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ck |

 

월간 정각도량 / 4월호 / 통권 6호 / 불기 2538(1994)년 4월 1일 발행

 

 

 

 

고승법어

생명의 원천은 평등하다/오녹원 이사장스님

 

정각도량

무법지대/한보광 스님

 

정각논단

불교와 유교/송석구

 

교리강좌

재와 포살/편집위원

 

경전의 세계

법화경/편집위원

 

불심의 창

성지 순례 유감/안중옥

 

불자탐방

김영길 교수/편집부

 

가람의 향기

운주사/편집부

 

일주문

마음의 바른 눈/이봉춘

 

동국과 불교

불교고등강숙으로의 재출발과 폐교/편집위원

 

비유와 설화

과보의 세계를 피하는 길이 선업 공덕의 길
/편집위원

 

코뚜레 없는 소/경허 선사

```

전등이야기

소를 타고 소를 찾다/편집부

 

열린마당

소중한 인연과 포교/조용호

 

신행 단체

동국대학교 여직원회/편집부

 

 

 

고승법어

생명의 원천은 평등하다 / 녹원 큰 스님



새봄 새 학기를 맞이하여 불자님들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하시고 새로운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티끌만큼이나 많은 國土를 다 셀 수 있고(刹塵心念可數知) 큰 바다의 물을 다 마실 수 있으며(大海中水可飮盡), 허공에 지나는 바람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지혜와 재주가 있는 사람일지라도(虛空可量風可繫)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을 다 말할 수는 없다(無能盡說佛功德)”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정각하신 본래 면목의 진리 자리는 언어와 사고를 훨씬 뛰어넘어 있습니다. 그 본체 자리는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시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른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했습니다.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內觀 自省하여 증오하신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여 입을 열어 말을 해도 그르칠 것이요 입을 닫아 말을 아니 하여도 그르칠 자리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한 이를 꿰뚫고 있기도 합니다. 본래부터 청정하고 신령하기에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증득하셨기에 覺者가 되신 것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 찾은 사람은 하루하루를 광명 속에 사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생활이요 그렇지 못한 이는 전도몽상의 일상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자리를 無師 證悟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누구나 평등하게 이 자리를 증득할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샛별을 보시고 견성하신 순간 이미 진리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진리이면서 인간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인간석가모니 부처님이면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너와 내가 하나이고 우주와 내가 하나인 경계입니다. 이는 하나 속에 만법 있고 만법 속에 하나가 녹아들어 있는 경계입니다. 탁 트인 이 자리는 善惡조차도 초월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대개 윤리 도덕과 권선징악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각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문재일 것입니다. 불교를 교리상으로 많이 보고 배워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불교의 생명은 체험적 실천궁행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불교는 禪 속에서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6년 고행의 수도와 달마 스님의 면벽 좌선 그리고 성철 큰스님의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 등에서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원각경(圓覺經)』에 ‘마음이 미혹하면 천지가 암흑과 같고 마음이 열리면 천하가 나와 한 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원효 스님도 ‘한 생각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한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고 하였습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가정과 사회가 국가와 세계가 크나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만일 북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인과법(因果法) 하나만 알았더라도 절대로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을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을 통해서 살고 있습니다. 즉 눈에 의해 빛깔을, 귀에 의해 소리를, 코에 의해 냄새를, 혀에 의해 맛을, 몸에 의해 촉감을, 마음에 의해 싫고 좋음을 받아들이면서 사고하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 어떤 외형적 한 가지 모양에만 잘못 집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테면 꽃이 필 때는 진다는 진리가 반대로 질 때는 핀다는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고, 모든 눈에 보이는 형상은 임시로 뭇 인연이 모여서 있을 뿐인데 단지 밖으로 드러난 모양과 빛깔만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본래의 마음자리는 청정하고 평등합니다.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화엄경》에서도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평등하고 생명의 원천은 하나인 것입니다. 단지 청정한 바탕이 무명에 가리워 있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佛性 그 자체는 四部大衆 누구에게나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신령스런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인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지만 다른 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구원을 믿다 안 되면 실망이 큽니다. 불교는 스스로 깨닫는 覺의 종교이기 때문에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 합리성이 점점 더 증명되어가고 있습니다. 깨달음에 접근하는 방법은 염불, 독경, 참선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제일 빠른 첩경은 전술한 대로 참선일 것입니다. 참선을 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원천은 禪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원천을 찾아냈을 때 우리는 불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 것입니다.

 

 

 

 

 

정각도량

무법지대 / 한 보 광(서울캠퍼스 정각원장)



우리나라만큼 법이 많은 국가도 별로 없을 것이다. 길거리를 가다가 침을 한 번 뱉어도 벌금이며,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포장마차를 하여도 위법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법으로 묶여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다. 법과 규제로만 얽어맨 나라, 이로 인해 경영자의 자유 의지란 있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 편의로는 이렇게 많은 법과 규제가 있으나 수많은 범죄행위가 저질러지고 있으며 국민들은 일상생활에서 조차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런데 오직 법적인 규제가 없이 방치된 치외법권의 사각지대가 있으니 다름 아닌 종교단체에 관해서이다. 정부에서는 종교단체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불교․유교․기독교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가 있으며 종교 관련 시설물만도 약 5만여 개소 성직자는 15만명 신자는 5,160만 명(한국종교사회연구소 『한국종교연감』 1993, 208쪽)이므로 전체 인구의 숫자를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 관련정부기관으로는 문화체육부내에 종무실이 있으며 여기에 1, 2, 3과 등에서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또한 종교 관련 법령으로는 불교의 「전통사찰 보존법」과 유교의「향교재산법」이 있으며, 그 외는 일반 법령상에서 종교 관련 규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특별히 단체를 구성할 경우는 비영리법인의 설립 규정에 의한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의 설립을 인가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종교단체는 다른 비영리 법인들과 마찬가지로 재단이나 사단으로 행세하며 규제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단체로서의 특수성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일반 종교기관에서는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법률에 묶이기 싫어하다 보니 단체 설립을 기피하며 정부에서도 되도록 단체인가를 해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부에서 규제가 가능한 종교 단체는 「전통사찰보존법」이 있는 불교와 「향교재산법」이 있는 유교 및 몇몇의 재단법인뿐이다. 이 외의 대부분의 종교단체는 방치 상태이다. 특히 기독교와 신흥종교, 무속은 완전히 무정책 상태이다. 그러므로 규제에 묶여 있는 불교나 유교 측에서 볼 때는 방치상태인 기독교가 부럽기 그지없으며 이쪽은 늘 차별과 통제와 피해만 당하는 것처럼 느껴져 왔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과거에 있던「불교재산관리법」을 악법이라고 하여 오랫동안 그 폐지와 부당성을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결과 1988년에 「전통사찰관리법」으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이것 또한 악법이라고 하여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요인은 “왜 기독교 등에는 관리법이 없는데 불교와 유교만 있어야 하느냐.”라고 하는 종교의 형평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이면에는 “기독교 등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불교만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피해 의식과 과거 10. 27법난을 경험한 불교의 섭섭함이다.

사실은 이 법으로 인해 당하는 규제와 간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든다면 주지의의취임을 문화관광부장관에게 일일이 신고하여야 하며, 해당사찰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에서는 주지를 해임하고 재산관리인을 두는데 그 관리인은 시장․군수 등 지방 관리가 맡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경내에 조그마한 건물의 신축이나 보수만 하여도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생활상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여름 장마에 지붕에서 비가 세어도 장관의 허가 없이는 고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전통사찰관리법」이다. 다른 종교단체에는 없는 이러한 법을 만들어 두고 규제 일변도로만 나가니 불교계의 불평은 자연히 소리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불교계에서 악법이라고 주장하는 불교재산관리법(전통 사찰관리법)을 한껏 부러워하여 우리도 그러한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종교단체가 있다. 금년 초부터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재산 관리법」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국회에 상정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불교계에만 있는 악법을 보고만 있던 기독교계에서 왜 이러한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지금까지 무법천지로 자유롭게 살아오던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노출되어 심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전국을 뒤흔든 토초세와 종토세에다 금융실명제까지 실시되므로 인해 지금까지 법인화를 꺼려왔던 종교단체들이 갑자기 임의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들은 세금으로 된서리를 맞았으므로 그 자구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특히 금융실명제의 실시로 인해 임의단체에는 고유번호가 부여될 수 없으므로 막대한 종교 자금을 관리할 수 있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임시방편으로 불교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기독교재산 관리법」의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팽창된 종교계의 재산보존 및 상속의 길과 면세의 특혜를 누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천도교․원불교․대순진리회 등 수많은 각 종교 단체의 관리법이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정부에서는 지금까지 불교와 유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단체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며,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법적인 영역 밖인 치외법권지대로 성역화시켜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제도권내에서 관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금번에 있었던 국제신흥종교연구소장인 탁명환 씨 살해사건과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무법지대로 방치만 해두고 혹세무민하는 것을 수수방관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종교가 동일한 법적인지 위를 누릴 수 있는 통일된 “종교법인법”의 제정이 하루 속히 요망된다.

 

 

 

 

 

정각논단

불교와 유교 / 송 석 구(서울캠퍼스 부총장, 철학과 교수)



머리말

분명 불교와 유교는 본래 성립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이 다르고, 또 그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양자가 똑같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중심으로 서로 비교해 본다면 불교․유교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불교나 유교는 인간을 문제시한다. 사실 인간의 문제는 모든 종교나 사상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 물음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바탕하여 어떤 해결책까지 내리는 것이 종교요 사상인 까닭이다. 문제를 좀더 세분화시켜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이상상(理想象)은 무엇인가, 등이 인간성 이해를 위해 제시된 물음들이다.

이러한 인간성 이해의 한 전형으로서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들 수 있지만, 불교나 유교에서는 아무래도 삶과 죽음의 갈등으로 인한 현재의 고통이나, 현재 삶의 공고화를 위한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물론 앞의 것은 불교의 방향이고, 뒤의 것은 유교의 방향으로 어찌 보면 양자가 서로 반대적인 것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양자의 인간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른데 그 원인이 있다. 어쨌든 양자는 모두 인간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것을 비교해 보면 각자의 취지나 지향점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미리 덧붙여 둘 것은, 첫 부분에서 말했듯이, 불교와 유교는 그 배경부터가 판이하게 다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교는 할 수 없고 다만 개연적인 분석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하나는 현실 삶의 초월에 중점을 둔 것이고, 또 하나는 현실 삶의 긍정을 중시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불교와 유교의 차이점

인간 이해에 관한 불교와 유교적 견해 차이는 대략 네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교에서는 기본적 성선(性善)이라는 객관적 본성을 인정하는 반면 불교에서 그러한 본성은 없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은 심(心)이고, 인간의 본성이라 할 만한 것은 이 ‘마음’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성이라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낮고 용렬한 마음을 여의게 하고, 교만하고 낮은 품격의 사람을 여의게 하고, 진실한 법을 비방하지 않게 하고, 아집을 여의게 하기 위한 다섯가지 이유로 해서 시설된 방편설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불성을 자성(自性)으로 고집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성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세계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불교나 유교는 똑같이 이 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야 할 유일한 세계이지 임의로 벗어날 수 있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지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긍정이니 부정이니 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곧 유교에서는 이 세계가 벗어날 수 없고, 또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야 할 유일한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세계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세계는 무명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이며, 그래서 본래의 청정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세계로 본다는 의미에서 전자의 긍정이고 후자는 부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의 인간관은 따지고 보면 이러한 세계관에 부합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 차이에서 유교는 세간적으로 나아가게 된 반면, 불교는 출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유교의 인간관이 사회 윤리적 입장에 기초해 있다면 불교의 그것은 훨씬 근본적 의미에서 인생론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양자가 똑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무엇이가’라는 물음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반면 불교에서는 ‘인간이 무엇인가’, ‘나(我)란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다.

유교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는 인간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항상 규범의 실현을 통한 도덕적 인간성을 밝히려 한다. 유교의 성선이라는 본성관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에서 공통적으로 지향하게 되는 심리적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현실적 고뇌를 어떻게 극복하는냐 하는 인생론적 입장에서 인간성을 해명하려고 한다. 불교 또한 현실의 다양한 차별적 인간 존재 양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상은 바로 ‘나’를 고집하는 무명의 인간적 조건에 의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진 가상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이 차별상의 가상세계가 진여심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이다. 내가 일심(一心)을 깨달을 때, 그 진여심은 여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불교는 자아의 자주적 주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게 된다.

세 번째,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계열의 인정에 있어서 양자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유교에서는 개인의 육체와 마음은 언젠가는 변화되어 소멸하고 마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사후(死後)의 세계란 없다. 다만 자손이 그 연속성을 계속 받아 나갈 뿐이다. 이를 생생(生生)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불교는 윤회를 강조하여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자손이라고 하는 따지고 보면 다른 주체에 의해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무명에 빠진 ‘나’가 계속 연속하는 것이다.

사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관계가 없고,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업(業)에 의한 윤회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속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또한 해탈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래서 유교에서는 혈연적 관계를 가장 중시하나 불교에서는 출세간을 강조한다.

네 번째, 유교에는 사후가 없어 구원 또한 없으나, 불교에는 구원이 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성인을 최종 목적으로 하나, 불교는 해탈이 궁극적 목표이다. 유교적 목표를 위해서는 윤리가 본질적이어야 하지만, 불교에서는 세속적 윤리는 다만 방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그것을 성(性) 또는 이(理)라 하고 결국 인의예지이지만 불교에서의 성은 부증불감(不增不減),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 해탈의 근거가 된다.

이상이 대략적으로 살펴본 불교와 유교의 인간이해의 차이점이다. 이 양자는 차이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점도 있다.


불교와 유교의 유사점

이 양자는 이 세계가 인간이 살아야 할 유일한 세계임을 인정하는 데서 공통적 출발점을 갖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악, 즉 부정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는 데서도 일치한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다만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긍정적이고 착한 요소는 일반화시키고 보편화시킬 수 있지만, 부정적이고 악한요소는 그 정도 차가 심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렇게 정도 차가 심한 것은 우리가 논의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기준으로 할 수는 더 더욱이나 없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기준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긍정적이고 착한 요소이다. 인간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동양사상의 일반적 견해이며 유교나 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불교와 유교는 현실적 인간 구조가 정신적(心理的)․육체적(生理的)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이 두 가지는 하나는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육체를 초월해야 한다는 관념 같은 것은 없고, 다만 극복이라는 생각만 있다. 이것은 그 결과가 어찌되었건 간에 양자간에 공통의 출발점이었음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우주와 인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바로 인간에 중심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는 똑같이 인간이야말로 무한한 생명의 원천을 지닌 주체적 자각의 존재라고 본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을 옭아매는 원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성에 관한 절대긍정의 신뢰와 책임성과 자유를 인식하게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한 것이나, 맹자가 “길가는 모든 사람이 다 요순과 같다”라고 선언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새로운 유교인 성리학에서 불교와 일치하는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수행을 강조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성리학에서 ‘마땅히 그러해야하는 법칙(所當然之則)’으로서의 성(性)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자연 인간의 생리적인 욕망(人欲)을 무시하고 천리(天理)만을 보존하는 데로 나가게 되어(滅人欲, 存天理) 마치 불교의 허무멸정(虛無滅情)의 세계와 유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진여심과 생멸심을 나눈데 대해 성리학에서는 인욕과 천리를 나눈 것이라든지, 불교에서 생멸심이 정(靜)으로 될 때 진여심이 드러난다고 한 것을 유교에서는 멸인욕 존천리라 한 것 등 수행면에 있어서 양자는 유사한 방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면에 있어서 양자의 유사성은 무엇보다 마음에서의 수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교에서도 마음이 아직 발동하기 이전(未發)을 강조하는데, 마치 불교에서 마음에 불성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를 자성으로 상정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끝내는 말

이상에서 개략적이지만 인간에 대한 절대 긍정의 정신과 주체적 자각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마치 인간성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인간성 안에 부도덕과 몰염치, 비정 그리고 악질적 요소가 본래 내재해 있다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불교나 유교는 이러한 죄악적 요소를 원초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인간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한 죄악적 요소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본래 청정자성을 착각하는 데서 나타난 가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절대긍정의 신뢰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을 가능하게 한다. 현실적 인간의 모습은 착한 사람, 악한 사람, 부자, 가난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못난 사람 등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인간이 본래부터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인간은 궁극적 차원에서 누구나 똑같은 출발점을 갖는다. 다만 후천적 요인에 의해 그러한 차별이 생겨났을 뿐이다. 이미 후천적 요인이라 하였으므로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긍정적이고 착한 본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더욱 다듬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교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이와 같이 할 수 있음을 들어 인간이 선하다는 절대 평등을,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마음, 곧 불성이 모든 중생들에 다 있다는 점에서 절대평등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을 이루고 불(佛)을 이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는 많은 점에 있어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인간의 주체적 자각노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음에 양자의 큰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참고삼아 성리학과 불교를 비교해보면, 성리학은 본성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까지 이론체계를 확립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천리와 인욕을 대칭 시킴으로써 불교의 수양법에 따르게 되었고, 더욱이 마음에 치중하게 됨으로써 유교 본연의 윤리이론체계 확립에서는 한계점을 노출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불교는 형이상학적인 종교성을 강조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사회성의 극복에 대해서는 여전히 새로운 시도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인간의 이해라는 문제상에서 양자를 비교해 본 것도 결국에는 각자의 한계를 지적하여 발전적인 모색을 해보고자 하는데 있었다.

 

 

 

 

 

교리강좌

재(齋)와 포살 / 편집위원



불교의 재일

절에서 발행한 달력에는 예외 없이 음력 날짜와 함께 재일(齋日)의 표시가 있다. 이 표시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주로 성행하는 재일을 알 수 있는데, 지장재일과 관음재일이 각기 음력 14일과 24일에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주로 여성 신자들의 경우지만, 일반적으로 이 재일에 참여하는 열성은 곧바로 신심의 돈독함과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아무리 열성적으로 재일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불교에서 재를 지내는 본래의 취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신심은 자칫하면 자기의 복을 비는데 그치는 기복으로만 빠질 우려가 있고, 흔한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우려와는 관계가 없이, 절을 찾아가 법당의 불상 앞에 숙연히 앉아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마음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긴 하다. 하지만 재일의 본래 취지를 잘 살려 마음의 묵은 때를 씻고 나온다면, 그 청정의 힘으로 자기의 소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밖에서도 통용되어 있는 재일의 일반적인 뜻은 ‘금기 사항을 잘 지켜 심신이 청정하도록 조심하는 날’이다. 이때는 당연히 몸과 마음이 부정(不淨)에 물들지 않도록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데, 행동의 신중을 위해서는 특별히 중시하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재계(齋戒)가 재 또는 재일과는 필수적으로 연관된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매월의 8, 14, 15, 23, 29, 30일을 재일로 정하였는데, 이를 ‘6재일’이라고 한다. 이 밖의 재일까지 모두 망라하면 10일이 되므로 이를 ‘10재일’이라고 하는데, 이 10재일은『지장본원경』(地藏本願經)의 여래찬탄품이나 『시왕경』(十王經) 등에서 설하는 것으로 6재일에 1, 18, 24, 28일을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 10재일에는 ‘10재불’'이라고 하여, 신자가 재를 지낼 때 주로 의지해야 할 부처나 보살이 각각 배당되어 있다. 즉 1일은 정광불(定光佛), 8일은 약사여래, 14일은 보현보살, 15일은 아미타불, 18일은 지장보살(또는 관음보살), 23일은 세지(勢至)보살, 24일은 관음보살(또는 지상보살), 28일은 비로자나불, 29일은 약왕보살, 30일은 석가여래이다. 이렇듯 많은 재일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중시되는 재일은 불교국가의 신앙적 전통이나 관습에 달려 있고, 또는 사찰마다의 특수성에 따라 중시되는 재일이 다를 수도 있다.


재의 본래 의미인 포살

그러나 어떠한 재일에서라도 재에 참여하는 신자의 자세는 다를 수가 없다. 재는 그 원래의 말을 따를 경우, 포살(布薩)이라고 불린다. 포살은 원래 인도의 고대종교인 바라문교에서 중요한 제사전달에 행하는 일종의 준비의식이었던 것이 불교에 도입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에게 가까이 머문다는 의미로 신을 맞을 준비의식이었던 것이 불교에 도입되어 그 내용이 바뀌게 되었다.

애초에 불교의 포살은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스님들이 보름마다 한 번씩 모여 계율 조목을 암송하면서 자신의 수행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집회였다. 이런 집회가 나중에는 재가신자들의 의례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재가신자들이 매월 6회의 재일에 사찰에 모여 ‘8재계’라고 하는 계율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고 스님들을 공양하는 법회가 성행하게 되었다. 즉 승려의 자기 점검의 의례로 시작되었다가 그 취지를 살리면서 재가신도의 의례로 발전한 것이 포살이며, 이 포살이 흔히 말하는 불교의 ‘재’이다. 이 포살의 전통이 남방의 불교국가들에는 불교 신자의 일상적 생활의례로 보존되어 있다. 거기서는 포살이 그 하루 동안 승려와 같은 청정 생활을 실행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소위 ‘일일 승려’가 되는 관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포살이면서도 ‘재’라고 불리는 북방 불교의 포살은 그 본래의 취지가 간과된 채 대승불교 특유의 방편적인 부분만이 부각되어 성행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 방편적인 부분이란, 재일에는 사천왕이 대신들을 거느리고 세간을 순찰하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일에 참여하는 대개의 신자들은 절에 가서 공양을 바치는 것을 선행의 공덕을 쌓는 것으로 삼고, 이로써 복을 짓는다는 생각을 앞세운다. 그러나 공양을 바치는 것과 아울러 스스로 심신을 정화함으로써 생활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을 때, 비로소 재의 취지가 살아나고 재를 지내는 실질적인 과보를 얻는 것이다. 재일에는 특별히 8재계를 준수하도록 규정하는 것도 자기의 심신을 정화하는 데에 재 또는 포살의 보다 진정한 의의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팔재계의 정신

8재계는 불교 계율의 근본인 5계에 세 가지 조목을 추가한 것이다. 추가되는 세 가지 조목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절제를 강조하는 것을 취지로 삼고 있다. 즉 여섯째는 꽃이나 향으로 치장하지 말 것이며 노래나 춤을 즐기지 말라는 조목이다. 일곱째는 사치스런 자리에 앉지 말라는 조목이며, 여덟째는 때가 아닌 적에 먹지 말라는 조목이다. 특히 여덟째 조목은 오후불식(午後不食)이라 하여 한낮이 지나면 먹지 않는 수행자의 전통적인 규율을 재가신자도 재일에는 실행하도록 권하는 것으로서, 재의 취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 조목을 규정된 그대로 실행하기가 곤란할 수 있다. 따라서 8재계에 담겨 있는 정신을 살려서, 일상적 생활습관으로부터 탈피하여 그간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재일을 맞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여기서,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의의가 간과되기 쉬운 5계의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더욱이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로 번역되어 있는 5계는 한자번역의 함축성 때문에 계율 본래의 정신이 축소될 우려가 있다.

성전의 원어에 입각하여 5계의 내용을 옮기면, 불살생은 생명체를 파괴하지 않음이다. 따라서 이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한다. 불투도는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취하지 않음이다. 이에 의하면 훔치거나 빼앗지는 않았더라도 주인 없는 물건을 자기 소유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불사음은 애정 생활에서 그릇되게 행동하지 않음이다. 불망어는 허망한 말을 하지 않음이다. 이는 보통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불음주는 정신적인 나태를 유발하는 것, 즉 취하게 하는 것을 섭취하지 않음이다. 이는 보통 음주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음주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정신적인 해이를 방지하는데 초점을 둔다. 따라서 환각의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 금지된다. 대승의 10선계에 불음주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정신의 해이를 방지하는데 뜻이 있고, 계율을 지키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총명한 정신을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의 5계는 어느 경우에나 적용되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므로, 재일에 중시하는 8재계의 정신은 5계에 추가된 조목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그 정신이란 일상의 오염된 행위와 생각들을 절제하고 정화하여 건전한 삶의 생기를 재충전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결국 우리에게 복을 초래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전의 세계

법화경 / 편집위원



대승경전 중에서 대표적인 경전으로 꼽히는 법화경은 일승묘법(一乘妙法)과 회삼귀일(會三歸一) 및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말하자면 일체개공(一切皆空)인 진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우주의 통일적인 원리로 삼고, 거기에 기초를 두고서 전체적인 교설을 펴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을 설한 사명으로서는 종지용출품(從地湧出品)에서 말하기를, 대지 밑에 있는 허공세계에 살고 있는 지용(地湧)보살들이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대지의 틈을 뚫고 솟아나와서, 다른 보살들을 불러 모으고 거기에서 이 경전을 펼 것을 임무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그때까지 교단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서 이를 유지하는 데 공헌을 했던 보살들이, 이제부터는 표면에 나타나서 새로운 것을 형성하려는 과정을 상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 경전의 성립 배경이 된 소승교단에 대한 비판이 그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징성은 한편으로 부처님은 시간과 공간의 한정성을 초월한 분임을 의미하는 ‘무량한 생명으로서의 붓다’를 보고자 한 의도이며, 이 영원한 생명력으로서의 붓다에 대하여 아버지를 사모하는 자식이 귀입(歸入)하듯이, 입장을 바꾸어 붓다를 나의 생명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일여(一如)의 입장을 일승(一乘)이라고 하는데, 방편품에서는 이 일승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이 일승만이 있으며, 이승이나 삼승은 방편으로서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법화경은 오늘날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큰 규모의 경전이 아니라 아마도 8장 또는 10장으로 설립된 소품(小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그것은 서품의 일부와 방편품과 비유품이 먼저 성립되고, 이어서 견보탑품(見寶塔品)의 앞부분과 권지품(勸持品)의 극히 일부가 성립된 후에, 종지용출품, 여래수량품, 여래실력품이 성립되었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분별공덕품과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이 첨가된 10장의 경전이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7권 28품이 전하고 있는데, 1품과 14품까지는 적문(迹門)으로써 부처님의 활동의 족적(足跡)을 밝힌 것이고, 15품에서 28품은 본문(本門)으로서 본래의 모습, 다시 말해서 중생이 돌아와야 할 본래의 자리틀 가르치고 있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궁극적으로 이 경전이, 여래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듣게 하며, 우리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며, 이를 깨닫게 하여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앞의 작문에서는 인간의 자각의 세계를 그리고 있고, 뒤의 본문에서는 여래와 융합된 세계에 드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몇 품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견보탑품에서는 보살집단신앙의 중심이었던 불탑에 대한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여래수량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요 근원적인 생명으로서의 붓다를 체현하고자 한 보살들의 불타관을 반영하고 있다. 방편품에서는 중생들이 부처의 지견을 개오(開悟)하여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한 것으로, 소승에서는 도저히 성불할 수 없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까지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화경에서는 갖가지의 설화와 비유를 들어서 그 교의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이 경전의 문학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즉 이 경전의 발생을 다른 일면에서는 이르기를, 고대 인도에서는 기원전부터 이미 비구들의 교단과는 달리 재가보살들을 중심으로 한 보살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보다 진보적이고 신앙심이 강렬한 집단이 나타나서 기원을 전후하여 새로운 입장을 추구한 새로운 경전의 결집이라는 종교문학운동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대승운동의 하나로 서북인도에서 이 법화경이 결집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 문학성과 종교성을 말하는 연유이다. 그 비유문학 작품으로는 구체적으로 법화칠유(法華七喩)라고 하여 일곱 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품의 화택유(火宅喩)를 보면, 옛날에 한 돈 많은 장자(長子)가 살았는데, 그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 불이 나서 타고 있었으나 그때까지도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열심히 놀고 있더란 것이다. 아무리 큰 소리로 노는 아이들을 불렀지만 아이들은 들은 체도하지 않으므로, 꾀를 내어서 집 밖으로 빨리 나오는 사람에겐 양이나 사슴 및 소가 이끄는 수레를 주겠다고 외치니, 그때야 아이들은 장난감에 현혹되어 밖으로 뛰쳐나옴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는 불난 집에 관한 비유 설화이다. 여기서 보면 장자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이들이 뛰놀던 퇴락한 큰 집은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바세계 즉, 억지로 참으면서 생명을 유지해가는 인토(忍土)를 말하고, 집 속의 아이들은 부처님이 어여쁘게 여기는 범부 중생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오니, 부처님은 이들에게 더 좋은 큰 흰 소가 이끄는 수레를 주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삼승(三乘)은 방편이고 일승만이 진실하다는 이치를 밝힌 것으로써 회삼귀일 사상을 천명한 내용이다.

신해품(信解品)의 궁자유(窮子喩)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이 어릴 때에 그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타국에 나가서 오래 살다가 오십 년이 지난 어느 때에, 우연히 잘 살고 있던 자기 아버지의 집에 품삯을 팔려고 들렀던 것인데, 그러한 그를 금방 알아본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서 붙들어 놓으면 소심한 마음에 겁을 먹고 달아날 것 같아서, 여러 가지의 방편으로 집에서 하찮은 일을 시키면서 숙식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인간적으로 신뢰감을 쌓은 뒤에 그 장자는 지난 과거사를 아들에게 상세하게 말하고 진실로 ‘너는 나의 잃었던 아들이다.’라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므로써,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고 가사를 잇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 설화의 근본적인 이념은 소송론자 즉, 겁 많고 소심한 자들로 하여금 자기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보배를 찾아내어서 대승으로 나아갈 것을 역설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이외에도 비유품은 약초유품과 화성유품, 안락행품, 수량품 등에서도 나오고 있다.

 

 

 

 

 

불심의 창

성지 순례 유감 / 안 중 옥(경주캠퍼스 총무과장, 동국문수회 회장)



이야기 거리가 되는 대부분의 화제들은 지나온 시간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먼 과거의 것이든 또는 발치에 놓였던 것이든 각각의 추억이 되어 항상 마음속에 살아 있기 마련이다.

동국문수회가 다녀온 성지순례! 그때 그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는 시간을 지면에다 옮겨 놓으려 한다.

문수회가 다녀온 성지순례는 지금까지 다섯 번이다, 재작년 가을에 표충사를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울진 불영사, 남해 보리암, 문경 봉암사를 다녀왔고 올 2월에는 곡성 태안사에 우리들의 발자국을 그려 넣었다. 매번 빡빡한 일정 탓에 동참한 법우와 가족들에게 인내가 요구되었으나 불법을 만나러 간다는 마음에 하나같이 설레임으로 상기되었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기억 속에서 지난 여름에 갔던 남해의 보리암과 최근에 다녀온 곡성 태안사의 순례 느낌을 적으려 한다.

남해 보리암으로 성지순례 일정을 계획하게 된 것은 서울보현회 법우들과 만나 합동 법회를 갖기로 결정한 때문이었다. 보리암은 경남 남해 금산의 정산 부근에 위치한 관음도량으로서 남해의 수려한 경관을 품에 안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다.

보리암을 목적지로 한 문수회의 경주 출발 시각은 오후 1시, 우리 일행을 태운 학교버스는 88고속도로를 지나 남해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장마철이어서 빗방울이 간간이 차창을 두드렸다. 진주 근교의 다솔사를 참배하고 나올 때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어 깊은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다솔사는 고요와 적막 속에 풍경소리만 어둠을 갈랐다. 다솔사에서 쫓기듯 달려온 일행은 어느덧 육지의 남쪽 한 끝점에 도착해 있었다. 남해가 고향인 법우의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대로 우리는 걸어서 남해대교를 건너기로 했다. 수천만 톤이 족히 넘을 육중한 대교도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에 움츨대는데 ‘속세에 찌든 우리들 마음이야 어찌 움직이지 않겠는가?’하는 생각 속에 갈팡질팡했던 감정을 위안하며 바다 위를 걸어갔다.

금산 아래에 다다른 일행은 험한 산길이라 학교 버스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보리암에서 보낸 소형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장마에 깎이고 파헤쳐진 길을 터덜거리며 애써 올랐던 버스는 충격 때문이었는지 고장이 나 칠흑같이 어두운 비바람 속을 걸어서 보리암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가 부족한 탓에 손전등은 고작 한 개. 가느다란 불빛에 의지하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보리암을 찾았다. 시간은 이미 10시를 훨씬 넘어 있었다. 법당을 참배하고 방에 모인 일행의 모양을 보니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내 잠든 법우도 있고 몇몇 법우는 철야정진 하겠다고 법당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오기로 한 보현의 법우들은 오지 않고 연락마저 두절되었다. 날씨 탓에 순례 일정이 순조롭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처마 밑에 멍하니 서있는데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신도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무얼 저리도 염원할까. 밖에는 폭풍우가 요란스럽게 휘몰아치고 있는데 한밤중에 무엇을 구하려고 합장한 채 밤을 새우는 것인가.

새벽 예불 시간까지만 해도 쏟아지던 장대비는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법우들은 떠날 행장을 차리고 있고 구름인지 안개인지 산을 감싸 안는다. 그런데 그 속을 헤치며 보현회 법우들이 아침 공기에 맑게 씻기운 모습으로 경내를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밤새 걱정한 것이 기우였음을 깨우치며 우리도 객인데 주인인양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란 만난다는 반가움 그 자체였다.

금산을 걸어내려 오는 길에 주위를 살펴보니 한없이 평온한데 부처님께서 우리들의 신심을 시험해보려고 지난밤 그리 고생시키셨나 하는 속 좁은 생각을 해 본다. 주지 스님께서 들려주신 법문의 여운을 뒤로하고 문수, 보현의 첫걸음은 하동의 쌍계사로 향했다. 금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지 못한 아쉬움 속에 일행을 태운 학교 버스는 쌍계사를 들러 섬진강 줄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화개장터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버린 옛 정취를 더듬으며 한 끼의 점심을 같이하고 보현회는 대흥사로 문수회는 경주로 예정되어 있는 각각의 여정에 나섰다. 헤어져야만 하는 아쉬움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눈길을 돌렸는지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논개의 고장 진주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며 한 여름철이라 더위와 장마로 어린이 법우들이 배탈이나 나지 않을까 한 걱정을 놓아버렸다. 우리들 순례 일정에는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력이 같이하니까.

지난 겨울방학을 맞아 1박 2일의 일정으로 동계성지순례를 계획하고자 몇몇 법우들이 모였다. 순례할 장소는 곡성의 태안사를 비롯하여 남원 일원으로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학교사정을 고려하다 보니 순례일을 짜 맞추기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도 출발하기 바로 전날 순례일정을 연기해야 하는 사정이 되고 보니 모든 회원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태안사는 전남 곡성에 위치한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거였으니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고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토요일 오후에 출발을 서두른 우리들이 태안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30분,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하고 맑아 퍽이나 다행스러웠지만 산사의 날씨는 아직 매서움이 남아있었다. 법당에 참배를 하고 종무소에 인사하니 저녁 공양에 앞서 법문을 먼저 듣자고 했다. 꽤나 시장하였을 테고 장시간의 강행군이어서 피곤함도 컸을 텐데 이제 두 돌 지난 어린법우부터 거의 육십이 다된 법우까지 정연하게 앉아 한 시간을 훨씬 넘긴 법문을 경청하고 있었다. 온돌인 대중방은 펄펄 끓고 있어 졸음이 쏟아지기 십상인데도 누구 하나 스님의 법문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에서 동국문수회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저녁공양이 늦은 시간에 끝났는데도 끝까지 잡무를 보살펴 주시는 스님들 모습을 보면서 공부하는 사찰임을 느낄 수 있었다. 법우들은 모두가 철야 정진하기로 약속하여 백팔참회를 하려고 새벽 예불을 맞았다.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피로를 느끼기는커녕 아침나절에는 산새소리처럼 더 맑아진 음성으로 서로의 얼굴을 대하고 있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한 그대로의 모습들이다. 아침 이른 시간에 태안사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구례 화엄사, 연곡사를 참배한 후 춘향의 고향 남원 땅에 들렀다.

다시 또 봄을 맞는 새 기운의 소리가 온 대지에 우렁차다. 부처님 법으로 맺어진 우리들이 인연법에 따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하기를 부처님 전에 간절히 염원들이며 성지순례에서 느낀 조그만 감정의 실타래를 감을까 한다.

 

 

 

 

불자탐방

김영길 교수 / 편집부



이번 호에서는 이번 학기부터 경주캠퍼스에 신설된 불교문화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신 불교학과 김영길 교수님을 만나뵈었다.


먼저 취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이제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하던 셋방살이를 마감한 셈입니다. 얼마 전에 불교문화대학 새내기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육은 백년 사업이다. 문화는 천년 사업이고 종교인 불교는 만년사업이다. 그렇다면 불교문화대학은 백천만년의 사업이다.’ 움츠렸던 겨울을 털고 일어나서 봄을 준비하는 농부의 마음새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문화대학 설립의 의의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불교문화대학의 설립은 우리 대학을 아끼는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이 성숙한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동국대학교의 본분에 대한 자각과 주체성이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여러분들이 걱정해주시는 바대로 구성학과가 둘뿐이라서 아쉽기는 하지만, 불교문화대학의 출발이 동국대학교의 본분과 개성에 따른 것이므로 학과의 수가 많고 적다는 물량적인 기준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불교문화대학의 설립은 세계의 대학으로 도약하는 동국대학교의 개성을 강화하는 기능도 클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볼교문화대학의 기반을 닦기 위해 힘쓸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장님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는데, 특별히 고려하고 계신 일들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 불교문화대학의 연구와 교육환경이 패적하게 되도록 모두가 동참하는 분위기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일들을 해야겠지요. 우선 대학 구성의 완성을 들 수 있습니다. 불교문화학과나 선학과 등의 증설이 논의되었는데, 문화라는 기치 아래 불교 관련 분야를 집약하고 총체적인 학문 영역으로 개방하여 확산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러면 불교학의 질적인 심화와 양적인 확대를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이미 개설된 학과의 교육 여건 개선입니다. 불교아동학과의 경우 진작 세운다던 부속 유치원이 아직도 설립되지 않았습니다. 또 학생들은 모 대학의 사회교육원은 단기 과정에서도 수강생 모두에게 유아교사자격증을 주는데 우리들은 4년간 배우면서도 왜 3할 밖에 취득할 수 없느냐고 합니다.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불교문화대학교수님들의 숙원입니다. 우리 대학은 모체가 조계종입니다. 조계종은 그냥 불교라는 통념이나 상징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직체입니다. 우선 모체가 건강하게 성장해야합니다. 그래서 종합대학의 총체적인 학문 영역을 집성하여 종단의 발전을 도울 수 있는 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합니다. 바로 ‘조계종 종학 연구소’의 설립을 제안하는 일입니다”


학장님께서는 ’86년에 도서관장을, 이어 ’88년에는 박물관장을 역임하셨고 교양강좌인 ‘한국문화의 불교’를 강의하십니다. 학장님께서는 전통문화 특히, 불교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교문화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글쎄요, 전통적인 불교문화라면 신라는 조각문화, 고려는 회화, 조선은 건축이나 의례 의식이 주가 되겠지요.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신라는 인간본위의 빼어난 기상과 현실 감각의 주체 문화이고 고려시대는 빼어난 감성과 이상이 깃들여서 꿈도 있고 아름다웠다고 하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는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참여의 소박성과 우직 강건함이 개성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천대를 받으면서도 구극의 활약상을 펼친 것이나 영산대제, 49제, 예수제의 흥행도 이런 기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불교문화를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전통 이행의 한규범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객관화의 이행이라는 것입니다. 신라는 불교문화의 심화이자 주체화과정입니다. 늠름하고 빼어난 기상의 석탑과 불상들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고려시대에는 겨레와 국토에 대한 이상이나 염원이 불화나 팔만대장경이라는 현실로 확장됩니다. 글이나 그림은 불상이나 탑보다는 타인화된 것입니다. 심화한 개성의 확산이지요. 또한 조선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거대 웅장한 의례의식은 교단의 왜소성이 순화한 저항성으로 비대화하고 장엄 화한 타인화, 객관화의 확산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불교문화는 타인회의 극치인 보살화, 사회화로 이행해야겠지요. 중세 교회나 회교 모스크와 다원적이고 평면적인 큰절의 공간을 평면성이나 집단성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보십시오. 산업문화다운 개성 있는 구조와 공간의 탈 절대평준의 좌표가 됨직 합니다. 음악도 보세요. 저는 염불이나 범패의 특성을 시김질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요즘 음악의 그것을 침묵성의 가늠질이라고 합니다. 이래 야만 염불을 국제화, 개방화할 수 있고 세계적 향도문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높임질이 아닌 음악은 아무도 모릅니다. 멋을 부릴 줄도, 들을 줄도, 볼 줄은커녕 아랑곳하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불교문화를 개발하여 사회로, 세계로, 미래로 확산해야 합니다.”


끝으로 불교문화대학 학생들을 포함한 젊은 불자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능력 있는 기사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안목이 커서 미리미리 내다보고, 멀리서 보고 판단하고,가까이서 잽싸게 피해 갑니다. 서툰 자나 거친 자가 뛰어들어도 기백이 넉넉하게 제갈 길을 갑니다. 결코 접촉 사고를 내지 않습니다. 인생도 그처럼 ‘넉넉하게 미리미리’ 살아가야 합니다. ‘안상이기’(安相而起)라는 말이 법화경에 있습니다. 평화롭게 상서롭게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가람의 향기

운주사 / 편집부



전남의 화성군은 그 이름처럼 아늑하고 푸근한 곳이다. 마한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여래비리국, 여미, 해빈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화순’이라는 이름을 얻은 화순군은 전남의 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운주사(雲住寺)도 이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화순읍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千佛山) 기슭에 있다.

운주사는 소박한 민중의 얼굴을 한 90여 구의 석불과 파격적인 형식미의 21기의 석탑이 ‘천불천탑동(千佛千塔洞)’으로 불리는 골짜기에 산재한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렇지만 이곳 운주사와 천불천탑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고 조성되었는지는 문헌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조성에 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설화는 통일신라말의 선승 도선(道詵) 국사가 하룻밤 하룻낮 동안 도력으로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다는 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에 찬술된『도선국사실록(道詵國師實錄)』은 국사가 우리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민물(民物)을 편안하게 하고자 배가 운행하는 형세인 우리나라의 각지역에 사탑(寺塔)과 불상을 세워 비보 진압하였는데,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전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운주사에서 멀지 않은 춘양면에는 촛대봉이 있다. 그러나 이 설화는 말 그대로 설화일 뿐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운주사에 대한 문헌 기록이 사지(寺誌)는 물론이고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것이 전무한 데다가 대개가 조선시대의 기록마저 지리지류에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내용 또한 운주사가 천불산에 있으며 좌우의 산등성이에 있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천개이며 석실에 2기의 석불이 서로 등지고 앉았다는 내용을 전할 뿐이어서 도선 국사가 창건했음을 증명할 만한 구체적인 사실이 게재되어 있지 않다.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세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시기가 앞서는 것으로 보이는 해무리 굽청자편이 10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므로 운주사건물의 초창 연대는 늦어도 l1세기 초반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흥덕왕 2년(827)부터 효공왕 2년(898)까지 생존한 도선국사가 생존 시기보다 훨씬 뒤인 고려 초기에 창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천불천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도 그간의 연구에 따르면 그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것이다.

다만 고려시대의 사원이 태조의 훈요에 의해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산천비보진압설(山川裨補聳員壓說)에 가탁(假託)하여 운 주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도선국사가 운주사를 창건하고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다는 설화는 오랫동안의 구전 전승 과정을 거친 후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도선국사실록』에 문자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조성에 관한 설로는 신라 말의 능주 지방 호족세력에 의해서 개칭되었다는 설, 능주지방에 이주해 온 이민족 집단에 의해 개칭되었다는 설,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들과 노비들이 조성했다는 설 등이 있다.

운주사는 고려시대를 거쳐 연산군 1년(1495)에 네 번째 중수가 이루어졌지만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운주사는 약 20년 후인 19세기 초에 설담자우(雪潭自優)에 의해 약사전이 건립, 중건되면서 약사도량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운주사는 고려 중․후기에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천불천탑의 불사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운수사의 조성 시기는 고려 중엽이라는 설과 12, 3세기라는 설, 11-14세기라는 설 등으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대체로 고려 중기에서 시작되어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도 군소 종파의 난립, 토착적 신비사조의 부활, 민중 중심의 지방불교를 특징으로 한 13세기 불교계의 동향으로 인하여 13, 4세기의 집중적으로 조성 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운주사의 불상은 총 90여구가 남아있다. 이들 불상은 형상이 단순화되고 변형이 심하며 그 조각수법 또한 거칠다. 또한 이들 석불의 상호나 수인 등은 전통적인 불상 조각의 정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 불상이 거의 유사한 정서와 조각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신비스런 민중적 설화로 문학적 해석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운주사의 불상들은 정형이 깨지고 심하게 변형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적 묘사가 크게 퇴화한 고려시대 전기불상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수인을 볼 때 비로자나불의 표현 양식에 가깝다.

운주사의 석탑은 21기가 현존하고 있는데 형식상 탑신과 옥개석이 방형을 이룬 방형석탑, 방형석탑과는 달리 탑신과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원형석탑, 모전계열 석탑, 지대석 위에 방형과 원형의 중간 형태의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은 석주형 폐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석탑은 천연암반이나 커다란 석괴를 기단으로 하거나 탑신에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거나 사선문양으로 옥개받침을 대신하는 등 신라 석탑이 보여준 정형성은 사라지고 다소 무계획적이고 무작위(無作爲)한 기법이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이곳처럼 한 장소에 수많은 석탑이 다양한 모습으로 건립된 예는 없다고 한다.

이 밖에도 운주사에는 석조불감이 전하고 있는데, 지대석 위에 여러 매의 판석을 조립하여 기단 면식을 구성하고 그 위에 널찍한 갑석을 놓아 감실을 받치고 있으며 감실위에는 팔작 형태의 지붕을 얹었다. 감실 안에는 2구의 석불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운주사에는 석불을 제작하기 위해 채석한 흔적이 10여 군데 나타나고 있으며 서쪽 산등성이의 중간부분 비탈진 곳에는 ‘칠성바위’라고 불리는 원반형 석재 7개가 놓여 있다. 이들은 한쪽 직경이 약 10cm정도 더 긴 타원형으로 칠성신앙의 조형물인 북두칠성석으로 추측된다. 이들 직경의 대소는 북두칠성의 별 밝기와 대체로 비례한다고 알려져 있다.

 

 

 

 

 

일주문 

마음의 바른 눈 / 이 봉 춘(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육신의 눈이 건강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의 눈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거나 잊고 지내기가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마음의 눈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곧 우리들의 인생관이랄까 세계관 같은 그런 문제로서, 세상과 인간 그리고 모든 존재에 대해 바른 인식, 바른 눈을 지녀야한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잘못된 인식과 관념이 얼마나 큰 죄악과 불행을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많은 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찍이 나치즘이 그러하였고 완전붕괴 직전에 있는 공산주의가 그렇다. 인간을 수단시하는 등 현대사회의 온갖 바르지 못한 견해와 관념들이 빚어내는 해악과 폐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마음의 바른 눈을 가져야 함은 우선 자신의 행복과 완성을 위해서이다. 또한 더불어 살아야할 이 세상 모든 이웃들의 행복과 완성을 위해서도 그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서의 八正道의 맨 첫머리에 세상과 존재에 대해 바르게 관찰할 것을 뜻하는 正見이 설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그것이 화엄경 등에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조화를 이루어 함께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는 見和同解로 전개되고 있으며, 禪家에서 또한 이 문제는 가장 요긴한 것으로 간주된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바, 위산 영우선사는 “깨달음의 밝은 눈이 소중할 뿐 그대의 행동은 문제가 아니다.(只貴子眼正 不貴汝行履處)”라고 말한다. 바른 눈을 뜬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른 행동이 있기 마련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은 물론 온 세상 이웃들의 행복과 완성을 위해서도, 인간은 바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인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관찰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바른 눈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신앙과 종교 문제에 있어서 바른 눈은 더욱 절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흔히 종교는 삶이 직면하는 물음들에 대한 해답으로 여겨지며, 그것은 그만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가치체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종교의 사상이나 가르침은 신성시되고 또 절대화하는 경향을 띠게 마련이지만, 이 때문에 그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바른 눈은 더욱 중요하다. 일찍이 붓다는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 사상을 망라하여 신의론(尊佑作因說)․숙명론(宿作因說)․우연론(無因無緣說)의 셋으로 크게 구분하고 이를 철저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른바 3종 外道說 비판이 그것이다. 이는 붓다 자신이 다양한 종교 사상 속에서 방황을 체험하고 또 그것들과 결별한 후 마침내 독자적인 방법을 통해 正覺을 이룩함으로써 도달한 결론이기도하다. 우리가 세상과 인간에 대한 正見 즉 바른 눈을 지니기 위해서는 보다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럴 경우 붓다의 이 같은 체험적 깨달음과 그 가르침은 더할 수 없는 길잡이가 아닐 수 없다.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지만 사이비 종교의 폐해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신흥종교 연구가가 피살되기도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종교적 현실의 일단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들이 특히 종교 신앙 문제에 있어서 바른 눈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동국과 불교 6-불교고등강숙시대

불교고등강숙으로의 재출발과 폐교 / 편집위원



불교계가 원종(圓宗)과 임제종(臨濟宗)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동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돌연 일본의 대불교정책의 기본법인 ‘寺刹令’을 제정 공포한데 이어 다음 달에는 ‘寺刹令施行規則’을 공포하였다.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은 당시 조선총독이던 寺內正毅가 日人 불교학자 渡邊彰으로 하여금 작성케 한 것이었다. 그 주요 골자는 ①30개 本寺지정 ②本寺주지에 대한 총독의 인가 및 그 末寺 주지의 各道 도지사 인가 취득 의무 ③토지․삼림․건물 등 사찰의 재산처분에 대한총독의 허가 사항 등으로 요약된다. 이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율성을 해체시켜 총독의 식민 지배 수단을 강화하는 한편, 행여 사찰의 재산이 비밀리에 항일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저의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찰령에 대해 당시 불교계에서는 표면상 이렇다 할 반대 내지는 저항운동이 없었다, 이는 당시 불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의 빈곤한 역사의식과 무기력에도 그 이유가 있었지만 좀더 다른 원인이 있었다. 즉 그 정도만 해도 조선말에 비하면 불교계의 여건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는 것과, 당시 가장 경계하던 한국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안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저항과 반대는 커닝 오히려 다투어 사찰령에 의한 불교계의 재편성을 서둘 정도였다. 그리하여 대립해온 원종과 임제종을 모두 해산하여 전국 불교계를 30교구로 편성하고, 총독의 인가를 얻어 취임한 30본사의 주지들은 사찰령 제2조의 규정에 따라 다시 本末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하에 이를 시행해 나갔다.

그러나 30개 교구로 나뉘어 지방 분권적 敎政을 실시하게 된 불교계는, 각 본사 간의 횡적 관계 유지와 포교․교육․대사회활동 등 불교계 전체의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기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찰령 공포 이듬해인 1912년 봄, 서울 각황사에서 제1차 본사주지회의가 개최되어 「30本寺住持會議院」을 설치키로 하고 한국불교계 전반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매년 1월중에 정기총회를 갖기로 합의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열린 제1차 총회에서는 불교계의 현안 문제가 토의되었으나, 그 중 교육에 관한 문제는 ‘會議院’ 임원(원장 해인사 주지 이회광)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에 따라 동년 7월 각 본산주지회의원장 이회광은 주지회의원으로 박한영을 초대하여 지난 모든 일은 불문에 붙이고 불교의 장래를 위해 앞으로 함께 힘쓸 것을 제안하니 박한영도 쾌히 승락하였다. 이에 이회광은 그의 복안으로 회의 원내에 고등불교전문강당을 설립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박한영으로 하여금 그 책임을 맡도록 하여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런 일과도 관련하여 1913년 1월의 제2차 정기총회에서도 불교계의 교육에 관한 문제가 광범위하게 논의되었고, 불교사범학교 재개의 원칙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앞서 1911년에 제정 공포된 「사립학교규칙」에의 저촉 여부, 그리고 항구적인 불교종립학교로서의 유지 방안 등을 보다 깊이 검토하기 위해 1년간의 연구와 준비 기간을 두기로 하고 그 임무를 다시 원장에게 일임하였다. 이에 따라 1914년 제3차 정기총회에서 원장 이회광은, ①불교계에는 보통학교(1911년 당시 15개)와 전문강원(47개)만 있을 뿐 고등학문을 교수할 기관이 한 곳도 없으므로 30본산주지회의원 이름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②불교고등강숙을 금년 4월부터 원흥사에서 불교사범학교의 뒤를 이어 발족시키되 그 학제는 잠정적으로 본 총회에서 정하기로 한다. ③고등강숙에는 각본사별로 公費生을 할당하며, 自費유학생도 인정한다는 등의 불교 교육에 관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이들 내용은 그대로 통과되었고 또 잠정적으로 불교고등강숙의 임시 규약도 의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개교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명진학교와 불교사범학교의 校舍로 쓰여온 원흥사에서 그 학교의 뒤를 이어 불교고등강숙이 발족되니, 1914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불교고등강숙은 어디까지나 불교사범학교의 뒤를 이으며 아울러 장차 한국불교의 대표적이며 명실상부한 신교육기관의 출현을 전제로 한 발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고등강숙의 학생은 各寺 전문 강원에서 大敎科를 이수한 승려에 한할 것, 그리고 교내에서나 교외에서나 항상 法衣를 착용해야 했던 것, 또는 諸 규율이 매우 엄했던 것 등은 명진학교나 불교사범학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학교의 모든 행사가 양력으로 행해진 것, 3학기제로 한 것, 또는 휴일을 일제의 경축일에 따른 것 등은 전 시대와 다른 것이었다.

불교고등강숙은 당시 한국불교계 전체의 여망 속에서 발족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개교 준비를 서두르던 동년 1월에는 교계의 희사가 잇달았다. 화엄사 주지 이지영이 書籍代로서 120圓을, 용주사 주지 강 대련이 燃料代로서 60圓을, 그리고 마곡사 전문강원 강사 김보련이 燃油代로서 20圓을 각각 희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불교고등강숙은 개교한 지 불과 반년도 못 되어 다시 폐교의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실로 어처구니없고 통탄할 일이었다. 이런 소동은 당시 한국불교계의 기성 對 신진, 보수 對 진보의 대결에서 기성․보수층의 횡포의 결과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불교고등강숙의 폐교는 청년 학생승려들의 ‘조선불교회’ 조직이 그 발달이었다. 당시 불교계의 원로격인 본산 주지들의 무기력, 즉 일제의 불교정책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오직 순응하는 태도에 대해 평소부터 분개하던 엘리트 청년 승려들은 불교고등강숙이 열려 다시 한 울안에 모이자 의기화합하여 조선불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기운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회광을 비롯한 본사주지 등 기성 보수 승려들이 가장 당황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학생들의 새로운 불교운동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를 사전에 봉쇄코자 새로운 불교운동의 근원지인 불교고등강숙을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직권으로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불교고등강숙의 폐교는 당시 동아일보(1920년7월 3일字)가 지적하고 있듯이, 강숙이 장차 이 나라 불교계의 역군을 길러내는 역할을 기대하게하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실로 통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애국,  애종적인 불교청년운동의 발단이 이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불교고등강숙이 폐교되었기 때문에 다음 中央學林의 개교가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고등강숙의 폐교는 한국불교사와 東大史上 그 나름대로의 의의는 찾을 수도 있다 하겠다.

 

 

 

 

비유와 설화

과보의 세계를 피하는 길이 선업 공덕의 길 / 편집위원



전생에 진 빚 금생에 와서 갚다

옛날 바라나국에 5백 명의 장님이 있었다.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구걸했으나 마침 세상이 흉년이었으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여서 의논했다. “지금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시하게 하신다 하니 우리도 그 나라에 가면 목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기 말했다. “길을 잘 아는 사람을 사서 우리를 데리고 그 나라로 가게 하자.” 그들은 각각 은전 한 푼씩을 내어 품팔이꾼을 샀다, 품팔이꾼이 그들을 데리고 가다가 말했다. “이 밑에는 길이 험하니 가진 돈을 내게 맡기시오. 혹 도적을 만날지 모르니 내가 간직하겠습니다.”

장님들은 각자 가진 돈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그는 돈을 받자마자 그들을 버려두고 도망 가버렸다. 장님들은 오도 가도 못하여 길거리에서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며 말했다.

“거룩하신 부처님,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이 액을 면하게 하소서.”

부처님은 올연히 그들 앞에 나타나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어루만지셨다. 그들은 모두 눈이 밝아지고 배가 불러졌다. 그리하여 기뻐하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수염과 머리칼이 저절로 떨어지고 가사와 발우가 손에 들려졌다. 부처님이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니,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 된 뒤에 부처님을 따라 기타림으로 돌아왔다. 아난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5백 사람들은 전생에 어떤 죄와 복을 지었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지나간 세상에 어떤 장자(長者:부자)가 있었다. 그는 품꾼 5백 명을 부렸는데 그 5백명 품꾼들은 품삯을 먼저 받고는 그를 버리고 모두 떠나가 버렸다. 그 때문에 그 뒤로는 여러 세상을 지내면서 그들은 이런 액을 받았으니, 그때의 그 장자가 바로 지금 돈을 가지고 간 저 사람이다. 그들은 빚을 갚고 마침 나를 만나 마음이 열리어 모두 도를 얻었으니, 죄와 복의 업은 이와 같느니라.”

그러므로 자기가 지은 업은 언제인가 자기가 받는 것이니 나쁜 업은 짓지 않아야 한다.

(衆經撰選集譬喩經)


부처님이 나무창에 발을 찔리다

부처님이 나열기성에서 큰 비구승 5백 명과 함께 계셨다.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5백의 비구승 및 아난과 함께 성내에 들어가 집집을 다니면서 걸식하셨다.

어느 마을에서 높이 1천 2촌쯤 되는 부러진 단단한 나무 한 조각이 부처님 앞을 가로막으면서 오뚝이 서는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가만히 생각하셨다.

“이것은 전생의 인연이다. 내가 지은 업이니 내가 당해야 한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모여 구경하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부처님은 다시 생각했다.

“지금 나는 전생에 지은 인연의 과보를 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봄으로써 인과를 믿고 감히 악을 짓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땅에서 한 길쯤 높이의 허공으로 솟아오르자 나무창도 곧 부처님을 쫓아 올라와 부처님 앞에 섰다. 부처님께서 다시 두 길, 세 길 내지 일곱 길까지 오르시자 나무창도 따라 올라왔다. 부처님께서 다시 1다라나무 높이로 오르면 나무창도 그를 따라 올랐고, 부처님께서 10다라나무 높이로 오르면 나무창도 그를 따라 올라왔다. 부처님께서 다시 10유순, 12유순, 강과 불과 바람을 동원해도 그 나무창은 올라왔고, 사천왕궁에서 범천에 까지 오르자 나무창도 삼십삼천으로부터 차례로 범천까지 올라와 부처님 앞에 섰다. 하늘은 그들끼리 “부처님께서 이 창을 두려워하시며 달아나신다. 그러나 창은 끝내 그대로 두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그때 세존께서는 범천에게 자신의 전생의 인연을 설명하시고 나열기성까지 내려오시면서 지나는 하늘마다 그들에게 모두 전생의 인연을 들려주셨다. 나무창도 부처님을 따라 그대로 나열기성으로 같이 내려왔다. 아난 등 비구들을 모두 제방으로 돌려보내고, 이 인연은 전생에 내가 지은 것이니 내가 마땅히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곧 대의(大衣)를 벗어내 겹으로 접어두시고 본자리로 도로 앉으셨다. 그리고 오른 발을 펴시자 나무창은 발등 위에서 발을 뚫고 밑으로 6만8천 유순의 땅속을 지나 물에 이르렀고 또 물 속 6만8천 유순을 지나 불에 이르렀으며, 그 높이 6만8천 유순의 불에 이르러 비로소 타버렸다. 이때 대지가 여섯 번 진동했다. 아난과 비구들은 생각했다.

“이 대지가 이렇게 진동하는 것은 그 나무창이 반드시 부처님의 발을 꿰뚫은 것이리라.”

부처님은 그 발이 나무창에 관통되어 고통이 매우 심했다. 아난은 부처님께 가서 그 발의 상처를 보고 자리에 쓰러졌다. 부처님께서 찬물을 끼얹어 주자 비로소 아난은 깨어나 부처님 발에 예배한 뒤에 발을 닦아주며 눈물을 흘리며 생각하였다.

“부처님은 이 발로 보리수 밑에서 악마를 항복 받으셨고 33천에 올라가시어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셨다. 부처님은 금강의 몸이신데 무슨 인연으로 나무창에 다치시는가.”

부처님은 아난에게 또 말씀하셨다.

“그만 그쳐라. 울지 말라. 세간의 인연으로 생사에 윤회하면 이런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이제 상처의 고통은 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조금 나아간다.”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이 짓는 행은 선이든 악이든 그 행은 자기 몸으로 다시 돌아오나니 끝내 그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모든 법(法)은 다 연대(緣對)이다.

내 몸은 금강과 같아서 나무창이 부술 수는 없지마는 이것은 다 전생의 업으로 부서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그 하는 짓은 모두 그 행에서 볼 수 있나니 선(善)을 행하면 낙(樂)과를 받고 악(惡)을 행하면 고(苦)과를 얻게 두1다.

옛날 옛적에 나는 상인이 되어 재물을 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가 배 때문에 싸우면서 예리한 창으로 상인의 다리를 찔렀었다. 그 인연으로 수천 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었고 축생에 떨어져서는 사람들의 화살을 몸에 받았으며 수천 년 동안은 아귀가 되어 쇠송곳 위를 밟고 다녔고 지금은 금강의 몸을 얻었으나 그 남은 재앙으로 인하여 지금 나무창에 찔린 것이니라. 그 첫째 상인은 지금의 저 제바달다요, 그 둘째 상인은 바로 나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4성제(四聖諦)의 올바른 뜻을 알아서 과조의 생을 줄이도록 하라.”

 

 

 

 

 

코뚜레 없는 소 / 경허* 선사 오도송(悟道頌)



‘코뚜레 없는 소’라는 말 홀연히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나의 집이란

소식 사무쳐 깨달았네

6월 연암산 아래 산길에서

도를 깨친 이가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노라.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鏡虛 : 近代 한국선을 중흥시킨 大禪師

 

 

 

 

전등이야기

소를 타고 소를 찾다(騎牛求牛) / 편집부



당나라 말기에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이라고 하는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5종 중 하나인 법안종(法眼宗)을 계산한 스님인데, 누가 와서 불법을 물으면 간단 명쾌한 직설로 대답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혜초(慧超)라는 스님이 그를 찾아와서 법을 청하였다. 

“혜초가 스님에게 묻겠습니다.”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법안이 말하였다.

“너는 혜초이니라.”

이 대화는 『碧巖錄』 제 7칙에 실려 ‘法眼慧超問佛’이라는 공안(公案)으로 널리 참고 되고 있다.

그런데 법안과 혜초의 이러한 대화에 대해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선사는 평창(評唱)에서 말하기를, “이는 마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혜초는 법안에게 부처를 물었는데 법안은 “너는 혜초이니라.”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혜초는 부처를 묻고 법안은 혜초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부처는 혜초이며, 혜초는 곧 부처인 것이다. 따라서 혜초는 자신이 부처이면서 그것을 모르고 천하의 선지식들을 찾아가서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찾아 헤매던 부처를 찾지 못하고 지쳐서 기진맥진하였을 때 법안을 만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어떤 것이 부처이냐”고. 그러나 법안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하였다. “너는 혜초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혜초는 대오(大悟)을 하게 된다. 좀더 부연하자면 “너 혜초가 바로 부처이니라.”라고 하는 것을 법안은 생략하였다. 만약 이것까지 법안이 말했다고 한다면 그는 잔소리꾼이 되었을  것이며, 너무나 친절이 지나쳐 귀찮게 느껴질 것이다. 이를 생략하였지만, 혜초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어느 옛 시인은 말하였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은 안 보여 짚신이다 닳도록 온 산을 헤매었네. 봄 찾는 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울타리 매화꽃이 한창인 것을.”

혜초의 심경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진리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진리를 멀리서 찾아 헤매고 있으며, 그것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우리들과는 다른 초인의 모습, 백마를 타고 오는 선구자적인 모습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리란 결코 화려하거나 초인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와 다름없는 것, 아니 우리들이 대수롭지 않게 홀려 보내고 있는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피해 가려고 하거나, 그 해결책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 정답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열린마당

소중한 인연과 포교 / 조 용 호(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장, 물리학과 3년)



고등학교시절 나는 집 근처에 있는 포교당 불교학생회에 다닌 적이 있다. 규모면이나 시설면에서 불교를 처음 접하는 나에게는 그리 호감이 갈 만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를 마구 잡아당기는 그 무슨 힘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인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것이었다.

일단 그 곳 사람들이 따뜻했다. 먼저 처음 나로 하여금 불법을 접하게 해주신 주지스님 석용산 스님. 그분은 참 자상하신 분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늘 바쁜신 와중에도 항상 우리 회원들을 걱정해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으시고 항상 신도들을 걱정해 주시고 불법을 전하시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그런 점에서 용산 스님은 나에게 무척이나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이다.

내가 불교를 잘 몰랐던 시절 스님의 법문을 몇 번 들은 것이 인연이 되어 계속 절에 다니게 되었고, 또한 많은 법우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대련회 (大蓮會)라는 고등부 학생회 회원들과의 소중한 만남이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불교를 믿고 따르는 학생들은 하나 같이 다 착한 심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때론 힘들어서 서로 다투기도 했지만 항상 생각나고 보고 싶은 얼굴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기억의 뒤안길에 묻혀 있지만 언제든지 만나면 기뻐할 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짧고 순간적인 만남들일지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좋은 인연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인연들인가.

그리고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보살님, 거사님들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위에서 열거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없다.

참 이제 보면 나는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맺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인연들을 맺는 데 있어서는 거의 가다 내가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경우들이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내가 겪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남에게도 전해야 될 때인 것 같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포교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생활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포교에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다른 종교같이 그렇게 이기적이고 광적으로 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포교할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자기 자신이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깨달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올바로 불교를 믿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부처님도 29세에 출가할 때 “나는 이제 선을 찾아떠나노라.”하고 떠나셨다. 그리고, 열반에 들 때까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전하셨다고 한다.

이 대목은 부처님께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포교 활동에 쏟으셨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요즘 소위 불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과의 소중한 인연을 깊이 깨닫고 있을까. 그리고 그 소중한 인연을 힘써 포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정말로 불교는 실천종교라고 믿는다. 여타 종교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실천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위대성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실천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서 나오는 것이 바로 포교, 즉 전법을 말한다.

우리는 진정 불법과의 소중한 인연을 자기만의 기회라고 여겨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그 소중한 인연을 모든 중생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진정 우리들은 포교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제 내년 초부터는 불교방송국(BBS)에 이어 불교유선방송(CATV)도 전파를 발사한다고 한다. 시작은 좀 늘었지만 잘 되어야 할 것이다. 정말 잘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유선방송 채널보다 우리 불교 유선방송 채널은 바로 우리 불법 전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그마한 인연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삶의 좌표를 설정해 주었다. 정말로 모든 이들이 부처님과의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포교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 한국 불교가 살길이라고 본다.

앞으로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갈 사람은 바로 청년 불자들이다. 이점에 대해서 종단이 공감한다면 좀더 많은 청년 불자들이 불법과의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물적으로 심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과외인연을 정말 바르게 알고 소중히 여긴다면 나는 포교활동도 자연히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 불교인들은 포교에 매우 약한게 사실이다.

조금 있으면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불자들은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었을 때를 생각하며 그 인연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스스로 깨달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그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재인식하여 포교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도 이제 법당으로 가서 예불을 올린 후 신입 회원들과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겠다.

 

 

 

 

신행단체

동국대학교 여직원회 / 편집부



어떤 경계에 닥쳤을 때, 즉 몸이 아프다거나 큰일을 만났을 때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부르는 음성을 들으시고, 일천 개의 손과 일천 개의 눈(千手千眼)을 가지고 우주 전체 안에 있는 일체중생을 구제해 주시는 관세음보살님의 영원한 생명을 이어 관음회를 구성한 신행 단체가 동국대학교여직원회이다.

매월 정각원에서 정각원장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고 점심 공양을 하면서 회원들의 우의를 다진다.

관음회 회원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관세음보살님의 밝은 눈과 진리를 향한 마음으로 동국대학교의 이념인 불국정토의 실현과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목표로 하며, 정각원에서 개최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여성은 만물을 조성해내고 기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관음회를 통해서 보살의 도를 실천하며, 부처님의 자비심과 지혜를 배움으로써 주위의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

회원들의 대다수가 가정을 이룬 주부이자 직장여성으로서 바쁜 가운데 생활하지만 관음회를 통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앞으로 좀더 현실에 맞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자녀들을 동반한 야외법회도 개최하는데, 자녀들의 불심도 대단하다. 자라는 어린 차세대들의 마음속에 타종교가 아닌 불교를 이해시키려면 여성 불자들의 힘이 아주 중요하다. 관음회는 여직원회의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운영위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여직원회의 회장직은 정보산업대학원 교학과 김수연 선생님이시다. 앞으로 동국대학교의 여러 신행단체에서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바른 이해를 심어주고 끊임없는 연구와 실천은 한다면 종립학교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