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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3월호 / 통권 5호 / 불기 2538(1994)년 3월 1일 발행

 

 

 

 

고승법어

인생귀로-참선의 세계/서암 종정 스님

 

정각도량

이사원융/ 최법혜 스님

 

정각논단

엘리오트의 시와 불교 사상/정갑동

 

교리강좌

수계와 계율/편집위원

 

경전의 세계

반야경/편집위원

 

신입생에게
보내는 글

대학의 이념/박선영

 

불자탐방

홍윤식 교수/ 편집부

 

신행단체

불자교수회 / 편집부

 

동국과 불교

불교사범학교로의 개편과 휴교/편집위원

 

가람의 향기

금산사/ 편집부

 

비유와 설화

과거세에 소를 죽인 과보/편집위원

 

전등이야기

줄탁동시/ 편집부

 

불서산책

불교대전/편집부

 

불교 건강법

고혈압/ 김갑성

 

일주문

대학입시와 인간교육/정승석

 

古寺 1/조지훈

 

 

 

 

고승법어

人生歸路  참선의 세계 /서암 종정 스님



인류의 문화는 어느 한 국가나 한 민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다 같이 아끼고 보호하고 가꾸어야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도 문화재만은 아끼고 가꾸어졌습니다. 불교는 인류 역사상 다시없는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모든 도시가 부서지고 폭탄 세례를 받았지만 불교문화유적지였던 京都만은 보호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인류가 쌓아 올린 문화만은 금쪽같이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본인이 참선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참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전부가 상념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과 문화를 일으키는 것은 상념의 세계, 관념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모두 따지고 연구하고 배우려는 인간 지식의 소산입니다. 참선은 그와 정반대의 길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의 위대한 인간생명은 난 것도 아니고 멸한 것도 아닙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시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 만유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이 물건은 있었습니다. 胎卵湿化의 모든 생명체는 그 근본이 모두 동일합니다. 현상계만을 보면 모든 생명체가 분명히 차별이 있지만, 우리가 깨닫고 보면 절대 평등해서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근본자리입니다. 그런데도 三界六道가 벌어지고 차별상이 생긴 것은 無明 때문입니다.

무명은 잘못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본래 生死와 起滅이 없고 始終이 없는, 생사와 시비를 초월한 곳이 우리의 근본자리입니다. 근본자리를 우리가 다 같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혼란한 삼계육도에 시비장단과 희로애락이 벌어짐으로써 착란을 일으켜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잘못 보고 있는 것을 한 생각 돌이켜 무명이란 그림자를 없애 버리면, 본래 무시무종이고 생사를 초월하여 성불한 근본 자리, 자기를 바로 아는 자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본래 갖추어져 있는 이것을 알아 버리면 모든 시비 속에 있어도 구애를 받지 않는 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金을 예로 들어 봅시다. 산에 가서 금을 캘 때는 많은 노력이 듭니다. 캐낸 금은 온갖 잡철이 섞여 있기 때문에 용광로에 녹여 불순물을 걸러 내야만 비로소 금으로서 작용을 합니다. 그 금으로 술잔, 비녀, 가락지, 귀고리 등 온갖 물건을 만들지만 그 이름이나 용도는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금이라는 근본은 모두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금을 제련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잡철을 걸러 내면 어떠한 물건을 만들어도 그 본성에는 변함이 없듯이, 우리가 근본자리를 알면 울든지 웃든지, 괴롭든지 즐겁든지 간에 그 자리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 그대로가 처처(處處)에 걸림이 없는 해탈의 세계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생활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울고 웃고 행동하는 그 속에 있습니다.

참선은 근본자리를 찾아내기 위해 지식의 저울대로 재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지식을 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문에 들어올 때는 먼저 지식의 보따리부터 집어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지식을 쌓으며 사는데 그 지식의 보따리를 집어 던지라는 것은 일견 모순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연구하고 지식을 쌓는 그 마음이 파도를 치는 것이 희로애락입니다.

신경을 많이 쓰거나 정신 이상이 있는 사람의 영파 사진을 보면 파장이 큽니다. 그러나 생각을 다 쉬어 버린 때는 파장이 작습니다. 우리 뇌가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모든 상념을 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마음을 쉴 때 지혜가 더 발달합니다. 우리는 자꾸 생각하여야만 지혜가 발달한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을 쉬어야만 영리해지고 판단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틈나는 대로 참선을 해야 합니다. 참선은 바로 모든 상념을 집어 던지는 것입니다. 모든 상념을 집어 던질 때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파도가 일지 않는 본래 마음자리를 찾게 됩니다. 모든 상념을 집어 던지는 노력을 계속할 때 이 복잡한 머리가 잠시나마 쉬어집니다. 그러면 머리가 명석해지고 연구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참선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외국인들이 참선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철학자가 상념을 움직여 참선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럴수록 참선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릴 때 오히려 참선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간화선입니다. 육조 스님 이후에 중국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의 가풍이 벌어져 선불교가 크게 진작되었습니다. 이때의 가풍이 간화선(看話禪)입니다.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아무리 짤막한 말이라도 제각기 뜻이 있습니다. 뜻이 없는 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화두는 ‘말하기 저쪽 머리’, 즉 모든 상념이 닿지 않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물으면 조사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니라,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하고 동문서답 같은 답을 합니다. 이렇듯 참선은 이론과 상념의 세계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습니다. 하지만 참선은 어렵고 쉬운 것이 관계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우리가 모든 생각을 쉰다는 것은 극히 쉬운 일이 기도하지만 반대로 그리 쉽지 않습니다. 쉬려면 쉬려는 생각이 하나 더 보태져 생각에 먼지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쉽다고 하면 세수하면서 코 만지기보다 쉽고, 어렵다고 하면 천하 박사의 지식이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참선이 모든 이론과 상념을 초월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천칠백 공안(화두)은 전부 혀가 붙지 않는 일체 이론과 상념이 떨어진 그 자리를 표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喝을 하고 棒을 하고 멱살을 잡고 밀어붙이는 등의 수단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념과 상념을 초월한 근본자리에 가장 접근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것이 참선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는 삼시 세 때 밥 먹는 것보다도 나은 정신의 영양소가 됩니다.

하루를 정신없이 복잡하게 지내다가도 단 5분이나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일체 상념을 끊어 버리고 화두를 접할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참으로 한가하고 쾌활한 그런 세계를 맞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선의 세계입니다.

불교는 서양의 신본주의 종교마냥 인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를 신앙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불교는 꿈을 깨는 종교요, 자각의 종교요,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불교를 창안했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나기 전에도 있었고 부처님이 멸한 뒤에도 무시무종으로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진리를 올바로 보고 꿈을 깨는 종교이기 때문에 우주에 흐르는 진리를 똑바로 보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보라는 데 무슨 이해가 있겠습니까. 바로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합니다. 붓다라는 말도 깨달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이 어디에서 시작한 줄 모르고 현재 자기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릅니다. 또 자기의 위치가 미래에 어디까지 흘러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르고 사는 것은 중생이라 하고, 알고 사는 것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힘을 과시한다든가 내가 세상을 만들었으니 내 명령을 따르라고 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눈을 뜨면 그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진리를 개척해 주신 모든 생명체의 위대한 스승으로서 모시며, 만물을 창조해 낸 신으로 모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삼계의 대도사(大道師)라고 합니다. 전체 우주 법계(法界)를 크게 이끌어 주는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모든 만물을 지배하는 권위를 가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생명체를 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고 이론 체계에도 맞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이 성한다고 하면 모든 문화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래서 인류가 똑바른 정신을 가지고 우주의 진리에 부응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교가 더없이 고귀한 진리이게 합니다. 우리가 우주의 진리에 눈을 뜨는 데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주객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평등합니다. 절대 평등하기 때문에 개개인 모두가 본래 생불(生佛)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본래 근본자리를 갖추고 있는데 무명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여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우치는 운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인류가 행복하게 사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부처님의 사상은 그 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교육과도 같은 것입니다.

불교문화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호흡을 해 왔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경주는 모든 인류가 아끼고 보호해야 할 세계적인 불교문화 유적지입니다. 이곳에 불교문화의 중추기관이자 인재양성 기관으로 종립 동국대학교가 건립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과 문화정책이 잘못되어 이처럼 성스런 문화의 전당에 경부고속전철이 지나갈 예정이어서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그 계획 때문에 우리 종단과 불교계가 깜짝 놀라고 이 노장도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경부고속전철의 경주캠퍼스 통과는 우리 불교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넓게는 우리 국가, 우리 민족적으로 큰 오점을 남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각계각층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반대운동도 하고, 노선을 변경하는 방안도 강구하고 있습니다. 온당치 않은 이런 일은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여서 학교 내에 불교학과와 아동학과등도 설치 수업 되고 있으므로, 종단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불교유치원 등을 속히 설립해서 제2세 포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동국대학교는 부처님의 사상을 건학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느 문화기관, 교육기관보다도 중요한 부처님의 전당입니다. 이러한 전당이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을 구비한 학교가 되는 것은 이 나라 문화를 바로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여기에 모인 교직원 여러분은 바로 우리 승단의 일원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사상을 크게 일으키는 시대의 견인차 노릇을 하는 분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노력하시어 우리 동국대학교를 더욱더 발전시켜 나갑시다. 이 노장도 현직에 있는 동안 우리 모두가 잘못을 반성하고 승단의 미비점을 시정하여 부처님의 사상을 온누리에 밝히는 대열에 동참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정각도량

이사원융(理事圓融) /최 법 혜(불교학과 교수)



조선조 말기 불교가 조정으로부터 많은 억압을 받았을 때 관리들의 횡포를 피해 가면서 간경(看經),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하며 오로지 수행에만 힘쓴 스님들이 있었다. 이러한 스님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 불렀다. 반면에 관리들의 횡포에 정면으로 대결하여 무서운 역무를 감당하기도 하고, 또한 조정에 호소하여 역무를 혁파(革罷)하면서 사원을 수호해 온 스님들도 있었다. 이러한 스님들을 사판승(事判僧)이라고 불렀다.

이판과 사판승은 안으로는 불법의 전통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교단의 재산을 수호하여 오늘의 교단을 유지케 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므로 선가(禪家)에서는 “수행자의 가풍〔淸白家風〕에는 사(事)가 곧 불법〔卽事卽理〕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행에 비유하여 사판승을 청산(靑山)이라 하고 이판승을 백운(白雲)이라고도 하였다. 지금도 산중의 큰절의 큰방에 가보면 공양할 때나 대중공사(회의)할 때 주지 스님을 비롯한 종무소 직원과 강주(講主) 스님과 학인 스님들은 청산 쪽에 앉고 제방(諸方)에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선방 스님들은 백운 쪽에 앉는다. 이러한 제도와 풍속은 모두가 불교의 진리를 실천 수행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안〔理〕밖〔事〕이 모두가 하나라는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이사(理事)를 원융하게 하는 것이 선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닦는 것과 같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그 통치의 근거인 수많은 법령 등이 파생되어 있다. 종단의 종헌과 종법들도 여기에 준하여 그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 법령을 시행하고 교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보면 집행부는 분명 사판승이고 선원, 강원, 염불원에서 수행하는 쪽은 이판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러한 이판과 사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편에서만 생각하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종단의 집행부나 종무소에서는 수행자를 소홀히 하는 면도 있기도 하고 반대로 수행자들은 집행부서는 수행자가 아닌 권력이나 남용하는 대중으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편견과 오해는 교단을 혼란과 분열로 몰아넣을 위험이 많다. 1950년대 초기 정화시기에 대두하였던 이판승(비구)과 사판승(대처)의 분열은 그 쟁점을 계율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명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정화 에서 반백 년이 지난 오늘은 비구교단자체의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교단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선을 주(主)로 하고 교를 종(從)으로 하는 조계종의 청규(선원청규)에서 제일 강조하는 용어는 중승(衆僧 : 승가)이다. 이 승가를 위하여 총람을 구성하고 장로(長老)를 두고 수좌(首座)를 두고 감원(監院) 등을 둔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종정, 총무원장, 방장, 주지를 위하여 승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승가의 올바른 수행과 전법을 위하여 승가로서의 대표자가 있다는 것이다. 즉 사판을 위한 사판이나 이판을 위한 이판이 아닌 이사가 원융하는 관계를 말한다. 만일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한 책임자나 수행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이판 사판 다 틀렸다.”는 말일 것이다.

 

 

 

 

 

 

정각논단

엘리오트의 시와 불교사상 /정 갑 동(경주캠퍼스 영어영문학과 교수)



엘리오트(T. S. Eliot, 1888-1965)의 시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평가할 목적으로 많은 평론과 책들이 이미 출판되었지만, 그의 문학 세계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인도의 철학적인 주제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는 학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시 전반을 살펴보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명시적으로 인용한 부분으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제3부 “의 설교(The Fire Sermon)”, 제5부 “천둥이 말하는 것(What the Thunder said)”의 ‘Da, Da, Da’와 ‘Shantih, Shantih’, 그리고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의 “드라이 셀베지스(The Dry Salvages)”의 제3장을 들 수 있으며, 그 외 인도와 관련된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논문은 엘리오트의 문학에 반영된 인도의 종교적인 영향, 특히 불교의 영향을 찾아봄으로써 그의 문학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인도의 종교는 어느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종교에 새로운 사상이 접목되어 서서히 다른 종교로 변화되어 왔다는 사실은 인도의 종교 발전 과정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종교의 영향중에서 엘리오트가 불교의 근본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으며,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후기 시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흔적이 적지 않다.

엘리오트 자신도 인도의 종교 및 철학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자신의 평론이나 시에 밝혔으며, 어린 시절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까지 많은 평론가들은 엘리오트의 문학 세계를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만 다루거나 포괄적인 인도 사상을 서양철학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구체적인 경전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예는 거의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한두 개의 구절을 경전에서 인용하여 설명하였을 뿐 경전의 구석구석을 연구하여 그 경전에 나타난 실례를 들어 엘리오트의 시 세계를 연구한 사례는 없었다.

원시경전의 철학적인 사상을일 수 있는 자료로써 가장 완벽하게 전해 오는 것은 팔리語로쓰여진 상좌부 전통의 經․律․論, 三藏이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설법을 내용으로 하는 경전은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교설로서 구전 단계를 지나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본다. 따라서 오랫동안 구전의 과정을 거쳐 전해지면서 부처님 자신이 직접 설했다고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종교적, 철학적인 사상이 후세에 많이 혼입되어 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진정한 부처님의 말씀만을 가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경전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는 사상을 우리는 대체로 부처님의 말씀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엘리오트의 생애에 미친 인도 사상의 영향을 고찰해 보고 불교의 근본 사상인 苦諦, 集諦, 滅諦, 道諦의 四聖諦가 엘리오트의 시에 어떻게 반영되어 서양철학과 융화되었는가를 살펴보고 그의 문학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고대 인도사상과 불교의 경전을 바탕으로 그의 시 세계에 펼쳐진 인간의 최대 목표인 靜點(the Still Point) 즉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우선 엘리오트의 문학적인 배경으로 그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니테리안 집안으로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묻혀 성장하였다. 그가 교육을 받으며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는 인도의 종교와 철학이 미국의 문화계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엘리오트 자신도 자기가 초월주의자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초월주의의 주장자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산스크리트語를 결코 배우지 않았으나 인도의 경전을 읽었던 것이 확실하고 인도의 사상이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에머슨은 『카타우파니샤드』(Katha Upaniṣad)와 『바가바드기타』(The Bhagavad Gītā)』에서 ‘幼影’ ‘大靈’ ‘業’과 같은 개념을 차용한 것 같으며, 불교의 윤회설도 매력을 느꼈지만 직접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철학적인 알레고리를 이용하여 이를 표현하였다.

에머슨의 이와 같은 사상이 미국의 시인과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시인 휘트만(Walt Whitman)도 그 영향을 받았으며, 결국 이런 영향이 엘리오트 자신에게 크게 미쳤음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 인도의 사상과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란만(Charles Rockwell Lanman), 우드(James Haughton Woods)와 바빗트(Irving Babbitt)와 같은 스승들의 지도를 받았었다. 1911년 가을학기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할때, 그 과정의 3분의 1정도를 동양철학과 역사언어학에 치중했었다. 과목 선택에서도 불교 경전에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 주었으며, 그의 노트에는 2세기경에 龍樹(Nāgārjuna)가 이룩한 中觀思想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는 또한 미국의 인도학 교수인 우드의 초청으로 1913-15년 하버드 대학에서 중국과 일본의 종교와 철학사상을 강의한姉崎正浩(Anesaki Masaharu)교수의 시간을 선택하여 수강하였다. 그는 아네사키 교수를 통하여 龍樹의 가장 유명한 가르침 중의 하나인 현상과 실재가 같으며 오직 두 가지 다른 면으로 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 즉 “輪廻는 열반이며, 그것은 열반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경구를 대학원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오트는 윌슨 나이트(Wilson Knight)의『불의 바퀴』(The Wheel of Fire)의 서문에서 “실재는 현상 속에, 그리고 현상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라고 썼는데, 이 말은 龍樹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다. 엘리오트는 1915년 옥스퍼드에 있는 佛敎協會(the Buddhist Society)에도 참여하였으며, 『황무지』를 쓰고 있을 무렵에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키플링(Kipling)의 『킴』(Kim)과 부처님의 생애를 쓴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의 『아시아의 등불』(The Light of Asia)이란 장편 서사시집을 매우 애독했으며 이를 그 후 자기의 평론에 적어 “잠재적인 공감”이 얼마나 강렬하고 오래 지속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었다.

엘리오트 자신도 자기의 작품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현실 세계에는 無常과 고통이 일반적이며, 편재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無常이란 사물이 좋은 면에서 나쁜 면으로 변하거나, 그 반대로 변할 때도 관련이 된다. 이런 점에서 무상은 살아있는 진리이다. 엘리오트가 “죽음의 시간은 매순간이다.”라고 읊은 것도 “무상이 지배하기 때문에 인생은 苦이다.”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엘리오트의 시에는 인간의 고통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이미지로 용해되어 스며들어 있다. 이런 번뇌는 곧 부처님 자신의 번뇌였다. 苦의 원인은 渴愛와 無常, 無明이 가장 큰 요인이었고 이런 것들이 그의 시 “게론쫀”, 『황무지』, “聖灰 水曜日”, “텅 빈 사람들” 등에 잘 나타나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바퀴의 개념은 윤회의 개념과 많이 통하고 있다. 바퀴는 존재의 끝없는 흐름을 상징하면서 회전한다. 세상의 여러 형태의 존재들은 그들의 바퀴에 모두 매어 있고 끝없는 고통에 복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와 의식과 사색과 행동”을 통하여 마음의 태도를 갖추고 이해의 순간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엘리오트는 그의 시에서 말하고 있다.『황무지』와 그의 마지막 장시『네 개의 사중주』에서 애욕을 끊고 空으로 돌아가려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 시도는 부처님이 절대(실재)이고, 궁극적인 진리이면서, 현상 세계에 살아있어서, 절대와 현상 사이의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특성은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의 개개의 불성에 잘 나타나 있다. 『황무지』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한 ‘Shantih(Peace)’는 三昧와 平和가 깃든 寂靜(the Still Point)에 다다르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결론적으로 여러 학자들은 엘리오트가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원시경전을 배경으로 살펴본 예는 드물었다. 엘리오트는 기독교 사상과 더불어 불교사상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이를 자신의 문학작품에 폭 넓게 용해시켜 동서양의 철학 사상의 뿌리 위에서 현대인이 처한 문명적 위기의식을 진단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1992학년도 성균관대 대학원)을 요약한 것이다.

 

 

 

 

 

 

교리강좌

수계와 계율 /편집위원



수계의 의의

우리는 종교적인 삶은 성스럽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그런 삶에만 전념하면서 일반 사람들을 지도하는 종교인을 성직자라고 특별히 존경한다. 우리의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자제하고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나 연설이나 생각을 성직자들은 특별한 규율에 따라 잘 절제함으로써 윤리적인 삶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결국 성직자인 승려와 속인은 자기를 규제하고  구속하는 여러 가지 규범들 중에서 어떠한 법에 의존하여 사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받기를 바라는 속인은 법률이라는 이름의 세속법에  의존하면서, 그나마 호시탐탐 그것마저도 벗어나갈 궁리를 하기 일쑤이다. 이에 대해 성직자는 세속법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일상적인 욕구를 규제하는 자기 종교의 규율을 따른다. 그 규율을 따르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다툼과 갈등이 극소화된 이상적인 상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적 규율을 전적으로 실천한다면, 적어도 그것을 실천하는 그 사회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도 달할 수 있을 것임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탐욕을 거의 본능적으로 타고난 인간이 한결같이 그 규율에 순응하길 기대할 수 없다는데 있다. 오히려 무질서하고 방탕한 삶이 인간 사회에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적 규율이 제시되었다. 이런 한계에서는 성직자가 아닌 속인에게 최소한이라도 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삶을 영위하도록 이끄는 것이 최선책이다. 그래서 종교에 입문하도록 권하고,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데, 이 의식을 수계(受戒)라고 한다. 이 수계에는 당연히 그 종교적 삶의 질에 따라 엄격함과 철저함의 단계가 있다.

수계란 흔히 ‘계율’이라고 불리는 종교적 규율을 자신의 행위 규범으로 실천하겠다는 선언이다. 불교에서는 재가 신자와 출가한 승려의 계율 내용이 다르고 소위 소승계와 대승계(또는 보살계)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지켜야 할 조목의 양이나 세부 규정의 차이일뿐, 계율의 정신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계율 종목의 범위를 따지기에 앞서, 불교 특유의 계율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흔히 계율을 운운할 때면, 엄수하기 어려운 ‘엄격한 금지’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재가 신도의 계율은 사실 그 ‘엄격한 금지’와는 무관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승려의 경우에나 적합하다.


불교의 계율 정신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계율’은 계(戒)와 율(律)이 확연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물론 그 기본 정신은 ‘계’에 있다. ‘계’라는 말의 인도 원어는 ‘명상하다’ ‘봉사하다’ ‘실천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하여 ‘습관성’ ‘행위’ ‘성격’ ‘경향’ 등의 의미를 지닌다. 습관성이나 행위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지만, 그냥 ‘계’라고 말할 때는 ‘선한 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계는 ‘선한 습관성’ ‘선한 행위’ ‘선한 성격’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계의 이보다 중요한 불교적 의의는, 계가 본래 자발적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서 단순한 금지적 조항은 아니라는데 있다. 자발적으로 악한 행위를 떠나는 정신력 혹은 강한 의사(意思,)이다. 악을 억제하고 선을 실천하는 자각적인 힘이다. 또 그런 정신과 힘을 반복하여 간직함으로써 몸에 완전히 배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선한 행위나 선한 생각 다음에 생기는 선한 습관력을 계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 교학에서는 어떤 계가 일단 몸에 배이게 되면 그 사람이 계를 무의식 중에 범하려 해도 이미 습관화된 계의 잠재력이 작용함으로써 그 사람은 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불교의 전문 용어로는 그런 잠재력을 ‘계체’(戒體)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계를 실천하는 사람은 선한 행위를 반복하여 습관적으로 익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위는 자연히 위용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계를 ‘위의’(威儀)라고도 한다.

한편 ‘율’은 ‘제거하다’ ‘이끌다’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동사로부터 파생하여 ‘제거’ ‘교도’(敎導) ‘훈련’을 의미하며, 이로부터 다시 ‘규칙’ ‘규율’ ‘규범’의 의미를 지닌다. 한자로는 ‘조복’(調伏)이라고도 번역된다. 교학적으로는 승려들에게 적용되는 낱낱의 계율 조목을 해석․ 설명한 것이며, 아울러 교단의 운영 규정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승려가 지켜야 할 제250조(비구) 또는 348조(비구니)의 계율을 가리킨다.(조목의 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서 교단의 구성원이 되는 수계 의식을 ‘구족계’(具足戒)라고 한다. 어쨌든 율은 엄격한 금지나 규제의 의미가 강하다. 교단의 주축인 성직자는 그만큼 속인의 귀감이 되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율은 후대에 대승계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소승계로 취급되기에 이른다. 대승계는 재가적 입장에서 기존 계율을 혁신하고 부처님의 이타적 입장을 지향하는 보살 정신에 부합하도록 제정된 것이다.

재가와 출가, 또는 출가수행의 단계에 따라 계율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그 정신은 ‘계’의 의미에 함축되어 있으며, 결국은 5계로 집약된다. 우리가 수계식에서 5계를 받으면서 ‘행동의 규제’만을 의식한다면 불교의 계율 정신을 바르게 실천하기 어렵다. 계란 스스로 선한 의지를 습관적으로 함양하는 자발성과 적극성임을 인식해야 한다. 형식논리에 입각한 소승계가 외형에 치우침으로써 현실에 대한 대응능력까지 상실하는데 이르렀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동기의 면을 포함하여 자발적인 결의라는 계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대승계가 등장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스스로 지키고 남도 지키게 한다는 정신이 대승계로 표방되었던 것이다.

대승불교의 계율 정신은 소위 삼취정계(三聚淨戒)라는 관념에 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중생에 대한 규제성을 강하게 표방하는 대승불교는 악을 방지하고 선을 실천한다는 계의 성질에 중생의 이익이라는 측면을 추가하였다. 즉 악의 방지라는 측면에 입각해서 준수해야 할 계율을 섭율의계(攝津儀戒), 선의 실천이라는 측면에 입각해서 준수해야 할 계율을 섭선법계(攝善法戒), 중생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실천해야 할 계율을 섭중생계(攝衆生戒)로 구분하여 계율 정신을 새롭게 설했다. 이상과 같은 정신을 집약한 구체적인 계율 조목이 5계를 바탕으로 한 10선계(善戒)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조목만 나열해 둔다. ①살생하지 말 것. ②훔치지 말 것. ③간음하지 말 것. ④거짓말하지 말 것. ⑤이간질하지 말 것. ⑥욕하지 말 것. ⑦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 것. ⑧탐욕을 부리지 말 것. ⑨성내지 말 것. ⑩그릇된 생각을 품지 말 것.

 

 

 

 

 

 

 

경전의 세계

반야경(般若經) /편집위원



반야경류는 대체로 대승불교의 초기에 반야공관을 서설하기 위하여 베풀어진 여러 가지 경전 중의 하나이다. 대승불교운동의 큰 조류를 말할 때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용수와 제 바를 중심으로 한 中觀學派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본질은 無自性으로서 이를 空으로 파악하며, 일체의 지식과 분별심을 초월한 지혜(반야)를 강조하는 학파와, 무착과 세친이 주장하는 唯識學派 즉, 사물의 실재를 공으로서가 아닌 有(假有)의 입장에서 마음의 전변으로 해석하는, 두 학파를 들고 있다. 이때에 중관파에서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 바로 반야경이다.

이와 같은 반야경에 한 가지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부류가 있는데, 대체로 원본은 범어의 8천송 반야경이고, 이를 지루가참이 179년에 한역한 것이 小品般若經 중의 道行般若經으로서 최초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후 많은 번역가들에 의하여 티베트어 역, 한역, 영역, 불역 등 후대까지 40여 종의 반야경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중요한 몇 가지의 경전만을 소개하면, 먼저 大般若經으로서 반야부 계통의 경전을 집대성한 叢書이다. 옛부터 鎭國의 경전이요, 人天의 大寶라고 하여 매우 귀중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 성립 시기는 반야부 경전 중에서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600권에 달한다. 한역은 현장이 귀국해서 번역(660~663)했는데, 특히 육바라밀행 중에서도 반야바라밀을 강조하여, 반야(지혜)는 佛母이며 육바라밀의 원천이어서 일체의 불법이 반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를 성취함으로써 육바라밀이 성취되고, 육바라밀이 성취됨으로써 일체의 지혜도 얻어진다는 것이다. 大品般若經은 2만5천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는데, 구마라집이 404년에 한역한 것으로서 총 27권 90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반야공관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해설하는 한편, 三乘․十地思想․授記論․化身思想․他方國土思想 등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이어서 小品般若經은 8천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구마라집이 408년에 10권 29품으로 한역한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주관적으로는 반야공관의 입장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할 것과, 객관적으로는 공의 체달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삼아서 수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般若心,經이다. 이는 600권의 분량을 단 260자의 짧은 분량으로 요약한 것으로서 大本과 小本이 있다. 대본은 소본에 비하여 서론과 결말 부분이 없는 것을 보입하여 놓은 것이다. 이의 종류에는 한역뿐만이 아니고 티베트어 역, 몽고어 역, 영역, 불역 등으로 출판된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수지․독송 되고 있는 것은 당나라의 현장 스님이 한역한 소본 반야심경이다. 이 경의 대의는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자성을 수행을 통하여 개발하고, 이를 궁극적인 상태로 완성해서 도달시킬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크나큰 지혜의 완성이 바로 우리 중생들의 인생 목표임을 역설한 내용이라 하겠다.

대개의 대승경전에서 그러하듯이 반야경류에서도 관자재보살이나 薩陀波倫보살 등의 구도 행각이 자세하게 부각되고 있다. 왜냐하면 보리살타 자체가 ‘깨달음을 얻기로 확정된 有情(중생)’이라고 하거나 ‘깨달음 구하는 유정’을 일컫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반야경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성격을 지니고 구도 행각을 하는데, 하나는 어떤 특별한 것에도 집착치 않는 무집착의 태도요, 다른 하나는 고통과 번뇌 속에서 온갖 갈등을 겪는 유정들의 세계를 철저하게 체득하고는, 일체중생들을 무상보리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 자신은 열반을 생각지도 않으며, 윤회를 두려워하지도 않는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살의 무집착과 大悲行이 지혜와 방편, 그리고 공의 원리와 함께 경전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8천송 반야경(제30․31장)과 마하반야경, 도행반야경 및 육도집경 등에 나오는 살타파륜의 구도설화 내용이다. 그가 마침내 많은 시련과 감동 속에서 끊임없이 정진하다가 담무갈보살을 만났을 때에 담무갈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이른다.

“선남자여, 여래는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진여는 부동이고, 진여가 여래이기 때문이다. 나지 않는 것은 오지도 가지도 않나니, 여래는 나지 않는다. 空性은 去來가 없나니, 여래는 공성이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와 같이, ‘여래와 모든 것은 낳지도 않는 것이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바로 안다면, 거기에서 그대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반야바라밀의 방편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에 대지는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면서 살타파륜을 위시한 많은 대중들은 보리심을 얻고 환희에 싸여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이 반야경은 그 수지와 독송에 있어서 어느 경전에 못지않게 중국에서부터 대유행되고 있는데, 이는 600권 반야경 중의 제398권에서, “이를 誦持하는 사람이나 轉讀하는 사람, 사유하는 사람 및 설한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여, 예부터 병란․천재․질병․기근 등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는 고승들에게 이를 독송시키거나 강설케 하고, 寫經해서 유포시켰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고종 때에 몽골군이 침입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이의 격퇴를 부처님 전에 기원하면서 만든 고려대장경의 경우, 그 첫머리에 반야경을 배열한 것 등은 이러한 데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도 많은 신도들이 그 정확한 뜻을 모르면서 단지 儀式 등에서 그대로 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라면 그 수행 하나하나가 지고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는데, 거기에 상응하는 교의가 없다면 자칫 맹목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解行의 合一이 요구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을 쉽게 풀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실상생활 속에서 부담감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어떤 例話등이 담긴 재해석이 긴급한 것 같다. 지금과 같이 주문처럼 외우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신입생에게 보내는 글

대학의 이념 /박 선 영(교육학과 교수, 교육대학원 원장)



그동안 많은 노력을 쌓은 끝에 어려운 관문을 뚫고 우리 동국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신입생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보내고자 합니다. 아울러 대학이 무엇을 이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특성은 어떠한 것에 있나 하는 것을 밝혀 여러분들의 대학 생활에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대학을 흔히 ‘학문의 전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대학은 학문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학문이란 ‘체계적인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체계적으로 지식을 탐구하는 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학업은 여러분이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지식과 지식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고,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지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며, 지식 그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전제나 방법 자체가 과연 타당한가를 따져 보아야합니다. 그리하여 보다 타당하고 참된 지식과 가치를 산출해내고 창조하는 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기능이나 역할 또는 사명을 세 가지로 말하곤 합니다. 연구와 교수 및 사회봉사가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연구는 위와 같은 학문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교수는 이 학문의 정신과 방법 및 원리를 알게 하는 활동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행위는 결국 기존의 지식이나 가치의 타당치 못한 점을 시정함으로써 사회를 보다 새롭게 갱신시키게 됩니다. 대학의 사회봉사는 바로 이런 성격의 사회봉사역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대학은 학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의 제일의 가치는 학문이라 하겠습니다.

학문에는 주제의 선택이나 사고에 있어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전제될 때에만 진리 탐구와 가치 창조에 그 어떤 제약도 없이 매진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의 모든 정의는 바로 이러한 학문의 자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학문의 자유는 단순히 외부적인 제 약으로부터의 자유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고 이성적 사고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진정한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동서고금의 여러 고전들부터 차례차례 탐독하고 음미해 나가면서 무지의 속박과 비이성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노력을 꾸준하게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동국대학교는 잘 알려 져 있듯이 불교의 정신을 건학의 이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고뇌가 무지로부터 야기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지의 철저한 추방이야말로 불교가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그 어떤 우상도 배격합니다. 우리는 사회의 제도나 관습 또는 언어나 관념 등의 우상에 사로잡혀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깨달음’은 인간이 지닌 이런 한계의 속박도 모두 돌파하여 자신과 사물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입생 여러분은 동국가 족이 되어 불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른 곳에서 맛볼 수없는 보다 심오한 학문 정신의 바다에 접하게 될 것입니다.

신입생 여러분. 우리 대학은 민족 대학입니다. 민족대학이라는 이름을 자처하고 또 공인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것은, 경제적 기반이 그 민족의 자본에 근거하고 있고 또한 그 민족의 문화에 대한 학문적 성과가 뚜렷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국대학교는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불교계의 성스러운 자산에 기초하여 설립되었고 또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대학의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 성과는 개교 일백년을 가까이 바라보고 있는 긴 역사와 함께 다른 대학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각계에 별같이 빛나는 우수한 지도자를 무수하게 배출해 오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시대와 함께 동양에 대한 관심은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 문명에 대한 한계를 자각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경향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철학이나 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사고방식 자체의 문제에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동양적 사고와 문화의 정수라 할 불교의 사상을 건학 이념으로 하는 우리 동국대학교에 여러분들이 입학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여러 점들은 새로 동국가족의 일원이 된 신입생여러분들에게 더욱 크고 뜨거운 분발과 긍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대학 생활 장도에 많은 보람이 있기를 합장하여 마지않습니다.

 

 

 

 

 

 

 

불자탐방

홍윤식 교수 /편집부


역사교육과의 홍윤식 교수님의 각별하신 불심(佛心)은 잘 알려져 있다. 현재 박물관장을 맡고 계신 홍 교수님은 동국대학교 박물관 30주년을 기념하며 ‘고려불화특별전’이라는 큰 행사를 치르셨다. 우리는 홍교수님을 탐방하여 좋은 말씀을 들었다.



박물관장직을 맡으시고 이번에 ‘고려불화특별전’을 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십니까 ?

“그동안 개인적으로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특히 불교문화재에 대하여 조사와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관심과 노력이 해를 거듭하면서 여러 인연을 만나고 조금씩 성과를 거두는 기쁨을 맛보았으며, 최근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으로 그 성과를 학술회의를 통하여 발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여건이 성숙하여가는 때, 마침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지난해로 개관 3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개관 30주년을 기리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삼는 계기를 마련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 ‘고려불화특별전’을 계획하였습니다. 고려불화는 이미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한 번도 실물을 친견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뜻 깊은 전시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특별전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려불화는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류의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불화는 약100여 점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 일본을 비롯하여 해외에 산재하여 있습니다. 최근에 몇몇 작품이 호암미술관을 비롯하여 국내로 들어왔지만 국내에서는 극소수의 관계자 이외에는 실물을 친견할 기회가 거의 없어 고려불화에 대한 연구에 애로가 많았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1976년에 일본 大和文化館에서 열린 이래 본격적인 ‘고려불화전시회’로서 세계적으로 두 번째 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려불화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에 하나의 전기가 될 것이며, 우리 국민들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도 우리 문화의 역량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민간차원에서 이러한 문화 교류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던 사실은 앞으로 좋은 선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지난 1973년에 처음으로 문을 연 우리 동국대학교 박물관은 그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내 유일한 불교미술 전문박물관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역대 관장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동국대 박물관의 현실은 솔직히 말해서 매우 열악합니다.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인력이나 소장품 등 여러 면에서 우리 박물관이 맡아야 할 역할과 기능에 비해 너무도 빈약합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에서 차지하고 있는 불교문화의 높은 비중에 비할 때 불교문화 연구의 중심이 되어야 할 동국대 박물관은 앞으로 불교계를 비롯하여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불교 중앙박물관으로 성장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들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이 상당히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 많은 국보급 문화재, 그것도 다른 나라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 것을 많은 돈을 들여 가져와서 전시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민간 차원에서 귀중한 문화재를 국내에 들여와 전시하기까지는 실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소장자 여러분들이 이 전시회가 지닌 깊은 의의를 헤아리시고 쾌히 승낙하여 주셔서 뜻 깊은 전시회가 열릴 수 있었던 점에 대하여 이 기회를 빌어 다시 감사드립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삼성문화재단 호암미술관과 공동주최를 제의하였는데 이를 역시 흔쾌하게 맡아주신데 대하여 이건희 이사장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박물관의 재정의 빈약함을 헤아려 이번 전시회에 후원금을 보내주신 분들이 계신데 이름을 밝히길 사양하시므로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후원자들이 계시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뜻있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때문에 앞일에 대하여도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문화 기행’ 형식으로 답사단이 구성되어 젊은이를 에게 인기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작년에 비소설 분야에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가장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특별한 계획을 실행하실 뜻은 없으신지요? 또 이러한 흐름에 대해 교수님 나름대로의 느낌은 어떠하신지요?

“요즈음 들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우리 문화와 전통에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현상이 눈에 띄고 있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불교가 지닌 문화 역량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이 많았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우리 불교계 스스로에 대하여도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겠고 이를 계기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개인이나 소수단체만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쳐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착실하게 다져 나갈 때 불교문화의 중흥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사업의 중심기관이면서 또 가장 효율적인 사업이 바로 불교 중앙박물관의 건립이라 생각됩니다. 사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형불사의 일환으로 이제 불교계가 힘을 합쳐 불교문화의 연구․조사․수집․보존․교육․계몽의 역할과 기능을 맡을 종합적인 기관으로서 불교 중앙박물관의 건립과 운영은 시급하고도 긴요한 사업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문화의 창조적 계승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남은 생애를 이 일에 봉사하려 합니다.”


불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제가 불교와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등학교시절부터입니다. 제가 입학한 학교가 바로 종립학교였기 때문이죠.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게된 것도 고등학교 시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뒤 대학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불교학을 배우게 되었으며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는 행운을 얻었지요.

특히 우연히 병을 얻어 큰 수술을 받는 생사의 고비길에서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은 뒤 새로운 삶의 길을 가꾸고 더욱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신행에 정진코자 애쓰고 있습니다.”


학교와 가정에서의 신행활동에 대해 간략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직 마음은 젊다고 생각하는데 벌써 육십 고개를 바라다보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우리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이며, 함께 나누고 베풀며 살 때 그 공덕은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이 일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고 나 개인의 성취보다 원만한 성취를 이루고 나아가 사회에 되돌리려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인 소망이나 계획이 있다면 주어진 공직의 기간을 보람 있게 마무리하고 나서, 정말 꼭 쓰고 싶었던 글들을 쓰면서 삶의 의미를 관조하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까요.”

 

 

 

 

 

 

 

신행단체

불자교수회 /편집부



대학을 대학답게 하는 것은 주위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시대를 밝히는 학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 뵈브(Sainte Beuve)는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국대학교에는 여러 신행단체가 있지만 대학이라는 학문의 요람에 걸맞은 격을 갖춘 신행단체를 들라면 단연 불자교수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학교가 불교 유일의 종립대학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학문의 각 영역에서 불교적 이론 토대의 구축을 통한 불교와의 접목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단체가 바로 불자교수회이다.

불교의 연구와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이 시대에 맞는 불교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인격완성과 이상적 사회를 함께 실현하는 불교로 중흥시키고자 불자교수회를 1988년 5월 창립한 경주캠퍼스 교수들의 원력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확인하기 위하여 경주캠퍼스 불자교수회는 국내외 불교학술단체와 교류 및 협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어느 신행단체이든 간에 한 모임을 유지하고 결속해 가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심과 회원 상호간의 돈독한 우의라고 할 것이다. 경주캠퍼스 불자교수회에서는 이러한 점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불자교수 상호간의 우의 증진과 인격도야를 도모하고 보살행을 통한 불교문화의 발전을 꾀하며 밝고 화합된 사회건설에 이바지함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회원 상호간의 우의 증진과 인격도야를 위한 활동, 사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불자교수회는 회장 l인과 부회장 2인, 10인 이하의 이사와 감사 2인 등으로 임원진을 조직하고 있는데, 현재의 임원진은 회장에 최익한 교수(의학), 부회장에 김병기 교수(무역)와 김필수 교수(철학), 감사에 정갑동 교수(영문)와 이임수 교수(국문)이다.

 

 

 

 

 

 

 

동국과 불교5  불교사범학교시대

불교사범학교로의 개편과 휴교 /편집위원



1908년(隆熙 2년)은 한국 불교계로서는 큰 격동의 한해였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한 高宗의 퇴위와, 정미조약의 강제 체결에 따른 내정 간섭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였다. 또 외래문화의 침투로 기존의 제도와 질서들이 붕괴되면서 이 땅에는 각종의 求國的 사회․교육 단체가 조직되고 있었다. 이 같은 시대와 사회 변동의 자극 속에서 한국 불교계 또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1908년은 특히 큰 격동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불교계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설립된 명진학교가 불교사범학교로 개편되고 또 휴교에까지 이른 것도 이런 과정에서였다.

시대 변화에 따른 한국불교의 진로 모색에 있어서 그 경향은 크게 세 계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즉 선진 일본의 예에 따라 사원 조직 및 불교교육제도를 근대화하여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자는 강대련․진진응․김지순․김구하 등을 중심으로 한 開化派와, 일본불교의 한국 포교를 적극 반대하여 한국 고유의 불교 전통을 이어 불교의 중흥을 도모코자 하는 라청호․ 김용곡․서학함 등의 保守派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후진성을 자인하되 우리 고유의 불교 정신을 잃지 않고, 다만 일본의 발달된 포교 방식을 도입하여 한국불교의 문예부흥을 기할 것을 주장하는 홍월초․이보담․이회광․김석옹 등은 中道派에 속하였다. 결국 이 세 경향의 그룹 가운데 온건노선을 경지해 오던 중도파가 불교계와 일반 사회의 지지를 받는 추세여서, 이들이 주도권을 쥐고 불교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중도파 인사들은 그 첫 작업으로 1908년 3월 6일 전국사찰 대표자회의를 원흥사에서 개최하여 종래 한국불교의 중앙자치기구의 구실을 해온 佛敎硏究會(1906년 설립)를 해체하고 새로이 圓宗종무원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원융무애의 사상적 전통을 잇는 宗으로서 圓宗을 세운 것은 한국불교가 근대화로 매진하는데 중요한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불교 정토종의 색채가 짙은 불교연구회에서 탈피하여, 뚜렷한 宗名 아래 거국적인 교단을 세우고 민중 교화와 구국대열의 참여 등 불교 본래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내외의 여망에 부응하는 새로운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원종의 종정에는 해산된 불교연구회의 회장이었고 동시에 명진학교 교장이기도 했던 이회광이 추대되었다. 또 이듬해 초에는 覺皇寺(현 수송동)를 창건하여 원종 종무원을 이전하고 불교중앙회무소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말하자면 각황사는 한국불교의 자주적인 再興本部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1908년부터 명실상부한 중앙불교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여 전국 사찰조직을 근대적으로 정비하는데 성공한 원종 총무원은 그 2년 후에는 불교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누차 종래의 중앙 불교 교육기관이던 명진학교의 개편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명진학교를 일본의 고등전문학교 정도의 수준으로 승격시키기로 결의하고 이를 學部에 청원하였던 바 1910년 4월부로 고등학교 정도로서 승인을 받기에 이른다. 이에 교명을 佛敎師範學校로 개명하고 3년제의 師範科와 1년제의 隨意科를 두었다. 교과 과정은 명진학교 때와 큰 차이가 없으나 외국어(일어)․측량․토목․산술․역사․지리 등 신학문을 더 배정한데 특색이 있었다. 한편 교장에는 이회광이 계속 취임하였으나 1910년 가을 宗務로 국내 각 사찰과 일본을 드나들게 되자 孤雲寺의 李萬愚가 뒤를 이었다.

한편, 원종 종무원으로서 각황사를 창건하던 1910년 8월 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불교는 각황사 창건과 같은 자주적인 불교재흥운동도 있었지만 반면 이 땅에 들어와 있던 일본불교 각 종파와의 관계도 깊어 일부 몰지각한 인사 중에는 일본불교와 손잡고 그들의 세력을 빌어 한국불교의 중흥을 도모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중에는 종래 온건불교개혁자로 알려져 온 이회광도 포함된다. 그는 일부 친일매국 승려들이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와 연합치 않으면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말살하듯이 한국 불교를 말살하겠다니 일본에 가서 담판을 해 달라’는 감언이설의 요청을 누차 받게 되어, 마침내 이를 수락하고 그 해 원종 종무원을 대표하여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동년 10월 6일 그는 일본 조동종대표 弘律說三과 더불어 全 7개조에 달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연합 체결을 하고 말았다.

이들 조약을 보면, 원종측은 “조동종이 원종 총무원 설립 인가를 얻는 데 힘쓴다.”라는 지극히 무의미한 조항(제2)을 교환 조건으로 조동종측의 거리낌없는 침투 조건들을 그대로 용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동종의 한국 포교에 대한 원종종무원의 편의 제공(제3조), 조 동종의 고문 위촉(제4조), 조동종에서의 포교사 초빙과 각 首寺에의 배치 및 일반 포교, 청년 교육 위탁(제5조) 등이 그것이다. 이회광의 의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이들 조항은 결과적으로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행위가 親日 이상의 賣宗的 행위로 지탄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합체결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음은 물론이다. 이는 한국불교가 살아 있는 한 필연적인 것이었다. 전국에서 반대의 여론이 비등하더니, 마침내 그 이듬해인 1911년 봄 김경운․박한영․진진응․한용운․김종래․오성월 등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연합 체결을 賣宗易祖의 妄動이라고 규탄하고 臨濟宗論을 내세워 마침내 臨濟宗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임제종 임시총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임시 管長으로 김경운을 추대하였다. 다시 가을에 임시종무원을 동래 범어사로 이전하는 한편 연로한 김경운을 대신하여 한용운이 대리관장을 맡았다. 임제종이 설립됨에 따라 연합 체결은 자동 좌절․.폐기되는 결과가 되었는데, 이는 자주적인 한국불교 중흥운동의 한 盛事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한국 불교계가 원종과 임제종으로 나뉘어 남북에서 서로 대립 분열하는 상태가 되자 이는 불교계의 힘의 분산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이내 불교 교육에 그대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불교사범학교는 원종 총무원이 경영하고 있었던 바, 이미 위상을 잃어버린 종무원으로서 학교 운영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선생과 학생들은 각기 소속 사찰로 돌아가 버리고 학교는 그대로 방치되니, 불교사범학교는 자동적으로 휴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학제 개편 1년 미만에 휴교가 되고 만 이 같은 사례는 명진학교로 개교한 이래 처음 겪는 비극의 일이었다.

 

 

 

 

 

 

 

 

 

가람의 향기

금산사 /편집부



전북 전주시와 김제시를 허리에 끼고 김제․만경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모악산(母岳山, 793. 5m)은 웅장하거나 기암괴석의 절경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포근히 안아 주는 그런 산이다. 그 느낌은 상봉(上峰)에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듯한 바위가 있어 산 이름을 모악이라고 했다는 전설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일어난다. 이번 호에 소개할 금산사(金山寺)는 모악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봄철이면 화사한 벚꽃이 만발하여 호남4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창건

금산사의 창건 시기는 여러 고찰들이 그러하듯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창건 시기는 사료에 따라 백제 법왕(法王) 원년(599)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금산사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과 혜공왕(惠恭王)대에 활약한 진표율사(眞表津師)가창건했다고도 한다(《송고승전》<백제국금산사진표전>), 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창건했다는 설(《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가섭불(迦葉佛)시대의 옛 절터를 재건했다는 설도 전한다( <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 이들 설들을 종합해 볼 때 진표율사가 출가하기 이전인 경덕왕대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건

금산사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진표율사에 의해서이다. 율사는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懈勒)․지장(地藏) 두 보살로부터 계본(戒本)과 간자(簡子)를 전해 받고 금산사로 돌아와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으로 중창불사를 시작한다(《삼국유사》<진표전간>).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존상을 조성하여 주존으로 모시고 금당의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율사에서 계법을 주는 모습을 그려 모시기도 하였다.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된 금산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혜덕왕사(慧德王師)에 의해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혜덕왕사는 해린국사(海麟國師)로부터 법상(法相)을 배운 법상종의 큰스님이었는데, 고려 문종 33년(1079) 주지로 부임한 이후 퇴락한 가람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는 등 사찰중건에 힘쓴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석조물들은 대개 이때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스님은 또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曠敎院)을 설치하고 간경(刊經)․법석(法席) 등을 주관하도록 하여 법상종의 대도량이 되게 한다.

금산사는 조선 선조대의 승병장 처영(處英) 스님의 본거지였으므로 왜적들의 보복을 받아 처참하게 폐허가 된다. 이 때 석조물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참화를 딛고 선조34년(1601) 수문(守文) 스님 등이 불사를 일으켜 법등을 이어간다. 이 불사는 35년 후인 인조 13년에 낙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표율사와 점찰법희

진표율사는 완산주 벽골(지금의 김제만경) 사람으로 성은 정씨(井氏)이며 l2세 때 금산사의 순제(順濟)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27세 때이던 760년부터 3년간 보안현(지금의 전북 부안) 부사의암에서 피나는 참회 고행 끝에 지장보살과 미름보살에게 각각 계본(戒本)과 간자(簡子, 점찰경에 따라 수행하는데 필요한 나무 조각)를 받는다. 이후 율사는 속리산으로 가는 길에 소가 끄는 수레를 탄 농민들의 귀의를 받기도 하고, 강원도 명주(지금의 강릉) 지방에서 흉년에 굶주린 농어민을 구제하는 등 중생제도에 힘쓰며 점찰법회(占察法會)를 통해 집단적 신앙운동을 전개한다. 점찰법회는 지장보살이 말세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한 교화법으로 가르쳤다는 《점찰경(占察經)》에 따라 각자가 윷놀이처럼 ‘목륜상(木輪相)’이라는 나무막대기를 던져 선악업을 점친 후 악업을 철저히 참회하여 없애고 선행을 스스로 실천하게 하는 법회다. 이처럼 진표율사는 점찰법회를 통해 대중 스스로가 선행의 주체적인 실천을 통해 낡은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지향하게 함으로써, 모든 악업을 버리고 자신과 타인의 안락을 위해 모든 선입을 짓도록 한 미륵경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대중들에게 용화세계의 희망을 고취하였다.


․유물

금산사의 유물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금산사의 대표적인 유물을 들라면 단연 미륵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미륵전은 금산사의 중심 건물로 용화전(龍華殿), 산호전(山呼殿), 장육전(丈六殿)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3층  팔작의 다포집으로 내부는 위까지 통한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한개의 심주(心柱) 대신에 네 개의고주(高柱)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목탑의 가구(架構)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적광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수계, 설법 등 법요(法要)를 집행하던 곳이다. 대장 전은 미륵전과 마주한 건물로 신라 목탑의 유형을 짐작할 수 있으며 지붕에 목탑의 복발과 보주 등이 남아 있다.

방등계단(方等戒壇)은 수계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고려시대 계단(戒壇)의 조형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계단은 매우 넓은 상하 2단의 정방형으로 축조되었으며 중심부에 석종형의 부도가 있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방등계단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대적광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육각 다층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3층의 화강석단을 6각으로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6각의 옥개석을 11매 올려놓았는데 탑신은 상부의 2개만을 제외하고 결실되었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노주(露柱),혜 덕왕사 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등이 있다.

 

 

 

 

 

 

 

 

 

비유와 설화

과거세에 소를 죽인 과보 /조 용 길(불교학과 교수)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바사닉왕의 대신 리기미에게 비사리(毘舍利)라는 며느리가 있었다. 그 여인은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왕은 그녀를 누이로 삼고 지냈다. 그녀는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몸과 얼굴이 잘 생기고 남보다 특이했다. 점차 장성하면서 건장하고 용맹하여 혼자서 여럿을 당해 내었다. 부모는 그들을 사랑했고 온 나라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그 뒤 장가를 들었는데 신부들은 모두가 그 나라의 세력 있는 집의 딸들이었다. 이때 비사리는 믿는 마음이 열려 부처님과 스님을 집으로 청하여 공양했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설법해 주셨다. 온 집안권속이 모두 다 수다원의 깨달음을 얻었는데 오직 막내아들만이 도를 얻지 못했다.

어느 때 그 막내아들이 코끼리를 타고 놀러 나갔다. 성문 밖에는 깊고 넓은 구덩이가 있었고 그 구덩이 위에는 큰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가 막 다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에 수레를 타고 오는 어떤 정승아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각기 세도를 믿고 길을 피하려하지 않았다. 비사리 아들은 곧 화를 내며 코끼리의 등위에서 몸을 밑으로 굽혀 정승아들과 함께 수레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 버렸다.

정승의 아들은 많은 상처를 입었고 분한 마음을 그 아버지한테 일렀다.

정승은 비사리 아들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 은밀한 꾀를 생각해내어 원한을 갚기로 하였다. 정승은 그 뒤 일곱 가지 보배를 합해 일곱 개의 말채찍을 만들고 질이 좋은 강철로 칼을 만들어 채찍 속에 숨겨 넣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 아들들에게 보냈다. 그들은 좋아라 하고 받았으나 그 나라 법도에는 왕을 뵈올 때는 칼을 가져서는 안 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에 그 정승은 그들이 채찍을 받아 늘 갖고 다니는 것을 보고 왕에게 참소하였다.

“비사리의 아들들은 나이가 젊고 힘이 세며 혼자서도 백 사람을 당해 냅니다. 그들은 지금 딴 생각을 품고 왕을 해치려 합니다.”

왕은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정승은 다시 아뢰었다.

“이 일은 진실이요, 거짓이 아닙니다. 현재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각기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말채찍 속에 감추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 일은 분명합니다.”

왕은 곧 사실을 조사해 보았더니 과연 그 말대로 였다. 왕은 “틀림없이 그렇구나.”하고 믿었다. 그래서 역사를 뽑아 궁중에 숨겨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그 안에서 죽였다. 그리고 일곱 명의 머리를 한 함에 담고 봉한 뒤에 비사리에게 보냈다.

그 날 비사리는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하여 집에서 공양을 올리려다가 왕이 보낸 함을 보고 공양을 돕기 위해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잠깐만 기다려라, 공양을 마칠 때까지 열지 말아라.”

공양을 마치고 그녀를 앉게 한 뒤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였다.

“이 몸뚱이는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나’라는 것이 없으며 언제나 위태롭고 두려움이 많다. 오래 살지 못하면서 온갖 번뇌에 얽매여 그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여 서로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한갓 마음과 몸을 괴롭힐 뿐이며 도(道)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 이러한 이치는 오직 지혜로운 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비사리는 마음이 환히 열리어 아나함의 도를 얻었다.

부처님은 비구 제자들과 함께 기타림으로 돌아가셨다. 그 뒤 비사리는 함을 열어 보았다. 7개의 머리가 그 함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욕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다지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다만 “원통하고 가엾구나. 사람이 나면 죽음이 있어 오래 살지 못하지만 어찌 이리도 다섯 갈래 길을 분주히 오가는가.”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일곱 아들과 처가 친척들이 듣고 몹시 성을 내어 모두 외쳤다. “대왕은 무도하여 억울하게도 착한 사람들을 죽였다.”

이들은 원수를 갚으려고 무기와 군사를 모아 왕궁을 에워싸았다. 왕은 황급히 뒷길로 빠져 부처님께 갔다. 군사들은 그 말을 듣고 곧 군마를 동원하여 왕이 숨은 기타림을 포위했다. 이때 아난은 바사닉 왕이 비사리의 일곱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 인척들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인연으로 그 일곱 아이는 왕에게 죽게 되었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사리의 아들들은 이승에서만 왕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리라. 오랜 옛날에 그들 7인은 친구 사이였는데 어느 날 의논 끝에 남의 소 한 마리를 훔쳤다. 그들은 자식이 없어 혼자서 곤궁하게 사는 할머니 집으로 찾아가서 소를 잡아달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기뻐하면서 나무와 물 따위의 삶을 기구를 준비해 주었다. 그들이 칼을 들어 치려 할 적에 소는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며 애원하듯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 체하며 소를 죽이려했다. 그때 소는 맹세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죽이면 나는 후세에 너희들을 그냥 두지 않고 설사 내가 도를 얻더라도 그냥 두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이내 칼에 찔려 죽었다. 그들은 소를 삶아 서로 다투어 맛있게 먹었다. 그 할머니도 배불리 먹고 기뻐하면서 ‘지금까지 손님을 접대해 보았지만 오늘이 최고였다’고 하였다.

“그때의 그 소는 바로 지금의 바사닉왕이요, 소도둑들은 바로 지금의 저 비사리의 일곱 아들이며 할머니는 바로 지금의 비사리이다. 그들은 그 과보로 5백생에 늘 죽음을 당하면서 지금에 이르렀고 그 할머니는 그때에 돕고 기뻐했기 때문에 5백생 동안 늘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 항상 근심하고 괴로워하다가 지금 나를 만나 비로소 도를 얻게 된 것이다.”

아난은 합장하고 거듭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들은 또 어떤 복을 닦았기에 부귀하고 용맹스럽게 되었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옛날 가섭 부처님 때에 삼보를 믿고 공경하는 어떤 부자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온갖 향을 모아 기름을 섞어 탑에 바르려고 가는 도중에 일곱 사람을 만나자 그들에게 권했다.

‘나는 지금 향유를 탑에 바르려고 간다. 나를 도와주면 복덕을 얻어 태어나는 세상마다 얼굴이 단정하고 힘이 세게 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기뻐하면서 함께 가서 기름을 탑에 바르고 제각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할머니 덕분에 복업을 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세상마다 영화롭고 부귀하며 할머니는 항상, 우리 어머니가 되고 우리는 그 아들이 되어 서로 떠나지 말며 그리고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들어 빨리 도를 얻기를 원합니다.’ 할머니는 기뻐하면서 그렇게 되자고 허락했다, 그들은 그때부터 5백생 동안 항상 부귀한 집에 태어났다. 그때의 할머니는 바로 지금의 저 비사리요, 일곱 명의 아들은 그때의 그 7인이니라.”

이때 많은 군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분이 곧 풀리면서 “대왕이 까닭 없이 형벌을 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업을 짓고 지금 그 과보를 받은 것이다. 한 마리 소를 죽이고도 그렇게 되었구나. 바사닉왕은 우리들의 임금인데 어떻게 까닭 없이 미워하며 해치겠는가?”하고, 곧 무기를 버리고 왕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으며 왕도 또한 그 죄를 묻지 않았다. 그때 부처님은 사부대중을 위하여 온갖 법을 널리 설하시면서 “착한 업은 닦아야 하고 나쁜 행은 여의어야 한다.”하시고, 다시 네 가지의 묘한 법을 자세히 설하시자 대중들은 그 설법을 듣고 모두 진리의 깨달음인 도를 얻어 평안히 살았다.(『불설 현우경』)

 

 

 

 

 

 

 

전등이야기 

줄탁동시 /편집부



『碧巖錄』 제16측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공안으로 남아 있다. 하루는 경청 도부(鏡淸道怤, 864~937) 선사에게 한 젊은 승려가 와서 말하였다.

“나는 이미 大悟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마치 병아리가 껍질을 주둥이로 쪼아 나오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하니 스님께서 밖에서 주둥이로 톡 쪼아 주십시요.”

“그런 소릴 해도 생명에 지장이 없느냐?”

“내가 만약 죽는다면, 스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야, 이 쓸개 빠진 놈아(草裏漢).”

그러면서 도부 스님은 설명하였다.

“대저 남의 스승(行脚人, 善知識)된 자는 모름지기 줄탁동시의 안목을 갖추고 줄탁동시의 활용을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스승(禪僧)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줄탁동시란 닭이 알을 깰 때에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하여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 온전한 병아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가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끊임없이 보살펴 그 근기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제자를 보살펴야 한다. 그러다 마지막 경지에서 할(喝)을 하든 봉(棒)으로 치든 그 제자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마지막 번뇌의 껍질을 깨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된 자는 제자의 깨달음을 위하여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늘 그의 곁에서 관심과 정성으로 보살펴야 한다. 또한 제자도 역시 깨달음을 위하여 오매불망 정진하여야 하며, 항상 스승의 모든 지도에 따라야 한다. 자신의 끊임없는 정진이 완숙하였을 때 제자는 번뇌 속에서 무명의 껍질을 깨뜨린다. 이것을 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스승과 제자의 무언의 행동이 동시에 일어날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며, 그 제자는 스승과 같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줄탁동시의 안목과 활용법을 가질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어느 승려와 같이 수승인 도부에게 자신을 ‘탁’하는 것은 스승의 역할이며, ‘줄’하는 것은 제자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달라고 부탁해서 될 일이 아니므로, 도부는 그 제자에게 “쓸개 빠진 놈”이라고 호통을 쳤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 있어서 스승이 제자를 위해 참되게 ‘탁’할 수 있는 안목과 지도력이 절실히 요망되며, 제자 또한 스승을 신임하고 학업과 인격 도야에 전념하여 ‘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참된 교육은 스승과 제자 간에 있어서 줄탁동시가 되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한 강의실에 수백 명을 두고 마이크를 잡고 일방적으로 퍼부어대는 교육의 현장에 있어서는 요원한 일이 아닐까.

 

 

 

 

 

 

 

 

불서산책

불교대전 /편집부



불교대전(大典)은 한용운 스님이 양산의 통도사에서 여러 대장경을 열람하고 난 뒤 1914년 부산의 범어사에서 발행한 것이다. 여기에 인용된 경전의 내용은 무려 450여 종류로서 일찍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소승의 모든 불교국가에서도 그 방대하고 자세함을 찾아 볼 수가 없는 대작에 속한다.

불교를 자력으로 공부하려는 신도에게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 자체가 상근기인을 상대로 한 데다가 경전이 수없이 많기 때문인데, 이러한 근본원인은 불교가 복잡한 인간심리와 그 해명에 역점을 두고 설해진 데 연유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대전에서는 중생들의 지혜를 개발하기 위하여 절세(絶世) 성인이신 석가세존의 경율과 여러 보살들이 지은 논장을 초록유취(抄錄類聚)하여 편성하고, 같은 경전에 관한 다른 번역은 서로 대조하여 그 문장과 뜻이 수승한 것을 초록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대전이 본래 국한혼용문이고 불교의 전문적인 용어가 그대로 주석없이 기록되고 있어서 그 난해함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 읽기가 어려울 것 같으며, 저자 자신도 이 점을 인식하고서 후일에 이에 관한 주석을 일일이 할 것을 다짐했지만 추가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와 같은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이 책의 특징은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내용, 즉 여러 가지의 삼장(三藏)을 주제별로 정리한 점이다. 이를 보면 서품(序品)에서는 경전을 설하신 이유와 수도의 이익 및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를 실천치 않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 가려 뽑은 것이고, 교리강령품(敎理御領品)에서는 총설과 마음의 체성 및 연기, 온갖 현상의 체성과 그 연기에 관하여 유취(類聚)하고 있으며, 제3 불타품에서는 역시 총설에 이어서 부처님의 본원과 지혜, 자비, 도화(度化) 및 불신(佛身)에 관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4 신앙품에서는 발심(發心)의 당연성과 그 득과, 신심의 효력과 종류, 염불의 가피와 그 종류, 삼보에 귀의하면 얻게 되는 이익 및 가피에 관하여 유취하며, 제5 업연품(業緣品)에서는 우리 몸의 원질론(原質論)과 그에 따르는 고(苦)와 난득(難得)의경우를 모았고, 이어서 유의법의 무상과 색신의 무상, 번뇌, 악업, 인과율, 윤회 등의 개념을 총괄하는 내용들을 초록해서 집대성하고 있는 것이다. 제6 자치품(自治品)에서는 학문과 지계(持戒), 수심(修心), 자신(自信), 진덕(進德), 위생 등에 관하여 많은 내용을 초록하고, 제7 대치품(對治品)에서는 가정과 사제(師弟), 타인, 사회 및 국가에 관하여, 제8과 제9에서는 포교품과 구경품(究竟品)을 배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뭇 경전들의 내용들을 교상판석(敎相判釋)하여 난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일반 대중들에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한용운 스님이 이와 같은 사정을 인식하고서 이를 재정비한 것은 역사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불교대전의 번역과 주석본은 1980년에 이원섭의 노력으로 현암사에서 발간되었다.

 

 

 

 

 

 

 

불교건강법

고혈압 /김 갑 성(한의과대학 교수, 보건소 소장)



고혈압은 온갖 성인병, 특히 순환기 계통의 퇴행성질환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만성질환으로서, 성인병 중에서도 가장 흔하고 관리가 어려운 문제의 질환이다. 세계보건기구인 WHO의 기준에 의하면 정상인의 혈압은 심장이 수축할 때의 혈압이 14OmmHg, 심장이 이완할 때의 혈압이 90mmHg 즉 140 / 90mmHg이하의 혈압을 말하며, 140-160mmHg / 90-95mmHg일 때를 경계역 고혈압, 160mmHg / 95mmHg이상을 고혈압으로 규정하고 있고 특히 180mHg / 120mmHg이상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를 중증고혈압이라고 말한다. 고혈압의 진단은 한번의 혈압측정에 의해서 판정되는 것은 아니며 혈압 자체가 인체의 상태나 환경의 변화 등에 따라서 변동하기 쉬우므로 3-4일간에 1일 3회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측정하여 판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혈압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워 원인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나 성인병 영역에서 gms히 보는 고혈압은 대부분 본태성 고혈압으로서 가계(家系)유전적 소인을 갖고 있고 신경과민, 식염의 섭취량, 비만증, 직업적 인자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본인도 모르게 20대 후반이나 30대에 시작되어 서서히 진행되고 오랜 시간 방치할 경우 뇌, 심장, 신장 등의 주요장기에 혈관성 병변을 야기하게 된다. 고혈압으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혈압 자체의 하나의 증상이지 병명이 아니므로 일반적으로는 증상이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혈압 상승으로 연관되어 나타나는 증상으로는 두통이 있을 수 있다. 이때의 두통의 양상은 뒤끝이 당기면서 아프고 특히 아침기상 시에 심하나 서너시간후면 자연적으로 소실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밖에 현기증이나, 피로감, 심장의 두근거림 등이 있을 수 있으나, 이때에도 목뼈관절의 퇴행성 변화나 디스크 등과의 감별이 요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고혈압은 그 자체보다도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합병증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인데, 주요 합병증으로는 중풍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고 심장의 비대, 심부전, 심근경색 및 신부전증과 같은 치사율이 높은 질환으로 합병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한의학에서는 이와 유사한 증후로서 간장의 화기(火氣)가 상충하거나 인체의 음기(陰氣)가 약해져 양기(陽氣)가 상승한 소치로 보거나, 체질적인 소인에 의한 습담(濕痰)과 같은 비생리적인 물질의 전류 또는 인체에서 발생하는 풍기(風氣)를 조절해주는 역할을 하는 간장기능의 실조로 인한 풍(風)의 내동(內動)으로 원인을 분류하여 치료하고 있으니 이는 한의학적 변증과 진단적 체계하에서만 가능한 해석이므로 한의사의 전문적인 진료를 받아야 가능하나 평소에 예방의 조치로서는 미역을 권할 수 있다.

미역은 감곽(甘藿) 또는 해채(海菜)라고 하는데 번열(煩熱)을 내리고, 소변의 양을 증대시켜 수분대사를 통한 신진대사를 활발히 해줄 뿐만 아니라 요드성분이 많아 혈액의 정화를 통한 혈액의 산성화를 방지해 주므로 혈관 내벽을 청결히 해주는 효능이 있다. 무엇보다도 고혈압환자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3가지의 원칙을 지켜서 생활하는 것이다, 첫째 정신적, 육체적 과로를 피해야 한다. 둘째 급격한 온도변화를 피해야 하고 특히 몸을 갑자기 차게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음식을 최대한 싱겁게 먹도록 해야 한다.

 

 

 

 

 

 

 

 

일주문

대학입시와 인간교육 /정 승 석(인도철학과 교수)



참므로 희한한 대학 입시를 거친 신입생을 맞은 새학기가 시작된다. 규정된 정원을 신입생으로 맞는다는 결과만을 생각하면, 이번의 입시가 예전과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선 이전에는 겪은 적이 없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과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일종의 혼돈인 듯 비치는 과정상의 번거로움이나 곤란함을,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대학 선택의 기회를 여러 차례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호기(好機)로 감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다는 일대사(一大事)에 직면하여 거의 겨울 내내 교정을 들락거리는 수험생들을 목격하면서, 나는 엉뚱하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일대사를 착잡한 기분으로 자꾸 떠올리게 된다. 대학이라는 곳이 완성된 인간을 위한 마지막 단계의 교육 기관이라는 우리의 일상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정말 어렵게 대학에 입학하는 이런 식의 과정이 맹구부목(盲龜浮木)의 비유처럼 희귀한 인연으로 태어난다는 인간의 가치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을까? 불교의 경전에서 설하는 ‘맹구부목의 비유’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강조한다. 100년에 한 번씩 해면으로 떠올라 머리를 내미는 눈먼 거북이가 있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자,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채로 떠다니는 궤짝의 뚫린 구멍 속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되어 휴식을 취할 수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기회이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바로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대학에 어렵게 입학했다고 하여 이후의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듯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여 모두가 그 인연에 걸맞게 사는 것은 아니다. 여러 불전에서는 다시 인간이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지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대반열반경』의 언급은 당면한 현실에 대해 특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 이유로서 많은 도리를 생각할 수 있음, 신체와 언설이 유연함, 교만함, 교만을 버릴 수 있음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제도적인 교육은 당연히 인간의 부정적인 특성을 교정하고 바람직한 인성을 더욱 계발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특히 대학교육은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가치를 터득하게 한다는 데서 각별한 의의가 부여된다. 『대반열반경』으로 말하면, 교만을 버릴 수 있도록 하는데서 인간 교육은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올해 치른 대학 입시의 상황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부정적인 특성을 여실히 발휘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굳이 제도의 잘못만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대학들이 제도가 보장하는 자율성의 발휘라는 명분으로 대학 자체와 학생들을 차별화하는데 급급하여, 결국은 과거의 계급 사회처럼 대학을 철저히 계급화․차별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떠한 명분으로 해명하든 이런 상황은 교만심의 발휘이고 그 소산이며, 입학한 학생들 역시 그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사회에 배출될 것이다. 다행히 동국대학교에 입학한학 생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불교의 인간관이 우리 대학에서는 교육 이념으로 적용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시(詩)

古  寺 1/조지훈




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西域 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조지훈(1920~1968)

정각리포트



종정 추대 문제 원만히 해결

제 111회 임시중앙종회가 지난 17일 총무원 청사에서 열려 종정 추대 문제에 관해 논란을 거듭한 끝에 종정 추대 문제는 원로회의의 의견을 존중하는 선에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지난해 성철 스님 열반 이후 조계종회 내부에서 종정 추대문제를 놓고 원로회의와 종회 간의 의견 마찰이 있을 것으로 염려되었으나 이번 임시중앙종회에서 “원로 스님들의 뜻을 존중하기로 하고 법리 문제점은 적당한 시기에 정비한다.”는 결의문을 내놓았다.

한편 원로회의 의장이며 봉암사 조실인 서암 스님은 지난해 12월 15일 원로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종정에 추대된 이래 21일 오후 원로회의 의원 11명으로부터 재차 종정 추대의 제의를 받고 종정직 수락을 밝혀 지난해 12월 24일 문경 봉암사에서 총무원장과 원로의원, 신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종정 추대식이 봉행되었다.

이 날 봉정식에서 종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불자(拂子)와 법장(法杖)을 봉정 받았다. 종정추대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 만큼 종단의 화합과 발전을 기대해 본다.


“맑고 향기롭게”

불교계에서 제안한 최초의 범국민운동이 될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자는 취지의 이 운동은 메말라 각박하고 오염되어 혼탁한 사회에 맑고 향기로운 연꽃을 활짝 피워 보자는 취지에서 지난해 말 운동 본부를 발족하고 지난 14일 법정 스님, 현호 스님 등과 고현(조선대 교수)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본격적인 운동에 나섰다.

마음․자연․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것을 과제로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게 살기, 화내지 말고 웃으며 살기, 나 혼자만 생각 말고 더불어 살기(마음),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기, 꽃 한포기 나무 한그루 가꾸며 살기, 덜 쓰고 덜 버리기(자연), 나누어 주며 살기, 양보하며 살기, 남을 칭찬하며 살기(세상) 등 세부 실천 사항을 확정하여 운동의 상징인 연꽃 스티커와 함께 배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진흙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티 하나 없이 청정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이제 우리도 탁하고 삭막한 이 사바세계에서 맑고 향기로운 삶을 가꾸어 나갑시다.…”(취지문 중에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어 우리들의 마음과 자연, 세상이 연꽃처럼 맑고 향기롭게 되도록 많은 국민이 동참하기를 기대해본다. 요즈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환경문제 등이 이러한 운동으로 인해 국토를 청결히 함은 물론 마음의 정화를 이루어 불국정토를 가꿔 나가자.


청소년 문화 강좌

고교 졸업생을 위한 문화 강좌가 지난 1월 24일부터 26일까지 신라문화원(원장 정병길 불교신문 경주지국장) 주최로 신라문화원과 선다원에서 열렸다. 무료 강좌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올해로 다섯 번째가 되는데, ‘한국 문학과 청소년’(강사 : 동국대 김선학 교수), 민속 놀이지도(강사:극단 두둘이 이종태), 남산 슬라이드 상영, 신라의 젊은이들(강사 : 향토 사학자 윤경렬 선생), ‘문화재를 찾아서’(강사:양북 중학교 최민희교사), 경주 일원 현지답사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성도절 대법회

부처님께서 육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성취한 성도절을 기념하기 위한 대법회가 지난 1월 19일 오후 7시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불국사에서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해동불교대학장이며 청주 관음사 주지인 이두 스님과 시인 고운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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