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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2월호 / 통권 4호 / 불기 2537(1993)년 12월 1일 발행

 

 

 

 

초청강연

돈오의 이해가 참된 선불교 / 야나기다 세이잔

 

정각도량

진리의 몸으로 나투신 큰스님/ 한보광 스님

 

정각논단

불교와 과학정신/ 민태진

 

전등이야기

주인공아!/편집부

 

선시

퇴옹당 성철 대종사와 열반송

 

교리강좌

다비와 사리/ 편집위원

 

일주문

마음의 안정/ 이만

 

경전의 세계

정토 삼부경/편집위원

 

불심의 창

원행의 싹이 곧 불심/ 구태회

 

불자탐방

학문과 종교가 일치된 삶, 김길웅 교수/ 편집부

 

가람의 향기

갑사/ 편집부

 

비유와 설화

세상만사는 '자업자득'이요 '자작자수'니라
/ 편집위원

 

동국과 불교

명진학교의 동태/ 편집위원

 

정각리포트

가야산의 불심/ 이석종

 

불교 건강법

성인병/ 김갑성

 

 

 

초청 강연

돈오의 이해가 참된 선불교 /야나기다 세이잔/통역․번역 : 정성본


정각원에서는 선불교 분야에서 저명한 일본의 야나기다 세이잔 교수를 초청하여

지단 10월 11일 법회에서 그의 강연을 들었다. 선불교의 문헌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쳐온 야나기다 교수는 선불교가 곧 ‘나’(자기)의 발견이라는 자신의 체험적 결론을 전달하였다.

지난 호에 다 싣지 못한 후속 부분을 정리하여 이번 호에 소개한다.



이미 나의 논문을 살펴보셨겠지만, 중국불교의 긴 역사에서 본격적인 頓悟에 대한 논의가 분명하게 된 계기는 『금강삼매경』의 출현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신라 원효대사의 주석이  있습니다. 어쩌면 『금강삼매경』그 자체가 한국(신라) 불교의 작품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한 역사적인 연구와 검토에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책이 돈오의 과제에 대답한 최초의 선문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경전에는 頓悟라고 하는 문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에서는 一覺이라든가, 理入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용어가 그러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초기 선종의 텍스트는 이 경전의 출현동기 그 자체를 원래 그대로 해명하는 것에서부터 크게 전개되었습니다. 이 경전의 출현 없이는 초기 선불교의 텍스트는 저만큼의 활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래 이 경전의 내용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이 책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입니다. 당시 시대가 시대인 만큼 유식이나 천태, 화엄, 계율 등의 교학을 토대로 하여 融和 統一, 綜合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修行 實踐道도 그 가운데에 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해이긴 합니다만, 원효의  주석책을 만든 그 동기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요?

『금강삼매경』의 돈오적인입장을 강하게 이어 받은 다른 한 派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초기 선종의 인물로서 東山法門이 그것이며, 이러한 입장은 南頓北漸의 分派에 계승되고 있습니다.

道宣의 『續高僧伝』제16권『南天竺僧 菩提達摩章』에 수록되어 있는 ‘二入四行說’은『금강삼매경』에 대한 최초의 언급입니다. 여기에도 돈오라든지 돈점이라는 말은 없지만, 도선이 달마의 선법에 대하여 ‘大乘壁觀 功業最高’라는 평가는 이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점은 선불교의 핵심 문제

頓漸의 문제는 선불교의 핵심의 하나입니다. 문제는 핵심의 내용인 본질(알맹이)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학자들의 해석은 대개 頓悟를 頓敎와 혼동하고 있습니다. 돈황 사본에 의해서 알 수 있는 神會의 『壇語』의 제목에도‘南陽和上頓敎 云云...’이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頓敎로서의 金剛般若를 높이 들어 내걸고 북종에 대결하려고 한 것이 그 동기 입니다.

제일 먼저 육조의 『壇経』그 자체의 제목에 ‘南宗 頓敎最上大乘 云云...’이라고 하고 있는데, 신회의 『단어』를 계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쨌든 8세기 후반 중국 선종은 中原仏敎의 팽배한 움직임 속에 있었습니다. 초기의 동산법문이나 『금강삼매경』의 제작 동기와 비교해 볼 때 산회나 『단경』의 頓敎는 상당히 교학적이고 교판적인 입장으로되돌아 갔습니다.

같은 8세기 후반, 그러한 신회의 『단어』나 육조의『단경』과 거의 똑같은 선상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歷代法宝記』의 등장입니다. 이 책의 표제에는 세 개의 다른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最上乘頓悟法門』이라고 하는 제목은 한층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금강삼매경』을 의지해서 신회의 입장을 넘어서려고 하는 의도가 보입니다.

이 책은 해동의 명승 無相의 말을 근거로 하여, 신회의 남종돈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원효가 주석을 첨가한 이래 해동 신라불교의 새로운 움직임입니다만, 금세기 초기에 돈황 사본이 발견되기까지 무상의 존재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頓悟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선불교의 전부입니다. 돈오를 잘못 알고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흐리멍텅하게 되면, 禪이 아닌 것을 선이라고 말하는 그 말에 빠지고 맙니다.

해동 무상이 활약한 이후에, 자신이 직접 티베트까지 가서 돈오 선종의 입장을 주장한 사람이 유명한 摩訶衍 선사인데 그 자신이 북종선을 계승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돈황 사본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들의 존재와 주장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인도의 카말라쉴라(蓮華戒)와 중국의 摩訶衍 선사의 돈점 논쟁을 기록한 것이『頓悟大乘正理決』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마하연 선사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법보기』를 토대로 하여 전혀 다른 각도에서 돈오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일찍이 나는 『초기선종사의 연구』에서 그러한 사실의 방향성 정도만 제시해 두었습니다만, 바로 江西의 마주와 규봉 종밀 두 사람입니다.

달마로부터 비롯되는 선불교를 돈오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똑같은 입장입니다만, 마조는 교외별전을, 종밀은 교선일치를 주장하며『원각경』을 중시하였습니다.『금강삼매경』에서『원각경』으로의 발전은 중세 중국불교의 대동맥이었으며, 이후 한층 더 깊이 연구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또다시 송대 초기 종밀의 교선일치를 중심으로 중국불교를 재편한 『宗鏡錄』이 등장합니다. 이 책은 모두 100권으로 되어 있는데, 없어진 종밀의 『禪源諸詮集都序』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종밀과 『종경록』은 역시 해동 고려와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으며, 『종경록』은『금강삼매경』과『금강삼매경론』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종말 이후의 교선일치를 토대로 한『금강삼매경』의 재편에 대하여, 교외별전을 주장한 마조계의 여러 파에서 『금강삼매경』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사실 가장 큰 과제이지만, 소위 간화선의 등장을 주축으로 하여, 이 복잡한 문제를 규명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구상만 제시하는 정도로 그치고자 합니다.


바다의 『조당집』로드

끝으로 꼭 보고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금년 4월, 나는 처음으로 중국의 복건성 남부에 있는 천주 개원사를 참배하였습니다. 이곳은『조당집』이 만들어진 천주 추경사의 유적지입니다. 나는 『조당집』의 편자인 靜, 筠 두 사람의 禪德을 고려에서 유학한 入唐僧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천주에는 『刺桐城』이라는 문헌에만 보이는 도시의 이름이 남아있는데, 刺桐이란 개원사가 있는 천주의 별명입니다. 자동이란 아랍 지방의 열대식물의 이름입니다.

나는 이 자동이라는 나무의 꽃을 보고 싶어서 천주에 갔습니다만, 역시 이 꽃은 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동이란 마을의 이름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을 방문한 때가 4월초였는데, 개원사를 처음 갔을 때, 山門(절 입구의 일주문)을 뒤덮어 버릴 정도로 아주 많은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이 꽃을 목련꽃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이 꽃이야말로 자동나무의 꽃임에 틀림없다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그(자동나무의) 꽃에 심취해 보았습니다.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선사는 남천축국 香至王의 제3왕자라고 합니다. 남천축국은 꽃향기가 나는 도시이며,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항구도시임에 틀림없습니다. 달마대사는 남쪽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왔습니다. 사실 실크로드라는 말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돈황이라고 하는 깊숙한 지방을 중심으로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상인들이 왕래한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근대 학자들이 이름 붙인 말입니다. 바다의 실크로드라는 말보다도 나는 ‘바다의 달마로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증거는『조당집』에서 달마가 番至王의 셋째 왕자라고 하는 『香至』라는 말이며,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는 천주라는 도시에 꽃향기가 가득한, 내가 이름 붙인 자동나무의 꽃이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조당집』의 편찬자인 靜, 筠이 두 禪德을 고려 초기에 입당한 유학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의『조당집』로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조당집』의 원본이 중국의 천주라는 항구 도시에서 배를 타고 고려에 운반되어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조당집』은 고려 팔만대장경의 보판으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조조되어 오늘날 해인사에 그 판목이 보관된 것입니다.

나는 어제 처음으로『조당집』이 만들어진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이 있었던 그 언덕위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중국의 천주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 남해에 운반되어진『조당집』이 분사대장도감에서 주조된 것은 고려대장경이 완성된 고종 32년(1245년)이었습니다. 이『조당집』보판이 완성됨에 따라 드디어 고려대장경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구상하고 있는 ‘『조당집』로드’에 대한 요약입니다만, 고려대장경에 『조당집』이 어떻게든지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이것으로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합니다.

불전 및 선문헌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눈과 귀와 코와 입뿐만 아니라, 손가락의 끝으로 읽어야했던 것이 나의 연구 작업의 출발점이었습니다만, 이제는 발가락 끝으로 읽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이번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생명은 이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두 발로, 발가락 끝으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의 옛터를 찾아가보고 『조당집』이 탄생한 그『조당집』로드의 현장을 확인해봤습니다. 이제부터 그『조당집』로드의 확인은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의 발로, 발가락 끝으로 하는 연구에 기대를 걸어 보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보고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각도량

진리의 몸으로 나투신 큰스님 /한 보 광(서울캠퍼스 정각원장)



지난 4일 새벽, 만추의 가야산엔 때 아닌 108번의 범종소리가 온 산중을 뒤흔들어 깨웠다. 세수 82세, 법랍 59세의 성철 큰스님께서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진리의 법신(法身)을 나투신 것이다.

스님은 1912년 4월 10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의 전형적인 유가인 진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뒤 한학을 공부했으며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19살 때 결혼하였으나 속세에는 관심이 없던 차 선가의 기초교재인『禪宗四部錄』중 『信心銘』과 『證道歌』를 읽고 발심하여 속인으로 지리산 大願寺의 선방에 입실하였다. 그러나 선방의 규칙은 엄격하여 속인의 입실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었으므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해인사로 불려가게 되었다. 이때 백련암에 있던 河東山 스님이 반강제로 머리를 깎게 하고, 性徹이란 법명을 주었으니 이때가 25살 이었다.

처음에는 白龍城(독립운동 33인 중 한 분)스님을 시봉하였으나 참선에 뜻이 있어 몰래 줄행랑을 쳤다. 이로부터 스님의 고행은 시작되어 8년간의 눕지 않는 長坐不臥와 16년간의 말하지 않는 黔言修行, 산문 밖을 나가지 않는 洞口不出, 소금기 없는 음식인 無塩食 등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철저한 수행생활에 몰입 하였다.

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으며, 오욕과 번뇌로 가득한 육신에 대한 조복이었다. 스님께서는 항상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수행자란 철저히 고독해져야 된다.”고 하셨다. 인간이 철저히 고독해질 때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평소의 생활신조는 “최저의 생활로 최고의 노력을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식․주에 있어서도 옷은 한 벌로 헤어지면 기워 입었으며, 음식은 무염식의 생식(生食)과 소식(小食)이었으며, 방은 3평을 넘지 않았으니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세속화되어가는 종교인들에게 참다운 성직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

또한 정치와 권력에 초연하여 어떤 누구도 부처님 전에 3천 배를 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었다. 70년 유신정권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를 참배하고 스님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그 사람과 나는 가는 길이 다르므로 굳이 만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찾아온 대통령을 돌려보냈으며, 80년 초에 전두환 대통령이 모시려고 하였지만 사양하여 한때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오늘날 성직자들이 정치권력에 아부하여 정치와 종교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한 스님도 아이들의 소리가 도량에서 나면 걸어 잠근 문도 열고 나오셨으니 천진불(天眞佛)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유일한 도반이요 친구는 사하촌(寺下村)의 어린 아이들이었다.

스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은 1년에 단 두 번뿐이었으니, 신년과 부처님 오신 날의 법어였다. 이것도 간결하고 이해하기 난해한 말씀이었으나, 80년대의 군사통치하의 어두운 시절에 있었던 전 국민들에게는 감로수와 같았으며 구원의 빛이었다. 스님은 가장 적은 말씀을 하셨으나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으며,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누더기 입은 자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큰스님께서는 철저히 혼자서 고독하게 살던 육신을 던져버리셨으니, 이제 영원한 광명의 법신으로 나투시어 온 중생을 이끄소서!

 

 

 

 

 

 

정각논단

불교와 과학정신 /閔 泰 鎭(화학과 교수)



우리는 형이상학적 정신과학과 형이하학적인 물질과학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다. 이는 정신론을 가지고 물질론을 다루거나, 물질론을 가지고 정신론을 다룰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많은 문제성을 갖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仏法)이 무량무변한 우주의 모든 진리를 한 눈으로 보시고 송두리째 깨우친 큰 진리라 한다면, 우리가 독립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신과학의 진리나 물질과학의 현대 과학적 진리가 서로 다른 진리가 아니라 서로 이해되고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라 생각된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소멸을 成住壞空으로 설명하는 바, 불성이 우주 만물의 본성이라 한다면 과학은 우주 만물의 규정된 진리를 객관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질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는 빛에 관한 실험 근거를 가지고 불교와 과학을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빛의 본성과 물질적 작용

빛의 본성은 완전한 파동도 아니고 완전한 입자도 아니며, 파동성과 입자성 그리고 전기적 성질과 자기적 성질을 함께 지닌 이원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존재하는 질량의 총화는 일정하고 에너지의 총화도 일정하다.”고 제안하였다. 질량이 무한히 흐트러진 것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 질량이다. 에너지의 형태는 다양하고 연기법과 같이 서로 변화되지만 항시 일정하다. 식물이나 해조류 그리고 몇몇 세균과 같은 광합성 생물들은 빛에너지를 이용하여 화학에너지 상태로 체내에 저장한다. 한편, 반딧불의 불빛은 체내에서 생합성한 화학에너지를 빛에너지로 방출하는 현상으로 보고 되어 있다.

또한 빛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예로서는 셀렌니움 광전지를 들 수 있다. 광합성 생물 이외의 동물이나 미생물 그리고 버섯과 같은 고등균류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며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세포 동물인 나팔벌레는 610nm의 빛을 이용하여 생체 에너지 저장물질인 ATP(adenosine triphosphate)라는 화합물을 생합성하고 그것을 운동에너지원으로 이용함으로써 빛을 필요로 함을 필자는 보고하였다.

또한 고등균류인 버섯은 아직까지 엽록체가 없는 것으로 보고 되어 엽록소와 같은 흡광색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470nm의 빛에 의하여 ATP의 생합성이 촉진되고, 680nm의 빛에 의하여 ATP의 분해가 촉진되어 그때 유리된 에너지를 생체 에너지로 이용하고 있음을 보고한 바 있다.


영원한 불성의 빛

그러면 종교적인 면에서 본 빛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 화엄경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는 遍照光明, 즉 온누리에 빛을 비추어 주는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이는 법신불인 바 심법, 색법 등 만법의 바탕이 되는 불성을 형상화시킨 부처님이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내면화를 마음이라 하였고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 불성의 빛을 지혜 광명으로 보고 있는 것 같으며, 그 지혜 광명은 불성의 광명이며, 여래장성의 광명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은 과학에서 어떻게 음미되어 질 수 있을까. 이 같은 문제는 현대과학의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단편적인 몇몇 실험적 근거를 제시하였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개체가 모양과 성질이 다르듯이 만물이 특정의 광파만을 선택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가 아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광파로 된 복합파이며, 모든 만물들은 특정의 광파만을 이용하여 성질․종류․함량이 서로 다른 탄수화물․지방질․단백질․유전자를 구성하는 핵산 등과 같은 복잡한 구조의 생체화합물을 만들고, 이러한 화합물이 다시 모여 세포를 만든다. 그 세포가 모여 특유의 형태와 성질을 가지는 개체가 형성되고, 변화․존재하는 것으로 예측된다(森羅万象之光波卽是宇宙万象也).


뇌파의 변화와 삼매의 깊이

다음에서는 뇌파와 참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사람의 정신 활동을 영위하는 신경세포는 대뇌피질 속에 층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수는 무려 140억 개 정도이다. 이 세포들도 따지고 보면 광합성 산물인 화학에너지, 즉 음식물을 섭취하여 체내 대사를 거쳐 생합성 된 복잡한 유기물질이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빛에너지가 변환된 거대분자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들 세포는 항상 진동이나 회전운동과 같은 정상적인 분자운동을 하고 있지만 오관을 통하여 들어온 번뇌 망상이나 정신적인 큰 충격을 받으면, 140억 개나 되는 세포들은 비정상적인 분자 운동을 하게 되고, 그 진동에너지가 증가하게 된다. 이에 따라 혈액 순환이 빨라져 혈압이 올라가고, 숨이 가빠지며, 최후에는 체온까지 올라가 정신이 혼미해져서 오류까지 범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는 140억 개나 되는 신경세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삼매(samādhi)의 현상을 빛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삼매란 火鏡이라고 하는 볼록렌즈로 삼라만상의 수보다도 많은 번뇌 망상의 빛을 다스려 자기가 목표로 하는 한 개의 광파만을 한 곳으로 모아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비유하고 싶다. 그러므로 천재와 백치의 차이는 이 같은 정신 집중과 집중 시간의 척도이며, 그 함수관계라 할 수 있다.

그 예로서 정상인의 뇌파를 측정하면 알파波는 11~14cps(cycle per second)이지만, 흥분 긴장 불안 상태에서는 베타파가 발현되어 그 파수는 14~l7cps이고, 그 정도에 따라 30cps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삼매의 경지가 깊어갈수록 알파파의 파수는 11cps에서 7cps로 감소하게 되며, 이때 초능력이 발현되고, 수면 상태와 비슷해진다. 또한 경지가 더 깊어가면 세타파가 출현하면서 그 파수는 7cps에서 4cps 정도로서 감각이 없어지며, 무통 분만이나 무통 수술을 할 수 있는 경지이다. 또 한 단계 더 깊어지면 델타파가 출현하고, 그 파수가 4cps에서 1.5cps로 감소되면 무의식 상태이며 초능력이 발현되고, 머리 주위에 오라(Aura)를 방출한다. 델타파가 1.5cps에서 0cps로 감소하면 몸 전체가 오라 상태의 빛을 방출하면서 140억 개의 신경세포의 진동에너지는 깨달음의 경지, 즉 해탈에 필요로 하는 에너지로 전환되고, 비로자나의 경지로 된다고 제안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번뇌 망상을 모두 떨칠 수 있는 과정을 선수행이라 하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선수행의 경지를 8개의 경지로 나누어 그 단계별로 內住心, 等住心, 安住心, 近住心, 調順心, 寂靜心, 最極寂靜心, 專住一趣, 그리고 마지막 해탈의 경지를 等持心으로 보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논의의 상황들은 모두 불타의 깨달음인 바, 연기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역학적 인과관계요, 둘째는 인연화합의 관계요, 셋째는 상의상관의 관계로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러한 3가지의 상황은 우주 법계에 상존하는 것으로 이를 일러 법주법계의 세계라 하는 것이다.


빛도 공에서 비론 된다

만물 생성의 근원인 빛은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 도대체 이 광자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 광자를 다시 무한히 쪼갤 때 이 극미자의 실체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空인 것인가. 만일, 공이라면 어떻게 有에서 공이 되며, 유라면 어떻게 공에서 유가 되어 존재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빛이 입자성을 가진 광자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본질은 무엇이며 이를 무한히 쪼갤 때 있을 것(有)인가, 공인 것(同)인가에 관하여는 의문인 것이다. 수학적인 개념으로는 수의 연속성으로 영(零)에 무한히 접근할 뿐 영은 아니다. 그러므로 광자를 무한히 쪼갠 그  극미자의 본질은 무엇이며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직도 답은 없는 것이다.

빛의 광자라고 하는 입자는 힘을 전달하는 하나의 소립자로서 그것을 무한히 쪼갠 극미자와 반극미자가 서로 공존하고 있으며 그들이 합해져 공이 되고, 서로 떨어져 그들이 존재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은 본시 공에서 태어나고, 공과 유를 매개하는 것은 空有轉子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주 생성의 본질은 빛이며, 빛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추구할 때 그 궁극은 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빛은 공에서부터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빛으로부터 생성된 우주의 본질 또한 공으로부터 나왔고, 우주를 구성하는 수만 가지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본질이 실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본질이 없는 虛相이며, 있거나(有), 없거나(無), 모양이 있거나(相), 모양이 없는 것(非相)은 오직 마음 장난이 아닐는지!(宇宙本是空 万象都虛相 有無相非相一切唯心造)


동체대비의 세계

이상과 같이 본다면 그것은 바로 색과 공이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님과 동시에, 또한 물질이 바로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라고 하는 반야심경의 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생멸증감과 오염청정도 없고 안․이․비․설․신․의 등에 의하여 생기는 인식주관도 없으며, 빛․소리․냄새․맛․접촉․사물(色聲香味觸法) 등에 의하여 생기는 인식 객관도 없고, 이 인식 객관과 인식 주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인식 세계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그대로일 뿐임을 자각한 경지는 너와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인 동체대비의 세계이고, 이 동체대비의 세계는 나와 네가 모두 하나라는 일미 평등의 세계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지에서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자기중심성의 집착과 그 집착에서 야기되는 분별에 의한 차별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사물의 변화하는 모습에 근거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시간의 구별 또한 넘어섰으니 생사의 문제 역시 초월한 경지라 하겠다. 어느 한 지점을 기준으로 한 공간적 구별 또한 그 근본에 있어서 무의미한 분별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할 때 남북이나, 동서의 문제, 인종이나 국가의 문제도 다 허망한 착각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정치․경제․사회적 모순도 이러한 세계를 깨닫지 못한 데에서 나오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 자기중심성의 집착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한민족의 남북통일에 대한 원리가 개시되어진다고 보며, 세계 인류 평화의 大道가 발견되고, 정치와 사회의 차원에 있어서 정의실현의 방향이 포착된다 하겠다.

불교가 21세기를 내다보며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한 光正한 비전(vision)을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관점에서 새롭게 제시할 사명과 역할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부각된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언급한 논의를 요약하여 보면 광파는 하나가 아니라 삼라만상의 수보다 많으며 그 하나하나가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광파의 근원은 光子이다. 그러나 광자의 본질은 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본래 공이고, 만상이라 하는 것도 實相이 아니라 그림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있고 없고 相이거나 相이 아닌 것 모두가 오로지 마음으로 조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森羅万象之光波 卽是宇宙万象也. 宇宙本是空 万象都虛相 有無相非相 一切唯心造)고 생각한다.

 

 

 

 

 

 

 

전등이야기

주인공아 /편집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서암산(瑞巖山)에 주석한 사언(師彦)이라고 하는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그는 항상 바위 위에 바보처럼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큰소리로 “주인공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서는 스스로 “예.”라고 대답했다.

또 이어서 “눈을 똑바로 뜨라.”라고 하였다.

또 스스로 답하기를 “예.”라고 했다.

또 이어서 “지금부터 사람들에게 속지 말아라.”라고 했다.

또 스스로 답하기를 “예.”라고 자문자답하였다고 한다.

서암 사언(瑞巖師彦)은 자신에게 큰소리로 ‘주인공아’라고 부르면서 매일 자신을 점검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참된 주인공은 누구이며 나의 참된 주인공은 누구일까? 우리는 하루 종일 자신의 몸뚱이를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이 몸뚱이와 나의 정신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육체는 육체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살아가고 있다.

매일 바쁜 일과에 시달리다 보면 하루를 살아도 정신없이 살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척 바쁘게 살 때를 일컬어 ‘정신없이 바쁘다거나’ ‘정신없이 산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바쁜 일과 속에 자신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서언은 일갈(一喝)하였다. 즉 “주인공아!” “눈을 똑 바로 뜨고 남에게 속지 말아라.”고 하였다.

자신이 주인답게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참된 삶이 되고 보람된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남의 말에 속고, 남의 가르침에 속고 남의 글에 속으며, 돈에 속아 살고, 명예에 속아 살며, 권력에 속아 산다. 이러한 삶은 참된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이 되며, 거짓된 삶, 허망 된 삶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루 24시간 중에 자신을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정신없이 허둥대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산다고 해야 좋을까.

이제부터라도 나의 참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찾는 공부를 하여 보는 것은 어떠할까.

“주인공아!”

“너는 누구냐?”

 

 

 

 

 

 

선시(禪詩)

퇴옹당 성철 대종사 열반송

(退翁堂 性徹 大宗師 涅槃頌)



일평생 어리석은 중생들 구제한다고 한 것이

그들을 속인 결과되었으니

그 과보가 하늘에 가득하여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스러움이 천만 가래로다.

둥근 해는 마지막 붉은 빛 토하며

서산 마루 푸른 산 위에 걸려 있구나.




生平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교리강좌

다비와 사리 /편집위원



불교의 전통적인 장례법으로 인식되어 있는 다비(茶毘)는 조계종의 종정 스님이었던 성철 대종사의 열반으로 각별히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관심의 대상이 된 바 있다. 불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까지 종정 스님의 다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다비 후에 추려 낼 사리(舍利)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정 스님의 무궁한 정진과 도력만큼이나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던 다비의 불길이 가라앉은 뒤, 이윽고 수습된 영롱한 사리들은 현재까지는 압도적인 최대의 양이었다는 점에서 그간의 온갖 기대를 한껏 충족시켜 주었고, 다시 한번 성철 대종사의 위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불교인들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많은 사리가 나왔기 때문에 스님의 위덕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뚜렷이 각인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각인이 반드시 사리의 양 때문이라면 불교의 진리에 바르게 접근한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정작 되새겨야 할 것은 누구보다도 기뻐했을 장례집행위원장 스님이 “성철 큰스님이 이것을 보시면 모두 버리라고 하셨을 것이다.”라고 대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입적하신 큰스님의 진정한 경지를 대변한 것이고, 불교의 무궁한 진리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 같은 말씀은 결코 사리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리 자체에 집착하여 신앙함으로써 우리가 큰스님에게서 배우고 추구해야 할 진리의 깨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리에 대한신앙은 인도의 불교가 오늘날의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전통적인 다비와 사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다비의 의미와 유래

다비는 중국에서 소신(燒身)․분시(焚屍)․분소(焚燒)등으로 번역했듯이 육신을 태우는 것, 즉 화장(火葬)을 뜻한다. 인도의 고대어로는 자피타(jhāpita)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에 유사한 속어의 발음을 중국에서 모사하여 ‘다비’로 번역한 것이 일반에 통용되었을 것이다. 세속으로부터의 초탈과 아무데도 걸림이 없는 무아․무애의 경지를 추구하는 불교에서 사후의 육신을 아예 태워 없애버리는 것이 교리에도 합당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다비가 불교 특유의 장례법인 것은 아니다. 원래는 인도에서 고대로부터 통용되어 오던 장례법이었다. 인도고대의 윤회관에 의하면, 사자(死者)의 영혼은 연기와 함께 천계(天界)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화장을 선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전에 의하면, 인도에는 화장, 수장(水葬), 토장(土葬), 풍장(風葬)이라는 네 가지 장례법이 있었는데, 특히 전륜성왕과 같은 존귀한 인물의 장례는 화장에 의해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장례도 이 관습에 따르게 되었는데, 화장이 불교 특유의 장례법으로 인식된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초기 성전 중의『대반열반경』(장아함의 遊行経)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래를 전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후, 십대 제자 중에서 부처님을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모신 아난다에게 전륜성왕의 장례법은 어떠하냐고 묻자, 아난다는 부처님이 자기에게 해주었던 말씀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장례법은 먼저 향탕(香湯)으로 그 몸을 씻고 새 옷으로 두루 몸을 감싸되, 오백 겹으로 몸을 감싼 뒤에 황금의 관에 넣고 기름을 거기에 쏟는다. 다시 그 황금의 관을 쇠로 된 곽 속에 넣고 전단향의 목관으로 그 겉을 겹싸고 온갖 기이한 향을 두텁게 쌓아 불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사리를 거두어 네거리에 탑을 세워 거기에 넣고, 겉에는 비단을 걸어,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의 탑을 보고서 그 바른 교화를 사모하여 많은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아난다는 계속하여 부처님도 이와 같은 방법의 장례로써 자신의 시신을 처리하여 불탑(仏塔)을 세워, 사람들이 그 불탑을 통해 행복을 얻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하도록 말씀 했음을 전하고 있다.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의 시신은 실제로 그와 같은 방법에 따라 화장되었으며, 화장 후의 사리를 주변의 국가들이 서로 안치하려고 다투던 끝에 결국 중재가 이루어져 여덟 국가가 분배하여 각기 자국에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불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이 후대의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후의 그 불탑에 대한 신앙이란 곧 사리 신앙에 다름 아니다. 나중에 아소카 왕은 여덟 탑 중 일곱 탑으로부터 유골을 모두 모아 다시 세분하여 8만4천 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했다고 한다.


사리의 진정한 의미

이처럼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일찍이 시작되었으며, 인도불교의 초기부터 성행했던 불탑숭배도 사리 숭배로부터 유래하여 후대에 부처님의 이타적인 자비 실천을 천명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였다. 사리란 ‘샤리라(śarīra)’라는 범어의 발음을 중국에서 묘사한 말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골조(骨組), 신체, 구성 요소를 의미한다. 이것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유골 특히 부처님이나 성자의 유골을 의미하고, 다시 그 의미가 전용되어 현재는 스님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난후 유골에서 추려 낸 구슬모양의 작은 결정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유골의 결정체로서의 사리가 지금은 수행승의 도력을 상징하는 신비의 대상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이것이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원래 살아계신 부처님의 육신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의 열반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은 아난다에게 “아직 다비에 붙이기 전에 사리를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서 말하는 사리는 부처님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들의 심정으로는 다비 후의 유골이 바로 부처님 생존시의 육신과 같은 것이며, 그 유골 속의 영롱한 결정체는 진리의 빛인 부처님 그 자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전통에 연유하여 사리를 숭배하고 공양하는 신앙이 사리탑을 건립하는 등의 형태로 예로부터 아시아의 불교국에서 널리 성행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사리의 양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실제로는 부처님 사리를 상징하는 다른 것으로 대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따라 사리를 구분하여 석가모니의 유골을 ‘생신(生身) 사리’ 또는 ‘산골(身骨) 사리’라고 칭하고, 그의 가르침을 사리에 비유하여 ‘법신(法身) 사리’라고 칭한다. 종종 경전을 탑에 안치하는 예가 후자의 경우다. 또 시신 자체를 가리키는 ‘전신(全身) 사리’와 유골 또는 거기에서 나온 낱알의 결정체를 가리키는 ‘쇄신(碎身) 사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쇄신 사리만을 사리로 알고 있지만, 한 스님이 입적하기 전의 모든 바른 가르침과 위덕이 바로 사리인 것이다. 흔히 다비 후에 수습한 사리의 양과 수행정도가 비례한다고 ale는 것은, 사리가 한량없는 6바라밀의 공덕에서 생기며 매우 얻기 어렵고 으뜸인 복전이라고 설한 『금광명경』에서 유래한 듯하다. 바로 이 점에서 사리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의의를 지니지만, 쇄신 사리 자체에만 천착하여 신앙하는 것은 보다 지고한 가르침으로의 지향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며, 사리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밝혀 보고자하는 한낱 속인의 호기심과 다를 바 없게 될지 모른다.

 

 

 

 

 

 

일주문

마음의 안정 /李 万(불교학과 교수)



불교에서 선종(禪宗)은 일반적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의 의사전달 방법 중에서 한 가지에 불과한 말이나 문자로써는 진실한 이치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를 버리고서 곧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체득되는 경지를 취할 것을 종지로 삼은 종파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한데 모아 조용한 가운데 좌선하면서 자기의 심성을 내관(內觀)하는 한편, 삼매(三昧 : 定)의 경지에서 현묘함을 감득하는 것이 중요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삼매의 경지란 안정된 상태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념무상의 경지이며, 바른 마음이 일어난 곳(正心行處)으로서 이곳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고, 시(是)와 비(非)에 관계치 않으며, 유(有)와 무(無)에 간섭하지 않아서 마음을 안락자재한 경계에 소요케 한다는 것이다. 마치 샘물이 맑으면 달 그림자가 그대로 나타나듯이 (泉水澄淸 月影頓現), 우리들의 산란한 마음이 정에 들면 즉 안정하게 되면, 모든 것의 본성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형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것이 일상생활에서는 지혜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회남자(准南子)의 인간훈(人間訓)에서 나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故事)에서 노인이 취한 행동과도 같은지 모르겠다. 즉 한 노인이 변방에서 아들과 함께 말 한 필을 기르면서 살아가는데, 어느 날 공교롭게도 그 말이 이웃 나라의 국경을 넘어 도망쳐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위로하기를,

“당신의 전 재산인 말이 도망을 쳤으니 안 되었다. 손재수(損財數)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등으로 말하니, 그 노인은,

“그렇게 위로해 주어서 고맙지만 꼭 손재수라고만 말하지 말라. 단지 있던 말이 잠시 없어졌다고만 이야기하라.”는 식으로 별로 걱정도 하지 않은 채 대답하니,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화는 말이 돌아왔을 때는 물론이고 낙마(落馬)를 했을 때나 그로 인하여 불구가 되어서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았을 때에도 계속 되었지만, 그때마다 지혜 있는 노인은 이에 쉽게 동요되어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말하기를,

“말이 단지 돌아왔다고만 이야기하라.”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다쳤다고만 말하라.”

“불구이기 때문에 전쟁터에 가지 못했다고만 이야기하라.”는 식으로 여전히 대답했다고한다.

말하자면 그 노인에게는 이미 모든 사물의 형상 뒤에 가려 있는 본성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 즉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마음에서 갖가지의 분별을 배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어디에 함부로 치우쳐서 집착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경전의 세계

정토 삼부경 /편집위원



아미타불은 깨끗한 땅에서 중생들을 거두어주는 임이시고, 석가여래는 깨끗한 땅으로 지도하는 스승이시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부처님을 도와서 교화를 펴시는 분들이다. 그러므로 일대시교(一代時敎)의 여러 경전에서는 간절하게 중생들이 왕생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미타불은 무량수경에 의하면, 옛날에 법장(法藏)이라는 보살이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들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을 거듭하여 마침내 구원이 성취됨에 부처가 되어서 현재는 극락세계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불은 보살도를 완성하여 타방세계(他方世界)에 출현하신 부처님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이러한 타방불신앙이 성행하여 국민이면 거의 누구나가 아미타불을 은인 중에 염불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이는 일종의 왕생신앙(往生信仰)으로서 이 세상을 다 살고난 뒤에 보다 좋은 세계에 태어나고 싶은 중생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아미타불 즉 서방정토 신앙은 현세에 대한 강한 불만과 미련심(未練心)이 많은 사람이 사후(死後)에나 현세에서 마음의 정화를 통하여 안정을 얻기 위한 타력적인 방법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미타(Amitā : 阿弥陀)불을 한량이 없는 수명을 가진 부처 즉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한량이 없는 광명을 가진 부처 즉 무량광불(無量光佛)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수명은 자비를 상징하고 광명은 지혜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들이 아미타불에 귀의하는 것은 꼭 타력적이라기 보다는 진실로 본래부터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혜와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아미타불은 항상 큰 원력의 배를 타고 생사의 바다에 떠서, 이 언덕이나 저 언덕에 머물지 않고, 한가운데도 머물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제도코자 하는데, 만약,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하루나 7일 동안 명호를 외워 한결같이 마음 산란하지 않으면, 그가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이 보살들을 거느리고 그의 앞에 나타나신다. 이때 그 사람은 전도됨이 없이 곧 왕생케 되느니라.”

하거나,

“시방세계의 중생이 내 이름을 듣고 내 국토를 생각하면서 덕을 밭거나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했으면서도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면, 나는 정각을 취하지 않으리라.”

고 맹세하신 반면에, 이와 같은 경지에 태어날 사람은 반드시 열반에 도달하고자 하는 원력과, 이생을 마치고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는 원력 및 부처님과 같이 32상을 갖추겠다는 것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또한 중생들이 보살도를 완성하여 부처가 된 결과로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을 주된 부처로 하는 경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무량수경과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이 그것이다. 이들을 또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도 부른다. 먼저 무량수경(無量壽経)은 아미타경에 비하여 그 분량이 많기 때문에 대경(大經)이라고 하며, 대무량수경 또는 2권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쌍권경(雙卷經)이라고도 한다. 그 내용은 상권에서는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를 건설하게 된 원인과 그 과보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미타불은 일찍이 법장보살이었을 때에 48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등 그 누구라도 그의 원력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구제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하권에서는 중생이 극락세계에 왕생케 되는 원인과 과보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누구든지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신심을 내어서 짧은 순간이라도 지성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아미타불의 원력을 입어서 거기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중생들은 세 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상근기 중생들은 욕심을 버리고 출가하여 오로지 선근 등을 닦아 극락에 왕생코자 하는 무리들이고, 중근기 중생들은 출가는 했지만 다소의 선한 일로 계율을 지키며 불사를 하는 등 공덕심을 회향하여 왕생코자 하는 무리들이고, 하근기 중생들은 재가의 선남선녀들로서 열심히 거기에 태어나고자 원력을 세우고 염불을 하거나 법문 등을 듣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미타경은 무량수경에 비하여 그 분량이 적기 때문에 소무량수경 또는 소경이라고도 하며 사지경(四紙經)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부처님 스스로가 설하신 무문자설경(無問自脫経)으로서, 내용은 아미타불과 서방정토의 장엄에 관하여 설명하고, 그러한 땅에 왕생하는 길은 아미타불을 부르거나 염불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그것에 있어서 무량수경과 다음에 알아 볼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고 한다.

관무량수경은 관무량수불경 또는 무량수관경이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줄여서 관경이라고 약칭한다. 경전의 명칭에서와 같이 관불(觀仏)에 관하여 설한 경전 중의 하나로서, 아미타불과 그 화신불인 관음과 세지의 두 보살 및 극락정토에 관한 장엄을 구체적으로 모두 16관법으로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설하는 까닭은 왕사성의 비극을 주제로 위제희(韋提希) 부인이 고뇌를 떨어버리고, 서방정토에 구원되어가는 경위를 관불과 관상의 설법으로 명백히 하고, 무량수경에서 설하는 타력구제(他力救濟)에 관한 진실성을 말법시대의 중생들에게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정토삼부경에서 말하는 중요한 내용은 역시 선남자와 선녀인들의 지극한 정성과 염불을 강조한 것으로써 그것은,

“사리불이여, 이 경전을 어째서 모든 부처님들이 한결같이 보호하는 법문이라고 하는 줄 아는가. 만약 선남자와 선녀인들이 이 법문을 듣고 받아서 지니거나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부처님들의 보호를 받아서 올바른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내 말과 여러 부처님의 말씀을 잘 따르라.”

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끝없이 정진하는 중생은 여러 부처님이 이를 호지해서 결국에 죽지 않는 왕생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불심의 창

願行의 싹이 곧 佛心 /具 泰 會(문협회원․시인)



밖은 영하 15도를 넘나들었다. 가야산의 겨울은 언제나 그렇듯이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食水로 활용하는 水閣에는 고드름이 꽁꽁 얼어붙었다. 때를 맞춰 수문을 열고 닫는 水頭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의 이야기로는 요 근래 날씨 중에 오늘이 더욱 추운 것 같다고 한다.

나와 慧勤은 굳게 결심하였다. 이번 겨울에는 정말 출가자의 본분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알아보자고 勇猛精進을 약속한 것이다. 방장께 話頭를 받으려면 3천 배를 해야 되기 때문에 저녁예불이 끝나고 大寂光殿에서 부처님께 多劫生來의 業障 消滅을 바라는 마음으로 一拜一拜를 하기 시작하였다.

천 개의 보리자로 만들어진 염주가 세 번 돌면 3천배가 되는 것이고, 보통 8시간을 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관계없이 더욱 정성껏 하기로 약속하였다.

몸은 무거워지고 무릎이 아프기도 하였지만 머리는 그렇게 맑아지고 기쁠 수 없었다. 냉랭한 찬바람이 법당 속으로 파고들어 손은 얼어붙고 귀는 없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저 기쁠 뿐이었다. 벌써 새벽 3시가 되었는지 노전스님의 道場聲 올리는 목탁소리가 고요한 山中을 일깨웠다. 大衆스님과 함께 아침 예불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여 3천배를 마치고 나니 아침 7시가 다되었다. 어제 저녁 7시에 시작을 했으니 모두l2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이상은 내가 입적하신 性徹 宗正스님을 최초로 단독 친견하여 화두를 받게 되기 직전의 일이다. 3천 배를 마치고 나는 道泮 慧勤과 함께 방장스님이 계신 퇴설당을 찾아가 삼배를 드리고 화두를 청하니 무척 기뻐하시며 “그래, 내가 다 알고 있었제. 어젯밤 3천 배 하느라고 고생 많았제. 강원에서도 經學을 잘 한다고 들었는데 이번 겨울에는 용맹정진을 통해서 廓徹大悟해야지. 그러면, 내가 화두를 줄 테니 이것 잘 참구해야 해…….”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즉 不是心 不是物, 不是仏, 不甚麽…….”

“네, 열심히 참구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번 용맹정진에 동참해서 잘해봐, 졸음이 올 테니 음식은 아주 적게 먹고 화두를 間斷 없이 해야 돼.”

이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그것도 海印叢林이 시작된 ’87년 첫 겨울 납월(臘月)八日 成道齋日을 기해 시작되는 7일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諸方의 선원에서 모인 내노라 하는 雲水衲子들과 함께 강원 학인으로서는 드물게 20여명이 동참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3천 배를 하고 당시 방장이신 性徹스님께 직접 화두를 받기는 나와 慧勤 두 사람을 포함하여 5~6명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 시험공부를 한다고 늦게까지 공부를 한 일은 있어도 7일간을 자지 않고 계속 정진한다는 것은 행자티를 갓 벗어난 나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되기도 하였지만 신심이 충만해 있던 당시로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녁 예불이 끝나고 入齋가 시작되어 자정을 넘어 새벽녘이 되니 졸음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무릎을 꼬집고 이를 꽉 깨물며 눈을 부릅뜨고 화두를 참구하면 다시 맑아지곤 하였다. 50분 坐禪하고 10분 放禪 步行하는 선원의 정진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2~3일은 졸음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4일째부터는 잠이 오질 않고 화두가 성성하여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때도 있었다.

成道齋日 前日 즉, 6일째 되는 날 방장스님이 긴 누더기를 입으시고 궁현당에 직접 오셔서 정진하고 있는 74명의 대중을 무언의 눈빛으로 격려하시고 훌훌히 가신 후, 아침 예불과 함께 납월 八日의 成道齋日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의 맑고 허허로이 넓어지는 마음을 “1968년 1월 7일, 눈 온 후 맑음”이라고 적은 빛바랜 일기장에서 읽을 수가 있다. 양력으로는 ’68년 이었지만 음력은 ’67년 12월이니 내 나이 19세에서 20세로 접어들던 때로 25년 전의 일이다.


푸른 하늘 푸른 잔디

호호탕탕 넓은 들을


피리 소리 벗을 하여

마음껏 노니라니


훈풍은 노래하고

靑松은 춤을 추며

어린 아이 엄마 품에

쌔근쌔근 잠들었네.


이후 나는 禪의 묘미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看經에 몰두하면서도 화두를 참구하며 行住坐臥에도 집중하다 보니 이따금 멍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그해 여름에 해인사대적광전에서 7일간의 용맹정진을 끝내고 방장실을 찾아 疑心事를 지도 받은 후, 더 조용한 곳을 찾아 月內 묘관음사 香谷스님 門下에서 굳은 각오를 하고 加行精進하며 두문불출하였다.

이러한 정진이 200여 일 계속되던 중 도반 法波가 해인사 상봉에서 적설로 不歸客이 되자 부득이 해인사를 다시 찾아 大敎를 마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에 나는 나름대로의 불교홍포의 원을 세우고 順境보다도 逆境을 택하면서 최선을 다하였지만 이승의 緣이 부족한 탓으로, 10.27 法難의 仏敎界 受侮를 지켜보면서 “거창한 願行보다도 차라리 초야에 묻혀서 나의 작은 이웃을 교화하리라.”는 아주 작은, 정말 아주 적은 願行을 가지고 살고 있다.

지면 관계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적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불교계의 세계적 지도자이신 性徹 宗正스님께서 입적하시어 오늘 다비를 끝냈고, 香谷스님께서는 이미 15년 전에 입적하셨다.

大善知識의 열반을 슬퍼하면서 20세의 젊은 나이에 받았던 信心과 경험을 반추하며, “前生事가 궁금하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대로이고, 來生事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대로 일세.”(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하신 게송을 되새기는 것으로 불심의 창을 가름한다.

혹, 어린 동자가 仏心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願行이 곧 仏心’이라고 살며시 말하고 싶다.

 

 

 

 

 

 

 

불자탐방

학문과 종교가 일치된 삶, 김 길 웅 /편집부



경주캠퍼스가 자리한 경주는 자연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특히 이곳은 신라 천년의 고도로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곳이기 때문에 전역이 불자들이 가꾸고 보존해야 할 수행도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까닭에 종립대학인 우리학교 경주캠퍼스에 고고미술사학과가 설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호에서 찾아본 불자는 고고미술사학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경주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을 학문적 열의로 실천하고 계신 김길웅 교수님이다.

교수님이 불교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다음이었다고 한다. 교수님은 1966년 우리 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근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였지만 지원 동기는 남달랐다. 대게의 경우 우리의 역사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겠지만, 교수님은 정치를 올바르게 하려면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정치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돌리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의 일이다. 졸업 후 1년여 동안 진로 문제로 인생의 좌절감까지 느껴가면서 방황하던   교수님은 은사님의 엽서 한 장으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는다. 취직을 하지 않았거나 혹  하였더라도 전공과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면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는데, 이 은사님의 소개로 문화재관리국의 사찰 동산문화재 등록 업무를 담당하는 임시직원으로 1년여 동안 근무한다. 이 때가 교수님이 불교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 시기이다. 교수님은 업무가 업무인지라 사찰로 잦은 출장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수많은 성보문화재를 대하게 되었고, 그런 경험은 무종교인이었던 교수님이 성보문화재를 통해 불교에 대한 관심과 믿음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수님은 이후 전공을 사학에서 미술사학, 특히 불교조각사로 바꾸면서 홍익대 대학원미술사학과로 진학하여 상보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불교에 대한 믿음을 학문적 열의로 승화하면서 연구에 몰두한다.

이렇듯 자신을 불교로 이끈 성보문화재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교수님의 애정은 남다르다. 교수님은 성보문화재가 우리와 같이 호흡하며 우리 곁에 있기 위해서는 보존을 위한 가시적인 노력만 기울일 것이 아니라, 불자들 스스로가 신앙심의 차원에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전을 위한 노력과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에까지도 적용되는 것이다.

교수님의 이런 생각은 그가 불교와 새로운 인연을 맺으면서 겪은 체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 문화유산을 자주 대하다 보면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케 해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사랑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그래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틈틈이 문화유산을 찾아볼 것을 권유한다. 교수님의 취미가 명산 고찰의 순례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한데 교수님으로서는 학문과 종교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쫓을 수 있기 때문에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약수를 뜨러 다니면서 백률사 아래 굴불사지 사면석불에게 예불을 드린다는 교수님을 대하면서 명산 고찰의 순례가 신행생활의 한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전국의 명산 고찰들을 매년 순례해 왔다고 한다. 내년 여름까지는 이제껏 다녀보지 못한 명산 고찰을 모두 순례할 계획이다. 충남 홍성의 용봉사와 보령의 성주사지, 강원도 강릉의 신복사지와 양양의 진전사지, 고성의 전봉사가 그곳이다.

꼭 가볼 만한 문화유산을 소개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교수님은 경주 남산과 전남 화순의 운주사를 꼽으셨다. 두 곳 다 성보문화재가 밀집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경주 남산은 신라인이 예토의 현실을 정토로 만들고자 한 서원이 서려 있는 곳이고 운주사는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는 민중의 염원이 부부와불의 전설을 통해 전하는 곳이어서 기자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문화유산 속에서 우리 조상의 얼을 읽어낼 수 있어야만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계승․발전시킬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두 곳을 추천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 불상에 대하여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할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신 교수님을 뵙고 나오면서 기자는 자신의 맡은 바 일을 묵묵히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불자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삶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학문과 그분의 표현대로 올바른 삶의 길을 밝혀주는 종교를 합일시켜 가는 김길웅 교수님도 바로 그런분이시다.

 

 

 

 

 

 

가람의 향기

갑  사 /편집부


가을 산행의 기쁨은 아무래도 낙엽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 따라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디며 울긋불긋 물든 가을산의 정취를 가슴속에 한껏 담는 일일 것이다. 그  도중에 천년을 하루같이 묵묵히 자리잡고 앉아 우리를 맞이하는 산사가 있어 세파에 찌든 우리의 심신을 돌아보고 씻어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의 등줄기라고 할 수 있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이 서남쪽으로 치달리다가 금강을 만나 수려한 풍치를 이루어 놓은 계룡산은 그런 우리의 바람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다. 계룡팔경의 제6경으로 일컬어지는 갑사구곡의 단풍이 천년 고찰 갑사를 싸안고 오리숲에서 시작하여 금잔디고개에 이르기까지 마치 불타는 듯한 장관을 펼쳐 놓기 때문이다.

갑사(甲寺)는 계룡갑사(鷄龍甲寺), 갑사(岬寺), 갑사사(甲士寺), 계룡사(鷄龍寺)라고도 불리는데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아도(阿道) 스님이 창건하고 백제 위덕왕 3년(556)에 혜명(惠明) 스님이 보광명전과 대적광전을 짓고 증창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백제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법등을 이어오던 갑사는 250여년 후 해동화엄의 비조인 의상(義湘) 스님에 의해서 면모를 일신한다.

의상 스님은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 스님 아래에서 수학하여 인가를 받는다. 스님은 스승의 입적 후 뒤를 이어 강학을 지도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쌓는다. 그러나 스님은 당나라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 문무왕 11년(671)에 귀국한 이후 고국에 머물며 후학 양성과 교단의 질적 향상을 위해 힘쓴다. 스님이 칙명에 따라 태백산 아래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이어 가야산 해인사, 비금산 옥천사, 남악(지리산) 화엄사 등에 교(敎)를 전하여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로 삼음으로써 화엄십찰을 이룬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갑사도 그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의상 스님은 문무왕 19년(679)에 갑사를 증수한다.

우리 불교사에서 갑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세종의 억불정책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세종은 재위 6년(1424)에, 태종에 의해 7종으로 정리되었던 종단을 다시 선교(禪敎) 양종으로 통폐합하면서 전국에 36곳의 절만 남기고 사원에 주석하는 승려의 수와 토지의 규모까지 제한한다. 이때 갑사는 선종에 속하게 되었는데 원래 10결의 토지가 있었지만 50결을 더하여 70명의 승려가 주석하도록 정해졌다. 갑사의 본래 사격(寺格)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지만 이러한 모진 억불정책 속에서도 굳굳이 법등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갑사가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렇듯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때로는 선종의 사찰로 억불정책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오던 갑사는 임진․정유의 두 왜란을 거치면서 모든 당우가 불탐으로써 폐사가 된다. 그러나 선조 37년(1604)에 인호(印浩), 경순(敬淳), 성안(性安) 스님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효종 5년(1664)에 사정(思淨), 신휘(愼徽), 일행(一行), 정화(正華) 스님 등이 크게 증수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른다.

갑사는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장이었던 영규(靈圭)스님이 출가, 수도했던 곳이다. 스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승장이 되어 청주성을 탈환하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궐기한 것은 스님이 처음이었는데, 이후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내에는 영규스님을 비롯하여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 스님과 사명대사 유정(惟政) 스님의 영정을 모신 표충원이 있으며, 위당 정인보 선생이 찬한 의승장 영구대사기적비(義僧將靈圭大師紀積碑)가 세워져 스님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갑사는 1,600여 년 동안 법등을 이어온 고찰답게 수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부분이 정유재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강당, 대적전, 천불전, 용향각, 진해당, 적목전, 팔상전, 표충원, 삼성각 등이 있고 중요, 유물로는 철당간 및 지주, 부도, 동종, 선조 2년간 월인석보 판본, 사적비, 약사여래입상, 공우탑(功牛塔) 등이 있다.

대웅전은 단층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7년(1604)에 중건한 것이다. 원래의 위치는 대적전이 있는 곳으로 추측된다. 대적전은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평면이 거의 방형에 가까운 단아한 멋을 풍긴다. 강단은 맞배지붕의 다포집으로 전체적으로 가구(架構)에 기교를 부리지 않아 웅장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동종은 기본 형태와 양식에서, 신라와 고려의 종을 잇는 조선시대 초기 동종양식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동종은 없고 당좌 사이에 석장을 잡은 지장보살상이 있다. 철당 간 및 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기단부터 철당간까지 모두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현재 기단부의 대석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고 장대한 두 개의 장방형 기단만 노출되어 있다. 대적전 앞에 있는 부도는 원래 갑사 뒤쪽 산중에 있던 것을 191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구조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으로 각부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입상은 원래 사자암에 있던 것인데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약사여래입상 아래 계곡에 있는 공우탑은 정유재란 이후 인호스님 등이 갑사를 중건할 때 온갖 자재를 운반하고 지쳐 죽은 소의 공덕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선조 2년간 월인석보 판본은 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목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현재는 21권 46매만 남아 있다. 개판기에 의하면 원래 논산 쌍계사에 보관되던 것인데 언제 갑사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비유와 설화

세상만사는 ‘자업자득’이요 ‘자작자수’니라 /편집위원



나선비구문불경(那先比丘問佛經)에선는 “세간의 불은 지옥 속의 불만큼 뜨겁지 못하다. 조그만 돌을 세간의 불 속에 두면 저녁이 되어도 녹지 않지마는 큰 돌을 지옥의 불 속에 두면 곧 녹고 만다. 또 사람이 악을 짓고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면 수천만 년을 지나도 죽지 않는다. 또 큰 이무기와 용 등은 선광이라는 돌을 먹어도 곧 삭여버리지만 사람이 아이를 배어 배 안에 두어도 녹지 않나니, 그것은 다 선악의 업의 힘이 그것을 녹게 하거나 녹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은 선악은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마치 몸의 그림자가 몸을 따라다니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죽어도 그 몸만 죽고 그 행은 없어지지 않는다. 비유하면 밤에 불을 켜고 글을 쓸 적에 불은 꺼져도 글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다시 불을 켜고 그대로 이어서 쓰는 것처럼 금생에 지은 행은 금생 또는 후생에 이루어지고 전생에 지은 행은 그 생에서 혹은 금생 또는 후생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업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 언젠가 자기 자신이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경전에 전해지고 있다.


왕녀 선광의 업

옛날 바사닉왕에게 선광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단정하여 부모들이 사랑했고 온 궁중에서도 모두 존경했다. 부왕은 딸에게 말했다.

“너는 아버지인 왕의 힘 때문에 온 궁중이 모두 사랑하고 존경 한다.”

딸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저의 힘 때문이지 이버지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부왕이 이렇게 말했으나 딸의 대답은 똑 같았다. 부왕은 성을 내면서 말했다.

“과연 너에게 업의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해 보리라.”

그는 좌우에 명령했다.

“이 성안에서 가장 빈궁한 거지 한 사람을 데리고 오너라.” 신하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가장 빈궁한 거지 한 사람을 찾아 왕에게 데리고 왔다. 왕은 곧 그의 딸 선광을 거지에게 아내로 주면서 딸에게 말했다.

“만일 너에게 업의 힘만이 있고 나의 힘은 없다면 지금부터고 일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딸은 여전히 말했다.

“제 업의 힘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거지를 남편으로 삼아 집을 떠났다. 그는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부모님이 계십니까?” 거지는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는 전에 사위성 안에서 첫째가는 장자(長者:부자)였는데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거지가 된 것이요.”

“당신은 지금 옛날의 그 집터를 알 수 있습니까?”

“그 터는 알지마는 지금은 집도 담도 다 허물어지고 빈 땅만 남아 있습니다.”

선광이 남편을 데리고 옛 집터로 가서 걸어 다니자 가는 곳마다 땅이 저절로 꺼지고 땅속에 묻혔던 보물 광이 저절로 나타났다. 그녀와 그 남편은 그 보물로 사람을 부리어 집을 지었는데 한 달도 못되어 궁궐 같은 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기녀와 종과 하인들을 두었다. 왕은 어느 날 갑자기 딸 생각이 났다.

“내 딸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궁실과 재물이 왕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왕은 말했다.

“부처님 말씀이 진실이구나. ‘본인이 선악을 지어 본인이 그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딸은 그 날로 남편을 보내어 왕을 청했다. 왕은 청을 받고 딸집에 가보았다. 털자리와 담요와 집의 장엄이 왕궁 더욱더 훌륭했다. 왕은 그것을 보고 몹시 찬탄하며 그 딸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말했다.

“자신이 업을 짓고 자신이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왕은 부처님께 가서 아뢰었다.

“이 딸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왕가에 태어나 몸에 광명이 있습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과거 91겁이나 오래전 세월에 비비시라는 부처님이 계셨고 그 때에 반두라는 왕이 있었으며 그 왕에게는 첫째 부인이 있었소. 비바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반두왕은 그 부처님의 사리로 일곱 가지 보배 탑을 세웠고 왕의 첫째 부인은 하늘관(天冠)을 비바시 부처님의 머리에 씌우고 하늘관 안의 여의주(如意珠)를 내어 문설주 위에 달았는데 그 광명은 세상을 환히 비추었소. 그는 이내 발원하기를 ‘장래 저의 몸에는 자마금빛의 광명이 있게 하시고 영화롭고 부귀하여 세 가지 나쁜 길과 여덟 가지 어려운 일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 지이다.’라고 하였소.

왕이시여, 그때 왕의 첫째 부인이 바로 지금의 저 선광입니다. 그가 또 가섭 부처님 때에 가섭 부처님과 네 큰 성문(磬聞)에게 맛난 음식으로 공양하려 할 때에 남편이 그것을 만류하자 그녀는 남편에게 청하기를 ‘만류하지 마세요. 저분들을 청하여 공양하게 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하였소. 그래서 남편도 허락하여 공양을 마치게 되었었소.

왕이시여, 그때의 그 남편이 바로 오늘의 저 남편이요. 그 아내는 오늘의 저 선광입니다, 남편은 그 아내의 공양을 허락했기 때문에 아내의 덕으로 지금은 크게 부귀하게 되었지만 뒤에 아내가 죽고 나면 도로 빈궁하게 될 것이요, 이와 같이 선악의 업은 따라다니면서 어긋나는 일이 없소.”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행업을 깊이 통달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고 깊이 믿고 깨달아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雜宝藏経)


선악의 과보는 자작자수

옛날 바사닉왕이 자고 있다가 두 내관이 서로 다투는 것을 들었다. 즉 한 사람이 “나는 왕을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은

“나는 의지하는 데가 없다. 내 업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대답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왕을 의지해 살아간다는 자에게 정이 더 쏠렸으므로 그에게 상을 주려고 곧 당직을 왕비에게 보내며 말했다.

“나는 지금 한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에게 재물과 의복과 영락을 두둑이 주시오.”하고는 그 남자를 불러 자신이 먹다 남은 술을 주면서 왕비에게 가져가게 했다. 이때 그 남자는 술을 가지고 문을 나서는데 코에서 갑자기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으므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제 업으로 살아간다는 이를 불러 곧 그 술을 주면서 대신 왕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왕비는 술을 가지고 온 사람이 왕이 말한 그 사람인 줄 알고 재물과 의복과 영락을 두둑히 주었다.

왕은 자기가 보낸 사람이 아님을 알고는 왕을 의지해 살아간다는 내관을 불러 물었다.

“나는 너에게 가라 했는데 왜가지 않았느냐?”

그는 대답했다.

“제가 막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코에서 피가 흘러내려서 그에게 대신 대왕의 술을 가져다 드리게 하였습니다.”

이때 왕은 탄복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이제야 부처님께서 ‘자신이 그 업을 짓고 자신이 그 과보를 받는다.’고 하신 말씀이진 실임을 알았다.”

이로써 본다면 선악의 과보는 그 행업으로 초래된 것이요, 그것은 하늘이나 왕이나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만사는 서로 상의 상관의 관계에 있지만, 그 상의 상관(相依相關)의 중심은 각기 다 본인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 본인의 행업(行業)에 의한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모난 행업이 아닌 원만하고 슬기로운 행업은 복이 되고 덕이 되는 복덕(福德)의 길이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동국과 불교4 : 명진학교시대3

명진학교의 동태 /편집위원



1906년 5월 8일 명진학교의 개교는 단지 불교계의 장거요 관심사만이 아니었다. 그 때의 일반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모아 이 사실은 大韓每日申報 등에 계속 보도되고, 특히 명진학교에 기금을 희사하여 그 발전을 도운 기사가 크게 취급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의 언론계가 을사조약 이후 민족의식에 불타 육영사업을 의식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사실로써 주목된다. 그 한 예로서 대한매일신보 262호(광무 10년 7월 5일)에 게재된 명진학교에 관한 기사를 소개하면,

“함경남도 釋王寺 金石翁 氏가 본 학교에 上校하여 學徒를 向하여 儒仏兩道에 忠孝를 明進코자 하는 誠意를 讚揚하고 熱心授業하여 「開明上」에 進步케 하라고 一場演說勸勉後에 韓貨二十元을 出藏補助하므로 同氏에 誠心을 慈收廣告함.”

이라고 하고 있다.

한편 명진학교는 각도 사찰대표자회의에서 선출된 홍월초가 초대 이사장에, 그리고 이보담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학생들은 대부분 30~40대의 老학생들로서 불교 강원에서 이미 大敎科 즉 10년 이상의 대학과정을 이수하여 불교교육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들은 원흥사에 기숙하면서 급식은 물론 학용품과 교과서 등 일체를 불교연구회로부터 지급받고 주로 신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명진학교의 교훈과 학칙은 홍월초 이사장 등의 노력으로 제정되었다. 그 교훈은 「慈悲․ 修善」으로 하고, 학제의 기본정신은 「승려에게 宗乘․余乘 신학문을 교수하여 其의 智德을 高케 하고 겸하여 布敎道의 인재를 양성함을 목적으로」하였다. 그리고 수학 연한은 2년간의 정규과정과 보조과의 단기과정으로 구분되고 정원은 각 학년 35명으로 하였다.

교과과정은 승려에게 주로 신학문을 교수하여 포교인재를 양성하려 하였기 때문에 불교관계의 과목(宗乘․余乘)보다 일반학과(俗學)의 과목에 더 비중을 두었다. 즉 주당 시간 중에서 20여 시간을 일반학과목에 배당하여, 주로 포교법․외국역사․외국어․측량학․농업초보․산술․理科․圖書․手工․체조 등을 이수토록 했던 것이다.

한편 명진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인사들을 보면, 홍월초․이보담․李命七(이상 전임)․尹致昊․徐光範․魚允中․井上玄眞(日人)․金優曇(이상 강사) 등이 있었다. 이들에게 교육을 받았던 당시 명진학교 학생들의 수준에 대해서는 李鍾郁 氏의 회상기(동대신문 325호)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의 한문실력은 대단하여 외국․역사 등은 곧 이해가 되었고, 외국어․외국지리․이과․ 산술 등의 과목에 흥미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학구열 또한 대단하여 오전 1, 2시까지 또는 밤을 새워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또 그들은 가끔 사회 명사들을 초청하여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또는 그들만으로서 웅변대회 등을 열어 사회에 크게 이바지한 바도 있었다.”

이 같은 명진학교의 동태에 관해선 기타 많은 문헌으로써 파악된다. 그 가운데 金映遂 박사의 회고담(東大 60年史) 일부의 내용을 통해 당시 모습을 살펴본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에 한국 각지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나 신문화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무렬, 서울에서 명진학교가 개교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그때 경상도 法華寺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에 입학고자 하였으나 입학자격이 너무 엄격히 규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즉 명진학교에는 전국의 中法山 사찰에서 수학하여 대교과를 마친 자로 중법산의 추천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중법산이 아닌 末寺 출신이기 때문에 부득이 입학하지 못하였다. …명진학교는 불교근대화를 위하여 세워진 학교로 대교과를 마친 사람으로서 입학을 허용하여 불교 교리보다 속세적인 신학문에 주력을 두어 강의를 하였던 만큼, 종래의 교육면에서 보면 불교 최고기관을 현대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적 교육제도에서 보면 이는 전문학교 정도였다. 또 교육내용에서 보면 초등학교 정도의 교과내용을 가진 학교였다.”


명진학교 학생 중에 정규과정을 졸업하고 후에 이름을 떨친 인재 중에는 權相老 박사(초대 동대총장), 安雲湖 등과 같은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오히려 단기과정인 보조과가 더 인기가 있어 일어 등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수개월간 재학하였던 학생 가운데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는 후일 한국근대사상 그 빛을 남긴 韓龍雲 같은 이도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서, 명진학교가 근대 한국사회 건설에 중요한 계몽적 역할을 담당하고 또 많은 인재를 배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진학교는 그 발전에 있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장애와 우여곡절 또한 없지 않았던 것으로, 개교한 지 1개월 만에 원흥사의 일부 보수적인 승려들이 보였던 반발도 그 중에 하나이다. 즉 보수파 승려들은 명진학교 학생들의 신학문 연구 태도에 불만을 품고 일어나 간섭하더니, 마침내는 원흥사 관리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월초, 이보담 등은 불교연구회를 통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이를 內部에 청원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1906년 6월14일 정책은 勅命으로 경무자 박승조를 원흥사에 파견, 원흥사 攝理 金趣海 및 기타 분쟁에 관여한 승려들을 전부 해산시키고, 사원건물 전부를 명진학교에 위탁하여 학교교육에 사용토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 일로 인해 결과적으로 명진학교의 교세가 일약 신장하는 계기를 맞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역사창조의 과정에서 겪어야했던 불교계 내의 의견대립인 동시에 극복하고 넘어야 할 하나의 난관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겪으며 개교 첫해를 보낸 명진학교는 1907년 제2대 교장으로 李晦光이 취임하였다. 이 무렵 점차 노골화하는 일제의 침략과 함께 한말의 정세는 극히 불안하였고, 이 같은 상황은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명진학교는 개교 5년 만에 불교사범학교로 개편, 새로운 발전을 기하게 되거니와, 이 또한 당시 시대 동향의 한 추이로서 나타난 결과였다.

 

 

 

 

 

 

정각리포트

‘가야산의 佛心’ /편집부



유행경(遊行経)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슬피 울며 기운을 잃고 몸을 땅에 던져 울부짖으며… 큰 나무가 뿌리째 뽑히자 가지들이 꺾인 것 같고, 끊어진 뱀이 뒹굴고 헤매면서 어쩔 줄 모르고…” 이렇게 비구들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 11월 4일 오전 7시 30분쯤 세수 82세 법랍 59세로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원적 하신 조계종종정 퇴옹당 성철 대종사의 입적은 부처님의 열반을 맞이했던 당시 비구들과 오늘날의 우리 불자들이 느끼는 것이 하등 다를 바가 없으리라.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和浮雲滅”이라지만 큰스님께서 남기신 족적은 너무도 크기에 그 뒷자리를 메울 일이 꿈만 같아 큰스님의 원적을 맞이하는 슬픔은 더욱 “온 천하가 피바다”가 됩니다.

1912년 경남 산청에서 부유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유학을 통달하고 어느 날 『증도가』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10원짜리’ 세속의 삶을 버리고 24세에 해인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하니 이로써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55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팔공산 파계사 성전 암으로 들어가 겹겹이 철망을 두르고 10년간 장자불와(長坐不臥)의 피나는 수행을 했다.

81년 1월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었으나 종정취임법회에는 모습을 들어 내지 않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우뢰와 같은 “가야산의 소리”만을 보내와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법난으로 어지러워진 종단과 세간을 산은 산의 자리로 물은 물의 자리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큰스님께서 남기신 업적을 표현한다는 것은 마치 ‘九牛一毛’와 같지만 수행자의 한 신화를 몸소 보여주신 부촉을 받들어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가장 크신 업적은 치열한 정진의 모습을 장좌불와 묵언수행을 통해 자기를 이기는 내면의 수행을 형상화해 보여 주신 점이다.

또한 山中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고고한 기품을 보여 주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가장 세간을 걱정하고 자비를 널리 베푸신 어른이셨다. 3천 배의 신화는 권위적 의도가 전혀 없고 참회라는 방편을 통해 민간내면에 있는 “태양처럼 빛나는 지혜인 부처”를 스스로 찾게 함으로써 육신과의 만남이라는 형식보다는 진정한 자아와의 만남이라는 내용의 중요성을 지적해주신 점이다.

또한 고려시대 이래 돈오점수적 수행 풍토, 즉 ‘편의주의적’이고 미지근하며 모호한 수행방법을 타파하여 돈오돈수적 수행을 제시했으며 《선문정로》, 조계종 종조설을 바로 잡았고 《한국불교의 법맥》 25년에 걸쳐 돈오돈수적 수행을 가르쳤다《백일법문》. 또한 일반대중들을 위해 올바른 수행방법과 참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자기를 바로 봅시다》. 그 밖에 《선림고경총서》를 번역하여 不立文字의 의미를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바탕 위에서 초이론의 세계를 밝혀주었다.

어찌 큰스님의 업적을 모두 글로써 표현할 수 있으랴. 큰스님께서 원적 하신 이래 전불자들이, 온 국민이 보여주었던 추모의 정은 그 모든 것을 잘 표현해 주었다.

어느 한 분의 죽음이 이처럼 진한 감동과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비구들이여, 방일(放逸)하지 말라… 일체는 무상하다. 이것이 여래의 최후의 말씀이다.”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일체는 무상하다’는 진리를 깨달아 치열한 수행으로 일관한 큰스님께서 제자를 지도한 5단계 수행지침은 출가․재가불자를 막론하고 꼭 귀담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잠을 많이 자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간식을 먹지 말라. ○책을 보지 말라.(참선 수행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 이 다섯 가지 수행법이야말로 오늘의 불자들에게 금석과 같은 말씀이다.

다음은 종단장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60년 통합종단이 출범된 이래 7일장은 이번이 처음이며 현직 종정스님께서 원적하신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것은 이러한 외적인 상황에서보다도 큰스님께서 보여 주신 수행력과 법력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남녀노소, 세간, 출세간, 종교적 간격을 뛰어넘어 이렇게 많은 추모객이 다녀간 경우도 없을 것이다. 10일까지 15만명 이상의 추모객이 다녀갔고 11일 영결식날 20만명이 다녀갔다고 하니 놀랄 만한 숫자이다. 또한 매스컴에서 연일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평생을 누더기 한 벌로 검소하게 살며 마지막 남기신 유품을 보면 평생 입은 누더기 한벌, 30년 동안 사용하신 석장, 20여년 쓰신 대나무 삿갓, 검정고무신, 덧버선 한 켤레, 양말 등이라고 한다. 물질 만능, 과소비 시대에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장례법은 어떻게 하리까?” 하고 아난존자가 여쭈니 “비구들은 잠자코 너희들의 할 일이나 생각하라. 모든 신도들이 스스로 처리하리라.”하셨다. 부처님께선 ‘法身사리’와 ‘色身사리’를 남기셨다. 법신사리(仏法)는 출가비구에게 색신사리는 재가 신도에게 유촉하여 잘 보전하게 하셨다. 어쨌든 큰스님께서 남기신 색신사리의 숫자에 있어서도 가히 부처님 이래 한국불교 사상 최고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출가자는 큰스님의 法을 잘 받들어 수행에 전념하고 재가불자는 사리를 잘 지키고 보전하면서 열심히 신행해야겠다.

지금 전국적으로 불교의 수행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살려 한국불교가 중흥하고 참된 수행풍토의 맥을 이어가기를 큰스님 전에 발원하며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나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서방정토 아미타불!

 

 

 

 

 

불교건강법

성인병 /김 갑 성(한의과대학 부교수, 보건소 소장)



성인병이란 어떤 특정질환만을 지칭하거나 또는 성인이 되어 걸리는 모든 질환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어, 노화와 더불어 40대 중반인 갱년기를 전후하여 발병하는 만성 퇴행성 질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질환을 몇 가지 열거해 보면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중풍, 암, 여성의 갱년기 질환 등이 이에 해당된다.

과거에는 고량진미의 많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던 부자들에게 많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문화병 또는 식원병이라고도 하였으나 근래에는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식생활의 패턴이 바뀌고 운동량이 부족해지면서 누구나 쉽게 걸리는 병이 되어버렸다. 특히 최근에는 어린이까지 영양 과잉으로 인한 비만증이 증가하면서 소아 성인병이란 말이 생길 정도이니 이제는 명칭 자체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성인병은 몇 가지의 공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첫째, 병의 발생 시기나 발병 원인, 진전되는 양상이 불분명하거나 다원적이어서 판단에 어려움이 따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미 증상이 나타날 정도가 되면 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복합적인 합병증을 수반하게 되며 대부분 만성적이고도 고질적인 질환으로 이행되며, 경우에 따라서 수시로 급격한 합병증을 나타내게 되고 원인질환이 해소되지 않는 한 합병증의 치료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처음에는 병에 대한 국소적 또는 전신증상이 분명치 않다가 나이가 많아질수록 빠르게 진행되며 40세 이후에 사망률이 급속히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성인의 경우 사망원인을 보면 고협압이나 고지혈증 그리고 이로 인한 중풍과 심장병 등과 같은 순환기질환이 전제의 30%로 수위를 차지하고 있고 각종 암이 18.2%를 차지하고 있어 성인병에 대한 예방과 대책이 절실한 시기에 와있다고 보아야 한다. 서두에도 언급을 하였지만 성인병의 원인은 잘못된 식생활과 운동부족 및 스트레스 등의 정신 긴장이 주요원인이므로, 일정한 운동을 포함한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과식과 과음 그리고 스트레스를 피하고 쌓인 스트레스는 즉시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효약이나 건강식품 등을 복용하여 조기에 치료되기를 바라지만 이미 진행되어버린 성인병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묘약은 없다고 보아야하며,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끝없는 자신의 건강관리를 통한 예방만이 가장 쉬운 방법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병의 시작은 이미 끝없는 전쟁의 선포와도 같은 것이다, 다음 호에는 성인병의 대표적 질환 몇 가지에 대한 원인, 증상, 치료 대책과 예방 대책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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