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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1월호 / 통권 3호 / 불기 2537(1993)년 11월 1일 발행

 

 

 

 

초청강연

선불교와 자기발견/야나기다 세이잔

 

정각도량

마음으로 만든 비석/ 최법혜 스님

 

정각논단

한국의 사찰 조경/ 홍광표

 

전등 이야기

道란 소가락에 있는가?/ 편집부

 

교리강좌

찬불게 /편집위원

 

불자탐방

타고난 불자, 오국근 교수와의 대화/ 편집부

 

가람의 향기

운문사 / 편집부

 

불심의 창

약한 자의 날개와 문신/ 김명석

 

경전의 세계

미륵 경전/ 편집위원

 

비유와 설화

많이 듣는 자가 지혜자 된다 / 편집위원

 

불교 건강법

가을철 건강과 섭생/ 김갑성

 

일주문

제사문화의 장점과 제사종교의 허실/ 조용길

 

동국과 불교

명진학교의 개교/ 편집위원

 

정각리포트

 

 

 

 

초청강연

선불교와 자기발견 /야나기다 세이잔


정각원에서는 선불교 분야에서 저명한 일본의 야나기다 세이잔 교수를 초청하여 지난 10월 11일 법회에서 그의 강연을 들었다. 선불교의 문헌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쳐온 야나기다 교수는 선불교가 곧 ‘나’(자기)의 발견이라는 자신의 체험적 결론을 전달하였다.

강연의 뒷부분은 약간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우선 앞부분을 이번 호에 소개한다.



금년에 내 나이가 일흔 하나, 영고성쇠가 있었습니다만 한 생애를 선불교(禅仏教)연구에 다 쏟은 셈입니다. 나의 연구 방법은 텍스트(禅文献)를 읽는 것으로, 무슨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특히 텍스트의 저작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의 관심사입니다. 나로서는 그러한 연구가 사실 전부였습니다. 선불교의 연구는 요컨대 오로지 그렇게 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자료보다도 역사적으로 오래된 자료를, 가능한 한 제일 오래된 선문헌을 보고 싶었으며, 잡히지 않는 꿈을 쫓아서 어쨌든 50년이 넘도록 이렇게 이것저것 연구해 왔습니다.

벌써 25년 전의 옛날입니다만, 『初期禅宗史書의 研究』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 일단의 연구 성과임과 동시에 나의 연구 작업의 발신지(発信地)가 되었습니다. 내가 선문헌을 읽어 보고 가치 있는 초기 선불교의 텍스트라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돈황 사본과 한국에 전래된 판본이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돈황은 금세기 초, 중국 감숙성(甘粛省)의 서북쪽에서 발견된 장소인데, 5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사본의 일대 보고로서, 거기에 포함된 초기의 선문헌은 대개 선불교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전문가라면 반드시 관심을 갖게 될 자료들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전래하고 있는 선문헌의 자료 가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알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러한 점이 퍽 유감스럽습니다만, 어쨌든 이것저것 연구해왔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수많은 선각자와 친우들의 덕분으로 돈황의 사본과 한국에 전래한 판본을 병행하여 읽는 연구 작업을 50년이나 계속할 수 있었고, 가치 있는 귀중한 선불교의 자료는 전부 읽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의 모든 자료를 사진이나 영인본을 통해서 읽어본 것이지, 진짜 원본을 읽어 본 것은 지극히 한정된 것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2년 전(1991년 6월 12일) 일본 조계종 관장(泰然 스님)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승가대학에 새로 완성된 강의실 준공기념 축하의식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50여년이나 그리워해 온 세계적인 인류의 보배, 팔만대장경 경판의  선반에서 특히 『조당집(祖堂集)』 제1권 제1장(丈)부분의 경판을 친견한 그 순간, 이미 나의 눈앞에는 이 경판이 처음 조각된 후 700년, 이 책이 처음 쓰여진 때로부터 천 수십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완전히 없어져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직접 원작자와 상면하고, 경판을 조각한 광준(匡俊) 스님의 숨결과 끌을 때려가며 글자를 새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중국을 방문했습니다만, 아직 돈황 막고굴(莫高窟)에는 참례하지 못했습니다.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에 소장되어 있는 돈황 사본도 보질 못했습니다. 중국의 북경 도서관을 방문할 기회도 있었습니다만, 돈황 사본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돈황 사본의 원본이라면 일본의 경도 용곡(竜谷)대학이나 대곡(大谷)대학에 있는 몇 십 점의 돈황사본을 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일본의 대학에 소장된 돈황 사본이 20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복사품이 아닐까라고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2년 전 처음으로 『조당집』의 경판을 친견하기까지 나는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돈황의 선문헌도 아직 한 점의 원본을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래도 과연 초기 선종 사상의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내심으로는 크게 부끄러움이 있었으며, 오히려 그러한 반성이 내가 오늘까지 이렇게 선학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탱해 왔던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으로 근대 백년 이상에 걸쳐서 강제로 희생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정치가는 아니라서 실다운 사죄는 드릴 수 없습니다만, 불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부끄럽고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잘못에 대한 반성으로 단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이러한 한 사람의 불교 연구자를 2년 전 흔쾌히 한국에서는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 또다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관계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현대 중국 불교에 대해서도 나의 반성은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국제 교류라는 명분 아래 관광 여행이 성행되고 있습니다만, 초기 선종 문헌을 대상으로 하여 연구하고 있는 나로서는 관광 여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후에 나에게 부여된 남아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2년 전과 이번에 해인사와의 인연을 소중히 하여 나 자신의 연구 작업을 보다 확실한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내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파리나 런던으로도 가능하다면 가보고 싶습니다만, 그때까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초기 선불교의 텍스트는 단순한 정보 수단에 그치지 않고, 커다란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본이나 판본도 작자와 글을 새긴 사람의 분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는 영원한 것이며, 읽는 사람을 만나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정보로서도 사실 똑같습니다. 확실한 수신기가 필요합니다. 정보를 받는 사람이 없으면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받는 사람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또한 발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선불교의 텍스트는 영원히 읽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올바르게 읽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으로서는 물론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텍스트는 단지 한 번뿐만 아니라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텍스트는 살아 있는 것이며, 단순한 사본이나 판본으로서의 자료 가치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대화의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돈황의 사본과 한국에 전래한 초기선불교의 텍스트를 서로 대조하여 읽는 연구 작업에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 왔습니다. 돈황본 텍스트만으로는 안 되며, 한국에 전래한 판본만 가지고 연구해서도 안 됩니다. 이 두 종류의 자료를 서로 대조하고 조합하는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되살아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돈황자료의 원본 그 자체를 한 점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나는 사진과 영인본을 의지하여 초기 선종의 생생히 살아 있는 소리를 어느 정도까지는 듣고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내 자신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전래한 판본의 선문헌 덕분입니다.

벌써 40년이 지난 옛날에 내가 최초로 읽게 된 선문헌이 『조당집』과 『선문촬요(禅門撮要)』라고 하는 고려시대의 판본입니다. 당시는 두 종류의 판본만이 있었을 뿐, 그 자료를 읽기 위한 주변의 관련 문헌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엔(내용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내가 성장한 임제(臨済)학원 전문학교는, 앞에서 말씀드린 일본 제국의 식민지라고 하는 대단히 부끄러운 상황 아래 있었지만, 한국의 유학승을 상당히 많이 받아 들여 서로 서로의 정보 교환이 성행되었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당시 일본의 불교관계 고등교육 기관으로서는 한국불교와의 교류에 공헌도가 높은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조당집』이나 『선문촬요』『선문염송집』이라는 텍스트를 보고 나는 곧바로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내용은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만, 독자적인 판본의 풍격(風格)이 강렬했기에 그 책들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나의 온몸에는 이상한 흥분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기회를 나에게 마련해준 많은 선각자와 친우들에게 나는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는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은 한국불교와 나와의 특히 불교의 인연(仏縁)이 지중 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년 전, 해인사를 참례했을 때 사찰의 관계자여라 분들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선문헌의 텍스트를 읽기 위해 공동연구반을 결성함과 동시에 거의 모두를 혼자의 힘으로 등사 원지를 긁고, 등사판에다 자신이 인쇄하고 제본까지 하였습니다. 눈과 귀와 입으로 읽는 것뿐만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읽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원본의 리듬이 나의 온몸에 퍼지면 새로운 텍스트가 만들어집니다. 돈황본 자료의 사진에 의한 공동연구를 진행할 경우에도 나는 똑같은 체험을 거듭하여 반복했습니다.

내가 베끼고(筆写) 있는 텍스트는 돈황본의 사진이지만, 내 온몸으로 느끼면서 새롭게 원지에 긁어서 새긴 등사판은 아마도 돈황 사본의 원작자가 돈황의 어두컴컴한 동굴 가운데 한 자 한 자 써내려 갈 때의 온몸의 동작(움직임)을 비록 천년이 넘는 시간적인 거리가 있지만, 똑같은 리듬으로 나에게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아직 내가 친견하지 못한 둔황 원본의 리듬 그대로 새로운 복사본을 만든 것입니다.

나의 이러한 등사판 선문헌은 고려대장경의개판자(開版者)가 중국의 사본을 나무에 조각하여 새긴 것에 비교한다면 물질적인 규모로는 전혀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빈약하고 조잡한 작업이지만, 똑같은 선불교의 텍스트를 만드는 리듬은 일관되게 작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풋내기로 순진무구하면서도 천상 천하에 오직 한 권뿐인, 오염되지 않은 처녀자료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선문헌의 텍스트를 원지에 긁고 베끼어 등사판의 복사본을 만드는 작업을 통하여 나는 초기 선불교의 세계로 뛰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본과 판본의 거리도 단번에 줄어들어 오히려 완전히 일체화되어 버렸습니다. 철필로 원지에 글자를 긁는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가운데, 손가락 끝이 먼저 글자의 모양을 알고 있어, 앞에서 쓴 문자의 리듬이 손가락 끝에서 되살아나곤 했습니다. 손가락 끝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나 귀, 입과 같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눈이나 귀, 입 이상으로 확실하게 깊은 곳에 있는, 아마도 옛날 활자나 경판을 조각한 사람, 혹은 비문이나 석경(石経)의 문자를 새긴 사람의 온몸에 축적된 경판을 똑같은 기억 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를 치는 사람이 먼저 손가락 끝으로 글을 읽는 것처럼, 나는 우연하게도 이러한 사실을 감지하였던 것입니다.

앞에서 선불교의 텍스트가 단순히 정보의 수단뿐만이 아닌 살아 있는 움직임을 포함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사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불교의 텍스트는 그러한 체험(실험)을 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선문헌이 지니고 있는 국제성은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등사판으로 복사한 빈약하고 조잡스러운 선문헌의 텍스트는 중국의 胡適 박사와 프랑스의 뽈 드미에빌(Paul Demieville) 박사 등 동양학의 최고봉에 있는 석학들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鈴木大拙, 塚本善隆, 宮本正尊, 関口真大, 長尾雅人, 入失義高 박사 등, 이 분야의 대선배들이 “자네가 만든 텍스트가 갖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격려를 주었습니다. 특히 入失義高 선성님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40년이나 계속 선문헌을 읽을 때마다 실로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여러 가지의 주의와 지도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의 보잘 것 없는 연구실은 갑자기 선문헌의 프로덕션(제작소), 分司大蔵都監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먼저 미국에서는 일본으로 건너와서 선의 지도자를 미국에 초청하는 한편, 선문헌의 영역(英訳)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협력자를 찾기도 했습니다. 日光第一禅堂의 창시자인 사사키 루쓰(Ruth F. sasaki) 부인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손으로 만든 선의 텍스트를 통하여 나는 내 자신의 의식주 등의 경제적인 도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국제적인 선학 연구의 방법도 터득하게 되어 수많은 지지자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임제학원 전문학교에 있을 때, 久松真一 선생의 처소에서 만나 알게 된 한국의 서옹(西翁)대선사가 동국대학교의 김지견씨와 함께 경도에 오신 것도 약간 뒤의 일이었습니다.

동국대학교에서 조명기 선생님의 고희를 축하하여 해인사에 소장된 판본 『조당집』의 영인본을 출간한 것이 1965년의 일입니다만, 그 중의 한 권을 고맙게도 우정상 선생님이 나에게 우송해 주셨습니다.

또 中日전쟁이 한창이고 세계적인 격동의 세월을 간신히 벗어나, 문자 그대로 구사일생을 얻은 대만의 이내양씨가 경도에서 새로 중문(中文)출판사를 개업하여 처음으로 근대적인 양 장 제본의 영인본 『조당집』을 출판하면서부터 내가 만든 등사판 선문헌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내양 씨의 제의로 내가 새롭게 계획한 『선학총서』 9권은 『조당집』 『선문촬요』『法集別行錄節要并入私記』 등 고려판의 선문헌도 포함하고 있으며, 아마 세계최초의 본격적인 영인본 ‘선문헌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의 대학은 국제적인 학생 운동의 파도를 전면적으로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196()년 후반의 일입니다. 이때만큼 자신이 대학 교수인 사실, 연구자인 사실의 의미를 뿌리 깊이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대학과 대학예 종사하는 사람 모두가 자기 해체와 개혁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고갈된 아카데미즘은 지금 세계가 살고 있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감히 젊은 학생들의 활력에서 배워 돈황과 한국의 선문헌의 현대역(現代訳)이라는 새로운 일을 착수하였습니다. 작가이며 평론가인 富士正晴이란 사람이 내가 쓴 『임제록』의 역주에 대하여 “대학 분쟁의 냄새가 물씬 물씬 난다.”라고 비평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 었습니다.

돈황이나 한국(고려)에서 순수하고 싱싱한 선문헌을 만들어 낸 것은 실로 전쟁의 혼란과 아픔을 체험한 사실입니다. 『임제록』의 설법도 唐末五代 격동의 전쟁이 한창일 때 진행된 것입니다. 선불교의 텍스트는 그러한 전쟁과 어려운 격동의 세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禅이란 무엇인가? 마음(心)인 것입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自己인 것입니다. 선이란 것은 이렇게 나 자신임과 동시에 근원적인 자기라고 하는 확실한 텍스트가 있었던 사실입니다. 정말 자타가 없고, 범부와 성인이 일체인 자기 발견이 선불교의 전부인 것입니다.

초기 선종의 텍스트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전래되고 있는 그 진리의 힘이 새롭게 오늘날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답을 해줄 것입니다.

돈황 사본과 『선문촬요』에 수록되어 있는 보리달마 이입사행론(菩提達摩 二入四行論)에 대승벽관(大乗壁観)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천사상의 의미를 이제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보원행(粮怨行,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실천), 수연행(随縁行, 일체를 인연의 법칙으로 깨닫고 도에 순응하는 수행), 무소구행(旌所求行, 진리를 깨닫고 구하는 마음이 없도록 하는 수행), 칭법행(称法行, 성품의 청정한 이치에 따라서 자리 이 타의 실천을 행함)이 라는 오래되어 케케묵은 사각(四角)의 한자가 갑자기 이상한 빛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배일 평범한 자신의 생활방식(생활 그 자체)이 실로 대승 벽관인 것이며 돈오(頓梧)의 실천인 것입니다. 아무리 여유 있게 천천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도 돈오는 유일한 것이기에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둘도 없이 소중한 유일한 진리(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정각도량

마음으로 만든 비석 /崔 法 慧(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옛날 평안감사의 아래에서 이방 벼슬을 살던 사람이 있었다. 하라는 정치에는 뜻이 없고 재물과 여색을 탐하던 감사는 날마다 부정과 향락에 빠져들었다. 드디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어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일자리를 잃게 되어 생계가 곤란해진 이방은 전 감사가 너무나 원망스러워 복수를 하러 찾아갔다. “대감마님 평양에 갔더니 백성들이 대감마님의 송덕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하니 “그래 그 비문의 내용이 어떠하던가.”하고 물었다. 이방은 “전 감사 아무개 백성 사랑 바른 정치 영원 기억.”이라고 답하자 전 감사는 “그럼 그렇지. 여보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 백성들이 이제야 나의 덕을 알아주는군.”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자 이방은 “그런데 대감마님 그 비문에는 이렇게 토씨가 달렸습니다.”하니 의아한 모습으로 전 감사는 “그래 무슨 토씨가 달렸던가.”하고 물었다. 이방은 슬픈 얼굴을 지으며 “전 감사 아무개가 백성 사랑하고 바른 정치하였더라면 영원히 기억될 것인데.”라고 하였더니 전 감사는 놀란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여보게, 그 토씨만을 좀 지워 줄 수 없겠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위치에 있어서나 그것이 공인이든 개인이든 간에 항상 그 인품을 논하게 된다. 그 인품이란 일시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일생을 통한 업적이나 행적으로 평가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직사회에서나 직장사회에서 청백리(清白吏)를 높이 표창하는 것은 반드시 가난만을 표창하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 재물에 부정이 없고 안으로 가정에 충실한 사람 그런 사람을 청백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대개 인품을 손상시키는 대표적인 허물은 재물과 여색의 둘을 말한다. 얼마나 그 허물이 컸으면 수행자들에게까지도 ‘그 독은 독사보다 더하다’고 하였을까. 그러나 그 독이란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바르게 살아갈 경우 그것은 독이 아니라 우유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의 인품이란 수행의 단계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구도자 보살은 우리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들의 고달픈 삶 속에서 우리들의 양심을 울리고 눈시울을 적시게 하며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어 선으로 방황타를 가리키게 하는 주위의 선지식들이 우리들이 마음에 새기는 비석인 것이다.

 

 

 

 

 

 

정각논단

한국의 사찰조경 /홍 광 표(조경학과 교수)



사찰조경은 사찰이라는 특수한 장소에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관념의 세계, 즉 이상향(理想郷)을 내용으로 하여 그것을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로 가시화(可視化)한 특수경관을 조성하는 행위이다. 사찰조경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찰경관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 여타 일반적인 경관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독자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사찰경관이 불교의 이념적 세계를 불교 문화적 틀에 맞추어 현실세계에서 이상적으로 실현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조형물은 관념-상징-형상화라고 하는 몇 단계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 관념은 조형물을 만들기 위한 의욕(造形動機)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곧 그 조형물에 내재한 내용의 하나가 된다. 결국 경관은 이 관념이 형상화된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이 형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관념이 구체화되기 위한 중간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그 매개체가 바로 상징행위(혹은 상징물)이다.

이렇게 볼 때 사찰조경은 일차적으로 불교사상․철학 등 불교적 관념에 대한 연구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러한 추상적 관념의 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매개체 즉, 상징물을 탐구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종교적 상징성을 형식화시키기 위한 조형원리와 소재의 선택이 요구된다. 결과적으로 사찰조경은 불교를 존재하게 만든 매우 다양한 종교적 개념(경관의 내용)을 특정 공간 속에서 불교 특유의 상징 언어를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상징화 작업)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찰조경의 특성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사찰조경을 사찰의 입지(立地), 공간구성(空間構成) 그리고 경관구성요소(景観構成要素)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찰조경에서는 사찰이 입지하게 될 장소를 선정하고, 건물과 마당 그리고 동선(動線)을 서로 엮어서 공간을 구성하며, 그 공간 요소요소에 불교적 상징성을 구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경관 요소들을 도입하는 총합작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조경 과정 각각의 단계에서는 특별한 의도와 일정한 규범 즉, 설계원리(設計原理)가 적용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곧 사찰조경 연구의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입지는 일반적인 공간과는 달리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곳에 선정되어졌으며, 이러한 택지(択地) 과정에서 조경가는  여러 가지 작용인자를 내용으로 포함시킴으로써 그 입지에 특별한 장소성(場所性)을 부여하게 된다. 한국사찰의 입지적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불교 수용기에 창건된 초기사찰들은 불교교리 등 불교의 관념적 세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불교가 지닌 종교적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한 입지관(立地観)보다는 정치․사회적 요인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여 입지가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당시의 전통적 입지관 또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이 당시에 창건된 사찰들의 입지는 주로 왕경(王京)의 중심적 위치에 있는 의미 있는 장소에 결정된다. 한편,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들은 교리를 배경으로 조영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데, 이 사찰들은 지리적으로 신라 왕 경인 경주의 외곽부에 자리를 잡게 되며, 산을 등지고 산록에 입지함으로써 어느 정도 산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입지가 결정되는 공통점이 나타난다. 결국 통일신라 전기에 출현한 사찰들은 입지형식상 도심형(都心型) 평지사찰과 지방형 산지사찰의 과도기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사찰의 입지는 왕경으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진 산중의 명소에 정해지게 된다. 이것은 당시 유행한 선종의 영향과 더불어 지방호족들이 불교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사찰의 입지가 산지에 결정되는 현상은 고려시대가 되면서 더욱 본격화되는데, 이 경우 불교의 이상적 세계인 수미산의 개념이 적용된 듯 보이며, 전래 민간신앙이었던 영지신앙(霊地信仰)으로서의 산악 숭배사상과 풍수지리적 택지 개념도 산지사찰의 입지 선정에 중요한 작용인자로서 적용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 후 조선시대가 되면서 사찰의 입지는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인하여 산지로 확정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산이 가진 성스러운 힘을 입지에 전이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됨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간구성적 측면에서 볼 때, 불교 전래 초기에 창건된 우리나라 사찰의 공간구성형식은 주로 인도사찰형식의 변형으로 나타난 중국사찰의 형식에 대한 모방으로부터 이루어졌으나, 그 후 점차 우리의 독특한 환경조건과 문화적 바탕 위에서 지속적인 적응과 조절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한국사찰의 형식은 공간구성의 중심성을 기준으로 고찰할 때, 탑중심형, 탑․금당 병립형 그리고 금당중심형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탑중심형사찰은 탑이 중심이 되어 사찰의 전체구조가 결정되는 형식유형으로서, 불교 전래 초기에 창건된 우리나라 사찰들은 대개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유형의 사찰들은 일반적으로 일직선축에서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전면에는 중문(中門)이 후면에는 금당과 강당이 배치되며 외곽에는 회랑이 설치되어 영역성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탑을 중심으로 강력한 구심성을 갖춘 수평 공간구성체계는 이 유형의 사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적 특징으로 해석된다.

탑․금당 병립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에 걸쳐 출현하는 사찰의 형식이다. 이 유형의 사찰들(사천왕사․망덕사․감은사․천군리 폐사․불국사)은 공간구성형식상 모두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금당 전면에는 동탑과 서탑이 중심축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배치되고, 외곽이 회랑에 의해서 위요되는 형식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공간구성형식은 당시 성행한 화엄사상 등 교학 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정형성이나 규범성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공간구성형식상 만다라 도형을 원형으로 하여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발견되고 있다.

한편, 금당 중심형은 시기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고려․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조영되는 이른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型) 사찰형식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사찰들은 입지가 산지에 결정되면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사찰이 입지한 지형적 특성에 적응하기 위해 회랑이 소멸되어 버리며, 회랑이 소멸되면서 나타나는 빈 공간에 강당과 승방들을 배치하여 방형(方形)의 중정 공간을 조성하게 된다. 이 유형의 사찰에서는 탑의 수와 규모 그리고 위치가 일정치 않아 공간구성에서 나타나는 탑의 중심성이 약화된 반면, 금당은 탑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산을 배경으로 하여 가장 좋은 지점, 즉 이행(移行)의 종점에 해당되는 곳에 정해지게 된다, 따라서 금당중심형사찰은 이제까지의 수평적 중심성을 추구하던 공간구조와는 달리 금당을 최종의 목표점으로 하는 수리적 중심의 구조로 바뀌게 되며, 모든 구성체계가 금당을 중심으로 완결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찰에 도입되는 경관요소에는 연지(蓮地), 영지(影池), 석수조(石水槽) 등 물을 이용한 요소와 화계(花階) 석단(石壇) 등 지형을 이용한 요소, 그리고 담장, 굴뚝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연지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설해지고 있는 극락정토의 못물(寶池)을 구체적으로 표한 것이며, 영지는 불교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부처님, 탑, 그리고 산의 그림자(佛影, 塔影, 山影)를 수면에 비추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불교적 상징성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사찰조경은 일반적인 조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내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타나는 경관(형식)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찰이 종교 공간이고, 불교의 우주관 및 세계관을 경관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찰조경은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기능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불교적 이념을 내용으로 하여 그것을 경관으로 형식화하는 성스러운 작업인 것이다.

 

 

 

 

 

 

전등이야기

道라 손 가람에 있는가? /편집부



唐대의 고승인 천룡(天龍) 선사의 문하에 구지(倶胝)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의 생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평생 동안 “仏說倶胝佛母準提陀羅尼”를 외웠으므로 그를 구지 선사라고 하였다. 그가 천룡 선사를 만나 불법을 물으니 선사는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으며, 이로 인하여 깨닫게 되었다.

이후부터 그에게 누가 불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손가락을 세워 쑥 내어밀곤 하였으며, 이것을 가풍으로 삼았다. 이러한 구지 선사의 지도에 의해 수많은 운수납자들이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의 문하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선사를 시봉하던 동자가 선사의 이러한 행동을 흉내내기 시작하였다. 동자는 선사가 없을 때 선승들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도를 물으라고 해놓고는 선사와 똑같이 손가락을 세워 쑥 내밀곤 하였다.

이를 눈치챈 선사는 어느 날 동자를 불러 그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러한 스승의 물음에 동자는 평소의 습관대로 손가락을 세워 쑥 내밀었다. 그때 선사는 숨겨둔 칼을 꺼내어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졸지에 손가락이 잘린 동자는 선혈이 낭자한 손을 움켜잡고 “아야-” 하면서 도망갔다. 이때 다시 선사는 물었다.

“동자야 ! 도(道)가 무엇이냐 !”

그 소릴 들은 동자는 또 손가락을 세워 쑥 내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가락이 없는 손이었다. 이를 본 동자는 크게 깨달았으며, 훌륭한 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선가(禅家)에서는 구지수지(倶胝竪指)라고 하여 오늘날도 중요한 화두(話頭) 중 하나로 《무문관》에 실려 있으며, 많은 운수납자들이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곤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불법이나 도란 손가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지 선사의 손가락과 동자의 손가락은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스승의 행동은 도를 체득한 연후에 나온 자신의 것이지만, 동자의 행동은 스승의 흉내에 불과하다. 남의 흉내란 자신의 삶이나 인생관이 될 수없으며, 제 목소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므로 그 손가락을 잘라 버린 것이다, 잘린 손가락을 내민 제자는 그 때서야 자신의 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남의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는가?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기 목소리는 어느 정도 되는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며, 진정 제자의 잘못을 보고 손가락이라도 잘라 줄 수 있는 스승은 얼마나 될까?

 

 

 

 

 

 

교리강좌

찬불게 /편집위원



불교 의례의 음악성

종교 의례와 음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감흥의 발산보다 더욱 세련된 음악은 종교 의례를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데서부터 발전해 나왔다. 그리고 이 음악의 효율적 가치를 가장 잘 인식하고 실용화하였던 것이 인도의 종교이다. 인도의 유명한 고대 성전인 4베다 중에서 『리그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탄의 시들을 모은 문헌으로서 일종의 가사집이며, 『사마 베다』는 그 시들을 듣기 좋게 읊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종의 악보집이다. 그래서 『사마 베다』는 인도 음악의 연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도에서 성립한 불교의 경우도 종교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음악적 요소를 활용하는 전통이 유지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찬송가가 기독교의 온갖 의례와 집회에서 발휘하는 위력을 불교의 경우와 대비하면, 불교 의례가 더욱 뿌리 깊고 강한 음악적 전통을 계승해 왔다는 설명에 대해 의아해 할지 모른다. 이런 의구심은 지금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는 음악, 더 정확히 말해서 ‘노래’(歌)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기인할 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노래란 서양의 음악 이론에 따라 오선지에 기호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에서는 세련된 시구(詩句) 자체가 이미 음악성을 지닌 노래로서 작성되었다. 즉, 다양하고 독특한 운율로 작성됨으로써 음의 높낮이와 길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음악화된 시구를 게송(偈頌)이라고 칭하고 또는 ‘게’라고 약칭하여, 그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불교 성전은 세계의 다른 어느 성전보다 음악성 즉 게송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가르침의 전달을 극대화하고 있다. 초기의 성전일수록 『법구경』처럼 전편이 아예 게송으로 이루어졌든가 게송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산문의 가르침은 다시 게송으로 그 핵심을 요약하여 반복함으로써 이해와 암기를 돕는다. 이미 음악화 되어 있는 게송들은 가르침의 요점을 암기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암기문이 필요한 의례에서는 전적으로 게송이 사용된다.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며 출발한 대승불교가 흥기할 무렵에는 새로 작성된 석가모니 전기(伝記)와 경전에서,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을 찬양하는 게송들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이런 게송들을 ‘부처님의덕을 찬탄하는 게송’이라는 뜻에서 찬불게(讚仏偈) 또는 탄불게(歎佛偈)라고 칭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가 당시의 사람들에겐 ‘노래’였지만 이제 서양의 음악 감각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우리에겐 그 음악성이 전달되지 않은 탓으로, 찬불게의 취지는 살리되 그 운율의 형태를 서양식으로 바꾼 새로운 찬불가가 작성되어 사용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찬불가들은 그 연원을 여러 가지 찬불게에 두고 있는 것이다.

찬불게의 의의

사찰의 의례에서 전통적으로 주로 암송하는 찬불게는 석가모니의 전기인 『불본행집경』(仏本行集経) 제4권에 나오는 것으로서, 석가모니가 과거세에 불사불(弗沙仏)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이에 의해 수행자였던 과거세의 석가모니는 장래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천상천하에 부처님과 같은 이는 없고(天上天下無如仏)

시방삼세에도 역시 비길 만한이 없다.(十方三世亦無比)

세상에 있는 것을 내가 남김없이 보아도(世間所有我盡見)

온갖 것 중에 부처님과 같이 이는 없도다.(一切無有如仏子)


유사한 종류의 찬불게는 『법화경』,『화엄경』,『승만경』등과 같은 유명한 대승 경전에 산재하며, 『불삼신찬』(佛三身讚)이나 『찬아미타불』(讚阿弥陀仏)등 독립된 일편의 찬불게도 있다. 굳이 종교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위인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보급함으로써 정신적 계도를 도모하듯이, 종교적 성인이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불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만, 어떤 유일자에 대한 절대적 맹신이나 맹종을 강요하지 않는 불교의 경우엔 같은 찬탄이라 하더라도 남다른 면이 있다.

우선 사상적으로 보면,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이 자신의 해탈을 우선하는 아라한으로부터 나와 남의 동시 해탈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보살로 바뀌고, 이 보살은 실질적인 부처이면서도 그 성불을 유예하고서 중생구제에 헌신하는 부처의 실천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찬불의 감정이 발생한다. 더욱이 이런 이상적인 인격은 석가모니 입멸 후 그의 사리를 신앙 대상으로 삼아 공양했던 재가 신자들의 염원이었다. 이로부터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불탑(仏塔)을 신앙하던 사람들에게 찬불적인 신앙이 성행하게 되었고, 이런 신앙이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찬불게는 위와 같은 추이의 산물인 만큼, 그것은 부처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표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도 보살․부처와 같은 인격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대승불교 특유의 이념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의 대표적인 예를 『무량수경』에서 볼 수 있다. 『무량수경』 상권에서는 아미타불이 법장(法蔵)이라는 비구였을 적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仏)을 4언 80구의 게송으로 찬탄했음을 기술하고 있는데, 보통 찬 불게라고 할 때는 특히 이것을 가리킨다. “빛나는 부처님의 얼굴은 우뚝하시고/위엄과 신통은 그지없으니/이처럼 찬란하고 밝은 광명을/뉘라서 감히 비기리이까.”로 시작하여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가 지고함을 계속 찬탄하는 이 찬불게는 다음과 같은 맹세(서원)로 이어진다.

“바라옵건대 나도 부처님 되어/거룩한 공덕 저 법왕처럼/나고 죽는 중생을 모두 건지고/빠짐없이 고해에서 건지오리다.”

“보시를 베풀어 뜻을 고르고/계율을 지키어 분함을 이기고/끊임없는 정진을 거듭하면서/삼매와 지혜로 으뜸을 삼으리라.”

“나도 맹세코 부처님 되어/이러한 서원을 모두 행하고/두려워서 시달리는 중생 위하여/편안한 의지가 되어 보리라.”

이 찬불게가 “만일 어찌하다가/어떤 고난에 빠진다 한들/제가 수행하는 바른 정진을/참아내지 못하고 후회하리까.”라는 다짐으로 끝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찬불게로 부처님의 위대한 공덕을 찬양함은 그런 부처님을 본받아 자신도 그렇게 실천할 것임을 다짐함이다.

 

 

 

 

 

 

불자탐방

타고난 불자 오국근교수 /편집부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강의와 연구에 바쁘실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와 그 이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나라 사람은 원래는 모두가 불교신자입니다.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어왔습니다. 근래 들어 2,3대째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지요. 특히 저는 선친께서 스님이셨고 가정적으로 좀더 불교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죠. 그래서 어릴적부터 불경(仏経)도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며 굳이 다른 종교를 믿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20代에는 잠시 범어사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기도 불교인으로 태어났고 결국 불교인으로서 살다가 죽저1 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 유적은 거의 8,90%가 불교 유산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미’ 속에 흐르는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역사라 할 수 있겠지요. 교수님께서는 학교 내에서 교수불자회 회장과 산악부 지도교수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언제부터 이런 활동을 하셨습니까?


“저는 동국대학에 들어온 것부터 부처님의 법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이라고 봅니다. 동 대는 단순히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중앙도량이며 강원이고, 포교당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 봉직하는 것이 부처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이제까지 이 학교에 봉직해 왔습니다. 그리고 7,8년 전 농대 교수불자회가 창립될 때 회원으로 가입했고 한국 교수불자회에서도 활동을 했습니다. 최세화 회장님이 정년퇴직하면서 부족한 제가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우리 학교 산악부는 우리 나라대학 산악부 중에서 가장 연륜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이 인정되는 산악부입니다. 9년 전 졸업생들이 간곡히 권하고 특히 불교인으로서 히말라야 설산에 대한 동경도 있고 해서 맡아 왔습니다. 금년 에베레스트 등정시 불행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지도교수의 자격으로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고 했습니다. 또한 학교를 위한 일이기에 작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동국인의 의무가 아닌가 합니다.”


교수님의 전공분야가 영문학인데 이것을 선택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어릴 때부터 문학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제가 특히 영문학을 선택한 것은 한국과 외국, 한국불교와 서양문화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여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좀더 긴밀히 할 수 있게 하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제 개인이 불교를 공부하는 데나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데 영문학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봉직해 오면서 그 동안 만나 뵈었던 큰스님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많은 큰스님을 친견했지만 특히 동국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큰 선지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포광 김영수 선생님, 퇴경 권상노 선생님, 뇌허 김동화 박사님, 조명기 박사님, 황정기 선생님 등이 기억에 남아있고 청담 큰스님, 동산 큰스님, 대륜 큰스님 등 이미 열반에 드신 노장님들과 석주 큰스님, 관음 큰스님, 덕암 큰스님 같은 노장님들과 일타 큰스님, 회광 큰스님, 숭산 큰스님 등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탑골 보문사의 강원 원장이신 황영진 선생님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참으로 많은 스님들에게 인간적으로 그리고 신행상으로도 큰 힘을 입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어떻게 신행활동을 하고 계십니까?


“저희 집에는 선대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오래된 중국계 관세음보살 탱화와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불하고 천수경을 독송함으로써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교수님은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 나오시면 제일 먼저 법당에 들러 예배를 한 후에 연구실로 가시는 것을 저는 항상 지켜보며 내심 존경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법당에서도 자주 뵙곤 했지요. 가족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85세 된 노모님이 계시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안사람과, 아들 둘이 있는데 모두 결혼했습니다. 큰아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각각 손녀 하나씩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우리 것, 우리전통, 문화, 유산 등에 대한 소중함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오신 인생의 선배로서 젊은 불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몇 마디 해주시죠.


“우리나라에서는 100여 년 전부터 서양의 문물을 배우면 그것이 개화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종교도 서양에서 들어온 것을 믿는 것이 개화되는 것이라 여겨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부터 믿어오던 것을 그대로 신봉하면 보수적이고 고루한 사람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근대화과정에서 외세의 힘에 지배되었지만 우리 것, 우리의 전통문화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인가 하는 점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민족은 세계 역사 속에 찬란히 빛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대화과정에서 잠시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망각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재발견해야만 합니다. 종교, 특히 불교에 국한해서 말해본다면 불교가 우리 조상대대로 믿어온 종교라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여러 종교와 비교할 수없는 ‘무상심심미묘법(無心甚深微妙法)’이라는 확신 때문에 지금까지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여 바르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법은 참다운 ‘정법’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개화가 거의 끝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것,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따라야만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젊은 불자들은 앞으로 세계의 정신문화를 주도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참다운 불법을 올바르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다른 많은 종교를 공부해 보도록 권합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가 얼마나 높고 깊은 참다운 진리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요.


“할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 공부해온 불교를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책으로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을 미력하나마 제시해보고 싶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교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부처님의 가호 아래 원만히 성취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람의 향기

운문사 /편집부



가을하늘은 맑고 깨끗함의 상징이다. 그러면서도 그 속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진지함과 엄격함이 숨어있다. 운문사(雲門寺)에 대한 느낌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가을하늘의 푸른빛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전문강원으로서 순수함과 진지함과 엄격함으로 청아하고 고결한 승풍을 지녀오고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를 찾아가던 날은 전형적인 가을하늘이었다. 그래서인가, 하늘이 그토록 푸르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창건

운문사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경주시 산내면의 경계를 이루는 1,l88m의 운문산(雲門山,또는 虎踞山)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운문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된다. 운문사 사적에 한 신승(神僧)이 금 수동에 들어와 3년 간 수행하다가. 오령(五霊)이 숨어사는 곳임을 알고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룩된 절이 중앙에 대작갑사(大鵲岬寺),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 소작갑사(小鵲岬寺, 또는 大悲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宝岬寺)인데 그 중에서 중앙의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다.


․중창

운문사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30년(608)에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원광(圓光) 법사가 주석하면서 사격을 크게 일신한다. 원광 법사는 2년 뒤 가슬갑사로 옮겨가는데, 그곳에서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를 주었으며 점찰보를 두어 점찰법회를 열기도 했다(《삼국유사》 <원광서학>조).

고려 태조 20년(937)에는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 국사가 크게 중창한다. 이에 태조는 26년(943)에 보양 국사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전지를 내리고 ‘운문선사(雲門禅寺)’라고 사액한다. 이때부터 지금의 절 이름인 운문사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원응 국사, 설송 스님 등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일언 스님과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라면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는 불교적 역사관에 의해 쓰여진 민족주의적 역사서이다. 일연 스님의 삶은 몽골에 의해 전국토가 유린되던 고려 후기 사회를 꿰뚫고 있다. 스님은 재물로써 승직을 구하거나 취처(娶妻)한 승려들의 타락상과 몽골의 병화로 불타버린 황룡사의 참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삼국유사》 <황룡사장육>조, <황룡사구층탑>조). 스님의 이런 경험은 현실적 수난을 민족의 자주적인 전통의식의 강조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불교적 역사의식을 형성케 한다.

스님의 역사의식은 왕명에 의해 4년 간〔고려 충렬왕 3년(1277)―6년(1280)〕머물게 된 운문사에서 그의 필생의 역작인《삼국유사》로 표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운문사는 불교적 민족정신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

운문사에는 천년고찰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 운문사의 본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대웅보전 앞에는 동서로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이 탑은 대웅전이 자리한 곳의 지세가 행주형(行舟形 : 전복되기 쉬운 배의 모양)이어서 이를 누르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작압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이다. 다만 호분을 두껍게 칠하여 본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없다.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이다. 석조여래좌상의 좌우에 2기씩 배열된 사천왕 석주들은 무인 복장을 하고 무기를 들고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원형두광을 지닌 채 악귀를 밟고 서있는 이 석주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금당 앞에 남아있는 석등은 옛날 금당 앞에 있었던 황금 탑을 밝히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이다.

이밖에도 경내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처진 소나무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고, 조선 초기의 건물로는 우리나라사찰 중 최대의 것으로 알려진 만세루가 있으며, 고려 중기에 활약한 원응 국사의 비가 귀부와 이수가 상실된 채 남아 있다. 이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뒷면에는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114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심의 창

약한 자의 날개와 문신 / 김명석 시인․경주캠퍼스 국문과 조교



산중턱 어딜 가나 들국화가 피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들국화가 피는 계절이면, 한 포기의 잡초도 내 언덕에선 자라지 못 하였던 고등학교 시절이 눈가에 아슴하게 살아 오른다. 지금은 옛날의 일이라 생각하니 어느 정도 상처난 시절을 회상할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때의 기억은 곧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기 싫었고, 조금이라도 기억의 파편이 묻어있는 물건은 태워버리고 싶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 못할 신(神)이 있어(당시 나는 무신론자였었다.) 나를 지배하고서 고통을 주었다면, 비록 내가 바위에 부딪치어 터지는 결과가 나타날지라도 내 저주 담긴 한 점의 피를 그의 면상에 뿌렸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생활이 연속이었을 때 자 살을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무작정 시외버스를 타고 바람이 멈추는 곳에 내려 발길 이끌리는 거목 당수나무 밑으로 갔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를 존재하게끔 도와준 모든 사물들에게 저주와 증오를 쏟아부으며 가늘고 실한 나일론끈을 움켜쥐었다. 나뭇가지에서 몇 개의 잎들이 힘없이 내 발끝 근처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이제 나도 저렇게 편안하게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생각했었다.

부처님 전에 향을 올리며 그래도 행복한 유년을 보냈던 내가 보였다. 이루고 싶은 것 많고 보고 싶은 것 많아 이루게 하여 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뼈만 앙상하게 남은 까무잡잡한 촌아이. 수몰민이 되어 대처에 나와 도시의 환경을 보면서 마냥 신기하여 밤잠을 설치다가 새벽녘 아련하게 들려오는 기적을 들으며 더 큰 대처로 가고 싶어 했던 아이. 경제력만 넉넉했다면(집안이 어려울 때였음.) 고칠 수 있는 것을, 그냥 낫겠지 하고 수년을 넘기는 바람에 먹구름은 짙어만 갔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더 이상 그때의 환경과 고충을 회상하기 싫다. 어찌어찌 병원비가 마련되어 입원하여 전신마취주사를 엉덩이에 놓았을 때 전신은 나른한 것이 힘은 없었지만, 이 병원을 나서는 날은 새로운 자연의 사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바로 앞에서 수술대에 누워 지르는 환자의 괴성과 망치와 끌 같은 도구로 뼈를 깨어내는 소리를 즐겁게 바라볼 수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응급실에 누워 있을 때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내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나를 본 것이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의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기에 내 스스로는 사실로 믿고 있다. 나는 하얀 시트 위에 누워 있고, 또 다른 나는 서서히 내 몸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허공에 떠서 누워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공(空)의 세계였었다. 무게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며, 정신은 그렇게 맑을 수 없었다. 이것이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인가 싶기도 하고, 새로운 무(無)의 세계로 가는 길인가 싶기도 했다. 그 순간 이외에는 아직까지 그런 환상적인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허공에 떠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리고 허공에 떠있는 나는 난로 연기통(당시 응급실 중앙에 자그마한 난로가 하나 있었고, 창문 위쪽 자그마한 창이 열려 있어 연기통 끝이 외부로 나가 있었다. 난로에는 물이 항상 끓고 있었으며, 보호자들은 가끔 끓는 물에 수건이나 가제를 소독하여 환자에게 사용하였음.)사이로 빠져나가려 하는 찰나 엄청난 고통과 함께 느낌 자체는 사라져 버렸다. 막연한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고통의 시간은 누워 있는 나와 허공에 떠있는 나의 결합시기로 보고 있다.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는 이승의 시간으로 며칠이 지난 뒤였다. 얼마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수술한 부위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와 장기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고, 속세의 말로 죽었다고 했다. 퇴원한 이후 나는 손닿는 곳에 있는 심령과학분야의 책을 깊이 탐독했고, 비슷하게 체험한 사람이 종종 있음을 책을 통해서 알았다. 그 이후로 내가 사는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회복이 되고 외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때쯤 가까이 있는 작은 암자에 찾아갔었다.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촛불 건너편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유년의 이루고 싶은 것 많고 보고 싶은 것 많은 아이는 한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죽음이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가,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해서 고통을 감내하며 서있어야 하는가가 절실하게 와 닿을 때마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야.’하고 외친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저음으로 외어 본다. 시간은 길기도 하면서 짧기도 한 것. 내가 이 지구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는 것.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 서서 흙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붉은색이면 어떻고 푸른색이면 또 어떠랴. 욕심이라면 두 가지 색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푸른색과 붉은색의 차이점을 알고서 눈을 감아 보았으면, 어떤 자가 있어 나에게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동굴이 있는데 그 곳에 들어가 보지 않겠냐고 한다면 들어가리라. 들어가 흩어져있는 날카로운 돌을 주워 내 살을 찢어도 보고, 문드러져가고 있는 사랑의 편경(片鏡)을 닦으며 노을색으로 물든 연가를 가다듬어 보기도 하면서,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 날아드는 갈매기의 날개를 가지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떠나는 떨거지 중생인가. 나무관세음보살.

 

 

 

 

 

 

 

경전의 세계

미륵경전 /편집위원



부처님께서 아함경류를 설하시고 난 뒤, 즉 성도 후 13년부터 20년까지의 8년 동안 말씀하신 때를 일컬어서 방등시(方等時)라고 한다. 이는 이때의 말씀이 횡적으로는 시방세계에 두루하는 방광보편(方広普遍)한 진실한 내용이며, 종적으로는 성인이나 범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가르침이므로 이와 같이 부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를 또한 대승경전을 총칭하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불교의 여러 경전 중에서 화엄경과 반야경․법화경 및 열반경류를 제외한 모든 경전류가 여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경부터 불교교단 내에서 소승과 대승불교가 서로 교리상의 문제로 다툴 적에 소승에서는 이 방등부의 경전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너희가 지니고 있는 계율은 마왕이 설한 것이고 우리들의 경율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것이다. 여래는 먼저 9부법인(法印)을 설하셨으니, 이와 같은 9인(印)은 나의 경과 율을 인(印)한 것으로 처음부터 방등경전의 일구일자(一句一字)도 있다함을 듣지 못했다. 여래소설의 무량한 경율의 어느 곳에서 방등경을 설하신 내용이 있는가, 이와 같은 중에 아직 일찍이 10부경명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 그것이 있었으면 마땅히 알았을 것이다. 필연코 조달(調達)의 소작(所作)이고, 조달은 악인이라, 선법을 없애기 위하여 방등경을 지었으나 우리들은 이와 같은 부류의 경전을 믿지 않나니, 이는 마왕의 설이기 때문이다.”라고『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사정품(邪正品) 등에서 그 부당성을 말하고 있지만, 방등경, 즉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대승경전, 즉 방등부의 경전 중에서 우리 생활과 친숙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미륵경전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미륵경전에는 3부경으로써 미륵상생경(弥勒上生経)과 미륵하생경(弥勒下生経) 및 미륵성불경(弥肋成仏経)이 있으며, 6부경을 말할 때는 이들 3부경과 더불어 관미륵보살하생경(観鶯勒菩薩下生経)․미륵하생성불경(弥勒下生成仏経)․미륵래시경(弥勒來時経)을 합하여 통칭하는 것이다. 미륵신앙이 대승불교 사상에 연유된 것이지만, 앞서 편찬된 아함경과 뒤에 출현한 열반경과 법화경 등에서도 그 내용이 설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상은 전 경전류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미륵이라는 의미는 팔리어로는 Mettēya, 범어로는 Maitreya인데, 이를 한역에서 자씨(慈氏)로 부르고 있다. 즉 ‘친구’라는 뜻의 ‘Mitra’라는 옛 인도 신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 신은 ‘계약’과 ‘진실한 말’을 그 성격으로 하기 때문에 예언자적인 분으로 여겨져서 신앙되고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구세주적인 성격을 띤 보살이 미륵보살인 것이다. 따라서 말법시대일수록 자주 그의 강림을 갈구하는 신앙이 열렬하게 되어서,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의 신앙이 정권의 과도기에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륵신앙에서는 상생, 즉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보살신앙과, 미래불로서 중생들을 구제키 위하여 하생하는 여래불로서의 신앙 등 두 가지의 신앙 형태를 가지고 있다.

도솔천신앙은 중생들이 십선 등을 닦거나 미륵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면, 이곳에 승천해서 오욕과 번뇌가 없고 청정하여 복덕이 풍족하는 등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미륵은 자비의 화신이고 그 공덕은 무량하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참회하거나 명호를 부르는 중생이 있으면, 이를 소멸시켜 주고 성취케 하며 감응해서 도솔천에 낳게 하지만, 적어도 삼악도 등에는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미래불신앙은 미륵보살이 반야와 원력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 지향력도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적이다. 즉 석가모니불의 정법․상법․말법시대를 지나서 이 세계가 극도로 악화되면 큰 재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재변으로 말미암아 많은 중생들이 피해를 보지만, 인류는 옛날의 죄악을 반성하고 십선 등을 적극적으로 닦아서 복덕이 증진되고 수명이 연장되며 오곡 등이 풍성하여 금․은 등 보화가 쓸데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이 땅에 강림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3회에 걸쳐서 중생들을 제도하여 구제한다는 것이니, 이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각자들이 이때를 맞이하며 스스로 미리부터 청정한 업을 쌓아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미륵의 세계, 즉 도솔천이나 현실에서 구원을 받게 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미륵불 자신의 수행이 있고, 그를 맞이하는 여건으로서 중생들의 청정한 세계가 먼저 그려지며, 끝으로는 석존의 법의를 이어받은 보처보살로서의 그의 성불이라는 것이다. 먼저 미륵보살은 그의 수행으로서 미륵보살소문본원경(頭勒菩薩所問本願経) 등에 보면 십종법이 설해져 있는 것이다.

그 첫째는 진리를 향한 발심이 미륵보살의 수행에 있어서의 관건이며, 둘째는 공성(空性)에 머물러서 집착심을 포기하는 것, 즉 무소주의 세계를 마음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셋째는 평등심에 머물면서 운수(雲水)와 같이 자재소요하여 대비심을 지니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 가지의 덕목을 수행해서 보살로서의 인격을 갖춘 뒤에는 중생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구제자와 피구제자와의 인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 보살뿐만이 아니라 중생들 스스로의 정업이 선결문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곧 중생들의 청정한 행위가 미륵의 수행설과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륵보살과 석존의 관계에서는 미륵보살의 수행이 보다 강하게 우리 중생들에게 긍정되는 면을 말한다. 즉 용화세계에서 성불한 미륵보살은 많은 대중들을 이끌고 계족산으로 올라가서 마하가섭을 친견하고는 석존의 법의를 전해 받고, 석존의 교법과 의식을 따르며, 대중에게 경전의 수지독송과 보시와 지계․인욕․자비행 등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는 것이다. 미륵경전의 내용이 타력이지만 사실은 그 구제의 가능성이 일체중생 각자에게 있다고 보아서, 자각을 표방하는 대승경전으로서의 미륵경전의 위치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비유와 설화

많이 듣는 자가 지혜자가 된다. /편집위원



부처님 당시 사밧티라는 고장에 수닷타라는 유덕한 부호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호시(護施)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의술 같은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때 호시는 중병에 걸려 자리에 몸져 누었다. 친척과 친구들이 병문안을 올 때마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권했지만, 그는 한사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해와 달을 섬기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할 뿐이다. 나는 이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하루는 수닷타가 그를 찾아가 말했다.

“내가 섬기는 스승은 이름을 세존(世尊)이라 하는데, 그분은 신덕(神德)을 널리 입히므로 만나는 사람마다 복(福)을 받는다네. 한번 시험 삼아 그 어른을 청해다 법을 설하고 축원(祝願)을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그분을 섬기거나 섬기지 않는 것은 자네 마음에 달린 것이니 달리 마음 쓸 건 없네. 자네의 병이 오래되어 낫지 않기 때문에 내가 권하는 것이라네.”

며칠이 지난 후 병든 친구는 수닷타를 불러 말했다.

“자네가 나를 위해 세존과 그 제자들을 청해주기 바라네.”

수닷타는 곧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했다,

부처님이 호시의 집에 이르자 발은 광명이 온 집안을 두루 비쳤다. 환자가 이 광명을 보는 순간 마음이 기쁘고 몸은 가벼워졌다. 부처님은 자리에 앉아 환자를 위로했다. 호시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저는 해와 달을 섬기고 임금과 조상들을 공경하면서 갖가지로 재계(斎戒)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은덕을 입지 못했음인지 아직도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 조상 때부터 지켜 오므로 이렇게 살다가 죽을까 합니다.”

부처님은 호시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횡사(横死)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소. ① 병들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그 첫째이고, ② 치료는 하면서도 환자로서 삼가 할 것을 삼가 하지 않는 것이 그 둘째이며, ③교만하고 방자함으로써 거스르고 따름(順逆)을 알지 못하는 것이 횡사하는 셋째 이유요.

이와 같은 사람의 병은 일월이나 국왕, 또는 조상과 부모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밝은 도리로써 시간을 따라 차근차근 고쳐야 합니다. 그 도리란, 추위와 더위에서 온 병은 의약으로써 고쳐야 하고, 삿된 일과 악귀로 인해 생긴 병은 경전과 청정한 계율로써 고쳐야 하며, 어진 사람을 섬김으로써 얻은 그 자비심으로 빈궁과 재난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덕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을 감동시켜 중생을 복되게 하고 지혜로 번뇌 망상을 소멸시킵니다. 이와 같이 행하면 현세에서 평안하고 복되어 뜻밖의 재난을 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요.”

부처님은 다시 게송으로써 말씀하시었다.


해를 섬기는 것은

밝기 때문이요

부모를 섬기는 것은

은혜 때문이며

임금을 섬기는 것은

권력 때문이고

도인을 섬기는 것은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이다.


건강을 위해 의사를 섬기고

이기기 위해 세력에 기댄다.

법은 지혜 있는 곳에 있고

복을 지으면 세상에 빛난다.


벗을 사귀는 것은

일을 위해서요

친구와 헤어지는 것은

급한 때이며

아내를 바라보는 것은

사랑을 위해

밝은 지혜는 설법 안에 있다.


스승은 중생을 위해

법을 펴나니

의문을 풀어 지혜 얻게 하고

청정한 행동의 근본을 깨우쳐

법의 보배 받아 지니게 한다.


많이 들음은 현세의 이익

처자 형제 친구를 잊게 하고

후세의 복을 가져오나니

듣고 들어

성인의 지혜를 이룬다.

지혜는 근심과 걱정

흩어 버리고

상서롭지 못한 희망을

없애나니

안온한 행복을 얻으려 하면

많이 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


호시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회의의 구름이 맑게 걷히었다. 지혜로운 의사의 치료를 받고 도의 덕에 의지하니, 몸이 편하고 온갖 근심 걱정이 사라져 감로수를 마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법구비유경』의 다문품(多聞品)에 나오는 내용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들을 때 진정한 만남(邂逅)이 이루어진다. 현대처럼 조급하고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이 각기 저마다의 자기 말과 주장만을 내세우는 세상에서는 연결이 아닌 단절의 무자비만이 있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 깨어지는 이유도 사람들이 남의 말을 진심으로 듣지 않거나, 혹은 건너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진정한 소리를 깨우치는 일일 수도 있다.

잠재되어 있는 곱고 맑고 밝은 언어는 내면에서 차츰 자라나야 남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곧 말이 자라도록 그 토양을 조성시키는 침묵의 성숙 기간이다.

침묵과 내면의 성숙에서 자란 성인들의 말은 솔직하고 단순하다. 이러한 솔직하고 진솔한 말은 복잡한 의식(意識) 속에서 메말라 가는 사람들의 메마른 마음의 틀을 소생시켜 준다.


중생(衆生)이란 편협하고 자기 말만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래서 소아병적인 자기 이익에만 급급하고 큰 정이 아닌 잔정에 매달리는 인간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어리석은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 불․보살로 통칭하는 존재의 대아적인 지혜의 인간이 성인이요, 도인이요, 무량한 마음의 소유자인 대덕(大徳)의 인간이다. 이들은 마음의 큰 귀를 가지고 상대의 모든 소리를 듣고 알아 말해주는 분이다. 이런 분 중에 최고의 어른이부처님이며 이는 인간으로서의 대표적인 모델이고 표상으로서 남아 계신 분이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의 의왕(医王)이고 법왕(法王 : 진리의 왕)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 모든 존재의 영원한 임이고 힘이고 대덕(大徳)이다.

 

 

 

 

 

 

 

 

불교건강법

가을철 건강과 섭생 /김 갑 성(동국한방병원 침구과 과장)



한의학에서 가을은 폐장의 계절이다. 일찍이 음양오행의 분화의 법칙에 의해서 자연의 천기가 사계절의 변화를 이루듯이 인체 내부의 오장 또한 계절의 변화에 따른 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폐장은 방위로는 기의 작용을 주관하며, 계절로는 가을의 속성과도 같은 인체의 구조작용상 수렴 작용을, 오색으로는 백색, 오미로는 매운맛에 의한 발산과 청량 작용을, 인체에 있어서는 대장과 형제 관계에 있고 출구를 콧구멍을 통하여 열어놓고 있으므로 평상시 폐의 상태를 콧속이 마르거나 콧물이 흐르는 것으로도 간편하게 알 수 있다. 폐는 육기(六気)상으로는 太陰 湿 土이나 오행상으로는 건조한 金이므로 인체 내부의 건조함과 습한 생리적 균형을 유지하는 작용 또한 폐의 기능 중의 하나인 것이다.

폐는 해부학으로 흉곽에 위치하여 오장 중 재일 높은 곳에 있으므로 위로는 천기와 통하고 그 氣는 피부와 연계하여 호흡기능과 수액조절 및 방어의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폐 기능이 실조되었을 때에는 호흡기 질환과 수액대사의 장애, 혈액순환의 장애뿐만 아니라 피부질환도 발생활 수 있는 것이다. 금년처럼 무덥지 않은 여름, 가을의 수확기에 접어들면서 냉해의 피해를 자연현상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소우주의 인체 또한 냉해의 피해를 당할 수 있으니 금년 가을이나 겨울에는 감기나 독감, 호흡기 질환이 극성을 부릴 것은 예상할 수 있으며, 위장관 계통으로는 설사와 같은 대장 질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없다.

한의학 원전인 『黄帝内経 素問』에 가을을 용평(容平)이라 칭하고 천기는 겨울을 향하여 매우 급박하게 흐르며, 지기(地気)는 맑고 밝으니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기를 닭과 같이 하여 정지(情志)를 안녕토록 할 것과 또한 신기(神気)를 수렴하여 가을의 기운을 평안케 할 것이며, 가급적 정지를 외부로 표출하지 않음으로써 폐의 기를 맑게 하는 것이 가을의 기운에 응하는 것이라 하였다.

폐를 튼튼히 하여 인체의 기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식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마늘을 권할 수 있다. 마늘은 한약명으로는 대산(大蒜)이라 하며, 색상부터 백색을 정하고 있으므로 폐에 귀속되는 약물이며 맛 또한 매운맛으로 폐에 귀속된다. 신선한 마늘에는 알리신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는데 그 작용은 황색포도상구균․녹농균․대장균․이질균 등에 대해 강한 억제작용이 있으므로 임상에서는 감기․결핵․유행성수막염․백일해․피부염 등에 많은 효과가 있다. 특히 여성의 트리코모나스 질염에도 우수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이 외에도 입안이 허는 구강염․인후염에 생마늘을 1일 수회 씹으면 쉽게 치료되며 최근 임상실험에서는 고혈압․중풍 등 만성적인 질환의 원인이 되는 혈관 내부의 콜레스테롤을 쉽게 분해하여 체외로 배설하는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는데, 매일 생마늘을 4주간먹인 환자에게서 콜레스테롤의 혈중 수치가 확실하게 감소되었음이 입증된 예도 있다. 이와 같은 보고를 볼 때 평소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먹을 때 마늘이 예외 없이 식단에 오른 것은 선인들의 지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불교의 계율 중의 하나인 식산계(食蒜戒)에서 마늘을 생것이든 익힌 것이든 모두 금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마늘의 매운맛이 분노 등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성욕을 돋구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설(능엄경)도 있고 보면 성직자에게는 권할 식품은 아닌 듯하다.

 

 

 

 

 

 

일주문

제사문화의 장점과 제사종교의 허실 /조 용 길(불교학과 교수)



민족의 추수감사제인 추석명절이 지났다. 우리민족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제사에 투철하다. 제사문화란 우리나라 등 동양권 문화에서 발견되는 끈끈한 정(情)의 문화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제사문화는 현대에 와서 여러 가지 찬반론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보다 많다는 것을 먼저 결론짓는다.

그 이유는 제사문화는 그 뜻과 의의가 첫째, 과거 선조라는 조상님에 대한 경배와 숭배의존중의 뜻이 담겨져 끈끈한 혈연에 대한 연대감으로 과거와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천신 숭배라는 것으로 천지신명(天地神明)으로 통칭하는 하늘님인 천지자연에 대한 경배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 이상의 것으로 다수확의 풍년에 대한 기원과 염원을 표출시킨 것이다. 이것이 제사상에 가득히 곡식, 과일 등을 차리고 조상님을 모신 제사 자리의 모습이다. 셋째는 후손들이 모처럼 모이게 되어 현실 이상의 실현을 통한 대화합(大化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① 조상님과 ② 풍년과 ③ 후손의 번영을 기원(祈願)하는 3박자의 하모니며 사회․민족의 오케스트라이다.

이러한 과거 혈연과 현재의 이상 추구와 대화합을 통한 씨족․부족과 사회․민족 전체의 조화 균형의 정(情)의 흐름을 어찌 미신으로 또는 우상숭배라고 어느 누구가 감히 매도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명절이 갖는 제사풍속은 인간으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의 것이요, 최상(最上)의 것으로 우리는 흔히 미풍양속이라고 일컫고 있다. 민족의 대이동은 세계 어느 민족도 못 따르는 가히 조선의, 한국의 민족적 기질이요, 정의 문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약간은 교통전쟁이지만 슬기롭게 대처한다면 득이 실보다 몇 백배 된다는 사실에 동감하게 될 것이다.

불교는 제사문화의 한 표본이다. 여기에 비해 제사종교라고 일컫게 되는 서양 종교는(힌두교 등 서양 모든 종교)유일신에 대한 철저한 제사와 예배가 그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동양의 불교문화권의 제사문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거기에는 정(情)적인 문화가 아니라 종속적인 예속이 있다. 유일신에 대한 믿음의 제사요, 약속의 제사요, 계약의 제사가 그 의식 절차이며, 그 성전의 내용이다.

이러한 점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양 종교(불교, 유교)가 갖는 앞에서 3가지 미덕을 간과하고 우상숭배니, 미신이니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독단이요, 아집이요, 차별상이니 이것은 문화의 우열에 빠진 착각이다. 문화란 어느 문화이건 간에 우열이 없다. 다만 문화의 강약만이 있을 뿐이다. 종교도 우열은 없는 것이고 다만 강약만 있을 뿐이다. 제사문화도 미덕의 강약만 있을 뿐이지 우열은 없다. 제사종교가 갖는 강제성이나 주입식은 다만 선진이라는 탈을 쓴 우열 논자들의 제국 행위이며, 침탈 음모임을 먼저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는 정(情)의 문화를 보호하자.

 

 

 

 

 

 

 

동국과 불교3 명진학교시대2

명진학교의 개교 /편집위원



원흥사를 중심으로 한 신불교운동의 대두는 곧 명진학교 개교의 여명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이 무렵의 국운은 날로 쇠하여 갔다. 일본은 한국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켜 청․러 양국의 세력을 몰아내더니 1906년에는 한국을 강압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주권을 유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제의 마수는 정치․경제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면에까지 침투하여 왔다. 특히 한국불교의 교세가 약한 것을 틈타 일본의 각 종파 승려들이 대량으로 침입하여 사원과 토지를 약탈해서 일본사원을 세우고 조선인 신도와 생도를 모집하여 일본불교를 보급해 나갔다. 이는 곧 민족 고유의 불교전통을 말살하고 그들의 관념상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1906년에는 일본서본원사파에서 국내 수사찰인 원흥사를 빼앗아 한국불교를 완전히 그 지배하에 두려고 획책하다가 이보담(李宝潭) 등의 반대로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특히 일본승려들은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함을 배경으로 삼아 그 때까지 전근대적 토지소유방식밖에 모르는 사원재산에 손을 뻗쳐 이를 침탈하여 일본사원을 건립해나갔다. 지방의 교활한 관리 또는 친일매국노들이 이런 혼란기를 이용하여 사찰재산을 침탈하거나 학교부지 등으로 징발하는 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자행됨으로써 불교계는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그 동안 신불교운동을 전개해 오던 홍월초․라청호 등은 학부(学部) 및 내부(内部)에 사찰재산을 보호해 줄 것을 요망하는 청원서를 내기도 하였거니와, 이 같은 상황은 곧 불교계의 새로운 자각을 요청하는 바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력으로 불교 진홍을 꾀하고자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신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사원교육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해야만 한다는 주장과 함께 점차 그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갔다.

여기서 종래 사원의 교육제도를 일별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원의 교육제도란 삼국시대 이래 강원․선원 등에서 비롯되어 연면한 전통을 지니며 발전해온 것으로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4단계로 되어 있다. 즉 오늘의 국민학교로부터 각각 중등․고등․대학과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①사미과(沙弥科) 1년 ②사집과(四集科) 2년 ③사교과(四教科) 4년 ④대교과(大教科) 3년의 총 10년에 걸친 교육과정이 그것이다. 이 밖에 대학원과정이라 할 수의과(随意科)를 두기도 했는데(1년 이상) 이수과목 및 수업연한 등은 종파와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같은 사원의 교육제도는 우리나라 유교교육제도와 쌍벽을 이루면서 인재를 양성해왔다. 특히 조선의 유교교육제도는 ①서당 ②향교 또는 5부학당 ③성균관의 3단계 코스로서 총수업연한이 10년에서 11년으로 되어 있는데, 양 교육제도의 흡사함이 주목되기도 한다.

이런 사원의 교육제도가 오랜 억불의 조선시대를 거쳐 오면서 크게 위축되어 한말에 이르러서는 선진 외래문화의 전래로 더욱이 그 낙후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불교계에서는 이 재래적인 구식 교육제도만으로는 도저히 근대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불교도에게 신학문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불교연구회 회원들은 그 도총무였던   이보담을 중심으로 수차례에 걸쳐 이 문제에 관해 회합을 갖고 중지를 모아 갔다. 그 결과 마침내 1906년1월 서울 중심의 각 사찰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포교와 흥학의 과업을 성취하려면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갖추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먼저 중앙에 전문학교 정도인 불교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게 된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그들은 학교설립을 위한 모든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특히 교명(校名) 문제를 신중하게 논의하였다. 한국불교를 자력에 의해 근대화시키고 그 대사회적인 파급 영향을 크게 기대할 수 있는 학교의 명칭을 정하는 일은 그만큼 중요했던 것으로 교명은 대체로 ‘원흥(元興)’과 ‘명진(明進)’ 두 가지 의견이 나와 서로 타당함을 주장하였다. 즉,

① ‘원흥’설을 주장한 인물은 이보담․김월해․김우운․박보봉 등인데 그 논거는 한국불교의 불멸의 성승이며 위대한 지도자인 원효의 사상을 부흥하여 불교의 근대화를 기하자는 것로서, 원효의 ‘元’자와 부흥의 ‘興’자를 따서 ‘원흥’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② ‘명진’설을 주장한 인물들은 김석옹․흥월초․김보운․김포응․김현암 등이었다. 그들의 논거는 당시 신지식을 흡수하려던 교육계의 일반적 목표가 되었던 중국고전 즉 『대학』에서 “大学之道 在明明徳”(대학의 도는 밝은 덕, 즉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이라고 한 정신과, 불전의 ‘精進․正道’(노력․수양)의 뜻을 이어 신문화를 개명 또는 명진케 하는 교육기관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고전에서 ‘明’자, 불전에서 ‘進’자를 따서 ‘명진’으로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심도 있는 논의 끝에 결국 명진설이 우세하여 그것이 교명으로 채택되었고, 이후 학교설립을 위한 모든 준비와 절차는 신속하게 이루어져 갔다. 그 해 2월 4일에는 교칙을 제정하는 한편 학교운영의 기금문제를 협의하여 마침내 전국 16개 중법산(中法山) 이상의 사찰에서 출자키로 결정하고, 2월 5일 이보담 등 9인의 연서로써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고자 한다’는 취지문을 붙여 내부(内部)에 인가신청을 제출하였다. 이를 접수한 내부는 동년 2월 9일자로 학교설립을 인가하였으니, 이것이 오늘의 동국대학교의 기원이 된 것이다(『조선불교 통사』 『조선불교약사』, 「대한매일신문」 등).

한편 이 무렵 불교연구회는 초대회장이던 홍월초가 신병으로 사임함에 따라 이보담이 회장이 되어 개교준비를 추진해 갔다. 그는 먼저 교사를 현재의 동대문 밖 창신국교 자리에 위치해 있던 원흥사로 정하고, 동년 2월 25일에는 각 도의 사찰에 학생모집의 공문을 발송하였다. 공문의 내용에서, 명신학교의 입학자격은 13세 이상 30세 미만의 승려로 불교 강원에서 대교과를 이수하고 중법산의 추천을 받은 자로만 규정하여 2명씩 추천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개교 준비가 완료되고 각 지방 사찰로부터 학생들이 모여 1906년 8월 드디어 명진학교는 개교를 보게 된 것이다. 민족이 수난에 처해 있던 시대에 한국불교가 다시 한번 그 자체 역량을 집결하여 역경의 역사 속에 새로운 의지를 드러내는 장거였고, 동국의 기원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정각리포트


동양 3국의 불교교류 전망이 밝다

한국․중국․일본의 동양 3국 불교교류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한국과 일본 양국은 정례적으로 상호교류를 지속해왔으나 중국과는 각각 다른 별도의 우호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l0월 한국불교종단 협의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동북아시아 불교평화회의”를 계기로 한․중․일 3국 불교교류회 결성을 제안함으로써 3국의 불교관계자들은 3각 외교를 가져왔었다.

한편 지난해 10월 동북아불교 평화회의 기간에 한․중․일 3국의 불교관계자가 3국불교교류회를 결성할 것을 논의했고, 이어 지난달 28일에는 일본 경도에서 2차 회의를 열어 각국 불교대표자들이 앞으로 더욱더 긴밀한 교류와 협력을 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한․중․일 3국의 불교가 우호의 결속을 다지는 교류관계가 맺어진다면 아시아는 물론 세계 불교권에 상당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이 3국의 불교는 대승불교의 중심축이 되고 있으며, 아직 중국은 발전도상에 있지만 한국불교나 일본불교의 위상은 가히 국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3국의 교류기구 구성은 21세기 세계불교 흐름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하여 내년 북경에서 열리는 3개국 불교회의에서 정식으로 한․중․일 3개국의 불교교류를 위한 기구가 결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불교 CATV에 대한 관심

불교방송국이 종합 유선TV방송 실시 예정 지역인 5개 대도시의 불교신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불교유선TV방송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불교유선TV방송을 개국했을 경우 82.8%가 방송을 시청하겠다고 희망한 것으로 보아 대단히 많은 사람이 불교유선TV방송에 거는 기대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54.6%의 사람이 이웃사람에게 불교유선TV방송 시청을 권유하겠다고 했으며 불교유선TV방송을 실시할 경우 67%의 사람이 포교분야에 큰 성과가 기대된다고 말해 불자들의 높은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료와 관련하여 67.4%의 사람이 5천원이 적절하다고 대답해 가능한 한 시청료에 대한 부담을 덜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서는 큰스님 설법19.7%, 교리강좌 13%, 불교 소재의 영화 8.3%등으로 나타났고, 또한 기존의 공중파 TV가 방영한 불교관련 프로그램에는 60.2%의 사람이 아쉬운 점은 있었으나 괜찮았다고 응답해 불교유선TV방송의 수준 높은 불교 소재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밖에 주주참여 가능도 및 광고주 희망도에도 높은 반응을 보여 영상을 통한 새로운 포교시대의 개막을 매우 기대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음이 설문조사 결과로 나타났다.


미테랑과 불교

 프랑스 대통령인 미테랑 씨의 방한을 계기로 불교계는 작은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세계적인 문화재인 “직지심체요절”과 “왕오천축국전”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현재 문화재관리국이 파악하고 있는,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15개국에 5만여 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상당수가 불교문화재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던 일본은 약 3만점 가량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 가서 보유하고 있고, 그 밖에 영국은 7천점 정도, 미국은 6천점 정도, 독일 5천점 정도, 러시아 3천점 정도, 중국 1천5백점 정도, 그 외 덴마크, 오스트리아, 체코, 네덜란드 등이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는 1천4백점 정도로 파악된다.

프랑스 대통령이 가져온 일부 문화재를 받은 우리로서는 해외로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일심으로 힘을 모아 기필코 해결해야 할 것이다.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원산지로 되돌려 줘야 한다는 것은 국제적인 원칙이며 유엔에서 결의된 사항이다. 아무리 원칙이 이러해도 국제사회에서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하는 만큼 불교계와 정부는 끊임없는 외교와 국제기구를 통한 도움으로 인내를 가지고 우리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는 문화재를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하겠다.


경주박물관 80년전

경주와 관련된 역사자료와 문화유적사진 등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경주박물관 80년전’이 10월 26일부터 11월 21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불국사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비롯하여 경주의 역사 조명에서부터 박물관의 발전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주요문서, 행사사진, 자료, 보고서, 도록, 포스터 등이 전시되어 있어 고도 경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인도철학과 30년 기념행사

 이번 학기로 과 설립 30년이 되는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는 학생회 주최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인도사진전’을 열었고, 극예술연구회 소극장에서 연극 ‘마헤쉬’를 공연했으며, ‘윤회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학부․대학원 학생들의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마지막 날에는 ‘인도철학인의 밤’으로 동문회를 마련하여 30년의 역사를 자축하면서 발전을 기약했다. 현재까지 322명이 졸업했고 13명의 교수가 배출되었으며, 작년엔 외무고시 수석합격자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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