 했고 둘째 아들을 낳아 난타구제라 했다.0뇰세기는 아들을 하나 주 면도를 닦도록 하겠다고 청하였으나 그 거사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주지 않았다. 삼명(三明 :三神通)을 완전히 갖춘 아라한인 이세기는 사람의 됨됨이를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아이는 인연이 없음을 알고 그만 단념해 버렸다. 그 후 거사는 또 아들을 낳았다.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골상이 비범했다. 이세기가 다시 가서 출가시키기를 권하자 그 아버지는 ''아이가 아직 어리므로 심부름을 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집은 가난하므로 이 아이까지 키울 수는 없으니 좀더 자라면 드리겠습니다.' 했다. 그 아이 이름은 우파구제였으며 자라날수록 재주가 비범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자본을 대주어 가게를 보며 물건을 팔게 했다. 이세기는 장사하는 그 아이에게 자주 들러 설법을 해주었다. 또 생각을 한곳 에 모이마음을 밝히는 공부도 가르쳐 주었다. 그 방법으로 흰 돌과 검은 돌을 주면서 착한 생각이 날 때에는 흰 돌을 자리에 놓고 나쁜생각이 날 때에는 검은돌 을 놓으라고 일러주었다. 마음을 닦을수록 흰 돌이 많아지고 이렇게 하여 초과(初果)를 얻었다. 이때 그 성안에 어떤 음녀가 있었는데 종에게 꽃을 사오게 하였다. 우파구제의 가게에서 사온 꽃이 많아서 음녀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종은 그 꽃집주인은 인자하고 정직하여 넉넉히 준 것이며 그 도련님은 얼굴이 아름다워서 한번 보기만 해도 아씨가 반하실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음녀는 이 말을 듣고 청했으나 우파구제는 마음을 억제하고 가지 않았다. 그 당시 음녀는 어떤 왕가의 아들과정을 통해 왔는데 보배로 꾸민 옷이 탐이 나서 그를 죽이고 옷을 집에다 숨겼는데 탄로나손. 발과 코를 베고 무덤 사이의 높은 가지에 세워 두었다.목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우파구제는 이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갔다. 아름다울 때는 청해도 아니오고 지금의 이 꼴을 보러온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우파구제는 ''나는 색 (色)을 탐ㅎ배여기 온 것이 아니오. 그대가 가엾어서 여기에 왔소''하고 그를 위ㅎ배 네 가지의 덧없는 법을 설명했다.

''이 몸은 더러운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공(空)' 한 것이요, '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보면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고 미혹한 무리들은 망령되어 그것에 집착하고있습니다.- 음녀는 이 진리(法)를 돔고 곧 법눈(法"R)이깨끗해졌고 우파구제는 아나 함이 되었다. 이때 야세기는다시거사에게로 가서 이 아이가 장성했으니 데려가겠다고 했다.거사는 거역하지 않고 그 아들을 보내 주었다. 우파구제는 출가한 뒤 십계를 받고 사미가 되었으며, 20세가 되어서는 구족계를 받았다. 이렇게 의식을 마치자 그는 아라한의 도를 얻어 세 명 (三明)과 육통(六通)을 두루 갖추었으며 변제가 뛰어나 그의 설법은 강물이 흐르듯 이어져 나갔다. 한번은 우파구제가 대중을 모아 설법하는데 악마 파순은 첫 번째는 돈을 뿌려서 두번째는 꽃을 뿌려서 세 번째는 미녀를 동원시켜 방해하였으나 우파구제의 신통은 미녀를 백골로 만들어 버려 마왕파순이는 도망가고 대중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파구제 존지는 늘 개 한 마리가 따라다녔는데, 날마다 설법을 듣고 죽은 뒤에는 여섯 번째 하늘인천상(天上)에 태어나, 악마 파순과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화가 난 파순이 장난을 쳤으나 도리어 악마 파순이 되감기 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악마파손이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대가 늘 착한 마음을 낸다면 선연(善緣)의 공덕이 있을 것이나 늘 악한 마음만을 낸다면 악연(惡緣)의 괴로움만 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존 자가 제도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존 자의 덕을 물으니 우쾨'구제 존지는 ''나는 축생으로 있을 때에도 중생을 교화시켜 성인의 과 위를 얻게 하였거든 하물며 오늘이겠는가.''

그 내력을 물으니 -먼 옛날바라다국에 어떤 선인(仙人)이있었고 5백 명의 벽지 불이 그 곳에 살고 있었다. 이때 한 원숭이는 날마다 와서 공양하면서 그들의 위용을 친히 보았다.

그 5백의 벽지 불이 열반한 뒤법지 5백 명이 와서 해와 달을 섬기고 불을 섬겼다. 한 다리를 들고 해와 달을 보고 아침저녁으로 온몸을 불에 태퉜다. 이때고 원숭이는 다리를 든 사람울보면 곧 끌어 당겨 바로 서게하고 불에 태우는 것을 보면 곧 불을 꺼버렸다. 그런 후 원숭이는 단정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라문인 범지들은 저 회들끼리 ''저 원숭이는 우리들을 위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고 이내 몸을 바루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리어 모두 벽지 불의 도를 얻었다. 그때의 원숭이가 바로 지금의 나의 몸이다.'' "어떤 인연으로 그런 원숭이의 몸을 받으셨습니까?'존자는 말했다. ''먼 옛날 90겁전에 비바시 부처님이 나오셨고 여러 비고 들은 바라냐의 선산에서 살고 있었다. 이때 한아라한이 산꼭대기를 올라가는데 그 걸음이 아주 가볍고 빨랐다. 어떤 젊은 도인이 그것을 보고 '저 날랜 걸음걸이가 흡사 원숭이와 같구나' 했다. 그 도인은 그런 말을 한 인연으로5백생 동안 늘 원숭이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디 입(口業)을 조심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존자 우파구제가 이렇게 말할 때에 대중들 중에는 수다원의과위와 사다함의 과 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 위를 얻는 이도 있었고, 벽지 불이 될 착한 뿌리를 삼는 이도 있으며, 대승의 마음을 내는 이도 있었다.

 

 

 

일주문
말의 진실성 /  정승석 (인도철학과 교수)

수은주의 눈금으로 따진다면 올해의 여름보다 수은주를 더 높이 끌어올린 여름이 옛날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설혹 그랬다 하더라도 아스팔트 도로도 자동차도 없었고 자연스런 대기의 소통을 방해하는

공해도 없었던 그때가 올해보다 무덥게 느껴졌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에 유사 이래

 가장 무더운 여름을 겪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허풍은 아니다.

정말 지독하게 무더운 그런 여름을 경험했다는 사실도 나중에는, 어떤 혜성이 목성에 충돌하는 희유의

 천문학적 사건을 목격했다고 자랑하는 것만큼이나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같은 여름에 시끄러웠던 또 다른 이0네거리를 덤으로 끼워 넣음으로써 그 더위를 더욱 실감나게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끼워 넣을 만한 이0네거리는단연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서강대학교 총장의 주사파 관련 발언이 될 것이다.

이제 새 학기를 맞는 대학가는 그 지독한 무더위를 견뎌 낸 비결을 주고 받을 겨를도 없이 '말의 진실성'을 따지느라 한동안 술렁일 것 같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교육자의 양식이라든가 성직자의 양심이

라는 문제가 시빗거리로 따라붙을 것이다.

사실 그런 시빗거리라면 굳이 문제가 된 발언의 당사자를 초점으로 삼지 않더라도 교육자나 성직자가

된 입장에서는 항상 자신을 반성해 보게 하는 소재와 계기가 된다. 이들의 발언은 다른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다만 교육자 또는 학자의 발언은 수시로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성직자의 발언은 종교라는 울타리에 의해

 그런 도전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된다는 데에 양자의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언어가 인간 생활에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과 그것의 효용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언어가 결코 진실 자체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이로부터 우리는, 언어는 진실에 접근하는 도구일 뿐이므로 자신의 발언을 절대 진실 안 것으로 강변하거나 타인의 발언을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교훈에 입각하면 문제의 발언을 계속 고집하는 당사자와, 발설자가 성직자라는 권위를 앞세우며 그 발언을 진상 파악의 척도로 삼는 공안 당국은 모두 진실의 외곽에 있으면서도 진실을 장악했다고

도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총장 선출을 앞둔 우리 대학에서는 조만간 진실을 앞세우는 말의 성찬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발언의 진실성을 간파하는 것은 우리모두의 일이지만, 아무쪼록 자기 발언의 결과까지 스스로 검토하여 언어의 신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다. 대학 스스로가 '진실의 착각'에 빠져 버린다면, 대학은 더 이상 진리의 마지막 보루일 수가 없다.

 

 

 

불자탐방
이종찬 교수 / 편집위원

긴여름 방학 내내 무더웠던 올여름, 이제 서서히 개학을 준비하는 즈음에 마지막 더위로 뜨겁게 달아오른 인문대학 학장실에서, 한국 신시 연구에 권위가 높은 이종찬 교수님(국어국문학과)과 자리를 마주했다.

 

안넝하셨습니까? 바쁘실 텐데 이렇게 탐방에 응해 주사서 감사합니다. 특히 선사연구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셨는데 불교에 잃문하시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요?

 

이곳 동국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또 직장으로써 봉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교를 경외시 했지만 연륜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후회스러워 학자적인 양심을 가지고 불교를 섭렵하게 된 것입니다.

 

동꾹대학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에 대해말씀해주시겠니까?

 

대학에 들어오기 전 유학(懦學)을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국학계 하면 동국대학이 가장 유명했고, 그래서 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하여 교양과목 중에 불 교학 개론이나 불교 문화사를 조명기 박사님에게서 배웠는데 처음에는 불교를 알지 못하여 불교가 황당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잘 배우지 못했고 졸업 후 교직에 있다 보니 불교 공부를 안 한 것이 굉장히 후회스러웠지요.그 후 불교를 섭림하기 시작했고, 역경 원에서 은허스님이 능엄경을 번역하시게 되었는데 그 때 능엄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능엄경을 공부하면서 많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특히 능엄경 가운데 ''너희들은왜 우물을 판다고만 말하는가?왜 우물을 메운다고는 말 못하는가?- ''한 삽의 흙을 떠내면 한 삽의 메워짐이 있나니라''이 구절을 통해 사물의 현상 속에 담겨 있는 양면적 진실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말 자체가 문학적인 수식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연스럽게 전공과 불교가 접맥되게 되었지요. 강단에서도 학생들에게 불교 공부를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평소종교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규칙적으로 종교의례에 참여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항상 인간의 귀의처로써 불교밖에 없다고 믿고 있어 불교를 늘 공부하며 연구하고 있을 뿐입니다.78년 「조선고승한시선」, 85년 「한국의 선시(고려편)」, 93년에 「한국불가시문힉사론」을 저술하.여 한국 선시 연구의 권위자로 칭송되고 있는데 선시의 특징과 묘미는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 과 '시' 외 만남이 가능하냐는 문제는 그만두고 '선시'의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린다면 '선'은 선적 깨달음이 전제되어야 하고,'시'도 역시 사물의 진리를 깨달아 언어화한 것입니다. '선'은 문자를 거부하는데 시는 문자를 도구로 하지 않으면 성림되지 않습니다. 이런 두 가지 전혀 상반되는 점에도 불구하고'선'과 '시'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신비하기도합니다. 선적 깨달음을 '방' 을하든, '할'을 하든, 문자로 표현하든, 이와 마찬가지로 '시'도사물의 진리를 깨달아 그 상황에 꼭 알맞은 문자로써 표기하는 일몰일어 (一物一語)설이묍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선'과 '시' 가 만나는 것이죠.문자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극소의문 자로세 선적 사유체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신시의 특징이자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깨달음을 떠나서 애송하는 선시가 있으면 들려주실주 있는지요?

 

처음 신시를 공부할 때 직지사에서 관용 큰스님께서 '선문염송' 을 강의하신다고 하여 무작정 내려갔습니다. 그때 감명깊게 남은 것은 관용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국의 만리장성에 필적할 만한 것이 선문염송이라고 하더군요. 왜냐면 선문염송이 나오.기 이전 전혀 기록이 없던 그 방대한 것을 수집하여 정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익주 땅에서 소가 풀을 뜯으니회주 땅에서 말이 배가 터지고 천하의 의원들이 찾아오니 돼지 왼쪽다리에 뜸을 뜨라고 하더라"는

선시가 있습니다. 이 신시를 통해 시공과 사유개념을 초월하는 신시의 세계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신시란 돌연직인 단절에서 오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무엇인지 탁 자르는 듯한 경지에서 신시가 우리에게 희열을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불교문학과 국문학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시를 포함하여 불교문학과 국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쓰이는 용어가 아주 높은 차원과 낮은 차원의 계층에 있는 모든 말을 수용하고 있고 언어가 주로 대중적이어서 그것이 그대로 국문학,특히 대중문학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시와 대비해 볼때 새로운 선시의 창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도 여러 스님들이 신시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선적 사유측 잘려진 논리로써 쓴 것이 신시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신시란 어디까지나 불교적 깨달음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어야지 선적 논리만 가지고 그것을 문자화한 것을 신시라고 하면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 아닌가 봅니다.

 

93년에 수필집 "없음의 여유"를 출간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작품인지요.

 

그동안 뭔가 생각할 수 있는 내용으로 원고청탁 받은 것을 모은 것입니다. 그 제목도 시대상황을 얘기하면서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만족하지못한다면 여유가 없는 것이고,없는 가운데 여유가 있는 것이지 있는 사람은 자꾸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법이지요.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얘기, 불가의 얘기, 신시 등이 다루어져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이제까지 나와 있는 작품을 좀더 깊은 의미를 연구ㅎ배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불교공부도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탐방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람의 향기
은해사 / 편집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딛고 일어선다.'' 불일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은해사 거죠 암에서 지난날 담선법회에서동학들과 약속하였던 결사를 시작하면서 지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薏劫社文)》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씀이다.

''우리들이 아침 저녁으로 행한 행적을 돌이켜보니, 불법을 핑계 삼아 나와 남을 구별하여 구구하게 이익을 꾀하고 풍진세상의 일에 골몰하여 도를 닦지 않고 옷과 음식만을 허비해왔다. (권수정혜결사문) 이렇듯 세속적인 명리를 추구했던 당시 불교에 대한 자기 비판으로부터 시작한 정혜사(定慧社)는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계기가 되었다.

지난 3, 4월 두달, 조계사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개혁 불사의 대장정은 지눌스님이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 불교를 혁신하고자 시작했던 정혜사의맥을 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전총무원장의 지지세력이었던 은해사에 전계대화상인 일 타 큰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신 일은 지눌 스님의 말씀처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일어서" 듯이 불행한 과거를 거울삼아 개혁을 통해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은해사를 찾는 느낌은 새롭다 할 것이다.

 

창건

은해사는 신라 헌덕왔 1년(809)에 혜철국사(憲哲國師)에 의해 해안평(응癩脹平)에 창건된다. 창건 당시는 지명을 따라 해안사(多癬眼寺)라 하였다.그뒤 고려 원종11년(1270)에홍진국사(弘l國師)가 중장하고 고려 충렬왕 1년(1275)에원참 스님이 중건하는 등 여러 번의 중건과 중창을 거듭하다가 조선 명종 1년(1546)에 천교(天敎) 스님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이 절을지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은해사' 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중종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천군 불우(佛字)>조에은해사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친교 스님이 현자리로 절을 옮기기 이전부터 은해사라는 사명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격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胎室)수호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절 뒤에 위치한태실봉에 대실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은해사는 이러한 관계로 조선시대의 모진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사격을 당당히 유지할 수있었다. 그러나 헌종 13년(1847)에 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1,000여 칸에 이르는당우가 전소하기도 한다.

은해사는 홍진국사가 주석할당시에는 선교 영종의 총본산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화엄의 대강백인 영파성규(影波聖聖) 스님이 주석하여 화엄교학의 본산을 이루기도 했다.

 

백홍암

은해사의 산 내 암자로는 운부암, 거조암, 백홍암, 묘봉암,중암암, 백련암, 서운임 등이있다,

이중 백홍암은 신라 경문왕 1년(861)에 창건하였는데 당시에는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 송지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명종 1년(1546)에 지금의 사명으로 개칭하였다고한다.

이곳의 극란전은 보물 제79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의대표적인 전각이다. 정면 3칸,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인 이 건물은 내부에 삼존불을 안치한 수미단(불상을 안치한 일종의 대좌로 천 개와 더불어 장엄한 불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수미단은 장방형의 불단으로 맨 하단의 받침부와 그 위로 3단의 신부(身部), 그리고 상부 1단을 갹출한 장방형의 판으로 구성되어있다. 받침부는 정면 5칸 측면2칸으로 구획하여 안상(眼象)과 귀면(鬼面), 용이 조각 하였으며, 신부는 그 1,2단을 받침부와 동일하게 구획하여 코끼리, 사슴, 사자, 인어, 물고기,동자 개구리, 사즘, 사자, 인어 등을 꽃무늬와 더불어 장식하였다. 3단에는 궝, 봉황, 학,공작 등 조류를 조각해 놓았다.이 수미단은 수미산이 7산8해에 위치하며, 물속에 잠긴 8만유준, 물 위에 나타난 8만 유문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이 수미단은 보물 제 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 백흥암에는 아미타삼존도가 봉안되어 있는데 1897년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성행하는 아미타상존입상의 기준적이라 할 수있다.

 

운부함

운부암은  동국여지승람》에운부사로 따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본래는 독립된 대찰이었다. 실상 산문의 개조인 홍척국사(洪陟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이곳에는 보물 제 514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청동보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가 돋보이는 이 청동보살 좌상은 원나라양식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엿볼 수 있는15세기 중엽의 불상이다. 이밖에도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군도형식을 보여주는 지장보살도기 있다.

 

거조암

이 거조암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눌 스님이 주석하며 고려 신종 3년(1200)에 지금의 송광사인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옮기기까지 10여 년 동안 수행하신 곳이다.

지눌 스님의 정혜사는 종전의 선종이 교(交, 문자)를 배격한 데 반해 정(定, 선정)과 혜(慧,지혜, 교)를 아울러 닦고 직관적인 깨달음과 점차적인 수행의 결합를 지향했다. 스님의 이러한 수행방법은 교종은 물론이고 종전의 선종과도 다른 혁신적인 수행방법으로 선종과 교종의 종교적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았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자각이었으며 비판이었다. 따라서 이 정혜사는 부패한 당시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개혁하고 재건하기 위한 교두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거조암은 지눌스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보낸 곳이며 한국불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유서 깊은 곳이다.

거조암은 본래 기조사라고 불리는 큰 사찰이었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8년째 되던 1197년에 왕족과 관리를 비롯한 수백 명의 대중들이 결사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그 사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거죠 암으로 사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세가 기울어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로 짐작된다.

이곳의 영산 전은 고려 우왕원년(1375)에 건림된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3칸에 주심포 양식을 갖춘 단층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이 영산 전은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 건강법
요통(腰痛) / 김갑성 (보건소장, 한의대 부교수)

허리가 아픔으로 인하여 생활에 많은지 장을 초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허리의 중요함을 절실하게 인식할 수있다. 한의학에서도 허리는 신지부(賢之府)라 하여 성기능을 포함한 생식, 배설, 정력, 원기 등을 주관하는 신기능계(註 :한의학에서 말하는 신이란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해부학적 위치로서의 콩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의 기능적 집합체로서 예로부터 허리가 튼튼하다 함은 체력과 근력의 강건함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허리의 위치는 인체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33개의 척추뼈 중목뼈 7개, 흉추 18개 밑에 5개의 장방형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역학적으로는 상체의 거의 모든 무게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므로 일상생활에서 가장 손상되기 쉬운 부분이다.무릇 인간은 포유류과외 척추동물이기 때문에 여타의 포유류처럼 네발로 기어다니는 것이 원칙이지만 진화의 과정에서 유독 뇌가 발달한 인간은 자세역학적 본능에 의해 두발로 지탱하는 직림의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두뇌를 보호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직립자세 자체가 중력에 역행하는 자세가 되므로 일상생활에서 오는 자세의 부담이 허리에 특히 많이 집중하여 잦은 허리 병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인류의 70퍼센트 정도가 무덤에 가기 전에 한번 이상허리의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보고가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인간에게 불편을 주는 병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앉아있는 자세는 체중을 고관절이나 무릎, 발목 등 하부의 관절로 분산을 시키지 못하고 오로지 허리에서 상체의 모든 무게를 받게 되므로 특히 허리에 가장 부담을 주는 자세가 되니 오랜 정좌를 기본으로 하는 고행을 위주로 하는 불교의 스님들이나 사무직 또는 학생들은 너무 한자세로 장시간 앉아 있는 것을 피하고 허리 근육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평소에도 게을리 하여서는 안된다. 이밖에도 허리의 통증은 척추자세의 이상도 문제지만 쓸개나 위장관과 같은 소화기 질환이나 비뇨생식기와 같은 내부 장기의 병편이나 허리뼈 사이에 위치하는 추간관(디스크)에 이상이 있으면 연관통증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임상에서 허리 아픈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대체로 동의보감에는 허리 아픈 원인을 크게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니 우선 내적인 원인으로 신허(腎虛), 식적(食積),담음(痰飮) 및 습열(濕熱)을,외적인 원인으로는 어혈(瘀血), 염좌상, 풍(風), 한(寒)및 습(濕)을 주요 원인으로 설정한 이외에 정신적 요인에 의한 기(氣)요통 등이 그것이다.이러한 원인들에 대한 이론은 한의학이 문자로서 기록되어 보존되어온 지금으로부터 약이 천년 전 그 이전의 의학서인황제내경이라는 의서에 최초로요 통이라는 질병에 대한 언급에서 당시는 인체에 분포하는 경락이라는 인체 기혈순환의 통로 상에 반현되는 증상을 분류하여 경락위주의 요통원인을 규명 시도하였고, 그 이후 중국의 규나라와 원나라 때까지 여러 학자들이 지역적, 환경적 또는 지방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제각기의 관점에서 요통의 원인을 관찰 분류하였던 관계도 확고하게 정립된 이론이 없었으나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선생이 당시까지의 학자들의 이론을 정리 열 가지의 원인설도 분류함으로써 진단의 기준과 치료의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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