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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9월호 / 통권 1호 / 불기 2537(1993)년 9월 1일 발행

 

 

   

 

창간 법문

직심이 도량/오녹원 큰스님

 

창간사

불성 계발의 구심점/ 민병천

 

정각도량

주객의 원리/ 법혜

 

선시

부처와 중생 둘이 아니로다/편집부

 

정각논단

불교와 한의학/구병수

 

교리강좌

삼귀의 / 편집위원

 

경전의 세계

화엄경/ 편집위원

 

불심의 창

이것도 인연인가/ 이정덕

 

가람의 향기

단석산 신선사/ 편집부

 

불자탐방

'장한 불자상'의 이천종불자 / 편집부

 

신행단체

동국대학교 교수불자회/편집부

 

전등이야기

'無'의 숙제

 

동국과 불교

누리 밝혀온 큰 빛/ 편집위원

 

비유와 설화

활만드는 사람은 활을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다루듯 지혜자는 자기 자신을 잘 다룬다
/ 편집위원

 

일주문

중도를 어떻게 실천합니까/ 정승석

 

불서산책

조선불교통사

 

 

 

창간법문

直心이 道場 /오녹원(동국학원 이사장)



원래 사바세계는 일도 많고, 탈도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衆生界라고도 합니다. 이 苦海의 삶 속에서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이상적 경지를 淨土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토는 결코 저 하늘 끝 어디엔가 붙어 있는 머나먼 理想郷은 아닙니다. 우리들 중생의 마음씨가 맑아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맙게 여기는 이들이 모여 살때 꿈결 같은 정토는 현실로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정토를 실현하려는 이들은 부처님의 道場을 세우고, 그 곳에서 正覺을 향한 꿈을 불태웁니다. 우리 東國大学校의 正覺院은 바로 그 求道의 산실이라고 자부합니다.

『유마경』에서 말씀하시기를 “直心이 곧 도량”이라고 하였습니다. 곧은 마음이란 정직함을 의미합니다. 올바름을 뜻합니다. 중생들이 뿜어대는 三毒의 公害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갈수록 어지러워져 갑니다. 그러나 청정도량에서 샘솟는 진여의 향기는 그 혼탁한 공기들을 정화시키는 법입니다. 우리들의 곧은 마음들이 모여 正覚을 이루고 또 혼탁한 사회를 맑게 할 수 있다면, 참된 정진은 二重의 善한 果報를 낳는 셈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누구나 게으르려는 심리, 남을 얕보려는 마음씨 등이 잠재해 있습니다. 이 그릇된 마음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릇된 마음들을 억제하고, 참된 마음의 고향을 회복해야 합니다. 곧은 마음이란 근원적 마음의 작용입니다. 생명의 실상을 판단하는 지혜, 우주의 조화를 통찰하는 예지가 모두 이 “곧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에게 直心이라는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直心이 사라진 불행한 시대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佛子라면 스스로의 直心을 확인할 뿐더러, 이웃들의 잠재력까지 일깨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정각원이라는 도량이 그 수행의 본산이 되기를 우리 모두는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끝으로 그동안 정각원을 지키고 일으키는데 온 힘을 쏟아온 역대 원장님들과 普光스님의 願力에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또 실무를 맡아 애써 온 임직원 여러분들의 노고에도 따뜻한 격려를 보내는 바입니다. 부디 正覺院이 이 시대 지성의 디딤돌이자, 우리 동국대학교의 정신적 支柱로서 성장발전하기를 十方三世 無量三寶전에 간곡히 祈願하는 바입니다.


1993.  8.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장 吳綠園 합장

 

 

 

 

 

창간사

불성계발의구심점 /민병천(동국대학교 총장)



우리 학교에서 신앙의 구심원이 되고 있는 정각원에서 「정각도량」을 창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간되기에 애쓰신 한보광 원장스님과 최법혜 원장스님을 비롯한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드리는 바입니다.

「정각도량」의 발간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서울캠퍼스와 경주캠퍼스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이「정각도량」에서 수행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는 서울의 정각원과 경주의 정각원에서 각각의 정각원보를 발행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동국대학교에서 두개의 원보가 발행되는 모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각도량」의 발간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로 통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에 따라 교수, 교직원 및 학생들에 대한 믿음의 매개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뚜렷이 배우고 익혀 동국인에게 신실한 불자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은 교양학과목을 통하여 불교를 이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이론이나 중점지도 내용에 치우칠 수도 있습니다. 생활로서의 불교에 접하는 것은 강의보다는 신앙연수적 기능을 수행하는 정각원과 거기서 발행하는 「정각도량」이 더 많고 뜻 깊을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정각도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알리는 매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자에게는 좋은 신앙생활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셋째, 이 정각도량을 통해서 학내의 불교생활에 대한 소식이 보다 많이 매개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석림회, 불교학생회, 그리고 믿음생활을 하는 불자개인의 소식이 소개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뿐만 아니라 정각원 또는 학내의 불교행사에 대한 안내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불자학생의 신앙생활수기나 감상등이 감명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각도량을 불자들의 마음의 구심점으로서만이 아니고 비불자들에게도 불교의 진수를 쉽게 알려 모든 동국인의 불성을 계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 뜻에서 전동국인의 이 「도량」에 거는 기대도 또한 큰 것입니다.

정각도량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애쓰신 여러분에게 재삼 치하말씀을 드립니다.


7월 30일


총장 민병천 합장

 

 

 

 

 

 

정각도량

주객(主客)의 원리 /수암법혜(경주 정각원장)



절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주인 노릇을 해보려고 하니 객(손님․나그네) 같은 객이 없고, 객 노릇을 해 보려고 하니 주인 같은 주인이 없더라.” 이 말은 어느 입장에 서서 그 상대를 보면 기대했던 바램에 미치지 못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객(主客)의 관계란 그 실체에 있어서 연기(緣起)의 공관(空觀)에 속한다.

나그네로 왔다가 나그네로 가는 인생의 본질에 대한 것은 그만 두더라도 가정에서 주인인 가장이 문밖으로 나가면 객이 되고 소위 처갓집에서는 백년지객인 사위이지만 따님을 책임지는 귀한 주인이다. 모처럼 피서철에 바캉스를 즐기려 떠난 여행이 바가지 요금과 불친절에 기분이 상했다고 하는데, 해변가의 주민들은 오물과 퇴폐풍조에 불만을 털어 놓는다.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노사의 관계, 학교에서의 학생과 교․직원의 관계 그리고 재단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개인과 공직자, 그리고 국가와 국민들 모두가 수직적인 주객의 관계, 다른 표현으로는 주종(主從)의 관계, 화엄경에서는 주반(主伴)의 관계로 이루어져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수평적으로는 주와 객이란 어떤 절대성을 가진 고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라는 것이다. 영원한 주인이나 영원한 손님이 아닌 주인이면서 손님이며 또한 손님이면서 동시에 주인이라는 연기의 관계라는 것이다.

학교에 들어와 책임을 맡아오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보직이란 주인이 바라는 객다운 객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학교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 즉 교수 직원․학생들의 주인들 앞에서 상징건물을 지키고 있는 책임이란 여간한 시집살이가 아니다. 특히 책임에 책임을 지는 것이 나그네의 의무라는 생각이 절실히 느껴지게 되었다.

우리들은 주객의 두 입장에서 항상 어느 한쪽의 위치만을 생각하면서 어느 한쪽의 위치만을 생각하면서 가끔은 자만심도, 소외감도 가지면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대립에 의한 불만이 계속되고 그 영향은 무한한 발전에 가장 큰 장애의 요인이 되고 있다. 어떠한 자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주인이 바라는 객다운 객이 되는 것이나, 객이 바라는 주인다운 주인이 되는 것은 주와 객이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화엄경의 주반중중(主伴重重)의 연기의 진리를 깨달음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의 객이 되고 객이 주인이 되는 보직자의 이 취임식에서 “축하합니다”라는 덕담속에는 전임자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후임자의 건투를 비는 인사임을 확인하고 싶다.

 

 

 

 

 

 

선시(禪詩)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로다. /원효(元曉)스님



靑山疊疊彌陀窟*

滄海茫茫寂滅宮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 부처님 계신 미타굴이요

망망한 넓은 바다 석가모니 부처님 계신 적멸궁이로다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한생각 망상 일어나니 갖가지 차별적 현상 일어나고

한생각 망상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 둘이 아니로다



 *香山居士는 위의 시를 원효스님의 悟道頌이라고 한다.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원효스님께서 깨달은 상황을 기록한 것인데 이것이 오도송이 아닐까(?)

  오도송이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쓰여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원효스님 당시는 오도송의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

 

 

 

 

 

 

정각논단

불교와 한의학 /具炳壽(한방신경정신과 교수)



불교에서는 인체의 구성요소를 地水火風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는 地大의 성질은 堅으로 水大는 濕, 火大는 煖, 風大는 動變化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한의학에서는 陰陽的四要素인 陽中之陽인 神, 陽中之陰인 気, 陰中之陽인 血, 陰中之陰인 情에 의하여 生命現象構成要素로 관찰할 수가 있다. 불교가 한의학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의 唐時代이며, 이 시대에 인도의 四元素說과 중국의 전통적 病因論과 절충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備急千金要方을 지은 孫思邈先生을 들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육체의 병존을 허락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는 육체 더욱이 외계의 물질계를 심의 영역에 환원시켜서 바라보고 있으므로 단지 四大要素는 육체의 찰나 生滅性을 설명하고 있다. 불교와 한의학은 같은 동양의 문화권을 바탕으로 이룩되어진 것이며 특히 気的인 측면과 心的 측면에 있어서는 매우 많은 유사점이 있으며 불교의 꽃이라고 볼 수가 있는 唯識哲学은 心的인 구조의 분석에 있어서 예리한 통찰력으로 현대분석 심리학을 능가하고 있다. 心은 citta로 직역이 되고 종자를 집적하는 의미이며, 華嚴經의 <十地品>에서는 “三界虛妄 但是一心作 十二縁分 是皆依心”이라고 하여 모든 존재하는 三界의 현상은 但 一心으로부터 전개가 되고 인생 가운데서 十二因縁도 心으로부터 變現된다고 하였으니 한의학에서 五臟六腑에 각각의 정신이 내재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현대인의 자아 상실로  인하여 야기되는 신경성 질환의 경우는 확고한 진여를 찾지 못하여 발생하기 쉬우며, 十牛圖 즉 牧牛圖에서 나타내고 있는 열가지의 그림은 真如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며, 현대신경성 질환을 불교적인 측면에서 분석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의학에 ㅅ1는 七情의 気 흐름 異常으로 鬱證 気滞 中気 上気 下気 気秘蔵燥 梅核気 薄厥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특이할 만한 것은 히스테리와 유사한 蔵燥證에서 蔵을 子宮으로 본 것은 현대의 시각과 유사하다. Alan Watt의 말을 빌리면 佛教僧이 말하는 解脫의 경지 或은 목표는 오늘날 성격치료자나 정신의학자들이 추구하는 건전한 성격의 목표 간에 공통성이었다는 것이다. 普照國師는 真心의 異名으로서 心地 菩提 法界 如來 涅槃 如如 法身 真如 仏性 総持 如來蔵 圓覺 等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러한 상태를 한의학에서는 無極, 神, 陰陽合一, 道의 觀點에서 볼 수가 있고 중국의 圭峰宗密禪師는 ○을 진여로, 주렴계의 太極 圖說에 있는 ◎을 阿賴耶識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아뢰야식은 잠재적인 習気가 매장되어 있으며 인식적으로도 존재적으로도 경험세계를 탄생시키는 근원이라 하였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熏習 習気라고 하는데 마치 衣服에 계속 香気를 쏘이면 그 옷에 향기가 배듯이 우리들의 善悪의 갖가지 前七識의 행위가 아뢰야식을 훈습하면 그 훈습을 받은 종자가 나중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 활동을 일으키고, 아뢰야식이나 말나식은 깰때나 수면 時에도 항상 활동을 계속하는 심층의 심리이다. 아뢰야식은 一切諸法을생성케 하는 가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一切種子識이라고 하며 아뢰야식을 근원체로 하는 心的인 활동의 근원은 無明에 있다고 보고 또한 무명을 근본적인 원인으로써 識은 부단히 유기적으로 순환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본다. 情子와 卵子의 응고체에 아뢰야식이 結合凝體하여 아뢰야식 중의 功能 즉 종자로 부터 미세한 감각기관(根)과 그것을 형성하는 四元素가 생겨난다고 하며 아뢰야식의 유무에 의하여 생사의 구별이 되어진다고 한다. 業(karma)이란 정신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도 아니며 현대적으로는 에네르기라고 하였는데 業中의 無表業은 種子論으로 발전하여 緣을 만나면 발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気의 흐름의 입장에서 볼 수가 있고, 또한 遺傳 因子의 의미가 있는데 이를 한의학적으로 보면 内経(五常政大論)에는 中에 根한 것이 神機라고 하는데 神去하면 機息하며 根於外한 것을 気立이라 하고 気가 止하면 化가 絶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神機는 DNA와 유사하게 볼 수가 있는데, 차이점은 DNA라는 물질의 구성으로 생명이 발생한다는 뜻이고 神機의 견해로 말한다면, 우주는 공간으로도 발현하고 물질로도 발현하며 생명으로 발현이 되는데, 생명으로 발현할 때는 물질을 假借하여 생물로 발현한다는 것이다. 아뢰야식 즉 무의식의 개념은 한의학의 五種勢力中의 하나인 沈静作用(精)과 유사하며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돌출하는 작용은 肝의 発生之気나 腎의 命門相火의 개념으로도 볼 수가 있다. 최근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불교의 건강법 중에 요가가 있는데 그 의미는 “合一을 이룬다” 혹은 “여러가지 물건들을 연결시킨다”라는 뜻으로 인간의 정신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한 고래로부터의 일종의 苦行技法이며 2千年 이상의 옛날부터 인도에서 실행된 것으로 禪이나 苦行의 원형을 이루는 것으로 특히 요가나 선의 기조절은 한의학에서는 핵심이 되고있는 분야이며 한의학의 기본 경전이라고 볼 수가 있는 内経의 기본 사상은 氣醫學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気를 가르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묶고 있는 생명체 특유한 에너지라고 할 수가 있으며 気의 움직임은 몸과 마음의 심리요법 心身醫學의 사고방법이 도입이 되고 있으며 仏教史的인 의미에서의 気는 識이 드러난 境으로써 宗密禪師는 마음과 대상(境)은 모두 空한 것이고 元気는 第 八識(心識,  阿頼耶識)이 변화되어 드러난 경계이며 마음과 대상이 합쳐져서 天地人이 생겨났다고 하여 元気를 불교의 심식이론속에 집어 넣었다. 특히 心的인 구조에 대하여 唯識은 八識 혹은 九識(阿摩羅識)까지 세분하여 있으나 이는 궁극적인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위배가 되지만 이렇게 세분하여 나누려고 한 의도는 중생의 심리구조를 파악하여 一切 衆生의 成佛이라는 경지에 가기 위안한 방편이 아니었나 사료된다. 심적인 구조에 대하여 四象医学을 창시한 李濟馬 先生은 인체의 구성요소를 天人性命의 四元構造的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에서 性命이 근간을 이루고 있고, 중앙의 太極인 心性이 있다고 하였고, 耳目口鼻는 인간생활의 向外性  기능을 표출하는 기관이라면 “肺脾肝腎은 向内性 기능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도 網目関係이며 性 情에서 발로되는 喜怒哀樂의 気가 臟器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인체의 各臟腑에 따른 気의 大小가 나눠어지게 된다.

四象에서는 耳目口鼻를 天気와 地気가 통하는 통로로 보았고, 五識인 眼耳鼻舌身은 외부의 사물을 인지하고 수집하는 안테나로 인식하였다. 李済馬先生은 格致藁을 적어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름휴가 동안 일독을 권하고 쉽다.

 

 

 

 

 

교리강좌

삼귀의 /편집위원



삼귀의의 의의

우리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채 사회 제도나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겉모습과는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불안과 고통이 잠복되어 있다. 잠복되어 있던 불안과 고통이 노출될 때,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의지처를 찾게 되고 대개는 그 의지처를 종교에서 발견하게 된다. 종교는 그런 불안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제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 사회에서 다른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신임할 수 없을 때는 자연스럽게 종교를 선택하게 된다. 이 경우, 종교는 선택해 오는 사람들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처방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신임 자체가 구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비법을 소장하고서,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그 비법을 배울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자격 조건으로서 진실하고 확고한 결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결의가 진실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는 비법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불교에 입문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결의로서 세 가지를 요구했고, 이와 아울러 다섯 가지의 행위 규범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앞의 세 가지가 어느 불교 행사에서든 맨 먼저 암송하는 삼귀의(三歸依)이고, 뒤의 다섯 가지란 오계(五戒)이다,

삼귀의는 불․법․승의 삼보(三寶), 즉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僧)을 의지하고 따르겠다는 맹세이다. 현재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삼귀의는 원래의 것에 그 취지를 보강한 것이다. 현재 남방 불교에서 암송되고 있는 원래의 것은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원어대로 옮기면, “나는 귀의처인 부처님께 갑니다.”라는 뜻이고, 여기에는 나의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부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암송해 온 삼귀의의 원문은 귀의해야 할 자세를 단적으로 표현해줌으로써 삼귀의의 취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삼귀의가 새롭게 한글화되어 현재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 한글 삼귀의와 이의 원문을 비교해 보자.

佛 :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歸依仏兩足尊(이 세상에서 최대의 경의로 받들어야 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兩足이란 성자의 두 발에 경례하여 최대의 존경을 표시함을 뜻한다.)

法 :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歸依法離欲尊(모든 욕심을 떠나 받들어야 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僧 :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歸依僧衆中尊(온갖 무리들 중에서도 가장 받들어야 할 불제자 집단에 귀의합니다.) 위의 비교에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명심하면서 삼귀의를 암송할 때, 불자로서의 경건한 자세와 결의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삼귀의란 결코 불교 행사임을 표시하는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다. 이것은 불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자기와의 맹세이자 공개적인 약속이며, 그 자체가 구제의 힘을 발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삼보의 가치 인식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숲에 들어가 나무 밑에 앉거나 빈집에 있을 때, 공포심이 일어나 머리털이 쭈뼛해지거든 나를 생각해 내라. ‘세존은 자연 그대로 오신 분(여래)이며, 공양 받을 만한 분이며, 널리 깨달은 분이며,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분이다.’라고. 그러면 공포를 물리칠 수 있다.

만약 나를 생각해 낼 수 없을 때는 법을 생각해 내라. ‘법은 세존에 의해 설해졌다. 현재 과보를 받는 것이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이며, 안온함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다.’라고. 그러면 공포를 물리칠 수 있다.

또 만약 법을 생각해 낼 수 없을 때는 승가를 생각해 내라. ‘세존의 제자들인 승가는 선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존경할 만하고 공양할 만하고 합장할 만하여, 공덕을 뿌려 복을 거두는 최상의 밭이 된다.’라고. 그러면 그대들은 불안과 공포를 물리칠 수 있다.”

위의 설법에는 우리가 삼보에 귀의해야 하는 이유와 그 효력이 제시되어 있다.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에게도 삼귀의가 불안과 공포를 제거하는 힘을 발휘할진대, 일반 속인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실제 옛날 인도의 불교인들은 삼보에 성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큰 바다로 나가서 조난당한 상인들이 힌두교의 신들에게 가호를 기원했지만 아무런 효력이 없었는데, 부처님과 그의 수제자들에게 기원했더니 그 자리에서 효과가 나타나 구제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같은 이야기가 자칫 오해될 수 있다. 다른 종교에서 신을 맹목적으로 믿기만 하면 신이 구제해준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런 오해이다. 불교는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믿음의 대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그 믿음은 진정한 구제의 힘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설법에서도 귀의 대상인 삼보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는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경전에서는 강조한다. 이는 또 거꾸로 진실한 삼귀의가 마음을 정화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삼귀의가 발휘하는 성스런 힘은 그것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탐욕과 오염이 사라진 마음이 발휘하는 힘이다. 따라서 삼귀의를 암송한다는 자체는 곧 마음의 정화를 의미한다. 불교를 믿는 데 방해가 되는 온갖 장애를 제거하는 의식이 바로 삼귀의례이다. 삼귀의의 이 같은 의의를 인식하지 않고 삼귀의를 암송한다면, 삼보에 귀의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머리 속을 맴도는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게 된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삼귀의를 무심하게 입으로만 되뇌이는 듯하다. 이는 아마도 왜 삼보에 귀의해야 하는지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쩌면 삼보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한가치 인식이 자기 마음 속에 배어 있다고 믿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의식으로 끌어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앞서 소개한 설법에서 부처님이 누구보다도 삼보에 잘 귀의했을 비구들에게 삼보를 생각해 내라고 가르친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삼보의 가치를 더욱 잘 인식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경전의 세계

화엄경 /편집위원


본 난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8만 4천 법문을 중국의 천태지의 (天台智顗)대사가 설정한 오시교판(五時敎判) 에 준해서 여러 경전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즉 깨달으신 직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알려진 화엄시(華嚴時)를 비롯하여, 근본불교를 설하신 아함시(阿含時), 유마경․금광명경․승만경 등의 대승경전사상을 설하신 방등시(方等時), 반야경류를 설하신 반야시(般若時), 그리고 법화경과 열반경류를 설하신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가 그것인데, 이와 같은 분류는 다소 이들을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때와 합치되고 그 분의 중생교화 의도가 그대로 깃들여 있다고 사료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숲 속에서 입멸(入滅)을 맞이하여 마지막 설법을 준비하실 때에 수 많은 제자들이 이를 비통해 하자,

나의 입멸을 슬퍼하지 말라, 무릇 육신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라. 그러나 내 비록 육신은 멸한다고 하더라도 내 법신(法身)은 멸하지 않느니라. 법신이란 내가 일대간(一代間)에 설한 법(法)과 율(律)중에 빛나고 있는 무상의 정각(正覚) 바로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입멸한 후에 너희들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아 살아가도록 할지니라.

고 당부하신 데서부터 불교경전의 탄생이 예고되는데, 이는 부처님이 평소에 고뇌하는 모든 인간들을 구제코자 하여 자신의 가르침이 여러 계층에게 두루 펴지도록 일부 바라문교도들이 사용하는 베다어를 지양하고, 하류층이 많이 쓰는 언어로, 설법한 것 등을 고려해볼 때에, 불교경전이 그 주안점을 처음부터 교훈적인 것과 평민성에 두고서 설해졌다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엄경은 본래 그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서 대방광(大方廣)이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말한다. 즉 이 진리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한량없이 크므로 대(大)라 하고, 만법의 모범이 되어 변치않는 체성(體性)이므로 방(方)이라고 하며, 그 덕은 널리 삼계의 우주에 관통되므로 광(廣)이라는 것이다. 또한 대승경을 통칭하는 말로써 그 이치가 방정(方正)하고 광대(広大)하므로 이를 대방등(大方等)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크고 방정하게 널리 깨달으신 진리의 경지를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세계를 그린 것과 같은 경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 내용이 처음으로 설해졌지만 깨달음의 세계를 묘사한 내용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난해한 경전에 속한다.

이 경전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종합된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개개의 품(品)이 독립된 경전으로 별도로 성립되었던 것인데, 후에 ‘화엄경’이라는 경명으로 집대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 성립시기는 대략 4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장소는 중앙아시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겠느냐 하는 견해가 있다. 화엄경의 각 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인데, 그것은 대략 1세기에서 2세기 때에 성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범어원전으로 남아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십지품과 입법계품(入法界品)의 두 품 뿐이다.

한역경전으로는 세 가지의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첫째는 불타발타라(Buddhabhadra:覺賢)가 418년에서 420년 사이에 역출한 60권본으로써 이를 보통 ‘60화엄(六十華嚴)’․‘구화엄(舊華嚴)’ 또는 진나라 때에 나왔기 때문에 ‘진화엄(晉華嚴)’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실차난타(Śiksā-nanda:喜學)가 695년에서 699년 사이에 역출한 80권본으로써 이를 또한 ‘80화엄(八十華嚴)’․‘신화엄’(新華嚴)이라고 하며, 당나라 때에 나왔기 때문에 역시 ‘당화엄(唐華厳)’이라고 한다. 셋째는 반야(Prajñā:智慧)삼장이 795년에서 798년 사이에 역출한 40권본으로써 이를 ‘40화엄(四十華嚴)’이라고 하는데, 이 권본은 ‘60화엄경’과 ‘80화엄경’ 두 역본의 마지막 장(章)인 ‘입법계품’만을 역출한 것이기 때문에 ‘60화엄경’과 ‘80화엄경’이 실질적인 이 화엄경의 완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구성은 60화엄경의 경우는 7처(處:이 경을 설한 장소) 8회(會:이 경을 설한 모임) 34품으로 되어 있고, 80화엄경은 7처 9회 39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이 경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우주의 본체(本体) 곧 법계(法界)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므로 이를 일컬어서 화엄 법계라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세계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같은 상근기의 보살들을 위해서 설법한 것이므로, 그 자리에 사리불이나 목건련 등과 같은 성문승들이 함께 들었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화엄경은 부처님 자신이 설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주위에 모인 수 많은 보살들이 삼매에 들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감득한 후에 부처님의 가피력을 얻어서 설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Vairocana : 光明遍照)는 마치 태양이 일체세계의 어둠을 없애주고 만물의 성장을 돕는 것과 같은 ‘광명의 부처님’으로서, 온 우주에 가득하고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무한한 빛을 비쳐주는 우주의 통일체로 상징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또한 일심소작(一心所作)의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유심(唯心)과도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弓菩薩說偈品)의 유심게(唯心偈)는 유심연기(唯心縁起)의 극치를 나타내어 설하기를,

마음은 마치 화가(画家)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것을 그리므로 마음먹는 대로 그리지 못할 것이 없다. 이러한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마음과 부처 및 중생은 차별이 없느니라. (心如工畵師畵種種五陰 一切世間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如仏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한 것이다.

이 경은 특히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내용을 설한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도행각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로운데, 이와 같이 발심(発心)한 수행자가 주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과 중생을 구제하려고 할 때에 어떻게 행동하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아 갈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다른 경전에 비하여 특출하다고 할 수 있겠다.

 

 

 

 

 

 

불심의 창

이것도 인연인가 /李 貞 徳(사범대 가정교육과 교수)



나를 불교로 이끈 것은 한 마리의 개였다. 팔년간 가족잃은 녀석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덟살짜리 피붙이를 잃은 듯 가슴을 후볐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때 문득 위안이던 것은 불교의 생명관이었다. 평소 불교의 생명에 대한 사상이 보다 종교적이라고 막연히 여겨지던  상념이 절절한 현실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겉모습이 다를 뿐 생명의 뿌리는 하나라는 그리하여 하찮은 미물이 중생이라는 이름으로 기도를 공평히 받을 수 있는 불가의 생명관은 한치의 저항도 없이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생명>에의 유난한 관심은 내가 지닌 특질이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때, 슈바이쳐 전기를 읽다가 아무리 가녀린 풀 한포기 하잘것 없는 벌레일지라도 그것은 살아있음이므로 두려울 정도로 소중하다는 <생명의 외경(畏敬)>이란 어휘를 만난 후, 지금껏 이것은 내게 지극히 예민한 부분으로 부딪쳐 오고 있다.

一어디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면 그것은 온 우주의 힘으로 피워낸 것이다. 一라든가, 一쌀 한 톨 속에서 파이란 하늘, 흰구름짱, 빛나는 햇살, 뚝뚝 듣는 빗방울, 농부의 땀 어린 모습 그리고 탈곡기의 소리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一는 불가의 가르침에

 어느덧 나는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차츰 제행무상(諸行無常), 연기(縁起), 자비,반야(般若), 보리(菩提)란 단어들에 빠져듦을어쩌는수가없었다. 심지어, 청소년시절 읽었던 도서로 <원효대사>중의 무애(無碍)라는 말까지 되살아서 꿈틀댔다. 화엄(華厳), 인연, 회향(回向), 도반(道泮), 도량(道場), 적조(寂照,), 진여(真如), 여여(如如)... 이전 어휘들도 웬지 그냥 좋다. 유정(有精) 무정(無精), 자타불이(自벤不二)란 말에도 끌린다. 반야심경독송을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을 때, 가를 모를 광막한 우주 안에 녹아드는 내 모습을 벅차게 느꼈다. 누군가는 이런 나더러 불연(仏緣)이 있어서 그렇다 했다.

이렇게 내 생애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지금 나는 오솔길을 걷듯 오롯이 찬찬히 평화롭게 이 길을 산책하고 있다. 이 산행에서 나는 선한 생명들을 만나고 고요한 희열을 맛본다. 그리고 예불문의 마지막 구절인 원공법계재중생자타일시성불도(願供法界諸衆生自他一時成佛道)와 만난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람의 향기

단석산 신선사 /편집부



경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역사(歷史)가 있고 조상들의 순박한 염원이 흐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한 소년의 뜨거운 염원이 아직까지도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염원의 기도처’가 있으니 그 곳이 바로 단석산신선사이다.

경주에서 산내면 쪽으로 가나보면 속칭 절골이라는 송선리가 있다. 거기서 우중골(雨中谷)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가다보면 잡목이 우거진 단석산에 이른다. 단석산에는 천년전 어린 김유신(金庾信)이 삼국을 통일할 힘을 얻고자 신불(神佛)께 기도하던 자연석굴사원 신선사가 있다. 이 석굴사원은 석굴사원으로 조성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미끈하게 솟은 바위와 고른 벽면 그리고 지붕을 만들어 얹기에 안성맞춤인 ㄷ자형의 모양 등은 이곳에 법당 아닌 다른 것은 조성될 수 없겠다는 확신마저 갖게 한다.

신선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단석산정 서남쪽이다. 단석산은 해발 827m로 신라오악(新羅五岳) 가운데 중악(中岳)에 해당하는 산이다. 처음의 산명은 월생산(月生山)이 었다고 한다. 월생산이 단석산으로 불리워지게 된 연유를 동국여지승람(東国与地與地勝覽慶州山川條)과 삼국사기 (三国史記, 巻四, 金庾信傳)에 김유신의 설화를 풀어 설명하고 있다.

이 설화는 김유신과 관련된 모든 것(단석산, 신선사, 삼국통일, 당시의 주된 신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5세에 화랑(花郎)이 된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 등 주변국들이 신라를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음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17세때 홀로 월생산의 석촌에 들어갔다 제단을 차리고 신라의 이런 환란을 평정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나흘이 지나자 갈의(褐衣)를 입은 노인[難勝]이 나타나 까닭을 물었다. 소년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할 방술(方術)을 가르쳐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번간 청하자 노인은 어린 김유신의 장한 뜻을 칭찬하고 보검 (宝剣)과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기도에서 영험을 얻은 김유신이 검술을 시험하기 위해 바위를 쳤는데, 잘린 돌더미가 산처럼 쌓여서 그때부터 단석산(断石山)이라 부르고 기도하던 그 곳에 절을 짓고 단석사(断石寺)라 했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단석사는 기도에서 영감을 얻은 김유신이 이에 보답하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기도하기 위한 기도처로 조성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특히 석굴사원 내부 벽면의 조성물들은 이 법당의 조성자와 깊은 인연이 있는 듯하다.

법당내부를 살펴보면 길이가 약l8m 폭3m 높이 8m정도의 장방형으로 서쪽이 트어져 있다. 열리진 서쪽으로 법당 안에 들어서면 북쪽의 암벽은 마치 한칼로 벤 것 같이 전․후로 날카롭게 갈라져서 혹시 김유신장군의 보검이 스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잘려져 있다. 이 북암(北岩)의 갈라진 앞쪽 암벽은 다시 2단으로 나누어져 상단에는 3구(軀)의 불상과1구(軀)의 반가사유상이 일렬로 조각되어 있고 하단에는 여래입상 1구와 인물상(人物像) 2구가 일렬로 조각되어 있다. 갈라진 뒤쪽 암벽에는 이 법당의 주존불인 거대한 미륵존불이 온화한 상호로 우뚝 버티고 서 계신다. 우측벽면(南岩)에는 또 하나의 큰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으며 본존불 정면에는 1구의 보살입상과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 석굴법당에는 모두 8구(躯)의 불․보살상과 2구의 양상이 있는데 그 배치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마치 중생[人物像]이 미륵존불에서 공양하려는 것을 불․보살들이 인도하고 증명하는 법회장소 같이 조성되어 있다.

신선사는 석굴사원의  초기형식인 점뿐만 아니라 마애불상군 조성양식에서도 매우 주목받고 있다. 몇 가지 살펴보면 본존불인 미륵존상은 광배와 좌대를 구비한 고 신라(古新羅) 유일의 마애석불로 평가받고 있다.



인물 공양상은 머리의 독특한 두건, 상하 분리된 의복, 공양물 등이 당시 의복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19자(字)30행(行)의 명문은 신선사가 제명칭을 찾게 하였다. 명문 중 잠주(岑珠)라는 글자가 있는데 신선사 창건과 관련하여 주목하여 볼만하다.

신선사는 마애석불군이 국보[1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년 전의 삼국통일의 시원지이자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수행과 기도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변변한 안내표지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조국통일을 염원하면서 찾는 순례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불자탐방

장한 동국 불자상의 이천종 불자 /편집부



서울․경주 정각원이 지혜와 힘을 모아 새로이 ‘정각도량’을 출간하면서 교직원 불자 가족탐방이라는 난을 마련하여 처음으로 탐방에 나섰다. 그 첫 번째 탐방으로서 개교 8주년을 맞이하여 ‘장한 동국 불자상’을 수상한 (서울)관재계장 이천종 불자님의 가족을 찾아갔다.

강변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려 강서구 가양동 한강변에 위치한 동신아파트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짐정리도 채 되기 전이었지만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종교란 현실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정과 직장이 종교생활을 하는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천종 불자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는 학교와 가정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당연한 공통된 문제이겠지만 특히 신앙을 바탕에 두고 두 가지를 함께 영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님께서는 조계사나 봉은사에 다니고 계시며 처가 쪽에서도 대단히 신심이 돈독하다. 이러한 불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이천종 불자님은 1974년 본교 농학과에 입학하여 80년도에 졸업하고 그 이듬해 본교 직원으로 입사하면서 학교에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83년 당시(원장 : 인환스님) 처가 쪽의 인척 되시는 분이 사찰을 운영하시다가 유품으로 남긴 탑을 학교에 기증하여 현재 정각원 뒤에 모셔져 있다. 그러기에 10여년을 학교에 봉직하면서 남달리 학교에 대한 애교심이 더욱 두터웠으리라.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자 거실 안에 깨끗이 모셔진 불상이 이 가족의 행복과 신심을 뒷받침하는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민영(국․6)이, 민진(국․5)이 그리고 막내아들 원태(유치원)는 목동 청소년 회관과 법안정사를 다니며 씩씩한 부처님의 아들딸들로서 밝게 자라왔다. 그리고 금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어린이 사생대회에 나가 모두 상장을 타왔노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가 장한 동국 불자상 받은 것에 못지않게 아이들도 훌륭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80년도 결혼하여 5식구가 부처님의 가호 아래 평화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이천종 불자님에게 있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아이들이 부처님의 법을 따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도록 보살펴 주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좁은 소견의 아이가 대부분인데 우리 아이만이라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도록 많은 배려를 한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식사 전에 한 가족이 모여 아침예불을 올리면서 가족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산사를 찾아다니며 현장교육을 통해 신심을 길러 준다고 한다. 또한 가끔씩 찬불가도 함께 부르고 경전을 독송하면서 참 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현재 어느 특정한 사찰에 정기적으로 나가지는 않지만 학교 전체를 부처님의 도량으로 생각하여 출근하여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 정각원이다. 83년도 수계를 받아 현성(賢星)이란 불명을 받았다. 특히 동국대학교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교문을 들어서면서 전부가 부처님의 도량이라고 생각하는 이천종 계장은 요즘 학생들이 철없이 불상주변이나 법당주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아무데나 꽁초를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 하나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살 선도하거나 이끌어주는 사람이 적어 대단히 아쉽다고 한다. 또한 다종교 현상 속에서 기타  다른 이교도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집회를 보는 문제 등에 대해서도 주인 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올바르게 행사하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입학과 새학기에 종교성을 가진 외판원이 교내에까지 들어와 판매행위를 하면 동불(東仏)학생들을 동원하여 강력히 저지하고 타이르고 했단다. 이렇듯 남들보다 강한 주인의식을 가진 이천종 계장은 초파일을 전후해서 몇 천개나 되는 연등을 교내외에 가설하는 등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부하직원들을 잘 독려하면서 신심을 가지고 일을 잘 처리해 왔다. 그럼에도 ‘장한 동국 불자상’을 받은 소감을 묻는 질문엔 아직까지 그러한 상을 받을 만한 공덕도 없는데 너무 큰 상을 받아 부끄럽다며 앞으로 더욱 더 부처님의 사업에 힘쓰라는 뜻으로 생각하여 더욱 노력하겠다고 대답한다. 학교 일이라는 것이 끝이 없지만 보다 많은 학생들이 좋은 시설 속에서 학생 본인의 진리 탐구에 정진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가끔 학생들로부터 복지시설을 늘려달라는 주문을 받으면 마음 같아서야 더 좋은 양질의 시설을 제공하고 싶지만 학교 당국이나 재단의 재원이나 정책입안 상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최대한 공정하게 현재의 시설물들을 잘 관리하고 유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고 한다.

학교에서는 맡은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가정에 돌아와서는 자상한 아버지의 역할을 성실히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천종 계장은 앞으로 더욱더 학교의 일을 통해 이 일이 곧 부처님의 불사라는 마음 자세로 열심히 일할 것이며 하루 속히 학내문제가 안정되어 어린 아들 딸들에게 좋은 학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고 한다. 물론 데모하는 것이 전부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까지 좋지 못한 장면을 보여줄 수는 없노라고 소신껏 이야기한다. 가끔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견학시키는데 그런 모습을 어찌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행단체

동국대학교 교수불자회 /편집부



동국대학교 교수불자회가 창립된 것은 1988년5월10일이었으나, 동국대학교가 개교된지 어언 90년 가까이 되어 오므로 실질적으로는 동대가 개교되면서부터 교수전부는 불자로 출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한다.

21세기를 맞이하는 2천6백여년이나 되는 불교의 역사는 그 철학적으로 완비된 이론과 그 종교적인 실천의 행이 결코 우리가 사는 사회와 무관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중생과 인류의 진로에 커다란 등불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88년도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신 최세화박사님을 중심으로 80여명의 교수들이 뜻을 같이하여 매달 네번째 토요일을 그 만남의 정기순례법회겸 친목 친선과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시간으로 하여왔다. 금년으로 5주년이 된다.

동국대학교에 봉직하고 있는 모든 교수가 모두 다 교수불자회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학과를 불문하고 불․법․승 삼보에 대한 예경과 예법을 통해 불교의 역사, 문화, 사상의 내밀화에 동참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교수불자회는 그 중에서도 서울 캠퍼스나 경주캠퍼스나 정각원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모든 불교행사 및 학교의 대․소간의 전 행사에 두루 앞장서는 입장에 있다. 수련대회, 수계법회, 부처님 오신 날 봉축등행사, 신임교수들의 수계의식 및 임용의식도 주로 정각원 법당에서 엄숙히 치러진다. 한방병원과 양방병원은 따로이 법회도 갖고 순례법회의 기회도 가지기도 한다.

현재 서울 캠퍼스의 경우 교수불자회장은 영어영문학과 오국근 박사이며 부회장으로는 오형근(불교학과), 김창수(역교과), 홍윤식(역교과) 교수이며 총무이사는 조용길(불교학과) 교수이며 정각원장 보광 한태식(선학과) 교수를 교수불자회 법사로 모시고 있다.

매달 4째 토요일 순례정기법회는 가까운 산사(山寺)로 정하여 15명에서 30명 사이의 회원들이 줄곧 참여한다.

의식은 먼저 방문사찰의 법당을 참배하고 삼귀의례, 예불, 반야심경봉독, 축원과 법문순서로 하며 때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풍경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진 법당에서 참선의 경지에  도취되기도 한다. 법사님의 법문을 듣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사찰에 계신 고승 대덕스님이나 주지스님을 모시고 사찰연기내력과 부처님의 고매하신 품격과 그 사상을 전수해 듣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에 곡차 좌담도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는 누구나 언제든지 동참하기만 하면 같이 교류할 수 있는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 동참 연락은 정각원 사무실이나 정각원장님에게 회장, 총무교수에게 수시로 전화주면 된다. 93년 후반기 순례법회에 적극적인 동참을 기원한다.

 

 

 

 

 

 

전등이야기

의 숙제 /편집부



송나라 無門慧開가 1228년에 편찬한 「無門關」이라고 하는 48則의 화두를 모은 공안(公案)집이 있는데 이 책의 1則에 의하면 ‘趙州狗子’를 소개하고 있다.

趙州스님에게 어떤 승려가 “개에게도 仏性이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趨州는 “無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趙州의 ‘無’字 話頭는 참선수행을 하는 운수남자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제1관문이 되었다. 여기서 조주의 대답은 절대적인 답이었다. 수행승들에게는 조주의 이 답이 옳다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無’일 뿐이다.

이때의 無는 有와無의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有와 無를 초월한 절대적이며 하나뿐인 本源一心의 경지를 뜻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 문자에 집착되어 有와 無의 말의 개념에 따라 분별하고 옳다 그르다고 평가한다.

조주의 이러한 답은 부처님의 경전과는 상치되는 말이다. 즉 ≪湮槃経》에서는 ‘一切衆生은 皆有仏性’이라 하여 모든 중생에게 부처가 될 씨앗(仏性)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조주선사는 개의 불성의 有無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無’라고 하였으니 불교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었을까?

그는 임제종 남천보원(南泉普願)의 법제자로 趙州에서 778년에 태어나 897년에 열반에 들므로 세수 120세를 살았다. 그의 법명은 종심(従諗)이고, 80세 때부터 40년 동안 趨州(河北省) 땅 観音院에서 주석하였으므로 그를 趙州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의 삶은 모든 것에 초월한 일생이었으며, 심지어는 세간과 출세간도 분별하지 않았고 부처와 중생도 하나로 보았다. 어느 날 누가 묻기를.

“저와 같은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니

조주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있느냐”고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와 같은 것이 본래 중생 아닙니까?”라고 하니 조주는 “그 밖에 또 무슨 부처를 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므로 불성의 有無도 듣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화장하여 유해를 흩을 것과 사리를 찾지 말라고 하면서 앉아서 입적하니 수만 명이 모여 애석해 하였다.

그의 많은 가르침 중 한마디, ‘無’의 숙제를 풀기 위하여 오늘도 수행자들은 긴 밤을 지새운다. 우리도 한번 도전해 봄이 어떠할까!

 

 

 

 

 

동국과 불교

누리 밝혀온 큰 빛 /편집위원



불교를 말미암지 않고 이 땅의 역사 우리 민족의 삶을 말할 수 없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 정신을 떠나 동국을 말할 수는 없다. 그만큼, 불교는 동국의 모태이고 근간이며, 동국은 불교를 통해 그 배경의 역사를 되새기고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하면서부터 이 땅의 조상들은 인간 이상의 구현과 문화창조, 그리고 다시 드높은 정신세계에 전혀 새로운 개안(開眼)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찬란한 불교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내외의 역경 속에서도 불교정신을 통해 민족의 자존(自存)을 드높이고 호국의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여 국기(国基)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이렇듯 불교를 중심으로 전개․축적되어온 이 땅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 굴절을 겪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의 무모한 숭유배불정책 이후부터였다.

려말에 주자학의 새로운 학풍이 우리나라에 전래한 그 사실 자체는 문화사의 면에서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그것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아 불유교체(仏儒交替)를 강행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인생관 및 세계․우주관의 폭은 오히려 협소하게 고착되어 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동안 정신세계의 원천으로서 생활․신앙․윤리 등 모든 삶과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온 불교와 함께 주자학의 철학과 실천윤리를 적절하게 상호보완적으로 수용 발전시키지 못하고 지배권력을 앞세워 인위적 개종(改宗)을 강요할 때 조선왕조는 이미 그 역사의 인과를 예견케 하였다. 그리하여 절대 평등의 사회와 숭고한 인간의 존엄성을 이상으로 하는 불교를 배격하고 엄격히 구분된 계급사회와 그에 상응하는 신분질서의 확립을 지향하던 중국적 통치이상을 추종해간 숭유(崇儒)의 정책은, 결국 왕조 5백년의 역사를 당쟁의 악순환과 차원 낮은 사고의 국론분열로 점철시켜 놓고만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조건과 문화환경 속에서 국민의 발랄한 생기와 창의력이 발휘될 수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려니와 이에 따른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심화하는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배불숭유정책의 강행 이후 누적되어온 사회의 정체와 약화 현상은 전세기말(前世紀末)의 내우외환으로 드러나는 바가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강한 조류와 함께 굴욕적인 강화조약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침략 등 외환(外患)과, 민심과 유리된 관료들의 압정에 항거하는 동학당(東學黨)의 민중봉기 등 내우(内憂), 그리고 이후 급격하게 진행되어간 조선정국의 변화는 그대로 난국이었으며 민족의 절망기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비상시를 당하여, 본래 무한한 자비의 힘과 인류의 평등 및 정신의 자유를 역설하여 우리 조선(祖先)에게 평화의 원리와 창조력을 일깨우고 인간의 존엄성 수호에서 승화된 확고한 국가관을 교시한 바 있던 불교는 역사적 난국의 타개를 위해 민중의 선도에 나서야 하는 것이었다. 왕조 5백년 동안 불교는 가혹한 배불정책 아래 인고와 굴욕의 교사(敎史)를 겪으면서도 인진왜란 같은 국운을 건 위국(危局)을 맞았을 때는 민중과 더불어 구국의 신념을 남김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런 불교가 이제 다시 고루한 폐쇄주의를 타파하고 정신적 문호를 개방하여 그 스스로가 지닌 무한의 자비력과 창조력을 총동원하여 조굮의 자주독립과 평등 및 양심의 자유에 입각한 보살정신을 전 인류에 제시함으로써 평화세계의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의 승단이 극동의 국제정세와 국내정국의 다난기(多難期)였던 1906년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창립한 정신적 목표는 바로 이같은 보살정신의 구현으로 국가와 인류에 기여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명진학교로서 고고성을 울린 이같은 동국의 과거사가 민족의 자각과 자주정신의 확립면에서 선구적으로 기여해왔다면, 오늘의 동국의 역사는 사학(私學)의 순수성을 견지하면서 건학이념의 구현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초창기의 동국이 불교를 현대화하는데, 그 몫을 다하였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동국은 다원화를 문화의 시대에 적응하여 스스로 학문의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연찬과 교육에 매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진리를 구명하고 전수하는 대학으로서의 동국의 건학이념과 교육의 목표 및 그 지표를 새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고 겨레와 인류구원의 예지를 창출하는 진리의 전당으로서의 동국의 사명을 저마다 가슴 깊숙이 각인해 두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정신이란 한마디로 말해, 지혜와 자비에 의거한 인간의 자기완성과 불국정토의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사상이다. 동국은 이 같은 불교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한다. 따라서 동국에서의 모든 교육과 연구는 마음의 올바른 수련을 통한 주체성의 자각과 여기에서 솟아나는 의롭고 헌신적인 사회봉사의 자세 및 능력계발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향을 바탕으로 동국은 학술의 깊은 이론과 넓고 정교한 응용방법을 교수 연구하며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을 형성하여 민족과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교육의 목적에 입각하여 ‘진리의 체득’ ‘자비의 실천’ ‘불퇴의 정진’ 세가지를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비의 체득’은 맑고 바른 마음의 자각을 뜻한다. 이를 모든 진리탐구의 기본으로 삼게 한다.

둘째, ‘자비의 실천’은 넓고 깊은 자비를 베푸는 봉사와 희생을 뜻한다. 이를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삼게 한다.

셋째, ‘불퇴의 정진’은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뜻한다. 이를 모든 생활의 기본으로 삼게 한다.

민족의 절망기에, 불교의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난국의 타개와 새 역사창조의 의지로 거화(炬火)를 높이든지 80여 성상, 이제 동국은 개교 1세기를 예비하며 겨레와 인류를 위해 웅비를 서둘러야 한다. 거룩한 삼보의 언덕 위에서 누리를 향해 밝혀온 큰 빛, 우리 동국의 역사를 함께 조명해보고자 하는 뜻도 여기에 있다.

 

 

 

 

 

비유와 설화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다루듯 지혜자는 자기 자신을 잘 다룬다.”

편집위원



법구비유경 명철품(明哲品)에 나타난 부처님 가르침 중에 한 토막을 소개하면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가 있었는데 크고 작은 어떤 일이라도 금방 따라 익힐 만큼 뛰어났다. 그는 기고만장하여 자신의 총명함을 스스로 말하기를 ‘천하의 기술은 기필코 다 알고야 말겠다. 만약 한 가지라도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밝게 통달했다고 할 수 없으리라.’ 이리하여 사방천하를 다니면서 많은 스승 아래에서 많은 일을 배워 통달할 수 있었다. 여섯 가지 기예며 천문․지리․의약, 그리고 무너지는 산과 흔들리는 땅을 누르는 법, 도박과 장기․바둑, 옷 마르기와 비단에 수놓기, 고기 썰기와 음식 요리법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로서는 온갖 일을 다 익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점점 자만하게 되었다.

‘사내로서 이만하면 누가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내 기술을 한번 과시해 보리라. 나와 견줄 자가 있다면 그를 꺾어 무릎 꿇게 함으로써 내 이름을 온 세상에 떨쳐 보리라.’

그는 이웃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웅성거리는 시장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각궁(角弓)을 만드는데, 소의 힘줄을 쪼개고 쇠뿔을 다듬는 등 활을 다루는 솜씨가 걸림이 없었다. 그래서 활을 사가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몰려들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나는 젊을 때부터 모든 것을 두루 배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활 만드는 사람을 보고도 그것을 업신여겨 배우지 않았다. 만약 저 사람과 기술을 겨룬다면 나는 지고 말겠다. 저 사람 밑에서 배워야겠구나.’ 그는 활장이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한 달 동안에 활 만드는 법을 죄다 익혀 이제는 그의 기술이 스승을 앞서게 되었다. 그는 돈으로 사례하고 거기를 떠났다. 또 다른 나라로 가다가 강을 건너게 되었다. 뱃사공이 배를 저어 가는데 배의 빠르기가 쏜살같았으며, 배를 돌리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또 생각했다.

‘비록 내가 익힌 기술이 많다고 하지만 아직 배 부리는 것은 익히지 못했다. 아무리 천한 기술이라도 몰라서는 안 되겠다. 이 일도 배워서 기술을 갖추어야겠다.’

그는 뱃사공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배웠다. 한 달이 못되어 배 부리는 솜씨가 스승을 능가했다. 그는 사례하고 그 곳을 하직했다. 그는 또 다른 나라로 들어갔다. 그 곳 왕궁이 천하에 짝이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을 보고 이제는 목수의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왕궁을 지은 목수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 달 동안에 그는 목수 일을 죄다 배워 마쳤다. 그리고 그를 떠났다.

이렇게 해서 열여섯 큰 나라(부처님 생존시의 전인도를 가리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기술을 마음껏 과시했지만 아무도 감히 겨룰 사람이 없었다.

그는 더욱 교만해져서, 이 천지에 누가 감히 나를 당하겠는 가고 으시댔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부처님은 걸식을 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발우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그 젊은이는 자기 나라에서는 아직 수행승(修行僧)을 본 일이 없었으므로, 부처님을 보자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탁발승(부처님)에게 물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일찍이 본 일이 없습니다. 그 어떤 복식에도 그런 모양의 옷은 없으며 종묘(宗廟)의 이상한 그릇에서도 당신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그릇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형상과 옷이 보통 사람들과 다릅니까?” 부처님은 대답했다.

“나는 내 자신을 다루는 사람이오.” 젊은이는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다루다니요? 무엇을 가리켜 자신을 다룬다고 하십니까?”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다루며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루네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 지라도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뜻이 굳어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네


깊은 못물은 맑고 고요해

물결에 흐르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듣고

그 마음 저절로 깨끗해지네.


젊은이는 이 게송을 듣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그는 공손히 부처님께 절하고 나서 자신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것은 다섯 가지 계율(五戒)과 열 가지 착한 행(十善業)과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과 여섯 가지 바라밀(六波羅密) 등을 닦는 것이고 활을 만들고 배를 부리고 나무를 다루는 기술은 바깥일이기 때문에 잘못 교만하게 되기 쉬운 생사의 길이지요.” 젊은이는 이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사람이 무슨 기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기능이 한낱 자랑거리나 뽐내는 것으로 되어버리면 문제는 심각해지게 된다.

어떠한 일이라도 그 일이 인격형성이나 윤리적 가치와 연결되어져야 한다. 모든 일이 인격화하고 윤리가치적 성격이 나타날 때 그 기능은 보석처럼 새로운 빛을 발하게 된다. 저마다의 근기에 따른 적법한 것을 추구해야 하며 정진으로 창조적인 열성을 쏟아야 한다. 자기를 다룸은 바로 천하를 다루는 것은 아닐까!

마음의 주인을 찾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일주문

중도를 어떻게 실천합니까? /정 승 석(인도철학과 교수)



아무개 언론사의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는 사람이 어느날 전화를 걸어와서는, 내가 책으로 쓴 교리 강좌를 두 번이나 읽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길게 말문을 열었다. 내게 칭찬만 하자고 일부러 전화한 것은 아닐 줄을 아는 터라 주문사항이 뭐가 될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예상보다는 당장 답하기 난감한 문제를 제기했다. 선뜻 이해되지 않았던 중도에 대해 설명은 잘 해주었는데,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중도냐고 물어왔다. 아울러 그렇게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알려주는 책을 써달라고 주문했다.

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치고 그러한 의문과 요구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쉽게 답하기 난감한 것은, 그런 의문과 요구가 사실은 몸소 깨달아 체험한 각자(覚者)의 경지를 설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길 바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쳐 주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뭔가를 답해 주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들에겐 공통적인 허구가 있는 듯하다. 자기의 의문에 대한 답변은 응당 상식을 초월할 것이라는 허구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하나의 가르침을 사찰의 일주문처럼 불교를 들어서는 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위 칠불통계(七仏通戒)라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중도의 실천이란 바로 칠불통계의 실천에 다름없을 것 같다.

칠불통계란 어느 한 부처님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다는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훈계라는 뜻인데, 그 내용은 너무 흔히 들어온 터라 아예 무시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아주 간명하게 불교를 정의하고 있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선은 힘써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중도 체험의 경지는 말로 이해하기 어렵다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실천되어야 하는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남을 이롭게 하는 선을 행하고 그 선을 행했다는 의식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맑은 마음을 유지했던 것이다.

물론 그 선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뒤따를 것이지만, 그것 역시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회생활에서는 선에 대해 정말 애매한 경우가 있긴 하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경우엔 더 약하고 어려운 처지에 동조하여 돕는 것이 불교의 선행이다. 이런 의미의 진정한 선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중도의 실천은 요원하고, 그것은 끝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인식된다.

 

 

 

 

불서산책


 

여기에서는 학문적으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는 불교 관련 학술서적을 단행본 중심으로 소개하되, 그 시기는 대한제국 이후 즉 1900년경부터 근래에까지 출판된 것을 가급적이며 일반인들을 위할 목적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조선불교통사(朝鮮仏教通皮) /편집부



이 통사(通史)는 이능화(李能和) 선생이 1918년 3월에 신문관(新文舘)에서 발행한 역작으로서 상․중․하 3편에 총2,300여 면에 이르는 방대한 한문체의 저술이다. 일찍이 외국어 학당 등에서 영어와 불어․중국어 등을 익히고 일본어도 구사할 수 있었던 선생은 불교를 위시한 한국학에 남다른 정열과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그의 학구적인 성격과도 부합되지만 한편으로는 일제하에서 민족성을 보존하려는 그의 남다른 안목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교열(校閲)한 이 통사는 그 체재에 있어서는 역사서적인 편집이지만 저술의 속뜻은 불교 포교서적인 활용을 염두에 둔 저술이라고 하겠다. 상편에서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교화한 때와 장소에 관한 역사편[仏化時處]이고, 중편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행해진 결집(結集)과 제 경론의 번역, 장소(章疏)의 저술 및 여러 유파(流派)의 성립과 그 전승(伝承) 등을 기록한 내용 즉 불․법․승 삼보(三宝)의 연원과 전래를 밝힌 것 [三宝源流]이며, 하편에서는 상편의 내용을 다시 부연해서 보충하고 있는데, 그 항목을 200가지의 제목[二百品題]으로 나누어서 해설하고 있다. 선생은 이러한 내용들을 기술하면서 전기적(伝記的)인 방법과 함께 가설항담(街說巷談)을 연의(演義)하는 서법(書法)을 썼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자재로 보충하고 있고 생략해서 문장을 썼지만, 가공(架空)이나 허구적인 서술이 없고 내용의 근원을 밝히고 있어서 능히 초보자들에게 불문에 들게 하는 입문서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부록에서 보여준 그의 불교에 관한 관심은 자상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그 전기나 활동이 전혀 없는 고구려나 백제 및 신라출신의 여러 스님들을 일본의 고대서에서 이를 발췌하여 기록한 것은 평소의 그의 이 방면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1916년 말경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설립한 사찰의 수와 승려의 숫자를 파악해서 기록한 것도 그렇고, 당시 선교양종(禅教兩宗)의 30본사와 그 소속 말사를 열거할 때에는 여섯 가지의 조례 즉, 사법(寺法)․ 사승(寺乗)․종지(宗旨)․등규(僚規)․주직(主幟)․사격(寺格) 등으로 자세하게 기술하여 30본사의 역사와 그 전승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한 것은 귀중한 자료이다.

최남선 등과 계명구락부(啓明倶樂部)라는 민족 계몽 단체를 1931년에 설립하여 삼국유사와 금오신화 등을 간행하기도 하고, 생전에 불교의 각종 잡지를 편집․간행도 했으며, 유교․도교․기독교․민속 등에 관한 많은 관련서적을 출판한 것은 오직 선생만의 업적일 것이다. 특히 이 조선불교통사 등이 뒷날 한국관련연구 일본 학자들의 저서 즉 다까하시(高橋 亨)의 이조불교(李朝佛教) 등에 거의 그대로 인용된 것은 민족적인 자랑임과 동시에 학문적인 우월감마저 주는 성과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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