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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5월호 / 통권 7호 / 불기 2538(1994)년 5월 1일 발행

 

 

 

 

고승법어

나의 스승, 운허/ 월운 큰 스님

 

정각도량

누구를 위한 관심인가/ 이도업 스님

 

전등이야기

발 밑을 보라/ 편집부

 

정각논단

자타카에 담긴 보살행 이야기
/ 권은주(대원 스님)

 

교리 강좌

석가모니불과 제불/ 편집위원

 

신행단체

동국문수회/ 편집부

 

불심의 창

삼월 법회/ 송희자

 

불자탐방

문기곤 예산과장/ 편집부

 

가람의 향기

동화사/ 편집부

 

일주문

파사현정의 빛/ 조용길

 

동국과 불교

중앙 학림의 준비화 개교/ 편집위원

 

비유와 설화

복의 밭이 되는 십선계/ 편집위원

 

열린마당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이순란

 

불서산책

각해일륜/ 편집부

 

불교건강법

중풍/ 김갑성

 

정각리포트

개혁일지/ 편집부

 

 

 

고승법어
나의 스승, 운허 / 월운 큰스님

지난해 10月에 동국역경원장으로 취임하여 바로 교직원 여러분께 일일이 인사를 했어야 옳으나 서로 여의치 않던 차제에 정각원에서 법석을 마련해주셔서 상견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괴이한 행동을 많이 하던 '우불집' 이라는 스님이 있었답니다 멀리 출타했다가 밤늦게 돌아와서는절에 있는 '불총' (불이 났을 경우 치는 총)을 쳐서 대중을 다 모이게 해서는 ''노스님들이 하도 많아 일일미인사륜 할 수 없어 '불총을 쳤습니다 하고 했다는 격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덕이 부족한 제가 역경원장이 된 것은 순전히 은사이신 윤허 큰스님의 음덕입니다, 스승을 30여년 모신 공덕으로 역경원장의 소임을 맡았으니 나의 스승이신 윤허 큰스님에 대하여 말해 볼까 합니다 그래서 윤허 큰스님의 좋고 나쁜 면을 거울로 ㅎ배 여러분의 삶에 지표로 삼았으면 합니다.

고인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법을 전수ㅎ때 이어오는 것이 부자간의 정리보다 더 두펍다고 했습니다 중국 청원 행사의 5대 법손인 암두(岩頭)는 그의 스승인덕산(德山) 스님의 곁을 떠나면서 어디 가더라도 스승님을 엎지 않겠다고 하니 스승인 덕선 스님은 ''네가잊지 않겠다고 하는 말의 기준이 뭐냐.''고 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말에 '제자가 스승과 더불어 지혜가비슷하면, 스승의 법을 이었을 때 스승의 덕을 반으로 줄어들게 하고, 스승보다 지혜가 뛰어나야 겨우 스승의 전한 법을 감당할 수 있다 (智爽師齊 壟脚昞르德, 智☏얘m 方衢촉授)고 합니다 또한 '청출어람 이라고 했듯이 스승이신 윤허 큰스님의 공덕을 무너뜨리지나 않으려고 역경 분야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운허(魃) 대종사는 전주 이씨로 본명은 학수(擧朱)요 법명은 용하(故)이니 윤허는 당호가 되겠습니다.저희들에게 매양, 한 달 10일 차이 배문에 춘원 이광수의 동생(육촌 동생)이 되었다고 우스개로 말 향하시곤 했습니다 고향이 평북 정주였는데 댁은 부유했지만 춘원 선생의 집은 가난ㅎ때 윤허 스님 사랑방에서 춘원과 다른 한사람, 이렇게 세 명이 공부를 했답니다.그런데 어느 날 서당 선생님께서 밖에서 놀고 있던 학동을 불러 머리맡에 앉게 해서는 당신이 보시던 책을 넘기며 책을 보라고 했답니다. 책을 다 보고 나서 외워보라고 하니 춘원을 그 책을 전부 외웠고 다른 학생은 반쯤 외웠으며 윤허 스님 당신은 첫 장만을 겨우 외웠답니다. 그때 꼴찌를 하고는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한일합방유로 서당이 깨지고 각자 흩어져있다가십년후어떤 기회에 세 명이 모이는 일이 있어 스승을 찾아가니 스승께서 그때 외웠던 책을 다시 외워 보라고 했답니다 춘원은 10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다른 학생은 겨우 제목만 기억했으며 윤허 스님께서 첫 장을 외웠답니다. 그래서저희들이 어떤 것이 좋은 것이냐고 스님께 여쭈었더니 재주와 지속력을 겸비해야 좋은 것이지만 두 가지 다 갖출 수 없을 바에는 지속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운허 큰스님의 생애를 구분해 본다면 대략 세 가지정도로 나눌 수 있읍니다

첫째, 큰스님은 철저한 민족주의적 독립 투사였습니다 1안2년 20세 때 서당이 문을 닫자 중국으로 들어가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끄년 뉜f명하' 라는 이름을 쓰며 본국으로 들어왔으나 동지 이호원 씨가 체포되자 부득이 탈출하여 강원도 추양 군 봉 일사로 은신하였다가 경송(慶松) 선사에 의해 득도하게 되었습니다.둘째, 스님은 철저한 수행자였습니다, 유점사와 범어사에서 진응(嵐噫) 강백에게 사교를 배웠고 게운 사에서 영호(H英湖) 강백에게 대고를 배워 피 나는 수행을 했습니다 해방 후 경기 교무원장을 맡으시면서 불교 사찰과 지방 유지를 규합해 광동 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셨습니다, 6 . 25 사변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을 겪으신 후 여러 사찰을 순력(巡歷)하신후 폐허가 된 봉선사에 돌아오셔서 가람을 정비하셨습니다. 이렇듯 일제의 탄압과 6. 25동란등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해 오셨습니다.셋째, 철저한 교육. 문학가로서 역경 사업에 헌신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었고 김범린 농대 총장과 큰스님 등 3자가 모이역경을 종단의 3대 사업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고, 종단의 여러 스님들(자운, 석주, 영암, 서옹)의 지지를 받아 1964년 동국역경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에 취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역경위원은 종정이 위임하고,원장과 위원장은 농대 총장이 위임하여 해인사 소장 팔만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ㅎ배 66년에 그 첫 권이 나왔습니다. 1966-77년 국가보조금을 받아 매년 8권씩을 간행하였습니다. 80년 큰스님께서 열반하실 즈음해서는 전체 분량의 반 정도를 이뤄 냈습니다. 이렇듯 철저한 민족주의적 독립 투사로서, 수행자로서, 교육자이며 문학가로서 삶을 살다 간 윤허 큰스님의 생애를 통해서 말법(末法)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야말로 내가 가야 할 필생의 종교요, 삶으로서 굳건한 신심이 퇴색되지 않도록 정진하며 자기가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하는 신심들이 모여 '우리의 신앙'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첫째, 불자(佛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신행할 때 품위를 지킬 것이며, 또한 현실에 알맞게 계행을 잘 지켜 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부처님의 교학이 무량하여 다 배우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꼭 알아야 하겠습니다, 즉 ''내가 왜 불제자가 되었는가.''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그에 답할 수 있을 정도의 불교 교리는 알아야 합니다 불교를 몇 십 년 믿다가도 하루 아침에 다른 종교로 바꿔 버리는 이유 없는 배반을 하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면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교를 믿는 동기가 확실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스스로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갈 줄 알아야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과거 . 현재 . 미래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이형성되어야 하겠습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만을 추구하다 보면 자칫 사관이 잘못 형성되어 실패하는 수가 있습니다 어제의 일들에서 오늘의 문제를 조망하고 어제, 오늘의 전 개사들을 잘 분석 . 파악할 때 내일의 일들은 투명해 질 것입니다 불교의 이상도, 정의감도 결국 과거 , 현재 . 미래의 상관 관계성 속에서 지혜롭게 분석하고 현명하게 판단함으로써 실현해 가야 하겠습니다

 

 

 

정각도량
누구를 위한 관심인가 /  이도업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쥐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운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금(4월 10일) 벌어지고 있는 조계종단의 사태에 2천만 불자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태 그 자체의 심각성보다도'생쥐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마저 태우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염려 때문이다 총무원장의 3임을 반대하는 것이나 종단의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한껏 높이는 것은 불교를 '보다잘해 보자'고 함에 그 본뜻이 있는데 소리를 높이다 자칫 본말이 전도되어 우리 불교에 흠집이나 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사실 이번 사태를 보도하는 방송 매체나 경찰의 수사 태도에서 그와 같은 작태를 한두 가지 볼 수 있었다 평소 극중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음에도 연속극의 병실 장면에는 반도시라고 할 정도로 십자가나 마리아상을 비춰 특정 종교를 간접 선전하던 텔레비전 매체가 이번 사태를 보도함에 있어서는 폭력 장면만 연속으로 거듭 방영함으로써 확대 부각시켜 간접적으로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하는 듯했고, 스님이라는 호칭을 00 승려로 불러 우리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스님이라는 호칭은 존칭이 아니라 보통명사화되어 있는 우리말이다 빠금산골 샌님'이라 할 때의 '샌님'이 보통명사 이듯이 경허(錢虛) 스님, 경허대사라는 말은 있으나 경하 승려라는 호칭은 들어 본 일이 없다.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방송사들이 전과 달리  0 승려로 부른 저의는 무엇인가 대학교수를 어느 날 갑자기 대학 훈장으로 비하해서 부르는 격이 아닌가, 어색하기만 하다.

경찰의 수사 태도 또한 아리송하다 처음에는 범종추();t鑛) 사람들만 400여 명 이상이나 무더기로 잡아가 총무원 집행부를 신나게 해주더니 이번에는 집행부 사람들에게 현상금까지 걸어 범종 추를 고무시키고 있는 듯하다. 병 주고약주고, 약주고 병 주는격이다. 불교를'잘해 보자' 고 우리 집안 사람들끼리 언성을 좀 높이면서 대립을 했는데 왜 밖의 사람들이 우리 불교에 흠집을 내려 하는가. 타종교 집단이 우리 불교를 헐뜯고 음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황새와 조개가 물고 물리면서 싸우는 사이에 득을 보는 어부는 누구인지를 지금 우리는 깊게 성찰해야할 때다. 쥐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 삼 간을 몽땅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초가삼간이 다 타 버리면 쥐인들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생쥐 또한 생각해 볼일이다.

 

 

 

전등이야기
발 밑을 보라/ 편집부

중국 원나라의 도태(蚩參)가 편집한 20권에서 전하기를, 불감혜근(1059~1117) 선사는 어느 날 법상에 올라가서 대중들에게 법문을 하면서 "조고 각하하라" 고 하였다.

여기서 조고란 관조 고려의 준말로서 '내려다보다, 돌이켜 보다, 주의하다, 조심하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 각하란 발 밑아래, 발 등의 뜻으로 현재에 당면한 위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알기 쉽게 설명할 경우 발조심, 길 조심,아랫도리 조심, 걸음걸이 조심, 발 밑 조심'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위와 앞만 보고 정신 없이 살아가고 있다. 자신도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조차도오른다. 남들이 력어가니 나도 뛴다. 만약 력지 않으면 다튿 사람들에게 떼밀려서라도 뛰게 된다. 거기다가 위만 쳐다 본다. 아예 아래로 내리팬 생각조차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일을 위해 뛰매, 출세와 명예을 위해 위만 쳐다본다. 때로는 돈을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죽을지도 모르고 뛰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다보면 내가 걸어온 발자취들은 오점투성이이다. 또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는 땅 위를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허우적거리다가 언제,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질는지도 모른다. 험난한 길을 비틀거리면서 걷고 있으며,급류가 챘는 계곡 위 씨 나무 다리를 걷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일마나 위험 천만한 일인가.

불감 혜근 선사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발 밑을 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주의해야 한다, 때로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 쉬었다 갈 줄도 알아야 한다. 조심하고 쉬는 것보다 퇴보나 낙오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재충전0]며, 혹시나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는 것이며, 지금까지 뛰어오는 동안 잘못은 없었는지 반성하는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정신 없이 뛰다 보면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기도 하며, 쓰러지기도 한다. 다시는 못 일어나 건강을 완전히 망쳐 버릴 수도 있으며. 요절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위해 밑도 뒤도 되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뛰기만 하는 것일까, 뛰다 보니 나 자신을 잊게 되었으며 정신이 나의 몰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렇게 하고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있을까.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나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만 보고 뛰다 보면 처음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급할수록 쉬었다 가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한 번쯤 생각해 봄이 어떨까?

''도(碁矗)란 발 밑을 보는 것'이라고.

 

 

 

정각논단
자타카에 담긴 보살행 이야기 /  권은주 (경주캠퍼스 불교아동학과 교수)

가뜩이나 뒤숭숭한 세상이다. 현대가 물질만능의 시대가 되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삭막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내 살기에 바쁘니 남을 돌아보기가 힘이 들고, 남을 밟고 서야 내가시는 세상이고 보니 더군다나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되어 간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도 그 이야기는 신문 귀퉁이에 세상을 아름답게 해준 훈훈한 이야기로 자주 실리곤 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일까 아니, 분명 그렇지 않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절대 다수가 결코 전부는 될 수 없으며, 이 세상 어디에선가는 분명 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실천하고 살고 있는 고운 마음씨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 이야기 속에는 남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신념이 담겨 있을 것이고, 또 그 신념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종교의 힘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 욕심을 부리자면 그 구원의 종교가 인연과 자비, 그리고 업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믿고 싶다. 예로부터 불교는 우리 민족을 이끌어 온 근간이었으며, 정신이었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을 담은 경전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 자타카는 불타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설화집으로 본생담 혹은 본생 설화라고도 부른다. 이 자타카에는 불타가 석가족의 왕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보살로서 수많은 생애를 거듭하는 동안에 천인(天人), 국왕, 대신, 장자, 서민, 도적 등으로서 또는 코끼리, 원숭이, 토끼, 공작, 물고기 등의 동물로서 여러 생을 거치며 각종 선행을 한 547종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자타가 속에는 삼세 윤회(三世輪廻)라는불교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기론적인 인과 관계, 무아(無我) 사상, 보살의 서원에 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 무아사상에 의해 타인의 결점을 관용하고, 이러한 관용 심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면 바로 보살로서 서원을 하게 된다는 보살 행은 적극적인 이타행의 실천으로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자타카에등장하는 불타 본생신(本生身)들의 자신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비약적이고도 헌신적인 보살 행 이야기들을 소개함으로써 이를 읽는 독자들이 신앙심과 보살처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는 커다란 소망을 서원한다

 

자타카 속에서 보살의 이타적인 행동의 하나인 보시 (布繪)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설화는 '토끼의 전생'이다

 

옛날 베나레스 근처에 현명한 토끼, 원숭이, 수달, 승냥이가 살았다 이들은 각각 먹이를 구하러 나가 먹을 것을 발견하면'주인이 있는가' 하고 세 번 외치고 그래도 주인이 나타나지않으면 그것을 가지고 와 때가 되면 먹었다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하는 자자일(自恣日)에 제적천왕이 이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굶주린 노인으로 나타났다 그에게 원숭이는 열매를,수달은 생선을, 승냥이는 고기를 보시했으나, 토끼는 풀을 줄 수 없어, 풀과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이고 몸 속의 벌레를 털고 숯불에 뛰어들었다 이에 제석은 토끼의 덕행을 가상히 여겨 토끼를 구하고, 그 보시 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산을 짜서 즙을 만들어 달에 토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 보살 행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운 까닭은, 우리나라 설화 및 전래 동화에 나오는 토끼들이 예지의 동물로서 지혜로 위기를 넘긴 토끼, 악한 자를 함정에 빠뜨리는토끼, 제 꾀에 넘어간 토끼 등으로 나오는데 비하여, 자타가 속의 토끼는 자신을 보시하여기아(負m餓)에 빠진 이를 구하고 진리의 사자가 되기를 맹세하는 보살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보시하는 데도 타인으로 하여금 살생의 업을 짓지 않게 스스로 소신 공양(燒身供養)의 길을 택하고있다 이 달 속의 토끼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전통 설화에도 나타나며, 구비 동요 및 전래 가사에도 전하고 있다

고 대 인도 사람들은 달을 샤신 즉 회토(懷兎)라 했고, 중국에서는 옥토(玉兎), 한국에서는 옥토끼라고 부르는데, 이는 모두 달이 토끼를 안고 있다는 회도 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그것을 빻아 환약을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동남아 일대에서는 계수나무를 약재로 널리 쓰고 있는 것으로보아, 이 모두가 토끼의 보시 정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근원을 자타카의 토끼 본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나라와 중국 등에 불교의 토착화와 더불어 민속 설화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장재구살라 왕의 전생' 은 타인을 용서하고디 큰 사랑의 보시를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시를 좋아하는 고살라 국의 장수왕은 이웃 나라 가아시 국왕에게 침략을 당해 나라를 내주고 떠돌아 다니다가, 장수왕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가난한 한 바라문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주었다 장수왕의 아들 장생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가 아 시 국왕의 시자(툴矜)가 되어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차에 숲 속에서 피곤ㅎ때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가아시 왕을 칼로 치려 했다 그러나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편 끝이 없다 사랑으로 이를 참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가아시 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결국 가아시왕의 뉘우침을 얻어 공주를 왕비로 삼고 모두가 화평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보시를 강조하는 동시에, 장생 태자에게 심한 갈등을 검게 하여 결국에는 증오의 충동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하여 깨닫게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불교적 궁극의 해탈 세계에 도달하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때, 그 악이 소멸되고 선으로 향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또 '사라바 사슴의 전생' 예서는 곤경에 처한 국왕을 도와준 사슴에게, 왕이 은혜를 갚으려 하자 사슴은 그것을 사양하고 왕에게 널리 보시할 것을 권한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갚으면 보은은 그 당 자에게 하기 마련인데 이 설화에서는 은혜를 느낀다면 그것을 다른 중생에게 날리 베풀 것을 권한: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이렇게 자타가 속에 담긴 보시 행위는, 가장 중요한 자신의 목숨까지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내주며, 그 대가를 바라기보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방도 그로 인해 선행하기를 서원하고있다. 이것은 전래 동화에서 흔히 보이는, 선행을 베 푼 뒤에 어떤 형태이든 돌려받는 은덕을 뛰어넘어 자타(自他)가 함께 선을 이루는 진정한 선(善)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보살의 자리 이타(自利手印f邕)를 실천하는 인간상은 인간 형성 이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리 이 타의 생활은 다른 별개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행위이면서도 삶 속에서 동시 통합적으로 구현되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다시 말하면, 자기 완성은 자비로운 대타적(大他的)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출발했었는데, 가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떠맡아 가고. 결국 왕에게 가서 자신의 문제도 해결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도 해결하게 되는, 그리고 그 해결 과정에서 저절로 복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의 설화가 바로 '가마니챤다 농부의 전생' 이다

 

현명하고 지혜가 밝은 일곱 살 난 어린 임금님이 있었다. 임금님의 평판은 나라 전역에 나있었다 가마니챤다라는 정직하고 부지런한 한 농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임금님께 재판받으러 가는 도중 자신의 문제가 세 가지 더 늘어나 극한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가마니챤다는 촌장과 창부, 젊은 여자, 뱀, 사슴, 더펄새, 목신(木神), 용(龍), 고행자, 그리고 젊은 바라문의 부탁을 받는다챤다가 처음에 자신의 문제를 안고 떠날 때는 심리적으로 몹시 갈등을 느껴 결국 자살하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임금님께 재판을 받으러 가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신이 처한 문제는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찬다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흔쾌히 그들의 문제를 떠맡은 채길을 간다 즉 자신의 문제에 대한 내면적 갈등이나 고통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나타나면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챤다는 어린 임금님을 만나 자신의 문제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함께 제시했다 다른 집에서 소를 빌린 챤다가빌린 집에 되돌려 주었는데 소 주인도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다음날 소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주인은 챤다가 훔쳐 갔다고 주장한다이 이야기를 들은 임금님은 해결책으로, 찬다는 직접 소 주인 손에 소를 쥐어 주지 않았으니 소값을 지불하고, 소 주인은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하니 눈을 빼라고 판결한다 이에 소 주인은 깜짝 놀라, 소각을 받지 않겠다 말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찬다는 나머지 자신의 문제도 어린 임금의 지혜로 슬기롭게 해결한다 또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때 찬다는 마지막 사람의 문제부터 임금님께 말하고 임금님의 해결에 따라 마지막 젊은 바라문의 문제부터 해결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임금님은 챤다에게 다른 중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뱀, 사슴, 더펄새의 꿀이나 보물항아리는 챤다에게 가지라 명령한다. 왜냐하면 그 꿀이나 보물 때문에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뱀, 사슴, 더펄새의 고통은 그것들이 없어지면서 자연히 해결되고 찬다는 뜻하지 않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구제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 이 타가 동시에 구현된 것으로, 우리들에게 현대의 이기주의 사회에서 사회적인 이 타 행동을 내포한 훌륭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설화는 나선 형식(嫩黜泉形式)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림형제 편 『금머리카락 세 개 있는 도깨비, 콘도르 새J에서 문제 해결을 처음에 만난 순서대로 물어보는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사회적인 이 타 행동의 또 한 예는 생명 존중과 자기 희생이다 보살 행에서의 생명 존중과자기 희생은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본생과 현생과의 관계가 갖는 인과적 필연성이 한층 긴밀한 관계로 접속되어 있으며, 또 업보 사상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행한 행동은 연기 (鮑)의 연속성으로 인해 삼세(三世)에 걸쳐 윤회되고, 결국 자신이 책임지고 받아야만 한다는 연기의 인과성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자타카와 보살 행은 곧 인간애의 발현으로서, 보살은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깨달음을 구한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곧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곧 깨달음을 구하는 일로, 상의 상자(木닦f在不皎)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慈),비(悲), 희(喜), 사(捨)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보시,구제, 희생을 하면서 다른 사람도 함께 성불하기를 서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타카에 담긴 이러한 보살 행은 우리들에게 잊혀 졌던 그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마음 어디에선가는 조그만 소리로 항변하는 외침이 있으나, 선뜻 나서기가 두려운 사람들이 그래도 많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그 숭고한 윤리, 서로 도와야만 그리고 조금은 나를 희생해야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대타 적 인간애를 잠시 잊고 살았다면 이제는 우리, 나서서 몸소 실천해야할 때다

 

 

 

교리강좌
석가모니불과 제불(諸佛) /  편집위원

누구나가 흔히 알고 있는 부처님은 불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위대한 인물 즉 석가모니이다 우리는 그분이 위대한 자비심과 능력을 지녔다고 알고서 '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의 자비와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실현되길 희구하며 불교를 신앙한다 하지만 석가모니라는 역사적 인물은 일찍이 80세의 생애를 마치고 타계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사후, 사람들이 언제든 어디에나 계신다고 믿어 온 부처님은 누구인가 이란의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적어도 둘 이상의 부처님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석가모니부처님 이래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 과정에서 부처에 대한 관념이 뭔가 달라져 갔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석가모니 부처님 즉 석가모니불 외에 여러 부처님이 계시다는 관념이 제불(諸툴羚)이라고표현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의 제불' 이라고 표현된다 우리는 사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런 두 가지 관념으로 부처님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관념으로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교 특유의 지식에 속하고, 또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부처 관념의 변화

 

불교 신자들에게는 부처님이 불가사의하고 초인간적인 능력을 지닌 분으로 신봉된다. 그런데 부처의 본딧말인 붓다(佛陀, 약칭하여佛)의 원래 의미는 '깨달은 자 (覺者)일 뿐이므로 애초부터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를 부처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부처를 인간과는 다른 신과 같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철저히 무신론의 입장에 선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해서, 석가모니 자신이 그린생각에 빠지기 말기를 당부했다 실제 인도에서는 후대의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까진 불상이 전혀 제작되지 않았고,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하는 조각에서도 석가모니의 모습을 직접 새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부처에 대해 사람들은 좀 특별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므로, 또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의하더라도 누구든 세상의 바른 이치를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실천의 정도에는 아무래도 편집위원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고, 또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세속적인 삶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완벽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석가모니 생존시부터 '부처' 라는 말은 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고, 불제자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보통 '아라한' 이라 불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석가모니 자신도 아라한이라고 불리기도 해서, 그 당시엔 불제자들의 이상적인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입멸하여 그 육신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자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리적으로는 석가모니가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으므로 완벽한 깨달음을 실현한 것이었다 한편 일반인의 신앙에서는 석가모니의 죽음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석가모니 자신은 세상의 바른 이치인놋을 믿는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입멸한 후에는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유언했으나, 불 제지들은 부처인 석가모니의 인격을 통해 법을 신봉했으므로 석가모니는 세상에 계실 때부터 초인성음 갖춘 분이라고 보았고, 그의멸후에는 이런 경향이 한층 강화되었다. 정신적으로는 여러 가지외 특수한 능력을 갖추고, 육체적으로는 위인(大人)의 모습인 32相을 갖춘 분이라고 간주되었다.부처님의 존재는 결국 그가 깨달은 진리인 법의 영원성 .보편성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고찰되고, 이에 근거하여 부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이 발달했다 석가모니는 수명이 유한하여 육신으로는 사라졌지만 그가 설하여 남긴 가르침인 진리는 영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법신(法身)이라 칭하고, 여기에 불멸의 인격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사상이 성립했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는 육신을 취하여 이 세상에 잠시 계시다가 사라졌지만, 그 석가모니라는 육신은 무상 . 무아 .연기라는 세계의 진리를 우리 중생에게 직접 알리고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일 뿐, 원래는 진리인 법자체로서 영원히 인간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또 법의 영원성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길 석가尺니 이전의 아주 먼 옛날부터 6인의 부처님이 차례로 출현하여 법을 설하였던 것이 현 재의석가모니불에 이르렀다는 신앙이 등장했다 이것을 '과거 칠불' 이라고 하는데, 과거 불은 시대에 따라 점차 많이 상정되어 가고, 다시 미래에도 여러 부처님이 계속적으로 출현할 예정이라고 설하기에 이르렀다.

석가모니의 입멸 후 100여 년 이후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여러부파에서는 부처에 대한 고찰이부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대중부(大衆部)는 이상주의적인 입장에서 여러 부처.여래는모두 세속을 초월했으므로 전혀 번뇌가 없으며, 또한 그의 육신.위력 .수명은 한정됨이 없고 단 한마디의 말로써 일체 법을 설하고 한 찰나의 생각으로 일체 법을 완전히 파악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대중부위 이상주의적이며 초인적인 부처 관념은 대승불교에서 수용되어 한층 발전하고, 대승경전 일반에서 부처는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지혜의 빛을 갖춘 분이라고 설해지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병행하여 불교인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라한으로부터 보살 또는 부처로 바뀌어 갔다.

 

제불 관념의 의의

 

대승불교는 이런 부처 관념의 변화에 부응하면서 일어났다 부피불교 시대의 여러 부피들의 주요 관심사는 신앙의 대상인 부처가 아니라 석가모니가 깨닫고 설한 내용을 해석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부파불교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승원에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갔고, 일반 신자들은 신앙적 욕구를 불탑을 숭배하는 것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불탑 숭배는 당연히 부처님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고,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력과 구세력을 희구하기 마련이었다. 부처님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강한 염원은 드디어 불상을 제작하여 숭배하는 것으로 표출되기에이르고, 나아가서는 현재의 이 사바 세계뿐 아니라 타국 세계에도 여러 부처님이 존재한다고 명료하게 주장하는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승불교에서는 과거 . 현재 .미래에, 아울러 十方 세계의 무수한 국토에 무'수한 부처가 출현한다고 설하기에 이르렀다 중생 구제를 특히 중시했던 대승불교의 이러한 관념은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발전한 것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본래적인 부처 관념 역시 여기서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부처가 될성품(불성) 또는 종자(여래장)가있다고 하여 중생 구제의 폭과 가능성을 더욱 확대해 주었다.

결국 대승불교에서 부처는 중생을 구제할 무한의 자비를 지닌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저마다 내부에 간직한 청정한 본성이기도 하다 어느 쪽의 부처를 택할 것인가는 자신의 근기를 따를 일이지만,아무래도 의존과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을 선호하게 된 것은 사회가 복잡하게 변하면서 그만큼 인간의 심성도 쉽게 오염되고 약화된 세태의 반영일 것이다 바로 이런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려는 데에 '제불' 이라는 관념의 의의가 있을 것이며,이 점이 자비의 종교다운 불교의장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심의 창
삼원 법회 /  송희자 (이과대 수학과 교수)

지난 3월 26일 동국대학교불자교수회에서는 월례 법회를 원주의 치악산 구룡사에서가졌다. 이번 법회는 겨울 방학 후 새 학기를 맞아서 갖는 첫 번째 법회이기 때문인지 회원 교수들이 많이 동참하여서 오랜만에 즐거운 모임이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목적지를 정했던 모양인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구룡사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구룡사는 작년에도 한번 간임이 있기 때문에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월례 정기 법회에는 될 수있 으면 빠지지 않으려는 평소의 내 생각과세 학기 첫 법회라는 이유 때문에 동참했는데 이번 법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일행들은 입을 모아 기뻐할 정도였고 내 자신도 큰 환희 심을 맛보았던 법회로서 지금도 정말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년만에 구룡사를 다시 찾아보니 절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매우 정돈되고 깨끗해져서 기분이 좋았으며 특히 이틀 전에 내렸던 봄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봄 기운이 완연히 감돌면서도 산들은 하얗게 단장을 하고 있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도량이 작년과는 전혀 다르게 면모가 일신되어 엄숙하고도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주지스님이 새로 오신 후에 절 안을 문자 그대로 청정무하예로 가그족신때문이라고 한다. 공양을 대접받고 예불과 축원을 마치자 출타하셨던 주지 스님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부랴부랴돌아오셨다. 향긋하고도 달콤한 오향차를 마시면서 주지 스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우리 학교의 재단 감사를 맡고 계신다는 삼지스님께서 얼마나 겸손하신지 참 훌륭한 스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어절로 났고 저런 주지 스님이 오셨으니까 도량이 일신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우리 불자 교수회의 상임 지도법사이신 법산 스님께서는 삼지 스님과 오대산에서 탄 허 큰스님을 모시고 같이 공부한 토반이라고 하시면서탄허 큰스님께서 ''국제 신사는 삼지야,''하셨다는 에피소드를 털어 놓으셨다. 과연 큰스님다운 혜안이라고 생각되었다. 구룡사는절 자체는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고 또6. 25사변 때 완전소실되다시피 하여 현존 건물들은 모두가 새 건물들이라 오랜 고찰이 풍기는 예스러운 분위기는 느낄 수 없지만 절 자체가 원래오래되었고(신라 때 의상대사께서 창건했다고 함) 치악산이란 명산의 품속에 자리잡고 있어 유명한 산사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 특히 구룡사는 우리 나라 사람이면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보은의 전설의무대여서 그 어느 명산 대찰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 낯익은절이다. 즉 까치가 자기 생명의 은인에게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았다는 전설의 고장이 바로 이 구룡사라고 한다

 옛날 한 선비가 길을 가다가 구렁이가 까치를 잡아 삼키려는 것을 보고서 구렁이를 죽여까지를 살려 주었다 그날 밤 그나 그네가 산중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과수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밤이 깊은지라 어쩔 수 없이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고 밤에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뜨니 큰 구렁이가사기를 칭칭 감고 있지 않는가 질 겁을 하고 파랗게 질려 있는 나그네에게 그 구렁이는 '오늘낮에 내 남편이 네 손에 맞아죽었다 그러니 이제 내 남편의원 수를 갚고야 말겠다 ' 하는것이었다. 꼼짝없이 죽게 된 나그네가 구렁이에게 온갖 사정을 했으나 구렁이는 막무가내로 큰 입을 벌려 삼키려는데 어디선가 들려 오는 종소리에 그만 몸을 스르르 풀고 사라져 버렸다. 목숨을 부지한 나그네가 그 이튿날 첫새벽에 산길을 오르고 보니 옛 절이 하나 있고 그절 종 각의 큰 종 앞에는 머리가깨진까치가 죽어 있더라고 하는 그 전설의 무대 그 종소리가 울렸던 곳이 바로 구룡사라고 주지스님이 얘기해 주셨다 그리고 구룡사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큰(넓은) 멍석이 있는데 절 앞 전각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한 장짜리 멍석은 족히 15평은 될 것처럼 보였다. 주지 스님의 정중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고 구룡사를 떠나 양평을 거쳐서울로 돌아오는 길을 달리는데 여주 가까이에서 목아 불교박물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을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 곳에 들리기로 하고 찾아갔는데 우리 나라에 하나뿐이라는 이 불교 박물관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리의 60만 평의 야트막한 야산의 한 가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불교박물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리 뜻밖에도 서양의 호화 별장 같은 아주 현대적인 멋진 건물이 나타났다 현대적 기법으로 조각한 돌 불상이 몇 분 서계신것을 제외하면 정원 또한 아주현대식이다 마침 우리 회원이신 정명호 교수께서 이 박물관원장이신 목아 박찬수 선생과 잘 아는 사이라 정문에서 연락을 했더니 박 원장이 달려나오시면서 우리를 환영해 주셨다. 그런데 호가 목마인 박원장은 기골이 장대한 40대 중반 분이신데 승복과 비슷한 한복을 입고는 머리를 길게 킬러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수염까지길 게 기르고 있어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나 중국 무협 영화의무 술의 고수처럼 보이지, 도무지 섬세한 예술적 솜씨를 자랑하는 조각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하튼 매우 특이한 인상을 풍기는 분이었다. 박 원장께서만사를 제 폐하시고 우리를 안내해주셔서 박물관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고 1,500점이 넘는 전시품들을 감상했는데 우리나라에도, 그것도 개인의 힘으로 이룩된 이런 박물관이 있었는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박원장은 고향이 경남 산청 생초면이라 나와는 고향이 바로 가까운 이웃이라 더욱 반가웠는데 열두 살 때부터 목각을 시작해서30여 년을 장인, 예술가의 외길을 걸어와 오늘날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 요 예술가이다 박 원장은 젊어서 일본에서 공부를 오래 해서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그쪽에서 더 일찍 유명해졌으며 일본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결과 큰돈을 벌어서 이곳에 땅을 사고건물을 지어서 박물관을 세웠다한다. 1993년 6월에 개관한 이래 많은 사람들(특히 불교도들)이관람을 하고 갔는데 그래도 한 달에 적자가 2천만 원에 이른다고 하여 ''아니 그렇게 적자가 많이 나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우리가 걱정을 했더니 ''다 부처님 배경을 믿고 하지요 부처님이 보살펴주시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막다른 고비에서는 저절로 잘 풀리더군요'' 하며 오히려 태연해 하는 것이었다 참 대단한 분이라고 우리 회원들은 모두 감탄,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공방을 차려서 후진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박 원장은 자기는 처음부터 장인(예술가)이기 때문에 역시 이런 사업을 경영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고 하면서 앞으로 새로 벌릴 여러 사업들을 사심 없이 맡아서 운영해 줄 기관이나 단체가 있으면 자기는 기꺼이그 사람들에게 맡기고 죽을 때까지 부처님의 모습을 깎고 다듬는 장인의 길을 걷겠노라고 말씀했다 한 자 정도 되는 불상 하나를 깎는 데는 10분 정도면 족하다는 박 원장의 제작 기술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박물관 지하실에서 관람한 국립영화제작소 제작의 18분짜리 부처가 되고 싶은 나무' 라는 기록영화에서 잘 볼 수가 있었다

 박물관 본관에서 좀 떨어져 있는 숙소 건물(절로 치면 요사채)에서우리는 목공예를 비롯한 불교미술 전반에 걸친 해박하고도 흥미 전진한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아무런 예정도 없이 뜻밖에 들린 길이리그 날은 대충 얘기를 마무리하고는 박원장께서 우리 모두에게 작은 호신 불을 하나씩 선물해 주시는 것이었다 항상 가슴에 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납작한 호두알 모양의 호신 불은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 신장들을 한 분씩 새긴 정말 정교하고 예쁜 호신 불이었다 나에게는 홍일점이라고 해서 도장 모양으로 셩긴 목에 거는 호신 불을 주셨다 인도에서 나는 전단향나무(영어로는 샌들우드라고 함)로 만든 호신 불들은 그 향기가 매우 독특하고 강렬했다 호신불들을 모두 두 손에 받들고 법산 스님이 축원과 염불을 모신 다음 품속에 넣으니 금방이라도 제불 보살님들의 가호가 몸을 감싸주는 것 같았다 박 원장이 굳이 권하는 바람에 우리는 전통 음식으로 맛있는 저녁 공양까지 대접받았다. 아무튼 정성스럽고 융숭한 대접을 반나절 동안 받고 박물관을 떠날 때 나는 이 박물관과 나아가 우리 나라 불교미술의 무궁한 발전을 부처님께 축원하였다 이렇게 3월 법회는 환희 심에 넘치는 큰 보람 속에서끝났다. 4월에는 또 어디로 갈 것인지 기대가 큰데 생각해 보면 내가 동국대학교에서 봉직하고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큰 인연과 은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불자 교수회 회원으로서 달마다 한 번씩이라도 유명한 절들을 찾아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잠시동안이나마 입정과 정근으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게다가 가는 절미다 동국대학교 불자 교수라 해서 얼마나 극진히 대접해 주시는지 미안할지경이다. 이래저래 나는 불자 교수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매달의 법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꼭 동참할 것을 다짐하면서.

 

 

 

신행단체
동국문수회 /  편집부

경주 캠퍼스 직원 불자들의 모임인 동국문수회는 불교 연수와 보살도 실천을 통해 견학 이념을 구현하고 동국 발전을 도모하며 상호 친목과 인격 도야를 추구한다는 목적 아래 지난 '92년 7월에 창립되었다.

동국문수회가 창립되던 당시의 경주 캠퍼스는 동국 이념의 상징인 정각원이 '88년에 이어 두 번째 방화 되어 건학 이념이 뿌리째 흔들리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린시기에 창립된 만큼 동국문수회의창립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큰 것이라할수있다

동국문수회는 창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네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인격 도야를 사업으로 그간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봉행하는 정기 법회와 매학기도 차례씩 실시하는 성지 순례가 그것이다 이 중장기 법회는 경주 인근 대덕 스님과 불교 관련 교수님들을 법사로 초청하여 봉행하고있고, ' 92년 밀양 표충사를 필두로 시작된 성지 순례는 그간 울진 불영사, 남해 보리암, 곡성 태안사, 문경 봉암사를 참배하였다 이번 학기에는 합천 해인사와 고창 선운사로 순례 일정을 잡고 있다동국문수회의 두 번째 사업은 본교의 발전을 위한 연수 활동 및 사회 봉사 활동이다 동국문수회에서는 그간의 신행 활동이 법회와 성지 순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보고 올해부터는 보살도 실천이라는 창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보육원이나 양로원 등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세 번째 사업은 타 불교 단체와의 교류와 협력인데 주로 서울캠퍼스 보현회와 이루어지고 있다 네 번째 사업은 창립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타 사업으로 올해부터 운수회지를 발간하기로 했다

 총 61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동국운수회의 회장은 총무과장안중옥 거사이며, 부회장은 인문대 교학과 송익균 거사, 사무국장에 관재과 김영수 거사, 사무차장에 학생과 류인수 거사가 맡고 있다 이 밖에도 감사 2인과 운영위원 7인이 동국운수회의 원활한 운영을 돕고 있다

 

 

 

불자탐방
문기곤 예산과장 /  편집부

동국가족 중에서 불심이 돈독한 불자를 찾아서 그의 신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불자탐방' 에서는 예산과장 문기곤 불자님을 찾았다

'불자탐방' 에 선정된 것을 축하하며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2월 12일자로 예산과장에 발령이 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새 부서에 적응은 되셨습니까?

이렇게 '불자탐방' 에 선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예산 부문에서 중요한 것은 해당 집행 부서의 예산 필요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하루 이틀에 쉽게 적응될 리 없겠지요 아무튼 새 부서인 예산 조정 부문을 열심히 공부하여 빠른 시일 내에 효과적인 예산 집행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해 칡업과장으로 계시면서 학생들의 취입문 제에 있어 좋온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실적에 대하여 말씀좀 해주시죠

 총장님과 전 교수님 및 교직원 선생님들과 총학생회, 졸업준비위원회 등의 적극적인 노력과 총동창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종전에 비해 그 성과가 좋았다고 봅니다

취업의 어려움은 모든 대학들이 안고 있는 고민인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94년 2월 졸업생들이 대기업을 비롯하여, 금융계, 국영기업, 공무원,언론사, 중소기업 등에 상당수가 입사했다는 사실은 실무자였던 한 사람으로서 남달리 기쁨을 감출 길 없습니다. 예년에 비하면 7一8% 정도가 상승했습니다 이것은 총장님 이하 전 교 . 직원이 합심 협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더 많은 노력과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종립대학이라는 특성과 취업 경향과는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지요. 즉 동국대학교의 취업 경향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많은 경영자들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따라서 그분들이 기업 경영에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교적 이념에 바탕을 두고 교육 밭은 동국대학생을 상당 부문에서 채용한 점에 대해감사와 자부를 느낑니다. 앞으로 더욱 많은 부문에 좋은 인재가 기용되어 동국대학교를 빛내리라고 확신합니다.

학창시절에 대불련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는데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 및 그때의 일들을 간략히 말씀해 주시지요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김천 직지사로 갔었습니다.그곳이 바로 사명 대사께서 불도를 닦았던 사찰이라고 안내하시던 스님의 말씀으로 불교와 접하는 인연이 되어 그 후 청소년 불교회, 청년불교회, 대불련 활동 등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포교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앞에 나서서 일하는 것보다는 뒤편에서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데 전념해 왔을 뿐입니다

 학교와 인연을 맺고 나서는 어떠했습니까

 부처님의 중도 이념을 근본으로 하여 인재 양성에 힘써 온 동국대인 만큼 모교에서 이 위대한 사상을 참되게 배우고 익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자비 속에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있습니다

새로 예산과장에 부임하셨는데 예산 집행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저는 83년부터 88년 초까지 관재계장으로 있으면서 학교 살림을 하는 가운데 예산을 받아 집행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예산 편성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집행되도록 관련 부분을 재확인하면서 실무를 집행했던 것이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산을 편성 . 조정하는 입장이라 여러모로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산을 편성하는 예산과에서는 공정하게 예산 집행을 하고 각 부서에서는 직접 그 예산을 잘 집행하여 최소의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서로 협조하고 노력한다면 모든 부문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앞으로 동국학술문화관 건립 등 많은 예산이 필요하리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동국학술문화관 건립 불사는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만큼 이사장님을 비롯한 모든 이사진, 총장님을 비롯한 모든 교직원, 학생과 총동창회를 망라한 모든 동국인과 불자들이 힙 력하여 역사적인 동국학술문화관을 건립하는 데 물 심 양면으로 협력해 줄 것으로 믿고 최선을 다하여 예산 확보에 노력할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신행 활동은 어떻습니까

 저는 집사람과 1남 1녀가 있습니다 저 자신이 부처님을 믿고 실천하는 확고한 불자로서 살아가듯이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저의 뜻을 따라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참다운 신행이 되도록 애쓰는 불자가 정이라는 데 항상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학교나 가정 또는 개인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다행히 부처님과 좋은 인연을 맺어 온 만큼 어리석게 살아온 저의 과거를 참회하면서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정진할 것입니다. 학교와 가정에도 충실하면서 다소라도 여력이 있다면 부처님의 좋은 사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마음의 광명을 찾을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열과 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가람의 향기
동화사 / 편집부

 

팔공산은 대구시의 진산이다. 시북단을 가로막으며 솟아 있기 때문이다. 해발1,193미터의 높이는 대도시 주변의 산으로는 단연 최고이며,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웅장한 산세를 동서로 뻗고 있다 통일신라말 후백제의 견훤과 맞싸우던 고려 태조의 여덟 장수가 이 산에서 모두 전사했다 하여 산 이름이 유래한 팔공산의 동봉 남쪽 기슭에 동화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화사를 찾던 날은 봄기운이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3월말이었다. 마침 일요일인지라 경내에는 삼 삼 오오 무리를 지어 도량을 참배하는 대구 시민들이 가득하였다. 문득 대구 시민들은 복받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심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여느 대찰처럼한주 동안 세파에 찌든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동화사가 바로 곁에 있기 때문이다

 동화사는 널리 알려진 대로 조계종의 제9교구 본사로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직할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다

 동화사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대개 『동화사사적기』의 기록을 따른다. 즉 신라 소지왕 15년(293)에 극달(極達) 화상이 창건하여유가사(瑜拘時)라고 부르다가, 신라 흥덕왕 7년(832)에 심지 왕사가 중창하면서 동화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동화사라고 이름을 고쳐 부른 까닭은 심지 왕사가 절을 중창할 때가 겨울철이었는데도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 공인이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진 것으루 미루어 보아 심지 왕사가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심지계조」(心漣繼祖)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를 싣고 있다

 

(전략) 심지 스님은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이다 (중략) 15세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열심히 수행하였다, 중악(지금의 팔공산)에 우거했는데 마침 속리산의 영심(永深) 스님이 진표(眞表)율사의 불골간자(了輅兮簡子)를 이어받아 과증법회 (果證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으나 이미 기일이 늦어 참여를 허락받지 못하였다.(중략) 법회가 끝나고 돌아갈 때 도중에서 그는 옷섶 사이에 두 간 자가 끼어 있음을 보았다. (중략) 심지 스님이 다시 돌아가다가 보니 지난번과 같았으므로(지난 번과 같이 옷섶 사이에 두 간 자가 끼어 있으므로) 다시 돌아와 고하였다. 그러자 양심 스님은''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그 뜻을 받드시오'' 하고 간 자를 주었다 심지가 그것을 머리에 이고 산(중악)으로 돌아가(중략) 산꼭대기에 올라 서쪽을한l여 던지니 간 자가 바람에 날려 갔다.(중략) 간 자를 임천(林泉)속에서 찾았다. 그 곳에 당을 짓고 안치하였으니 지금 동화사 창당북쪽에 있는 소정이 그 곳이다 (하략)

 

이 기록은 동화사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첫째는 동화사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진표 율종의 총통을 이어받은 심지 왕사가 그 종지를 신라 영토 내에 펼치기 위하여 자신의 본거지에 건립한 법상종의 대찰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동화사는 신라와 고려에 이르기까지 금산사, 법주사와 더불어 법상종의 3대 사찰이었다『동화사사적기』에 나타난 '유가사' 라는 사명이 법상종의 성격을 띠고 있음도 주목해 볼 점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는 『고려사』 「정종 2년」조에 '동화사 계단(戒壇)에서 경률을 시험 보도록 한다'는기록과 통일신라대의 양식을 보이는 방형 배례석(兩豊石)이 금당임에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 아이 곳의 극락전 터가 옛 동화사터(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소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화사는 한때 사명 대사 유정스님이 영남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지휘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서사원(儉쭁遠)이 격문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기는 등 항일 호국의 뜻 깊은 유적이기도 하다. 이곳에 유정 스님이 영남도총섭으로 있을 때 사용하던 인장과 금강 저가 보존되어 있고, 조사 전에 굵달 화상과 심지 왕사, 인악대선사의 영정과 함께 스님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화사는 여러 차례 중건, 중창을 통해 지금의 가람을 이루었다.934년에 영조(霰" ) 선사가, 명종20년(1190)에는 불일 보조 국사지눌 스님이, 충렬왕 24년(1298)에는 홍진(弘眞) 국사가 각각 중건 및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모두 불타 버려 당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현존하는 당무는 대개 영조 8년(1732)에관허(冠虛), 운구(雲丘), 청월("靑月), 낙빈(洛7賓) 스님 등이 중창할 때 이룩된 것이다 이 밖에도선조39년(1606)에는 유정 스님이, 숙종 3년(1677)에는 상숭(尙崇) 스님 등이 중건하였다,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제248호로 지정된 금당임 삼층석탑 2기, 보물 제244호인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247호인 비로임 삼층석탑, 보물 제243호인 동화사 입구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254호인 당간지주, 보물 제601호인 달성 도학동 석조부도,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호인염불암 마애약사여래좌상, 대구시유형문화재 제10호인 대웅전 등이 있다. 이 중 금당임 삼층석탑은 경문왕 3년(863)에 건립된 것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 7과가 봉안되어 있으며, 동화사 입구 마애여래좌상은 유희 좌를 한 불상으로 심지 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의 문살 무늬는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천장의 극락조 또한 유명하다 비로임 삼층석탑은 납 석제 사리호외 명문을 통해 경문왕 3년(863)에 신라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림된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상보문화재로는 미름보살이 전표 율사에서 주어 양심 스님을 거쳐 심지 왕사에게 전해졌r구는 『패엽경』과 고려 예종이 『패엽경」을 빌려 보다가 일부를 잃어버리자 대신 보내왔다는 송나라에서 전해 온 부처님 치아(어금니)사리, 금당임 수마 제전 금동불좌상, 아미타극락회상도, 염불임 관경변상도 등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금당암, 비로암,내원암, 부도암, 양진암, 염불앙등이 있다,

 

 

 

일주문
파사 현정의 빛 /  조용길 (불교학과 교수)

메마른 대지에 촉촉이 단비의 감로수가 폭신한 융단처럼 온 누리를 적셨다. 겨울 가뭄의 긴긴 나날 끝에 내린 축복의 자연의손짓이다.

천지 자연의 만물은 말 없는 말로서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 생명의 최선의 나래를 온 누리에 가득 채우고 있다. 24절기가 갖는 한국적인 봄의 빛은그어느민족, 사회, 국가보다 화사하고 밝기만 하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간에 오차 없이 오가며 보여 주는 자취는 쉬는 것 같으면서도 쉼 없고,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쉼 있는 여백과 여유를 갖추고 윤회하고 순환하고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넉넉함 속에서 그 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걸림이 많고 집착이 많고 자유와 평등 속에서도 그 자유의 소중함과 그 평 등 성을 깨달음이 없이, 혼자만의 이기심이나 끊임없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미망을 헤매고 있으니 이것이 사업 자득의 무명 중생(無明衆生)의허상이리라. 신기루 같은 허상에 쫓겨 상락(肯樂)의 기쁨과 희열의법열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천은 의구로되 인정은 간데 없고 독 오른 인간들의 아수라와 아귀 같은 분별심과 차별상은결국은 불안과 불신의 늪을 사회에 깊이 마련하고 말았다 인고의 자연과 넉넉함의 자연과 여백의자 연에서 인간이 얻는 것 없이 잃어만 가고 있다면 이것은 베풀어주는 자연에 대한 거역이요, 불순이요, 흐름을 역류하려고 애쓰는 허사의 일이 아닌가 만산이 푸르러지고 온갖 꽃이 저마다 숨김없이 개화한 것은 마치 아늑한 산사(山寺)의 화사한 대웅전이 장엄 되어 있는 듯하다

 저토록 아름답고 저토록 처절하고 저토록 미묘한 온갖 채색을 갖춘 자연은 우리 인간 중생들의 어버이요, 스승이요, 형제 자매요,친구요, 애인이요, 벗님이라 자기를 태우며 만 생명을 생육(生育)시키고 있는 저 태양은 일체 삼라만상의 어버이의 어버이라 생명의 근원인 밝음(明)이요 지혜요 자비요 희사(喜手君)요 파사 현정이다

여기에는 차별도 미움도 증오도 갈등도 없고,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고 착함도 악함도 없고 우수하고 열등함도 없다 무차별의 자비희사의 베풂과 넉넉함과 무한히빈 공간(空)과 한없이 넓은 땅(地)과 끝없는 하늘(天)의 ㅈ冷와 평등의 아라한과 보살만이 있는 극락 정토의 세계다. 이 세계는 끝없는 파사 현정의 빛을 발하니 이를 보는 ㅈ峀 쓸 수 있는 자이고 쓸 수 있는 자는 용기 있는 자이니 각 시대마다 일어나는 폭풍 노도의자전(自轉)과 공전(空轉)의 정화(1탸ㅁ)의 세계이다 이를 일러 이미 일주문의 문 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시방(十方)의 제불보살님들은 환희 하며 약동하니 성취를 하였음이라

 자연의 이치가 순리에 따르듯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일도 자업자득과 자작 ㅈ件(自作自受)의 업의 일이라. 오직 불 보살님 전에 참회를 통한 절실함만이 천지 자연에 대해서나무든 존재에 대한 만분지일이나마 갚음이 있을 것이다 자등명(自燈明)하고 법등명(法燈明)하여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데 정진하는 길만이 빛이요, 정화(淨和)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동국과 불교
중앙학림의 준비와 개교 /  편집위원

동국 역사의 면면함과 굳셈, 그리고 그것이 결코 쉽게 다져진 길이 아니었음은 무엇보다도 그 초기 사정에서 잘 드러난다 1906년 명신학교로 출범한 이래 1914년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만 해도 그것은 우여 곡절을 겪으며 다시 불교사범학교, 불교고등강숙으로 교명을 달리하며 개 . 폐교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불교고등강숙은 개교 반 년 미만에 불교계 내의 노장 대 청년,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인해 폐교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정 속에서도 중앙교육기관의 존속을 재촉하는 당시 불교계 내의 여론은 뜨겁게 달아 올랐다. 여론은 불교고등강숙이 폐교된 3개월 후인1914년 가을에 접어들자 대체 적으로 불교고등강숙보다 좀더 신시대에 부홍하는 학교를 열자는 쪽으로집약되었고, 그것은 곧 현실로 구체화하였다. 1인5년 1월에 열린 30본산주지회의원 제4차 총회의 안건 중 「불교중앙학림 설립에 관한 사항」이 상정된 것이다.

이 총회에서는 30본산주지회의원을 해체하고 대신30본산연합사무소를 발족시켰거니와. 이 새 기구의 위원장 및 7개 본사의 주지로 구성된 常置員會에 불교중앙학림 설립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일임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2월에는 30본산사무소의 운영 등을 포함한 壎台匍}規가 제정되었고, 그 가운데는 중앙교육기관으로서의 중앙학림 설립 및 그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규정들이 포함되었다.

* 연합사찰과 그 말사 승려에게 종교와 기타 필요한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서울에 중앙학림을 설치한다(제12조). *각 본사와 그 말사 승려에게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각 본사에 지방 학림을 설치한다(제14조). *중앙학림의 직원 임명에 常置員의의견을 듣도록 한다(제11조) * 포교사는 중앙학림졸업생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게임명한다(제16조)는 등이 그것이다

30본산연합사무소의 상치 원들은 이 같은 원칙하에 동년 3월의 1차 회의, 4월의 2차 회의를 통해 중앙학림 개교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1,2차회의에서 결정하고고 뒤 추진 과정에서 일부 개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개교를 위한 준비 사항은① 학림의 위치 ② 직원 선정③ 각 본사의 등급에 따른 학생 모집 ④ 학생의 지원 자격 ⑤ 개교에 필요한 당해연도 경비 및 등급별 각 사찰의 분담액 등 이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학림의 위치 및 직원 선정의 내용만을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학교의 위치 : 제1차회의에서는 학교의 위치를元興寺로 하기로 했으나, 다시 숭일동(현 명륜동) 1번지에 있는 舊北關齟i는를 총독부로부터 빚려 쓰기로결정함

2 교직원 선정 ' 학장 강대현, 학감 김보륜, 寮監김능성, 彰才 김침월, 불 교학 교사 박한영, 산술 교사이명철, 국어 물리교사 早川毓, 지리교사, 理科 교사, 서기 등은 추후 선정

이상과 같은 준비를 거쳐 드디어 1915년 l0월 4일목적, 명침, 학칙, 수지 예산, 유지 방법 등 일체 서류를 첨부하여 선교 영종 30대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강대현의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사립 불교중앙학림설립인가원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당시 사정을 짐작해 보기 위해 일건 서류 가운데 예산관계와 유지 방법을 살펴보면, 1년간의 수지예산액은 4,092員, 그 지출 내역은 교사 봉급 및 서적, 기계, 기구비, 소모품비 등으로 나타나 있다. 수입 총액 4,092원에 대해서는 설립자 즉 30본산과 그 외 yr의 출자(기부)로 충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각 사에서 매년 출자하는 액수는 사찰에 따라 각기 차이를 두고 있다.이러한 설립인가 신청서를 접수한 조선총독부는 동년 11월 5일자 學第717호로 중앙학림 설립을 인가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1906년 5월 첫 중앙교육기관으로서 명신학교를 탄생시킨 이래 만 9년 6개월만에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가장 근대적인 모습의 학교를 갖게 된 것이 다

각 사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대부분 公費生이었다각 사에서는 공비생 1인당 매월 6원씩 지급하였는데,그 방법은 공비를 학교로 직접 부종하면 학교에서는 그들의 숙식비로 3원을 공제하고 나머지 3원을 본인들의 일용 잡비로 지급하였다. 한편 그들의 수준은 특히 한문과 교학 부분에 있어 실력이 대단하였다 여기서 중앙학림 제1회 졸업생인 임석진(林漸)의회상기를 통해 당시 학생들의 모습을 보자,

(전략) 학생의 정도는지방학림의 졸업자 및 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모집된 사람들은 각 강당의 재래식 학그牛를 졸업한 강사 자격을 갖춘 노(老)학생들이었다 (중략) 기숙사내의 勤行 및 上學 때에는 한복 위에 흑색 장삼을 입었고 출입시에는 한복 두루마기에 사각모를 썼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학생측으로부터 양복 착용의 진정서를 제출해 보았으'나 일본인 고문의 불응으로 실현되지 못했었다 (하략) - 「동대신문 제 326호고

 

당시의 30본산연합사무소의 임원들은 중앙학림을발족시킴에 있어 모집 학생의 확보와 그들의 단계적인 수학(受學) 제도의 확립을 기하기 위하여 상당한 연구와 작업을 해놓았다. 즉 1913년 현재 전국의 각본밀사에서 경영하던 교육기관을 보면 보통학교 15개교, 전문 강원이 47개소(해동불교 4호, p.8)였다그런데 그 중 보통학교를 가능한 지방학림으로 개편하거나 또는 지방학림을 신설토록 하여, 보통학교 졸업자를 지방학림에서 3년간 교육시키고, 다시 그들을중앙학림에 입학게 하는 체계를 세워 놓은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연합사무소 상치 원들은 중앙학림 설립준비를 진행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학림의학칙 강령을 마련하여 중앙학림 인가원 제출에 앞서1안5년 7월 3일 총독부에 그 승인 원을 제출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동년 7월 15일 승인을 얻어 연합사무소 위원장 강대련 명의로 각 본사에 이를 시달, 본사로 하여금 지방학림을 설립도록 적극 권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당시 한국불교계의 교육은 중앙학림을 정점으로 하여 그 밑으로 지방학림,다시 그 밑으로 보통학교를 저변으로 하는 피라미드형의 종적 체계와, 각 사의 전문 강원에서 중앙학림으로 연결되는 수직형의 종적 체계라는 이원적인 관계로 이룩되는 매우 조직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유와 설화
복의 밭이 되는 십선계 /  편집위원

부처님께서 유교경에서 말씀하시되 ''계율은 바로 해탈의 근본이요, 또 이 계율을 지니면 모든 선정(爾翠定)이 생기게된다.''고 하였고, 또 ''이 계율이 바로 나의 스승이니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닦고 배워 갈 것이니,계율을 지닌 사람에게는 항상 선신(箚申)이 따르면서 옹호하고 있다

칠불경(七佛系涇)에서는 ''삼귀계(三融)를 지니면 아홉 분의 산신이 그 수행하는 이를 항상 하며 또 오계(五戒)에도 하나의 계마다 다섯 분의 산신이 수호하게 되므로 스물다섯의 산신이 그를 항상 옹호하고 있다.''고 하였다

 

계율 비유

옛날 어떤 나라에 곡식이 풍성하고 백성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가 와서 빼앗으려 했다, 그래서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싸우러 가게 되었다

 그때 담을 짜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60이 가까웠다. 그의 부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 항상 남편을 업신여겼다. 그러나 남편은 늘 부인을 공경하고 어렵게 여겨 도리어 장부처럼 받들었다 남편은 부인에게 말했다.''이번에 나라의 명을 받고 나가게 될 것이니 지금곧무기와양식담을 그릇을 준비해 주시오 ''부인은 남편에게 닷 뇌들이 그릇에 양식을 담고 길이가 한발한자되는 담 짜는 북 하나를 주면서말했다.

''당신은 이것 홀 가지고 가서 싸우시오. 다른 물건은 없소. 만일이 그릇을 깨거나 이 북을 잃어버리면 나는 당신과 같이 살지 않을것이오.''

남편은 하직하고 싸움터로 나갔다. 남편은 적군에게 죽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그도 가지 물건을 잘못하여 잃어버리거나 깨뜨려버려 아내를 잃게 될 것만이 두려웠다.길에서 적군을 만나 싸우다가 이쪽 군사가 패하여 곧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북과 그릇 두 가지 물건을 잃으면 부인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여러 사람들은 모두 달아나는데도 그만은 북을 머리에 이고 혼자서 적을 향하여 나아갔다. 적군은 이것을 보고 무슨 큰일이 있는 줄 알고 감히 나오지못하고 모두 물러갔다- 그래서 이 나라 군사는 다시 진을 정돈하고 힘을 합해 나가 싸워 크게 승리했다. 그리고 적군은 패하여 흩어지고 거의 모두 죽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공을 세운 이에게 상을 주려 할 때 여러 사람들은 왕에게 아뢰었다. ''저 담 짜는 사람이 가장 공이 많습니다''왕은 그를 불러 사정을 물었다.''그대는 어떻게 그 큰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었는고.''

그는 대답했다. ''사실 저는 용감한 무사도 아님니다. 제가 싸움터로나 올 때에 아내가 두 가지 물건을 주었습니다. 만일 그것을 잃으면 아내가 저와 이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그도 가지 물건을 보전하려 했으므로 적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지요. 실은 용맹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 사람은 비록 아내를 두려워하였으나 결국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해 주었으니 제일 큰상을 주어야할것이다'' 하고 곧 대신으로 삼고 보화와 집과 미녀들을 주어 왕을 보좌하게 했다 그리ㅎ배 그 자손들도 그 복을 이어받아 대대로 전했다.이것은 세상에서 인연으로 얻어지는 것을 나타낸 것인데 부처님은 그것을 비유하여 말씀하셨다''그 아내가 남편에게 닷 되들이그릇과한발 한자의 북을 준 것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계율과 열 가지 선행을 가르친 데 비유한 것이요, 남편에게 두 가지 물건을 굳게 지켜 깨거나 잃지않으면 나와 같이 산다고 말한 것은 법을 가지다가 죽더라도 범하지 않으면 부처님과 함께 도의 집에 오름을 말한 것이며, 이미 적군을 물리치고 다시 상을 받은 것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현세에서는 원수의 행패가 사라지고 후세에서는 저절로 생 천하여 복을 받는 데에 비유한 것이니라.'

 

십악업 떠나 정견 닦기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 정사에 계실 때에 여러 비고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중생이 ① 살생을 행하고 살생을 널리 펴면 그는 지옥의 죄와 아귀, 축ㅅ명의 행을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수명이 매우 짧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목숨을 해쳤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중생이 ② 남의 물건을 훔치면 세 갈래 나쁜 길(三蔥遣)의 죄를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항상 가난하여 배를 채울 밥이 없고 몸을 가릴옷 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도둑질을 하였기 때문이니 남의 물건을 겁탈하는 이는 남의 목숨을 끊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중생이 ③ 음행 하기를 좋아하면 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그 집안이 정숙하지 못하고 몰래 음란한 행을 할 것이다.또한 어떤 중생이 ④ 거짓말을 하면 지옥의 죄를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남의 업신여김을 받고 말은 신용이 없으며 남의 천대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전생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이 ⑤이간질을 하면 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세상에 난다 해도 마음이 항상 안정되지 않고 늘 근심에 빠질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양쪽에 거짓말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이 ⑥ 나쁜 말(아첨, 아부)을 하면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심는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남의 미움을 받아 늘 꾸지람을 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진실하거나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이 ⑦ 지저분한 말(저주, 욕설 등)을 하여 남들과 싸우면 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심는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미워하는 이가 많고 친척들은 흩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전생에 지저분한 말(저주,욕설)을 하며 싸웠기 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이 ⑧ 탐하고 질투하면 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심는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옷과 밥이 모자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전생에 탐하고 질투하였기 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이 ⑨ 성을 내고 해칠 마음을 일으키면 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 세상에 난다 해도 항상 거짓이 많고 참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며 마음이 어지러워 안정되지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에 성을 내어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때문이다. 또 어떤 중생이 @ 삿된 소견을 지니면 세 갈래 나쁜 길의 죄를 심는 것이요, 설령 인간세상에 난다 해도 나라의 중앙에 태어나지 못하고 변두리 지방에 살면서 세존의 거룩한 도법의 이치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혹은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벙어리 등의 불구자가 되어 착한 법과 나쁜 법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에 믿음의 뿌리가 없어 사문, 바라문, 부모, 형제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재앙을 막는 길은 오직 계를 굳게 지키는 일이니라

 

 

 

열린마당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  이순란 (경주캠퍼스 불교아동 3, 불교문화대 부학생회장)

비가 내린다. 따스한 봄기운을 몰고 겨울내 메말랐던 대지위를 촉촉히 적신다, 불대 사무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싱그러운 재잘거림이 들린다 '분명 새내기들일 테지 '대학생이라 멋을 낸 모양이지만 그들이 새내기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의, 아직은 순수한 웃음소리와 어설픈 몸짓이 나의 마음을 즐겁게 두드려 주기 때문이다. '이런 10시가 넘었는데...... '잠깐 생각을 멈추고 바라 본원효관 2층 불교문화대 사무실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 옆 인문대사무실의 열리진 창문 너머로는 몇몇 학우의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말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계단을 두세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지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누가 볼세라 조심스레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사무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가방들이 의자마다 놓여져 있고, 휴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청소를 할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이런 일에 멈칫하게 되었다 내가 청소할 때나 각 부서 일들을 나누어 맡아 할 때, 또 누군가의 심부름을 할 때면, 외부학생회장이 그런 일을 하냐고 학우들은 의아해 했다. 그런 그들 앞에 나는'내가 좋아서 해 ' 라고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갑자기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빗질 하나 하는 것도 이렇게 주저하다니.'길게 한숨을 토해 내며 빗자루를 찾았지만 오늘따라 웬일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잘됐다 싶어 냉큼 돌아섰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어느새 개였는지 날씨가 화창하다  중정을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한다 시원하고 향긋한 봄내 음이 내 폐 깊이 스며든다 중정 곳곳에는 활기찬 젊음 들로 가득하다 그 젊음의 소리는 박자도 음정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의 작은 울림과 어울어진다.''안녕하세요 '' 언제 들어왔는 지불교학과 학생회장이 언제나처럼 안경 너머로 자그마한 두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런 웃음을 보내며 서있다. 나도 마주하며 웃는다. 그러나 활짝 개인 웃음을 보낼 수가 없었다 어제 일로 속이 좀상해서일까, 어설픈 웃음을 감추려고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가방에서 신입생 예비대학결산서를 꺼냈다 어제 회의에서 예비대학 결산 잔액을 양과(불교학과, 불교아동학과)와 불교문화대간에 나누기로 합의했다 '차라리 방관자였더라면 속상하지않았을텐데...' 예비대학 때 빠듯한 예산으로 10원 20원까지아끼면서 살림한 탓인지 이 얼마 안 되는돈 이 쉽게 내밀어 지지않았다 '지금 자보쓸 매직 하나 살 돈도 없는데, 휴우....... '버릇처럼 나오려는 한숨을 근근이 삼키고 세 번씩이나 돈을 세어보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서있는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변함없이 유쾌한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나간 후 갑자기 내자신이 우스워졌다 항상 건강한 마음으로 건강한 웃음을 나누고자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 내가 이런 자그 마 한 일에 이렇게나 속상해 하다니 나도 별 수 없구나 싶었다 휴지는 여전히 바닥을 뒹굴고 있었지만 새들의 재잘거림이 내 귓전을 간질 일렀다 창가에 턱을 괘고 창문 너머로 가득히 밀려두는 햇살 속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흥얼거린다.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어떤 유혹의 손짓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있으리. 우리 이제 절망에 굴하지 안 고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 가며 마침내 올 밝은 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불서산책
각해일륜 /  편집부

각해일륜은 용성스님(1864~1940)이 지은것으로서 그 제목이 의미하는 내용은 깨달음[覺]이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및 구경각(究竟覺패 모두 원만하여 둘이 아니며, 바다[海]는 그것이 깊고 넓어서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한 것이고, 일륜(日輪)이란 현묘한 지혜는 원만하고 밝아서 비추지않는 바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종교적인 이념과 도덕적인 성격, 철학적인 사색, 과학적인 탐구 및 인과 법칙 등을 갖추지 않음이 없으므로 '각해일륜' 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유포하게 된 까닭은 불교계의 당면과제인 민족 중흥과 인류 번영 및 불교계의 혁신이란 벅찬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하려면, 용상 대사가 일찍이 이와 같은 난제들에 관하여 고심 끝에 피력해 놓은 각해일륜을 보지 않고서는 그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는 평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스님은 어느 때에 두 선백들이, ''옛날에 우리 불교를 배척한 자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지난 자가 없고, 현재에 더욱 심하게 배척하는 자는서양종교이다. 우리가 먼저 남을 배척할 것은 없지마는 한번 변론할 필요가 있으니, 원컨대 선사는 변론하는 서책을 저술하여 종교의 깊고 얕은 것을 알게하소서.''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니, 이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삼일독립선언서 발표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의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종교의 서적을 들여와서 열람하는데 이를 보니, 모두가 한글로 번역되고 한문으로 된 것은 거의 없는 것에 큰 자극을 받고 맹서하기를, ''오동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짐을 보고 천하의 가을 됨을 아는 것이니, 세계 인류는 생존을 경쟁하고, 경제의 파탄은 극도로 되어가는 시대에 누가 한문에 머리를 썩히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허송하며 공부하리오.(중략)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는 조선글이 적당할 것이니, 남녀상하가 보면 즉시 아는 것이라 보급되기 편리하리니,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들을 모아서 경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에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님은 뒤에 삼장역회(三蔽君箏倉)를 조직하여 화엄경 동경 .율.논삼장을수십 권 번역하였으며, 1926년에는 건백서(建白薯)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여 당시 사원에서 실시되고 있던 참선과 염불 및 간결 등이 전폐 되거나 변질하여서 불교 본연의 자세가 아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정토록 촉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각해일륜은 한마디로용성 스님의 철저한 구도자적인 행각과 그 증 득의 편린들(제1~2권)을 저술한 것으로서, 수심정로(제3권) 및 육조단경요역(제4권) 등과 함께 스님의 불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스님이 계셨던 그 때와 별반 다를것이 없는 처지에 살고 있는 현대의 불자들이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탐독해 봄직한 책이다

 

 

 

불교건강법
중풍 /  김갑성 (한의대 교수. 보건소 소장)

동의보감 중풍 문에 ''岳旨夔址旨 麻木不仁, 三年來中度 이라는 말이 나온다. 손가락이 저리고 뻣뻣한 증상이 있으면 곧 중풍이 발병할 수 있다는 중풍 발작의 전구 증상을 기술한 것이다. 이 러한증상이 곧 중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년 이후에 발생하는 이와 유사한 증상들은 고혈압이나 당뇨병 혹은 고지혈증과 같은 성인병을 갖고 있거나 가족 벽 중에서 선대 또는 형제 자매 중에 이란병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건강을 반드시 검사하여보아야 할 것이고, 당연히 중풍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것이다.

그러면 중풍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발생하며 그에 대한 예방대책은 무엇인가. 중풍은 글자 그대로 풍에 적중하였다는 말인데 여기 서풍이란 한의학 최고의 원전인 황제내경에 '백병지시야'' (百病之始也)라 하여 모든 병의 근원이 되는 질병 유발 인자를 지칭하며, 이는 신체적 조건이 상부의 기능은 항진되어온 화기가 형성되고 하부의 기능은 냉하여져 수기가 화기를 제어하기 어려울 때 발생하는 것으로 이때 덥고 찬 현상 속에서 대류의 현상으로 발생하는 것이 풍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자연 현상에서도 봄철에 대기의 공기는 아직 냉하고 지표면의 온도는 상승할 때 위의 찬 공기와 아래의 더운 공기가 상충하면서 그 사이에서 형성되는 대류 현상으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 이치와 같다고볼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발생한 인체 내부의 풍은 평소 잠재적으로 취약한 인체의 포인트에 집중되어 부위별로 병소를 형성하게되는데 잠재적으로 취약한 포인트로서 혈압이 높다거나 당뇨병과 같은 중풍 유발의 선행 질환을 갖고 있다면 중풍이 올 확률이 매우 높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인체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유발될 수 있는 인자를 한의학에서는 습(濕), 담(痰), 화(火) 또는 기(無,)의 불균형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며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과 같은 성인병이 뇌졸중의 한 원인으로 보는 것과 방향은 다르나 대부분의 중풍 환자가 혈압 상승이나 당뇨와 같은 선행 질환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중풍은 뇌혈관 질환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중국의 청대 이후의 한의학자들 중에는 해부학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인체의 질병을 해부병리학적인 접근을 시도한 학자들이 많은데 왕정임과 같은 학자는 중풍 환자를 해부하여 보고는 뇌의 혈전을 관찰하고 이를 어혈이라는 관점으로 접근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중풍의 예방은 우선 선행 인자인 습, 담, 화와 같은 인체의 비생리적인 물질이 체내에 생성되거나 저류되지 않게 하고 거의 순환을 원활히 하는 방법을 시도해야 하지만, 일반인이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기에는 전문적인 진단과 이론에 대한 습득이 필요하므로 우선 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선행 질환을 갖고 있는 경우 이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와 예방에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보기로 하겠다.

 

 

 

정각리포트 
개혁일지/ 편집부

옛속담에 '스님의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 는 말이 있다.

그만큼 출가한 스님들에게 있어 벼슬이니 명예니 하는 것은 아주 덧없고 무상하다는 말이다.세간의 모든 인연들을 버리고 출가한 사람이 다시 세속의 영예와 복람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출가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다.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었던 청유건설 회장의 상무대 이전 사업에 따른 자금 횡령 사건이 터지면서 획령 자금 가운데 80억 원이대고 동화사 약사대불의 불사 금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전 서의 현총무원장을 통해 14대 대통령 선거자금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종단은 태풍의 회오리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진상 조사반이 언륜에80억 원의 정치 자금 유입설을 폭로한 것과 조기현 ㅆ1의 수감과 비슷한 시기인 지난3월 16일, 전총무원장은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조계종 임시중앙종회 소집 공고를 발표했다. 이에 23일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단체에서 애종, 구종의 뜻을 모아 ''범승가종단개벽추진회(범종추)를 결성하여 '서의현 총무원장 3선 음모 반대 및 상무대 80억 원 비리 사건진상 규명 촉구'등 종단 개혁을 위한 고종법회를 시작하면서 범종 추 상임대표 등 여러 스님이 단식기도 정진에 들어갔다

한편 종회 전날인 29일 새벽에 철야 정진중인 고종법회 스님들에게 총무원 건물에서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는 것을 기화로 하여 총무원에서 동원한 300여 명의 폭력배 등이 조계사 해탈문으로 난입하여 정진중인 스님들을 무참하게폭행했다. 종로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이러한 장면을 구경하다가 폭력배들이 물러가자 전경, 백골단 1000여 명을 투입하여 오히려 질서 정연하게 정진 기도했던 스님들을 강제 해산하면서 연행하는 가운데 총무원에서 던진 돌에 맞는 등 두각 스님과 30여 명이 부상당해 입원하게 되었다 또한 전경들은 법당문을 부수고 기도하는 스님을 7시간 이상 감금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어 30일 새벽에는 구종법회중이던 476명의 스님을 강제로 연행하여 18개 경찰서로 분산시켜 10시간 이상 감금하였다.

이로써 전 서의현 원장은 이날 종회를 강행하여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거수 투표로써 3선 통과가확정되었다. 4월 1일 범종 추측에서 '폭력 사태와 공권력 투얍에대한 기자 회견을 통해 현장에서 찍은 비디오, 사진 등을 제시 배포하며 총무원에서 꼬드긴 폭력배 등이 고종법회 정진중이던 스님들을 폭행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으나, 경찰의수사 태도는 처음부터 미온적이 고성의 없이 진행되었다. 검찰이 상무대 이전 자금의 대선 자금 유입사건에 대해 노골적으로 수사를 기피하고 있듯이, 애초부터 현정권의 부도덕성을 그대로 나타냈다. '깨꿋한 도덕정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하는 것은 그 반대급부로서 깨끗하지 못한 부분을 가리고 싶은 심리가 그만큼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덕적으로 째끗하다면 '깨꿋한 정치를 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일, 4일 원로회의 스님들께서 범종추의 개혁 의지를 적극 지지했다. 이를 이어서 각 단체에서 지지 표명이 잇따랐고 전 봉화시 재무국장이었던 선봉 스님과 예산스님이 양심 선언을 통해 개혁의 바람을 더욱 강하게 했다. 5일에는 원로회의 스님들이 전부 참석(전권위임 포함)한 가운데 총무원장의 즉각 사퇴와 4월 10일 승려대회 개최 및 3월 30일 중앙종회 무효를 결의하여 선언하였다. 이에 불교계 지성인들이 개혁의지를 선언하였으며, 6일에는 조계사에서 2,000여 명의 4부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3 . 29법난 규탄과 종단 개혁을 위한 범불교도대회가 열려 총무원장 및 총무원 집행부의 퇴진을 결의했다. 8일에는 총무원측이 원로중진 회의를 소집했으나 혜암 스님께서 회의 소집을 거부하며 승려대회 준비를 절감하고 승려대회 봉행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총무원측에처는 종정 교시로써 10일에 열리게 될 승려대회를 열지 말도록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9일, 10일에 걸쳐 원로회의 스님들께서 '승려대회' 틀 원로회의에서 주관한다고 재천명함으로써 전 서 원장의 측근 사찰인 동화사, 은해사를 제외한 전국의 강원 . 선방에서 2,000여 명의 스님과 원로 대덕 스님들 및 재가 불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0일 13시 조계사에서 근래 유래 없이 단합된 승가의 모습을 보여주어, 더 이상 개혁의 고삐를 늦출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승려대회가 초문중적인 많은 스님들이 참여하여 성공적으로

치루어짐으로써 종정 스님을 내세워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던 전 서원장 쪽은 점점 더 비참하고 추악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승려대회에서 서 원장 퇴진이 결정되어 총무원 청사를 합법적으로 접수하려고 하자 다시 경찰이 투입되어 개혁회의 스님들을 150여명 가량 연행하였다. 이에 분노한 4부 대중은 정부와 경찰의 지나친 종교 탄압에 분연히 일어서서 단합된 모습을 보이자, 지난 12일 문화부 차관을 조계사에 두번씩 보내어 경찰 철수의 명분을 찾았다. 급기야 13일 새벽에 경찰

이 철수하고 총무원을 지키던 구 총무원측 인물들이 경찰의 호위 속에 빠져 나갔다 .13일 17시 총무원장은 도도히 흗러가는 개혁의 세력에 굴복하여 사퇴했다. 13일 개혁회의는 범불교도대회를 열어 그간의 정부의 종교 탄압을 강력히 규탄했고, 15일 종회가 열려 총무원장의 사표를 처리하고 개처회의에 종정 불신임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일임하고 자진 해산했다. 이로써 조계사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며 앞으로 더 많은 노력과 지혜를 모아 종단 개혁, 자기 개혁을 통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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